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역사교실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
 관리자  08-22 | VIEW : 7,582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


  부처님 머리는 왜 솟아 있는가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마투라 불상의 출현


    서 기전 2세기는 세계사의 판도가 달라지던 중대한 시기였다. 서방세계에서는 그리스와 로마가 패권을 다툰 끝에 대로마제국이 이루어졌으며, 동방세계에서는 흉노와 한(漢)이 천하를 다투다가 흉노가 한에 밀림으로써 민족 대이동의 단서를 열어놓았다. 그 결과 인도 대륙은 쫓기는 흉노세력에 밀려 내려오는 샤카(塞, aka)족, 월지족 등 북방 유목민족들의 연쇄적인 침략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서북인도 지역은 물론이려니와 중인도의 서북지방까지도 이들 유목민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이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슝가왕조는 이들의 침공에 시달리느라 피폐해져서 상신(相臣) 바수데바(婆須提婆)에게 왕위를 찬탈당한다. 그러나 바수데바가 수립한 칸바왕조(Knba·서기전 72∼서기전 27년)도 반세기 미만에 남인도의 안드라왕조에 멸망되고 만다(서기전 27년).
  안드라왕조는 중인도를 방패로 하여 외침에 시달리지 않고 착실하게 성장해왔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이때부터 중인도 지역은 이민족의 지배와 군웅할거의 단계로 돌입해, 사회분위기는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띠게 된다.
  특히 동·서세계가 각각 대제국으로 안정되면서 상대방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기한 물품을 대량으로 요구함으로써 서북인도가 그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상업적인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 세력이 다시 중인도 지방으로 확산되자 서북인도와 중인도의 교통요로에 위치한 마투라(Mathura-)는 상업도시로 급성장한다.
  그래서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진취적인 사상 경향이 뿌리를 내리니 이것이 대승사상의 정착이었다. 이에 마투라에서도 대승사상을 바탕으로 불전도에서 불타의 모습을 사람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던 오랜 전통을 깨고 불상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인도는 교조(敎祖) 석가모니불의 역사적인 활동 무대로, 불타의 발자취가 생생히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불타의 형상을 표현해내는 데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던 듯, 초기에는 많은 불전도 중에서 전통적인 상징물과 함께 성불(成佛) 이전의 불타, 즉 보살 수행시의 불타부터 인체 표현을 시도했다. 이는 탑문(塔門) 장식의 부조[浮彫;돋을새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는 곧 예배 대상으로 삼을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마투라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진취적인 기상과 상업적인 부가 예배상의 조성을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여기에는 이 지방을 다스리는 절대권자인 태수(太守, mahksatrapa)의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종교정책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간다라 불상과 순인도적 불상

  그러나 불상이 처음 출현하는 1세기 말기에서 2세기 전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불상을 만들어놓고도 그것을 불상이라 표현하지 못했으니, 이는 카트라(Katr)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菩薩銘佛三尊碑像)>의 대좌에 새겨진 브라흐미[brahm 梵字; 고대인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표음문자] 문자의 명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다라키타(Buddharakhita)의 어머니 아모하아시(Amoh-s)는 자신의 절에 보살상을 만들어 모신다. 일체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런데 이 비상(碑像)이 보살상이 아니고 불상이라는 것은, 이보다 조금 뒤에 이와 똑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지면서 불상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은 다른 삼존불비상에서 확인된다. 이 삼존비상은 대체로 마투라가 쿠샨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인 2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거의 동시대에 출현하는 간다라 불상과는 양식적으로 전혀 상이한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이 그리스 조형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이 마투라 불상은 순인도적인 조형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체[肢體;팔다리와 몸통]를 과장되게 표현하여 힘차고 안정감 있는 결가부좌[結跏趺坐;다리를 꼬아 책상다리를 한 앉음새]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조상(造像)의 선례는 이미 서기전 3000년경 순인도적인 인더스문명의 유적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 배꼽이 내비치는 얇은 옷의 표현도 아쇼카왕 시대 이래의 야차신상(夜叉神像)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타의 고향답게 ‘부처님 몸은 항상 젊고 늙지 않는다(佛身常少不老)’는 불신소년신관[佛身少年身觀; 부처님 몸은 소년의 몸이라는 생각]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불상을 소년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654년, 唐 阿地瞿多 번역] 권5에서 “여래(如來)의 형상은 16세 동자(童子)와 같다”는 등 불신소년상(佛身少年相)을 주장하는 경전의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 모양도 성인식을 갓 치르고 난 동자의 머리인 주라(周羅, cda)나계[螺쬇;주변의 머리칼을 깎아버리고 정수리의 머리칼만 모아서 소라껍데기 모양으로 틀어올린 상투]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동안(童顔)으로 탐스럽고 둥글며 싱싱하다.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시원스러워 우람한 체구와 함께 육감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는데, 이는 옷주름이 없다면 나체로 보일 만큼 얇은 의복표현이 가져오는 효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의복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놓도록 대의[大衣;맨 위에 입는 겉옷으로 승가리라 부르는 장방포(長方布)인데 우리는 보통 가사라고 부른다]를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빼내, 왼쪽 어깨 너머로 넘겨 입는 편단우견[偏袒右肩;오른쪽 어깨만 드러냄]의 옷 입는 법으로 표현돼 있다. 손바닥에는 윤보(輪寶) 표시가 분명하고,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가 있어 높은 상투와 함께 역시 경전에서 이야기되는 32상(相)의 기본 요건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간다라불상에 비해 거대한 원광(圓光)을 지고 있으며, 그 뒤로는 보리수라고 생각되는 장식이 있고, 그 위에는 비천(飛天)이 좌우에서 날고 있으며, 불타의 좌우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의 왕이라고 생각되는 협시인물(脇侍人物)이 각각 불자[拂子;먼지떨이]를 들고 시립하였다. 세 마리 사자가 좌대를 받치고 있어 사자좌(獅子座)를 상징한다. 이것이 삼존불상의 시원양식(始原樣式)이라 하겠다.

  양식화의 진행  

    진보적인 대승사상과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중인도 불상을 탄생시킨 마투라는 불상 조성의 성역이었다. 특히 부근 시크리(Sikri)에서 산출되는 적색사암이 불상 조성의 재료로 환영받음으로써, 카니쉬카 대왕의 성세(盛世)를 지나서까지도 마투라에서의 불상 조성은 계속 활기를 띠었다. 가위, 마투라는 불상시대 이후 중인도 불교미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32년명불삼존비상>(도판 2)도 역시 마투라 공방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예배상으로, 마투라 부근 아히차트라(Ahicchatr)의 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한눈에도 앞서 살펴본 카트라 출토의 <‘보살’명불삼존비상>(도판 1)과 동일양식 계열의 삼존비상임을 알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보살’이라는 구차한 명문(銘文)도 들어 있지 않다. ‘32년 겨울 4월8일 비라나(Virana)비구가 부모 일족과 함께 기증한다. 노비구들과 그 여러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비구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라는 간단한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불상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불상으로 알고 만들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명(王名)이 없이 32년이라 한 것은 카니쉬카대왕 이후에는 그 위덕(威德)을 기리기 위해 카니쉬카대왕 기년(紀年)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카니쉬카대왕 이후를 역사에서는 제2쿠샨시대라고도 한다. 이 예배상은 서기 160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카니쉬카대왕의 즉위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있으나 현재 비명학자나 미술사가들이 서기 128년 설에 대체로 동조하고 있다). 카니쉬카대왕 이전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보살’명불삼존비상>과 비교하여 보면 양식적으로도 그만한 시차의 진전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불상에서 소라껍데기와 같이 틀어올린 주라나계의 사실적인 표현이 본뜻을 상실하고 삼층 뿔 모양으로 무의미하게 양식화되었으며, 얼굴 모습도 순진무구한 동안에서 노성한 장년기의 엄숙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힘차게 솟아오른 가슴과 길고 날씬한 허리에 적당히 발달된 근육이 보여주던 이상적인 인체미가, 밋밋하고 힘없는 조각 기법으로 둔화되었으며 지체도 약화되었다. 그래서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이 가지는 건강미나 순진성, 육감적인 매력까지 모두 소멸되고 있다.
  이는 미술사에서 항상 반복되는 양식변천의 과정이기도 하다. 어느 한 양식이 이루어진 다음 그것을 무의미하게 답습 모방할 때 빚어지는 양식화 현상인 것이다. 이런 양식화의 진행 과정에 다른 양식의 영향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하는 것이 또한 예사니, 여기서도 간다라불상의 근엄한 용모가 동안을 노화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사자가 표현돼 있는 좌대 정면에 보리수를 둘러싼 인물상의 표현이 바로 간다라불상의 좌대양식이라는 점은 이 사실에 더욱 신빙성을 부여한다.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는 시무외인[施無畏印;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쳐들어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손짓]을 한 손이 쉽게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꽃모양 화침[花枕;꽃베개] 으로 비체[碑體;비상의 몸통]와 연결시켰는데, <32년명불삼존비상>에서는 손을 직접 비체에 붙여 조각함으로써 불필요한 화침을 제거하였다. 이것은 선의의 양식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를 호위하는 범천과 제석

  협시한 두 인물은 대승사상이 일반화된 후대의 삼존불에서라면 분명히 보살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주존을 ‘보살’이라고 명기하고 있는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는 범천과 제석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26 향보리수품(向菩提樹品) 중(中)이나 같은 경전 권33 범천근청품(梵天勤請品) 하(下)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범왕[梵王;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주재자로 사바세계의 주인]과 제석[帝釋;도리천( 利天)의 주인으로 수미산(須彌山) 위 33천(天) 중 중앙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며 사천왕(四天王)을 거느린다]은 항상 불타의 주변을 감돌면서 보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경전 권31 석여마경품(昔與魔競品) 제34에서는 불타께서 대각을 이루신 후 여러 천인(天人)들이 꽃비를 내리며 달려와 찬탄하였다고 한다. 배경으로 표현된 보리수나무로 보아 이 <32년명불삼존비상>은 대각의 장면을 상정(想定)하여 만들어진 예배상이 분명하므로 협시도 여러 천인의 대표인 범왕과 제석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는 두 협시상이 각각 불자(拂子)를 들고 시립해 있다. 그런데 이 비상에서는 이들의 지물(持物)이 불자가 아니라 왼쪽은 연꽃, 오른쪽은 금강저(金剛杵)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부 미술사가들은 이들을 후세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연화수(蓮花手)보살과 금강수(金剛手)보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과 자세히 비교하면 오른쪽은 불자의 자루가 과장돼 금강저로 양식화되고 왼쪽은 불자의 머리가 잘못 이해돼 연화로 표시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무의미한 양식화의 결과로 빚어진 표현의 오류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양식화 현상이 장차 현실화해 보살상으로 진전함으로써 후세의 삼존불로 되어간 것은 사실이다. 협시의 의복 표현도 카트라상에서 보이던 마투라식의 투박의(透薄衣;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옷)가 아니고 간다라 영향을 생각할 수 있는, 두껍게 짠 옷이다. 보리수의 표현은 사실성을 상실하고 소략한 음각선으로 기계적인 처리를 하였다.

  성인식과 소라 상투  

  고대 인도사회는 바라문교(婆羅門敎, brhmanism)사상에 입각하여 사성제(四姓制, caste)의 엄격한 계급 의식에 지배되고 있었다. 바라문교 승려층인 바라문(brhmana)들은 신을 대신하여 사회를 이끌어가는 최고계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신권이 왕권 위에 군림하는 신정(神政)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사회제도가 종교의식에 방불하여 많은 사회의식이 엄수되었다.
  그중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누구나 치러야 하는 의식으로 결발식 (結髮式, cdkarman)과 치발식(kenta)이 있었다. 결발식은 성동식(成童式), 즉 동자가 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의식은 계급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생후 1년에서 7년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문자 그대로 머리칼을 모아서 정수리에 묶어놓는 의식으로 동자가 되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의식이었다.
  다음 치발식은 동자기를 지나서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으로 바라문은 16세에, 크샤트리아는 22세에, 베이샤는 24세에 각각 치렀다고 한다. 이 의식은 정수리를 제외한 모든 머리칼을 밀어버리고, 정수리의 머리칼만 가지고 상투를 틀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투를 주라(周羅)라 하였으니 산스크리트어인 츄다(cuda)와 팔리어인 츌라(cla)를 한자로 음역한 말이다. 그래서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605∼ 616년, 隋 達摩쳥多 번역] 권1에도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다.

  “주라라는 것은 수나라 말로 상투라는 의미다. 외국인들은 정수리 위에 조금 남긴 긴 머리로 상투를 튼다.”

‘불설입세아비담론(佛說立世阿毘曇論)’[559년, 陳 眞諦 번역] 권6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혹은 정상에 하나의 상투를 남기고 남은 머리칼을 모두 깎으니 주라계(周羅쬇)라고 한다.”

  이 치발식은 중국문화권의 관례(冠禮)와 같은 일종의 성인식으로, 이를 치르고 난 이후부터는 사회적으로 성인 대접을 받고 상투를 틀어올릴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인도인들은 치발식을 갓 치르고 났을 때만 이런 주라계를 틀고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투라 불상의 불두를 보면 바로 이런 치발식을 치르고 난 형태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머리 모양은 이미 앞서 본 카트라 출토의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트라상에서는 머리칼을 틀어올려서 나계를 만들고 그 상단에 동곳모양의 상투구슬(쬇珠)로 고정시킨 사실적인 표현의 주라나계였다.
  그렇다면 마투라에서는 불상을 출현시킬 때 처음부터 성인식을 막 치르고 난 청년상을 본보기로 하였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간다라 불상의 초기 형태인, 코밑수염이 무성한 장년기의 근엄한 왕자상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리스 조각 전통을 이어받은 간다라 쪽에서 미모의 청년신상으로 불타를 표현해냈음직한데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이것을 몇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부처님은 왜 16세 소년 모습일까

  인류학상 인도유럽인으로 분류되는 아리안족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상소불로[常少不老;항상 젊고 늙지 않음]의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고대기 미술에 있어서 야차나 야차녀 등 잡신일지라도 항상 청년상으로 표현해내고 있으며, 원시경전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마나바[摩納婆, mnava;젊은 수행자]가 항상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이에 불타가 신격화하면서부터는 전통적인 신상관(神像觀)에 입각하여 불신상소불로[佛身常少不老; 부처님 몸은 항상 젊고 늙지 않음]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불신관(佛身觀)의 한 요소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불신상소불로의 내용은 대승경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대표적인 것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불설급고장자녀득도인연경(佛說給孤長者女得度因緣經)’[980년, 宋 施護 번역) 권 상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세존(佛世尊)이란 분은 … 모든 곳의 상호(相好)가 단정엄숙하게 잘 갖추어 있고 소년상을 나타내는데, 뛰어나고 미묘하기가 비길데 없다.”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 권5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부처님의 형상은 16세 동자와 같다.”

  그리고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60∼663년, 唐 玄 번역] 권381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의 얼굴 모습은 항상 젊고 늙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적인 전통에 충실했던 마투라에서는 이런 경전들의 불신관에 입각하여 애초에 16세 소년, 즉 바라문 계급이 이제 막 치발식을 치르고 났을 때의 모습을 본보기로 하여 불상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겠다.
  이에 반해서 간다라에서는 비록 그리스의 조형기반으로부터 출발했다고는 하나 페르시아와 월지족 등 잡다한 문화 전통이 뒤섞여 있었고 역사적 인물로 불타의 면목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역(異域)이었다. 따라서 간다라에서는 다만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모습과 같다는 대인상관(大人相觀)에 의해서 당시 군림한 왕자의 상을 본보기로 했기에 그와 같은 장년상의 불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후 곧 마투라의 영향을 받자마자 간다라에서도 수염을 감소시켜가며 동안형의 청년상을 지향하게 됐을 것이다.
  인도 마투라박물관이 소장한 차우바라 출토 <3층나계를 가진 불두(佛頭)>는 앞서 든 <32년명불삼존비상>보다도 더욱 양식 진전이 노골화되고 있어, 주라나계가 복발형[覆鉢形;사발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의 3층탑 모양으로 양식화했다. 다만 표면에 머리칼을 상징하는 가지런한 가로 줄무늬가 무수히 표현되어 아직 상투의 의미는 유지되고 있다. 아래 위 눈꺼풀이 확대되어 상대적으로 눈이 반개(半開) 형태에 가까워지고, 눈 가장자리를 강조하는 테가 굵게 표현되었으며, 입술 윤곽도 같은 수법으로 강조되어 길게 늘어진 귓불과 함께 양식화 현상이 노골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장차 굽타불상의 신비주의 양식에 연결될 조짐을 보이는 특징들인데, 이런 과장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얼굴 전체에 청년다운 순진성과 활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간다라 영향과 신비한 육계  

  카니쉬카대왕의 인도 통일이 중인도의 마투라에서 출현한 순인도적인 불상양식과 서북인도의 간다라에서 출현한 그리스적인 불상양식을 신속하게 융화시켜 나갔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대체로 간다라지방에서는 카니쉬카대왕의 치세 후반기인 2세기 중반에 이미 간다라불상의 양식기반 위에 마투라식의 편단우견, 양족노출[兩足露出;두 발을 드러냄] 및 사자좌의 특징을 도입하고 설법인 [說法印;설법할 때 만들어지는 손짓. 오른손을 높이 들고 왼손을 낮게 들어 엄지손가락과 둘째 혹은 셋째 넷째 손가락을 마주 대게 한다]이라는 독창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새로운 양식의 불설법좌상을 출현시켰다. 일종의 혼합양식을 창안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마투라지역에서는 서기 160년에 만들어진 <32년명불삼존비상>에서 겨우 협시천왕의 치마 표현에 간다라식의 두껍게 짠 옷 표현이 가해지고, 대좌에 성수(聖樹)를 예배공양하는 인물상의 부조가 나타나는 정도다. 이런 소극적인 영향은 중인도가 가지는 보수적인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보수성도 결국 쿠샨제국의 정령(政令)이 미치는 동일 국토 내에 존재한다는 정치적인 이유와 함께 승려들의 활발한 교류에 의해 조만간 깨뜨려지게 된다. 우리는 그 물증을 마투라박물관 소장의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불입상은 용모로 보면 틀림없는 마투라식 불상이다. 비록 약간 노성한 듯한 느낌이지만 마투라불의 앳된 얼굴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으며 상투도 비록 머리칼 표현은 사라졌지만 주라나계의 잔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주변에 연호문[連弧文;원의 일부분인 호를 연속적으로 반복시켜 만들어낸 무늬]을 두른 대형 광배와 시무외인을 한 오른손 뒤에 받친 화침에 이르면 마투라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게 된다.
  그런데 문득 의복에 이르게 되면 돌연 간다라풍으로 바뀌어서 통견후직의[通肩厚織衣;양쪽 어깨를 통틀어 감싸 입은 두껍게 짠 의복]의 형태가 된다. 물론 이 통견후직의는 간다라식의 자연스러운 형태가 아니다. 오른손은 마투라식으로 어깨 위까지 쳐들었는데 옷자락이 따라 올라가지 않고 가지런히 내려가 있으며, 왼손 역시 그와 비슷한 높이로 들어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따라 올라가지 않고 옷 자락이 돌처럼 굳어진 채로 가지런히 내려와 있다. 마치 멕시코인들의 의복과 같이 장방형 포의 가운데를 뚫어 머리를 넣은 듯한 형태다.
  따라서 옷주름이 비스듬한 포물선을 긋는 간다라 불의와는 달리 물결무늬와 같은 가지런한 타원형선이 중첩(重疊)된 모양으로 형성돼 있다. 그리고 주름선 자체도 간다라식으로 주름선을 융기(隆起)시킨 것이 아니라 마투라식으로 주름선을 파 나갔다.
  이렇게 간다라식 통견후직의에 대한 이해가 덜 된 상태라 하더라도 마투라 불상이 간다라식 통견후직의를 입었다는 사실은 마투라불상 양식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불상양식은 마투라공방의 혁신적인 조각가들이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불입상의 양식이 얼마나 혁신적인 의미를 가졌느냐 하는 것은 머리 생김새의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제까지 주라나계의 사실적인 표현으로부터 양식화가 진행돼왔지만 아직 그것이 상투라는 의미를 상실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체두[剃頭;깎은 머리] 형태로 주라나계의 머리칼 표현을 완전히 제거해버림으로써 살이 솟아난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즉, 주라나계가 완전히 육계(肉쬇)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마투라 불상에서 신비로운 육계가 탄생함으로써, 곧 나계(螺쬇)를 전제로 하여 부처님 머리칼 전체가 왼쪽으로 돌아 난다는 32대인상 중의 발모우선상[髮毛右旋相;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도는 상호]은 머리칼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난다는 나발[螺髮;소라 껍데기 모양의 머리칼]로 의미 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각두[一角頭;하나의 뿔이 달린 머리]의 민짜 머리에 소라껍데기 같은 나발들을 덧붙여 나가게 된다. 간다라 불상에서 육계가 되고 나발이 되는 것과는 서로 다른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끝에 가서는 육계와 나발이라는 하나의 귀착점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큰 상투가 인도 사회가 희구하는 신비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됐으리라고 생각된다.
  얼굴 모습에서도 초기 불상에서 보이던 발랄한 소년의 천진성이 감소돼 있다. 대신 웃음기를 머금은 약간 감긴 눈과 과장된 입술선이 유도하는 신비로운 미소에 의해서 고요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강조되고 있다. 이런 모든 요소들이 굽타불상의 선구를 이루어 장차 굽타시대가 되면 세계조각사상 가장 신비로운 인체 표현인 굽타 불상 양식을 이루어내게 된다.
  손바닥에 아직 윤보(輪寶)의 표현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다리 이하는 파손되어 대좌(臺座) 형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양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마투라 지역이 쿠샨제국에 점령되어 그 영향이 막강하게 미치던 시기일 것으로 보아야 하니 늦어도 3세기 전반기를 넘지는 않을 듯하다.

  나발의 생성  

  마투라박물관 소장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은 남겨진 상태만 가지고는 입상인지 좌상인지 구분하기 힘든데,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도판 4)을 바로 뒤잇는 양식인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얼굴에서 웃음기 담은 눈과 초생달처럼 입끝을 올려 미소를 상징한 입술 및 분명한 백호(白毫)가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의복도 통견후직의인 간다라식 불의(佛衣)에 음각선으로 옷주름선을 넣은 표현을 계승하였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은 오른손과 옷자락을 잡은 왼손이 거의 어깨 높이로 올려지고 손바닥에 윤보의 표시가 분명한 것도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 그대로다.
  그러나 횡대종선[橫帶縱線;가로로 구역을 나누고 세로로 금을 그음]의 머리칼 표시가 육계를 포함한 머리 전면에 가하여져서 민짜의 깎은 머리 모양에서 나발이 생성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옷주름선도 음각선에 제법 입체감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보여 층단의 기미(機微)가 있으며, 두원광에서는 연호문대(連弧文帶) 안으로 연주문[連珠文;구슬을 연속적으로 반복시켜 만들어낸 무늬] 띠(帶)를 더 추가 장식하는 등의 양식진전이 있다. 이것은 장차 굽타불상으로 넘어가려는 과도기 양식임을 확실히 해주며 마투라불상 양식에서 쿠샨양식과 굽타양식이 연결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분명한 자료다.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의 상양식을 가장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 <51년명불좌상>(도판 6)이다. 의복표현은 동일한데 다만 옷주름의 음각이 훨씬 입체성을 띠어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이 보인 시험조각 형식을 극복하였고, 머리위 전면에 굵은 나발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나발은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이 보인 횡대종선의 머리칼 표현이 한 단계 더 양식 진전하여 소라껍데기 모양이 된 것이라고 파악된다.
  ‘51년 여름 제 3월 4(?)일 보살(?像)…대중부(大衆部) 여러 비구의 소원으로 하여’라는 명문이 대좌에 새겨져 있어 카니쉬카대왕 기원 151년(279)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보살’이라는 명문은, 이 불상 양식이 이미 마투라 불상양식에서 굽타 불상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에 위치한 것이므로 불상을 ‘보살’이라고 표현하는 초기 단계의 편법이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니 [?像]이라는 글자의 오독(誤讀)일 것이다.
  또 51년이란 연대는 반 로하이젠 여사가 주장한 것처럼 백자(百字)가 생략되었다고 보아 카니쉬카 대왕 151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면 양식사적으로도 타당한 기년이 되니, 이후 4세기에 나타나는 굽타 불상양식이 바로 이를 뒤따르기 때문이다. 대좌에는 중앙에 같은 양식으로 표현된 선정불삼존상(禪定佛三尊像)이 부조되어 있고 좌우에 사자상이 있어 아히차트라 출토 <32년명불삼존비상(佛三尊碑像)>(도판 2)의 사자좌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투라 공방의 신파와 구파

  마투라 공방(工房)에서 간다라 불상양식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간다라풍의 외형을 성급하게 추종하려는 신파(新派)와 마투라의 조각 전통 속에 이를 용해해들이려는 구파(舊派)의 대립이 있었던 듯하다. 앞서 든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이 신파에 속하는 것이라면 마투라 고고박물관 소장의 <22년명불좌상>은 구파에 속하는 것이라 해야겠다.
  우선 의복 표현에서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은 간다라식으로 두터운 옷에 같은 간격의 옷주름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오른쪽 어깨로 옷자락이 넘어오면서 만드는 옷주름선의 자연스러운 표현도 망각한 채 실제로는 생길 수 없는 긴 타원형의 음각선을 가슴에서부터 발등에 이르기 까지 같은 간격으로 연속되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계승한 <51년명불좌상>에서는 의복이 결가부좌한 무릎을 완전히 덮어서 두 발이 노출되지 않는 간다라 좌불(坐佛) 옷주름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에 반하여 <22년명불좌상>은 비록 통견후직의를 받아들이기는 하되, 우선 왼쪽 어깨 부분에서 마투라불 옷주름 전통을 고집하여 평행 수직의 옷주름선을 계승하고 있다. 다만 편단우견법(偏袒右肩法)에 의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 옷주름을 표현할 수 없었던 오른쪽 어깨부분에서만 간다라식의 비스듬한 옷주름 무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가부좌한 두 발은 마투라전통 양식대로 계속 드러내고 있다. 이로 보면 두 불상양식은 그 출발에서부터 전통의 고수와 탈피라는 대립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좌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22년 여름 제2월 30일에 불상이 베 짜는 일 하는 사람들의 절(Prvrika vihra) 안에 만들어 세워지다.’

  따라서 <22년명불좌상>은 반 로하이젠 여사의 백자(百字) 생략설에 의해서 카니쉬카대왕 기원 122년 (249년) 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크노주립박물관 소장의 사헤트마헤트 출토 <대형 나발불좌상>, <22년명불좌상>과 동일한 양식의 불좌상이나, 의습선의 음각 기법이 심화되어 입체성을 띠므로 조금은 뒤늦은 양식일 개연성이 있다. <22년명불좌상>의 머리와 오른쪽이 파손된 것과 달리 <대형 나발불좌상>은 광배와 왼손이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었는데, 특히 머리가 온전한 것은 이 종류 상양식(像樣式)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대좌에 ‘사케타(Sketa)의 베 짜는 일 하는 사람(Prvrika)인 시하데바(Sihadeva)의 기증’이라 씌어 있어 <22년명불좌상>에서 ‘베 짜는 일 하는 사람들이 세운 절에 만들어 세운다’고 한 명문의 내용과 관련성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보수적인 상양식을 고집한 것이 마투라에서 상당한 경제 기반을 누리고 있던 세습적인 직포업자[인도에서는 일반인들의 외투인 사리(sri)나 승려들의 삼의(三衣)를 모두 치수대로 맞추어 짜내므로, 곧 베 짜는 일 하는 사람이 옷 만드는 일을 겸하게 된다]들일 경우 이들의 보수적 경제 기반이 능히 그렇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은 카트라 출토 <‘보살’명삼존비상>에서 보이던 윤곽이 뚜렷한 동안(童顔)인데 머리에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나발의 초기 형태라고 생각되는 굵은 소라껍데기 모양의 돌기들이 시원스럽게 덮여 있다.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 손바닥에는 윤보 표지가 뚜렷하고 결가부좌한 발바닥에도 역시 윤보 표지가 있다. 광배의 남은 조각에는 연화문(蓮花文)이 보여 굽타시대의 연화나 초화문(草花文)으로 장식된 화려한 광배의 전구를 보는 듯하다. 양쪽에 사자가 앉아 있고, 그 사이에 좌우로 4위(位)의 협시를 거느린 불좌상이 안치된 대좌도 <22년명불좌상>과 형식이 동일하여 혹시 동시대 동일인(적어도 동일 공방)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비로운 굽타불상  

    인도는 고대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고도의 문화 역량을 과시해온 지역이면서도 역사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남겨져 있지 않아서 그 역사전개의 과정을 잘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다. 그래서 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이룩하였던 쿠샨왕조의 역사도 매우 불투명하니,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리던 카니쉬카대왕(128~151년) 전후의 제왕세계(帝王世系)도 확실치 않다. 다만 카니쉬카대왕 이후 100여년 동안 제국의 통치력이 중인도 지역에 계속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후비쉬카(Huvika)니 바수데바(Vsudeva)니 하는 제왕들의 이름과 카니쉬카 기원의 기년명(紀年銘)이 새겨진 비명(碑銘)을 통해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쿠샨왕조는 대체로 바수데바 시기(3세기 후기)에 사산족인 샤풀 1세의 침략을 받아 쇠망한 듯한데, 이로부터 중인도의 제국 영토들은 거의 따로 나뉘어서 독립적인 소국가(小國家) 형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상태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다가 갠지스강 하류에 위치한 마가다국의 소왕(小王)이던 찬드라굽타 1세 (CandraguptaⅠ, 320~335년)가 점차 주변을 아우르기 시작하여 왕중왕인 전륜성왕(mahrjdhirja)의 칭호를 얻게 된다.
  이로부터 그 아들인 사무드라굽타(Samudragupta, 335~375년)와 손자인 찬드라굽타 2세 (CandraguptaⅡ, 375~414년)의 양대에 걸친 천하통일 정책은 곧 아쇼카왕 시대의 마우리아왕조가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즉 서북은 수틀레지(Sutlej)강으로 이어지는 인더스강을 경계로 하고 북쪽은 히말라야산(雪山)에 이르며 남쪽은 크리슈나(Krishna)강을 경계로 하고 동쪽은 아삼(Assam)지역에 이르는 인도반도 거의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굽타제국의 국력은 인도 역사상 공전절후한 것으로 문화의 발전도 극치에 이르러 인도 문화사상 다시 볼 수 없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더구나 이제까지 이민족의 지배 아래 놓여 외래 문화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왔던 인도인들로서는 중인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일어난 굽타왕조의 순인도적인 문화 성향에 긍지와 공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왕조가 순인도적인 문화 성향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의 하나로 바라문교(婆羅門敎)를 숭상함으로써 비슈누나 시바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힌두교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민중 사회에 깊이 침투하게 되었다. 이는 이 시기 중국의 남북 분단과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 및 해로의 개통 등으로 비단길 무역이 위축되어 인도에서도 상업세력이 쇠퇴해갔던 것과도 연관된다. 즉, 굽타제국이 중농정책을 표방한 결과 농업사회를 주도하는 데 알맞은 새로운 이념의 필요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위에 굽타왕조의 절정기를 다스리던 찬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 2세 및 쿠마라굽타(KumraguptaⅠ, 414~455년)의 3대 왕은 문예(文藝)에 정통한 임금들로 문예부흥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힌두교 문화가 난만한 발전을 보이게 되고, 전시대 이래 융성해온 불교문화 역시 현란한 발전으로 이어지니 불상조각 사상 신비로운 이상미(理想美)의 극치를 이룩했다는 굽타양식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굽타 불상의 특징

  당시 불교 교단의 동향을 살펴보면 간다라 출신인 무착(無着), 세친(世親) 형제와 같은 대승론사(大乘論師)들이 굽타제국 수도인 아유타(阿踰陀, Ayodhy)에 와서 활약하다 서거했다 한다. 이는 서북 인도적인 취향이 강한 논소불교[論疏佛敎;경전에 철학성을 담기 위해 장황한 논리적 해석과 주석을 붙이는 일에 열중하는 불교. 이런 일은 불교를 도리어 어렵게 만들어 대중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불교 소멸의 원인이 되었다]가 굽타왕조의 수도권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미 쿠샨왕조시대 후기로부터 간다라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아오던 마투라 조각양식이 점차 간다라 조각의 특징을 소화, 흡수하는 현상을 보이다가 드디어 굽타 성시(盛時)에 이르러서는 간다라적인 특징도 마투라적인 조형감각으로 변형시켜 자기화하는, 순인도 취향의 양식통일을 꾀하는 듯하다.
  그 결과 세계 신상사상(神像史上)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불상 양식을 창안해내게 된다. 육계와 나발의 분명한 표현, 어깨까지 늘어진 귓불, 수려하고 빼어난 용모에 윤곽이 분명한 이목구비, 삼도(三道)가 둘려진 굵고 긴 목과 늘씬하게 빠진 팔다리 등이 모두 신비감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요인들이다.
  그 위에 마투라식 투박의[透薄衣;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옷] 기법으로 표현된 간다라식 통견의(通肩衣)에 비쳐 나오는 균형잡힌 청년의 몸매는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중인도 미술의 전통인 관능미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게다가 간다라풍의 옷주름선이 잔주름 형태의 융기선으로 중첩되어 상쾌하게 나열됨으로써 자칫 관능으로만 흐르기 쉬운 육체미에 신비감을 조성해 준다. 투명한 옷감에서 잔물결처럼 일어난 옷주름이 육신을 보일 듯 말 듯 가려준 결과다. 힘차게 솟아오른, 크고 잘생긴 코와 탐스럽고 탄력있어 보이는 두툼한 입술, 수려하게 빼어난 미목[眉目;눈썹과 눈]에 살집 좋은 동안(童顔)에서도 육감적인 관능미를 실감할 수 있다.
  거기에 큰 눈을 반쯤 감아 내려뜨게 하는 명상의 자태를 짓게 함으로써 이를 더욱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손은 간다라식 물갈퀴가 손가락 사이에 표현되고 발가락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남성의 상징인 성기 표현은 비치는 의복 표현에서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는 부처님 성기는 말과 같이 평소에는 속에 감춰져 있다가 필요할 때만 나타난다는 32상 중의 음마장상(陰馬藏相)을 노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투박의의 표현법을 쓰면서 불상을 신비화시키는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표현수단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 불상양식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는 두원광[頭圓光;머리 뒤를 둘러싼 둥근 광배, 머리에서 나오는 빛의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한 대형 원판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마투라식 두원광이 기본이 되고 있다. 쿠샨시대 마투라 불상의 두원광이 다만 원판 둘레에 연호문(連弧文)이 둘러진 간단한 양식이었던 것에 비해, 이제 굽타 성시가 되면 머리 둘레에 4중의 동심원이 그려지면서 그 사이에 공작당초(孔雀唐草) 무늬띠, 소철(蘇鐵)잎 무늬띠, 연주(連珠) 무늬띠 등 복잡한 초화문(草花文) 장식이 가해지는 것이다.
  마투라 부근의 자말푸르에서 출토된 <대통령관저소장 불입상>도 이러한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왼손 끝과 오른손, 그리고 두발이 파손되었을 뿐인 이 불입상은 현재 인도 대통령관저에 소장돼 있다.
  마투라 고고박물관 소장의 붓디슈왈(Buddhishwar) 출토 <434년명불입상>은 1976년에 발견된 불상이다. 대좌에 굽타 기원 115년(434)이라는 명이 있어 굽타불상 양식 편년에 결정적인 기준을 마련해준 귀중한 자료이다. 쿠마라 굽타 1세(414~455년) 시대에 제작된 것이 분명한 이 불입상은 전체적으로 자말푸르 출토의 <대통령관저소장 불입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일견해 알 수 있다.
  선명한 나발의 표현과 작은 육계, 과장된 귓불, 백호의 불표현, 살집 좋은 얼굴에 크고 분명하게 자리잡은 눈과 코와 입술, 반개부시(半開俯視)한 눈, 수려한 눈썹, 뚜렷한 삼도, 통견투박의에 물결치듯 일어난 의습선, 이런 것들이 모두 서로 비슷하여 같은 사람의 솜씨가 아닌가 의심 날 정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불입상에서는 얼굴에서 인중(人中)의 표현이 얕게 형식화되고 옷주름선도 오른쪽 어깨에서 자연스러운 굴곡(屈曲)이 이루어지지 않고 훨씬 도식적인 처리로 끝나고 있다. 이로 보면 적어도 이 상이 <대통령관저소장 불입상>보다는 반세기 이상 뒤지는 시기의 상양식을 가지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목 뒤로 조금 남겨진 광배에서 빛살이 창날(槍鋒)처럼 연꽃잎 장식을 둘러나간 합리적인 양식화 현상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굽타 불상에서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은 오른손이 남아 있는 예가 극히 드물어 그 양식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이 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상이 가지는 자료적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손마디의 상안형[象眼形;코끼리 눈 모양] 표현은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 이래의 마투라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고 물갈퀴 형태의 망만[網뇬;살가죽 막]과 윤보표지(輪寶標識) 없이 손금만 표현한 것은 간다라식을 수용한 것으로, 두 양식을 신묘하게 조화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모두 통견투박의의 신양식과 동궤(同軌)를 보이는 양식 기법이다. 비쳐나온 배꼽 아래로 군대[裙帶; 치마 끈] 표현이 엷게 비쳐보여서 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의재[衣財;옷감]는 모두 투박성(透薄性)을 띠고 있다. 코 끝이 약간 파손되고 왼손이 떨어져 나갔을 뿐 상 자체는 완전하게 남아 있고, 대좌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마투라 양식의 최후  

  (도판 10)은 굽타시대의 마투라 불상양식 중에서 조금 독특한 옷주름 표현법을 가진 불상이다. 일반적으로 오른쪽 어깨로 대의(大衣)가 넘어와 왼쪽 어깨로 걸쳐지는 대의(大衣) 입는 법에 따르면 오른쪽 어깨부터 옷주름선이 비스듬히 일어나 물결 무늬를 만들며 점차 중앙으로 내려오게 마련인데, 이 은 다르다. 옷주름선이 옷깃의 중심으로부터 V자형 물결무늬를 일으키기 시작해 그대로 파상[波狀;물결이 일어나 퍼져 나가는 모양]을 연장해 감으로써 V자형의 옷주름이 인체의 중심축을 따라 차례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런 옷주름선 표현법은 간다라식 옷 입는 법을 처음으로 수용하던 단계의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어서 혹시 이 마투라 신파를 계승한 옷주름 표현법이 아닌가도 생각되나, 아직 다른 예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아 성급히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런 V자형의 단순한 옷주름 표현법이 <434년명불입상>에서처럼 비스듬한 물결무늬 옷주름선을 굴곡 없는 V자형으로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과 <434년명불입상> 두 상을 비교하면 인중이 얕게 새겨져 양식화한 것이 서로 같아 거의 비슷한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니 그 영향 관계는 더욱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대체로 마투라 지역에서 출토되는 굽타시대의 불상양식으로는 이보다 더 양식진전을 보인 예는 그리 흔치 않다. 다만 라크노 주립박물관 소장상이 하나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마투라로부터 잠나(Jamna)강을 타고 코삼비(Kaubi)를 지나 파탈리푸트라 (Ptalliiputra, 巴連佛 혹은 波?俚)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사르나드[Srnth, 鹿野苑;석가모니불의 최초 전법(轉法)이 이루어진 성지(聖地)]에서 갑자기 마투라 불상 양식과는 약간 다른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 대량 제조된다.
  그런데 그 상들에 새겨진 기년명을 보면 거의 굽타 기원 154년(474), 157년(477) 등으로 나타나서 굽타왕조가 제국의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 소왕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후굽타기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인도의 국내사정을 잠시 살펴보아야 하겠다.
  3세기 중·후반기에 걸쳐 사산족의 침입을 받아 해체된 쿠샨제국의 영토 내에서는 간다라의 키다라쿠샨 왕국과 중인도의 굽타왕국이 점차 주변을 아우르기 시작하여 각기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특히 굽타왕국은 중남인도를 거의 통일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두 나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150여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환한다.
  따라서 마투라는 키다라쿠샨왕국과 교류하는 관문(關門) 역할을 하면서 쿠샨시대 중인도 불상미술의 발상지답게 간다라 불상양식을 수용하여 굽타 불상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낸다. 그래서 5세기 중반까지는 비록 굽타제국의 서북변경에 위치해 있으나 굽타미술의 중심지로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수로(水路)에 의해 불교 미술품들이 수도권으로 쉽게 운반될 수 있었던 지리적인 이점도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중앙아시아의 초원으로부터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쳐들어온 야만족 백흉노(白匈奴, Hephthalites)가 키다라쿠샨왕국을 멸망시키고 인더스강을 건너 굽타제국을 넘보게 되자, 마투라는 서북 인도와의 문물중계지라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오히려 대흉노전의 전진기지로 변화한다. 이에 자연히 불교미술의 발전은 중단되고 그 주도권은 굽타제국의 수도권인 갠지스강 중류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래 굽타제국은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서기전 269~232년)이 건설하였던 파탈리프트라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갠지스강의 큰 지류들이 합수되는 수로의 요충이었다. 그런데 굽타제국의 제3대 제왕으로 천하통일을 완성한 찬드라굽타 2세(375~414년)는 지키기 쉬워서인지 이곳을 버리고 갠지스강의 한 지류인 고그라(Gogra) 강가의 아유타(阿踰陀, Ayodhy)에 도읍을 새로 건설하여 옮긴다. 이곳에서 굽타제국은 그 극성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백흉노의 침입과 내부의 분열로 국세가 기울어 소왕국으로 남게 된 쿠마라굽타 2세(473~477년) 치하에서 다시 잠나 하구(河口) 근처인 갠지스강 중류의 교상미로 수도를 옮긴다. 대개 이때부터 마투라는 굽타왕조의 변방 도시로 전락하고 불교미술품 제작의 주도권도 교상미에 가까운 갠지스강 중류의 사르나드에게 빼앗긴 듯하다. 그래서 마투라에서는 5세기 중기 양식보다 더 진전된 양식의 불상이 갑자기 줄어들고, 사르나드에서는 이 시기의 기년명을 가진 불교상들이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신(裸身)과 같은 사르나드 불상  

    굽타제국은 쿠마라굽타 대왕의 성세를 끝으로 하여 급속히 쇠퇴한다. 이미 쿠마라굽타 1세 대왕시대의 극성 속에는 쇠퇴의 요소가 내재했던 것이다. 한 세력이 극성에 이르면 곧 내리막길로 접어든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섭리이고 역사 진행의 법칙이다. 따라서 극성의 이면에는 향락과 안일을 추구하는 퇴폐적인 사회풍조의 자생으로 말미암아 갈등과 모순이 싹트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굽타제국의 쿠마라굽타 1세를 정점으로 하는 극성 속에 자괴(自壞)의 요소들이 팽배하다가 드디어 스칸다굽타(Skandagupta, 455~467년)시대에 이르러 백흉노족의 침입을 받자 서북 지방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만다. 이어지는 내부 분열로 인하여 국기(國基)가 크게 흔들리니 대제국의 영화는 끝나고 겨우 갠지스강 유역을 다스리는 소왕국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역사 변천의 상황을 대변하듯, 쿠마라굽타 1세의 치세 시기 이후라고 생각되는 사르나드기의 불상양식은 난만한 발전의 극에 이르러 퇴폐적인 요소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캘커타박물관이 소장한 사르나드 출토 <옷주름 없는 불입상>도 그런 사르나드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예 중의 하나다. 유명한 녹야가람지 출토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轉法輪佛坐像)>(도판 12)과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진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양식적인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다만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초전법륜처[初轉法輪處;처음 법륜을 굴린 곳, 즉 최초의 설법을 행한 곳]의 성적(聖跡)을 상징하는 주불답게 세심한 공력으로 처리된 것에 비해, <옷주름 없는 불입상>은 비교적 소략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두 상 모두 두 눈썹 사이를 중심점으로 한 대형 원판의 두원광을 지고 있는데, 이들은 다같이 중심원과 그 밖으로 이어지는 당초(唐草) 무늬띠와 판 끝을 장식하는 연호(連弧) 무늬로 이루어지면서 그 사이를 같은 시대 보살상의 장신구에서 볼 수 있는 영락형[瓔珞形;구슬 꿰미 모양] 연주(連珠) 무늬띠로 구분짓고 있다.
  당초 무늬의 경우 <옷주름 없는 불입상>은 오직 단순한 당초 무늬의 연속일 뿐이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에서는 당초 무늬 사이 사이에 마치 목련꽃과 같이 생긴 많은 꽃들을 봉오리에서부터 활짝 핀 상태 등 여러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어 복잡하고 화려한 양상을 보인다. 당초의 경우도 그 끝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고 연호 무늬의 호(弧) 모양을 더 작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주 무늬의 토막형 보석도 훨씬 많이 끼워 넣어 전체적으로 장식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래서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옷주름 없는 불입상>보다는 조금 뒤지는 양식이라고 생각되는데,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장식적인 의지가 크게 작용한 대형의 주불이라는 면을 감안한다면 시대 차이는 그리 크지 않으리라고 본다.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에서는 마투라 불상 초기의 카트라 출토 <‘보살’명삼존비상> (도판 1)에서처럼 꽃을 뿌리는 비천을 광배 양쪽 위에 표현하였으며, 등 뒤에서 두원광을 받치고 있는 신광[身光; 몸에서 나는 빛, 곧 몸체 뒤에 붙은 광배]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윗단과 당초 무늬 사이를 헤집고 나와 혀를 빼문 마가라[麻伽羅, makara;악어나 고래 등의 대형 물고기]를 조각하였고, 아랫단 역시 당초 속에 날개 달린 말을 표현하여 중인도적인 장식의장(裝飾意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로 보면 사르나드 시기의 불상양식은 인도적인 요소로 복귀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된 듯하니, 이 두 상에서 보인 옷주름 없는 의복의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상뿐만 아니라 사르나드기의 모든 불보살상들이 옷주름 없고 투명한 얇은 옷을 입는데, 이는 열대문화의 특성으로부터 말미암은 인도 미술의 뿌리 깊은 인체 표현기법의 조형전통이었다.

  불상의 성기 표현

  이에 마투라식 굽타불상과 달리 관능미를 억제하는 신비로운 요소로 작용하던 옷주름선이 사라진 사르나드 불상에서는 인도 전통의 관능미가 되살아나게 된다. 이는 당시 난만한 굽타제국의 문화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런 관능미의 풍미는 당시 힌두교 조각에도 일률적으로 적용되어 이후 인도 조각의 주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불교조각에서도 이로부터 시작된 관능적 표현이 밀교사상(密敎思想)과 표리를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8세기 팔라시대의 퇴폐적인 불상 양식을 낳게 되며, 한편으로 중국에 영향을 끼쳐 성당(盛唐)시대 불상양식에 관능미를 부여한다.
  중인도식 투명한 얇은 옷 표현 기법은 불신(佛身)을 거의 나신에 가깝게 노출시킬 수밖에 없으니, 제일 처리하기 곤란한 것이 성기(性器)였을 것이다. 그래서 32상 중의 부처님 성기는 음경(陰莖)이 말처럼 숨어 있다는 음마장상(陰馬藏相)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 이에 ‘대승백복상경 (大乘百福相經)’ 권4에서는 “음경이 감춰져서 나타나지 않는다” 하고,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권4에서는 “부처님이 과거세에 몸을 근신하고 욕망을 멀리한 까닭으로 성기가 노출되지 않고 완전히 숨는다’고 하였다.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권8 관마왕장품(觀馬王藏品)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님의 국부가 아무것도 없이 펑퍼짐해서 이를 보던 여자들이 부처님은 무근인[無根人;성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흉보는 소리를 듣고 부처님께서 마왕법(馬王法)을 써서 성기를 크게 노출시켰다.”

  이 모두 부처님의 성기가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은 실제 마투라식 굽타불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나드 양식에 이르면 상당히 양감 있는 국부의 표현을 보이는데, ‘우바이정행법문경(優婆夷淨行法門經)’ 권 하에서 말한 대로 천 명의 아들을 둘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거대한 성기라는 음마장상 본연의 모습을 표현해내고 있다. 이는 마투라 초기 불상으로의 복고(復古) 현상이라고 하기보다는 관능적 요소의 강조라는 퇴폐풍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투라식 굽타불상은 입술에 분명한 윤곽선이 돌려져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얼굴 표정은 근엄하며 방정강건[方正强健;몸매가 네모 반듯하고 굳세며 씩씩함]한 몸매를 가져 신비의 극을 이루면서도 건실성을 잃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르나드식에 이르면 섬약과 관능적 요소의 노출로 세련미에 비례하여 퇴폐적인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것을 이 <옷주름 없는 불입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녹야원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  

  사르나드는 부처님 당시에 녹야원(鹿野苑, Mgadva)이라 불리던 곳으로, 힌두교의 성지로 알려진 베나레스(Benares;옛날의 婆羅奈)에서 10리쯤 북쪽에 떨어져 있다. 이곳은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처음 법륜을 굴림. 즉 처음으로 설법함]이 행해진 불교의 성지로, 아쇼카왕 이래 많은 불교 유적을 남기고 있다.
  당나라 현장(玄裝, 602∼664년) 삼장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녹야(鹿野) 가람[伽藍, 僧伽藍, saghrma의 준말. 절의 통칭]은 8구로 나뉜 여러 층의 정사(精舍)로 승려 1500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한다. 정전은 높이가 200여 척이나 되는데 벽돌로 쌓아올린 건물 각층의 감실에는 황금불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유석(鍮石)으로 만든 사람 몸 크기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모셔져 있었다. 아마 여기에 들고 있는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바로 현장이 배관(拜觀)하였던 그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일 것이다.
  놋쇠빛 나는 돌이라는 의미의 유석(鍮石)이 푸른 기가 도는 흰색의 주나르산 백색사암을 가리키는 말일 터이니, 바로 그 백색사암으로 만든 이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장 삼장이 배관할 당시는 이 상이 만들어지고 나서 200여 년이 지난 시기였을 터이고, 크기가 여래의 몸과 같았다는 내용이 높이 159cm의 이 상과 매우 방불하며 그 위에 이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굽타시기 사르나드 불교미술 양식을 대표할 만큼 우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녹야가람의 정전터에서 수습되었음에랴!
  다시 녹야가람의 남쪽에는 아쇼카왕이 최초로 법륜을 굴린 곳, 즉 부처님 최초의 설법처에 세웠다는 100여척 되는 탑이 있고, 그 앞에는 70여척 되는 기념주가 세워져 있었으며(돌빛이 옥색의 윤기를 머금고 있으며 여러 모양을 비춰낸다고 하였다), 다시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탑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아약교진여(阿若喬陳如, Kauinya) 등 다섯 비구가 석가보살의 고행 포기에 충격을 받고 자기들끼리 독립하여 나와 습정[習定;선정(禪定)을 익힘]하였던 곳이라고 하였다[이상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 권7 참조].
  이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유적들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남겨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경전에 나타나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기를 통해서 알아보아야 하겠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7~권12의 고행품(苦行品) 17, 왕니련하품(往尼連河品) 18, 예보리장품(詣菩提場品) 19, 엄보리장품(嚴菩提場品) 20, 항마품(降魔品) 21, 성정각품(成正覺品) 22, 찬탄품(讚歎品) 23, 상인몽기품(商人蒙記品) 24, 대범천왕근청품(大梵天王勤請品) 25, 전법륜품(轉法輪品) 26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다른 본연부(本緣部) 경전들도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싯달타 태자가 밤을 도와 성문을 빠져나가서 출가하고 난 다음, 정반왕은 심산궁곡의 사람 없는 곳에서 홀로 수행하는 태자의 신변보호와 시중을 위해 대신의 자제 다섯 사람을 선택하여 보낸다. 이들은 만약 중도에서 되돌아온다면 5족을 멸하겠다는 정반왕의 위협 때문에, 태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태자가 간 방향을 따라가다가 당시 제일 뛰어난 선지식(善知識)이라는 라마오특가(羅摩烏特迦)의 제자가 되어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마침내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던 싯달타태자, 즉 석가보살이 이곳에 들러 라마의 오도처[悟道處;도를 깨달아 이르른 곳]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생각을 안 하고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 곳]의 경지를 쉽게 깨치고, 그것이 해탈의 길이 아니라 하며 떠나려 한다.

  부처와 다섯 수행자

  이에 다섯 수행자는 석가보살을 따라나서서 가야산 기슭의 니련선하(尼連禪河)로 가 함께 6년간 고행을 하며 용맹정진하는 석가보살의 시중을 든다. 이런 고행 끝에 석가보살은 고행만이 해탈의 길이 아님을 깊이 깨닫고 고행을 푼 다음 선생(善生, Sujt)이라는 촌장의 딸에게 우유죽을 얻어 마시고 체력을 회복한다. 다섯 수행자들은 이를 퇴전[退轉;뒷걸음쳐 아래로 굴러떨어짐]으로 보고 크게 실망한 나머지 석가보살을 버리고 자기들끼리만 수행을 위해 길을 떠난다.
  이들이 머문 곳이 바로 녹야원(鹿野苑)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석가보살은 우유죽으로 원기를 회복한 다음 현재의 부다가야(Buddahagay)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나아가서 선정에 든 다음 마왕 파순(波旬, Ppyas)에게 항복받고 해탈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다. 12월8일(인도력으로는 2월8일, 혹은 4월8일)에 샛별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대오각성(大悟覺醒)하신 것이다. 그래서 생사의 유전(流轉)에서 완전한 해탈을 얻으셨다.
  이에 칠칠일(49일) 동안 해탈의 환희를 음미하면서, 지나던 두 상인이 바치는 제호(醍?)에 찹쌀가루와 꿀을 타서 끓인 죽(경전에 따라서는 꿀에 탄 보릿가루라고도 한다)을 받아 마시고 원기를 돋운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친 미묘한 진리를 중생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 이때 범천왕과 제석천왕을 비롯한 여러 천왕이 부처님께 깨친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착한 무리가 줄어들고 악한 무리가 늘어난다는 명분을 들어 간곡하게 설법할 것을 권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상·중·하 세 부류의 근기(根器)를 타고난 중생들 중에 상근(上根)의 중생은 설법하지 않아도 깨칠 것이며, 하근(下根)의 중생은 설법을 해도 깨우치지 못할 것이지만, 많은 층을 차지하는 중근(中根) 중생은 설법을 함으로써 깨우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설법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맨 처음 설법의 대상으로 라마와 아라다 선인을 생각했지만, 이들이 며칠 전에 고인이 된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시중을 들다 떠난 다섯 수행자들을 꼽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곧 이들이 머물고 있는 녹야원으로 찾아간다.
  여기서 이들 다섯 사람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되는데 이때 전법륜(轉法輪, Dharmacakravartin)보살이 나타나 윤보(輪寶)를 바친다. 세속의 전륜성왕은 금, 은, 동, 철 등의 윤보를 가지지만 부처님께서는 법륜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다섯 수행자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 연법(十二因緣法)의 중도법문(中道法門)을 최초로 설하니, 이들은 모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출가하여 비구가 된다. 이런 최초 설법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바로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다. 다섯 비구와 어린아이가 딸린 여자 공양자가 윤보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합장하여 꿇어앉아 있는 대좌의 부조는 이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다섯 비구의 이름은 경전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사분율(四分律)’ 제32에 의하면 아약교진여 (阿若喬陳如, jnta Kauinya), 아설시(阿說示, Avajit), 마하남(摩訶男, Mah-rman), 파제(婆提, Bhadrika), 바부(婆敷, Vpa)라고 하는데, ‘법화경문구(法華經文句)’ (隋 智 說) 제1 상에 의하면 교진여와 아설시 두 사람은 부처님 모계 친척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부계 친척이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Copyright(c) 1999  All rights Reserved.
E-mail: newsroom@donga.com


 PREV :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 관리자 
 NEXT :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3 관리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