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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상의 定都와 遷都
 관리자  01-25 | VIEW : 2,100
한국역사상의 定都와 遷都
遷都를 감행한 王은 대개 被殺되었고, 나라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서울은 民族史上 最長 1000년의 首都이며「漢江의 奇蹟」을 이룩한 天惠의 中心무대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民族史에 나타난 古代 領土國家의 定都
  
徐那伐(서나벌: 徐羅伐)은 신라의 첫 국호이며 992년 동안의 붙박이 首都(수도)이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기원전(B.C.) 57년 朴赫居世(박혁거세)가 지금의 慶州 일대 여섯 村長의 추대를 받아 居西干(거서간)으로 즉위했다. 居西干은 당시 신라 王의 칭호이다.
  
  처음에는 慶州 중심의 조그만 城邑國家(성읍국가)였으나, 北으로부터 流移民을 받아들이면서 聯合的 성격의 국가권력을 형성하게 되고, 왕위도 朴·昔·金의 3姓이 차례로 차지했다. 그 뒤 4세기 말엽인 17대 奈勿王(내물왕: 356∼402) 때부터 金씨 지배세력이 확립되고 古代 領土國家로서의 기초가 잡히기 시작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高句麗(고구려)는 B.C. 37년 夫餘族(부여족)의 朱蒙(주몽)이 亡命집단을 이끌고 東夫餘에서 남하하여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연합하고 卒本夫餘(졸본부여: 압록강 중류 桓仁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이다. 朱蒙이 바로 始祖(시조) 東明王이다. 고구려는 小獸林王(소수림왕: 371∼383) 때 古代국가의 체계를 완성했으며, 廣開土王(광개토왕 391∼412) 때는 遼東(요동)지방을 차지, 이후 滿洲(만주) 일대의 主人이 되었다.
  
  百濟(백제)는 고구려 시조 朱蒙의 의붓아들인 溫祚(온조)가 후계경쟁에서 밀려 그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B.C. 18년 慰禮城(위례성: 한강유역)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이다. 漢江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系 유이민세력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이어 馬韓 50여 개국을 차례로 정복하거나 연합한 백제는 近肖古王(근초고왕 346∼375) 때 전성기를 이뤄 371년 平壤城(평양성)을 공략, 고구려의 故國原王(고국원왕)을 射殺(사살)하기까지 했다.
  
  고구려는 長壽王(장수왕: 413∼491) 대에 이르러 中原의 强者로 부상한 北魏(북위)와 和平관계를 유지하면서 창끝을 韓半島 남부로 돌린, 이른바 「西守南進」정책을 구사했다. 그 구체적 정책이 427년 압록강 中流의 國內城에서 平壤(평양)으로 옮긴 遷都(천도)였다. 드디어 475년 장수왕은 3만의 병력으로 백제의 왕도 漢城(한성: 지금의 서울 송파구 夢村土城과 강동구 천호동 風納土城 일대)을 포위하고, 탈출을 기도하던 백제의 蓋鹵王(개로왕)을 베었다. 이로써 493년에 걸친 漢城百濟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遷都한 나라의 不幸
  
  개로왕의 아들인 文周는 고구려군의 攻勢 초기에 新羅로 달려가 1만 명의 원군을 이끌고 돌아왔으나 이미 父王은 전사하고, 漢城은 함락된 뒤였다. 文周王은 熊津(웅진: 공주)으로 천도했다. 이후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강력한 南進勢에 맞서 羅濟同盟(나제동맹)을 결성했다.
  
  熊津시대의 백제는 문주왕·동성왕 등이 土着 귀족세력에게 암살되는 등 국내 정정이 불안했다. 백제의 英主 聖王(523∼554)은 熊津이 中興의 도읍으로는 너무 좁고 고구려와의 충돌도 격화되자 538년 또다시 泗泌(사비: 부여)로 천도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했다. 聖王은 550년 신라와 연합군을 형성, 고구려에 빼앗겼던 漢江 중·하류 지역을 탈환했는데, 이때 신라는 처음으로 小白山 계선을 넘어 漢江 상류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江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눠 가진다는 것은 신라와 백제라는 古代정복국가의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고구려 勢가 물러난 한반도 中部, 漢江유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신라·백제의 대결은 예정된 手順이었다.
  
  羅濟同盟을 먼저 배신한 것은 신라의 眞興王(진흥왕: 540∼576)이었다. 진흥왕은 기습전으로 백제가 탈환한 漢江 중·하류 6개 郡을 횡탈했다. 이에 聖王은 百濟-伽倻-倭國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신라를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聖王은 불운했다. 管山城(관산성: 충북 옥천)까지 진출하여 신라 정벌을 꾀하던 왕자 餘昌(여창)이 陣中(진중)에서 병마에 시달렸다. 聖王은 아들 餘昌을 위문하기 위해 불과 50騎만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달려가던 중 大田 동남방의 식장산에서 신라의 매복병에게 사로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이어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왜국 연합군 3만 명은 신라군에게 처절하게 참살되었다. 왕자 餘昌만이 匹馬單騎(필마단기)로 한가닥 血路(혈로)를 뚫고 전장에서 이탈,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백제 27대 威德王(위덕왕)이다.
  
  
  漢江 유역을 지배하는 者, 韓半島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이후 신라의 국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漢江유역을 차지하는 者가 韓半島의 最强이었다. 풍부한 物産, 그리고 세계제국 唐(당)과 이어지는 交通路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흥왕代의 신라는 한강유역의 經營으로 국력의 피크타임을 누렸다.
  
  그러나 신라의 獨走(독주)를 삼국의 다른 2國이 허용할 리 없었다. 이후 100여 년간 백제와 고구려는 同盟 혹은 협조 관계를 맺고 신라의 생존을 위협했다. 2對 1의 劣勢(열세)에 처한 신라는 唐과의 同盟으로 위기를 극복해 갔다. 신라는 고구려의 南進과 백제의 東進 전략下에서도 漢江 유역을 끝까지 지켜 냈다. 신라의 漢江유역 城主와 城民들은 籠城戰(농성전) 중 군량과 식수가 떨어지자 오줌까지 마셔가며 守城했다.
  
  당시 東아시아의 정세는 고구려-백제-왜국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南北동맹과 新羅-唐으로 연결되는 확고한 東西동맹 간의 대결구도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두 진영의 대결에서 東西동맹이 승리하였는데, 그 결과로 新羅의 삼국통일이 이룩되었다. 이것은 민족사의 再통일이 아니라 최초의 통일이었다. 이로써 韓民族은 동일한 法俗과 文化 속에서 民族國家를 이룩할 수 있었다.
  
  세계제국 唐이 주도한 팍스-시니카(Pax-Sinica)를 활용하여 민족문화의 絶頂期(절정기)를 구가한 統一新羅도 9세기 후반에 들면 國運이 기울어 지방의 豪族(호족)들이 난립, 저마다 「將軍」 혹은 「城主」를 자처하며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분열의 시기에 최초의 强者로 등장한 인물이 尙州 출신의 邊境軍 裨將(변경군 비장)이었던 甄萱(견훤)으로, 그는 武珍州(무진주: 光州) 일대에서 軍閥(군벌)을 형성했다가 900년 全州로 근거지를 옮겨 도읍으로 삼고 後百濟(후백제)를 개창했다.
  
  이어 신라 憲安王(헌안왕)의 庶子로서 왕실의 배척을 받았던 弓裔(궁예)가 901년 왕위에 올라 국호를 後高句麗로 칭했다. 이로써 신라·後백제·後고구려의 後三國시대가 전개되었다.
  
  처음, 궁예는 군벌 箕萱(기훤)·梁吉(양길)의 幕下(막하)를 전전하다가 鐵圓(철원)에서 自立하였고, 이어 松嶽(송악: 개성) 지역의 호족이었던 王隆(왕륭)-王建(왕건) 父子의 歸附(귀부)에 의해 松嶽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러나 변덕스러웠던 궁예는 904년 국호를 摩震(마진)으로 개정하고, 수도를 다시 鐵圓으로 옮겼다. 累代(누대)에 걸친 王씨의 기반 松嶽을 도읍으로 삼았던 당초의 판단이 잘못임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911년 국호 摩震은 또다시 泰封(태봉)으로 바뀌었다. 이후 궁예는 오만하고 광포하여 인심을 잃은 끝에 918년의 軍部 쿠데타로 왕위를 王建에게 빼앗기고 도주하다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王建은 그의 祖宗의 땅인 松嶽으로 돌아가 이름을 開京이라 칭하고 새 왕조 高麗를 創業했다. 開京은 고려왕조 475년간의 수도였다. 太祖 王建은 高麗가 高句麗의 후계국임을 천명하고 옛 고구려의 수도 平壤을 西京으로 고치고 故土 회복의 중요 기지로 삼았다.
  
  
  國號와 首都를 자주 바꾼 弓裔의 敗亡
  
  그러나 당시는 世界史上 북방 騎馬民族의 전성시대였던 만큼 高麗의 北進정책은 바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흥기한 騎馬민족국가 遼(요)가 中原에 「최초의 征服國家」를 세워 漢族국가 宋(송)을 압박했다.
  
  宋은 遼에게 해마다 수십만 냥의 銀과 수십만 필의 비단을 歲幣(세폐)로 상납, 평화를 구걸했다. 高麗에 대해서는 對遼 군사동맹을 요청했으나 高麗는 實利路線(실리노선)을 固守, 이를 거절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宋은 滿洲(만주)에서 일어난 金(금)과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遼를 협격했다.
  
  遼의 패망은 宋에게 되려 禍根(화근)이 되었다. 이리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金은 北宋의 수도 開封을 포위·함락시키고 宋의 徽宗과 欽宗 부자를 포로로 삼고 國脈(국맥)을 끊었다. 이것이 中國史에서 말하는 靖康之變(정강지변)이다. 이후 欽宗의 동생 高宗이 양자강 남쪽 杭州(항주)로 피란하여 南宋을 세웠다. 고려는 대륙의 새로운 강자 金에게 朝貢(조공)했다.
  
  이런 東아시아의 격동 속에서 西京의 승려 妙淸(묘청)이 圖讖說(도참설)로써 중앙정계에 진출, 西京 천도를 획책했다. 그는 西京의 林原驛(임원역)에 大花勢가 있다고 주장, 수도를 옮기고 稱帝建元(칭제건원)하여 金에 대해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遷都를 촉진시키기 위해 남 몰래 기름을 넣은 큰 떡을 大同江에 가라앉힌 다음, 거기서 기름이 水面에 떠올라 그 빛이 오색 영롱한 것을 보이고, 이를 吉兆(길조)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造作의 術數(술수)가 탄로나자 妙淸은 1135년 西京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開京軍에 의해 토벌되었다. 妙淸의 自主노선은 나무랄 바 없으나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 金을 공격할 형편은 아니었다.
  
  한편 南宋 정권은 華北을 석권한 정복왕조 金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에는 北方 草原에서 불같이 일어난 몽골과 동맹을 맺는 遠交近攻(원교근공) 정책을 구사했다. 金은 1234년 몽골군의 침략을 받고 패망했지만, 南宋의 安保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몽골제국은 西征中에도 高麗와 南宋을 끊임없이 침략했다.
  
  고려는 高宗 19년(1232) 수도를 江華島로 옮기고 몽골군에 39년간 항쟁했다. 그러나 본토의 백성들은 몽골군의 약탈과 학살로 미증유의 고통을 받았다. 견디다 못한 고려는 몽골제국에 굴복, 元宗 11년(1270) 開京으로 환도했다.
  
  南宋은 1276년 수도 臨安(임안: 항주)이 함락되고, 1279년 패망했다. 北宋 150년과 南宋 150년의 300년간은 중국 역사상 가장 경제가 번영했고, 그 수도인 開封과 臨安은 호화의 극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北宋과 南宋은 常備軍 100만 명을 보유했으며, 그 제철량이 유럽 전체 제철량의 두 배를 웃돌 만큼 무기제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北宋과 南宋은 弱體 왕조였다. 그것은 당시 北方 유목민족의 전쟁기술, 즉 騎馬戰法(기마전법)의 탁월성 탓이기도 했지만, 宋 지도부의 향락·사치·부패, 그리고 가능한 한 전쟁을 회피하려는 宥和的(유화적)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특히 宋은 태조 趙光胤(조광윤) 이래 지방군벌의 발호를 예방하기 위해 지방군을 억제하고 중앙군을 주력으로 삼는 强幹弱枝(강간약지) 정책과 文官優位(문관우위)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宋은 역대 漢民族 국가 중 국방력 최악의 나라가 되었다. 바로 이 점은 남북 대치상황에 처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漢城 定都와 「王子의 亂」
  
  遼東정벌에 나섰다가 威化島(위화도)에서 回軍, 易姓革命(역성혁명)을 일으킨 李成桂(이성계)는 1392년 7월 開京의 壽昌宮(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朝鮮王朝를 開創했다.
  
  太祖 이성계는 즉위한 해 權仲和 등을 시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했는데, 公州 계룡산 밑이 좋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권위였던 河崙(하륜) 등의 반대로 계룡산 도읍계획은 무산되었다. 우선, 首都의 立地로선 너무 좁았다.
  
  太祖 3년(1394) 마침내 새 수도를 漢陽(한양)으로 결정하고, 9월1일 新都宮闕造成都監(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한 다음 그해 10월28일 백관을 거느리고 漢陽으로 들어와 정식 수도로 삼았다. 漢陽이 漢城府(한성부)로 격상되었지만, 아직 宮闕(궁궐)과 都城(도성)이 완공되지도 않았던 시점이었다. 그만큼 조선왕조는 王씨의 500년 터전이었던 開城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음해인 太祖 4년 9월, 宗廟(종묘)·景福宮 및 光化門 앞의 관청들이 완성되었다. 太祖 5년(1396) 1월부터 축성을 시작, 연인원 20만 명을 동원하여 98일 만에 石城 1만9200자, 土城 4만300자의 都城을 쌓아, 비로소 首都로서의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 漢城은 시련을 겪었다. 제1차 「왕자의 亂」이 일어나 太祖가 퇴위한 가운데 민심이 흉흉해지자 후계왕 定宗은 수도를 4년6개월 만에 다시 開京으로 옮겼다. 제1차 「왕자의 난」은 太祖가 여덟 번째 아들 芳碩(방석: 후비 康씨 소생)을 世子로 세우자 開國에 功이 많았던 太祖의 다섯째 아들 芳遠(방원)이 韓씨 소생의 同腹兄(동복형)들과 作黨(작당)하여 세자 芳碩과 개국공신이며 漢城의 설계자인 鄭道傳(정도전) 등을 주살했던 쿠데타였다. 이후 조선왕조는 6년8개월 동안 開京에 머물었다.
  
  
  「漢江의 奇蹟」을 이룩한 中心무대―서울
  
  定宗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李芳遠, 즉 太宗은 漢城 환도를 추진했으나 開京 주민은 물론 다수의 朝臣들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太宗은 開京이 새 왕조의 도읍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1405년 10월1일, 太宗은 빗발치는 遷都반대론을 물리치고 다시 漢城으로 돌아왔다. 이후 宮城을 수축하고 여러 시설을 신·개축해 지금의 서울로 비약할 터전을 갖추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든 왕은 제4대 世宗이었다. 세종 4년(1442) 연인원 32만여 명이 동원되어 38일간 都城의 土城 부분을 모두 石城으로 개조했다. 장마철이면 범람하던 淸溪川(청계천)도 대대적으로 준설했다. 漢城府를 둘로 나누어 성 안은 都城, 성 밖 10리까지의 지역을 城底(성저)라 했는데, 城底에서도 나무를 베거나 무덤 만드는 일을 엄금했다. 漢城은 수도로서 거듭 발전하다가 開國 200년 만인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 왕궁과 官衙 등이 거의 불타 버렸고, 왕(宣祖)이 義州(의주)로 몽진했던 약 1년간 倭軍의 治下에 있었다. 그 후에도 漢城은 1624년 李适(이괄)의 亂, 1636년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일시 함락되었지만, 이후 조선왕조가 日帝의 침략을 받아 합병되었던 1910년까지 王都로서 존속했다. 漢城府는 일제치하 35년간 京城府로 이름이 바뀌었고, 한반도의 식민통치기관으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직후 京城府는 美 군정下에서 서울市로 개칭되었고, 1946년에는 특별시로 승격했다.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후 서울특별시는 일본식 町(정)을 洞으로 바꾸고 행정구역을 대폭 확장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서울은 3개월 동안 敵治下에서 신음했다. 정부를 비롯한 여러 기관이 釜山으로 옮겼다가 그해 9·28 수복으로 환도를 했으나 中共軍의 개입에 의한 戰勢 악화로 다시 부산으로 옮겼다가 1953년 휴전협정 후 서울로 재차 환도했다.
  
  이후, 서울은 1960년 4·19 혁명과 5·16 혁명 등 한국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지켜본 증인이 되었다. 5·16 혁명 이후 「잘 살아보세」라는 민족적 悲願(비원)을 구호로 삼고 「싸우면서 일한」 결과, 大韓民國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세계 150여 개국 가운데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 成就(성취)의 중심무대가 서울이었고, 그 상징적 표현이 「漢江의 기적」이었다.
  
  지금, 서울은 1000만 시민의 메트로폴리탄, 수도권에는 20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서울은 통일신라 이래 제2의 민족적 르네상스를 이룩한 祝福(축복)의 땅이며, 統一韓國의 수도로서 역사적 當爲性(당위성)을 지닌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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