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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신라인은 세계 일류시민이었다
 관리자  08-22 | VIEW : 2,080
9세기 신라인은 세계 일류시민이었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mongol@chosun.com)  

張保皐 연구의 결정적 자료

일본 天台宗의 大成者인 圓仁(엔닌)은 서기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唐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기 위한 고난에 찬 순례를 했다. 이 여행기록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唐뿐 아니라 일본과 신라를 오가면서 국제무역을 하던 해상왕 張保皐 등 신라인의 해외 활동이 잘 적혀 있다. 張保皐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 자료이다. 이 여행기는 日記式이다. 중국 천지를 걸어서 다니면서 체험한 민중의 삶은 생생하다. 圓仁은 주관적인 감상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아주 세밀하게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적어 놓고 있다. 일본인의 기록 정신이 이런 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司馬遷의 「史記」를 읽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여행기가 절제와 자제를 미덕으로 삼는 전형적인 동양식 기록문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圓仁의 이 여행기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법사의 「大唐西域記」와 함께 세계 3大 기행문으로 꼽힌다. 기자는 최근 「중심」에서 출판하고 金文經씨가 譯注를 붙인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거의 절반이 唐, 일본인이 아니라 신라인이다. 圓仁이 9년 동안 唐에서 공부하고 여행하는 데, 그리고 귀국하는 데 在唐신라인들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신라인의 唐內 집단 거주지나 연락망, 특히 張保皐가 산동반도에 세운 기지인 赤山법화원의 큰 도움을 받았다.
  
  신라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의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譯注者 金文經씨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이 신라인들이 세계 무역사의 새로운 단계인 동서해상교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하고 그 주인 노릇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신라인들은 마치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지중해나 중동의 해안에서 수행하였던 것과 같은 역할을 동쪽의 세계에서 그것도 前者에 비해서 훨씬 위험한 해상에서 앞장서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東아시아 세계의 교역은 종전의 唐을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교역체계로 그 내용이 바뀌어 갔다. 이와 같은 東아시아 무역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주인공들이 바로 신라 무역상인들이다>
  
  이 여행기에서 圓仁은 「주인은 도적의 마음으로 사람을 재어 보았다(主人賊心算人)」라고 쓰는 등 자신이 접했던 인물들의 평을 자주 했다. 그는 신라인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험담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묘사한 신라인들의 언동은 감동적이다. 신라인들은 이 일본 高僧에 의해서, 唐에서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일을 정확하고 친절하고 의리 있게 하는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정보망·거점·책임감·추진력
  
  그가 唐의 관리들과 하는 일은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 在唐 신라인과 하는 일은 척척 돌아간다. 신라인들은 唐內에 거점과 인맥을 잘 만들어 두었고 정보에 밝으면서 책임감이 강한 것으로 나온다. 張保皐의 唐內 네트워크가 강했고 신라무역상들이 우수한 항해술을 근거로 하여 唐-신라-일본을 연결하는 서해·남해의 해상항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하여 我田引水式 과장의 필요 없이 사실대로 확인된다.
  
  圓仁 일행이 9년간의 순례여행을 끝내고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되는 과정, 그 동안 수집했던 典籍들을 신라인에게 맡겨두었다가 불교 탄압의 와중에서도 고스란히 돌려받는 이야기, 張保皐의 부하 張대사가 圓仁을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해 배를 짓는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하여 항해 중 신라 영해로 표류해 들어갈까 봐 경계하던 시절이었다. 신라인들은 敵國의 승려를 동족 대하듯이 한다.
  
  <張대사는 지난 해 겨울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금년 2월에 이르러 일을 마쳤다. 오로지 우리를 실어 떠나보내어 귀국시키고자 함에서였다>
  
  그러나 누군가 張대사를 모함하는 신고를 唐의 관청에 하는 바람에 張대사가 만든 배를 탈 수 없었다. 圓仁은 중국의 남부 항구 明州로 가서 거기에 와 있는 일본 배를 타고 귀국하기로 한다.
  
  <접대 중인 張대사는 20리를 배웅해 와서 비로소 헤어졌다>
  
  圓仁은 또 신라 배를 이용한다.
  
  <신라 사람 진충의 배가 숯을 싣고 초주로 가려는 참에 만났는데 배 운임을 의논하여 그 삯을 비단 5필로 정하였다>
  
  <초주에 도착하니 신라坊의 총관인 劉愼言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비로소 명주에 있던 일본인은 이미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劉대사에게 부탁하여 이곳에서 출발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도모해 주기를 청하였다>
  
  <신라 사람 金珍 등의 서신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5월11일 소주의 송가구로부터 출발하여 일본국으로 갑니다. 21일을 지나 내주 관내의 노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일본국의 스님들이 지금 등주의 적산촌에 머물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 배에 태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전일 노산을 떠날 즈음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스님 등은 이미 남주로 가서 일본국으로 가는 본국선을 찾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노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배를 타고 오십시오』라고 하였다>
  
  <노산으로 가는 배 편이 있어 편지를 써서 김진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이곳의 소식을 알리고 특별히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 뒤 다시 노산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고자 여행 식량을 준비하였다. 초주의 신라인 劉총관이 모든 일을 맡아 주었다. 전 총관인 薛詮과 등주 張대사의 동생인 張從彦, 그리고 어머니 등 모두가 배웅하였다>
  
  <김진 등의 배를 찾을 수 있었다. 배에 올라 떠났다. 등주 관내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였다. 張詠(張대사)이 배로 올라와 만났다>
  
  <張대사가 보낸 송별의 물건을 받았다. 적산포로부터 바다를 건넜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산들이 있는 섬을 보았다. 높거나 낮거나 하여 이어져 있었다. 뱃사공 등에 물었더니 『신라국의 서부, 웅주(공주)의 서쪽 땅」이라고 했다. 본래 백제의 땅이다. 하루 종일 동남을 향해 나갔다. 산과 섬이 연이어서 끊이지 않았다. 밤 10시가 가까워질 무렵 고이도(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구초도(전남의 거차군도 중 한 섬)에 도착했다. 섬지기 한 사람과 매를 키우는 사람 2명이 배 위로 올라와서 이야기하기를 『나라는 편안하고 태평합니다. 지금 당나라 칙사가 500명을 이끌고 경주에 와 있습니다. 4월 중에 일본 대마도의 백성 6명이 낚시를 하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무주의 관리가 잡아 데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병으로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라의 國格
  
  <서남 방향에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신라국의 동남쪽에 이르러 큰 바다로 나아갔다. 동남쪽을 바라보고 갔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멀리 대마도가 보였다. 정오경에 전방에 일본국의 산들을 보았다. 오후 8시 무렵이 되어 히젠국 마쓰우라군 북부 시카시마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험난한 귀국 과정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가 圓仁 일행이 唐에서 수집한 많은 서적을 싣고 한반도의 서해안, 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무사히 도착하는 장면에 이르러 기자도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마치 기자가 1200년 전으로 돌아가 劉愼言, 張대사 등 신라인이 되어 圓仁 일행을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해서 노심초사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 신라인의 정보網, 基地網, 우수한 항해술, 정확한 업무자세는 왜 통일신라가 민족사 최초의 일류국가였는가를 웅변해 준다. 일류국가는 일류국민으로 구성된다. 9세기 신라인들이 보여 준 품격이야말로 신라의 國格이었을 것이다.
  
  圓仁 또한 일본의 천태종을 발전시킨 國師가 되었고, 그의 여행기에 신라인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 뒤 사람들이 신라와 張保皐의 對外 활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제1 가는 자료가 되도록 하였으니 이야말로 국경을 넘어선 報恩이 아니겠는가.
  
  圓仁의 여행기를 영문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圓仁의 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냈던 前 駐日(주일) 미국대사 라이샤워도 신라에 감탄했다.
  
  <당시의 한국(신라)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 같은 민족, 언어, 국경을 가지고 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群 속에 일본이 들어 있다>
  
  
  치외법권적 특권 누렸던 신라인
  
  E.O.라이샤워는 도쿄에서 출생한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로서 일본학과 동양학을 연구했고 이 대학의 옌칭(燕京)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는 일본 승려 圓仁의 여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번역했고, 그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엔닌의 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한 章을 떼어 내어 「중국의 신라인」을 다루고 있다. 그는 신라와 唐이 손잡고 東아시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唐, 新羅, 일본이 공존공영하던 고대사의 전성기에 신라인들이 한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한울 발행·조성을 옮김).
  
  <圓仁이 우리에게 알려준 바에 의하면 중국 동부,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의 무역은 대부분 신라 출신자들의 손에 의하여 장악되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인들은 평온한 지중해 연안에서 상인들이 그 주변 영역에 하였던 것과 같은 역할을 연출할 수 있었다. 중국의 수도 長安에 머무는 외국 사람들 중에서 신라인들이 가장 많았고, 다른 외국인들보다도 철저하게 중국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서해는 신라인에 의해서 지배되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인 무역상 사회는 山東반도 南岸 일대와 淮河(회하) 하류 일대를 따라 집중되었다. (해상무역의 전략적 거점인) 楚州에는 거대한 신라 租界가 있고 신라인 총독이 신라방의 행정을 관장할 정도였다. 839년 봄 일본 사절단의 신라인 통역 김정남이 초주에서 귀국하는 사절단을 위하여 아홉 척의 배를 구하고 이를 운항할 60명의 신라인 선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중국 연안의 신라인 사회는 상당할 정도로 치외법권의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圓仁이 중국 연안에서 만났던 많은 무역선들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신라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은 東아시아 해상무역에서 신라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그들의 도전은 미약했다. 일본 遣唐使(견당사)의 관료주의적 비효율과 혼란과 비극적인 항해의 기록은, 신라인들이 여유 있게 산동 연안을 몇 번이나 왕복하다가 드디어 圓仁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던 뛰어난 기동력에 비하면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어쨌든 圓仁의 시대에는 아직 신라인들이 세계의 이 부분에서 해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라이샤워는 張保皐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張保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三國史記의 짧은 기록을 보충하는 圓仁의 여행기와 라이샤워의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羅唐동맹이었다. 신라인의 해외 활동은 세계제국 唐의 제1 동맹국이었다는 데서 가능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신라인을 닮아 세계로 넓어질 수 있었던 것도 韓美동맹 덕분이었음을 모르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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