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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과 한민족의 起源에 대한 오해와 이해
 관리자  08-22 | VIEW : 2,599
檀君과 한민족의 起源에 대한 오해와 이해

  
檀君은 고려 말에 만들어진 신화, 역사적 실체가 아니다. 檀君은 한민족의 시조가 아니라 신라통일이 한민족의 起源이다
  

李 錢 경상대 사회교육학부 교수

檀君조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

필자는 금년에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한울, 1999)」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국수주의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과학적인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단군에 대한 논쟁이 우리 사회에서 뜨겁게 달아오면서 이 책은 일반인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책에서 주장한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古朝鮮(고조선)이라는 명칭은 「三國遺事(三國遺事)」에 처음으로 나온다. 「三國遺事」를 쓴 一然(일연)은 檀君神話(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을 위만조선과 구분하려는 의도로 고조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조선을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와 구별하기 위한 의도로 옛 조선, 즉 고조선이라 부르고 있다. 춘추시대의 사실을 전하는 「管子(관자)」라는 책에는 「조선」의 이름이 나오며, 조선이 齊(제)와 교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기원전 7세기 초경에 조선이라는 실체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일 것이다.
  
  檀君神話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알려져 있다. 단군신화는 고려 충렬왕대(1274년∼1308년)에 一然이 쓴 「三國遺事」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李承休(이승휴)의 「帝王韻紀(제왕운기)」, 權擥(권람)의 「應製詩註(응제시주)」, 「世宗實錄地理志(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도 단군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三國遺事」보다 1백30년이나 앞서 편찬된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檀君에 대한 내용이 없다. 또한 「三國遺事」보다 1천년이나 앞선 「三國志」에서도 물론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일연은 「魏書」, 「古記」 등의 문헌에서 단군조선에 관한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魏書」와 「古記」는 현존하지 않는다.
  
  「三國遺事」의 檀君神話에 따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으로부터 변신한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고 단군은 B.C. 2333년에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의 즉위년이 중국 전설시대의 堯(요)와 같은 때라고 한 것은 중국인과 대등한 한국인이라는 민족 자주성의 입장에서 주장된 것이다. 환인이라는 말은 원래 범어(산스크리트어)의 釋提桓因陀羅(석제환인다라) 즉 東方護法神(동방호법신)에 어원을 둔 것이므로 환인은 불교가 들어온 뒤에 표현상의 수정을 통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단군신화는 역사적 과정에서 각색된 흔적을 갖고 있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공동始祖(시조)로 인식된 것과 단군조선이 민족 최초의 왕조로 인식된 것은 고려 후기에 들어서였다. 고려 후기에 단군이 강조된 것은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그리고 元(원)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을 고양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 후기의 지배층은 고려 주민들을 단합시키고 통합시키기 위해서 상징적 실체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한반도 통일 이후 5백년 내지 6백년 동안이나 하나의 국가 단위에 속해 있었던 고려 말의 한반도 주민들은 상징적 실체인 단군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집필된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에서는 민족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조선에서 찾았다.
  
  
  왜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아닌가
  
  
  필자는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보지 않는다. 단순히 상징적인 실체로서만 단군조선의 실체를 인정할 수 있으나,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始祖라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적 진리는 정확히 밝히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단군조선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우선되어야 한다. 필자가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보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은 고려시대 말의 시대적 필요성에서 등장한 것이다. 고려시대 말 이전의 어떠한 사료에서도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중국측의 사료에도 단군조선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단군조선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과 요동 반도를 중심으로 기원전에 고대 문화권이 존재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기원전에 요동 반도를 중심으로 선진문화가 발달하였던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군조선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우리는 신화의 내용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필요는 없다. 국사학계도 단군조선이 B.C. 2333년에 형성되었다는 「三國遺事」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 B.C. 10세기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음을 단정하고 있다.
  
  둘째, 단군조선이라는 실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할 때에는 한반도와 그 주변에 무수히 많은 문화집단들이 산재하였다. 그러한 문화집단들은 각각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고, 서로 다른 종교적 관행을 갖고 있었으며, 서로 다른 관습을 갖고 있었다. 또한 각각의 문화집단들이 그러한 집단들을 서로 이질적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문화집단들이 단일 민족 의식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문화집단들을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韓民族(한민족)은 그러한 다수의 민족들이 오랫동안 문화 同化(동화)과정을 거쳐서 후대에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한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어떻게 한민족 최초의 국가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애초부터 잘못된 발상
  
  
  셋째, 신라가 통일한 영역은 과거의 마한·진한·변한의 영역에 해당하고, 이 영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韓語群(한어군) 계통의 민족들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三韓一統意識(삼한일통의식)이 있었음은 문헌에 의하여 밝혀져 있다. 우리 한민족의 형성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사람들은 바로 한어군 계통의 민족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고조선이 위치하였던 영역에는 원래부터 夫餘語群(부여어군) 계통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부여어군 계통의 민족들은 우리 민족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다. 부여어군 계통의 민족들은 후대의 말갈족·여진·만주족 등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는 사람들로서 우리 한민족의 형성에 부분적으로만 기여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기원을 고조선과 연결하는 사고는 애초부터 잘못된 발상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필자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단군조선으로부터 찾는 것은 매우 잘못된 역사 해석이라고 본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고려시대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8백여년 동안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에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에게 정서적으로 또한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는 실체임에 틀림없다. 특히 우리 민족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이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과학적으로 볼 때 단군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수의 민족들이 문화 同化과정을 거쳐서 단일 민족으로 발전한 다음에 상징적으로 특정한 역사적 실체를 마련하여 민족의 기원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한 보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고려시대 말의 시대적 필요성에서 우리 민족은 단군조선을 창조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단군조선을 정확히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민족이 태초에 단일 민족으로 출발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우리 민족은 반만년 동안 단일 민족으로서 빛나는 역사적 삶을 살아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은 매우 애매한 것이다. 애매한 것이라기보다는 심히 잘못된 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일 수 있다.
  
  
  과학적인 역사 인식은 무엇인가
  
  
  수천년 전에는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수십 혹은 수백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한 각각의 민족들은 고유한 생활지역을 갖고 있었고, 특정한 생활양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각각 배타적 동질집단 소속감을 갖고 있었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수천년 전부터 단일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는 어리석은 사고임에 틀림없다. 우리 한민족이 처음부터 단일 민족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한국사를 결코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다수의 민족들이 서로 同化되어 단일 민족화 과정을 본격적으로 겪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특히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건국 이데올로기로 삼은 삼한일통의식은 통일신라시대의 주민이 모두 韓(한)이라는 민족에 속한다는 의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쉽게 단일 민족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하나의 국가가 되었지만 그 계통을 따져 올라가면 각각 신라·백제·고구려로 연결된다는 분립적 역사계승 의식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후삼국의 등장이라는 것은 바로 분립적 역사계승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동일 민족 의식이 강화된 한편 분립적 역사계승 의식도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왕조 질서 내에서는 삼국 중에 어느 나라가 정통이냐는 시비가 나타났고, 고려 중기 혼란기에는 지방의 반란군들이 신라부흥·백제부흥·고구려부흥 등을 내세우는 형태로 분립적 역사계승 의식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분립적 역사계승 의식에 쐐기를 박는 사건은 몽골의 침입이었다. 30~50년 동안의 對夢(대몽)항쟁 속에서 한반도 주민들의 동일 민족 의식은 크게 고양되었다. 13세기에 「三國遺事」와 「帝王韻紀」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집필되었다.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에서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단군조선에서 찾았다. 특히 「제왕운기」에서는 삼한의 70여국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등장하였고, 고조선→삼한→삼국→통일신라→후삼국→고려로 이어지는 일원적인 역사인식 체계가 확산되었다. 고려 말기에 신흥 사대부와 신흥 군벌의 연합에 의해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었을 때 국호를 조선이라고 정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인식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의 역사와 인식상의 역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식상의 역사는 사실상의 역사와 다를 수 있다.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인식된 것은 고조선이 몰락한 이후에 약 1천3백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 인식은 고려 말의 시대적 배경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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