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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관리자  08-22 | VIEW : 1,645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사료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주장의 오류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 변방의 소수정권이라 주장하며 ‘고구려 훔치기’에 나섰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을 위협하며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다. 중국의 황제가 고구려의 왕을 중국이 그토록 경계했던 타자(他者)인 흉노의 왕으로 여긴다는 중국 문헌이 발견됐다. 이로써 중국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할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중국이 심상찮다.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면서 고구려사(高句麗史)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중국 옌볜대 류쯔민(劉子敏) 교수는 ‘중화천하질서(中華天下秩序)의 고구려’라는 논문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 중에서 갈라져나간 할거정권이며, 북방 소수민족(흉노와 그 후예를 뜻함)의 궐기로 형성된 분열국면의 틈을 타서 중원의 광대한 관할지구를 탈취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백제, 신라와 각축전을 벌였다고 했다. 중국이 남북조 시대에 들어선 후 고구려가 중국과는 독립된 국가로 나아갔지만, 남북조와 신속(臣屬)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사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노리는 것일까? 그 계기는 1997년 북한이 ‘조선전사’를 발간하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특별히 강조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은 이에 대한 반발로 우선 중국 동북지방(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 지금까지 무려 10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 벽화 유네스코 등재로 이슈화

집착이라 할 만큼 활발한 연구에도 고구려사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2001년 북한이 고구려 벽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면서 고구려사는 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고구려=중국사’라는 중국의 시각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북한에 유적을 공동으로 등재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제안을 일거에 거절했고, 이에 중국도 독자적으로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북한 단독 등재가 확실한 것으로 예측됐지만 막판에 심의가 보류되었다. 이때부터 고구려 문제는 중국의 국가적 과제로 급부상했다.

중국은 중국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5년간 약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할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는 고구려가 중국 변방의 소수정권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고구려의 영토였던 중국 동북방을 중시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동북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 건 분명하다. 따라서 중국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재확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 지역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명분을 축적하겠다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이러한 역사 왜곡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구려 영토 대부분이 현재 중국 땅에 속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시도가 얼마나 모순에 차 있는지를 적극적인 대처 논리를 가지고 밝혀야 한다.

과거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대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료와 유물을 참조해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한민족에 대한 자료가 국내에 미흡해 다분히 인근 국가들의 사료들을 인용하는 것이 현실인데, 이 역시 단편적인 데다가 나라마다 편찬자의 이해득실이 엇갈려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가필되었을 가능성 또한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민족이 한민족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한민족이 스스로를 곡필하지는 않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왜곡하고 있는 역사에 대해 중국측이 작성한 사료를 통해 적절하게 대응한다면, 중국측에서 더 이상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 중국과의 과거사 논쟁에서 첫 단추를 잘 끼느냐 잘못 끼느냐는 중국보다 한국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중국 ‘밖의’ 나라, 흉노제국


중국인들은 소위 중국인이 아닌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특히 한민족과 관련되는 민족은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동이란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중국인이 아닌 민족이라고 부른 동이와 중국인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필자는 훈족(흉노(匈奴))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사료 등을 통해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제66호)와 ‘고대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신동아’ 2003년 11월호)을 통해 375년 서유럽을 공격,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반도 남반부의 가야·신라와의 친연성을 제기했다. 중국과 끊임없이 경쟁을 벌였던 흉노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가야·신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적어도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이들을 중국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가야·신라가 흉노의 일파인 훈족과 친연성이 있다면 가야·신라보다 흉노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고구려는 흉노와 어떤 관계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역사에서 흉노가 나타나기 전까지 주로 동이(東夷)들이 살고 있던 동북 지역은 한민족의 원류가 정착한 지역이자 부여와 고구려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흉노와 고구려의 연계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근본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흉노란 중국 북방에서 처음으로 유목민 국가를 건설한 제국의 명칭이지,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들이면서 점점 강성해졌다. 그러다 기원전 4세기부터 비로소 여러 유목민 부족들을 망라하여 하나의 포괄적인 기마민족 집합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들은 ‘흉노’라는 이름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고, ‘노(奴)’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란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흉노에서 흉(匈)자를, 선비(鮮卑)에서도 비(卑)자를 떼어내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에서 따온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로 ‘사람’이란 뜻이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흉노가 ‘노예 같은 오랑캐’란 뜻이었다면 흉노 제국이 이런 이름을 용납했을 리 없다. 특히 진나라의 뒤를 이어 들어선 한(漢)이 흉노에게 조공하는 입장에서 상대를 비하하는 뜻으로 ‘흉노’라 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를 의미했다. 고구려의 5대 부족인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도 흉노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 있다.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에 자리잡은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에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대(元代)의 극 ‘공작담(孔雀膽)’ 대사에 등장하는 ‘노(奴)’나 ‘아노(阿奴)’의 어의를 살펴보면, 이는 남편을 지칭하는 ‘낭(郎)’이나 ‘낭자(郎子: 그대, 그이, 낭군)’의 뜻이다. 즉, ‘노(奴)’자가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흉노의 어감과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선입견은 버려도 좋지 않을까.

漢에게서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흉노 간 본격적인 대립의 역사는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했지만 곧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 중국인 한(漢)을 세운다. 당시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한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북쪽 흉노와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흉노는 몽골 중앙부인 상원(上原; 현재의 산서성 북부, 운중(雲中)에 상당하는 위치) 지역에 본영을 설치하여 선우(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의 아들’, 즉 흉노의 왕을 뜻한다)가 직접 통치하고 좌현왕과 우현왕으로 나누어 각기 동서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상원 지역은 광활하면서도 비옥한 초원지역이자 동서남북 교통의 요충지다. 흉노를 비롯해 칭기즈칸, 돌궐, 위구르 등이 모두 이 지역에 본영을 설치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을 흉노의 속국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당시 동호(東胡;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며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인접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라며 순순히 동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1000여리의 황무지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신하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과 가축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는 유목기마민족의 패자로 떠올랐고,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을 뜻하며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슈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에 이르렀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 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10년간의 한·흉노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와 흉노는 대략 300년에 걸쳐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그후 두 나라는 모두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우선 흉노는 기원전 57년에 동서로 나누어지고, 동흉노는 다시 남북으로 갈라진다. 이후 중국과 계속 대립하다 350년 한족과의 전투에서 북흉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흉노 편을 든 고구려

한국사는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받는 부여(夫餘)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 桂婁部)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관해서는 대동 소이하다(‘광개토태왕비’에 추모(鄒牟)로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흉노와 동이에 속하는 예맥(부여)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 데도 두 나라가 교전한 기록이 단 한군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기후나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약탈에 나섰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서로 이웃한 종족간에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다소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흉노가 동호를 격파한 후 부여가 흉노의 세력권 안에 속해 있었다면 이들간에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도 발견됐다. 진(秦)나라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서’에 ‘해동의 모든 이족(夷族)들은 부여의 족속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부여와 흉노처럼 고구려와 흉노의 관계 또한 특별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왕망이 중국 전한(前漢) 왕조를 파하고 신(新, 8∼23)을 세운 후 흉노를 정복하겠다며 고구려에 병력을 요청하자 고구려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거꾸로 요하(遼河)를 넘어 신(新)을 공격해 요서태수 전담을 전사시키고 지속적으로 왕망의 영토를 유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망은 흉노의 일족인 휴도왕의 후손으로 중국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웠으므로 흉노도 자신의 세력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동·서 흉노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동흉노로 볼 수 있다. 왕망은 동흉노가 그의 지배를 거부하자 흉노의 다른 일파이자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으로 하여금 동흉노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소수맥은 동흉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망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는 것이 문무왕의 능비문에도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알지가 흉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제67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경작(粗放耕作)을 하던 선비(鮮卑)는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족이다. 선비는 동호가 흉노에게 격파된 후 선비와 오환으로 분리된 다음 북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 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 후연, 남연, 남량,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이며 선비의 문화가 당대까지 존재했던 점 등을 미루어보아 선비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중국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이 할거하며 중원을 지배하던 시대를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라 부른다. 이러한 선비가 고구려와 특별한 유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선비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는 여러 차례 발견된다. 우선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삼은 일이 있다. 또 후한 광무제가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부용(附庸)세력화하여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 고구려로부터 이탈하게 한 일도 있다(48년). 이에 고구려는 모본왕 2년(49년)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방어선을 화북 산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이에 당황한 후한은 고구려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선비족 일부를 책동하여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도록 사주한다.

고구려의 태조 대왕은 더 이상의 선비족 이탈을 막기 위해 동왕 3년(55)에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하였고 동왕 69년(121)에는 선비세력과 합세,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행동 폭을 확대시켰다.

鮮卑는 고구려의 부용세력

부용(附庸)이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대국(大國)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 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도 이러한 보호-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주체적인 생존방식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여 전사국가(戰士國家)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시켜 나가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사회적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런 내외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탈피,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독자적 생존권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한다.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흉노가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이 부용 관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地豆于) 같은 이종족(異種族)에게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고, 특히 노역과 군역을 확보했다.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라고도 한다.

고구려제국은 복속된 기마민족들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였으므로 새롭게 탄생한 한족의 국가 수·당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 산재한 흉노의 후예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수·당은 고구려와의 전투를 한-흉노간 전투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 문제가 30만명을 동원하고도 참패했음에도 그의 아들 양제가 또 다시 고구려 침공에 매달린 것은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족을 지배하고 있는 동북아의 패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은 607년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을 때 때마침 고구려 사자와 마주친 후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부용세력 간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양제로서는 급선무였다. 마침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는 등 침공 명분까지 만들어주자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와 말갈 연합 세력에게 패퇴했고 당 태종의 공격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는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나 통일신라와의 항쟁에서 패배해 한반도의 주도권을 신라에 넘겨주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왕을 흉노의 선우로 인정

중국인들은 ‘북방 소수민족 세력의 궐기’였던 5호16국이 중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중국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동북방에 위치한 기마민족 고구려는 흉노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을 때는 흉노에 속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해 흉노가 멸망한 후에는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 같은 사실은 고구려가 5호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 등을 부용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북방 기마민족의 맹주 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한 사료가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주고 있다.

중국 중원이 오·촉·위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 황제 손권은 동천왕 7년(234),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파견한 일이 있다. 이때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單于)’라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3년 오(吳)의 손권이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가서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해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나라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책봉하고 예물을 보낸 것이다(책봉이란 정식 수교(修交)의 외교적 관례로 주종 상하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국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견사자사굉(遣使者謝宏) 중서진순(中書陳恂)
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가사의복진보(加賜衣服珍寶)


그러나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한다. 그러나 관구검을 격파한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관구검을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고구려는 변방 소수세력 아니었다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에서 세계를 주름잡던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특성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흉노가 중국과 끊임없이 혈투를 벌여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중국과 당당히 맞서 싸우거나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흉노의 수장급이란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 고구려는 중국에 종속된 변방 소수세력이 아니었다. 즉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끼워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중국인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고구려는 북방 기마민족으로 흉노의 몽골계에 속한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기할 것은 고구려가 흉노의 여러 습속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적석목곽분은 흉노 등 북방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인데 고구려에서는 이런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어 시체와 부장품을 안치한 후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중국, 그리고 일본에는 없는 무덤 형태이다.

북방 기마민족이 후대까지 견지했던 순장(殉葬)의 습속도 고구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에서는 발견되고 있다.

광대한 영토에 속해 있던 한민족 원류들이 모두 똑같은 습속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 고대 중국 기록에서는 한민족의 원류가 거주한 지역의 민족이 예·맥·한·부여·옥저 등으로 구분되어 불렸지만, 이들은 모두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사람으로 불리는 것과 다름아니며 같은 민족이라도 지역에 따라 풍습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고구려가 흉노로 분류되던 거대한 제국 안에서 우월적인 독자제국을 형성했으며 습속도 독자적으로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우리 고대사 연구 강화해야

근래 언론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에 대응해 우리 정부가 고대사 관련 분야 연구자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고, 필요하다면 북한과도 적극적으로 공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사 왜곡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일본의 한국사 왜곡으로 우리가 얼마나 분개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시 중국으로부터 허를 찔렸다.

한국사를 왜곡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데도 한국이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민족사를 큰 틀에서 연구하고 분석하는 전문연구기관이 없는 데다,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는 현실 탓에 통일된 역사조차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역사 연구자들은 다음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2004년 6월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산하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 한·중 두나라가 신청한 고구려 유적의 ‘소유국가’가 결정될 예정인데, 현재 중국이 좀더 유리한 분위기라고 한다. 중국에서 문화유산위원회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요, 유적 규모나 정비 상태도 북한보다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원국들에게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중국의 단독 기재 시도를 적극 저지하는 일이 시급하다.

장기적으로는 한민족사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하고 공백상태나 다름없는 우리 고대사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민족사에 대한 어떠한 문제에도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 또한 길러야 한다. 북한과의 공조가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한민족사 연구에 과학을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고대사는 사료와 함께 발굴되는 유물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앞으로는 과학의 지원 없이 고대사 연구에서 정확한 사실을 규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유물 발굴과 고대사 연구를 ‘국립과학기술연구소’의 고대사 연구팀 주도로 진행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李鍾鎬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 건축과 졸
●프랑스 페르피냥대 공학박사
●프랑스 페르피냥대 열역학 및 에너지연구소 연구원(1979∼84)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 소장(1988∼91)
●현 (주)피라미드워즈 전문위원
●저서 : ‘노벨상이 만든 세상’ ‘현대과학으로 다시 보는 한국의 유산 21가지’ ‘과학이 파헤친 세기의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등  


중국이 고구려사 연구를 위해 5년간 약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하는 현실에 비춰볼 때, 우리가 단편적인 연구 결과로 중국측의 물량공세를 이겨낼 수는 없다. 한국도 중국에 상응하는 예산을 투입해 전문가들이 민족사 연구에 앞장서도록 해야 한다. 보다 많은 정보를 축적해야 중국 등의 역사 왜곡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사건을 한민족사에 남겨진 퍼즐의 빈칸을 채우는 기회로 전환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끝)

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
발행일: 2004 년 01 월 01 일 (통권 532 호)
쪽수: 568 ~ 57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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