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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29
 관리자  08-22 | VIEW : 2,486
[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29]


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진경대사 보월능공탑과 석남사 부도

  
  경명왕 8년(924) 4월1일에 건립된 것이 확실한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제28회 도판 6)가 후삼국기에 있어서 건립연대가 가장 확실한 탑비의 기준작이라면, 이와 함께 건립된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도판 1) 역시 건립연대가 가장 확실한 부도의 기준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1919년 3월 일제에 의해 경복궁 총독부 박물관으로 이안되어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경복궁 뜰 안에 세워져 있다. 경복궁에 현존한 이 사리탑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8각당(八角堂) 집을 형용하고 있는 것은 초기 부도양식과 동일하다. 844년에 건립되는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興法寺址 廉居和尙塔)>(제25회 도판 5)에서 비롯되어 868년에 건립되는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大安寺 寂忍禪師 照輪淸淨塔)>(제25회 도판 7)과 872년경에 건립되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雙峯寺 澈鑑禪師塔)>(제25회 도판 9)을 거쳐 884년에 건립되는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寶林寺 普照禪師 彰聖塔)>(제26회 도판 8)과 890년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울주 <석남사 부도(石南寺 浮屠)>(제26회 도판 10)로 이어지는 8각당형 부도인 것이다.

그런데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양식적으로 <석남사 부도>(도판 2)를 바로 뒤잇는 것이어서 이 둘을 비교해보기 위해 다시 한번 그 사진을 게재한다.

우선 기단부부터 비교해보면 <석남사 부도>는 8각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사자좌와 수미좌를 상징하였다. 아랫단은 사자상을 8면 중 4면에 격간격으로 돋을새김하였고, 윗단은 다른 돌로 똬리처럼 둥글게 만들어 받쳤는데 표면을 국화잎새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놓은 것이다.

그런데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에서는 2단 별개석으로 이루어진 이 하대를 한 돌로 합쳐서 1단으로 간소화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사자상과 공면(空面, 빈칸)이 교차되던 아랫단 8면에 모두 안상(眼象)을 새겨넣었다. 안상의 형태는 머리 부분에서 7번의 꺾임이 있고, 밑부분에서 3번의 꺾임이 있는 모란꽃잎 모양이다. 그 8면 위로 수미좌를 상징하는 구름무늬 물매가 이어지는데, 8모의 모서리에만 국화잎새 구름무늬를 한 가닥씩 솟구쳐내어 이를 상징하고 남은 부분은 밋밋한 면으로 단순화시키는 고도의 생략기법을 구사하였다.

이것만으로도 파격적인 의장(意匠)이라 할 터인데, 그 위로 낮은 받침단 한 층을 올려 세워 국화잎새 구름무늬를 가득 장식해 놓았다. 북통 모양의 중대석을 받치기에 꼭 알맞은 크기다. 따라서 8모의 모서리에 솟아난 국화잎새 구름무늬는 이 국화잎새 구름무늬띠로부터 솟구쳐나온 것이 분명해진다. 극단의 생략기법으로 복잡한 내용의 수미좌 형식을 단순화시킨 세련된 의장이라 하겠다(도판 3).

북통 모양의 중대석은 거의 비슷한 양식을 보이지만 <석남사 부도>의 중대석이 더 배흘림이 강하여 긴장된 느낌을 준다. 따라서 8면을 나누는 실패 모양의 안상기둥도 팽팽하게 힘을 받아 터질 듯 불거져 나와 있다.

이에 비해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의 중대석은 둥근 기둥에 가까울 만큼 배흘림이 사라지고 또 짧아져서 압축된 긴장감을 거의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8모의 안상기둥도 밋밋한 실패 모양이 되어 맥빠진 느낌이다. 두 가닥 선으로 연결된 안상 중앙의 꽃무늬는 마름모꼴의 십(十)자화 꽃판까지 서로 같지만 중대석의 긴장과 이완의 차이에서 오는 기백은 사뭇 다르다(도판 4).

상대석이 위로 피어난 연꽃 모양의 연화대좌인 것도 서로 같다. 그러나 <석남사 부도>에서는 상대석 자체가 넓어서 힘차게 펼쳐진 꽃잎에 기운이 넘치는데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에서는 상대석이 좁고 두터워 꽃잎이 좁게 오므라들 수밖에 없으니 위축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기에다 꽃잎 끝을 밖에서 깊이 파 뒤집어놓고 그 표면에 복잡한 보상화(寶相華) 장식을 더하니 꽃잎은 늙어 시들어가는 모습이다. 무의미한 장식성이 노쇠화로 치닫는 시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해 놓았다.

8모 탑신석은 가늘고 길어져서 8각당집이라는 의미를 망각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앞뒤로 나 있는 앞문과 뒷문의 문짝 표현도 생략되고 그 좌우로 돋을새김했던 사천왕(四天王)의 표현도 사라졌다. 부도 건축이 가지는 상징 표현조차 외면하려는 말기적 무관심이 빚어놓은 무차별적 생략일 터인데 결과적으로는 상징 표현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수 석조예술로 지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옥개석은 기와골과 연목 표현을 안팎에서 모두 생략하였다. 그리고 8모 지붕의 8개 지붕마루만 높게 표현하고 그 끝 망와(望瓦; 지붕마루 끝에 세우는 암키와)가 있어야 할 곳에는 두 개의 고사리 머리 위에 보상화를 얹어놓은 듯한 귀꽃을 장식하여 끝막음해 놓았다(도판 5). 이런 귀꽃 장식은 후백제 지역의 석등(石燈)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륜부(上輪部)의 앙화(仰花)와 복발(覆鉢), 찰주(刹柱), 보개(寶蓋), 수연(水烟) 등은 서로 비슷했던 모양이나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에서는 찰주와 보개가 망실된 듯 앙화 위에 수연이 바로 올라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울주 <석남사 부도>와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계승관계를 한눈에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서로 양식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석남사 부도는 낭공대사 부도인가  


  그런데 필자는 제26회에서 <석남사 부도>를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3대 조사로 사실상 가지산문을 처음 일으켜 세운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의 부도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寶林寺 普照禪師 彰聖塔)> 양식과 비교하면서 <보조선사 창성탑>이 세워진 뒤에 이를 본딴 가지산문 계열의 부도일 듯하다고 보았고, 가지산문의 초조인 도의(道義)선사 부도로 세워진 것일 수 있다고 추론했었다. 이는 석남사에 전승돼 오는 도의선사 부도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합리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면서도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문(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文)> 내용에서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년)이 경주 부근 석남사에서 돌아가고 그곳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경대사 부도>를 재확인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다가 미술부 소재구(蘇在龜) 학예관이 이 문제를 이미 울산에서 출간할 향토지에 거론했다는 말을 듣고 <석남사 부도>가 <낭공대사 백월서운탑>일 것이라는 그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였다.

비석과 함께 있지 못하여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지산이란 산 이름과 연관지어 가지산문 초조인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석남사 부도>를 낭공대사 행적의 부도로 추정하는지를 밝히기 위해 경북 봉화군 명호면(明湖面) 태자리(太子里) 태자사터에 남아 있다가 1918년 경복궁으로 옮겨온 <신라국 고양조국사 교시낭공 백월서운지탑 비명병서(新羅國 故兩朝國師 敎諡朗空 白月栖雲之塔 碑銘幷序)>의 내용 중 그 해당 부분을 옮겨보겠다.

“신덕(神德)대왕(912∼916년)이 큰 뜻으로 빛나게 다스리고자 은총을 내려 대궐로 부르자 정명(貞明) 원년(915) 봄에 이르러 대사는 갑자기 선승들을 이끌고 제향(帝鄕; 왕도, 서울)으로 올라왔다. 전례에 의해서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안주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절은 곧 이에 앞서 성상(聖上)이 재상으로 있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임금(효공왕)께 드렸다가 이어서 대사(낭공대사)에게 부탁하여 영원히 선종사찰로 삼은 곳이다.

이때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 밖에 나와 머무는 곳)로 맞아들여 거듭 자비로운 얼굴을 뵙고 이에 기다리던 마음을 열어 다시 무위(無爲;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스러짐)의 설법을 들었다. 사양하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특별히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에 여자 제자가 있었으니 명요(明瑤)부인이다. 신라 종실이고 나라의 으뜸 귀족이었는데 대사를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불교를 존숭하여 석남산사(石南山寺)를 받아서 영원히 머물러 지켜주기를 청하였다.

가을 7월에 대사는 심히 마음에 흡족하여 비로소 이 절에 머물러 살기로 하였다. 멀리 4악(四岳, 동악·서악·남악·북악)에 이어져 있고 높게 남쪽 바다를 눌렀으며 시냇물이 다투어 흐르니 마치 금여곡(金輿谷; 쇠수레가 구르듯이 물소리가 요란한 골짜기)과 같았고 바위와 산봉우리가 높음을 다투니 자개봉(紫蓋峯; 붉은 구름이 뒤덮고 있는 봉우리, 衡山 第一峯의 이름이기도 함)인가 의심스러웠다. 참으로 은일(隱逸)이 사는 그윽한 곳이고 또한 승려가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사가 두루 영산을 찾아다녔으나 거처를 정하지 못하더니 비로소 이 산에 이르러서야 임종할 곳으로 생각하였다. 명년(916) 2월초에 이르러 조금 편치 않더니 12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인생이 유한하니 나는 갈란다. 지켜서 잃지 말도록 너희들은 힘써라’ 하고 승상(繩床; 줄을 엮어 만든 침상이나 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근엄하게 돌아갔다. 나이 85세, 승납 61세였다. (중략)

17일에 이르러 삼가 색신(色身)을 받들어 서쪽 봉우리 기슭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성고대왕(聖考大王; 돌아가신 아버지 대왕, 신덕왕)이 홀연히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참으로 가슴 아파하며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의식을 감호(監護; 감독하고 보호함)하게 하고 이어서 조문하고 제사드리게 하였다.

정명 3년(911) 11월중에 이르러 동쪽 언덕 위로 개장(改葬)하니 절에서부터 300보쯤 떨어졌다. 전신이 흩어지지 않고 신색(神色)도 평상시와 같았다. 문하인들이 거듭 자애로운 얼굴을 뵙고 감격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석호(石戶; 돌문, 석실의 뜻)를 베풀고 막아버렸다. (중략)

제자 신종(信宗)선사, 주해(周解)선사, 임엄(林儼)선사 등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한마음으로 지키니 모두 상족(上足; 제자를 스승의 발에 비유하여 제자 중 뛰어난 이를 일컫는 말)에 해당하였다. 항상 부지런히 수호하며 오래도록 간절하게 추모하였으나 늘 큰 바다로 먼지가 날아가거나 높은 바람에 번개가 끊어지듯 할 것을 생각하고 여러 번 대궐에 나아가 큰 비석을 세워주도록 청하였다.

금상(今上; 지금 임금, 경명왕)이 왕위를 이어 교종을 존숭하고 선종을 떠받듦이 전왕조와 다름이 없어 시호 드리기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하였다. 이에 하찮은 신(臣)에게 명하여 마땅히 붓방아질을 닦으라(비문을 지으라) 하니 인연(仁, 최인연)이 굳게 사양하였으나 면치 못하고 명령에 대답하여 이를 좇는다.

변변치 못한 말을 늘어놓아 남긴 공적을 법대로 찬양하였으나 비유하건대 표주박을 이끌어 바다를 되질한다 해도 큰 바다의 깊이를 알 수 없고 대통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아도 푸른 하늘의 광활함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일찍이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고 친척으로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억지로 꾸몄다는 일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로써 법은(法恩)에 보답하노라.”

석남산사, 즉 석남사에 낭공대사 행적의 부도가 세워지고 그 비문을 최인연(崔仁, 878∼944년)이 짓게 되는 내력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호남 부도양식이 영남으로 전해지는 이유  


  그런데 비석이 이곳 석남사에 세워지지 않은 이유는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의 뒷면에 새겨진 <신라국 석남산 고국사비명후기(新羅國 石南山 故國師碑銘後記)>에 분명히 밝혀놓았다. 낭공대사의 법손(法孫)인 석순백(釋純白)이 지은 글인데 관련 부분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직 대사는 당나라 시대 신라국 경명왕 천우(天祐) 연중(904∼922년)에 법연(法緣)이 끝나서 경명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이어서 최인연 시랑(侍郞)에게 칙명으로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혼잡하고 사람들이 교활하여 성대한 일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로써 해는 새로워지고 달은 묵어가나 비문을 세우지 못하였다.

뒤에 고려국이 이미 4군(四郡)을 평정하여 3한(三韓)을 솥발처럼 바로 세우자 현덕(顯德) 원년(954) 7월15일에 이 큰 비석을 태자산(太子山)에 세운 것은 좋고도 좋은 인연이 있어서였다.

이에 국사의 문하에 신족(神足) 제자로 국주사(國主寺) 승두(僧頭)인 건성원(乾聖院) 화상(和尙)이 있었는데 법휘는 양경(讓景)이고 속성은 김씨이며 자는 거국(擧國)이었다. 대사를 위해서는 몸도 되고 마음도 되며 왕을 위해서는 귀도 되고 눈도 되었다.

장차 꽃다운 먼지를 바람이 쓸어가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구름이 녹이며 (행장을 기록한) 노란 비단이 해지려 하는데 푸른 비석을 세우지 않을까 두려워 스승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스스로 귀부(龜趺) 딸린 비석을 세웠다. 화상의 조부 애()는 원성왕의 내손(來孫, 5대손)이고 헌강왕의 서장인으로 (중략) 안으로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을 맡았고 밖으로는 패강도호(浿江都護)를 맡겼었다. 부친인 순례(詢禮)는 (중략) 안으로 집사함향(執事含香)에 이르렀고 밖으로 삭주장사(朔州長史)에 다다랐다.”

경명왕(917∼923년) 초기인 918년경에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최인연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세상이 안정되자 광종 5년(954), 즉 현덕 원년 7월15일에 가서야 봉화 태자사에 비로소 낭공대사의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비석 세우는 일을 자담하여 주관한 이는 국주사의 승두이자 건성원 주지인 양경화상이었는데, 그는 낭공화상의 고족제자이고 신라 왕족의 후예였다. 이때 이 일에 동참했던 9명의 낭공화상 제자들이 낭공 문중의 중심인물들이었던 듯한데 낭공 재세시에는 어려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뒷날 문중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고 적고 있다. 용담 식조(龍潭 式照)·건성 양경(乾聖 讓景)·연곡 혜희(谷 惠希)·유금 윤정(宥金 允正)·청룡 선관(靑龍 善觀)·영장 현보(靈長 玄甫)·석남 형한(石南 逈閑)·숭산 가언(崇山 可言)·태자 본정(太子 本定) 등 9인이 그들이다.

여기서 보듯이 석남사 주지 형한과 태자사 주지 본정이 이들 9인의 중심 인물에 들어 있다. 이로써 석남사와 태자사가 모두 낭공문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절인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두 절에 낭공대사의 부도탑과 부도탑비가 따로 세워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석남사 부도>, 즉 낭공대사 부도가 하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의 양식을 계승하게 되었을까.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년)은 사굴산문(山門)의 개산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의 수제자로 가지산문 제3대 조사인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현재로서는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도 그 부도 양식이 상호 계승관계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문제는 이 <석남사 부도>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의 주인공인 봉림사 진경(眞鏡)대사 심희(審希, 855∼923년)를 통해서야 해결될 수 있다.

봉림산문의 초조(初祖)이자 혜목산문(慧目山門)의 제2대 조사인 심희는 문덕(文德) 초년(888)부터 건녕(乾寧) 말년(898)까지 만 10년 동안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에 주석하면서 참선과 교화를 행하고 있었다 한다. 최인연이 용덕(龍德) 4년(924)에 지은 <유당신라국 고국사 시진경대사 보월능공지탑 비명병서(有唐新羅國 故國師 諡眞鏡大師 寶月凌空之塔 碑銘幷序)>에 기록된 내용이다.

송계가 강진 월출산 밑에 있는 지명이니 이곳에서 장흥 보림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그가 송계선원을 찾아가기 4년 전에 보조선사의 사리탑과 탑비가 세워진다. 그러니 새로 세워진 보조선사의 부도와 탑비는 그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 진경대사의 뇌리에 새겨진 <보조선사 창성탑> 양식이 장차 낭공대사 사리탑인 <석남사 부도>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진경대사의 보월능공탑으로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이 연결고리를 추적하려면 두 비문에 나타난 낭공대사와 진경대사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진경대사는 888년부터 강진 송계선원에 머물렀다 하는데 바로 그 어름인 892년에 견훤이 완산주(完山州), 즉 전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武珍州), 즉 광주를 손안에 넣고 자립한다. 그러니 송계선원 일대가 차츰 전란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진경대사는 898년 송계선원을 떠나 설악산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이곳도 이미 궁예가 차지하여 전란의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어져 있었다.

그래서 명주(溟洲; 강릉)로 일시 피란해 머문다. 그것이 대체로 900년 전후한 시기였던 듯하니 진경대사 나이 46세 전후한 때이다. 이때 69세의 노경에 접어들었던 낭공대사 행적도 사굴산문의 근거지인 이곳 명주에 머물고 있었다. 아마 진경대사는 이때 낭공대사를 찾아뵙고 그와 인연을 맺었을 듯하다.

그러나 궁예가 901년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를 자처하다가 뒤이어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철원(鐵圓)으로 도읍을 옮기기 시작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이들은 함께 강릉을 벗어나 신라 왕도인 서라벌로 자리를 옮긴 듯하다. 이해 7월 효공왕이 73세의 낭공대사를 왕사로 초빙한 것을 계기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함께 떠나왔던 진경대사는 경주를 거쳐 곧바로 김해로 찾아갔던 듯하다.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그곳의 실력자인 김율희(金律熙, 蘇律熙와 동일인, 쇠유리의 한자표기에서 뜻을 취하면 김율희가 되고 음을 취하면 소율희가 된다)가 선종을 외호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그의 보호를 받으며 선지(禪旨)를 전파할 목적으로 찾아갔다고 보아야 한다.

진경대사 자신이 김유신의 후손으로 임나 왕족의 후예였으니 이곳은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김율희도 그의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 김해는 진경대사에게 있어서 전란을 피해 있으면서 선지를 펼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막 50대로 접어든 진경대사는 이곳에서 김율희의 도움으로 창원 봉림산에 봉림산문을 개설하여 혜목산문(慧目山門)의 기치를 일신한다. 이렇게 김해에 와서 터를 잡아 안도하고 나자 진경대사는 강릉에서 인연을 맺어 신세진 낭공대사를 김해로 초빙한 듯하니 낭공대사가 경주를 떠나 김해로 가는 것이 907년 늦여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공대사는 이곳에서 진경대사와 김율희 부자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915년까지 머물다 다시 신덕왕의 초청을 받고 이해 7월16일 경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바로 명요부인의 청으로 석남사로 내려가서 다음해인 916년 2월12일 이곳에서 돌아간다. 85세의 고령이었다.

이때 진경대사는 62세의 노인으로 봉림산문의 주인이 되어 이곳으로 피란해 오는 구산선문의 선사들을 보살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선종계에서 그의 위상은 막강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낭공대사의 사리탑과 탑비 건립에 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었을 듯하다. 사리탑 건립에 진경대사가 직접 관여하게 된 데는 낭공대사와의 친분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진경대사가 낭공대사 사리탑이 건립되는 917년 11월보다 1년 뒤인 918년 12월 4일에 신라왕도 경주로 올라가서 국사가 되는 것으로 보아도 이런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낭공대사의 부도인 <석남사 부도>가 진경대사의 의도에 따라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양식을 계승하면서 단순해지고 다시 진경대사 자신의 부도인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석남사 부도> 양식을 계승하면서 더 단순해지는 과정을 거치는 듯하다. 그 결과 호남의 부도양식이 영남으로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석등 양식의 획기적 변화  


  그런데 이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에서 보이는 옥개석 귀꽃장식과 기단 상대 연화대석의 연꽃잎 표면 보상화문 장식 및 중대석 안상 안의 마름모꼴 꽃무늬 장식과 두 가닥 선등은 신라말 백제 지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후백제 시대에 화려하게 꽃핀 석등 양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들의 상호 연관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장구통 모양의 간주석(竿柱石)을 가진 후백제 특유의 석등 양식의 진전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석등은 벌써 백제 무왕(武王, 600∼640년) 때부터 8각으로 만들었던 사실을 익산 미륵사지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 <미륵사지 출토 석등 8각 옥개석>(도판 6) 및 <미륵사지 출토 석등 연화하대석>(도판 7)과 <미륵사지 출토 석등 간주석>(도판 8) 등이 그 확실한 증거물이다. 그러나 미륵사지 출토 석등 부재물에서 볼 수 있듯이 연화하대석 위에 길고 가는 8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넓은 연화상대석을 올려놓은 다음 그 위에 8각 화사석(火舍石; 등불을 넣어 놓는 돌집)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덮어놓는 결구로 짜여 있다.

그러니 8각기둥인 간주석(竿柱石)이 상대석 이상의 석등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쉽게 파괴되어 삼국시대 석등으로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불국사가 지어질 때인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도판 9)과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이 가장 오래된 예로 꼽히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석등들은 아직 상하 연화대석이나 옥개석 추녀머리 등 어디에도 귀꽃장식이 없고 연화대석의 연꽃잎 표면을 장식하는 꽃무늬도 없다.

그런데 9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법주사 사천왕 석등>(도판 10)에 이르면 화사석의 화창(火窓) 좌우에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하거나 상하 연화대석의 연꽃잎 표면에 모란꽃잎 모양의 보상화문(寶相華文)을 덧장식하는 장식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쌍사자석등이 출현한다.

<법주사 쌍사자석등(法住寺 雙獅子石燈)>(도판 11)이 그것이다. 8각 간주석 대신 사자 두 마리가 배를 맞대고 연화하대석에 서서 연화상대석을 두 앞발과 머리로 각각 받쳐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상하 연화대석의 연꽃잎 표면에는 품(品)자형 구슬무늬와 보상화문이 각각 장식되어 시대양식의 동질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후 선종이 들어와 구산선문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신흥 선종사찰에서는 부도미술의 발전과 발맞추어 서로 양식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석등양식을 다양하게 발전시켜 나간다. 그 선구적인 형식을 보이는 것이 <보림사 대적광전앞 석등>(도판 12)이다. 이 석등은 좌우에 서 있는 쌍탑에서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경문왕 10년(870)에 만들어진 것임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석등에 있어서 기년명을 가진 유일한 기준작이기도 하다. 쌍탑과 동시에 조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서탑지(西塔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탑을 만든 때. 함통(咸通) 11년(870) 5월(月) 일(日). 때는 응왕(凝王; 景文王 凝廉) 즉위 10년이다. 만든 이유. 헌안왕 왕생을 경축하기 위해 만든 탑. 서원부(西原部, 지금 청주) 소윤(小尹) 내말(奈末; 제11위 관등) 김수종(金邃宗)이 상주해 들려서 칙명을 받들다. 백토(伯土) 급간(及干; 제9위 관등)이 주선하다.(造塔時. 咸通十一年五月日. 時凝王卽位十年矣. 所由者. 憲王往生 慶造之塔. 西原部小尹 奈末金邃宗聞奏, 奉勅. 伯土及干珍)”

탑지에서 밝힌 대로 이 석탑들은 경문왕 10년(870)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니 동탑지에서도 같은 해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이에 있는 <보림사 대적광전앞 석등> 역시 이 동서 양탑과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양식기법으로 보아도 이의 타당성이 입증된다. 기본적으로는 상하 연화대석 사이에 8각 간주석을 세워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일반형 석등이지만 그 장식성이 판연히 달라져 있다.

우선 연화하대석에서 뒤집어진 연꽃잎마다 그 끝 복판에 귀꽃 장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린 고사리 머리처럼 말려올라간 덩굴수염 두 개가 등을 맞대고 있는데 그 위로 모란 꽃잎을 포개놓은 듯한 보상화 장식이 덧붙여져 있는 모습이다. 이런 귀꽃 장식은 옥개석 8각지붕마루의 망와(望瓦) 표현에도 그대로 부여되고 있다.

그리고 연화상대석의 위로 핀 연꽃잎 표면에는 모란꽃잎이 여러 장 포개져 있는 듯한 보상화 장식을 더하여 화려한 장식성을 과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옥개석 상륜부에서는 석탑 상륜부의 여러 특징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烟)의 표현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석등 양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런 획기적인 상륜부의 양식 변화는 이후 석등 양식에도 그대로 계승되지만 부도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당장 884년에 바로 그 보림사에서 이루어지는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부터 보개(이 부분은 현재 파손되어 있음)와 보륜·수연이 갖추어진 상륜부를 가지게 된다. 이 양식이 885년에 이루어지는 하동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 부도>를 거쳐 울주 가지산 <석남사 부도>로 이어지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그런데 이 석등이 만들어지기 직전에 광주 부근 무등산 자락의 담양군 남면(南面) 학선리(鶴仙里)에 있는 개선사(開仙寺)에서는 전례없이 특이한 형태의 석등을 창조해 놓는다. 마치 둥근 연화소반(蓮花小盤) 둘을 주둥이끼리 맞대어 놓은 듯한 표현으로 길고 가는 8각기둥이었던 8각 간주를 대신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장대 같던 8각 간주의 위태로움이 일시에 사라지며 석등도 안정감을 되찾게 되었다. 아마 이런 의장은 연화소반을 뒤엎어 함께 나르는 설거지 장면에서 번개처럼 터득해 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획기적인 양식변화를 보인 이 석등의 화사석에 그 조성 내력이 새겨져 있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경문(景文)대왕님과 문의(文懿)황후님, 대랑(大娘; 경문왕의 둘째 왕비이자 문의황후의 여동생인 듯)님이 원등(願燈)으로 심지를 세우다. 당 함통(咸通) 9년(868) 무자 한봄날 저녁에 달빛을 잇다. 전국자감경 사간 김중용(金中庸)이 기름값으로 내놓은 벼 300석을 올려보내다. 승 영판(靈判)이 석등을 건립하다. 용기(龍紀) 3년(891) 신해 10월 승 입운(入雲).(景文大王主 文懿皇后主 大娘主, 願燈 立炷. 唐咸通九年戊子仲春夕, 繼月光. 前國子監卿 沙干金中庸, 送上油粮業租三百碩. 僧靈判建立石燈. 龍紀三年辛亥 十月 日 僧入雲)”

선종을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경문왕이 헌안왕의 두 따님인 제1·제2왕후와 함께 무진주 무등산 자락에 원등(願燈)으로 이 석등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현재 개선사(開仙寺)로 쓰고 있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개선사(開禪寺)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보물 제111호인 이 <개선사지 석등>(도판 13)은 장구통형 석등의 시원을 이루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연화소반을 주둥이 맞대어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간주석 형태를 보이니 간주석이라기 보다는 중대석이라는 표현이 더욱 타당할 듯하다. 상대·중대·하대의 3중 기단부를 갖춘 8각부도의 결구와 같아진 것이다.

이런 간주석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가 편안해지자 화사석을 마음놓고 확장하여 8면에 화창(火窓)을 뚫는 대담성을 보이고 옥개석에는 8모에 높은 귀꽃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크고 넓직한 화사석을 받치기 위해 넉넉하게 커진 연화상대석의 연꽃잎 표면에는 겹꽃 장식이 화려한 모란꽃잎을 겹겹이 새겨 장식해 놓았다.

이런 석등 양식은 곧바로 보물 제267호인 <임실 용암리 석등(任實 龍岩里 石燈)>(도판 14)으로 이어진다. <개선사지 석등>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다만 마주 붙여놓은 연화소반의 간격이 조금 벌어지면서 길이가 길어지니 중대석 전체가 흡사 장구통 같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이를 장구통형 석등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이밖에 이 석등은 <개선사지 석등> 형식에다 두 가지 요소를 더 보태고 있다. 장구통형 중대석받침으로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한 받침돌 하나를 연화하대석 위에 첨가하였고 상륜부에 노반(露盤)이 더 설치되어 있다. 아마 그 위에 보륜과 보개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보림사 대적광전 앞 석등> 양식에서 받은 요소일 것이고, 구름무늬 받침돌은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제26회 도판 9)에서 받은 영향일 터이다.

높이가 518cm나 되고 조각 기법이 웅혼장쾌한 것으로 보면 견훤이 후백제왕을 자칭하여 후백제 건국을 천하에 공포하는 90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임실 용암리 석등>을 뒤잇는 양식의 석등이 보물 35호인 <실상사 석등(實相寺 石燈)>(도판 15)이다. 견훤이 실상산문과 화해하고 나서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과 그 탑비를 세우던 시기인 915년 경에 만들어졌을 듯하다.

이 <실상사 석등>에 이르면 장구통형이 양식으로 굳어지는 현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중대석의 연화소반이 맞물린 자리가 더욱 벌어지면서 완전히 장구통 모양이 되는데 그 벌어진 사이 공간에는 네잎 클로버와 같은 꽃송이를 장식하고 꽃과 꽃 사이를 두줄 띠로 연결해 놓았다. 이런 꽃띠 장식은 아래 윗단에도 반복된다. 그리고 연화 하대의 연꽃잎 가운데 끝부분과 옥개석 및 보개의 8각 지붕마루 끝에는 고사리 머리 모양의 귀꽃이 솟았다.

그런데 이들 표현이 천편일률로 형식화된 반복적인 표현이라 틀에 박힌 듯한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실상사가 가지고 있던 신라적인 잔재가 조각기법에서 이런 형식성을 더욱 부추겼을 수도 있다. 이 <실상사 석등>은 조금도 파손되지 않고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복발과 보개, 수연 등 상륜부를 원형대로 볼 수 있는데 <보림사 대적광전 앞 석등>의 상륜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복발에도 꽃띠 장식을 더하였고 수연 아래에 구름무늬띠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런 장구통형 석등 양식이 신라지역으로 들어간 사실은 합천 가야산 <청량사 석등(淸寺 石燈)>(도판 1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상사 석등>보다 양식화가 더욱 진행되어 장구통 모양의 중대석이 연화소반을 마주대어 놓은 것 같은 모양에서 변화했다는 원뜻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아래쪽 연꽃잎 장식은 아래로 뒤집어져서 복련판 형태를 취하고 위쪽 연꽃잎 장식은 위로 피어나서 앙련판 장식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중앙의 장구통 형태는 두 소반 사이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장구통 모양으로 변형되어 8줄기의 세로 패임과 두 줄기의 가로 패임으로 구획을 나누고 그 가운데 8면 중앙에 마름모꼴의 십(十)자화 꽃무늬를 새기어 두 줄로 연결하는 장식을 가하였다.

그리고 아래 위 복련 앙련의 연꽃잎 장식 아래 위로는 구름무늬대를 한층씩 더 두르고 연화 하대 바로 위에서는 8각대 위에 복련 연화대를 하나 더 올려놓는 중첩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의미한 장식을 반복하고서도 부족해서 연화하대 기단부의 8면 안상 안에는 사자상과 향로 등을 교대로 돋을새김하고 화사석 4면 화창 곁에는 사천왕상을 새겨놓았다.

후백제 지역에서는 <개선사지 석등> 이래 <실상사 석등>에 이르기까지 장구통형 석등은 한결같이 화창이 8면에 뚫려 있어 8면 통창(通敞; 넓고 밝아 시원하고 환함)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신라지역으로 넘어와서는 중대에서 장구통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8면 통창의 개방성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라 전통 방식대로 4면 화창을 두고 말았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장구통형 석등 형식이 신라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시점에서 그럴 만한 계기를 찾는다면 920년 10월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함락하고 진례성(進禮城; 창원)까지 진격해 들어간 사실일 것이다. 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런 후백제 양식의 석등이 당시 대야성 관내인 합천 청량사에 세워진 이유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이 <청량사 석등>은 921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때 이 <청량사 석등>의 장구통형 중대석에 새겨지는 꽃띠무늬 장식이 그대로 울주 <석남사 부도>나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의 중대석에 새겨지고 있다. 이들의 상호 연관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920년 전후한 시기의 시대양식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결국 <석남사 부도>나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의 꽃띠무늬 장식도 후백제 특유의 석등 양식인 장구통형 석등의 영향을 받은 요소라는 얘기다.


석등양식의 대단원,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이후 후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장구통형 석등 양식은 국보 제12호인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 앞 석등>(도판 17)에 이르러서 그 양식의 완결을 보게 된다.

<청량사 석등>에서 보듯이 연화소반을 맞붙여 놓은 듯한 의장으로 출발했던 <개선사지 석등> 양식의 본뜻이 완전 퇴색하여 순수한 장구통 모양의 중대석이 된 이후에, 이에 대한 반성과 후백제 양식과의 재결합 과정을 거치면서 재창조해 낸 것이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이다.

<개선사지 석등> 이래 진행된 각종 양식화 현상들을 철저히 파악하여 과감한 생략으로 본질만 남겨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높여 놓은 것이 바로 이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인 것이다. 그래서 장구통 모양의 중대석에서 연화소반의 흔적도 사라지고 구름무늬의 어지러움도 없어져 단순소박한 백통 향로와 같이 고고하고 맑은 아름다움만 남게 되었다.

너무나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듯하기에 마름모꼴의 십자화를 두 가닥 띠로 연결하는 꽃띠 장식만은 중앙에 선명하게 남겨두었고 향로 모양의 중대석 받침대 아래로는 구름무늬 띠를 둘러 연화 하대와 만나게 하였다.

화사석은 화창을 넷만 뚫어 절제미를 강조하고 상륜부도 모든 요소를 하나씩만 표현하여 상징성을 추구하였다. 장구통형 석등 양식이 고도의 추상화 과정을 거쳐 양식적인 완결을 이루어낸 것이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양식이 <국보 제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서 그 양식을 마무리짓고 불보살상 양식이 <석굴암 불보살상> 양식으로 완결되며 석탑은 <불국사 다보탑>으로 끝이 나듯이 석등 양식도 바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에서 그 아름다움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화엄사 석등은 그 규모도 다른 석등들과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여 높이만 6.36m에 이른다.

이런 거대한 규모에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만한 석등이라면 아무 때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고 백성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드높아 자신감이 넘쳐나는 시기에만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석등 양식이 유행하던 시기 중에 그럴 만한 시기를 꼽는다면, 그것은 견훤이 신라를 무찔러 그 수도를 함락하고 국왕을 폐립하며 천년구도에 쌓인 보물들을 노획하고 자녀(子女)와 백공(百工) 장인들을 포로로 잡아 당당하게 개선하던 927년 11월경일 것이다.

그러니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928년경에 신라 정복의 기념으로 견훤왕이 국력을 기울여 건립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후에 이 석등을 능가하는 석등은 다시 만들어지지 못하지만, 이 석등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요소들은 각 시대 석등 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또 이후 고려 통일 초기에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각종 부도 양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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