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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8
 관리자  08-22 | VIEW : 2,507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8  
    
  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전륜성왕 자처한 진흥왕 직계들
  
   신라는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흥왕 15년(528)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 같은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일단 불교를 공식 수용하게 되자, 마치 백지에 물들듯이 불교가 모든 신라 사람에게 삽시간에 전파돼 나갔다.
이는 신라가 이때까지 어떤 외래문화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고립된 지역으로 문화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최초로 불교로부터 외래문화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漢) 사군(四郡) 설치(서기전 108년) 이후 이미 유교문화의 충격을 받았던 고구려나 백제 지역이 불교가 들어와도 한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신라에서 열띤 호응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벌써 불교 이념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은 다음 정복전쟁을 감행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욕을 보이기 시작한다. 불교를 공인한 지 4년 뒤인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를 굴복시켜 합병해 들인 것이 그 첫 사업이었다. 중국과 직접 교역을 트기 위해서는 좋은 항구와 물길에 익숙한 해양세력이 필요한데, 낙동강 하구를 차지하여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금관가야가 합병의 첫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로 7세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眞興王, 534∼576년)은 스스로 혈통이 석가족(釋迦族)과 같은 ‘크샤트리아(刹帝利) 종(種)’이라고 굳게 믿고 자신이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 분쟁으로 편할 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백제를 돕는 척하면서 끼어들어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엄청나게 빼앗아 들인다. 한강 유역 거의 전 지역을 차지하고 북쪽으로는 개마고원 이남의 함경남도 일대까지 수중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관가야 이외에 나머지 5가야도 모두 정복하여 자국 영토로 삼았다. 이에 진흥왕 22년(561) 경의 신라 영토는 경상남·북도와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와 함경남도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가 되었다.
이때 진흥왕은 불과 29세밖에 안 된 청년왕이었으니 이런 긴 국경선을 순행(巡幸)하면서 스스로 전륜성왕이란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들 이름도 동륜(銅輪)이나 금륜(金輪)으로 지어 자신의 뒤를 이을 임금들이 모두 전륜성왕으로 태어난 것을 천하에 공표한다. 진흥왕의 혈손들이 모두 진(眞)자 왕호를 계승하면서 진골(眞骨)을 자처(自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자부심은 결국 그의 증손자인 태종무열왕(604∼661년)대에 이르러 백제를 멸망시키고(660년), 그의 고손자인 문무왕(626∼681년)대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멸망시켜(668년) 끝내 삼국을 통일하는 결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삼국통일이 자력(自力)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힘을 빌린 것이었으므로, 통일 이후에 당의 영토 야욕에 부딪혀 신라 자체가 멸망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러니 당군 격퇴가 눈앞의 현안이 되었던 문무왕으로서는 삼국을 통일했다 하더라도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천하를 호령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재위기간(661∼681년) 내내 죽을 힘을 다해 겨우 당군을 한반도 밖으로 내모는 일에 성공하였을 뿐이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신문왕(645∼692년) 역시 통일전쟁 시기에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을 휘어잡는 일에 진을 빼다가 재위(681∼691년) 11년 만에 돌아가는 바람에 전륜성왕으로 군림할 겨를이 없었다.
  
  전륜성왕릉 모방한 성덕왕릉

  
   그러나 신문왕의 둘째 왕자로 태어나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난 성덕왕(聖德王, 690년경∼737년)이 등극하여 재위(702∼737년) 3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신라의 국운을 절정에 올려놓자, 비로소 신라왕은 전륜성왕을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성덕왕 30년(731) 4월에 일본이 병선(兵船) 300척으로 신라의 동해안을 침략하다가 일거에 격파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고, 성덕왕 32년(733) 7월에는 당이 발해의 침공을 받자 신라에 배후에서 발해를 공략해 달라는 군사지원 요청까지 하게 되었으니, 신라의 국세는 그 당시 천하무적임을 자랑할 만큼 강성함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이에 성덕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하여 성덕왕 34년(735) 2월에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국서(國書)에 왕성국(王城國)이라 자칭한다. 왕 중 왕인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였다. 일본이 이런 국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항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해 1월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김의충(金義忠)이 당 현종으로부터 패수(浿水;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와 백제 옛땅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공식으로 인정받고 돌아온다.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지 67년 만에 이루어낸 외교적인 성과였다.
이렇게 되자 성덕왕은 명실상부한 전륜성왕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덕왕은 전륜성왕의 자리를 겨우 2년밖에 누리지 못하고 성덕왕 36년(737) 2월에 48세쯤 장년의 나이로 돌아가고 만다.
이후 성덕왕의 셋째 왕자로 보위에 오른 효성왕(721년경∼742년)이 짧은 기간(737∼742년) 재위하고 단명하자, 그 동생인 경덕왕(725년경∼765년)이 뒤를 이어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절대군주로 군림하게 된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문화의 절정기인 불국시대 문화를 난만한 지경으로 끌어올려 놓는 일을 감행한다.
경덕왕은 자신이 전륜성왕이 되려면 우선 부왕인 성덕왕과 조부왕인 신문왕을 전륜성왕으로 추존하여 그에 알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성덕왕의 능을 전륜성왕의 능제에 맞게 개수하였다. 전륜성왕의 능이라면 곧 부처님의 능인 스투파(Stupa, 塔婆)와 같은 것이라야 한다.
이에 경덕왕은 그 13년(754)에 <성덕왕릉>을 인도의 <산치탑> 모양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전륜성왕의 능답게 애초 둘러놓은 봉분 주변에 판석(板石)으로 된 호석(護石)을 세워 난간을 더 두르고, 난간과 봉분 사이에 박석(薄石)으로 지면석(地面石)을 깔아 회랑(廻廊) 형태의 요도(褥)를 만들어 <산치탑의 난간과 요도>를 방불케 한 것이다.
그리고 호석 외부 받침 기둥 사이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입체조각으로 조성하여 왕릉을 12방향에서 호위하게 하였다.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은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무장 모양으로 만들었다. 현존한 이 십이지신상들은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그 원형을 잃었다. 오직 신신상(申神像), 즉 원숭이 신상과 <유신상(酉神像)>, 즉 정서(正西) 방향을 맡은 닭신의 형상만 머리 부분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다른 십이지신상의 모양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능의 정남쪽 난간 앞에는 상석(床石)이 놓여 있고 상석 앞에는 <문인석> 한 쌍과 무인석(武人石) 한 쌍이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오직 <문인석> 하나만 온전하다. 왕릉 후면과 전면은 각각 한 쌍씩 모두 4마리의 <석사자(石獅子)>가 지키고 있다. 석사자는 인도 스투파에서 연유한 것이고, 문인석은 당의 황제릉에서 영향을 받은 의제(儀制)일 것이다.
왕릉에서 남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성덕대왕릉비를 지고 있던 <성덕대왕릉비귀부(聖德大王陵碑龜趺)>가 이수(首)와 비신(碑身)을 잃은 채 남아 있는데, 그조차 목이 달아나고 신체 일부가 파손된 형편이다.
조각기법은 <태종무열왕릉비>와 비교하면, <삼화령미륵삼존상>과 <석굴암불보살상>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 <성덕대왕릉비귀부>가 <태종무열왕릉비>에 비해 더욱 풍만하고 비대해졌지만 그에 반비례해 기운 찬 생동감은 많이 감소하였다. 살집이 너무 좋아서 둔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당(盛唐)시대(713∼765년) 중국 문화권 전체를 휩쓸던 미술양식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서예(書藝) 분야에서조차 안진경(顔眞卿, 708∼784년)체와 같이 비후장중(肥厚莊重; 살이 쪄서 두툼하고 큼직하며 무거움)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초당시대(618∼712년)의 구양순(歐陽詢, 557∼641년)체와 저수량(遂良, 596∼658년)체가 힘차고 바르며 굳세고 날렵한 특징을 보이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바로 이런 대조적인 현상이 그대로 비석 양식에도 반영되었으니 <태종무열왕릉비>의 조각기법과 <성덕대왕릉비귀부>의 조각기법이 이와 상응하는 차이를 보여준다.

   김유신묘의 비밀
  
  ‘삼국사기’ 권9 성덕왕본기 13년(754) 5월조에 “성덕왕비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성덕왕릉을 산치탑 모양의 스투파 형태로 개수하여 전륜성왕릉 형태를 갖춘 것은 경덕왕 13년경이었을 것이다. 불국사 창건이 경덕왕 10년(751)부터라 하였으니 성덕왕의 추복사찰 건립도 이와 때를 같이한 것이라 해야 하겠다.
경덕왕은 내친 김에 조부왕인 신문왕릉도 스투파 형태로 호석과 난간을 둘러 전륜성왕의 능제에 충실하도록 하였으니, 황복사지의 십이지신상 조각 판석이 그 유물이라 한다. 이 사실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 교수가 ‘통일신라 십이지신상의 양식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그 내용은 제15회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강교수는 이 신문왕릉 십이지신상 호석이야말로 십이지신상 호석 양식의 완성된 형태라고 극찬하고 있다.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인 이 십이지신상은 갑옷이 아닌 도포를 입고 있어 문사차림인데 모두 병장기를 들고 있어, 문사들이 각 방위를 맡아 왕릉을 호위하는 듯하다. 혹시 무장(武將)들이 평복 차림으로 왕릉을 수호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도포차림이 갑옷차림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성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이 갑옷차림으로 무장의 모습을 보인 것은, 십이지신이 방위신(方位神)이니 사천왕[四天王;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라는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그 주변을 7산 8바다가 둘러 있으며 우리가 사는 남섬부주는 수미산 남쪽의 8해 속에 섬처럼 고립돼 있다고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살며 수미산 사방 하늘을 각기 한쪽씩 맡아 다스리니 동방천왕은 지국천(持國天)이고 서방천왕은 광목천(廣目天)이며 남방천왕은 증장천(增長天)이고 북방천왕은 다문천(多聞天)이다]의 권속이어야 하므로 사천왕과 같은 무장 차림을 해야 한다는 불교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현상이었을 듯하다. 전륜성왕의 스투파 건립이라는 의례 감각으로 성덕왕릉을 개수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십이지신상이 한결같이 문사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신문왕릉에서는 갑옷을 도포로 바꾸면서 호석을 이루는 판석 위에 이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 방법을 택하였을 것이다. 신문왕릉은 아예 호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덕왕릉은 이미 호석이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십이지신상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호석 앞에 덧장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미 강우방 교수가 밝혀놓은 대로다.
그런데 이런 도포차림의 십이지신상이 한결 세련되게 정리되어 양식 진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 <전 김유신묘>이다. 그렇다면 이런 호석과 난간이 둘린 왕릉제도가 전륜성왕의 스투파에만 해당하리라는 학설과, ‘삼국사기’ 권9 경덕왕 24년(765) 6월조에 경덕왕이 돌아가자 모지사(毛祗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을 연계시켜 볼 때 현재 김유신묘라고 전해지는 완벽한 스투파식 왕릉이 경덕왕의 능일 수도 있다는 주장에 미술사적 당위성(當爲性)을 완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제35 경덕왕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처음에는 경지사(頃只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돌을 다듬어 능을 삼았다. 뒤에 양장곡(楊長谷, 성덕왕릉이 있는 곳)으로 이장하였다.”

경지사는 모지사의 오자(誤字)라고 보아야 한다. 돌을 다듬어 능을 삼았다는 기록이 경덕왕릉에만 나오니 산치대탑과 같은 인도식 석탑 형태의 스투파형 능묘 의제를 처음부터 왕릉에 시공한 것은 경덕왕릉부터라고 보는 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동남산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
  
  칠불암(七佛庵)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高位山: 490m) 상봉 동쪽 기슭에 있다. 고위산 상봉에는 원래 봉수대가 있어 이 골짜기를 봉화골로 불러 왔는데, 행정구역은 경주시 남산동에 속한다. 동남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터진 골짜기라서 계곡이 깊고 으슥한데 그 막바지에 이 절이 있다. 절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에 이곳에 암자를 새로 짓고 나서부터다.
이곳에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바위가 있어 칠불암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이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새겨지던 신라시대에 절 이름을 무엇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사□사(四□寺)라는 명문이 있었다 하니 혹시 사불사(四佛寺)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삼국유사’ 권3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조에서 문경 사불산 대승사 얘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령 동쪽 100여리에(사실 사불산 대승사의 위치는 조령 동남쪽이고 죽령 서남쪽이니 죽령은 조령의 오자인 듯함) 산이 있어 높은 언덕으로 우뚝 솟아났는데 진평왕 9년(587) 갑신(진평왕 9년은 갑신년이 아니고 정미년이다. 갑신년은 진평왕 46년으로 서기 624년에 해당한다. 착오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평왕 46년으로 바로잡아야 할 듯하다)에 갑자기 큰 바위 하나가 그 위에 나타났다.
사면이 한 길쯤 되고 네모 반듯한데 사면에 사방여래를 새겼다. 모든 면을 붉은 비단으로 가린 채 하늘에서 그 산 정상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우러러 뵌 다음 드디어 바위 곁에 절을 새로 짓고 대승사(大乘寺)라 이름하였다.
‘묘법연화경’을 외는 사람인 비구 망명(亡名)을 청해다가 절을 맡기고 청소하며 바윗돌을 공양하게 하여 향불이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름지어 부르기를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했다. 비구가 죽어서 장사지내고 나니 그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동륜(銅輪)태자의 장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왕과 같은 이름인 정반왕이란 이름을 받아 전륜성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진평왕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조부왕인 진흥왕이 확장해놓은 방대한 국토를 지키느라 힘겨워하던 당시에 사방불의 가피력(加被力; 보살핌을 더해주는 힘)으로 천하 사방을 무난히 평정하여 정법으로 다스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이런 사방불을 조성했던 듯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은 종교적인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계책이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재위 702∼737년) 말년경이나 경덕왕(재위 742∼765년) 초년경에 이와 같은 사방불을 경주의 안산(案山)인 남산 동쪽 상봉에 조성하여 천하 사방의 평정을 기원하는 일을 되풀이하였으니, 보물 200호인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바로 그것이다.
진평왕 때 문경 사불산 대승사에 사방불을 조성한 것은 고(古) 신라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던 이곳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그렇다면 이제 성덕왕이나 경덕왕이 경주의 안산인 남산 상봉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듯 사방불을 조성해냈다는 것은, 이미 사방을 평정하여 명실상부한 사주(四洲)의 주인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표방하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니 이 사방불의 조성은 당 현종이 성덕왕에게 패수 이남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덕왕 34년(735) 2월 이후에 진행된 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영유권 인정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했을 수도 있다.

  칠불암 마애삼존상의 조각 양식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이 사방불이 보여주는 조각양식이 이 시대의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사방불과 함께 조성되었을 뒷벽의 석가여래 마애삼존상 조각양식은 성덕왕 18년(719)에 조성된 것이 분명한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양식을 바로 뒤잇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우선 불상에서 비교해보면 두 불상이 비록 앉고 선 차이가 있고 통견과 편단우견의 옷 입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육계의 크기와 형태가 넓고 나지막한 것이 비슷하고 네모 반듯한 얼굴에 미소 띤 근엄한 표정이 서로 형제인 듯 닮았으며 부풀려 올린 옷주름 표현법이 거의 한솜씨인 듯 닮았다. 다만 <칠불암 마애삼존상>의 주불이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에 비해 조금 거칠고 굳은 느낌이 있어서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의식하며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항마촉지인을 지은 손의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하며 나발 표현을 생략한 두발에서 육계에 상투끈을 나타낸 듯한 것도 자못 어색하다.
이런 차이는 협시보살입상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비교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두 보살입상의 형식적 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니 화려한 보관을 쓴 것이나, 천의를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왼쪽 어깨로 넘겨 입은 것, 치마말을 허리에서 뒤집어 내리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맨 것, 치마가 양쪽 다리를 따라 내려오며 반타원형 호(弧)를 거듭 쌓아내리듯 서로 다른 옷주름을 만들어내는 것, 천의 자락이 두 팔뚝을 휘감아 내리는 것 등이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보관에서도, 구슬꿰미로 만든 목걸이에서도, 천의나 치마의 옷주름에서도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협시보살입상 쪽이 거칠고 투박하다. 두 팔뚝을 타고 내린 천의 자락 표현을 비교해보면 두 보살입상의 기법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천의 자락은 산들바람이 흔들어놓은 듯 나부끼며 물결쳐 내려오는데, <칠불암 마애삼존불 협시보살입상>은 둘 다 뻣뻣한 철사줄이 아래로 뻗어내린 듯 수직으로 내리 그어지고 있다.
이런 양식적인 차이 때문에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의 조성시기를 성덕왕 말년이나 경덕왕 초년으로 추정하게 되는데, 이 두 임금이 당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방불의 우리식 표현
  
  사방불의 성격은 백제의 <예산사면석불> 이래 이 땅에 정착한 대로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석가불, 북방 미륵불일 것인데 동향한 동방불이 실제로 약호를 들고 있어 약사불임을 과시한다.
이미 제9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사방불의 성격을 우리식으로 도출해내는가 하는 것을 구명하고 나왔다. 동진(東晉)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가 번역한 ‘불설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佛說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 즉 ‘관정경(灌頂經)’ 권12(317∼322년 번역)에서 동방약사유리광여래를 도출해내고, 구마라습(鳩滅什)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402년 번역)에서 서방 아미타를 이끌어낸 다음, 석가불은 남방 인도에서 출현했으므로 남방에 위치시키고, 미륵의 하생은 백제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북방에 배치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사방불도 이 성격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에서도 대판(大阪)의 사천왕사(四天王寺, 593년 건립)와 내량(奈良)의 원흥사(元興寺, 593년 건립)의 5중탑 안에 모셔진 사방불이 동방 약사, 서방 미타, 남방 석가, 북방 미륵으로 되어 있고 내량 흥복사(興福寺) 5중탑(730년 건립) 안의 사방불 역시 이와 같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백제의 장인이 만든 것이었다.
사방불은 모두 활짝 핀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형태인데, 동방 약사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에 약호를 들고 있는 손짓을 보임으로써 나머지 3방불도 모두 이와 같은 손짓을 짓고 있다. 다만 약호를 들지 않았으므로 왼손의 수인(手印)은 마치 항마인과 같이 되었다. 즉 시무외항마인이 된 것이다.
이는 전륜성왕이 사방의 마왕에게서 항복받고 그곳 백성들에게 정법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손짓으로 보아야 하니, 전륜성왕임을 자처하기 위해 조성해낸 사방불의 손짓 표현으로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불이 뜻밖에 편단우견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흔히 보지 못하던 상 형식이다.
삼국시대 이래 포복식 불의 양식을 선호하여 그로 말미암아 <예산사면석불>, <태안마애삼존불>, <연가7년명 불입상>, <서산마애삼존불> 등이 한결같이 포복식 불의 계통의 통견불의 양식이었다. 신라에 와서도 <삼화령미륵불삼존상>, <배리미륵불삼존상>,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 <군위석굴아미타삼존상> 등이 모두 포복식 불의로 통견 양식을 보여왔다.
그런데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전반부터 수나라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아 편단우견의 불입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나라에서는 이미 개황 4년(584)이라는 기년명이 있는 <개황4년명 아미타오존상>은 주불에서부터 반단(半袒)형식을 청산한 순수한 편단우견 형식을 보이고 있다. 경쟁적으로 수나라 문화를 수용해 들이고 있던 삼국에서도 곧바로 이를 모방함으로써 7세기 전기부터 일각에서는 이런 편단우견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백제지역에서 만들어낸 편단우견상으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읍신천리석불병립상(井邑新川里石佛立像)>이고,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편단우견금동불입상>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편단우견이라는 관습에 생소했던 우리는 이런 형식의 불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신라 통일기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초당(初唐)시대에 유행하던 굽타불상의 통견불의 양식을 수용하여 <황복사지삼층석탑출현 금제여래입상>이나 <황복사지삼층석탑출현 금제여래좌상> 및 <감산사지 아미타불입상>과 같은 통견불의 양식 계열의 불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불좌상에서 갑자기 순수한 편단우견 좌상이 만들어졌으니 통일신라 조각사에서 가히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편단우견상 양식을 수용해 들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성덕왕의 빈번한 대당교섭과 유학생 파견(728)과 같은 문화교류의 부산물이었다.
당나라에서는 초당시대에 현장(玄, 602∼664년) 삼장이 인도를 17년(629~645)간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당시 인도에서 만들어지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마왕에게 항복받은 표시로 왼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아 손바닥을 위로 가게 펴 대고, 오른손은 지신을 불러내어 이를 증명하게 한 표시로 오른쪽 무릎 아래로 엎어 대서 손가락들이 땅을 가리키게 한 손짓)의 편단우견상(도판 13) 양식을 새로 들여와 이전의 반단식을 청산하고 순수한 편단우견상을 활발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실물을 장안(長安) 3년(703)에 만든 <보경사전래불삼존좌상(寶慶寺傳來佛三尊坐像)>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 양식이 전래되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불좌상 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은 통일신라 불좌상 양식에 주류가 되어가는데 <석굴암 주불좌상>에서 그 상 형식이 완성된다. 그러니 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존상은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의 효시로 <석굴암 주불좌상> 양식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굴불사(掘佛寺) 사방불(四方佛)
  
  ‘삼국유사’ 권3,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로 나들이를 가다가 산 아래에 이르러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땅을 파보게 하니 큰 바위가 나왔다. 사면에 사방불을 새기게 하고 이로 인해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굴석(掘石)이라 한다.”

잘못 전해져서 굴석이라 한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를 파내 그곳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인 굴불이라는 이름보다는 바위를 파냈다는 의미인 굴석이라는 이름이 더 타당하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보아야 한다. 경덕왕은 동남산 상봉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사방불을 새긴 다음 이제는 땅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사방불을 경주의 진산(鎭山)인 북악(北岳) 금강산(金剛山) 초입에 새겨놓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백률사로 올라가는 계곡 초입에서 땅속에 묻힌 거대한 바위를 찾아낸 다음 거기에다 사방불을 새기게 하였다. 염불소리가 이 바위를 찾아내도록 인도하였다면 이곳에 땅으로부터 솟아난 사방불을 조성하겠다는 경덕왕의 간절한 서원(誓願)이 사무쳐서 그와 같은 기적이 연출되었을 수도 있다.
이 일은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을 조성하고 난 뒤에 이루어진 듯하다. 보물 121호인 <굴불사 사방불>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김리나(金理那)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양식 편년상 <굴불사 사방불>의 조각기법이 <칠불암 마애삼존상>보다 진전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바위는 남쪽으로 터진 계곡의 중앙에 놓여 있는데 정면인 남쪽보다 서쪽면이 더 높고 넓다. 그래서 경덕왕은 <굴불사 사방불>을 조성하면서 서방 아미타불상을 사방불의 중심불로 힘들여 조성했던 듯하다.
이는 <칠불암 사방불>에서 동쪽으로 터진 계곡 상봉에 얹힌 바위의 동쪽 정면이 가장 넓었기 때문에 그곳에 동방 약사를 조성하면서 이를 중심불로 삼았던 것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구성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이 <굴불사 사방불>은 서쪽 면에 새긴 서방 아미타삼존불이 중심을 이루는데 주불인 아미타불입상은 높이가 351cm에 이르고, 관세음보살입상은 292cm, 대세지보살입상은 249cm나 된다. 아미타불입상은 바위에 붙여 몸통을 입체상에 가깝게 조각한 다음 얼굴만 따로 만들어서 목 위에 붙이는 기법을 사용하여 사방불의 주체로 삼았으며,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주불의 크기에 알맞은 비례로 딴 돌을 다듬어 완전 입체상을 만들어다 주불 좌우에 기대 세워놓았다.
선도산 상봉의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과 같이 좌우 협시보살을 따로 만들어다 주불 양쪽 곁에 기대 세워놓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미타불입상의 의복 표현도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의 주불 의복 표현과 비슷하여 포복식 불의에 옷주름이 정면에서 통째로 물결쳐 내려온 듯 표현되어 있다.
이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에서는 허벅지에서부터 옷주름이 양분되어 내려오는 신양식을 보이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선도산 아미타삼존대불>의 주불에서 보인 옛 법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모본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시대양식을 외면하지 못해 겉옷의 옷깃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려 앞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 치마를 맨 허리띠 표현까지 노출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초당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 겉옷을 두 벌 겹쳐 입는 법)에 의해 속가사는 통견법으로 입고 겉가사는 편단우견법으로 입어 속가사 자락이 오른쪽 소매처럼 보이도록 표현하였다.
이것은 동남산 <칠불암 사방불>에서부터 그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당풍(唐風)의 새로운 의복표현법으로, 당나라에서는 <정관13년(639)명 불좌상>(제13회 도판 12)에서부터 그런 형식이 확인되고 성당시대(713∼765)에 널리 유행하던 의복표현법이다.
인계(印契), 즉 손짓도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의 주불 손짓을 의식한 듯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손이 같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왼손마저 허리 근처까지 올려 마치 무슨 지물(持物)이라도 받쳐든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빈손이다. 소원하는 대로 모두 주겠다는 의미의 손짓인 여원인(與願印)을 실감나게 표현한 자세라고 보아야 하겠으나 아무래도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의 주불이 어깨 높이로 왼손을 들어 옷자락을 잡은 모양을 염두에 둔 듯한 표현이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은 보관에 화불 표현이 분명하여 관세음보살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좌협시보살입상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섬세하여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더 많이 참조한 듯하다.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은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들었는데 몸은 약간 뒤틀어 선정성(煽情性)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석굴암 조각으로 이어지기 직전에 보이는 난만성의 표출이다.
대세지보살은 얼굴이 반 이상 파손되어 전모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비교적 단정하게 똑바로 서 있다. 옷주름 표현은 관세음보살입상과 대동소이하여 매우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석굴암 조각과 흡사한 석가삼존입상
  
   그 다음 남쪽 면이 넓어서 이곳에 <석가삼존입상>을 조성하였던 듯하나 현재는 우협시보살상이 흔적 없이 파괴되고 주불의 두상도 떨어져 나간 상태다. 그러나 조각 기법은 사방불 중 가장 우수하여 마치 석굴암 조각을 보는 것과 같으니 석굴암 조성에 참여했던 조각장(彫刻匠)이 이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팽만감이 넘치도록 탄력 있는 육신의 표현과 위엄이 깃들인 넉넉하고 자비로운 표정 등이 석굴암의 주불이나 십일면보살을 비롯한 여러 존상에서 드러나는 양식적 특색과 매우 흡사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덕왕 10년(751)에 창건되기 시작하였다 하니 이 <굴불사 사방불 남면 석가삼존입상>도 이 어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것이 석굴암 조각을 위한 시험 조각일 수도 있다.
석가여래입상은 의복 표현이 마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그것과 같이 굽타식 통견불의에 양다리에서 옷주름이 매미날개처럼 둘로 갈라진 형태다. 그러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의복보다 더 얇게 표현하고 있어 그 세련도가 극에 이르렀음을 과시한다. 연화대좌는 딴 돌로 만들어 밑에서 받치게 하였다.
문수보살이라고 생각되는 좌협시보살입상은 얼굴이 마치 석굴암 본존 좌상 같다. 그런데 하체가 풍만하여 꼭 인도의 마투라시대 야차녀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구슬장식을 더하지 않고 다만 천의(天衣)로만 몸을 감싸서 소박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오히려 이것이 풍만함을 더욱 강조하여 자애로운 모성상을 표출시키는 의외의 효과를 냈다.
공간의 협소성 때문에 주불과 협시보살의 크기를 거의 같게 조성하였던 듯 파손된 주불의 현재 높이는 136cm이고 문수보살입상 높이는 145cm에 이르러 오히려 협시보살상이 주불보다 더 큰, 역조현상을 보이고 있다.
<굴불사 사방불>의 동면에는 역시 약사불이 표현되었다. 높이 206cm의 <약사불좌상>인데, 석벽 면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파고들며 갈라져 나간 형태여서 사람이 그 아래로 들어가 작업할 공간이 없어 그랬는지 몸체는 얕은 돋을새김과 줄무늬로 대충 처리하고 얼굴만 입체감이 날 만큼 두드러지게 새겨놓았다. 광배 역시 선각(線刻)으로 처리하였고, 약호도 주변을 파내는 방법으로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북벽도 역시 석벽 면이 고르지 않아 두 면으로 나뉠 수밖에 없자 북면 동쪽에는 <미륵보살상>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기고, 북면 서쪽에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도판 19)을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다. 이것이 혹시 백률사에 모셔져 있었다는 대비상(大悲像)을 본떠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삼국유사’ 권4 백률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계림(鷄林, 경주)의 북악(北岳)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는 대비상(大悲像; 관세음보살상) 하나가 있는데 처음 만들어진 때를 알지 못하나 신령스럽기로 소문 나 있었다.”

그리고 이 대비상이 효소왕 2년(693)에 동해 북변 금강산 일대로 놀러 나갔다가 북적(北狄; 말갈족)에게 포로가 되었던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郞)과 그의 낭도인 안상랑(安常郞)을 구해 돌아온 사실을 장황하게 얘기하고 있다. 신라의 신기(神器)인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거문고(玄琴)를 가지고 가서 만파식적을 쪼개 두 화랑이 타게 하고 관세음보살은 거문고를 타고 하늘을 날아 백률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떻든 효소왕 시대(692년)에 이미 백률사에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던 모양이니, 경덕왕이 백률사 초입에 사방불을 조성하면서 적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포로로 잡힌 신라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이 대비상을 그대로 옮겨 사방불에 덧붙여 조각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연계(連繫) 과정은 결국 <십일면육비관세음보살입상>도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주불좌상 뒷벽에 새겨지게 하는 촉매 구실을 하였다고도 보게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십일면육비관세음보살입상>은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의 선구적인 시험조각이었다고 하겠다.
<십일면육비관세음보살입상>의 높이는 179cm이고 <미륵보살입상>의 높이는 161cm로 거의 등신대(等身大; 사람의 몸과 같은 크기)에 해당한다. <미륵보살입상>의 조각기법도 남벽의 문수보살입상의 그것과 방불하니, 석굴암 조성 직전인 경덕왕 10년(751)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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