*

紹興에는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고 있을까

◆ 관리자 07-25 | VIEW : 3,985

紹興에는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고 있을까

王羲之와 蘭亭序의 배경

朴漢濟 : 46년 경남 진주(진양) 출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현재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96~97년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저서 肋偶基紆?林導爬寬博속(일조각, 1988) "인생-나의 五十自述" (한길사, 1997)

◈ 월간중앙 연제에 앞서
나는 왜 틈만 나면 배낭을 메고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濟州道에도 가보지 못했고 국외로는 동아시아 지역을 벗어나 보지 못한 내가 91년초 처음 그 땅을 밟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자그만치 열다섯번이나 중국을 방문했다. 뿐만 아니라 1년간 중국에 장기 체류하면서 제법 많은 유적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앞으로도 나의 중국행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지금까지 기껏 내 전공과 관련이 깊은 華北과 華中 일부 지방만을 들러본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여행객이 흔히 가고 싶어하는 경치좋은 관광지에 대해서는 당초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桂林도 黃山도 가보지 못했다.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사건이나 사상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경승과는 크게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서 이미 잊혀진 왕조의 도읍지나 사건의 현장을 찾아 그곳에 겨우 남아있는 안내판 하나라도 만져보기 위해 하루 종일 시골버스를 탄 적도 있다. 중국인, 아니 중국 역사학자들로부터 왜 그런 곳을 찾아 가느냐는 핀잔을 받으면서도 줄곧 다녔다. 동행이 있기도 했지만 혼자 다닌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三國시대에서 唐代까지, 즉 3세기에서 10세기까지 약 8세기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밥을 먹고 있다.
이 시대를 사랑하고, 이 시대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 나서기를 이렇게 좋아한다. 초등학생에게도 익숙한 “三國志”의 曹操가 이 시대 사람이고, 전원시인 陶淵明, 書聖이라 불리는 서예가 王羲之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 則天武后와 傾國之色의 여인 楊貴妃도 바로 이 시대가 배출한 사람들이다.
이 시대만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간상을 연출해낸 시대도 중국사에서 드물 것이다. 이 글들은 연구실 안에서 역사책을 읽으면서 느끼던 아쉬움의 현장을 찾아 나선 나의 여행기록들이다. 같은 곳을 여섯번이나 찾은 곳도 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동안 책상 앞에서 골몰했던 문제들이 쉽게 풀리기도 했고, 기왕에 알고 있던 지식과는 다른 사실도 많이 발견하면서 현장학습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도 깨달았다. 연구실 창 너머 김포공항 쪽으로 눈을 돌릴라치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중국에 있는 작고 못난 유적지들이다. 지금 역사 연구는 대중에게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동안의 나의 연구도 역시 그러했다.
지금도 나의 연구 결과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심정으로 공부하고 있지만, 한편 역사와 대중을 보다 더 가깝게 접근시켜야겠다는 생각도 최근 들어 자주 하곤 한다. 아무리 전공에 국한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이런 글을 쓰고 대중지에 발표한다는 것이 평소 매스컴에 친숙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솔직히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논문 쓰는 것만으로도 허덕거리는 사람이 딴 짓 한다고 욕할 것이 뻔한 동료 교수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내친 김이니 현장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지식과 생각의 일부를 독자에게 충실하게 전하려 한다. 앞으로 연재될 이 글들을 통해 역사적 지식이 조금이라도 넓어지고 역사를 되돌아보는 의미와 재미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99년 12월 관악산 기슭에서…

※ 지명은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나 필자의 의도에 따라 우리 음으로 표기했습니다.<편집자>

97년 1월 중순, 1년간의 중국생활을 마감할 즈음, 항주(杭州)·소흥(紹興)·무석(無錫) 지역의 여행을 계획했다. '하늘에는 극락이 있다면 지상에는 소주(蘇州)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地有蘇杭)는 말처럼 항주는 소주와 함께 중국에서 제일가는 경승지다.
소주는 91년 첫번째 중국 방문 때 이미 가본 적이 있다. 중국에 1년간 장기체류하면서도 항주에 가보지 못했다면 뭘 하고 지냈느냐는 핀잔을 들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행을 계획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항주보다 소흥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소흥에 가는 길에 항주를 보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동양의 베니스라 불리는 소흥은 항주에서 동남으로 60km 떨어진 인구 10여만명의 소도시이다. 이곳은 “아Q정전”(阿Q正傳)으로 유명한 작가 루쉰(魯迅 1881~1936)의 고향이기도 하다. 루쉰의 자전적 소설인 “고향”의 첫머리에서

‘나는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2,000여리나 떨어진 먼 곳에서 20여년 동안이나 오지 못했던 고향에 돌아왔다. 계절은 한겨울. 고향이 가까워옴에 따라 날씨마저 잔뜩 찌푸렸고 차가운 바람이 선실에 불어닥쳐 윙윙 소리를 냈다…. 아! 이것이 20년 동안 내가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고향이란 말인가??

라 쓰고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의 소흥 방문도 루쉰의 귀향때처럼 계절도 날씨도 그러했다. 20여년 전 나는 학계의 입문작인 석사논문의 주제로 남북조(南北朝) 말기를 살았던 한 사대부의 생애와 사상을 다루었다. 그때부터 이곳 소흥(옛지명은 會稽)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소흥은 꼭 찾아 보았으면 하고 열망하던 나의 학문상의 고향이었다. 루쉰이 귀향길로 이용했던 운하에서 바라본 하늘이 찌푸렸던 것처럼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도 역시 음산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가 소흥에 도착한 날처럼 루쉰이 고향에 도착한 날에도 아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루쉰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북경(北京)에서 소흥으로 직행할 수는 없었다. 밤늦게 항주에 도착한 나는 우선 소흥행 열차시간부터 알아 보았다. 새벽 6시발이었다. 숙박비와 안전을 고려하여 항주대학(현 浙江大學) 초대소에서 일박하는데, 초라한 대학 초대소인지라 모닝콜 서비스도 없다. 평소 소심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나는 몇 차례나 자다 깨어 시간을 확인했는지 모른다. 새벽부터 겨울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강남지역에는 겨울에도 난방을 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요와 이불이 오히려 내 덕을 보려 하니 나도 내 온기를 빼앗길까봐 잔뜩 웅크리고 잤다.
그랬더니 팔·다리 등 온몸이 말이 아니었다. 북경에서부터 침대차를 타고 오기는 했으나 28시간의 긴 여행에 거뜬할 체력도 못되고 그럴 나이도 이미 넘었다. 게다가 겨울 여행이라 우산도 준비하지 않은 데다 새벽에 우산 파는 곳을 찾을 수도 없어 초대소에서 큰 길까지 걸어가는데 옷이 흠뻑 젖어 추위를 넘어 뼈골이 마구 시려온다.
어제 저녁 숙소로 들어오면서 항주역행 버스번호를 확인해 두었지만, 버스를 탈 마음은 달아난 지 이미 오래다. 겨울, 그것도 비 오는 묘시(卯時)는 여전히 칠흑같은 밤이다. 통상 그러하듯 열차는 40분 연착이다. 그것도 내몽고 포두(包頭)발 영파(寧波)행 직쾌(直快)열차였으니 그 정도로 연착한 것만 해도 양호한 편이라 할까. 종점에 가까워서인지 앉을 좌석이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운 좋게도 젊은 여성과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갖는다. 분명 외국인임을 눈치챈 때문이리라. 그래 혼자 떠도는 외로운 여행길에 이런'하이커이'(還可以·그런대로 쓸 만한)한 여인이 먼저 말을 거는 데야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짧은 커트머리를 한 것 외에는 나로서는 전혀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그 여성도 소흥행이란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나의 친구가 근무하고 있는 북경사범대학 역사학과 석사과정 학생이다. 방학을 맞아 고향 소흥으로 가는 길이란다. 아귀가 착착 맞아들어 간다. 소매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거늘 이 정도면 진짜 인연(?)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녀는 이런 잉쭤(硬座·딱딱한 의자)를 타고 북경에서 이곳까지 앉아서 이틀 밤을 보내면서 온 여인답지 않게 싱싱하다. 역시 젊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이다. 여행 일정을 이야기했더니 소흥역 대합실에서 1시간만 기다려 주면 집에 잠시 들렀다가 여행 안내를 맡아 주겠단다. 내가 묵고 있는 사회과학원 전가루(專家樓)며, 나를 초청한 역사연구소 그리고 그녀가 공부하고 있는 북경사범대학 역사학과 등에 관한 대화를 통하여 아무리 따져봐도 그녀가 꽃뱀은 결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진 그녀는 도유(導游 여행가이드)치고는 최고급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간혹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여복이 굴러들어오곤 하는 사람이다. 성이 L이라고 했다. 내가 소흥을 찾아가는 가장 큰 목적은 왕희지의 난정에 가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나를 곧바로 그곳으로 안내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먼저 안내한 곳은 루쉰의 고거(故居)와 그 맞은편에 위치한, 루쉰이 12세에서 17세까지 공부했던 삼미서옥(三味書屋)이었다. 그녀는 왕희지를 이해하려면 소흥의 도시 분위기를 먼저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에게 소흥에서의 모든 일정을 맡기기로 했다. 삼미가 무슨 뜻이냐에 대해서는 반드시 통일된 견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삼국시대 동우(董遇)가 풀이한, 즉 '공부함에 있어 반드시 세가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라'爲學當以三餘)는 데서 유래한 것 같다. 삼미란 즉 ‘삼여’(三餘)의 뜻이다. 삼여란 '계절에 있어 한해의 마지막인 겨울과 하루에 있어서 마지막인 밤과 맑은 날이 아닌 구름끼고 비가 내릴 때’(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陰雨者晴之餘)를 말하거니와 이런 일체의 토막시간을 아껴 공부에 힘쓰라는 뜻이니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 같다.
송나라 문인 소식(蘇軾)은 동우의 이 삼여(三餘)설에 근거하여 위와 같은 자투리 시간에 독서하는 즐거움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맛은 삼여에 있는 것’(此生有味在三餘)이라 하였다던가. 사실 공부란 무한한 인내와 고통이 요구되는 일이어서, 건수만 생기면 놀 궁리를 찾는 것이 보통 사람의 속성인 것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공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지 못할 환경이라 여길 때 해야 남들을 이길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진리를 이 삼미서옥은 나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소흥은 역시 북경·상해(上海)등 번화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예술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고달픈 문학을 택한 루쉰처럼 온 시가지가 인문정신으로 채워져 있었다. 명대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과 초대 북경대학 교장을 지낸 채원배(蔡元培), 청말의 여류 혁명가 추근(秋瑾)이 이곳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남긴 흔적들이 시내 곳곳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보존돼 있었다. 이 소흥 땅에 인문정신을 배게 한 것은 이들보다 훨씬 이전 이곳에 살았던 송대 시인 육유(陸游 : 陸放翁, 1125~1210)였다. L양은 나를 심원(沈園)으로 안내했다. 육유의 아련한 사랑이 깃든 심원을 이곳 소흥 사람들은 끔찍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시인의 담백한 자취가 군더더기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육유는 그의 문학에 심취해 있던 이종 여동생 당완(唐琬)과 결혼하여 금슬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당완이 시어머니의 미움을 받아 두 사람은 어머니의 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혼하고는 재가했다. 10여년이 지난 어느 봄 날 심원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해후한 두 사람은 모두 감격해 물끄러미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고로 사랑에는 여자쪽이 역시 용감하고 더 행동적이라던가.
이루지 못할 사랑을 정사(情死)로서 마감하려 할 때에도 먼저 제의하는 쪽이 여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육유는 말없이 마음만 상해하고 있는데 당완이 술과 안주를 육유에게 보내 주었다. 이에 육유는 솟구쳐 오르는 옛 사랑의 기억들을 억누르지 못하고는 붓을 들어 벽 위에 지금껏 인구에 회자되는 墩宕觀잇(釵頭鳳)이라는 사(詞)를 지어 써내려 갔다.

그대는 부드러운 섬섬옥수로(紅酉禾手)
나에게 황등주를 부어주었지(黃呻酒)
성안에 넘친 봄빛 실버들로 늘어질 때(滿城春色宮墻柳)
동풍이 사나워 인연이 깨졌으니(東風惡歡情薄)
그리움과 한에 사무친 가슴(一懷秋緖)
외로운 나날로 몇해를 보냈던고(幾年離索)
아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여(錯錯錯)

봄은 예나 다름이 없건만(春如舊)
사람은 보람없이 여위어만 가니(人空瘦)
연지 묻은 손수건 눈물에 젖는구나(痕紅鮫靑透)
복숭아꽃 스러져 화원마저 쓸쓸하니(桃花落閑池閣)
사랑의 맹세 변함이 없어도(山盟雖在)
정을 담은 편지 그 누가 전해주랴(錦書難託)
아아 어쩔 수 없는 내 신세야(莫莫莫)

당완이 다시 사를 지어 화답한 것은 물론이다.

세상물정 야박하고(世情薄)
세상 인심 안좋군요(人情惡)
비 뿌리는 황혼에 꽃이 쉽게 떨어지듯(雨送黃昏花易落)
새벽바람 불어와도(曉風干)
내 마음 젖고 싶었으나(痕殘欲箋心事)
난간에 기대어 혼잣말을 할 뿐이네(獨語斜欄)
아아 어렵고도 어려워라!(難難難)

사람은 각각이 되어 버렸고(人成各)
지금은 어제가 아니네(今非昨)
병든 마음 그네 끈처럼 길구나(病魂長似秋千索)
뿔피리 소리 차갑고 야밤의 빗장 비스듬이 걸려 있는데(角聲寒夜岸珊)
사람들이 물어볼까 두려워(酷人尋問)
눈물 삼키고 즐거운 척하였네(咽裝歡)
아아 모두가 거짓이로다!(瞞瞞瞞)

그날의 만남은 그들에게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당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녀는 그리움에 애태우다 얼마 있지 않아 병들어 죽었다. 전통시대 남자들은 사랑 외에도 할 일이 많아서인지 육우는 96세까지 장수하였다. 육유는 만년에 이 심원에 들러 그녀를 그리는 수많은 글을 지었다고 한다. ‘삼일 동안 시를 짓지 않으면 답답함을 감당하지 못한다’(無詩三日却堪憂)던 육유는 수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여 지금 남아 있는 시만도 9,200여수나 된다고 한다.
그의 시 가운데 당완에 관한 시가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심원을 둘러보면서 내가 부럽게 느낀 것은 그들의 지고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시가 연애시였든, 우국충정(憂國衷情)을 표현한 시였든 그것들을 짓는 것만으로 밥을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지은 시가 지금까지 그토록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이고, 우리에게 장사에만 신경쓰는 것 같이 보이는 중국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는 인문정신 때문이리라. 나는 그곳에서 “육유 연보”(陸游年譜) 한권을 사서 배낭에 넣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보낸 일생 속에 당완과의 사랑이 갖는 비중과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곳 소흥은 원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로 유명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땅이었다. 질시와 반목, 원수와 복수만이 난무하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고을’(報仇雪恥之鄕)이었던 이 땅에 처음으로 인문정신을 불러일으킨 자는 육유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 이곳을 배경으로 살았던 남조의 귀족 사대부들이 뿌려놓은 것이었다. 서성 왕희지가 이곳에서 살았고, 산수시인 사령운(謝靈運)의 전원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왕희지·사령운과 같은 문인들이 지금부터 1,600여년 전에 이미 이곳 소흥에 인문정신을 심었던 것이다.
왕희지의 예술을 탄생시킨 난정은 현재 소흥시내에서 서남쪽 12.5㎞에 있는 난저산(蘭渚山)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월왕 구천이 이 일대에 난을 심었다고 전해져 난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동진(東晉)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 3월 초3일 월주(越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서남 20리에 위치한 명승지 난정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 왕희지의 주재하에 그의 아들 현지(玄之)·환지(渙之)·휘지(徽之)·헌지(獻之) 등 외에 당시의 명사였던 손통(孫統)·손작(孫綽)·사안(謝安)·지둔(支遁) 등 42인(일설에는 43인)이 모여 수계사(修己事 : 흐르는 물에 몸을 맑혀 상서롭지 못한 것을 없애는 행사)를 행하고 있었다.
마치 경주의 포석정(鮑石亭)과 같이 곡수(曲水)를 만들어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흘러가게 하여 술잔이 도달하면 그 앞에 앉은 자가 곧 술을 마시고 즉석에서 시를 짓는 것이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세잔(三觴)을 마셔야 했다. 이 모임을 통하여 26명이 지은 37수의 시가 모아졌다. 이 모임의 주재자였던 왕희지는 이 시들을 모아 편집하고 이 모임을 통하여 만난 여러 명사들과 나눈 대화에서 느낀 감상을 적어 앞에 붙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蘭亭序)다.
나는 몇 년 전 서안 서북대학에 근무하는 오랜 중국인 친구로부터 서안 비림(碑林)에 세워져 있는 ‘난정서’의 모본(紙本은 故宮博物院 소장으로 神龍本이라 한다) 탁본을 한 장 얻어 표구하여 내 연구실 책상 옆에 걸어두고 간혹 그 의미를 내 나름대로 새겨 보곤 한다. 그 전문을 전재해 보자.
‘영화 9년 계축 늦은 봄 초승에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여 계사(示契事)의 모꼬지를 행하였다. 여러 어진 분들이 다 왔고 젊은이와 어른이 다 한자리에 모였다. 이곳은 산이 높고 고개가 험하며 무성한 수풀과 긴 대가 들어찬 죽림이 있는데 또 맑은 냇물과 거센 잦은 여울물이 좌우에 비치며 띠처럼 둘러져 있었다.
그 물을 끌어대어 술잔을 흘리는 구곡(九曲)의 유수(流水)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차례대로 죽 벌려 앉았으니 비록 사(絲)·죽(竹)으로 만든 관현(管絃) 악기의 성대함은 없으나 한잔의 술을 마시고 한수의 시를 지어 읊으니 이 또한 마음 속의 깊숙한 정서를 펼치기에 충분하였다. 이날은 하늘이 활짝 개이고 대기는 맑아서 온화한 봄바람이 화창하게 불었다. 하늘을 우러러 우주가 무한히 큼을 보고, 아래를 굽어 지상만물의 무성한 자태를 살펴볼 수 있었다. 사방으로 눈을 놀려 바라보고 마음가는 대로 생각을 달려 보니 그로써 보고 듣는 즐거움을 함껏 누릴 만하였다. 실로 즐거운 일이었다.’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會于會稽山陰之蘭亭修示契事也群賢畢至少長咸集此地有崇山峻嶺茂林脩竹又有淸流激湍映帶左右引以爲流觴曲水列坐其次雖無絲竹管絃之盛一觴一詠亦足以暢敍幽情是日也天朗氣淸惠風和暢仰觀宇宙之大俯察品類之盛所以遊目騁懷足以極視聽之娛信可樂也)

‘대체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세상을 살아감에 어떤 사람은 평소 가슴 속에 축적했던 식견을 풀어내어 친구와 한 방에 마주 앉아 서로 얘기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의탁하는 바를 따라 육체의 속박을 초월해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나아감과 멈춤이 제각기 다르며 고요히 지내고 시끄럽게 지냄이 같지 않으나 사람은 저마다의 경우를 즐겨 잠시 자기 마음에 흡족한 때를 당해서는 쾌연히 스스로 만족해서 바야흐로 노년이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지낸다.

그러나 그 마음 가는 데가 어느덧 물리게 되어 감정도 세사를 따라 바뀌는 날에는 그에 따라서 감개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지난 날에 즐기던 바가 고개를 숙였다 드는 동안 묵은 자취가 되어 버리면 더더욱 감정이 북받쳐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장수하거나 단명하거나 간에 마침내 그 생명도 다할 날이 있음에야 더욱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인은 말하였다. 살고 죽는 것 또한 인생의 중대한 일이라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어찌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夫人之相與俯仰一世或取諸懷抱悟言一室之內或因寄所託放浪形骸之外雖趣舍萬殊靜躁不同當其欣於所遇暫得於己快然自得曾不知老之將至及其所之旣倦情隨事遷感慨係之矣向之所欣宰傘仰之間以爲陳迹尤不能不以之興懷況脩短隨化終期於盡古人云死生亦大矣豈不痛哉).

‘나는 옛사람이 감동을 일으킨 까닭을 살펴볼 적마다 그것이 한 문서를 맞추는 듯이 나의 생각함과 동일하니 지금까지 그 문장을 읽으면서 슬퍼하고 한탄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슬퍼하지 않도록 마음을 깨치지 못하였다. 죽음과 삶이 동일하다는 (莊子의) 말이 진실이 아닌 허황된 주장이라는 것과 칠백세나 살았던 팽조(彭祖)와 갖난 아이 때 요절한 자의 나이가 (영원에 비하면) 하등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망녕된 주장임을 진실로 알 수 있다.

뒷사람이 지금의 우리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지금의 우리가 옛사람의 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나 매양 한가지일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열기하고 그 사람들이 지은 글을 한군데 모아보았다. 비록 나중에 세상이 달라지고 세사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사람의 감회를 일으키는 소이는 일치할 것이니 뒤에 이 글을 보는 사람 또한 장차 이것에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每攬昔人興感之由若合一契未嘗不臨文嗟悼不能喩之於懷固知一死生爲虛誕齊彭禾爲妄作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悲夫故列敍時人錄其所述雖世殊事異所以興懷其致一也後之賢者亦將有感於斯文).

325자로 된 이 ‘난정서’는 남조 사대부들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산수에 대한 사랑, 각자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몸을 맡겨 인생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정신, 영원한 것에 대한 사모, 유한한 인생의 덧없는 유전(流轉)에 대한 슬픔이 통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문장보다 이 ‘난정서’의 필체는 고금 최고의 서법가인 왕희지의 득의(得意)의 작품으로 더 알려져 있다.
특히 그 가운데 나오는 20자의 ‘之’자는 각각 다른 풍채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 가운데 왕희지 필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필체에 흠뻑 빠진 사람은 동진말 찬탈자인 환현(桓玄)과 명군 당태종(唐太宗)이었다. 환현은 왕희지와 그의 아들 헌지(獻之), 즉 이왕(二王)의 일품(逸品)을 항상 옆에 두고 감상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그의 찬탈이 백일천하로 끝나자 수도 건강(建康)을 떠나 배를 타고 그의 근거지였던 형주(荊州)로 돌아가던 중 추격당하자,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양자강 물 속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는 무인이었지만 문학을 이해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당태종은 수나라 말기 반란의 와중에서 주저하는 아버지에게 혁명의 기치를 들도록 강권한 무인적 기질의 정치가이기도 하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누구보다 문인을 좋아하고 문을 숭배하였던 인문주의자였다. 그의 곁에 문인 십팔학사(十八學士)를 두어 우대하고, 최고의 고전 오경(五經 :易·書·詩·禮·春秋)에 대한 주석의 결정판이라고 할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뿐만 아니라 선인의 서적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사업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정관 6년(632) 정월 8일에는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위나라의 종요(鍾繇)와 동진의 왕희지 등의 진적(眞蹟) 정리를 명하여 1,510권의 거책을 출판시켰다.
왕희지의 작품은 남조의 잦은 왕조 변혁과 전쟁 속에서 하나씩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태종은 날이 갈수록 왕희지의 글씨에 빠져들어 스스로 그것을 모사하는데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왕희지 글씨의 일품 중의 일품으로 알려진 '난정서' 를 접할 수가 없었다. 정관 13년(639) 칙명을 내려 천하에 흩어져 있는 왕희지가 남긴 글씨들을 찾아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그 결과 왕희지의 자손으로부터 봉정된 40지(紙)를 비롯하여 1,290지 13질 128권이 새로이 제실의 소유가 되었다. 당태종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정서’를 얻을 수는 없었다. 태종이 팔방으로 손을 써 찾고 있던 중, 월주 영흔사(永欣寺) 변재선사(辯才禪師)가 수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변재는 왕희지의 7대손인 불승 지영(智永)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 정보가 틀림없다고 확신한 태종의 그것을 얻으려는 집념은 끈질겼다. 칙사를 영흔사에 보내는 대신 변재를 궁중의 불교사원인 내도량(內道場)으로 불렀다. 자기가 무슨 이유로 장안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며칠을 보낸 후 변재는 어느 날 태종과 대좌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난정서’에 이르게 되었고, 유도신문에 말려든 변재는 평상의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는 “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 그것을 본 적은 있지만, 입적하시고부터 난세가 거듭되어 그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소승도 현재 그 행방을 전혀 몰라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시치미를 뗐다.
아무리 황제라는 신분이라 하더라도 모른다는 데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태종은 심증은 갔으나 실증을 찾지 못한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를 소흥으로 귀환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밀사를 파견하여 철저한 감시를 명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태종은 근시의 신하에게 이것을 얻을 방도를 의논시켰다. 방현령(房玄齡)이 나섰다. 양나라 원제의 증손으로 감찰어사로 있는 소익(蕭翼)이 재사(才士)이므로 그를 시켜서 탐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사실 난정서는 왕희지 사후 자자손손으로 전해져오다 마지막으로 지영에게 귀속되었던 것이다. 지영은 집안의 전통을 받았음인지 그 역시 명필이었다. 불문에 몸을 맡긴 그는 산음현 서남 31리 난저산 아래 조상의 묘소 가까이에 있는 영흔사에 기거했다. 불승인 지영에게는 자손이 있을 리 없고, 100세의 고령으로 입적하자 ‘난정서’는 자연 그의 제자 변재에게 맡겨졌다. 변재 역시 지영의 글씨를 모사하면 진필처럼 보이는 재주가 있는 재사였다.
변재는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생각 끝에 몰래 사방 일장(一丈)의 대들보에 구멍을 파고 그곳에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난정서’를 보관하였던 것이다. 소익은 영흔사에 가서 노승 변재를 만나 바둑과 거문고·투호(投壺)·악삭(握 ) 등의 잡기로 금방 친해졌다. 그 후 영흔사를 자주 방문하게 된 소익은 어느날 태종으로부터 빌린 양 원제가 쓴 ‘직공도’(職貢圖)를 휴대하고 영흔사를 찾아와 변재에게 보이면서 그와 자연스럽게 서화에 대해 화제를 옮겼다.
이야기가 '난정서'에 미치자, 소익은 양나라 이후 전란으로 '난정서'가 남아 있을 리 없다고 짐짓 이야기하니, 변재는 참지 못하고 모르는 소리라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결국 변재로 하여금 진품을 소익에게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쉽게 탈취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변재가 불사(佛事)로 절을 비우는 것을 틈타 그것을 탈취하여 영안역(永安驛)으로 내달려 자기가 칙명을 받은 어사임을 밝히고 그 지역의 도독(都督)의 도움을 얻어 장안으로 급히 이송하였다. 태종이 기뻐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소익을 추천한 방현령은 금채(錦綵) 1,000단을 받았고, 소익은 원외랑(員外郞)으로 승진된 것은 물론 수많은 하사품과 장원과 저택을 받았다. 한편 변재는 태종을 속인 죄가 있었지만, 80을 넘긴 고령임을 고려하여 죄를 묻지 않았다. 태종은 그에게 비단 3,000단과 쌀 3,000석을 지급하라고 월주자사에게 명하는 특별 조처까지 취하였다. 변재는 그것을 3층 보탑(寶塔)의 건립비로 돌리고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일품(逸品)을 잃은 억울함에 식음을 전폐하다 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태종은 ‘난정서’의 진적을 얻고는 모각하여 황자나 근신들에게 주었다. 정관 23년(649) 임종을 앞둔 태종은 함풍전(含風殿)으로 황태자 이치(李治·후에 高宗)를 불렀다. “나는 너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고 가지만 하나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 효성이 지극한 너이니 내 뜻을 결코 거스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고 운을 뗀 태종은 “내가 바라는 것은 난정 하나 뿐이다. 황천으로 가는 길에 가지고 가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천자의 지위도, 수많은 재보도 모두 황태자에게 내주었으나 상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난정서’의 진적이었던 것이다. 태종은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난정서’는 배장품(陪葬品)으로 그의 무덤 소릉(昭陵)에 묻혔다. 이로써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던 ‘난정서’는 영원히 땅속에 묻혀 뒷사람이 더이상 볼 수 없게 됐다.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역대 서법가들에 의해 모사된 작품일 뿐이다.
L양과 내가 시외버스를 타고 난정 정류장에 도달하니 겨울비는 여전히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집에 들러 준비해온 우산은 차양이 컸지만 하나뿐이었다. L양의 마음씀이 용의주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산을 하나밖에 가져오지 못할 사정이 있어서인지 나는 확실히는 모른다.
우산이야 몇푼 안주어도 살 수 있는 것이지만 나는 꼭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들겠다는 우산을 그녀는 굳이 자신이 들었다. 난정으로 가는 구부러진 길 옆의 죽림 앞에서 난을 팔고 있던 아주머니 서너명이 사기를 권한다. 난을 한 뭉치 사서 L양에게 건넸다. 도유비(導游費·안내비)인 셈이다. 그녀는 ‘쉐쉐’(謝謝)를 연발하며 가방 속에 조심스레 난을 넣으면서 잘 키우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왕희지가 명사들과 함께 유상곡수(流觴曲水)의 연회를 열었던 원래의 난정 터는 아니라지만, 옛 정취를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뚫고 들어가니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아지(鵝池)와 아지정(鵝池亭)이다. 왕희지와 거위(鵝)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일엽편주를 타고 수향(水鄕) 소흥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우거진 대나무 수풀 사이에서 한 무리의 하얀 거위가 노닐고 있었다. 그 노는 자태를 보고는 거위를 갖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거위의 주인에게 흥정을 걸었다. 주인은 “이 거위는 팔 수 없습니다. 만약 우군대인(右軍大人:왕희지)께서 진정 가지고 싶다면 ‘도덕경’(道德經)을 써 가지고 오십시오”라 했다.
왕희지는 그 제의에 동의하고 그의 글씨와 거위를 바꾸었다. 왕희지가 그렇게 거위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서법 수련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붓을 잡을 때는 식지(食指)를 거위 머리 모양으로 약간 굽어지게 쳐들고, 붓을 움직일 때 거위가 발바닥으로 물을 저어가듯 움직여야 정신을 붓끝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이 왕희지가 거위의 동작에서 배운 서법인 것이다. 이 아지는 왕희지가 거위를 기르면서 그 서법을 연구하던 곳이었다.
아지 옆에 있는 아정에는 ‘아지’(鵝池)라는 커다란 두 글자가 가로로 쓰인 석비가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왕희지가 거위를 기르기 위해 못을 파고 그 옆에 돌을 세워 아지라는 글씨를 쓰기 시작하였다. ‘아(鵝)’ 자를 썼을 즈음에 마침 황제의 성지(聖旨)가 하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붓을 놓고 성지를 받으러 가니, 그의 아들 헌지가 붓을 들어 이어서 ‘지(池)’ 자를 썼다는 것이다. 즉 ‘한 비석에 두 글자를 부자가 구슬을 이은 것처럼 썼다’(一碑二字父子合璧)는 아름다운 고사를 알리는 유물이다. 실제로 왕희지 부자의 글씨일 리는 없지만, 삼각의 정자가 그 비석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었다.
아지 너머에는 난정의 백미라고 할 유상곡수(流觴曲水)가 있다. 난정은 역대 서법가들이 찾아오는 성지(‘朝聖’之地)이다. 매년 3월 초3일에는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서법가들이 이곳 유상곡수에 모여 들어 왕희지의 옛 자취를 본받아 수계상영(修示契觴詠)의 난정서회(蘭亭書會)를 연다고 한다. 그러나 비오는 이곳에는 우리 둘을 빼고는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다.
그 뒤로 우군사(右軍祠)·소란정(小蘭亭)·묵화정(墨華亭)·어비정(御碑亭) 등의 건물들이 겨울 빗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붓과 제대로 노닐어 보지 못한 내가 서성의 이 성지를 3월 초3일에 찾는 것은 외람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비오는 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시간, 오십에 접어든 초노의 나이에 외롭게 떠도는 한 외국인의 안내를 기꺼이 자청한 젊고 아리따운 여성과 같이 호젓하기 이를 데 없는 강남 정원 난정을 한 우산 밑에 유유히 거니는 즐거움을 독자여, 상상해 보라. 왕희지는 인생의 유한함을 통절히 설파했지만 겨울, 비 그리고 어둠이 짙어가는, 영락없는 삼미(三味)·삼여(三餘)의 시간이 아니던가. 이곳 소흥이 배출한 명사 루쉰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나. 삼미의 시간을 아껴 쓰라고….
그날 저녁 늦게 항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L양은 언제 준비했는지 나를 배웅하면서 ‘삼미서옥’(三味書屋)이라 쓰여진 문진(文鎭) 하나를 건넨다. ‘삼미의 의미를 두고 두고 잘 새겨보라’며….
우리는 아쉬운 듯 그렇게 헤어졌다. 소흥에 다녀온 지 벌써 3년. 이 겨울에도 소흥에는 겨울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을까?


PREV ：	어느 권력자의 ‘母情의 세월’	관리자

NEXT ：	塞上에 울던 비운의 여인이 민족 우호의 영웅으로	관리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