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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최고의 외교정책 大家 光海君
 관리자  07-25 | VIEW : 1,946
조선조 최고의 외교정책 大家 光海君
민족을 戰亂에서 구했으나 內治에 실패한 悲運의 君主

최용범 :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졸업. 전 "사회평론 길" 기자. 현 프래랜서 출판 기획자 및 집필자로 활동중. 저서로 "대학문예운동의 이론과 실천"(좋은책刊, 공저), "너희가 대학을 아느냐"(새로운사람들刊, 공저)가 있다

광해군시대 주요 사건과 연표
1575년 광해군 출생
1592년 왕세자로 책봉됨, 임진왜란을 맞아 분조를 이끌기 시작
1608년 선조 사망, 광해군 즉위 유영경 사사, 임해군 유배 선혜청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 시행
1609년 기유약조를 매정, 임란 이후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통상 재개 광해군, 서북지역의 방어태세를 엄중히 하라 지시
1610년 허준, “동의보감” 25권 지어 바침 국방상 긴요한 화약 등을 신경써 구입하도록 지시
1611년 윤방 등을 시켜 동래·부산 등지의 왜구를 살피게 함. 정인홍이 이언직·이황을 비판한 ‘회퇴변척’사건 발생,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정권은 사림과 대립관계가 첨예화됨.
1613년 계축옥사 발생, 김제남 사사, 폐모 논의 시작 정인홍 문하의 정온까지 영창대군 살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정인홍의 문하에서 이탈할 정도로 사림의 반발을 삼.
1616년 2월 여진족의 위협에 대비하여 서북지역의 방어를 엄히 하라고 지시. 누르하치 후금 건국, 그의 침략 소문에 도성민 동요
1617년 광해군, 후금 정세 탐지하라고 지시
1618년 광해군, 명의 원병 요청 강력히 거부. 광해군과 비변사, 파병 여부를 놓고 논쟁 인목대비를 西宮이라 낮춰 부름
1619년 명의 거듭된 요청에 파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심하전투에서 패전
1621년 명이 다시 원군 요구, 모문룡 조선에 들어옴
1620년 10월 비변사에 방어대책을 세울 것과 후금과의 관계를 원할히 할 것 지시
1622년 모문룡, 가도로 들어감
1623년 인조반정 일어나 광해군 폐위
1624년 이괄의 난 발생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발생
1637년 인조, 청 태종에게 항복
1641년 광해군 사망

조선왕조 제15대 임금으로, 패륜아·폭군 등 부정적 이미지로 분칠되어 온 광해군(재위 1608∼1623). 왕위에 오른 지 16년째 되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귀양생활을 하다 쓸쓸히 눈을 감은 廢主 광해군은 한마디로 역동적이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임란후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고 주변 강대국과의 실리외교를 전개해 전쟁의 위기를 넘긴 탁월한 군주로 재조명받는 광해군이 후세인들에게 주는 두가지 교훈.


조선조에서 쿠데타를 맞아 실각한 임금은 노산군·연산군·광해군, 이렇게 셋이다. 이중 노산군은 어려서 즉위한 뒤 막강한 삼촌의 힘에 떼밀려 퇴위 당했다. 그래서인지 조선조에서도 많은 이들의 동정을 샀으며, 죽은 뒤에나마 단종으로 추존돼 복권됐다. 연산군은 정말 원 없이 폭군 짓을 하다 퇴위됐기에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치부될 만하다. 연산군은 행동반경이 좁게만 강제됐던 조선의 왕 중에서는 드물게 말 그대로의 ‘왕’처럼 임금 노릇을 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에는 관심 없이 궁녀만 1,300명을 거느리며 매일 연회 속에서 지낸 임금. 충언하는 신하가 미워 아예 사간원이라는 정부기관을 통째로 없애버리고 마음대로 악패를 저질렀던 연산군이었으니 퇴위 당했더라도 억울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달랐다. 15년간의 재위기간 내내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응해 자신의 확고한 정치노선을 끌고 가다 반대세력의 쿠데타를 맞아 한순간에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의 치적이 만만찮아 쿠데타에 성공한 반란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광해군의 치적을 폄하하고 은폐하기 위해 “선조실록”을 수정하고, “광해군일기”의 사초를 왜곡하는 등 갖은 수를 써야 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가린다고 영원히 덮이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광해군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란을 피하게 한 ‘중립외교’ 노선을 펼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다. 한명기(규장각 특별연구원) 박사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 “광해군”(역사비평사)을 통해 그를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광해군시대의 방대한 사료와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저술한 이 책은 당대의 사대주의적 신료들의 거듭된 반대를 물리치고 초강대국 명나라를 ‘주무르고’, 신흥 강국 후금을 ‘달래는’ 탁월한 외교정책을 구사하는 광해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필자는 이 책을 보면서 ‘광해군의 그런 탁월한 외교정책이 왜 좌절됐는가’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책 안에 있었다. 광해군이 그의 시대에 부닥쳤던 외교문제는 미·중·일·러 4대강국에 둘러싸여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 없이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지금 우리 시대의 방향 설정에 주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이 부닥쳤던 문제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고, 그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한명기씨의 “광해군”을 주연료로,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보조연료로 해서 광해군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털어놓는 광해군시대의 비망록을 육성으로 들어보았다.

진짜 쿠데타로 실각한 광해군

광해군을 만난 곳은 그의 마지막 유배지 제주에서였다. 시점은 1840년. 그가 죽기 바로 전년이다. 두 칸이나 될까, 그와 심부름하는 계집종 하나만 있는 초라한 띠집이었다. 의욕 없이 서책을 넘기던 예순 여섯 살의 노인 광해군은 홀연히 나타난 기자를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누구냐?”
18년간의 폐위 기간이었지만 왕으로서의 말은 바뀌지 않았다. 조선의 왕은 신하들을 부를 때 통상 ‘너’(爾)라고 불렀던 것이다.

― 400년 뒤의 사관입니다. 전하의 재위기간 중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았습니다.
“허, 다 늙은이에게 무얼 들으려고…. 그리고 내 시대의 실록은 이미 만들어졌을 텐데.”

― 어느 정도는 아시겠지만 실록은 저들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만 골라 쓰지 않았겠습니까. 심지어 전하시대에 간행된 “선조실록”도 저들이 수정실록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원래 불만이 많았던 서인들이 득세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 전하께서는 반란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짐작했었다.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정인홍도 나를 떠났고, 오른팔 노릇을 자임했던 이이첨이는 대북정책에서는 사사건건 반발만 하니 믿을 만한 신료는 하나 없었구나. 이이첨이가 내 견해에 반대해 ‘숭명배금’(崇明排金)을 주장한 것도 어디 자기 주장이었겠느냐. 다수 신료가 그렇게 주장하니 그에 편들어 제 체면치레만 할 따름이었지. 왕이란 자리가 참 고독했다. 섬이지, 섬. 반란 당시 비원 쪽에 불이 나 이씨 종사가 내 대에 이르러 망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조카가 대신 올랐으니 역성반란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상들께 면목은 서니 다행이 아닐까 한다.”

광해군은 반란이 있자 처음에는 “이이첨이 저지른 짓이 아닌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왕세자로만 17년간 있었고, 즉위 무렵에는 계모인 인목대비의 소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반대파 신료들의 책동 때문에 즉위 여부까지 불안을 느꼈던 광해군. 그런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대북파의 중심인물인 이이첨에 대해 이런 의심까지 들 정도였으니 반정을 전후한 광해군의 정치적 처지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짐작해 볼 만한 대목이다.

― 반란 무렵 이귀와 김자점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대간들의 상소도 있었고, 반란에 대한 첩보도 끊이지 않았는데 전혀 대비하지 않았죠?
“내 최대의 실책이었다. 김상궁이 별일 아니라고 하기에 나도 그런 줄만 알았지. 이귀가 또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과 대질신문까지 하자며 상소를 올렸으니…. 불안하기는 했지만 우선 그냥 놔두었던 거다.”

여기서 김상궁이란 누구인가. 실록에서 김개똥(金介屎) 상궁이라 전하는 인물로,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시대 최대 악인으로 묘사된 인물이다. “광해군일기”에는 오늘날로 치면 박스기사라고 볼 수 있는 기사들이 있다. 광해군 5년 8월11일자의 ‘이이첨과 김상궁 개시에 관한 비교 평가’같은 기사다. 이 기사에서는 그 둘의 비슷한 점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며 과격한 역적토벌론을 일삼는 것. 둘째, 벼슬 욕심을 줄이되 실권을 최대한 갖는 것. 그래서 이이첨은 영상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김상궁은 희빈이니 귀빈 자리 같은 데 욕심을 두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실익은 마음대로 챙긴다는 점. 셋째, 악역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그 일에 대한 공은 자신이 차지하는 것 등이다.
김개시가 광해군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록에 의하면 미모는 아니었지만 성적 기교라고 볼 비방(秘方)을 써서라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의 독살에 간여하면서, 광해군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런 김상궁을 이귀가 포섭해 광해군에게 들어간 첩보를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 유폐된 지 벌써 18년째인데, 아직도 아쉬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허, 지나간 세월 말해 무얼 하겠느냐만 그래도 가슴속에 울컥울컥하는 게 있지. 그래도 이제는 아무 미련도 없지. 허유·유효립이가 내 복위를 꾀하며 일을 준비할 때는 조금 희망도 품었지만 그새 물거품 아니었나. 그게 벌써 12년전 일이니 그저 모진 목숨이나 이어가고 있구나.”

1628년 허유와 유효립 등은 “광해군을 일단 복위시킨 뒤 인성군(광해군의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추대한다”며 반란을 꾀했다고 한다. 반란의 추진 과정에서 광해군의 첫째 처남 유희견의 아들 유효립은 유배지 강화도로 사람을 보내 광해군의 측근들과 연락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광해군은 복권 의지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 재위기간 중 가장 뿌듯한 기억이 남는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전란을 막았던 게 아닌가 한다. 3년 전 능양(인조)이 청나라 왕에게 머리를 세번이나 조아렸다지? 오랑캐니 뭐니 하면서 함부로 대하다 그런 치욕을 당했으니…. 내가 일찍이 조선사람들은 허풍 때문에 망할 것이라 했는데 오늘날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신료란 사람들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서책에 있는 말이나 되새기고 저희들 생각대로만 되는 줄 아니…. 내가 왜란 중에 북쪽을 다녀봐서 저들 여진의 힘이 얼마나 강성한 줄 똑똑히 알았다. 수도 적지만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우리 군사들이 저들을 당해내지 못할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을 왜 그리 외면하는지….”

18년간의 유폐된 인생

‘전란을 피하게 한 것’, 이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광해군대의 치적이다. 그는 조정의 정치에는 피로감을 느끼며 짐짓 외면까지 하면서도 군사(?)외교문제 만큼은 맹렬히 챙겼다. 이런 점은 인조대의 주화파인 최명길 등이 자신들이 직접 명·청과의 외교전을 펼치면서 그 탁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명의 거듭된 무리하고도 오만한 군사지원 요청을 요령 껏 거부하고, 청에 대해서는 되도록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중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러기 위해 청에 대한 정보라인을 긴밀히 가동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대외정책은 분조를 이끌며 현장에서 전장을 지휘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 즉위하자마자 의욕적으로 대동법을 추진하셨는데요. 백성들도 많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전란을 당해 전국을 다녀 보면서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 사는지를 많이 느꼈다. 구중궁궐에만 있었으면 몰랐을 테지. 전란 중에는 명군이 먹다 게운 것도 서로 주워 먹으려고 아우성칠 지경이지 않았느냐. 전쟁이 끝난 마당에도 굶어 죽는 백성이 넘쳐난다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 방도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이원익이 대동법을 제청해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 특산물을 바치라는 좋은 뜻을 왜곡해 억지로 있지도 않은 특산물을 바치게 하니, 대신 내주는 방납인이란 자들이 중간에서 얼마나 이문을 챙겼겠느냐. 그것을 봄, 가을로 쌀 16말만 내게 하니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 정도로 좋아했다. 그런데 중간에서 큰 돈벌이를 했던 방납인들이 얼마나 극심히 반대하는지 나도 잠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 돈이 얼마나 큰지 사대부는 물론이고 종실 사람들까지 이런 무도한 돈벌이에 나서지 않았겠느냐. 제 재물 못 불린다고 ‘대동법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떠드는 무리까지 있다고 들었다.”

조선조 왕족을 비롯한 양반들의 악폐는 극심해, 임란이 터졌을 때 왕자들의 사택에 불을 지르고 왜군에 귀순해 스스럼없이 앞잡이를 자청하는 무리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악폐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돼 조선 후기 내내 문제가 된다. 광해군도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생을 챙겼지만 사대부층의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그 역시 왕권 강화를 이유로 무리한 궁궐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고, 반란세력들에게 빌미를 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 그런데 전하께서도 전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궁궐 조영이나 중축을 무리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창덕궁에 거할 만도 하셨을 텐데 경덕궁·자수궁·인경궁을 새로 짓고 창경궁을 중수하시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참 불안했다. 나는 왕위에도 힘들게 올랐고, 반역을 모의하는 무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왕실의 위엄을 드러낼 생각이 컸다. 초라한 행궁에서 선대(선조)가 명군 장수들에게 얼마나 얕보였느냐. 게다가 창덕궁은 노산군과 연산군이 역도를 맞은 궁이라 불길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 유배지 초라한 초옥에 있어 보니 그런 것이 얼마나 부질없었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운이 다한 것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그보다 가진 힘을 다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정치적 성과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허준의 “동의보감”이 나올 수 있게 한 전하의 결단을 높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의보감”은 중국에까지 수출돼 그쪽 사람들도 처방에 많이 참고한다더군요. 분량이 만만찮은 책인데 전란이 끝난 뒤라 책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테지요.
“아, 그러냐. 반갑구나. 그때도 신료들은 허준이를 베어 죽이자는 의견을 냈으니, 그 사람들이 참 완고했다. 잡약을 올려 선대가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으니 그래야 된다는 거였지. 허, 사람의 명이 다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나. 의술이란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그래도 허준이 유배지에서도 쉬지 않고 선대가 명한 일을 끝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이냐. ‘동의보감’이 있어 내 대에도 전염병이 창궐하면 그 책을 퍼뜨려 처방토록 했다.”

― 16년간이었으니 참 오랫동안 세자로 있었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란을 당해 세자로 책봉되자마자 전장으로 다녀야 했다. 노숙까지 해가며 종사를 보위하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민심이 자신에게 기우는 것은 좋았지만 선왕에게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치게 되어 처신이 몹시 어려웠다. 전쟁 중에는 송유진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임금이 허물을 뉘우치고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종용하겠다’는 망발을 해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게다가 명은 또 어땠소. 내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신민들이 복종하니 군사관계 업무를 책임지도록 명한다’면서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여 국가가 보존되도록 도모하라’고 했으니 선왕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내가 원망스러웠겠느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왕 뵙기도 죄스러웠으니…. 이런 데다 선왕이 불편한 심기를 이용해 영창을 세자로 대신 책봉하자는 유영경 같은 무리가 있었으니 밤잠을 이루기조차 힘들었구나.”

대동법 추진으로 민생안정에 주력

― 명은 그렇게 칭찬하다 나중에는 적장자가 아니니 세자를 인정하지 못한다. 왕위 계승을 허락하지 못한다고 한참이나 전하의 심사를 어지럽혔으니 명에게 복잡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선왕을 망신줄 때는 총명한 세자라며 치켜세우다 뒤에 딴소리를 하며 자리를 뒤흔드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았겠느냐? 게다가 조선에 온 명군은 또 얼마나 불손하고 백성에게 패악을 끼쳤느냐. 풀뿌리로 연명하는 백성들 옆에서 징발한 쌀과 고기를 게우도록 먹고 그것도 모자라 은이며 삼이며 조선의 재물을 다 쓸어가지 않았느냐. 그런 명이 뭐가 그렇게 좋아 사대를 제대로 안한다고 과인에게 그렇게들 떠들어대던지…. 우리나라의 신료들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광해군이 명과 일정한 거리를 둔 배경에는 이런 개인적인 감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즉위하면서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명나라에 당시 국고의 3분의 1 이상의 뇌물을 바쳤다. 뇌물을 둘러싸고 당시 신료들의 한탄도 컸지만 광해군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뇌물을 주는 이가 이를 받는 무리를 ‘더럽다’는 감정을 가지고 보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전하께서는 군사외교 문제에는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내정은 거의 방치하신 듯합니다. 이이첨 등 과격하고도 간특한 대북파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 결국 전하를 어렵게 하지 않았습니까?
“허, 피곤했도다. 피곤했도다. 영창을 내세우겠다는 유영경 무리야 밉기 그지없었지만 선왕의 유지가 대신들을 계속 중용하라는 것 아니었느냐? 미워도 심하게 내쳐서는 아니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고 자백도 나오는데 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이신 임해군도 마찬가지지. 내 형이지만 악패가 여간 심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형제간에 싸워서는 안되는 법. 모반을 꾀했다는 증거를 내놓고 처벌을 주창하는 신료들의 주장을 막기는 힘들었다. 영창 살해도, 인목대비 폐모도 그렇지. 말리고 말렸다. 그래도 한번 격해지고, 원론을 내세우며 유생을 앞장세운 이이첨 같은 신료들이 들고일어나는데 어쩌랴. 내 눈을 가리고 유폐된 형과 동생을 죽이는 그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구나. 복잡한 종친 일은 정말 염증이 날 정도였구나. 재위 10년이 지나고 이이첨 무리들을 멀리 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던 듯싶다. 저들은 저들대로 힘을 키워 대북정책까지 반대하며 제 몫만 챙기려 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새로 임용한 신료들 중 쓸 만한 자는 적은데 그나마 풀어놓은 이귀·최명길 같은 서인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내가 반란군에 칼을 쥐어줬구나.”

눈부실 정도로 탁월한 외교정책과 판연히 대비되는 어지러운 내정. 그것은 광해군이 임란후 10여년의 세자 재위 기간 동안 선조의 계속적인 견제로 자신의 신료들을 키우지 못했던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10년은 그의 자신감과 의욕을 감퇴시키는 세월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광해군의 집권을 뒷받침했던 것은 강한 정치적 기반을 가진 당파가 아니라 이질적 세력으로 구성된 취약한 대북파였다. 또한 대북파의 중심인물인 이이첨은 주류 사림 계열이 아닌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경로보다 사술과 과격책으로 일관해야 했다. 주류 사대부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모 같은 사건들은 강경한 정치세력 숙청으로 이이첨파의 권력을 강화하는 술책인 성격이 강했지만, 역으로 지지기반을 취약하게 해 그들의 목을 죄게 했던 것이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물러난 마당에 가장 아쉽게 느끼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부질없는 얘기 아니겠소…, 형제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가장 안타깝소. 사악하고 간특한 이이첨 같은 무리를 힘을 가지고 똑똑히 본 뒤 제압해야 했소. 피곤하고 어지러웠지만 내정을 이런 무리에게 맡겨 놓았던 게 가장 큰 탈이었소. 신료들과 부자의 정으로 만나 진정으로 국사를 고민하고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애써야 했소. 외로운 세월이었소이다.”

광해군의 유배지 초라한 띠집은 그나마 위리안치된 상태였다. 위리안치, 사방 10리 안에는 사람들이 근접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라고는 심부름하는 계집종 하나뿐이었다. 제주도, 섬 속의 섬에서 유배생활 마지막 5년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재위 기간에도 섬 속에 갇혀 있었다. 과격 대북파라는 섬, 그리고 자신의 세력만을 키우려는 이이첨 같은 권간(權奸)으로 인해 신료라는 바다에 둘러쌓인 섬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런 섬 안의 고독과 불안 속에서 광해군은 대북정책을 밀고나가야 했다.
광해군은 강대국에 둘러쌓여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진일보한 민주주의를 이뤄야 하는 우리시대에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두가지 메시지를 던져준다. 4대강국의 틈바구니에서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위한 한반도적 시야에서의 탁월한 외교력을 갖추라는 것이 동전 앞면의 메시지라면, 이러한 민족적 과제의 이행을 뒷받침해 줄 정치세력을 형성할 민주적 리더십을 갖추라는 것이 뒷면의 메시지일 것이다.

광해군의 실패가 주는 역사적 교훈 2가지


정권의 성공 여부는 지지기반의 확대와
측근세력에 대한 장악력 강화에 달렸다

“지금 이 땅의 우리 역사 역시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기적처럼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한반도에 미치는 열강의 입김은 여전하다. 그들은 한반도 문제가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만 우리 내부를 추스르고 열강의 입김을 넘어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절대절명의 과제를 앞에 둔 우리 모두에게 역사로서의 광해군과 그의 시대는 분명 소중한 거울이 될 것이다.”

한명기씨의 “광해군”의 한 대목이다. 강대국 명(明)과 신흥강국 청(淸)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생사를 건 선택을 해야 했던 당대의 상황이나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주변 4대강국의 입김이 막강한 현실 속에서 평화적 남북관계를 실현해야 하는 지금의 우리시대는 유사한 면이 많다. 그런 점에서 현명한 외교노선으로 전화를 피해가면서 자강책(自强策)을 선택한 광해군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탁월한 외교정책은 내치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 쿠데타를 맞아 물거품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외치와 내치는 모두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광해군과 김대중 정권을 비교하는 이들이 있다. 외교의 성공과 내치의 실패가 큰 틀에서 비슷하다고 한다. 집권 절반을 넘어선 시점에서 김대중정권을 평가하는 조사에서도 외교와 대북정책에서는 비교적 높은 점수를 얻었지만, 경제문제나 지역감정 해소 등 내치문제의 성적은 저조했다.

얼핏 보면 유사하게도 보인다. 정말 그럴까?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외교정책은 큰 틀에서 적절한 방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정책에 대한 지지기반이 광해군에게는 너무 적었다. 초지일관하게 그의 정책방향을 뒷받침해줄 지지기반이 전무했다. 초기에는 이항복·이덕형 등 노련한 신료들이 실무적으로 이를 수행해 주었지만 후반에 접어들면서는 그의 외교노선을 이해하고 발로 움직여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신료들에게 청과 명에 보내는 외교문서의 구체적 내용까지 짚어줘야 했다. 그리고 그의 노선은 서인 등 반대파 말고도 유일한 지지기반이었던 이이첨 등의 대북파에 의해서도 거부당했다. 추진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여론주도층인 사림은 사대를 내세우며 청을 배척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의 외교노선을 강하게 추진하면 할수록 그의 정치적 기반은 좁아지는 운명에 처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외교노선을 반대했던 대북세력을 견제하고자 소북파는 물론 최명길·이귀 등 쿠데타세력을 기용했던 것은 그런 곤란한 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대중정권의 대북정책은 그 대의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어 강력히 추진할 기반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물론 야당과 일부 보수세력의 반대가 있지만 야당 내에서조차 이러한 대응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적지 않다.

다른 한편 양쪽 모두 소수정권이라는 점은 공통된 지적이다. 김대통령 역시 자주 소수정권의 한계와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광해군정권 역시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만이 지지기반인 절대 소수정권이었다. 또한 이이첨 등의 전횡으로 그나마 적은 지지기반이 더욱 협소해졌다. 일부에서는 김대중정권 내부의 가신그룹에 의해 여당이 좌지우지되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소수정권이란 점과 측근그룹의 전횡으로 재벌·관료 등 지배집단이 정권 후반기 들어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한 뒷소문이 적지 않다. 그러나 광해군정권과 절대적으로 다른 점은 김대통령이 자파의 정치세력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이이첨 등 대북세력이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비 등 사림의 대대적인 반발을 사는 강경책을 구사할 때 소극적 반대에 일관하고 끝내는 추인하는 등 끌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이첨 등 대북세력의 강경책은 물론 정권 독점욕에서 발로한 것으로, 이것이 광해군정권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광해군은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이들의 전횡에 대해 아예 염증을 느끼고 방기하기만 했다.
집권 후반기이고 대북정책이 구체화되는 시점이다. 김대중정부의 성공 여부는 지지기반의 강화와 측근세력에 대한 철저한 장악력 강화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광해군의 실패는 이런 점에서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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