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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궁예를 한쪽 눈으로만 봤다
 관리자  07-25 | VIEW : 3,130
역사는 궁예를 한쪽 눈으로만 봤다

격정의 이상주의자 궁예

최용범

신라 천년왕국의 축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던 미륵불의 화신 궁예.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승리자의 기록에서 그는 단지 실패한 군웅일 뿐이었다. 시대적 요청 앞에 온몸을 내던지며 쓰려져간 그는 냉혹한 폭군인가, 아니면 역사의 희생물인가?

후삼국시대 주요 사건 연표
861년(추정) 궁예 출생
866년 견훤 출생
876년 궁예 세달사에서 계를 받고 승려가 됨
877년 왕건 출생
891년 궁예, 죽주 농민봉기군 기훤(箕萱)의 무리를 찾아감
892년 궁예, 원회와 함께 북원(원주)의 양길에게로 감
892년 양길, 궁예로 하여금 백오 내성·정선·삼척·울진을 토평케 함
894년 궁예, 명주(강릉)를 토평하고 군사 3,500명을 모아 14대로 편성하고 장군에 추대됨.
895년 궁예, 저족(인제)·낭천·광평·철원 등 한주 관내 10여개 군현 점령. 내외관직 설치.
896년 송악군(개성)의 왕건 부자 궁예에게 귀순
898년 7월 궁예, 현재의 황해·경기 일대 30여 성을 취하고 송악성을 도읍으로 정함
899년 9월 양길, 북원(원주)·중원·국원(충주) 등 30여 성의 군사를 합쳐 궁예를 쳤으나 패함.
900년 중원 괴양의 청길과 신훤이 궁예에게 투항 901년 궁예, 국호를 후고구려로 건국하고 왕으로 즉위
904년 궁예,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로 함. 내외 관제 정비.
905년 궁예,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연호를 성책(聖冊)이라 함. 서원경(청주)에서 1,000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킴
910년 후백제 견훤, 3,000명의 병력으로 10여일간 나주성을 포위 공략했으나 실패
911년 궁예, 국호는 태봉(泰封), 연호는 수덕만세(水德萬歲)로 바꿈.
911년 발해왕 대인선, 궁예에게 사신을 보내옴.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이 왕건을 앞세워 모반. 궁예 폐위
919년 견훤,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움. 견훤군과 왕건군이 팔공산에서 격돌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신라 멸망,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왕위에 오름. 견훤 왕건에게 투항
936년 왕건,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후삼국 통일

잠깐 다른 얘기부터 해보자. 서점가에, 그것도 경제·경영 분야의 베스트셀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도몬 후유지 저, 작가정신 펴냄)이란 책이 수위를 다투고 있다. 일본의 역사평론가가 쓴 책인데, 제목 그대로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막부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재활용술에 포커스를 맞춰 쓴 역사 에세이물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1993년에 출간된 책이다. “나는 증권으로 몇억 벌었다”류의 증권투자서나 “인터넷비즈니스.com”류의 e-비즈니스 관련서로 꽉 찬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목록에 느닷없는 일본사의 한 인물의 인간경영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출판 관계자들은 벤처기업의 리더들이 기업의 성공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이 아이디어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영에 있고, 더 좁혀 보면 ‘인간경영’에 있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시점에 이 책이 나와 히트치고 있다고 나름의 베스트셀러 분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 당장 이 책의 히트 배경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책을 보면서 새삼 일본이 부럽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정말 일본이 대단한 나라라고 느끼는 것은 500년 전 일본의 역사인물이 뉴밀레니엄의 초입에 서 있는 이웃나라의 베스트셀러 코너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봉건제 하의 최고권력자였던 인물이 산업자본의 시대를 넘어 지식이 지배한다는 정보사회에서도 당대의 경영자들에게 현실적인 지침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만든 역사인물에 대한 잘 가공된 일본의 역사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부러움이다. 요즘 잘 쓰는 말로 하면 ‘인문교양 인프라’가 정말 튼실하게 구축돼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인물 중 CEO나 정치인들의 좌표로 쓰일 수 있는 인물로 누구를 들 수 있을까? 아니 그 인물을 들어 말하면 공감을 얻을 만한 역사 속의 스타는 있는가? 우리에게 ‘성웅’인 이순신, ‘성군’인 세종대왕, ‘의사’인 안중근은 있어도 옆에 두고 부담없이 그 삶의 궤적 속에서 길을 물어볼 역사 속의 ‘스타’는 없다.
왜일까? ‘삼국지’식의 스케일을 가질 만한 역사가 없어서인가? 그렇다면 더 적은 역사밖에 없는 일본에 ‘역사스타’가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승자 중심의 역사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한 우리의 역사 풍토도 그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스타’가 없는 우리 역사

일본 전국시대의 최종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지만, 그 전대를 만들어온 오다 노부가나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활동상은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사실은 사실대로, 전설은 전설대로 남겨져 내려오고 있다. 그만큼 패자에게도 기록은 엄정했고, 그들에게서도 섭취할 것은 그대로 섭취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승자 중심의 논리가 너무 강했다. 이는 단지 기록의 문제만은 아니다. 승자의 기록인 정사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다. 패자 입장에서의 기록은 물론이고, 그 해석도 적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나름의 정당성조차 잃고 부관참시 당한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역사 속의 스타를 배양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정치권력을 둘러싼 싸움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이 있듯, 정치사에서는 단지 실력만이 아니라 운이 더 큰 몫을 차지하곤 한다. 운명의 여신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운을 가졌던 승자만을 지나치게 챙겨주는 것은 기(技) 3은 다했건만 운(運) 7이 따르지 못해 좌절하고 만 역사속 인물들의 피땀어린 흔적을 간과하게 마련이다.
이런 역사의 부관참시를 가장 많이 당한 이가 아마도 후삼국 시대의 걸출한 영웅인 궁예가 아닐까? 역사 속에서 궁예는 포악한 성격으로 처자식을 비롯, 수다한 사람을 무고하게 살해한 폭군으로, 그리고 자신을 미륵이라 사칭한 사이비 교주 정도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점은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라보다 고려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찾는 북한의 고려 연구는 남한보다 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궁예를 ‘통치기구를 꾸리고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하고, 통치령역을 넓힐 목적으로 싸움을 끊임없이 벌려놓은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김은택,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6).

남과 북에서 공히 폭군으로 취급받는 궁예. 그러나 그를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적지않은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미국 캔사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는 “선인, 악인, 그리고 추인 - 고려 왕조 창건 속의 인물들”이란 논문에서 “고려 창건사에서 왕건은 선인(善人), 견훤은 악인(惡人), 궁예는 추인(醜人)의 배역을 받았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기록된 것처럼 성스럽거나 악한 존재는 아니었다. …역사가들이 역사를 편찬하던 그 시점에 특수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배역을 맡게 된 것처럼 보인다”며 정사의 진실성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허스트 3세 교수는 이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사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궁예에 대해 “큰 야심과 정치적 지혜가 있었으며, 개인적 권위가 있었고 사람들의 능력을 잘 판단할 줄 아는, 곧 인재를 볼 줄 알았던 인물이며 궁예왕국의 정치적, 행정적 업적이 오로지 왕건의 탁월한 덕성의 결과였다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역사의 추인 궁예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신라 왕가의 왕위계승 전쟁에 휘말려 성장기 내내 쫓겨다녀야 했다. 15~16세 때까지 신라 왕가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 숨어 살아야 했고, 이후에는 안정된 피신처를 찾아 중이 됐다. 이런 궁예가 혈혈단신으로 난세에 두각을 나타내 반란군에 투신해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끝내는 한반도 지역의 3분의2를 점령해 후삼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데서 볼 수 있듯, 그의 정치적 역량은 남달랐다. 이는 개성 지역의 유력한 호족의 아들로 태어난 왕건이나, 지역에서 장군 행세를 했던 지방세력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던 견훤보다 출신상의 핸디캡을 딛고 일어선 것이라 한층 더 높게 평가할 만하다. 더구나 고려 왕조 창건의 바탕은 궁예가 이뤄낸 태봉의 세력권만이 아니다.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좌절케 했던 신라의 골품제를 타파하고 신분이 아닌 능력 중심의 인재를 등용하는 등 신라에 대비되는 국가체제를 정비해 놓은 태봉의 제도가 그대로 고려의 정치조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궁예의 몰락 뒤 왕건가의 신하인 고려의 사관들은 궁예의 이런 긍정성은 남김없이 삭제하고, 왕건을 빛내기 위해 궁예에 대해 최대한 부정적 기술로 일관했다. 고려 왕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역사의 분칠인 것이다.
필자가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궁예의 몰락 원인이었다. 적의 기록이라 할 “삼국사기”에서조차 궁예를 ‘사졸들과 함께 즐거움과 괴로움을 같이하고, 직책을 주고 빼앗음에도 공(公)으로 하고 사(私)로 하지 않았다. 이로써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떠받들어 장군으로 삼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기·강원·충청 일대 실력자들의 대부분을 정복하거나 귀순시켜 한반도의 3분의 2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두었던 궁예. 그는 과연 왜 몰락한 것일까? 정사에서 말하듯 말기에 들어 그가 변태적 성격파탄을 일으켜 포악하고 잔학한 정치를 일삼았기 때문인가? 그러나 허스트3세를 포함, 최근의 역사 연구가들은 이러한 정형화된 해석에 반대해 당시의 주변 정황을 종횡으로 엮어 가면서 객관적인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필자는 이들 연구물들을 토대로 궁예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필자는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왕건의 쿠데타로 인해 실각, 철원 주변 산기슭에 허망하게 앉아 있는 궁예를 만났다.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왕공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이미 끝났다”고 한탄한 뒤 변복을 하고 왕궁을 탈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다. 궁예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싶었다. 그에 대해 부정적 기술로 일관했던 “삼국사기”에서도 ‘절의 규칙이나 율법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고 담기가 있었다’고 묘사했을 만큼 그의 풍모는 기운은 빠져 있었으나 여전히 한 시대를 호령했던 기백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산기슭에 정좌해 앉아 있던 궁예왕은 필자를 보자 언뜻 놀라는 기색을 보이는 듯했으나 금세 몸을 필자쪽으로 돌리고 성한 한쪽 눈을 부릅뜨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저는 후세의 사관이올시다. 우리 역사가 패자에게 그러하듯, 궁예왕에 대해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내용만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아 후세의 귀감이 될 대왕의 증언을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허, 전생이 후생의 인연이 되어 환생하는 것은 보았어도, 후세인이 찾아오는 것은 처음 보는구려. 그래, 천운이 다한 이 몸에게 물어볼 말이 무엇이오?”
― 왕건의 역모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까?
“했지요. 당연히 하고 말고요. 송악의 세력가 왕륭이 자신의 군사와 재산을 내게 주며 대신 그의 장남 왕건에게 송악성을 맡겨달라고 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음을 알았지요. 그때 왕건의 나이 갓 스물이었어요. 이른 나이였지만 성주를 하고도 남을 인물이었소. 왕륭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송악성주로 임명은 하지 않았지만 철원태수를 맡겼지요. 왕공이 탁월한 군사능력을 보여 삼한 각지로 영토를 넓혔소만 곳곳에 자기 세력을 키워놓는다 하여 경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소. 특히 내가 철원으로 환도한 뒤에는 해상활동이 미흡하다거나 새롭게 귀순한 청주 지역 사람들만 중용한다며 왕건 세력의 불만이 많았소. 내가 철원에 다시 도읍을 정한 것은 강성하던 후백제와의 싸움을 미루고 이미 쇠락한 신라를 먼저 쳐 삼한 통일이 기틀을 다지고자 하는 뜻이었소. 그러나 저들은 이런 원대한 뜻은 모르고 자신들의 세력만 키우려 하고 있었으니 참 답답한 노릇이었소.

삼국사기도 인정한 궁예의 진면목

4년 전에 왕건에게 반역의 기운이 있다는 내봉성(司正기능을 맡은 부서)의 보고도 있었고, 느낌도 심상치 않아 반역모의죄를 물은 적이 있지 않았소. 그때 왕건이 수긍하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 듯싶어 상을 주고 무마하려 하였소. 공이 그토록 많은 왕건을 형에 처하기도 그렇고, 송악 부근 세력도 만만찮아 놓아 주었던 것이 오늘의 화를 불렀던 것 같소.”
사실 왕건의 쿠데타는 오래 전부터 준비돼 왔다고 볼 수 있다. 쿠데타 당시 41세였던 왕건은 이미 10여년 전인 30세 때 금탑에 올라가 왕이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건은 내직보다 전쟁터를 돌며 군부를 장악해 가고 있었고, 궁궐에도 신라 6두품 계열이 주류를 이룬 실무관료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심어 놓고 있었다. 이들 전문관료들은 궁예가 초기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던 시기의 창업공신들인 하층민·승려·무인세력들과 이미 상당한 대립관계에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쿠데타가 일어난 918년 왕건 세력은 ‘궁예의 시대는 가고, 왕건이 천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참언이 새겨진 거울을 당나라 사신인 왕창근이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를 교묘하게 저잣거리에 퍼뜨리고 있었다. 이는 고대부터 있었던 천명설을 이용, 민심을 교묘히 움직이는 왕건 계열 세력의 교묘한 선무공작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듯 문무 양쪽에 걸친 세력확장과 인민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작까지 포함된 왕건의 모반은 ‘준비된 쿠데타’였다. 이에 대한 견제와 공세가 거듭된 끝에 궁예는 실각하고 만 것이다.

에필로그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궁예의 몰락에 대해 그의 잔학한 성격과 미신적 행동으로 일체의 지지세력을 잃고 자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왕건 즉위 이후에도 반란 사건은 네차례 이상이나 기록돼 있다. 왕건의 즉위 5일만에 환선길이 모반을 꾀하다 실패하고 참수됐다. 14일째 되는 날에는 이흔암이 반란을 꾀하다 주위의 신고로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졌고 이어 동년 9월과 10월에는 청주인에 의한 모반사건이 연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주(강릉)의 실력자 왕순식 역시 왕건에게 복종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이 와중에 공주·운주 등 10여개 주·현이 자발적으로 후백제에 투항한 사실은 왕건의 거사가 정사가 기록한 것처럼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 속에 이뤄진 천명에 따른 혁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정사의 기록을 다시금 의심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사가들은 왕께서 장남을 청광보살(淸光菩薩), 차남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칭하시고 스스로 미륵불(彌勒佛)로 자처하신 것에 대해 ‘과대망상’으로까지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나는 사바세계로 내려올 때부터 내가 미륵이라 생각했습니다. 미륵이 무엇입니까? 말법시대, 불교의 교리와 부처의 설법으로도 세상이 고쳐지지 않을 때 나타나 중생을 구제해 주는 존재 아닙니까? 신라왕실은 부패할대로 부패했고, 지방관은 공적 도둑이요, 비적들은 날도둑인 이 험한 세상이 말법시대가 아니고 무엇이오. 나는 10여년간 불가의 계율을 닦아왔고, 20년을 백성을 구제하는 데 바쳤소. 왕법과 불법을 통합해 불국토국가(佛國土國家)를 세우는 것이 내 필생의 과업이었소. 신라의 진흥왕 역시 장자를 동륜(銅輪), 차자를 철륜(鐵輪)이라 칭하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불법과 왕법을 일치시키려 하지 않았소?”

― 대왕께서 악명을 얻으신 이유 중 하나로 석총이란 중이 왕께서 쓰신 경전을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쇠몽둥이로 쳐죽인 사건도 있습니다. 저술했다는 경전을 비난하였다 하여 죽인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까?
“석총은 죽어 마땅했습니다.”
궁예는 몰락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에서만은 정말 화가 난 듯했다.

알고도 당한 궁예

“석총은 내가 10여년간 수도생활하며 정진한 공부와 20년간 미륵세상을 이루노라 속세에서 분투한 경험을 살려 저술해 놓은 20권의 저작을 ‘사악하고 괴상스런 이야기’(邪說怪談)라며 한마디로 비난하고 무시하였소. 일개 중이 저작한 단 한권의 책이라도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오. 게다가 석총이란 자가 가사 한벌과 189자의 간자(簡字)를 왕건에게 바쳤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도 들어왔소. 이는 ‘부처의 뜻이 왕건에게 있고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왕건에게 맡긴다’는 정치적 신탁을 왕건에게 주었다는 이야기인 것이오. 반역이고, 왕에 대한 거역의 뜻을 번연히 눈앞에서 행한 놈을 쳐죽이지 않고 어찌하겠소!”
석총에 대한 타살건은 흔히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칭한 과대망상증에서 빚어낸 살해사건으로 이해되지만, 그 배경에는 이렇듯 복잡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가 깔려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미륵불교 내의 두갈래 세력, 즉 석총이 속한 진표계와 궁예가 계승한 태현계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도 가졌던 불교계 중 진표계가 이미 왕건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다.

― 철원으로 옮기면서 왕궁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조영했다는 후세의 비판도 있습니다.
“사관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소. 철원의 성곽은 기껏해야 둘레 1만4,421척의 외성과 둘레 1,905척의 내성으로 이뤄진 토성이오.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사치요? 더구나 나는 여색이라곤 밝힌 적이 없소. 여색을 밝히느라 궁궐을 크게 짓지 또 무슨 이유로 궁을 크게 짓겠소. 다만 철원이 척박한 땅이고, 물길이 없어 운송에 백성들의 노고가 가중된 것은 마음에 걸렸소.”

― 대왕께서 국호를 후고구려→마진→태봉으로 세차례에 걸쳐 바꾼 이유는 무엇인지요? 후대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대왕의 통치능력 부족이나 개인적인 성품이 변덕스럽기 때문이라고까지 해석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 고구려 계승 의식을 버리고 ‘궁예의 명예’를 내세운 영웅주의의 발로라며 비난하기도 합니다만.
“내가 나라를 일으킬 당시만 해도 지역마다 근거를 둔 세력들이 활개치고 있었소. 후고구려를 건국할 때 각 지역의 세력가들이 항복하거나 귀순해온 것은 새롭게 나라를 일으켜 제민보국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어요. 언제 발톱을 다시 들이밀지 모를 때였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야 어느 세월에 미륵세상을 이루겠습니까?
이런 무리들을 이끌고는 국권을 강화해 인민을 지키고 양육시키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처음 후고구려라 했던 것은 내가 근거를 두었던 지역이 고구려 고토였음을 염두에 두어 그들의 반발을 최소한 줄이려 했던 것이었소. 그러나 왕권을 강화할 힘이 뒷받침될 때마다 나라 이름에 더욱 큰 의미를 두어 국권을 강화하고자 했소. 마진(摩震)이란 국호는 대동방국(大東方國)이라는 의미를 지녀 후고구려보다 더 큰 뜻을 지녔지요. 하지만 나는 조화로운 이상적인 낙원이란 뜻을 지닌 태봉(泰封)이 국명으로는 가장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조화로운 미륵세상 꿈꾼 이상주의자

― 지방에 할거한 세력이 아직 통합되지 않을 뿐더러 중앙에서도 청주계열 대 비청주계열, 거기에다 6두품 출신인 전문관료 세력 대 비천한 초기참여 세력간의 대립이 치열했던 상황이었음을 보지 않고, 더구나 강력한 친위기반 없이 너무 국권과 왕권만 강화하려 했던 것이 너무 성급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꼴이 되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내 대에 미륵세상을 이뤄야 한다는 조급증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 같소.”
나이 30에 세상에 나와 60을 바라보는 지금, 다시금 홀홀단신이 되어 산기슭을 헤매야 한다. 살육이 남무했던 세월, 내외로 권력투쟁 속에서 살아오다 회복할 길 없는 패배를 당하고 세상의 끝으로 가는 그의 심정은 어떨까?

“아무 미련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쫓기며 살았소. 구중궁궐에 있었다면 보기 힘들었을 하층 인민의 생활을 보면서 어서 누구 하나 고통없는 미륵 세상을 이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았소. 그 집념이 무리라면 무리였겠소. 힘이 있어야 저 사악한 무리들을 일소하고 미륵세상을 이룰 수 있었소. 사리사욕에 빠진 무리들 권력을 손에 넣기에 혈안이 되는 것은 내 처도, 자식들도 마찬가지였소. 처 강비와 두 자식까지 반역의 무리들과 함께 했었으니…(간통죄 혐의로 처형당한 강비는 사실 유력 호족이었던 친정쪽의 반역 모의에 연루돼 있었다고 한다).
그저 부덕의 소치이지 않겠소. 단지 내 출생의 원한을 이기지 못해 무고한 신라 백성까지 목베게 했던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소.”

이 말을 끝으로 궁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수인사를 나누고는 산속으로 사라져갔다.
“삼국사기”에는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부양(강원도 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하고, “고려사”에서는 산골로 들어간 이틀뒤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 부양의 백성에게 들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보리 이삭을 훔쳐 먹으며 누차하게 목숨 부지에 연연할 궁예는 아니었다. 패자를 철저하게 죽이는 역사의 잔인함이 마지막까지 누추하게 보이도록 기록한 것은 아닐까? 궁예는 산속으로 사라져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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