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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관리자  08-22 | VIEW : 3,840
인터뷰 - 正史를 뒤엎는 역사서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펴낸 金聖昊


金 聖 昊
1934년 강원도 철원 出生. 서울大 농대 농업경제학과·건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일본 교토大 박사학위 취득. 농촌진흥청·국립농업경제연구소·농림부·한국농촌경제연구원 근무.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으로 비류백제와 그의 일본 망명설을 최초로 발표, 2000년에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으로 비류백제는 망명 전부터 倭人의 나라였음을 보완하였음.  
  
金玟希 月刊朝鮮 기자 (minikim@chosun.com)  


農學을 전공한 사학자
  
    1982년 「비류백제론」으로 역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던 金聖昊(김성호·68)씨. 그가 20년 간의 치밀한 연구 끝에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月刊朝鮮社)를 내놓았다. 이 책은 한반도의 역사적 여명기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다루고 있는데, 이 안에는 正史를 뒤엎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도전적 담론들은 다음과 같다.
  
  ▲「三國史記」의 전부를 김부식이 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복합민족이다. ▲檀君(단군)은 우리의 시조가 아니라, 일본인의 시조이다. ▲일본인과 고구려인은 同一민족이다. ▲金庾信(김유신)은 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문무왕에 의해 암살되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서의 머리가 아니라, 꼬리에 불과하다.
  
  「正史」란 「바르고 정확한 역사」라는 뜻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자기의 집권을 정당화한 것이라는 게 金聖昊씨의 持論(지론)이다. 金씨는 1982년에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으로 正史에 도전장을 던져 이미 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바 있다.
  
  그동안 일본 왕실이 한반도 이주민이라는 說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었지만, 史料 부족 등의 이유로 외면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金聖昊씨가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인 應神(응신)이 일본으로 건너가 15代 天皇이 되었다는 說을 제시한 것. 「氏姓으로 본 한민족의 기원」(2000)에서는 氏姓의 연구를 통해 비류백제는 망명 전부터 倭人의 나라였음을 보완하였다.
  
  金聖昊씨의 위와 같은 가설에 대한 講壇(강단) 사학자들의 반응은 유보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역사 인식이 한 걸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지난 5월3일 오후, 기자는 老학자 金聖昊씨의 집을 찾았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그의 집은 노부부 단 둘이 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2층집이었다.
  
  대학에서 農學을 전공한 그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재직 당시 「농지개혁사 연구」(1989)를 편찬한 바 있다. 역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때 취미 삼아 역사 공부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農學과 史學이라는 동떨어져 보이는 두 분야의 연관성을 묻자, 둘은 不可分性을 가진다고 했다. 토지 私有가 姓의 발생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고대는 씨족사회였어요. 씨족이 해체되면서 토지 私有 제도와 姓氏 제도가 처음으로 생긴 것입니다. 토지 私有의 시기를 추적하면 姓의 발생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三國史記」 本紀는 김부식이 쓴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正史가 「三國史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金聖昊씨는 「三國史記」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1000년 간 역사를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正史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승리한 자의 기록인 만큼,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삼국의 本紀는 김부식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後代에 저작된 것이 아니라, 실은 삼국의 건국 초부터 씨족별로 각각 기록되었다는 것이 金聖昊씨의 주장이다.
  
  고구려는 解(해), 夫餘(부여), 高(고)氏로 변천했음에도 고구려 本紀에는 마지막 왕통인 高씨의 단일왕통으로 되어 있고, 백제도 해, 牟(모), 부여氏로 변천했음에도 부여씨의 단일 왕통으로 되어 있으며, 신라도 박, 석, 김씨로 변천했는데, 마지막 김씨족이 박혁거세의 탄생을 김씨족의 卵生신화로 바꾸었다고 한다. 즉 마지막 王統에서 法統(법통)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단일왕통을 표방했다는 것이 그가 제기하는 근거이다.
  
  
  『우리가 단일민족이었다면 소멸되었을 것』
  
    金씨는 우리 민족이 檀君의 후손인 단일민족이 아니라, 東夷族(동이족) 중심의 복합민족이라고 한다. 청동검과 축성술에 능했던 한씨족, 항해술과 불사약 및 관개농법을 지닌 오족왜인, 기마술에 능했던 스키타이族 등이 활을 잘 쏘았던 東夷族 중심으로 혼혈된 혼합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단일민족이 아닌 복합민족이라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만약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었다면,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을 거예요. 단일종족일수록 고도문명에 접하면 곧 소멸하거든요.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외래 민족이 오면 곧 망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복합민족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의 직업 분화는 종족별로 되었습니다. 농사짓는 종족은 농사만 짓지 다른 건 모르고, 배를 타는 민족은 배만 타고, 말을 타는 민족은 말만 탔지요. 말하자면 우리 민족은 각 분야의 능력 있는 종족이 모였기 때문에 그만큼 생명력이 강한 것입니다. 중국 민족이 몇 천년 간 먹고 먹히는 역사를 겪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복합민족이기 때문이에요』
  
  이에 대한 해프닝의 하나가 신라의 향가 「獻花歌(헌화가)」와 고대가요 「龜旨歌(구지가)」의 주인공인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김해가라 首露王의 수로와 발음이 같지만, 수로부인의 水路(수로)는 「물길」, 즉 말갈의 별칭을 빗댄 말이라고 한다. 말갈과 거란은 박씨족과 같은 이란계 스키타이族이라는 것이다.
  
  『이란계 스키타이族 중에는 훤칠한 팔등신 미인이 많아요.「헌화가」에서 水路부인이 바로 스키타이系였거든요.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지나가던 노인이 목숨을 걸고 꽃을 따다가 바쳤겠어요. 이 이야기는 순정공의 아내가 이란계 스키타이族이던 김해 여인이었음을 빗댄 희롱조였습니다』
  
  그리고 金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단군신화는 가짜이며,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니라, 일본인의 시조라는 것이다.
  
  그는 단군신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이야기에서, 桓雄(환웅)은 사람이 되려는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여 여인으로 환생한 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는 곰 숭배사상이 全無(전무)하며, 정작 곰 숭배사상을 가진 민족은 日本 홋카이도의 아이누人(인)이라 했다.
  
  20세기 초까지도 곰 사냥에는 「슈루쿠」라는 독약을 사용했는데, 이 독약 원료가 쑥이었다고 한다. 현대의 곰이 쑥을 먹고 죽는데, 고대의 곰인들 쑥을 먹고 죽지 않았겠냐는 것. 결국 환웅이 곰에게 쑥을 먹인 것은 곰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곰 토템족을 정복한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곰 토템족을 정복한 이야기를 미화한 가짜라는 것이 金씨의 주장이다.
  
  
  檀君은 일본인의 시조, 일본인과 고구려인은 同一 민족
  
    그리고 평양에 설치된 단군릉 또한 사기라고 한다. 고조선은 朝陽(조양)에서 망하고, 韓氏朝鮮의 마지막 단군 準王(준왕)은 강화도에 정착하여 평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평양에 단군릉이 있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평양에 설치된 단군릉은 金日成이 자기의 주체사상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것」이 金씨가 내린 결론이다.
  
  일본인은 倭人(왜인)의 탈을 쓴 韓씨족이어서 한씨시조 天孫檀君(천손단군)은 응당 일본인의 시조라고 한다. 반면 한국인은 韓씨족의 탈을 쓴 東夷族이면서도 자기 시조 少昊金川氏(소호김천씨)를 단 군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단군신화를 「三國遺事」에 인용한 것은 一然禪師(일연선사)이지만, 曲學阿世(곡학아세)의 主役은 유교의 盲從者(맹종자) 이승휴입니다. 이승휴가 後朝鮮(후조선 - 韓씨조선)을 기자조선이라 하여 三朝鮮을 수용함에 따라 先朝鮮(선조선 -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어부지리로 우리의 시조가 된 거예요』
  
  신화의 허무맹랑한 부분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전승자들로 하여금 믿게끔 하는 것이 신화의 매력이자 기능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에 金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대인들에게 신화는 거짓이 아니라, 실제였어요. 현대인들이 신화를 해석하려고 하다 보니 주관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신화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내가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이유는 단군신화가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檀君이 우리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檀君은 일본인의 시조이고, 우리의 시조는 小昊金天氏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이 미신이라는 이유로 檀君을 부정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리고 金씨는 고구려와 일본인이 같은 韓씨족이었다고 주장한다. 韓씨조선 후손의 일부는 고구려 高씨족이 되었고, 일부는 위만에 의해 정복당했는데, 위만이 바로 倭人이었다는 것이다.
  
  『韓씨조선을 정복한 위만은 중국 남부에 살던 吳族(오족)으로, 키가 작아 倭人으로도 불렸어요. 그런데 이들은 불과 1000여 명의 소수 인력으로 韓씨조선을 정복한 거였습니다. 그 결과 정복 후에는 逆으로 韓씨족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죠』
  
  그렇다면 金聖昊씨는 이들이 어떻게 지금의 日本 영토로 갔다고 보는 것일까. 韓씨족에게 逆으로 동화된 倭人이 비류백제의 후손이 되었고, 비류백제가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天皇국가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온조의 형 비류가 正史의 기록대로 자살한 것이 아니라, 한강 부근에서 공주로 옮겨 비류백제를 세웠는데, 이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이 광개토왕의 남침으로 39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15대왕 應神(응신)이 되었다는 것. 일본의 14대 이전까지의 天皇들은 모두 毛(모)씨였지만, 15대째부터는 眞(진)씨라는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과 고구려는 始祖神話(시조신화)와 언어가 같다는 점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고 한다. 金씨는 고구려어가 신라어와는 다르고, 일본어와 같다는 예로 다음을 들고 있다. 고구려어의 「오사함(烏斯含=토끼)」은 일본어의 「우사기(うさぎ)」, 「내물(內勿=납)」은 「나마리(なまり)」, 「내미(內米=파도)」는 「나미(なみ)」, 「어사(於斯=도끼)」는 「오노(おの)」, 「미(彌=물)」는 「미즈(みず)」였고, 고구려어의 「밀(密=셋)」이 일본어의 「미(3)」, 「우차(于次=다섯)」가 「이쓰(5)」, 「난은(難隱=일곱)」이 「나나(7)」, 「덕(德=열)」이 「토(10)」였다는 것.
  
  『만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말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金씨는 말한다.
  
  
  金庾信은 문무왕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책은 원래 「金庾信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金庾信은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영웅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은 삼국통일을 둘러싸고 엄청난 파워게임이 있었음을 발견했다는 것.
  
  金庾信의 여동생 문희(문명왕후)가 김춘추(무열왕)의 왕후가 되었으니 金庾信과 김춘추는 처남매부 간이었다. 그런데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은 삼국통일 당시 자기에게 불복한 反戰派(반전파)들이 金庾信을 등에 업고 北進을 꾀하다가 실패하자, 눈엣가시였던 金庾信을 제압하기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 같다고 한다.
  
  北進의 실패로 왕위를 빼앗긴 문무왕은 强首(강수)로 하여금 唐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항복 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그런데 强首는 항복 문서에서 웅진 공격만 사죄하고, 金庾信의 北進에 대해서는 一言半句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唐나라 황제에게 使者로 보낸 原川(원천)의 口頭報告(구두보고)를 친히 듣고 裁可(재가)해 달라고 애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原川이 직접 보고한 내용은 항복 문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金庾信의 北進에 대한 것이라고 金씨는 주장한다.
  
  『北進의 책임자는 金庾信이니, 그를 죽여야 唐나라 황제에게 사죄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어떻게 문서화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이런 내용을 原川더러 口頭로 보고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金庾信 암살이 암시된 强首의 항복 문서를 본 문무왕은 잘 되었다고 칭찬하면서 벼슬과 下賜穀(하사곡)을 내렸거든요. 이것은 곧 「金庾信을 암살하라」는 無言의 지령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백두산은 머리가 아니라 꼬리
  
    뿐만 아니라 문무왕이 金庾信의 혈통을 변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金庾信은 원래 任那王族(임나왕족)의 후손이었으나, 문무왕은 金庾信의 매부인 아버지 무열왕의 王統을 세우기 위해 金庾信을 수로왕의 후손으로 변조했다는 것. 문무왕은 임나왕족인 金庾信의 조상을 수로왕으로 바꿔친데다 그를 암살까지 했으니, 金庾信의 혼령이 임나 왜병을 이끌고 와서 자기 무덤을 파헤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고, 이에 豪華墳墓(호화분묘)를 사양하고 대왕암의 護國大龍(호국대룡)이 되어 庾信과의 혼령대결을 예비했다는 것이 다. 이 또한 문무왕이 호국대룡이 된 것은 죽어서도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는 正史를 뒤집는 학설이다.
  
  그렇다면 단군이 우리의 시조로 부활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金聖昊씨는 고려의 건국 때부터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종족별로 각기 다른 시조를 두었다는 것. 즉 朴씨의 시조는 朴赫居世(박혁거세), 金씨의 시조는 小昊金天氏, 高씨의 시조는 天孫(천손), 그 밖의 다른 姓들도 각각 다른 시조를 두었기 때문에 姓의 數와 시조의 數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 땅은 거의 차지하지 못하고 백제만 통합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聖域化(성역화)하기 위해 단군을 봉안한 곳인 安岳(안악) 九月山(구월산) 三聖祠(삼성사)는 고구려 멸망 후 350년 간 고스란히 잔존했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고려가 건국되자, 고려가 단군을 우리의 시조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북한이 현재의 우리 영토가 된 것은 고구려 땅이어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에서 조선 초까지 700여 년이나 추구된 北進의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항간에 膾炙(회자)되어 온 것같이 민족의 발상지가 아니에요. 한강에서 경주까지 밀렸다가 다시 北上한 한반도의 마지막 종착역이죠. 지금까지 우리는 꼬리를 머리로 잘못 알아 온 것입니다』
  
  따라서 金聖昊씨는 한민족의 중심을,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백두산이 아니라, 네 종족의 先住地(선주지)였던 한강 유역으로 본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북방대륙을 고대의 우리 영토라고 거품을 넣어 널찍하게 그렸지만, 실은 각 씨족의 개별적인 先住地였을 뿐이라는 것. 한민족의 근간인 4개 종족(마한 한씨족, 변한 진·모씨족, 진한 김씨족, 진국 박씨족)이 융합한 한민족의 1번지는 한강 유역이어서, 한강은 바로 한국판 갠지스강이라는 것이다.
  
  
  正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 20년 이상 걸려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나도 正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 2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正史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 도통 들으려 하지 않아요. 둘째 아들이 사학과를 졸업했는데, 그놈과는 만나기만 하면 싸운답니다』
  
  1934년생인 그는 나이도 나이지만, 15년 전 위암수술로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런데도 매일 새벽 3∼4시까지 책을 읽고 연구한다고 했다. 金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참을 챙겨주는 부인 칭찬을 하면서, 요즘은 소화가 잘 안 돼서 간단하게 먹는다고 했다. 잠자리에 들어도 그 날 공부한 것들이 머리 속에 남아 있어서 잠이 오지 않아 소주 반병씩은 매일 마시며, 커피도 하루에 서너 잔은 기본이고, 담배도 한 갑 이상씩 꼭 피운다고 한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金聖昊씨는 아시안 바이킹의 해상 활동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서양뿐 아니라, 백제에도 바이킹族이 있었다면서 또 하나의 正史에 대한 도전장을 내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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