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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3
 관리자  08-22 | VIEW : 3,606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3]    
    

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50만근의 동으로 만든 황룡사 종  


     경덕왕(景德王, 742∼765년) 재위 기간이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불국시대(佛國時代)의 정점에 있었다는 사실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해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찌 불국사와 석굴암뿐이겠는가. 수많은 문화유산이 장구한 세월 속에 모두 인멸되어 그 자취를 남기지 않을 뿐이다.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수많은 문화사업이 이루어졌던 사실은 ‘삼국유사’를 통해 그 일부나마 기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 첫째가 황룡사(皇龍寺) 동종과 분황사(芬皇寺) 동조 약사여래에 관한 기록이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종·분황사 약사·봉덕사종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35대 경덕대왕은 천보(天寶) 13재(載; 당 현종은 천보 3년 1월1일부터 年을 載로 고쳐서 14재까지 재위하고 안록산 난으로 숙종에게 전위한다. 숙종이 至德 3載에 이르러 建元 元年으로 환원하니 연을 재로 쓰는 것은 천보 3재에서 지덕 3재에 이르는 14년뿐이다. 경덕왕 13년, 서기 754년임) 갑오에 황룡사종을 만들었다. 길이는 한 길 세 치(一丈三寸)고 두께는 9치이며 무게는 49만7581근이다. 시주는 효정(孝貞) 이찬과 삼모(三毛)부인이고 장인(匠人)은 이상댁(里上宅) 하전(下典)이다. 숙종(肅宗, 1096∼1105년)조에 새 종을 거듭 만드니 길이가 6자8치다.

또 다음해인 을미년(755)에 분황사 약사동상을 만들었다. 무게가 36만6700근이고 장인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强古) 내말(乃末)이다. 또 황동(黃銅) 12만근을 희사하여 선고(先考; 돌아간 아버지) 성덕왕을 위해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했으나 이루어내지 못하고 돌아가자 그 아들 혜공대왕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유사(有司; 맡은 관청)에 명하여 장인들을 모아서 이를 이루어내고 봉덕사(奉德寺)에 봉안하였다.

봉덕사는 곧 효성왕(737∼741년)이 개원 26년(738) 무인에 선고 성덕대왕의 추복(追福)을 받들기 위해 창건한 곳이다. 그래서 종명(鐘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 하였다. 조산대부전태자사의랑한림랑(朝散大夫前太子司議郞翰林郞) 김필월이 왕명을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많아서 싣지 않는다.”

황룡사 동종과 분황사 약사여래 동상은 현존하지 않으나 <봉덕사 성덕대왕신종>(도판 1)은 현재까지 전해져서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17회에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그 결과 이 ‘삼국유사’ 기록 내용이 크게 틀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다만 마무리지은 해를 대력 경술(770) 12월이라 하여 현존한 성덕대왕신종명에서 밝힌 대력 6년(771) 신해 12월14일과는 1년의 오차를 보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분명히 일연(一然)대사가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당시에도 이 <성덕대왕신종>이 남아 있어 종명을 읽었을 터인데 어째서 이런 실수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옮겨 적는 과정에 그와 같은 착오가 발생했으리라 생각된다. 혹시 종명을 직접 검색하지 않고 당시까지 남아 있던 봉덕사 사지(寺誌)를 옮겨 적던 중 다른 기록과 혼동하여 이런 잘못을 저질렀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립하던 시기에 이미 황룡사 동종과 분황사 약사여래동상을 먼저 이루어내었던 사실을 이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황룡사 동종이 49만7581근으로 <봉덕사 성덕대왕신종>의 12만근에 비해 구리 투입량이 4배가 넘는데도 높이가 겨우 한 길 3치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두께는 9치라 했다. 한 길 높이로 만들었다는 현존 봉덕사종의 실측치가 높이 303cm 두께 20.3cm여서 한 자 길이가 30cm 정도였다는 계산이 나오니 9치는 27cm에 해당한다. 따라서 구리 투입량과 크기의 비례가 서로 맞지 않는다. 혹시 한 길 석 자(一丈三尺)를 한 길 세 치로 잘못 적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거대한 황룡사 동종은 봉덕사종에서 보여주는 신라 범종의 완성미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미숙성이 있었던 듯, 만든 지 300여 년이 지난 고려 숙종(1096∼1105년) 연간에는 벌써 못 쓰게 돼 새 종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과중한 무게와 크기 및 두께가 종의 기능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황룡사 동종을 만드는 비용을 댄 시주가, 경덕왕의 첫 왕비로 경덕왕이 21세쯤 되었을 때인 경덕왕 2년(743) 봄에 아들을 못 낳는다 하여 출궁시킨 삼모부인으로 되어 있다. 즉 경덕왕이 출궁시킨 전 왕비인 것이다. 그리고 함께 시주한 이는 이찬 김효정이라 하였다. 이 김효정은 삼모부인의 숙부뻘되는 인물일 듯하다. 삼모부인은 경덕왕의 외조부 김순원의 아우인 이찬 김순정(金順貞)과 당대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수로부인(水路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여인이라고 생각된다. 경덕왕에게는 5촌 이모뻘이었다.

그런데 이들 외척가문이 신문왕 이래 계속 군림하며 왕권을 좌우하게 되니 경덕왕은 등극하자마자 무자(無子)를 핑계삼아 과감하게 왕비를 출궁시키고 그 조카딸인,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滿月)부인을 맞아들여 새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이로써 외척의 발호를 억제하고 그들의 반발도 무마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출궁당한 지 10년도 넘은 전 왕비 삼모부인의 대시주를 받아들여 황룡사 동종을 만들게 했으니 그 통치능력은 불국시대의 절정기를 주도해 내고도 남을 만하다 하겠다.

더구나 김효정은 일찍이 성덕왕 13년(714) 1월에 행정수반인 중시(中侍)가 되어 김유신계라고 생각되는 성덕왕의 첫 왕비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외척가문의 중심인물이다. 그런 그가 진흥왕이 세운 진골 왕통의 원찰이며 선덕여왕이 세운 구층탑이 있어 삼국통일의 위업(偉業)을 과시하는 통일신라 왕국의 상징적 중심 사찰인 황룡사에 50만근에 가까운 동을 시주하여 동종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면 경덕왕의 절대왕권에 절대복종을 맹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황사 약사동상 조성이나 불국사와 석굴암 건설 등이 이처럼 비대해진 집권가문들의 재력을 흡수하는 방편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 김문량(金文亮) 김대성(金大城)으로 이어지는 집권가문이 불국사와 석굴암의 조영에 앞장서 깊이 관여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문량을 성덕왕 5년(706) 8월에 중시가 되었다가 성덕왕 10년(711) 10월에 순직한 김문량(金文良, ?∼711년)과 동일인으로 인정하고, 김대성을 경덕왕 4년(745) 5월에 중시가 되었다가 경덕왕 9년(750) 1월에 면직된 김대정(金大正)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덕왕은 성덕왕이 다져놓은 굳건한 국력을 바탕으로 집권가문들의 축적된 힘을 문화사업에 기울이게 함으로써 불국시대의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23년(754)에는 선덕여왕 때 조성한 영묘사(靈妙寺) 장륙상(丈六像)을 개금(改金; 불상에 금박을 다시 입히는 일)하기 위해 벼 2만3700석을 시주하기도 한다.

  
만불산(萬佛山)의 기교  


    그러나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형 예술품의 대표작은 만불산(萬佛山)이라 불리던 소형 불국세계의 모형 조각인 것 같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삼국유사’ 권3 만불산 항목을 옮겨 보겠다.

“경덕왕(742∼764년)은 또 당나라 대종(代宗, 763∼779년)황제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인에게 명하여 5색(色) 담요를 만들게 하고 또 침단목(沈檀木; 오랜 세월 물 속에 담가 두어 목질이 치밀해지고 향기가 나는 나무)을 조각하여 명주(明珠; 밝게 빛나는 구슬)와 미옥(美玉; 아름다운 옥)과 함께 가산(假山; 꾸며 만든 산)을 만들게 하니 높이가 한 길 남짓하였다.

이것을 담요 위에 놓으니 산에는 깎아지른 바위와 괴석 및 간혈(澗穴; 물이 흘러나오는 동굴)이 구간마다 나뉘어 있는데 매양 한 구역 안마다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는 광경이나 여러 나라 산천의 정경이 있었다. 산들바람이 문으로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날고 제비와 참새가 날아올라 춤추며 들락거리니 자세히 살펴보아도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없었다.

그 안에 만불(萬佛; 만 구의 불상)을 봉안했는데 큰 것은 한 치(3cm 정도)가 좀 넘고 작은 것은 8∼9푼이라서 그 머리는 혹 큰 기장알만하고 혹 녹두 반쪽만한데 나발(螺髮; 소라 껍데기 모양의 머리칼)과 육계(肉; 살이 솟아서 이루어진 상투), 백호(白毫;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 둥글게 말려 있음)와 미목(眉目; 눈썹과 눈)이 뚜렷하여 상호(相好; 잘생긴 모습)를 다 갖추었으나 다만 방불할 뿐 상세할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서 만불산이라 일컬었다.

다시 금과 옥을 새겨서 유소(流蘇; 기나 가마 등에 장식하는 술)와 번개(幡蓋; 장대에 걸어 늘어뜨린 천이나 덮개 모양) 및 암라(菴羅; 망고나무), 담복(; 치자)의 화과장엄(花果莊嚴; 꽃과 과일로 장엄함)과 백보누각(百步樓閣; 백 계단이나 되는 높은 누각)과 누대(樓臺), 전각(殿閣), 당우(堂宇), 정사(亭)를 지었는데 모두 크기는 비록 작으나 형세는 살아 움직였다.

앞에는 빙 둘러 서 있는 비구의 형상이 1000여 구가 있고 아래에는 자금색(紫金色; 자줏빛 도는 금색) 종(鍾) 3틀이 늘어서 있는데 모두 종각과 포뢰(蒲牢; 용의 일종 곧 龍)가 있고 고래로 당목(撞木; 치는 나무)을 삼았다. 바람이 있어서 종이 울면 빙 둘러 선 승려들은 모두 엎드려 땅에 닿게 절하고 범음(梵音; 경 읽는 소리, 범패 소리)이 은은하게 들리니 대개 종에서 끌려 나는 소리다.

비록 만불이라고 하나 그 실제는 헤아릴 수가 없다. 이미 이루어져서 사신 편에 당 대종에게 보내니 대종이 보고 탄복하기를 이렇게 하였다. ‘신라의 재주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지 사람의 재주가 아니다.’ 이에 구광선(九光扇; 9가지 빛을 내는 부채)을 바위 사이에 두어 불광(佛光)이라 부르고 4월8일에 양가승도(兩街僧徒; 장안의 큰길 좌우에 사는 승려, 행정 편의상 좌우가로 나누어 통괄하였음, 즉 장안의 모든 승려)에게 조서를 내려 내도량(內道場; 궁중 안에 두었던 사찰)에서 만불상에 예불하게 하고 삼장법사인 불공(不空)에게 명하여 밀교(密敎) 경전을 1000번 염송하게 하여 이를 찬탄 경축하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그 교묘한 재주에 탄복하였다.”

위에 번역한 내용대로라면 지금 세상에 기계와 기기를 응용하여 만든다 해도 이보다 잘 만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녹음장치도 없는 상황에 어떻게 범패 소리까지 은은히 울려 퍼지게 장치를 했단 말인가. 1200여 년 전에 이미 최첨단 설치미술의 선구를 보여줬던 것이다. 그래서 설치미술의 도사라 할 수 있는 밀교승의 대표 불공 삼장법사에게 다라니를 1000번씩이나 염송하게 하여 그 설치미술에 생동감을 불어넣게 하였던 모양이다.

불공(不空, 705∼774년)은 불공금강(不空金剛, amogh-a-vajr-a)의 약칭으로 인도 사자국(지금의 스리랑카) 출신이다. 진언종(眞言宗) 제6대 조사(祖師)가 되는 인물인데 16세인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스승인 금강지(金剛智) 삼장을 따라 중국에 와서 70세까지 살며 밀교를 널리 전파한 대선지식이다.

일찍이 천보 5년(746)에 밀교 경전을 더 구하기 위해 사자국에 갔다 오자 당 현종도 그에게 깊이 귀의하였다 하니 현종의 손자인 대종이 그에게 만불산을 경축하는 다라니를 염송하게 했을 때(764년경), 이미 환갑 나이로 광지(廣智)삼장의 존호를 받았을 것이다. 당나라 밀교를 총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에게 직접 나서서 만불산을 대상으로 성대한 밀교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하니 만불산의 조형적 가치가 얼마나 뛰어났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제유민 진표(眞表)율사의 등장  


     경덕왕이 이처럼 절대왕권을 행사하면서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불국세계를 건설해가고 있을 때 옛 백제 지역에서는 또 다른 불국세계를 건설하려는 운동이 민간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일찍이 삼국 말기 백제에서 미륵신앙이 크게 일어나서 백제 사람들은 백제가 미륵 하생의 땅으로 선택되기를 희망하여 익산 용화산 아래에 미륵사를 크게 짓고 무왕(600∼640년)과 선화공주가 미륵의 화신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 미륵사상을 뒤늦게 전수한 신라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미륵의 화신으로 떠받들며 화랑을 그 무리로 삼아 삼국통일을 이루어내더니 이제는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확신 아래 화엄 불국사를 건설하여 불국시대를 연출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신라에 망하여 그 지배 아래 들어간 백제 유민들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좌절의 심도는 미륵의 하생처라고 생각했던 익산 미륵사 주변 일대가 더욱 깊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백제 영역 안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일찍부터 벽골제(碧骨堤; 볏골 방죽의 한자식 표기일 것이다)라는 인공저수지를 만들어 쌀 생산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그래서 망국 이후 신라 조정의 수탈이 우심하였을 터이니 그 분노와 절망은 다른 지역에 비할 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국시대의 문화절정기를 맞게 되자 각종 문화사업을 펼치기 위해 그 수탈은 더욱 가혹해졌을 것이고 백성의 고통은 그에 비례하여 더욱 커지기만 했을 것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어찌 이들을 절망으로부터 구해줄 구세주의 출현이 없을 수 있겠는가. 현실적인 고통과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과 기대에 부푼 미래를 꿈꾸게 하는 가르침을 베푸는 이가 나온 것이다.

벽골군(碧骨郡, 볏골군), 즉 김제군 만경현(萬頃縣) 출신의 진표(眞表, 718∼?)율사(도판 2)가 그 사람이었다. 진표율사의 전기는 현재 3종이 전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이 북송 태종 단공(端拱) 원년(988)에 찬녕(贊寧)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14 백제국금산사진표전(百濟國金山寺眞表傳)이다. 그 다음이 고려승 영잠(瑩岑)이 금(金) 장종(章宗) 승안(承安) 4년, 즉 고려 신종 2년(1199)에 지은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기명(關東楓岳山淵藪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記銘)’이고, 남은 하나가 충렬왕 6년(1280)에 일연(一然)대사가 지은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이다.

그중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기명’은 지금까지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外金剛面) 용계리(龍溪里) 발연사 터에 남아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전문을 다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 다음 항목에 ‘관동풍악발연수석기’라는 항목으로 이를 발췌하여 옮겨놓아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일연이 그때까지 전해오던 진표율사전을 바탕으로 ‘진표전간’을 지으면서 그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발연사의 진표율사 비문(碑文) 내용을 옮겨 적어 뒷사람으로 하여금 비교해보게 한 것이다.

이 세 가지 기록은 비록 연대기에서 20여 년의 차이를 보이는 등 서로 맞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진표라는 인물의 특성은 한결같은 내용으로 전하는데 우선 세 책이 다 진표가 전라도 만경(萬頃)현에서 출생한 백제 유민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송고승전’에서는 아예 당나라 때 백제국 금산사(金山寺) 진표전(眞表傳)이라는 제목을 달아 진표가 백제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진표는 ‘진표전간’에서 밝힌 대로 신라 성덕왕 17년(718)생이거나 금강산 발연사의 진표비에서 밝힌 대로 성덕왕 33년(734)생이거나 간에 백제가 멸망한 뒤 반세기 이상 지난 뒤에 신라 백성으로 탄생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중국 사람이 뒷날 진표의 전기를 ‘고승전’에 편입시키면서 굳이 백제국인이라고 표기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진표 자신이 백제 유민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백제국인임을 자처해서 자타가 이를 공인하였기 때문에 국내에서 그의 전기를 지을 때 이렇게 표기하였고, 그 기록이 그대로 중국에 전해져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되었을 듯하다.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중국인으로서 이를 교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진표가 태어나 살던 시기가 통일신라시대라는 것을 잘 아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진표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진표를 백제시대 사람으로 볼 수 없으므로 백제국인이라는 표제는 삭제하고 말았던 것 같다.

대신 그의 출신지를 분명히 밝힌 것으로 그가 백제 유민임을 강조하고 있으니 ‘발연사석비(淵寺石碑;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장골입석기명을 줄여서 이렇게 부르겠다)’에서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라 했고,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에서는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 사람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4 만경현(萬頃縣)조에 ‘본래 백제 두내산(豆乃山)현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김제군의 영현(領縣; 명령권 안에 있는 현, 즉 속현)으로 삼았다’고 했으니 두 기록이 모두 맞다. 다만 도나산촌이 아니라 도나산현이어야 하고 그곳이 지금의 김제군 만경면에 해당하는 만경현 대정리였던 것이다.

지금도 징개맹갱이(金堤萬頃)뜰로 불리는 옛 백제 지역 중 제일 넓은 평야지대에서 출생한 진표율사는 ‘진표전간’에서 그 아버지의 이름이 진내말(眞乃末)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성씨가 진(眞)씨였던 듯하다. 진씨는 백제의 일급 지배계층 성씨 중 하나로 태안반도 일대를 세력기반으로 하던 해양족의 중심 가문이다.

그 부친도 백제 관등(官等) 제3위(位)인 은솔(恩率) 벼슬을 했던 모양이니 통일신라가 백제 관인에게 신라 벼슬을 줄 때 3위인 은솔을 신라 관등 제 11위인 내마(柰麻 혹은 乃末)로 강등한다는 사실이 ‘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 백제 사람 관위조에 실려 있다. 내말은 관위(官位) 명칭이니 이름으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진표는 태안반도에 세력기반을 두고 해양세력을 좌우하던 백제 일급 지배층인 진씨 가문의 후손으로 백제 멸망 이후에 만경현에서 출생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 그 부친이 신라 벼슬 내말의 지위를 물려받고 있었다면 백제가 멸망할 즈음에 활동하였을 그 조부대에는 최소한 제3관위인 은솔이거나 제2관위인 달솔(達率) 정도의 관위를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태안반도에서 만경땅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안반도를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운동과 그 실패, 백강 입구에서의 대해전(大海戰)과 백제·일본 연합 수군의 대패 등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진씨 일족이 백제 패망 후에 금강 남쪽 만경강 입구 지역인 만경에 정착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이 살던 태안반도의 내포평야는 쇠들강문이(牛坪江門) 뜰이라 하여 한 쪽 끝으로는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들로 만경의 자연조건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만경강이나 당시 큰물(今勿)로 불리던 삽교천의 규모와 형세가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진씨 중 일부가 이곳 만경현에 터잡아 살면서 복국(復國; 국권을 회복함)의 꿈을 키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머니 이름이 길보랑(吉寶)이고 성이 정(井)씨라 한 것은 그가 태어난 대정리(大井里)와 무관하지 않을 터인데 이 정씨가 본래 백제시대에는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지배세력으로 진씨와의 혼인관계에 의해 진씨 일족을 이곳으로 이주시킨 당사자 아니었나 한다.

어떻든 만경현 일대에서 백제 유민을 이끌던 진내말의 아들로 태어난 진표는 백제 부흥의 꿈을 갖고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기 때문에 달리기와 활쏘기에서 아무도 그를 앞지를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사냥 나가기를 좋아했는데 개원(開元, 713∼741) 연간의 어느 해 봄에 홀로 사냥을 나갔다가 장난삼아 한 일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행하게 된다. ‘송고승전’ 진표전에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 놓고 있다.

“석진표는 백제 사람이다. 집이 금산(金山)에 있어 대대로 사냥을 해오니 진표도 날쌔고 민첩하며 활을 잘 쏘았다. 개원 연간에 당하여 짐승을 쫓던 나머지 밭두둑 사이에서 쉬다가 버들가지를 꺾어 개구리를 꿴 꿰미를 만들어 물 속에 넣어두었다. 구워먹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산으로 들어가 사냥하면서 사슴을 쫓다가 산 북쪽 길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개구리를 꿰미에 꿴 일을 완전히 잊었다.

다음해 봄에 이르러 사냥 나가던 길에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물에 가보니 지난해 꿰어 놓은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진표는 이때 몹시 한탄하며 자책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아뿔싸 어떻게 입과 배를 채우자고 저들로 하여금 한 해가 지나도록 고통받게 했단 말인가.’ 이에 얼른 버들가지를 끊어 조심스럽게 풀어준 다음 이로 인해 뜻을 일으켜 출가하였다.”

신라의 꿰미에 꿰여 있는 백제 사람들의 처지가 그가 꿰어 놓은 개구리들과 같다는 생각에 심각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까봐 허락도 받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칼로 머리칼을 잘라 출가한 다음 신체에 극한적인 고통을 주는 참회법으로 계법(戒法)을 구했다 한다.

그러나 ‘발연사석비’에서는 12세에 출가할 뜻을 보이자 부친이 이를 허락하였다 하고, 금산수(金山藪) 순제(順濟)법사에게 가서 출가하였다 하고 있다. ‘진표전간’에도 12세 나던 해에 금산사 숭제(崇濟)법사에게 출가하였다 하고 있다. 우리측 기록에서는 발심 동기가 되는 개구리 꿰미 얘기는 빠져 있으나 한결같이 12세에 출가했다 하니 이 개구리 꿰미 사건은 진표가 12세 나던 해에 일어났던 모양이다.

진표는 출가하고 나서도 개구리들이 고통받았던 만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그 심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보상적 수련을 계속한다. 이는 백제 유민들이 현재 받고 있는 고통과 절망의 망국한도 백제인들이 과거에 무심결에 저질렀던 악행의 과보니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참회수련을 통해 이를 이겨낸다면 희망과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는 수행관이었다.

이에 진표는 백제 유민임을 표방하기 위해 숭제(崇濟; 백제를 숭상함) 혹은 순제(順濟; 백제에 순응함)라는 이름을 가진 금산사 승려에게 나아가 백제 유민들의 고통과 절망을 환희와 희망으로 바꿔 놓을 방법을 배우고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된다.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과 토착 미륵신앙  


     그렇다면 기름진 들녘에 살면서 풍요로운 물산으로 넉넉한 살림을 자유롭게 꾸려가던 백제 사람들이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수탈과 압제, 멸시와 구박 속에서 꿰미에 꿰인 개구리처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 고통의 현실을 어떻게 희망으로 바꿔놓을 수 있단 말인가. 진표는 그 방법을 ‘점찰선악업보경’에서 찾으려 하였다.

우선 절망적인 현실의 고통이 어디에 연유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점을 치고 그 원인이 규명되면 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극한적인 망신참(亡身懺; 몸을 잊을 만큼 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가하여 이를 이겨냄으로써 과거의 죄악을 씻어내는 참회법)을 행하고 나서 희망의 성취 여부를 묻는 점을 다시 쳐서 미래의 희망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백제 유민들에게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은 가르침이 아닐 수 없었다. 절망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방법을 강구해낸 것이다. 그러니 징개맹갱이뜰에서 희망없이 살던 백제 유민들이 어찌 여왕벌을 만난 벌떼처럼 진표율사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진표율사가 어떻게 해서 이 ‘점찰선악업보경’과 인연을 맺게 되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진표는 스스로 출가한 다음 개구리를 고통스럽게 한 일을 참회하기 위해 온몸을 땅에 내던지면서 미륵보살이 직접 계법(戒法)을 전수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전신을 계속 치고 받으며 밤낮 없이 일심으로 망신참을 수련하자 7일 밤이 지나면서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첫 7일 밤이 지난 다음날 새벽에 지장(地藏)보살이 나타나 손으로 금지팡이를 흔들어 진표가 계법과 인연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두 번째 7일이 지나자 귀신이 나타나 무서운 형상을 지으면서 진표를 바위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데 몸은 하나도 다치지 않는다. 그리고 세 번째 7일에 이르자 미륵보살이 나타나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법 구하는 열의를 칭찬하고 3법의(三法衣)와 질그릇으로 만든 발우를 몸소 진표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또 진표라는 이름을 내려주며 무릎 밑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 주는데 상아도 아니고 옥도 아니나 첨대(籤대; 점칠 때 쓰는 댓조각) 모양이었다. 하나에는 9(九)자가 다른 하나에는 8(八)자가 쓰여 있다. 이를 주면서 당부하기를 만약 사람들이 계법을 구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죄를 참회하고 나서 점을 치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108대의 첨대를 더 주면서 계를 구하러 오는 이들이 90일이나 40일 혹은 21일 동안 참회하고 정진하여 기한이 차면 부처님 앞에 나아가 108첨대와 2개의 첨대를 공중에 던져 점을 쳐보게 하라고 가르쳐준다. 그리고 8이라는 것은 새로 얻는 것이고 9라는 것은 본래 있던 계라는 의미라고 일러준다.

위와 같은 내용은 ‘점찰선악업보경’과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다. ‘송고승전’에서는 위와 같이 미륵보살이 직접 진표에게 그 내용 일부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표전간(眞表傳簡; 진표에게 점대를 전해주다)’에서는 미륵보살이 직접 진표에게 ‘점찰경’ 양권과 과보를 증명해주는 간자(簡子; 점대) 189개를 전해주었다 하고 있다. 표현을 좀더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내용을 옮겨보겠다.

“그 스승(숭제법사)이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선도(善導) 삼장에게 수업하였다. 그런 뒤에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꿈에 뵙고 5계를 받았다.’ ‘얼마나 부지런히 닦으면 되겠습니까?’ 하고 진표가 묻자, ‘정성이 지극하면 1년이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숭제가 대답한다. 진표가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면서 삼업(三業; 身, 口, 意 3업과 善, 惡, 不記業 3업 등 여러 종류의 3업이 있다)을 널리 수련하는데 망신참(亡身懺)으로 방도(方道)를 삼았다.

처음 일곱 밤으로 기한을 삼고 전신을 돌에 부딪치니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져 피가 바위 절벽으로 흘러내렸다. 성인의 반응이 없는 듯하여 몸을 버리려고 뜻을 세우고 다시 7일을 기약하여 두 번째 7일을 마치자 지장보살이 나타나 정계(淨戒)를 내려준다. 곧 개원 28년(효성왕 4년, 740) 경진 3월15일 진시(辰時)였다. 그때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뜻이 자씨(慈氏, 미륵보살)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중지하지 못하고 영산사(靈山寺, 일명 변산 또는 능가산)로 옮겨서 정성과 용맹을 처음처럼 하니 과연 미륵이 감응하여 ‘점찰경’ 양권과 과보를 증명하는 간자(簡子; 점대) 189개를 내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중에서 제8간자는 새로 얻는 묘계(妙戒)를 의미하는 것이고 제9간자는 일찍이 얻었던 계의 기본틀(戒具)을 의미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沈檀木, 침향목)으로 만들었으니 여러 번뇌를 의미하는 것이다. 너는 이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건네주는 나룻배와 뗏목을 만들도록 하라.’”

진표가 부안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23세에 ‘점찰경’ 2권과 점찰간자 189개를 미륵보살에게 직접 전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8간자와 제9간자는 미륵보살의 손가락뼈(과거 석가세존의 제자였을 때의 육신의 뼈마디라고 이해해야 할 듯)라는 것이다. ‘송고승전’에서 8, 9 두 개의 간자가 뼈도 아니고 옥도 아니었다고 한 것에서 한 걸음 더 진전한 표현이다.

108간자가 189간자로 된 것도 ‘점찰경’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연사석비’에서는 진표의 스승인 금산사 순제법사가 진표에게 이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면서 이 경전을 가지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의 양 성인 앞에 나아가서 간절하게 참회하며 구하면 계법을 전해줄 터이니 이를 세상에 전하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 진표가 27세 되던 해인 상원(上元) 원년(760, 경덕왕 19년) 경자에 쌀 20말을 쪄서 가루로 만들어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가서 쌀 다섯 홉을 하루 식량으로 삼아 미륵보살상 앞에서 계법을 부지런히 구하였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받을 수 없어 분을 내어 바위 아래로 떨어지니 홀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아서 바위 위에 올려놓는다. 다시 소원을 발하여 삼칠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련하면서 바위를 때리는 참회를 하자 3일에 이르러 손과 팔뚝이 부러져 떨어진다. 제7일 밤에 이르러 지장보살이 손으로 금지팡이를 흔들며 와서 쓰다듬는데 손과 팔이 예전과 같다.

지장보살이 가사와 발우를 주므로 진표는 그 감응에 감사하여 더욱 정진을 배로 늘려 삼칠일을 채우니 바로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오는 것이 보인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함께 와서 진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계본 구하는 것을 칭찬하며 지장보살은 계본을 내려주고 미륵보살은 제8, 제9 간자를 내려주었다. 그때가 경덕왕 21년(762) 임인이었다.

연대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점찰경’의 구득 경로가 서로 다르나 ‘점찰경’을 가지고 점치는 점찰간자를 미륵에게 직접 받았다는 사실에서는 세 기록이 모두 일치하고 있다. 진표가 특히 제8간자와 제9간자를 중심으로 한 108, 혹은 189개의 점찰 간자를 미륵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 것은 모두 사실로 받아들인 듯하다.

이는 백제 지역, 특히 익산 미륵사 지역을 중심으로 이미 미륵신앙이 철저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점찰선악업보경’과 미륵보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점찰선악업보경’은 ‘지장보살업보경(地藏菩薩業報經)’ ‘지장보살경’ 등으로 불리는 것으로 당 현장이 영휘 2년(651)에 번역한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10권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장안(長安) 4년(704)에 번역한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2권과 함께 지장삼부경(地藏三部經)으로 불리는 지장신앙의 중심경전이다.

그런데 진표에 의해서 미륵보살이 이 경전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이 경전을 직접 전수해주었다거나 189간자를 전수해주었다 하여 미륵신앙과의 접합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백제 유민식 미륵신앙에 ‘점찰경’ 참회점찰 수행방법이 가미되면서 망신참(亡身懺)과 같은 극단적인 자해참법이 첨가된 것이니 이는 우리 민족다운 미륵신앙 형태의 시초라 할 것이다.

본래 ‘점찰선악업보경’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말법(末法)시대의 악세(惡世) 박복(薄福)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으로 과거의 선악 업보와 현재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쳐서 그것이 흉수일 경우 지장보살에게 예배 공양하고 참회하는 의식을 거쳐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점치는 방법은 나무토막 6개를 4면으로 다듬어 한 면은 공면으로 남겨두고 3면에만 차례로 1, 2, 3과 4, 5, 6 등을 써나가 18에 이르게 하고 이를 세 번 던져서 합산한 숫자를 가지고 해당 숫자의 점대를 뽑아 점을 친다. 최고 숫자인 3, 6, 9, 12, 15, 18이 연속 3번 나와 합산되면 189가 되므로 189개의 점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점찰경’은 수나라 때(589∼618년) 천축 삼장 보리등(菩提燈)이 번역했다 하는데 수 문제 개황(開皇) 17년(597)에 비장방(費長房)이 지은 ‘역대삼보기’ 권12에서는 개황 13년(593)에 위경(僞經; 가짜 경전)으로 분류돼 조정에서 유포를 금하였다 한다. 그 뒤 당 고종 인덕(麟德) 원년(664) 도선(道宣)이 지은 ‘대당내전록(大唐內傳錄)’에서도 계속 위경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측천무후 천책만세(天冊萬歲) 원년(695)에 명전(明佺) 등이 편찬한 ‘대주간정중경목록(大周刊定衆經目錄)’ 권1에서는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아 칙명을 받들어 간행된다. 그래서 당 현종 개원 18년(730)에 지승(智昇) 등이 편찬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서도 정경에 포함시키고 그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미륵의 땅, 금산사(金山寺)와 법주사(法住寺)  


     ‘발연사석비’에서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덕왕 21년(762) 임인 4월27일 진표율사가 점찰교법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양성(兩聖)으로부터 전수하고 나서 금산사를 중창하려고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이 나타나서 옥(玉)가사를 꺼내 바치고 8만 권속을 거느리고 시위하여 금산사로 간다. 그러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 가서 이를 이루어냈다.

다시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진표율사에게 계법(戒法) 전해주는 것을 감득하고 율사는 시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 권고하여 미륵장륙상을 구리로 부어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미륵이 내려와 계법을 전해주는 성대한 광경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상은 갑진(甲辰, 경덕왕 23년, 764) 6월9일에 주성(鑄成; 부어 만듦)하고 병오(丙午) 5월1일에 금당에 안치하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766, 혜공왕 2년)이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덕왕 19년(760)에 27세로 변산 부사의방에서 망신참을 결행하여 지장보살로부터 가사와 발우 및 계본을 전수하고 다시 용맹정진을 더하여 미륵보살에게 점찰간자(점대)를 받는데 제8, 제9간자는 미륵의 손가락뼈로 만든 것이었다. 제8은 새로 얻는 계법을 의미하고 제9는 이미 있는 근본 계법을 의미하는데 이 점찰간자들은 과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진표는 현재의 몸을 버리고 나면 대국왕의 몸을 받고 뒤에는 미륵이 상생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진표가 이런 가르침을 받는 것이 경덕왕 21년(762) 임인 4월27일인데 그 후에 곧바로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기 시작했다 하니 진표 29세 때다.

다시 2년 뒤인 경덕왕 23년(764) 갑진 6월9일에 미륵장륙상을 주성하였고 2년 뒤인 혜공왕 2년(766) 병오 5월1일에 이를 금당에 봉안했다 한다. 진표 33세 때 일이다. 이때 만든 미륵장륙입상의 대좌라고 생각되는 석연대(石蓮臺)(도판 3)가 보물 23호로 지정되어 현재도 금산사 마당에 남아 있다. ‘발연사석비’는 계속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금산사 중창과 미륵보살상 조성을 끝마친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하였다. 길에서 소가 끄는 수레에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를 향해 무릎을 꿇고 운다. 수레에 탄 사람이 내려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화상을 보고 울며 화상은 어디서 오는가.’ 진표율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금산사에 사는 진표라는 승려다. 나는 일찍이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가 미륵, 지장 양성 앞에서 계법과 진짜 점대를 직접 전해 받았다. 절을 지어 이를 머물러 두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으려고 왔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미련한 듯하나 속이 밝아서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법을 존중하기 위해 무릎 꿇고 울었다.’ 그 사람이 듣고 이렇게 말했다. ‘축생도 오히려 이와 같은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내가 사람이 되어서 어찌 무심할 수 있는가’ 하고 곧 손으로 낫을 집어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다.

진표율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머리를 깎고 계를 주었다.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을 표시해두었다. 돌이켜 명주(溟州, 강릉) 해변으로 서서히 나아가니 물고기와 거북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 앞으로 온다. 몸을 대 육지와 같이 하므로 율사는 밟고 바다로 들어가 계법을 읊고 되돌아 나왔다.

더 가서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 발연수(淵藪, 藪는 寺와 같은 의미)를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며 7년을 머물렀다(772년, 40세). 그때에 명주 경계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율사가 그들을 위해 계법을 설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키고 삼보(三寶; 佛, 法, 僧)를 공경하기에 이르렀다.

조금 있다가 고성 해변에 무수한 어류가 스스로 죽어 나오므로 백성들이 이를 팔아 식량을 삼아 죽음을 면하였다. 율사는 발연사를 나와 다시 부사의방에 이르고 그런 후에 고향으로 가 부친을 뵌 다음 진문대덕방(眞門大德房; 진씨들이 세운 원찰인 듯)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때에 속리산 대덕(大德)인 영심(永深)과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함께 율사가 있는 곳을 찾아와 이렇게 청한다. ‘우리가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니 원컨대 법문(法門)을 전해주십시오.’ 율사가 아무 말 없이 대답하지 않으니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로 올라가서 거꾸로 땅에 떨어지는 등 용맹하게 참회를 한다. 율사는 이에 교법을 전하고 관정(灌頂)한 다음 드디어 가사와 발우,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 ‘점찰선악업보경’ 2권, 189점대를 주었다.

다시 미륵의 진짜 점대인 제9와 제8 점대를 주며 이렇게 경계하였다.

‘9라는 것은 이미 법을 삼고 있는 것이고 8이라는 것은 새로 얻는 성불종자(成佛種子; 대각을 이루는 씨앗)이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부탁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산에 길상초가 난 곳이 있을 터인데 여기에 절을 짓고 이 교법(敎法)에 의지해서 사람과 하늘을 널리 제도하며 후세에 퍼뜨리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곧장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 나 있는 곳을 찾아 절을 짓고 이름을 길상사라 하였다. 영심은 여기서 점찰법회를 처음 베풀었다. 율사는 부친과 더불어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함께 도업(道業)을 닦다가 효도를 끝마치었다.”

진표는 어째서 금산사 중창을 마친 다음 곧바로 속리산으로 향했을까. 미륵, 지장 양대 보살로부터 받은 신물(神物)을 오래 보관할 만한 절을 짓기 위해 갔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속리산의 지세를 살펴보자. 한반도의 등골을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백두산에서 일어나 개마고원으로 함경도의 중앙을 뚫고 내려오다 그 분수령에서 동해변으로 다가들어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일으키고, 태백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들어오다가 한반도의 남쪽 중심부에 이르러 정기를 모아 불쑥 솟구쳐낸 영산(靈山)이 바로 속리산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휘어져 내린 줄기는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져 영호남을 나눈다. 북쪽으로 치고 올라간 줄기는 안성 칠현산에 이르러 한 가닥은 계속 북진하여 한남정맥(漢南正脈)을 이루어 과천 관악산에서 끝나고, 한 가닥은 서남진하여 금북정맥(錦北正脈)을 이루니 보령 성주산에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오대산 이남 태백산 이서로부터 속리산의 북쪽 물까지 모두 모아서 남한강으로 몰아오게 되며,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이 되고, 동남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서,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3대강의 공동 발원처를 이룬다.

이에 대체로 산맥과 수맥에 의해 나뉘어 있던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세력이 자연 이곳에서 부딪게 되었다. 백제가 한강 유역까지 장악하였을 때는 백제 영토가 됐고, 고구려가 남진하면서는 고구려의 남쪽 변경이 됐으며, 신라가 한강으로 진출하면서는 또한 그 영토가 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삼국 쟁패의 요충지가 되어 항상 전쟁에 시달리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대가람을 건립하는 것은 어느 쪽에서도 생각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표율사는 삼국시대 내내 전쟁에 시달리느라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이곳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점찰교법을 펼칠 제2 후보지로 이곳을 택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더구나 통일된 신라왕국에서는 산맥과 수맥의 중심에 위치해 사통팔달의 정점에 있음에랴! 그래서 길상초가 나 있는 곳을 대가람터로 점찍어 두고 영종 등 제자들에게 미륵, 지장 양대 보살로부터 전수한 점찰 간자와 계본 및 ‘점찰경’ 등을 주어 보내며 대찰을 건립하게 하니, 그곳이 당시 길상사로 불리던 법주사(法住寺)였던 것이다(도판 5). 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의미의 법주사라는 이름이 진표가 영심에게 전해준 법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일이다.

그래서 법주사에서는 불국시대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국보 5호 쌍사자석등(도판 4)과 국보 64호 석연지(石蓮池, 도판 6) 등 창건 당시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진표전간’에 의하면 진표가 금강산 일대까지 교화하고 나자 그 소문이 경덕왕에게까지 전해져서 경덕왕이 진표율사를 왕궁으로 맞아들인다. 보살계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때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비빈과 내외 친족도 모두 보살계 제자가 되었다. 그래서 경덕왕은 벼 7만 7000석을 시주하고 비빈과 왕실 내외 친족들은 비단 500필과 황금 50냥을 시주하였다.

진표율사는 이를 모두 받아가지고 인연 있는 여러 산에 나누어주어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하니, 영심 등이 법주사를 창건하는 데도 이런 왕실의 시주가 큰 몫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사실 이 재물은 백제 유민들이 수탈당한 것을 일부나마 찾아온 것일 뿐이었다.

법주사에도 초창기부터 미륵장륙상이 동으로 만들어져 산호전(珊瑚殿)에 봉안되어 있었다 하나 정유재란(1597)에 불타서 파괴되었다. 금산사 미륵장륙동상과 같은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금산사 미륵장륙상이 국보 62호 3층 미륵전(도판 7) 안에 36척(약 10.8m) 높이로 1938년 복원 조성되는 것과 같이 법주사 미륵장륙상도 산호전 터에 100척(약 30m) 높이로 1939년 복원 조성되었다(도판 8). 모두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돌아온 현대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조성한 것으로 금산사 미륵장륙상은 석고로 조성하였고 법주사 미륵장륙상은 시멘트를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 금지 등으로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던 시기였다. 이런 절망의 순간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법주사에 묻어둔 미륵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래서 모악산 금산사와 속리산 법주사는 영원히 미륵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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