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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관리자  02-23 | VIEW : 4,070

대한매일이 서울신문으로 새 출발하면서 작가 정동주(얼굴·55)씨의 역사 문화에세
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을 연재합니다.‘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은 역사에
편입되지 못한 피지배자로서의 민중의 삶, 한국인의 의식 밑바탕에 흐르는 사상의
원류를 조명하는 탐방 에세이입니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가 살아 숨쉬고 사람 냄새
가 은근하게 배어 있는 품격 높은 산문의 미학을 전해줄 것입니다.

아무리 우람한 나무라도 지하수가 뿌리를 적셔주지 않으면 말라죽고 맙니다. 인간
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적시고 살찌우는 원천이 고갈되면 삶
은 황무지처럼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본향, 정신의 바탕이 소중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입니다.‘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은 바로 이같은 점에 착목해
이야기를 풀어갈 것입니다. 달빛에 물든 민중의 삶, 스러져가는 우리 문화의 유산
을 햇빛에 드러내고 구체적인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은 때로는 기존의 주류역사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 새로운 연재물은 다양한
논쟁을 낳고 건강한 담론을 만들어갈 것으로 기대됩니다.

작가 정동주씨는 경상남도 진주 출신으로 역사와 문학이 교차하는 글쓰기로 널리
알려진 이 시대의 이야기꾼입니다. 84년 장시 ‘순례자’로 제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정씨는 서사시집 ‘논개’등 일곱 권의 시집을 낸 시인
이자 ‘백정’‘단야’‘민적’‘콰이강의 다리’‘신의 지팡이’‘불의 지문’등 스케일 큰 소설들을 발표해온 중진 소설가입니다. 또 러시아 한인 유민사를 다룬 자료집 ‘카레이스키, 또 하나의 민족사’를 펴내 국내 문단에 ‘과거사 바로보기’ 붐을 일으키는 등 역
사연구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79년 경남 사천으로 내려간 이래 향토를 지켜온 ‘농군작가’로서 역사 이면의 진실
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정씨의 글은 감각에 호소하는 요즘 작가들과는 분명 다
른 힘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발로 뛰고 온몸으로 쓰는 작가의 정직한 글쓰
기에서 비롯됩니다.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삶을 깊이 있게 아우르며 한국의 정체성
을 찾아가는 거대한 지적 오디세이아, 일주일에 두 차례씩 연재될 ‘달빛의 역사, 문
화의 새벽’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운주사 천불천탑①-신비에 대한 오해와 몽골문화 1.3.  
  
등록 2004-01-04 16:59:12     조회 387
이름 정동주    

  
“천불천탑의 성지(聖地), 불가사의한 신비, 미완의 불국토, 한국불교의 영원한 화두,
불교미술의 보고, 유례가 없는 한국불교 유적지, 우주인이 내려와 그린 그림, 삼엄
한 의미를 지닌 문양장식,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 불가사의의 상징.”

이 화려한 말들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있는 운주사 주변의 불탑과
불상들에 헌정된 한국인의 역사관이자 미의식의 한 사례다.

성지(聖地)로까지 칭송받고 있는 천불천탑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성종12년
(1481)에 간행되고 중종25년(1530)에 증보된 지리서(地理書)인 ‘동국여지승람’권
40이다.“천불산(千佛山)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 석탑이 각각 일천(一千)
씩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이석불(二石佛)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했다.

그 이후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네 차례 발굴조사, 두차례 학술조사의 결과에 대
한 보고서를 포함하여 천불천탑에 대한 갖가지의 견해가 담긴 글(보고서, 기행문,
단행본 등)은 모두 30여 종류나 된다. 그런데도 천불천탑의 신비로 일컬어지는 몇
가지 핵심 내용은 그대로 신비에 가려 있고,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견해를 흉내
내거나 터무니없는 말로 과장하는 동안에 운주사는 어느새 한국 불교미술의 미스
터리 현장으로 자리잡았다.

신비라고 말해지는 부분은 10여 가지나 된다.

신비1. 탑신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은 무엇을 뜻하며, 그 문양은 어느 민족의 문화
에서 기원된 것인가?

신비2. 불교 교리에도 없는 남편불, 아내불, 아들 딸로 불리는 특이한 모습의 석상들
이 과연 불상인가, 아니면 석인상(石人像)인가?

신비3. 불상은 절집 안에 봉안하는 것이 상례인데 왜 야산과 들판에다 배치했으며,
불교 교리와 상관없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가?

신비4. 개인의 기복을 비는 칠성신앙의 상징인 북두칠성을 조형물로 만들어 불탑
과 석불 속에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신비5. 70여 개의 석불들이 지닌 표정과 계란형 얼굴, 유난히 길다란 코, 정수리의 계
주(珠)처럼 보이는 뾰족한 모습 등은 분명 전통적인 한국의 불상(佛像)과는 사뭇
다른데, 그 까닭이 무엇인가?.

신비6. 석불들의 손 모양, 즉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인계(印契)와는 관계가 적어 보
이는데, 이를 과연 불교와 관련 지울 수가 있을까?

신비7. 한 장소에서 신라 탑과 백제탑 양식이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비8. 불교 교리에서 탑을 세우는 일정한 원칙, 즉 일탑일가람제(一塔一伽藍制)와
쌍탑일가람제(雙塔一伽藍制)를 무시하고 한 장소에다 무려 18기나 되는 탑을 촘촘
하게 세운 것은 어느 나라의 조탑(造塔)관습을 따른 것인가?

신비9. 석불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옷매무새 즉 의문(衣紋) 또는 의습선을 불의(佛
衣:승려가 입는 옷으로 세 가지의 가사)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볼 수가 있는가?

신비10. 이와 같은 희귀한 일을 누가, 왜, 어떻게, 언제 했는가?, 등이다.

이 같은 의문은 운주사를 말하는 모든 이들이 갖고 있으면서도 의문에 대한 대답
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저 신비하다느니, 알 수 없다고만 한다.

이런 가운데 비교적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천불천탑이 조성되던 시기의 시대 상황
과 불교 교리적인 측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과 석불 석탑 양식 기법이 13세기를
전후한 고려 중기의 특색을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조형물들은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13세기의 가장 큰 특징인 최
씨(崔氏) 무신정권의 영향과 관련을 짓고 있는 점이다.

그리하여 천불천탑의 신비를 푸는 열쇠는 이미 천불천탑에 헌정된 칭송 안에 들
어 있으며, 일치되는 견해들을 조금만 더 넓게 분석하면, 그 속에 대답이 들어 있다
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은 이른바 성지(聖
地)를 능멸한다는 민족 감정 또는 비전문가의 무지에서 비롯된 황당한 삼류소설이
라고 짓밟아버리는 소위 어른들의 횡포에 가까운 힘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다양
성이 진실한 애정이나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되었더라도 독점적 권위를 누려 온 어
른들의 견해와 다를 때는 가차없이 무시해 버리고 억눌러 온 것이 지금까지의 한
국사와 문화론의 대세였지 않은가? 그래서 달빛의 역사가 되었고, 문화는 왜곡, 폐
쇄, 획일화의 밤이었다.

나도 매우 망설였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연구를 해오고 계신 소재구(蘇在
龜)선생으로부터 무언의 격려를 받고 몽골의 학자들을 만나기 위해 여행길에 오
른 뒤에도 적잖이 번민했다.

몇 년 전 일본국보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사발 하나에 대한 책을 발표했을 때 보여
준 그 어른이란 이들의 태도를 너무나 가슴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두렵기
보다 어떻게 잘 참아내야만 문화의 새로운 새벽을 열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 어른들의 실속없는 위엄과 정교하게 갖추어지지 못한 이론의
허세를 겁내기보다는 애정있는 다양성을 갈망하는 세상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
을 보면서 울어도 울겠다는 각오로 취재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운주사의 천불천탑에 대한 신비를 부정하거나 황당한 삼류 소설을 쓰려는 것
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역사적 개연성을 한가지 더 발굴해냄으로써 신비의 의미
를 보다 역사화하려는 것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천불천탑의 신비 열 가지에 큰 무리 없이 접근하는 방법 중 하나는
몽골의 문화를 통하여 비교해 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천불천탑을 조성한 시기를
13세기 전후로 본다는 국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에서 응용해 낸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13세기는 고려 중엽에 해당되며, 이때의 고려는 세 명의 왕들이 이
어서 통치한 매우 불우했던 시대였다. 고종(1214∼1259), 원종(1260∼1274), 충렬왕
(1275∼1308)은 최충헌의 최씨 무신정권, 몽골의 침략, 강화도 천도, 몽골의 고려 예
속화, 삼별초의 항전과 고려 민중의 분노, 원(元)나라의 내정간섭, 몽골군과 고려군
으로 편성된 연합군의 삼별초 토벌, 원의 간섭에 의한 일본 정벌계획과 실패에 따
른 고려 민중들의 고통, 고려왕의 원나라 노예화, 희대의 매국노인 홍다구(洪茶丘·
1244∼1291)의 조부, 부친, 홍다구로 이어지는 삼대에 걸친 몽골 앞잡이로서의 반민
족적 행동들, 그리고 불교의 전횡과 타락의 단초를 여는 시대가 곧 13세기였다.

그 중에서도 민족 반역자 홍다구가 몽골(원)군의 사령관이 되어 고려의 삼별초를
격멸시키기 위해 고려군까지 그의 지휘 아래 복속시켜 1270년부터 1280년에 이르
는 십여년 동안을 고려에 머물면서 전라도 곳곳을 쏘다녔던 흔적들은 단연 내 관
심을 끌었다.

무등산 수박이 홍다구와 관련된다는 이수광의 ‘지봉유설’, 허균의 ‘도문대작’, 허준
의 ‘동의보감’기록들은 중요한 증거다. 또한 삼별초 토벌이 끝난 1273년 2월 이후
고려군민총관(高麗軍民總官)이 되어 고려의 왕은 물론 고려의 모든 사람들을 지배
하려 들었고, 쿠빌라이 칸(世祖)의 양아들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 정벌에 필요
한 군량미를 모으고 선박을 만드는 책임을 지녔던 그가 주로 머물렀던 곳도 전라
남도 해안을 낀 나주와 전주지방이었다. 특히 쌀이 많이 생산되는 강경평야를 비
롯, 나주평야와 호남평야 일대의 쌀을 군량미로 확보하기 위해 홍다구의 전횡은
무서웠다. 그때 홍다구는 3000∼7000명의 몽골군을 지휘했다. 그의 위세는 고려의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일과 홍다구의 몽골군을 실험적으로 연결시켜 보기로 했
다.운주사의 탑신에 새겨져 있는 세 종류의 낯선 문양에 대한 한국 연구자들의 한
결같은 대답이 그저 신비롭다거나, 삼엄한 의미라거나, 우주인의 소행이라는 사실
상 모르겠다는 말에서 더욱 더 몽골문화와의 비교를 시도해 볼 생각을 해왔다. 그
리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의 석인상(石人像) 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인 몽골
과학원 역사연구소 고고학분과 선임연구원인 도브도인 바야르(Dovdoin Bayar, 57
세)교수, 몽골민속학의 권위자인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민속학분과장 겔렉참츠
체렌한드(65세)교수,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중세분과 선임연구원 소드놈 촐몽
(S.Tsolmon, 51세)교수 세분을 인터뷰하기로 약속하고,2003년 12월 27일부터 30
일까지 차례로 세 사람을 만나 그들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준비해 간 천불천탑 관련 사진들을 먼저 보여주고 나서 그들이 보인 흥미 있는 반
응은 공통적이었다. 매우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운주사 천불천탑②-석불 X자문양 전통가옥 겔 하단 상징  

등록 2004-01-05 15:03:25     조회 588
이름 정동주 [홈페이지]    

  
일요일인 2003년 12월28일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울란바토르 시내의 한 찻집에서
촐몽 교수를 만났다. 준비해 간 천불천탑 관련 사진자료를 보여준 뒤 내가 먼저 질
문을 하고 촐몽 교수의 답변을 들었다.

문: 고려와 몽골(원) 사이에서 매우 특별한 활약을 했던 홍다구 등 몽골에서 보낸
인물들을 몽골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답: 그들에 관한 정통 역사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몽골(원)의 역사기록은
1368년 명나라에 원이 멸망당한 뒤 대부분 파괴되었는데,홍건적 사건은 몽골의
역사기록을 불태운 대표적인 사례다.오늘날 몽골역사서 ‘몽골비사’ ‘집사’ 같은
기록도 고려,중국의 자료를 러시아 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토대로 하여 몽골 측이
연구한 것들이다.

문: 몽골인의 탑 세우는 관습에 대해 말해달라.

●유라시아 유목민 청동기때 석인상 건립

답: 스투파(Stupa·탑) 관습이나 목적을 알려면 먼저 석인상(石人像)의 역사부터
이해해야 한다.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에게서 사람 형상을 한 석인상 만드는 관습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대체로 청동기 시대부터다.

조상의 형상을 만들어 제사 지내기 위한 신앙 측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조들의
위업을 길이 받들기 위해서였다. 이 관습은 돌궐족, 거란족, 몽골족으로 전승되었는데
13세기부터 본격화된 몽골 석인상은 탑을 세우는 이유와 겹쳐졌다. 유명한 인물,
전쟁 때 나라를 구한 영웅을 기념하는 기념물도 세웠다.

굳이 불교와 관련해서 탑을 세우지는 않는다. 몽골인 정서에는 샤머니즘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문: 몽골군은 상대국을 침략한 뒤 피정복국에 몽골의 문화를 강요하는 관습이
있었나?

답: 그렇다. 점령지에다 몽골의 역사를 쓰게 하거나 기념물을 세우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문: (사진을 가리키면서)이런 문양이 몽골에도 있었나?
답: 몽골 민속에는 이것과 똑같은 문양이 옛날부터 있어오고 있다.

문: X는 몽골에서 어떤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답: X는 몽골 전통가옥 겔의 하단부를 구성하는 힘살대로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유목민족은 계속 이동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X문양의
힘살대를 접어서 싣고 다니다가 자리가 정해지면 X를 펴서 천막을 친다.X를
‘하낭헤’라 부르는데, 몽골인에게는 “하낭 겔에서 태어나 동굴에서 생을 마친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소중한 역할을 하는 하낭헤이기 때문에 몽골인 삶 도처에 이 문양이 상징적
으로 응용되고 있다. X는 동서남북, 상하로 이어지는 연속성, 영원성을 뜻한다.
종교적으로는 민족,가족 간의 유대와 정을 상징한다.만약 운주사라는 곳의 탑에
새겨진 X문양이 몽골군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타향에서 전사한 몽골
병사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 영혼을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려보낸다는 주술적인
상징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한 경우다.

문: 혹시 몽골군이 상대국을 공격하는 군대 안에 무당을 배속시키는가?
답: 그렇다. 군대 안에 샤먼을 동행시키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전통이었다. 전쟁 개시
날짜와 시간, 공격의 계속과 중단, 후퇴에는 “영원한 하늘의 힘으로!”라는 뜻의
무당이 관여했다.

문: 무당은 어떤 방식으로 점을 치는가?
답: 주로 무구였지만 때로는 하늘의 별을 관측하여 지휘관과 군대의 운명을
예언했다.

문: 별 중에서 몽골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슨 별인가?
답: 북두칠성이다. 몽골인은 초원을 옮겨다니는 유목민이어서 어느 별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저녁 9시 이후가 되면 북두칠성을 향하여 우유를 뿌리면서 목축의 번성을
기원한다. 우유를 뿌릴 때 사용하는 국자 안에도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다.

2003년 12월29일(월) 오전 11시 체렌한드 교수를 그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준비해간 사진을 보여준 뒤 물었다.

문: 어떤 느낌이 드는가?
답: 낯익다.이런 문양들(X,XX,   )은 과거 몽골 역사 유물에서도 많이 발견되지만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 고스란히 살아 남아 있다.

문: X문양은 어떤 뜻을 지녔는가?
답: 겔의 하단부를 떠받치는 접었다 폈다 하는 건축 재료로 연속성, 영원성을 상징한
다.

문: ◇문양은 어떤 상징으로 통용되는가?
답: 동서남북 사방을 튼튼하게 수호하고, 강력한 힘을 나타내기도 하며, 악을
물리친다는 상징적인 문양이다. ◇◇는 하탄수이흐라 하는데 ◇의
응용이며 강화된 뜻이다. 몽골의 고대 인물상의 귀고리, 목걸이, 반지에서
발견되는데, 악을 물리치는 부적과 같다.

문: (지면참조:문양을 넣을 수 없기 때문) 문양은 어떤 의미인가?
답: 안에 든 것은 꽃 문양이고 바깥 것은 하탄수이흐 문양이니까, 두 문양이 겹쳐진
만큼 더욱 더 강력한 상징이다. 활짝 핀 꽃은 번성, 새로 태어남, 신성한 힘을
상징하니까 신성함을 더욱 오래도록 수호한다는 상징이다. 강력한 힘을 뜻하므로
악귀나 사악한 귀신을 항복받고 물리친다는 상징이다.

2003년 12월29일(월) 오후 3시 바야르 교수를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그는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70여구의 석불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던 그가 먼저 나에게 물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몽골
석인상 연구’라는 저서를 갖고 있고, 한국에도 그에게서 배운 학자가 계신다.

바야르: 이 석상(石像)들은 어느 시대에 조성되었나?
필자: 우리나라에서는 13세기경이라고 한다.

바야르: 이 석상들은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조성해온 석상이나 불상과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가?

필자:특히 정통한 불상 양식과는 좀 다른 것 같다는 말도 있다. 무더기로 세워져
있다든가, 지난 시대인 신라나 삼국시대, 고려 초의 불상기법에서 후퇴하며
조악하다는 지적이 있다. 절 집 바깥 노천에 세워진 점도 불교 교리와는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바야르: 돌로 만든 불상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데, 시대적으로 특징이
있으며, 불상으로서 지녀야 할 원칙 같은 것이 공통적으로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쉽다. 그런데 이 석상(사진)들은 불상이라기보다 석인상(石人像)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이 석상들은 한국 어느 지역에 있는가?

필자: 한국 남단 전라남도 화순이라는 곳이다.
바야르: 이 지역이 몽골군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가?

필자: (몹시 놀랐다.삼별초와 몽골, 고려 연합군의 전투, 그 이전 몽골군의 침략을
얘기했다.)
바야르: (그는 갑자기 긴장하는 모습이었다.)몽골군이 주둔했던 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념물을 남겼다는 것이 제대로 연구되고 있지 않아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것들은 한국의 전통 불상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 같고, 몽골의
석인상과 유사한 점이 발견되기는 합니다만….

●석불, 몽골인의 조상신 석인상과 비슷

필자: 어떤 부분이 몽골 석인상과 유사하다는 것인가?
바야르: 이 석상들 얼굴 모습은 돌궐제국 석인상과 퍽 닮았다. 코를 기다랗게 처리한
점이 그러한데, 눈썹과 코가 연결된 부분을 선명하게 처리한 것은 돌궐의 석인상과
매우 닮았다. 몽골 석인상 연구는 손의 모양, 다리 모양에 따라 연구된다.

필자 :운주사 석상들의 손 모양으로 볼 때는 어떤가?
바야르: 돌궐 석인상과 유사해 보인다.…만약 몽골군이 그 곳에 가서 기념물을
조성했다면 몽골 고유의 방식을 고집했을 수도 있고, 그 지역 전통기법과 양식을
몽골 것과 융합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정해서 하는 말이다.
이곳 석상 중에서 상투 모양이 있는데, 이것도 돌궐 석인상과 유사하다.

●무더기 石像 돌궐시대 제사유적에서 발견

필자: 이 석상들은 무더기로 모여 있는데 이것은 불교 교리와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예가 몽골이나 그 이전 시대에 있었는가?
바야르: 돌궐시대 제사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제사유적지는 칸(지배자)의
제사유적인데, 칸은 앉아 있는 모습이다. 마치 부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옆에는 대신들이 좌우로 선다. 대신들은 직위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노예계급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있다.

필자: 이 사진은 흔히 와불(臥佛)이라 부르는데, 이런 예가 몽골에도 있는가?
바야르: 흔치는 않지만 몇몇 있다. 일으켜 세우면 재앙이 일어난다 하며 그냥 둔다.

이번 취재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운주사 탑신에 새겨져 있는 문양들이 모두
몽골의 민속에 나타나 있다는 점, 문양마다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그  의미들은
한결같이 현대 몽골 사회 곳곳에서 살아 있는데, 특히 몽골에서 가장 유서깊은  
간단사(寺)의 처마 끝이나 모든 사찰의 출입문과 지붕에서 문양들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 문양들은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도 없다. 그래서 오래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양을 신비한 것이라고만 말해왔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운주사 천불천탑을 몽골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지금까지 논의되어온 비밀스럽다던 탑신의 그 문양이 몽골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고, 석불들이 불상이기보다는 몽골인들의 조상신인
석인상과 그 형태와 세우는 방식이 많이 닮았다는 점을 보고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문화의 새벽이 오기 위해서는 부질없는 권위주의적 학문 방법과 속좁은
민족 문화론을 내세워 너무나 객관적이고 엄연한 역사사실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부끄럽게 여길 줄도 알야야만 한다. 부끄러움을 알면 모두가 평등하고 아름답다.
아, 그리고 천불천탑은 몽골군의 삼별초를 진압한 전승기념물이었을지도 모른다.


(3)한국인을 사랑한 사람, 무어 목사(상)  
    
등록 2004-01-09 19:29:37     조회 291
이름 정동주 [홈페이지]    


“대황제 폐하께, 나 새뮤얼 무어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
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황제폐하께서 폐하
의 신하들과 함께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신다면 저를 불러주시길 황송한 마음으
로 바라옵니다.”

한글로 적힌 이 편지는 겉봉에다 ‘코리아의 황제, 서울시(The Emperor of
Korea,City)’라 적고 그 안에 넣어져 우체통에 있었다.

이 편지는 고종황제께 전달되지 않고 내무부 관리의 손에 들어갔다. 그 관리는 편
지를 보낸 이가 그 즈음 한창 한국의 백정(白丁)들에게 설교하는 일로하여 미국선
교단과 서울 주재 외교관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새뮤얼 무어라는 사람임을 알았
다. 그 관리가 보기에 무어 목사는 불손하기 그지없었다. 감히 일개 외국선교사가
사사로이 고종황제에게 편지질을 한 것은 크게 비난받을 무례한 짓이라는 공식 불
평과 함께 그 편지를 미국 공사 알렌(H,N,Allen)에게 다시 보냈다.

●“무어는 정신이 건전치 못한 사람 같다”

편지 겉봉의 수신인은 ‘코리아의 황제’,수신인의 주소를 ‘서울(City)’이라고
적은 것은 우습기도 하고 기발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편지를 검토한 알렌 공사는 미 국무부에 보낸 공문서에서 “이런 겉잡을 수 없
고 무례한 선교사는 공사관 영창에 가둬야 옳다.”고 했다.그의 어머니께 보낸 편지
에서는 “무어라는 괴짜 선교사 한 사람을 감금시키겠다고 협박할수 밖에 없다.”고
했으며,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Ellinwood)에게 보낸 편지에서
는 “무어 목사는 가장 어렵고 귀찮은 사람이며 내가 언젠가 그를 ‘미친 인간’으로
보지 않으리라 장담 못하지만 그의 행동은 분명 ‘정신이 건전치 못한 사람’같다.”
고 썼다.

또한 “무어 목사가 고종황제를 만나겠다는 것은 그의 백정들(his butchers)을 인
정받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며,‘정신 상태가 건전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가 없어서
공사관에 관계된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고 하면서 “선교사들의 보
호뿐만 아니라 무어 목사같은 괴짜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선교사 거
류지를 차라리 부산, 인천, 원산과 같은 개항지로 제한하는 것이 좋겠다.”고 까지
썼다.

알렌 공사는 1900년 가을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서, 앞으
로 무어 목사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알렌 공사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 재한 미
국인 거류민으로서 어울리는 행동을 하겠다는 서약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는 회의록을 미국공사관에 전달하도록 하는 조치
를 취했다.

무어 목사는 이 통고를 받은 뒤 몹시 괴로워하다가 “내가 미국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여 나의 상관에게 매우 버릇없이
말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는 사과편지를 알렌 공사에게 보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알렌 공사의 말대로라면 “무식한 토박이 글쟁이가 썼기 때문에 무례한 글”이었으
나 무어 목사는,“그 편지는 지도를 받아 가장 존대하는 말로 썼으며, 편지 겉봉의
표기가 잘못되어서 불손하다는 항의를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본의가 아니고 이
나라의 관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불손한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다만 황제
폐하와 그가 다스리시는 나라의 현재와 영원한 복락을 염원해서 쓴 것이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비단 이 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민 계급의 대명사이자 가장 탄압받고 사는 백
정들에게 기독교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과 평등의 참뜻을 깨닫게 하기 위한 선교활
동으로 인하여 알렌 공사와 무어 목사 사이에는 비난과 해명의 편지가 여러 차례
오고 갔다.

●1900년 서울 외교관들 화제의 주인공

무어 목사는 참기 어려운 마음의 괴로움을 선교본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편지로
토로했다.“나와 같은 사람을 파괴시키기 위해 알렌은 그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느껴집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증오한다는 것이 어떤 심정
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알렌에게 품었던 미워하는 감정은 몇 주간이었고, 그 폭
풍은 벌써 지나가버렸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특별히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
을 느꼈습니다.”라고.

1900년 한해 내내 서울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단연코 화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
던 무어 목사는 그때 40세였다.

새뮤얼 무어(Samuel F.Moore,한국 이름 모삼열·牟三悅)는 1860년에 태어나서
1906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892년 9월19일 제물포를 통해서
였다. 시카고 부근 그랜드 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889
년 몬타나대학(College of Montana,현재 이름은 Rocky Mountain College)을 마
치고, 매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1892년 봄에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남다른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대학시절 학교 근처 감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열렬하게 외쳤고, 신학교 시절에는 경
찰서 유치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설교하기도 했다. 그해 9
월 로즈 엘리(Rose Elly)와 결혼하여 미국 북장로 선교사가 되어 두 달 뒤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15년동안 한국에 살면서 아들 셋, 딸 하나를 모두 한국
땅에서 낳아 길렀다. 딸은 무어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 아내의 복중에 있어서 유복
자로 태어났다.

그는 죽은 뒤에도 한국땅에 묻혀서 우리와 함께 살지만, 그가 떠난지 100년 가까
이 지나는 동안 한국인은 그토록 그가 차별받은 사람들을 붙들고 절규했던 인간평
등과 사랑을 많이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다.

●3년만에 한국말로 완벽하게 설교

그는 한국에 온 뒤 빨리 한국말을 익히기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그 당
시 선교사들은 정동이나 연동에 모여 살았다. 신변의 안전과 가정생활을 위해서였
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한국인 마을에서 서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빼어난 언어
감각으로 한국에 온지 반년이 채 못지나서 한국말로 주기도문을 유창하게 외웠고,
간단한 기도는 거뜬히 할 수 있었다.

3년 뒤 그는 수원의 한 교회에서 한국말로 설교를 했는데 너무나 완벽하게 한국
서민이 사용하는 말로 교인들을 감동시킨 나머지 한 교인이 미국에서도 목사들이
한국말을 쓰는지 묻는 바람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한국사람이 양복만 입은 것 같다는 한국인들의 그에 대한 칭찬은 그의 한국말 솜
씨가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의 생활 대부분이 한국인들과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 그의 말은 서민들의 생
활언어여서 서민이라면 누구하고도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그 즈음 미국의 선교사위원회에서는 선교활동을 돕기 위하여 선교사들에게 ‘한국
어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한국말을 잘하는 무어 목사는 그
시험에서 늘 낙제점수를 받았다. 이유는 사뭇 엉뚱했다. 그 시험에서는 서울 양반계
층들이 사용하는 유식하고 고급스러운 말들만 물었기 때문에 무어 목사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교위원회에서는 무어 목사에게 양반의 고급 교양어를
배우도록 권고했다. 무어 목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민중을 가르치려면 민중과 호흡해야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섬기고 싶은 것은 평범하고 진실된 한국 서민들이며, 그들을
위하는 길은 양반들의 고급스러운 말을 이용한 성경운동 보다는 그들의 가난하고
낮은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그들의 마음이 되어서 그들의 눈과 가슴으로 인간이 평등해
야 하는 까닭을 설명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
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들의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 보다 현명한 것은 없다고 했
다.

감리교의 초기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G.Appenzeller) 목사는 어느날 무어 목사
가 어느 교회앞 길거리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국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전
도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적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그는 민중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민중의 습속을 생활하면서 민중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그의 진지하고 애정어린 태도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
을 갖게 했고, 향기롭게 새겨진 그의 인상은 오래토록 가슴에 살아남아 있다.

그의 집은 늘 한국 서민들로 북적거렸고, 항상 그는 길거리에서 서민들을 만나 세
상사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조금도 차
별하지 않고 좋은 이웃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그의 집을 인의예지
가(仁義禮智家)라 칭송했다.

오늘, 같은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을 차별하는 저 천하에 몹쓸 지연, 학연, 혈연이 만
든 질병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무어 목사를 그리워한다.




(4)한국인을 사랑한 사람, 무어 목사(하)  

  
등록 2004-01-11 18:57:19     조회 287
이름 정동주 [홈페이지]    

  1898년 10월29일 종로 네거리 운종가 광장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
가 열리고 있었다. 외세의 국권 침탈위기에 맞서기 위해 정부 대표자와 민간인 각
계층 대표자가 한 자리에 모여서 국정개혁 원칙을 민중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
결정된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다짐을 하자는 큰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거리에서
관민이 함께 참여하여 벌이는 한국 최초의 합동토론회였다.

오후 2시. 광장에는 황국협회,황국중앙총상회,순성회,협성회,광무협회,진신회,친
목회,교육회,국민협회,진명회,일진회,보신사 등 각 사회단체들이 모였다. 순성회
부인들, 각 학교 생도들, 시전상인들, 맹인, 승려들, 백정(白丁)들, 정부부처 관료 및 신
사들이 청첩장 받은 순서대로 참석해 있었다.

●무어에 세례받은 백정 만민공동회 연설자로

오후 3시. 대회장인 윤치호가 먼저 만민공동회의 목적을 설명하고 인사말을 했다.
곧 이어서 군중은 만세를 불러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질서유지에 힘썼
다. 그런 다음 만민공동회의 개막연설자가 단상에 올랐다. 회의장은 순간 물을 뿌
린 듯이 고요해졌다. 연단으로 올라서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눈길이 일제히 쏠렸
다. 개막 연설자로 지명된 사람은 놀랍게도 백정 신분이자 새뮤얼 무어 목사한테
서 세례받은 곤담골교회 박성춘(朴成春)이었다. 박성춘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
로서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
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에 비유컨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
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심히 견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적에 보답하고 국조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

회중은 연설을 끝낸 박성춘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고,  연단 아래 모였던 수
십명의 백정들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 광경은 여러 날을 두고 장
안의 화제였다. 박성춘, 그는 이날의 연설로서 독립협회 주요인물인 안창호, 서재필
같은 큰 인물들과 함께 국가의 독립과 민족자립을 논의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
다.

무어 목사는 한국에 온 이듬해인 1893년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었던 곤담골에다 교회를 열고 곤골교회라 이름을 지었다. 교회에는 마을 아이
들을 위한 예수교학당을 함께 열었다. 무어 목사는 늘 길거리에서 한국사람들을 만
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아이들을 예수교학당에 보내라고 권했다. 그 마을에 살
던 박성춘이라는 백정도 무어 목사라는 사람의 진실된 성품이 싫지 않아서 그의
아들 박서양을 주일학교에 보냈다.

그후 박성춘은 발진티푸스를 앓아서 죽게 되었다. 박서양은 주일학교에 나와서 아
버지 병을 낫게 해달리는 기도를 하면서 울었다. 이를 본 무어 목사가 그 까닭을 물
었고 박서양은 아버지의 병환의 위급함을 말했다. 무어 목사는 박서양을 돌려보낸
뒤 급히 다른 선교사를 만나러 갔다.

고종황제의 어의(御醫)인 에비슨(Oliver R Avison)을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황제의 전문의사에게 천민보다 더 핍박받는 계급 백정을 진료해달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설혹 에비슨이 승낙한다 하더라도 그런 사실을 정부
대신들이나 서울의 양반들이 알게 되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에비슨은 무어 목사의 간곡한 청을 듣고 망서리지 않았다.무어 목사의 눈에 백정
들의 참담한 생존이 가장 시급한 구원의 대상으로 비쳤듯이 에비슨의 눈에 비친
무어 목사의 행동은 천사로 비쳤기 때문이다.

두 명의 선교사들이 백정 박성춘을 찾아왔다. 박성춘이 완쾌할 때까지 두사람의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박성춘은 임금님의 주치의가 자기 같은 천민을 치료해주기
위해 누추한 곳까지 와준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완치된 뒤 그의 자식들 모두를 주
일학교에 보낸 그도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어 같이 설움 받고 사는 백정들에게 전도
를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큰아들 박서양이 의학을 공부하여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
을 치료해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키웠다. 박서양은 결국 1899년 제중원의학교(세브
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면서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
이 되기도 했다.

그 무렵 무어 목사는 한국식 이름을 지었다. 모삼열(牟三悅). 소울음소리 모(牟)자
를 즐겨 쓴 이유는 백정들의 애환과 고난을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
지를 표명한 것이다.

1895년 박성춘은 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곤담골교회는 교인 20명의 제
법 뜻있는 교회로 자리잡아갔다.

●“양반전도 어렵다” 선교사들 불평·비난 받아

그 무렵 첫 차별사건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교회에 나오던 양반 신도들이 발길
을 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사정을 알고 보니 양반 신도들은 백정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백정 같은 천민도 예수를 믿
으면 죽은 뒤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백정이 가는 천당이라면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양반 신도도 있었다. 백정이 믿는 하느님과 양반이 믿는 하느님이 동일
하다는 것은 곧 양반을 능멸하는 짓이며, 더욱이 한 교회 지붕 밑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천당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도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다며 뉘우치는 이들이 생겼다. 그
들은 무어 목사에게 새로운 제의를 했다. 자기들을 앞자리에 앉게 하고 백정들을
뒷자리에 앉도록 좌석을 구별해준다면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무어 목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후 1904년 지금의 인사동으로 옮겨 1905년 승
동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한국 기독교사상 가장 뜻깊은 역사
를 간직한 교회의 하나가 되었다.

박성춘이 교인이 된 뒤 무어 목사는 에비슨 박사와 함께 뜻을 모아서 백정들에 대
한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1895년에서 189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
정에 탄원서를 냈다. 이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졌다. 비로소 백정도 한국의 국민 자격
을 얻어 호적에 오를 수 있었고 일반인들처럼 갓도 쓰고 두루마기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백정들은 머리에 갓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외출할 때에는 패랭이를 쓰
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디서나 한 눈에 백정 신분임을 드러내도록 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의 유태인들이 가슴에 노랑색 별을 달고 다녀야 하듯 했고, 인도
의 최하층 노예신분인 수드라가 항상 황토색깔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 것과 같
았다. 그러다가 갓을 쓸 수 있다는 법령이 공포되자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
방령을 발표했을 때 기뻐했던 흑인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기쁨이 한국
전역의 백정들을 울부짖게 만들었다. 어떤 백정은 하도 좋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
고 갓을 쓰고 살았던 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철도공사장 노동자 인권침해´ 日에 항의

이와 같은 선지자적인 무어 목사의 행동은 많은 선교사들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
이 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이들은, 교회가 백정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면 양반들에게 전도하기 어려워지게 되고 결국에
는 교회가 성장하는데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는 불평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들을 교인으로 전도해야만 교회의 위상이 높아
질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실익이 생길 수 있지만, 백정 같은 천민들이 아무리 교인
으로 많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은 별로 커지지 않는다고 했
다. 백정들의 인간해방 운동을 위하여 동료 선교사들과 아무 의논도 없이 임금에
게 탄원서를 낸 것은 미 국무부 정책을 위반하여 다른 나라 정치와 관습에 간섭하
는 것이라고 보았다.

1899년 12월 무어 목사는 고종황제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알렌 공사로 하여금 주
선해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무어 목사는
한국의 백정들에 대한 인권탄압 정책과 제도를 혁파해달라는 요구를 고종황제에
게 해볼 결심으로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거절당한 뒤 할 수 없이 문제의 그 편
지를 직접 고종황제에게 보냈고, 그로하여 알렌 공사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던 것
이다.

이런 가운데 무어 목사는 아내의 건강이 몹시 쇠약해져 1902년부터 1년 동안 미국
의 고향에서 요양을 끝내고 1903년 9월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 무
렵 무어 목사는 서울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알렌 공사와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천민이나 서민들보다 양반과 부자, 귀족들에게 주로 선교활동을 펴면
서 백정선교에 집중하는 무어 목사를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
하는데 지쳐갔다.

그는 살림도 할 수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장만하여 ‘기쁜 소식(The Glad Tidings)’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작은 어촌과 섬, 그리고 한강 언저리
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마음 속에서 차별을 없
애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런 중에 일본 군용철도 공사장에 강제로 동원된 한국 노동자들의 심각한 인권
침해 문제를 일본영사관에 제기했다. 일본영사관에서 아무런 반응을 안보이자 일
본군의 잔혹행위를 고발하는 성명서를 해외선교부에 보내 도와줄 것을 호소하기
도 했다.

●1906년 전도여행길서 병 얻어 46세로 사망

그때 무어 목사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인들에게 그토록 짓밟히면서도 민중봉기가
없는 것은 한국인들이 수탈과 억압에 너무 익숙해져 인간의 혼이 죽어버린 탓이
아닌가 하고 통곡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자유사상을 고취
시켜 나간다면 장차 인간의 혼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한국인을 사랑하던 무어 목사는 1906년 전도 여행길에서 병을 얻어 그해
12월22일 세브란스병원에서 46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의 백정을 사랑한 인권의 은인이자 인간해방의 참뜻을 가르친 위대한 사
도였다. 그의 인권사상은 그가 죽은 지 16년 뒤인 1922년 백정해방운동으로 되살아
났다.


(5) 백제인의 사랑 진표율사(상)  

등록 2004-01-16 18:37:10     조회 175
이름 정동주    


진표 스님을 뵙기 위해 금산사(金山寺) 가던 날은 절기로 소한이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는 겨울 속에 봄 날씨를 차려 입고서 뜬금없이 진표 스님의 안부를 묻는 나그네에게 개구리는 왜 우느냐고 되물었다. 이 질문은 금산사를 찾아가는 모든 길손에게 던지는 것이면서 금산사에 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알았느냐고 또 묻는다고 했다.

그날은 잿빛 참나무 숲에서 우는 동박새 울음소리에 실려서 물어왔다. 어떤 때는
봄날 노고지리 노래나 겨울 갈가마귀떼 울음으로도 물어온다 했다. 눈보라로 울부
짖거나 천둥번개로 절규하기도 하며, 살모사 눈빛이나 하현달의 쓸쓸함으로 물어
올 때도 있단다.

●견훤이 물었다 “후백제를 아시오?”

개구리가 왜 우느냐고요? 실은 저도 오늘 그걸 여쭙기 위해 찾아가는 길인 걸요.
돌아갈 때는 꼭 대답을 들려주고 가란다. 걸음이 무거워졌다. 금산사 일주문 조금
못미쳐 돌로 된 굴다리 앞에 이르자 이번엔 안내판 글자 속에서 견훤이 걸어나오
더니 나그네를 붙들었다. 후백제를 아시오?

후백제라….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백제가 멸망한 660년에서 무려 240년이나 지
난 뒤에 옛 백제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건국한 나라가 아니냐고 대답하
자 견훤이 버럭 고함을 쳤다. 연합군이라고? 이런 시러베아들놈 같으니라구. 연합군
은 뭔 연합군이야, 늑대 같은 외세지.

외세 끌어들여 욕심 채우려다가 시퍼런 증오와 원한의 늪에다 백제인들을 처밀어
놓고, 고구려 저 광활한 영토 몽땅 다 빼앗기고서 반도 남쪽 구석에 내몰려서 쭈그
리고 사는 꼴 하고서는….그 잘난 신라가 저질러버린 엄청난 과오를 당신도 지금
보고있지 않은가.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즈그네덜거로 한다며 떵떵거리고 있는데
도, 그 뭣인가 대한민국 정치인이라는 얄궂은 것들은 입 딱 봉하고 있담서. 외세 끌
어들여 민족 영토 거덜내버린 신라 정치인들이나, 중국 눈치 살피면서 몸사리는 정
치인들이나 모조리 다 거시기할 것들이여. 참으로 두렵고, 아프고, 무거운 해후였다.
견훤은 백제 유민인 전주지방 인민들의 회고적 감정에 호소하며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는데, 그때 가장 결정적인 힘이 백제 유민들의 그 회고적 감정이었다. 백제
가 신라 역사에 편입된 지 240년이 지날 때까지도 옛 백제를 못잊어하고, 신라의 지
배질서에 원한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단순히 옛 일만이 아닌 것 같다.

●금산사에 계신 진표 스님을 뵙다

진표 스님은 금산사 대웅전 뒷편 조사당(祖師堂)의 영정 안에 계셨다. 오른 쪽에
는 은사이신 숭제법사(崇濟法師)께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나그네와 진
표 스님 사이에는 120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우주는 마음으로
짓고 허무는 것이라는 진표 스님의 법문을 믿고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스님께 여
쭈었다. 스님은 고요속에다 말씀을 풀어놓으셨다. 그렇게 조사당문답(祖師堂問答)
이 시작되었다.

나그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라크 국민들은 참담한 좌절감에 빠져 있습니
다.목숨을 내건 테러로 살상과 증오의 날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 불행을 종식시
키기 위한 방법을 먼저 여쭙고자 합니다. 오늘날 이라크 국민들이 겪는 고통은 스
님께서 목숨을 건 망신참회(亡身懺悔) 수행을 통하여 백제인들과 신라 집권자들
이 상생(相生)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시던 그때 상황과 매우 닮았다고 여기기 때문
입니다.

진표 스님: 미국과 이라크는 인간이 지닌 모순의 두 측면을 각각 대변하고 있구
나.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여기는 쪽과 일체의 사물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라고 집착하는 또 한 측면의 충돌이지. 똑같으니까 싸우는 것이지. 나는 그때 백제
인들에게는 무모한 저항을 하지 말도록 설득시켜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신
라의 지배자들에게는 잔혹한 탄압을 중지시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야 한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매우 미묘한 것이어서 자칫 잘못
하면 어느 한쪽만의 이익을 위해 편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거든. 그리되면 약자들
로부터는 굴종을 강요한다는 원성을 들을 수 있고, 강자한테서는 저항을 부추긴다
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자는 불만·투쟁 잘 다스려야

나그네: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지요.

진표 스님: 다스리되 군림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불만과 투쟁이
라는 두 축 위에서 절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좋은 지도자는 두 원인을 잘 다스리
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자랑이란 욕심을 만드는 종자이기 때문이다. 백제인들에
게는 신라의 지배질서를 따름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제시해야 하고, 신라 지
도자들에게는 비폭력적 방법으로 백제인을 끌어안을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가르
쳐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을 터득하는 데는 엄청난 장애들을 극복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나그네:가장 큰 장애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진표 스님:내가 왜 이 일을 맡아야 하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나그네:어떻게 해결하셨는지요?

진표 스님: 비상한 시름은 평범한 물건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백제인들은 한 세
기 가깝도록 신라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왔다. 증오는 저주로 변했다. 신라의 편견
도 지배자라는 타성에 젖어서 점점 더 폭력적인 지배방법만 강구했다. 서로의 견
해 차이가 워낙 커서 웬만한 조정능력으로는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었
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했다. 과거의 인연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얻고자 했다. 그 능
력으로 나와 타인의 과거에 얽힌 인연과 선악에 관한 것을 알고자 했다. 이를 숙명
통(宿命通)이라 하느니라. 또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었다. 인과응보를 확인시켜줌으로써 눈에 안 보이는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힘이지. 이것은 천안통(天眼通)이라 하느니라. 번뇌가 끝나서 얻은 지혜로서
현재의 번뇌를 끊어버리는 능력을 얻는 누진통,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는 신족통, 보통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능력인 천이통,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인 타심통을 합한 육신통(六神通)과 해탈법을 깨닫기 위한 결심
을 한 것이다. 이 육신통이야말로 비상한 시대 문제를 풀 수 있는 비상한 물건이라
고 믿었기 때문이지.그런 능력이 있어야만 양쪽 모두를 조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깨달았다. 지배자와 민중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적대감정을 해결하여 공존과 상생
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율자가 되기로 한 것이지. 그런 조율자로서의 능력과 방법
을 지장보살님과 미륵부처님께 물었다. 내 몸을 던져서 답을 구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망신참회라 부른다.

나그네: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수행법인 망신참회를 선택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
니까?

●내 개구리는 업장을 깨우쳐 주었노라

진표 스님: 동기라고 했느냐?(스님은 오른쪽에 있는 그의 스승이신 숭제법사 쪽
을 바라보며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머금었다.)너는 개구리가 왜 우는지 아느냐?

나그네: 생물시간에 배우기로는 암컷과 수컷이 교미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만.

진표 스님: 그래야겠지.그런데 내 개구리는 울어서 내 미혹과 업장을 깨우쳐주었
다.

나그네: 무슨 말씀이신지….

진표 스님: 나는 열 살 이전에 활을 잘 쏘아 명궁 소리를 들었다. 자주 사냥에 나가
활솜씨를 자랑하곤 했지. 어느날 사냥가던 길에 개구리떼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는
데 그놈들을 잡아 구워먹고 싶었다. 크고 살진 놈만 잡아서 버들꿰미에 꿰었다. 돌
아올 때 갖고 가기위해 냇가에 두었는데 사냥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그만 집에 오
면서 잊어버렸어. 일년 뒤 다시 그 길을 지나다가 작년에 내가 잡아서 꿰어둔 개구
리들이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개구리들의 처량한 모습
이 내 이웃 사람들로 느껴졌고, 나는 내 이웃 사람들을 박해하는 신라 지배자들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금산사 숭제법
사님을 의지하여 출가를 했다.


(6) 백제인의 사랑 진표율사(하)  

  
등록 2004-01-18 19:20:45     조회 131
이름 정동주 [홈페이지]    

  
삼국시대 후반 백제는 신라와의 지루한 전쟁으로 몹시 불우한 시대를 이어갔다.
신라는 백제를 넘어서 당나라와의 보다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국력을 키우고 싶어
했고, 그러자면 백제는 신라에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이 되었다. 두 나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 신라의 집요한 침략전쟁 속에서 백제는 좌절하지
않기 위해 미륵신앙을 껴안았다. 단순한 전쟁 회피나 불안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서가 아니라 신라의 군사 공격을 꺾어 응징하는 힘과 근원적으로 죽고 죽이는 살
상전이 없는 세계에 태어나 살고 싶다는 구원을 향한 절절한 신앙이었다.

미륵신앙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제인들은 백제 땅이 미륵부처가 강림
하실 약속의 땅으로 선택되기를 희망하면서 미륵사를 크게 짓고 미륵부처가 오시
기를 기다렸다. 미륵사가 삼국시대를 통하여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은 백제인
들의 그같은 소망이 투영된 백제인의 마음으로 이룩한 신앙의 결정체였다.

미륵신앙은 100년이 넘도록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 나라가 미륵신앙의 성지였다.
이같은 백제의 미륵신앙을 유심히 살펴보던 신라가 뒤늦게야 슬며시 미륵사상을
배워가더니 백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미륵신앙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다.

●신라에 정복 뒤 좌절빠진 백제 유민

화랑도와 미륵사상을 연결시켜 현실적인 국력으로 바꿔낸 것이다. 미륵신앙을 표방하는
사찰을 짓기도 했지만 미륵사상이 현실화된 화랑도를 통하여 군사력을 극대화시킨
신라는 그 힘을 바탕으로 삼아 백제를 정복해버렸다.

어이없게도 신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진 백제는 그들의 염원으로 이룩한 미륵성지들과 함께 소망의 땅에서 절망의 땅으로 쫓겨난 셈이 되고 말았다.

좌절감은 크고 깊었다. 이제 백제인들은 백제 유민이란 말로 바뀌는 가혹한 운명
에 놓였다. 그 때부터 처절한 저항의 날들이 시작되고, 원한 또한 깊어졌지만 한번
뒤바뀐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신라는 아주 천천히 백제 땅과 사람을 신라의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갔다. 먼저 백
제의 역사를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 신라기(新羅紀)에 삽입시켰다. 백제를
정복한 지 100년이 가까워진 757년(경덕왕 16) 진표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땅 이름
을 원래 지명인 두내산현에서 만경(萬頃)으로 바꾸었다. 이는 정복지 백제에 대한
신라의 완전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진표는 이제 만경들판에서도 그치지 않
는 백제유민들의 원한과 저주의 나날들이 미륵신앙의 힘으로 해원되어 신라와의
상생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같은 격변속에서 진표는 아버지와 진지한
의논 끝에 금산사(金山寺)의 숭제(崇濟)법사를 의지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유민들 고난 해결위해 `망신참회법´ 수행

숭제법사 또한 백제 유민으로서 일찍 당나라 정토종을 이끌던 선도(善導·613∼
681)화상 법맥을 이어온 스님이었다. 이제 진표는 스님이 되어 숭제법사의 가르침
을 받기 시작했다. 숭제법사는 진표스님께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주
면서 각별한 수행을 권했다. 점찰경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은 말법시대(末法時代)
가 되면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이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 부닥쳐 수행에 곤경을 겪
게 되고, 산란한 마음때문에 갈피를 잡지못할 경우가 많게 된다고 했다. 이때 숙세
의 선악업보가 현재의 고락길흉을 점찰하여 참회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의 안락을
얻도록 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숭제법사는 진표스님에게 계법(戒法)을 지니고 미륵과 지장보살에게 참회하여 직
접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할 것을 당부했다.

진표스님은 백제 유민들이 100년 가까이 겪고 있는 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과 능력을 구하기 위해 17년 간의 긴 고행에 돌입했다. 육신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수행법의 하나인 망신참회법(亡身懺悔法)을 선택했다. 육신을 버리지 않고는 깨달
아지지 않는 수행법이었다. 백제 유민들이 한 세기토록 겪은 육신의 고통을 자신
의 한 몸으로 다 받아내겠다는 각오였다.

참회의 참(懺)은 산스크리트 Ksama의 음역으로 용서를 비는 것, 뉘우치는 것을
뜻한다. 내가 범한 죄를 부처 앞에서 고백하는 것, 회개한다는 것인데, 원시불교에
서 비구는 자기가 범한 죄를 석가세존 또는 장로비구에게 고백하여 심판받도록 되
어 있었다. 비구는 보름마다 모여서 우포자타(uposatha·포살·布薩)라는 의식을 행
하고, 계율의 조목을 읽힐 때 마다 죄가 있을 때는 스스로 말하고 일어서야 했다. 이
렇듯 대승불교에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한 자는 모든 부처 앞에 참회하고, 온몸을
던져 진리에 귀의하는 맹세를 하며, 부처의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의 잘못을 거두어
주는 은혜를 입음으로써 죄의 공포에서 해방된다고 했다.

이같은 의식의 궁극 목표는 죄의식이 전혀없어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 하였
다.

진표스님이 이같은 망신참회법을 선택한 것은 직접 자신이 진리를 체험하여 확신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 백제 유민들에게 참회의 필요성을 말하고, 참회를 통하
여 진정한 해방을 누리고 자유를 숨쉬고 사는 삶을 권하려는 것이었다. 육신의 고
통을 극복하는 참회법은 일찍이 석가모니 시대부터 있어왔다. 하루에 한 끼,이틀
에 한 끼,사흘에 한 끼를 먹거나, 나무 열매나 꽃으로 요기를 하거나,한 다리를 들
고서 있거나,진흙 먼지 속에 누워있거나,가 시덤불 위에 누워있거나, 물과 불 위에
누워있거나, 어깨쭉지의 살에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끈을 밀어 넣어 나무가지에
다 묶어놓고 피를 흘리며 매달려 있는 등의 육신을 고통속으로 몰아 넣어 그 고통
을 잊어버림으로써 위대한 정신을 깨달으려는 수행법이었다.

진표스님의 망신참회법은 이들 전통적 수행법보다 훨씬 더 처절했다.

760년(경덕왕 19) 쌀 20말을 쪄서 말린 것을 가지고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
에 들어가면서 백제 유민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는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는 살아
서 그 방문을 걸어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미륵부처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다. 대부분의 출가승려들이 해온 전통적 수
행법에 따른 정진이었다.그러나 3년이 넘도록 미륵불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
다. 그때 진표스님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경전에 쓰여있는 수행법에 따라 참회
하는 것만으로 백제 유민들의 그 오래고 참혹한 고난이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한 것은 땅 위에 백제 한 나라만 존재하는 것이 아
니라 여러 국가가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인정할 때는 피할 수 없는 약육
강식의 세상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주 모든 것의 상관성 깨달아

진표스님이 망신참회법 수행을 결심한 것은 신라의 백제 침공을 꾸짖고 회개시키
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백제인들이 한 세기가 넘도록 미륵신앙을 지니
고 혼신껏 기도했지만 그에 대한 회답이 신라의 지배 아래서 굴욕적인 삶을 살도
록 한 것이라면,왜 그래야 했는지를 알고 싶었으며, 장차 백제유민들은 어떻게 살
아야 원한과 저주의 불길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진표스님은 자신의 고통이 모든 백제유민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끈은 모
든 신라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주에서 홀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없고, 태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모
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있다는 깨달음이 진표스님의 확신으로 차올랐다. 백제인들
의 고통이 소멸되지 않고는 자신이 결코 안락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백제인들의 고통을 없애줄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었다. 그 방법
은 수행자 자신의 죄의식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참회법으로는 불가능한 차원에 닿
아야만 깨달을 수 있음을 알고는 육신을 버리기로 했다. 온 우주는 마음의 문제이
지 육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장한 결심으로 21일 동안 육신을 던져넣는 참회수행을 단행했다. 바위 아래로 몸
을 던졌다.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진표스님을 안아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사
라졌다. 다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수행을 강행했다.3일째 되자 팔과 다리가 부
러져 일어서 걸을 수도, 물건을 쥐기도 어려웠다. 이제는 온몸을 굴려 언덕 아래로
떨어지는 참회수행을 계속했다. 오직 마음으로 미륵을 불러 대답을 원했다. 차츰 고
통을 잊는 상태로 몰입했다. 이제 온전한 것은 머리 뿐이었다. 머리 마저 깨뜨려버
림으로써 살고죽는 불편함마저 초월하고 싶었다.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나
타나 팔과 다리를 고쳐주고,가사와 발우를 전했다.수기(授記)가 내려진 것이다.그
때부터 새로운 수행을 시작했다. 21일을 다 채웠을 때 그토록 갈망했던 고통을 치
유시키는 지혜가 터득되었다. 금산사로 다시 돌아온 것은 29세 때였다. 금산사에다
청동으로 빚은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그 아래서 외치기 시작했다. 사자후(獅子吼)
를 토한 것이다.

●신라 지도자들에도 참회 설파

만경들에서 농사짓던 이들이 미륵불을 기다렸지만 미륵불이 오지 않는 까닭을 말
하면서 진정한 미륵을 만날 수 있는 비법을 설파했다. 백제인의 마음속에는 신라
를 향한 증오와 저주로 꽉 차있기 때문에 미륵의 소식이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이
미 미륵은 와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했다. 증오와 원한과 저주로 피
흘리고 죽이는 일이 그치지 않는 한 미륵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설득했다. 신라
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백제인들뿐이며, 백제인의 용서를 통해서만 신라가 나라다
울 수 있고, 신라가 나라다워야만 백제인의 마음에서 증오와 저주가 사라질 수 있
으며, 그래야만 공존과 상생을 이룰 수 있다고 절규했다.

신라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외쳤다 .백제인을 능멸하고, 빼앗고, 죽이는 통치법으
로는 신라도 끝없는 고난속으로 빠져들 뿐이며,오만과 편견과 무력으로 이룬 한
때의 번영이 더 큰 재앙으로 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참회하는 길뿐임을 설파했다.

신라인의 참회가 있어야만 백제인과 공존할 수 있음을 타일렀다 .마침내 신라의
왕과 귀족, 지도자들이 진표스님의 법문에 무릎을 꿇었다. 진정한 통일신라는 그 때
부터 시작되었다. 진표스님의 온 몸을 던진 백제 사랑은 한 시대의 고난과 불행을
극복해 내는 위대한 지도자의 참모습이었다.

(7)연기스님 前상사리(상)  

  
등록 2004-01-24 18:39:13     조회 29
이름 정동주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68년 겨울이었습니다.연기라는 스님이 계신
다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남쪽에 있는 화엄사(華嚴寺)로 가보
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만 믿고서였지요. 그 해 겨울 산벚꽃 꽃잎만한 함박눈이 내
리던 노고단 준령을 넘어서 화엄사까지 왔을 때 각황전(覺皇殿) 뒤 아름드리 소나
무들의 늠렬한 푸른 빛깔들은 함박눈을 맞으며 선정에 들어 있더군요.

그때 저는 함부로 마셔버린 사상의 술에 취하여 스물 한 살 밤과 낮이 길 없는 혼
돈으로 몹시 흔들리고 있었고, 마음은 까닭을 알 수 없는 분노의 황톳물에 젖어서
어둡고 쓸쓸했습니다 .말이 사상이지 사실은 어설픈 어릿광대의 흉내내기에 지나
지 않았지요. 스님을 다시 찾아가는 올 겨울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꼭 서른 여섯 해
만입니다. 스물 한 살 푸르렀던 나이가 어느새 함박눈을 뒤집어 쓴 머리칼로 변했
습니다.

●연기스님의 지극한 효행 형상화

36년 전 그 때 저는 연기 스님이란 분이 화엄사에 계신 줄 알고 찾아갔었지요. 각황
전 석등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노승께 연기 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자 그 노승은
나를 잠시 바라보시더니 각황전 뒤 108 돌계단을 올라가면 기다리고 계실 거라 했
습니다. 어떻게 제가 찾아올 줄 알았는지 궁금했지요. 함박눈을 맞으며 돌층계를 오
르면서 연기란 분이 어떤 스님인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층계를 다 올라왔지만 아무
도 없었습니다. 다만 매우 특이한 모습의 3층 석탑 한 기와 석탑 맞은편에 석등 하
나가 분분하게 흩날리는 함박눈 속에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 석탑이나 석등보다 높다란 언덕 주위에 빙 둘러서 있는 수
백년 된 소나무들의 붉은 몸피와 짙푸른 솔가지들의 층층마다 내리고 있는 눈송이
들의 정취가 더 숨막히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잠시 뒤 저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더
군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천천히 탑 주변을 한바퀴 돌다보
니 안내판이 있었습니다. 사사자3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 경주 불국
사의 다보탑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 걸작품이라는 것, 효대(孝臺)로도 불리는 이
석탑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스님이 그의 어머니께 받친 효행을 형상화하고 있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연기라는 스님이 화엄사에 계시니 가서 만나보라
던 어느 스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을 쓸다 말고 능청스럽게 연기 스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실 거라 했던 그 노승의 말씀에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지요.

피식 웃었지요.하지만 더는 의심의 원 안으로 걸어들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냥 겨울 지리산을 만나보았다는 것만으로 자위하며 돌아오려 했는데, 워낙 눈이 많
이 내리는 바람에 화엄사 객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눈
은 그치질 않았지요. 꼬박 이틀을 객실에서 보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연기라는 스님
에 관한 얘기와 화엄사의 내력을 얼마만큼이나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연기 스님이
나 화엄사 둘 다 전설 또는 신화적인 요소를 많이 지녔다는 것, 우리나라 역사 속
의 저 무수한 사찰들 중에서 화엄사만큼 중요한 인물들이 중첩으로 관련된 곳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습니다. 눈을 쓸던 그 노스님이 얘기로 전해주었
거나 보여준 몇 가지 문헌들을 종합해 볼수록 혼란스럽기도 했고, 신비스러운 면
도 있었습니다.

●起·緣起·烟起… 생몰연대와 업적 달라

우선 연기라고 발음되는 이름이 셋이었습니다. 제비 연()자를 사용하는 연기(起),
인연 연(緣)자를 쓰는 연기(緣起),연기 연(烟)자를 쓰는 연기(烟起)였습니다. 한 사
람이 세 가지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이 각각 저마다의 이름을 사용했
으며, 각각의 생몰연대와 업적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세 사람의 이름을 둘러싸고 온갖 억지가 벌어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세 사람 모
두를 누군가가 꾸며낸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하셨
습니다.

제가 그때 그 노스님의 말씀 중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던 것은 화엄사상(華嚴
思想)에 관련된 스님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연기존자(起尊者), 자장율사(慈藏律師),
원효(元曉), 의상(義湘), 연기조사(緣起祖師), 도선국사(道善國師), 의천(義天)을 비
롯한 화엄학승들이 수행한 통일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핵심 사찰이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구례 화엄사라는 사찰에 이토록 명망이
드높았던 승려들의 이름이 거론되는지, 그 승려들의 생몰연대와 업적이 확연하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 같은 업적을 놓고 경합을 벌이듯 거론되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모습의 그 효대와 효대의 주인공인
연기 스님이라는 분과 그 분 어머니도 비구니였다는 얘기가 전설인지 아니면 신화
인지, 혹은 사실이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36년 전 겨울에 있었던 그 일은
제가 눈 덮인 화엄사 길을 탈출하듯 빠져나온 뒤로 한동안 잊어버렸습니다. 저 살
기 바빠서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화엄사와 효대를 찾게 된 것은 1993년 무렵부터
였습니다. 식구들과 함께였거나 혼자일 때도 있었습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나 있었
고, 각황전 석등 앞에서 눈을 쓸던 노스님도 육신을 벗고 고해의 바다를 건넌지 오
래였지만 효대 주변 솔숲엔 천년의 바람소리가 한결로 푸르렀고, 어머니를 바라보
는 연기 스님의 자세는 지리산과 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씩 차례로 물어 들어갔습니다. 화엄사는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
중창자는 누구였는지, 각황전 자리에 있었다는 장륙전(丈六殿) 벽면을 장식했던 돌
에 새긴 화엄경은 어떤 종류였는지도 물었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화엄경과 화엄사상이 먼저 영향을 끼친 것이 신라인지 아니면
백제인지가 더 궁금했습니다. 이 의문은 원효와 의상 두 사람 중에서 의상은 당나
라에 유학하여 화엄경을 배워왔는데, 유학하지 않은 원효가 화엄사상을 어떻게 배
울 수 있었는지, 왜 백제시대의 화엄사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지, 정복지 백제
땅을 다스리기 위해 화엄십찰을 짓고 화엄사상을 펼치는 과정에서 전라도 주민들
로부터 어떤 도움을 왜 받아야 했는지는 지금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그리고 연기라
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 사람의 정체는 과연 누구인지,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어떤
것이며 왜 그런 일을 하며 살아야만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효대의 주인공이신
연기 스님은 세 분의 연기 중 과연 어떤 분이신지, 그  연기 스님이 우러러 보고 있
는 맞은편의 그 스님상이 과연 연기 스님의 어머니이신지, 어머니가 맞다면 왜 출
가한 사문인 아들을 따라서 절에 오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장엄하면서도 슬픈 화엄사의 내력

스님. 화엄사를 창건한 연대가 544년 무렵이었고, 창건자는 연기조사(緣起祖師) 또
는 연기(緣起)라고 적고 있는 기록을 틀렸다고 할 만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문제
는 역시 연기라는 이름입니다. 지금의 화엄사에서는 세 분의 연기 스님을 모두 인
정하고 있습니다. 창건자는 연기(起)이고, 중창자는 연기(緣起)이며, 본격적인 화엄
사상도량으로 키운 이는 연기(烟起)라는 것이지요. 제비 연()자 연기는 인도에서
오신 스님이며, 인연 연(緣)자 연기는 의상(義湘) 스님이거나 지금의 전라남도 고
창군 흥덕면 출신 황룡사 승려로서 755년 2월 황룡사에서 신라의 흰 종이에다 먹
으로 주본(周本) 80화엄을 사경했던 스님이며, 연기 연(烟)자 연기는 화엄사를 크
게 확장한 도선(道善) 국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스님. 과연 스님은 이 세 분의 연기 중 어느 분이십니까? 저는 감히 효대의 주인공
이 지닌 신비를 풀어낸다면 세 연기의 비밀과 함께 화엄사의 아름답고 장엄하면
서 조금은 슬픈 내력도 자연스럽게 풀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날까지 이 신비
가 신비로 남아 있는 것은 화엄사와 효대가 지닌 역사의 중요성 때문이라고 여깁
니다.즉, 화엄사는 신라와 백제의 주요 국경도시인 구례(求禮) 땅에 정략적인 목적
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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