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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小平이 주도한 毛澤東에 대한 역사적 평가
 관리자  05-19 | VIEW : 2,249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 ② - 鄧小平이 주도한 毛澤東에 대한 역사적 평가  

  
「建國 이래 黨의 약간의 歷史문제에 관한 決議」내막
  
문제는 毛澤東이란 偶像이었다. 人口大國 중국은 紅衛兵의 亂動과 파괴를 부른 毛澤東의 極左群衆路線을 부정하지 않는 한 民生문제 해결에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毛澤東 사망 후 再起한 鄧小平은 歷史決議의 채택을 통해 『毛澤東의 功은 1차적이고, 過는 2차적』이란 절충의 레토릭으로 毛澤東의 神性을 약화시켜 놓고 實事求是의 路線을 확립하고 「朴正熙 경제모델」을 모방함으로써 中國을 「경제성장 優等國」으로 변화시켰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中國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鄧小平이 주도한 歷史決議 채택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格下와 고르바초프의 「開放·개혁」 선언과 더불어 極左이데올로기의 存立기반을 허물어버린 20세기史의 일대 事變이었다


『文化大革命은 毛澤東 동지가 일으킨 內亂이었다』

● 毛澤東의 極左路線 부정한 新中國의 反省文
● 毛澤東의 포퓰리즘 청산하고 鄧小平의 實用主義 확립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오늘의 中國을 견인한 역사적 文獻

<毛澤東>


1981년 6월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1期6中全會)는 「建國 이래 黨의 약간의 歷史문제에 관한 決議」(이하 歷史決議로 표기함)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歷史決議는 毛澤東(모택동)이 주도한 「文化大革命」(문화대혁명)의 極左路線(극좌노선)을 부정하고, 鄧小平(등소평) 체제를 확실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 놓으면서 오늘의 중국을 經濟 제일주의의 길로 이끈 역사적 文獻(문헌)이다.
  
  8개 부문, 38개 항, 약 3만 字로 구성되어 있는 歷史決議의 실무적 작업은 中共黨 최고 이론가 胡喬木(호교목) 그룹이 맡았지만, 그 全文에는 20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鄧小平의 의지, 즉 그의 實用主義 정신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鄧小平은 1980년 3월부터 1981년 6월 사이에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역사결의 基礎小組」에 문건의 기초와 수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간여했다.
  
  문제는 毛澤東이었다. 中國은 毛澤東의 呪術(주술)에서 깨어나 그의 神性(신성)과 극좌 이데올로기의 과잉상태를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歷史決議가 작성되던 무렵만 하더라도 毛澤東을 비판하는 데는 아직도 勇斷(용단)이 필요했다.
  
  毛澤東은 이미 1976년에 사망했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偶像化(우상화) 작업에 의해 여전히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특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한 「創業皇帝」(창업황제)였다. 鄧小平은 그의 「歷史決議의 基礎에 대한 意見」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毛澤東 동지의 오류에 대해 度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됩니다. 度를 넘게 되면 毛澤東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黨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鄧小平은 毛澤東을 부정하거나 기왕의 黨결의를 全面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를 보는 그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毛澤東 동지의 功過(공과)에 대해 적절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고참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토지개혁 시기의 빈농, 중·하층 농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毛澤東 사상이란 깃발을 내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깃발을 내던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 黨의 빛나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鄧小平은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밑자락을 깔고 『毛澤東 동지가 만년에 이르러 사상에 일관성이 없고 어떤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못박았다.
  
  『대체로 1957년(전반기)까지 毛澤東 동지의 領導(영도)가 옳았으나 1957년 (여름의) 反右派(반우파) 투쟁 이후부터 誤謬(오류)가 점점 늘어났다』
  
  그 오류의 핵심인 文革에 대해 鄧小平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문화대혁명」이 한 세대의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세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으로 無政府主義와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범람하게 되었고, 사회기풍에 심각한 害(해)를 끼쳤습니다』
  
  鄧小平은 「문화대혁명」 시기 중 「毛澤東 동지의 오류」와 「4인방의 도전」과 홍위병의 난동을 극복한 데 대해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힘을 합쳐 「逆轉勝(역전승)한 기록」으로 평가했다.
  
  
  中國的 시장경제의 이론적 土臺
  
  歷史決議는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점하는 中國의 인민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어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世界史的 의미를 지니고 있다. 12억 인구의 中國이 굶으면서도 「혁명의 수출」에 주력한다면 이웃나라가 불행해질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격동하게 마련이다. 中國은 「대약진운동」 기간(1958∼1961년) 중 3000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었고, 「文化大革命」(이하 文革으로 표기함) 기간(1966∼1976년)에는 철없고 파괴적인 紅衛兵(홍위병)들의 亂動(난동)에 의해 1억 명의 인민들이 탄압을 받았다.
  
  특히 文革은 중국을 30년 이상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의 사회구조를 황폐화시켰으며, 통치제도, 지도력, 교육제도, 그리고 지식인층을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歷史決議는 「毛澤東의 以後」 중국 지도부의 뼈저린 각성을 바탕으로 작성된 반성문이다. 歷史決議 채택 이후 16년간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한 鄧小平은 中國을 「경제성장의 優等國」, 「世界의 工場」으로 변화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歷史決議 채택 이후 20년도 못 돼 韓國에 있어 中國은 제1의 수출시장으로 浮上했다. 작년 이후 日本의 제1수출시장도 美國에서 중국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東아시아 3國이 그려갈 「21세기 三國志」는 우리 민족의 進運에 엄청난 영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에서 歷史決議에 대한 理解는 중요하다.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은 1985년 「歷史決議」에 대한 註釋本(주석본)을 발간했다. 30여만 字에 달하는 주석본에서는 歷史決議를 130개 항목으로 나누고 史實과 이론 양면에서 「歷史決議」에 대한 해설을 했다. 130개 항목 가운데 이론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항목은 30여 개인데, 그 중심내용은 毛澤東 우상화와 문화대혁명의 비판 그리고 중국의 사회주의 현대화 방식 등에 관한 것이다.
  
  「歷史決議」와 그 註釋本은 一黨獨裁(일당독재)의 국가 中國에서 현재 異論(이론)을 不許(불허)하는 「정통 중국 현대사」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것이 비록 최후의 勝者(승자) 鄧小平에게 복무하는 문건이라 할지라도 그가 터를 닦은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의 성과·과제·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이하 < > 안의 글은 「歷史決議」에서, 《 》 안의 글은 「역사결의 註釋本」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毛澤東의 驕慢과 自慢
  
  <(1957년 이후) 10년 동안 당의 사업은 지도방침상 중대한 실책이 있었다.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경험부족과 경제발전법칙 및 중국 경제의 기본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나아가 毛澤東 동지를 위시한 중앙과 지방의 적지 않은 영도동지들이 승리로 인해 교만하고 자만하게 되었다. 일을 성급하게 이루려 했으며, 주관적인 의지와 주관적인 노력의 작용을 과대시한 나머지 진지한 연구와 실험도 하지 않고 總路線(총노선)을 내놓자마자 경솔하게 「대약진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일으켰다. 지나치게 지표를 높이고 엉터리 지휘를 하며 허풍이나 공산화風을 일으키는 것을 표징으로 하는 좌경오류가 크게 범람하였다>
  
  1952년 말까지 농·공업부문의 생산력이 戰前의 수준을 웃돌게 되자 毛澤東은 다시 과도기의 總路線(총노선)을 제기했다. 과도기의 총노선은 사회주의 改造(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는 시기를 과도기로 단정하고 농업의 사회주의적 집단소유제, 상공업의 국유·국영화를 통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과 동시에 자주국방력을 갖춘 부강한 사회주의 중국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中共은 1958년 1월부터 농·공업분야의 낙후를 일소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기하기 위해 제2차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毛澤東은 이를 추진하기 위해 「대약진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농민들은 낡은 농구를 사용하여 토지를 수없이 개간하고 수리관개시설을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증산을 위한 密耕密植法(밀경밀식법)도 개발되었다. 공업부문에서 대약진운동은 철강 생산량 증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과도하게 할당된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은 생산량만 중시했기 때문에 제품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각종 통계와 결과보고는 과장·조작되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추진된 농촌의 人民公社化는 오히려 식량생산량을 감소시켰다.
  
  그것은 현실을 무시한 급진적이며 모험적인 개변이었다. 생활의 공동·집단화는 각 가정의 소멸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의욕을 크게 감퇴시켰다. 자급자족을 위한 각종 공산품 제조도 전문적 기술과 성의 부족으로 조잡품만 생산하였으므로 결국 자원과 인력 낭비만 가져왔다.
  
  
  『毛澤東의 彭德懷 비판은 완전한 誤謬』
  
  <1958년 말부터 1959년 7월에 걸쳐 열린 黨중앙정치국 廬山(여산)회의 전반기에 毛澤東 동지와 당중앙은 全黨을 통해 이미 파악한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산회의 후반기에 毛澤東 동지가 彭德懷(팽덕회) 동지에 대한 잘못된 비판을 제기하였다. 나아가 全黨이 反우경투쟁을 잘못 전개하였다. 소위 「彭德懷, 黃克誠(황극성), 張聞天(장문천), 周小舟(주소주) 등 反黨(반당)집단」에 대한 제8기 중앙위원회 제8차 전체회의(8期8中全會)의 결의는 완전히 오류였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사후수습책과 책임소재 그리고 개발전략과 이념문제를 둘러싸고 중국 권력층 내부에 심각한 대립과 분열을 초래했다. 당시 정치국원이며 국방장관이었던 彭德懷는 기술개발에 의하지 않고 군중동원에 의해 추진된 대약진운동의 모순, 대약진운동에 軍동원으로 빚어진 戰力의 약화 사실 등을 들어 毛澤東을 비판하고, 대약진운동의 수정을 요구했다.
  
  이에 毛澤東은 彭德懷와 그 일파를 숙청했으나 날로 악화되는 경제실패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毛澤東이 스스로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시인해야 했다. 그가 강행한 대약진운동 때문에 1958년부터 1960년 사이에 2000만~3000만 명이 영양실조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인민의 필수 소비품은 이미 기본적인 수요마저 채울 수 없었다. 예컨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전국의 1인당 평균 식량소비량은 203kg에서 163.5kg, 돼지고기는 5.1kg에서 1.55kg으로 줄어들었다. 많은 지방에서 浮腫病(부종병)이 발생하고 심지어 사람과 가축이 굶어 죽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졌다》
  
  
  毛澤東·林彪 對 劉少奇⊂小平의 대립구도
  
  大파국의 사후수습은 黨의 제2인자였던 劉少奇(유소기)가 맡았다. 劉少奇는 自留地(자류지)와 시장경제의 도입, 전문관료와 기술자의 경영참여, 지방에 좀더 많은 재량권의 이양, 정확한 통계보고, 기층간부의 再훈련, 都給制(도급제)의 실시, 생산목표 초과에 대한 초과수당 지급 등을 포함한 調整(조정)·緩和(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들의 근로의욕을 높이고 기업경영에 사상적·정치적 간섭을 배제시켰다.
  
  이로써 1962년에는 농촌에 풍년이 들고, 소련의 경제·기술원조가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크게 회복·성장했다. 이같은 경제정책 성공으로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劉少奇는 주요 요직에 鄧小平 등을 중용할 수 있었다.
  
  毛澤東은 당내 실권파에 의해 자신의 업적과 정책이 모독당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해방군을 배경으로 한 林彪(임표)가 毛澤東에게 접근했다. 彭德懷가 毛澤東에 대한 비판으로 숙청되었을 때 그 후임으로 국방장관에 임명된 林彪는 毛澤東 사상의 열렬한 지지자로 행동해 왔다. 중공 권력층 내부는 毛澤東·林彪 사이의 제휴관계가 은밀하게 형성되어 劉少奇⊂小平 중심의 실권파와 대립하는 양상을 빚었다.
  
  
  『文革은 建國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게 했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에 걸친 「문화대혁명」으로 당과 국가와 인민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았다. 이 「문화대혁명」은 毛澤東 동지가 일으키고 영도하였다.>
  
  文革은 中國의 근대화를 30년 후퇴시킨 狂亂(광란)이었다. 「歷史決議 주석본」에 따르면 우선 文革 기간 중 紅衛兵이 자행한 학대행위의 결과로 숨진 사람은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毛澤東의 아내 江靑(강청)을 중심으로 한 4인방은 70만 명 이상을 비방·박해했으며, 그 가운데 3만5000명을 죽게 만들었다. 또한 수많은 인민이 육체적·정신적 불구가 되었고, 자살하기도 했다. 文革 기간 중 축출된 黨간부의 비율도 거의 60%에 달했다.
  
  중국대륙이 유례없는 狂亂에 휘말린 것은 실로 기괴한 음모적 음모에 의해 촉발되었다. 1965년 11월, 문예비평가 姚文元(요문원)이 사학자이며 北京 부시장인 吳 (오함)이 쓴 「海瑞罷官」(해서파관)에 대해 文匯報(문회보)에 「新編 歷史劇 해서파관을 평한다」라는 비평을 실었다. 이것이 文革의 도화선이 되었다.
  
  《1965년 초 江靑은 上海에서 張春橋(장춘교)와 함께 요문원으로 하여금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쓰도록 획책하였다. 전반적인 집필활동은 매우 비정상적인 비밀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중앙정치국원도 毛澤東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으니…》
  
  문제가 되었던 「해서파관」은 1961년 1월 北京에서 이미 공연되었던 京劇이었다. 내용은 明나라 嘉靖帝(가정제) 때 高官이었던 海瑞(해서)가 황제의 亂政(난정)에 대해 諫(간)하다가 파직당했지만, 파직 이후에도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하나의 공연으로 끝났다. 그러나 毛澤東을 가정제로, 彭德懷를 해서로 풍자한 것이라고 해석한 毛澤東의 측근들에 의해 뒤늦게 정치문제화하고 말았다. 江靑·康生(강생) 등이 『해서파관은 팽덕회의 罷官을 빚댄 것』이라고 毛澤東을 격동시키고, 극좌파 작가 요문원에게 上海에서부터 문제를 제기케 했던 것이다. 上海는 실권파 劉少奇⊂小平의 세력이 약했던 지역이었다.
  
  요문원의 글은 林彪가 장악하고 있던 解放軍報에 실린 데 이어 다시 黨기관지 人民日報에 게재되었다. 江靑 일파의 공세가 가열되는 가운데 劉少奇·彭眞(팽진) 등은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二月要綱(2월요강)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오함의 비판으로 야기된 충격을 학술토론의 범위로 확정시켜 정치투쟁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毛澤東과 그 추종자들은 二月要綱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예술과 문학에 대한 군중비판을 요구했다. 드디어 1966년 5월 중순에 黨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되어 毛澤東의 의도에 따른 「5·16通知」가 작성했다. 5·16통지는 二月要綱을 폐기하고, 당·정부·軍 등에 잠재한 反혁명수정주의분자에 대해 엄중한 비판과 경고를 담은 내용이었다.
  
  5·16통지가 시달된 지 열흘도 못 돼 北京대학에서 大亂의 뇌관이 터지기 시작했다. 5월25일 北京大(북경대)의 학생대식당 동쪽 벽면에 북경대 黨 서기이며 학장인 陸平(육평), 북경대의 黨 위원회 副서기 彭佩雲(팽패운), 北京시당위원회 대학부 副부장 宋碩(송석) 등 3人을 「反黨 反사회주의 분자」로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에서는 당과 대학 고위 간부들을 싸잡아 「君」이라 부를 만큼 전례없이 과감했다.
  
  『집회와 대자보는 최량의 대중적·전투적 방법인데, 君들은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지도하는 것에 의해 대중적 혁명을 탄압하고 있다』
  
  『毛澤東 사상의 위대한 赤旗(적기)를 높이 달고, 모든 妖怪變化(요괴변화)와 흐루시초프流의 反혁명 수정분자를 일소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이룩하자』
  
  대자보에는 7인의 필자가 서명되어 있었는데, 筆頭(필두)는 북경대 철학과의 여성 강사이며 수재로 알려진 攝元梓(섭원재)였다. 그녀는 毛澤東의 심복인 康生의 처 조일구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었다.
  
  
  紅衛兵 탄생의 배경
  
  대자보를 읽은 毛澤東은 『북경대학이라는 견고한 보루의 타파가 가능해졌다』면서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毛澤東은 실무파가 장악한 北京을 『물도 겉돌고 針(침)도 들어가지 않는 수정주의 독립왕국』이라고 불평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우리들은 붉은 정권을 방위하는 衛兵(위병)이다』
  
  6월 초, 北京의 淸華大學 부속중학교 교내에 나붙은 대자보의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毛澤東의 혁명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紅衛兵을 조직했다. 文革기간 악명을 떨친 紅衛兵의 탄생이었다.
  
  紅衛兵 조직은 금세 전국의 대학과 중학교(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과정)로 번져갔다. 毛澤東은 홍위병의 난동을 「혁명적 활동」이라고 부추겼다. 이리하여 北京시장 彭眞, 제2서기 劉仁, 그리고 대자보에서 비판당한 3人이 숙청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 곳곳의 담벼락은 부르주아 사상을 비판하는 대자보들로 뒤덮였다.
  
  黨기관지 인민일보에는 「모든 牛鬼蛇神(우귀사신)을 일소하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이어 「부르주아 계급의 학자 및 권위를 일소하라」는 등 文革을 고무하는 사설을 5일 연속으로 실었다.
  
  학교에서는 대자보가 넘쳤다. 온갖 것이 다 「권위주의적」, 「수정주의적」이라고 규탄되었다. 학교는 수업 불능의 혼란에 빠졌다.
  
  국가주석 劉少奇는 당 간부들로 이뤄진 工作組를 조직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긴급 소집된 黨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공작조를 파견하고 「대자보는 학내에만 붙일 것」, 「가두에서의 데모 행진은 금지」 등의 「8개조의 지시」를 결정했다. 그러나 공작조의 학내 진입에 학생들은 「혁명의 억압」이라고 반발, 충돌이 잇달았다.
  
  《 5월 말, 6월 초에 인민일보사와 북경대학에 공작조를 파견한 것은 毛澤東의 동의를 얻은 것이었다. 上級黨(상급당)에서 하급에 공작조를 파견하여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과거 당이 늘 취하던 작업방법이다. …江靑, 康生, 陳伯達(진백달: 1904∼1989. 모택동의 비서를 지낸 극좌 이론가. 文革 후 실각) 무리가 당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도발하고 선동하였기 때문에 다수의 工作組(공작조)와 造反派(조반파) 사이에 대립이 시작되었고, 공작조를 내쫓는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군중 속에서도 공작조를 보호하는 파와 내쫓는 파로 갈리어 격렬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혼란한 국면이 더욱 심각해져 갔다》
  
  
  『造反有理―天宮을 소란케 하라』
  
  毛澤東은 중국 남쪽 浙江省(절강성) 杭州(항주)에서 劉少奇 등 黨중앙의 대응을 차갑게 지켜보았다. 6월9일, 劉少奇 등은 항주로 날아가 毛澤東에게 사태의 수습에 나서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毛澤東은 『그대로 놔두면 좋지 않은가』고 서슴없이 거절했다. 歷史決議에서는 당시 毛澤東의 論點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다수의 자산계급 대표인물과 反혁명 수정주의분자가 당, 정부, 군대, 문화영역 각 분야에 잠입하여 상당히 많은 부문의 영도권이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군중의 손을 떠났다. 당내에서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가 중앙에서 자산계급 사령부를 만들어 수정주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걸으면서 각 省, 市, 자치구 및 중앙의 각 부문에 그 대리인을 두고 있다. 문화대혁명을 단행하여 공개적·전면적으로 아래서부터 위로 광범한 군중을 궐기케 하여 위와 같은 어두운 면을 파헤쳐야만 走資派(주자파)가 탈취해 간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하나의 계급이 하나의 계급을 뒤집어엎는 정치대혁명이며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1966년 6월18일, 북경대학 캠퍼스에서는 학장직으로부터 쫓겨난 육평을 비롯한 40여 명의 당간부, 교사 등이 북경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黑幇」(흑방)이라고 규탄되어 작대기에 묶인 채 매달려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에서 파견된 공작조가 광란의 현장에 달려와 학대 행위를 중지시켰다. 劉少奇는 이 사건의 보고서를 받고 「처리는 정확하고 민첩했다. 참고하도록」이라는 코멘트를 붙여 黨중앙의 이름으로 전국에 보냈다.
  
  청화대학 홍위병이 중앙당 공작조의 공격을 받아 劣勢(열세)에 몰렸던 6월24일, 이 대학 부속중학에 「毛澤東 사상의 혼은 造反」이라는 홍위병의 대자보가 등장했다. 黨기관지 인민일보에 『마르크스주의의 도리는 복잡한 것 같지만, 결국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바로 造反有理(조반유리)이다』라는 「毛澤東의 어록」이 실렸다. 文革 중에 가장 유행했던 용어 造反有理는 반역에 이치가 있다는 뜻이다. 造反은 文革 수개월 전에도 毛澤東이 언급한 그의 상투용어였다.
  
  『중앙기관이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지방이 造反해서 중앙으로 진공하도록 호소해야 한다. 각지에서는 (중앙으로) 많은 孫悟空(손오공)을 보내서 天宮을 소란케 해야 한다』
  
  西遊記의 주인공 孫悟空은 홍위병, 天宮은 劉少奇⊂小平이 장악한 黨중앙을 의미했다.
  
  
  「司令部를 포격하라―나의 大字報」
  
  장기간의 지방 나들이에서 北京으로 돌아온 毛澤東은 1966년 8월1일부터 인민대회당에서 8期11中全會를 소집했다. 참석자들은 총회가 열린 8월7일, 회의장에 배부된 자료를 보고 경악했다. 표제는 이러했다.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
  
  毛澤東의 친필이었다.
  
  『일부 지도자 동지가 반동적 자산계급의 입장에서 문화대혁명 운동을 때려부숴 無産계급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의기양양해 있다. 얼마나 악랄한 짓인가!』
  
  거명은 하지 않았지만 「사령부」는 누가 보더라도 劉少奇⊂小平의 실무파였다. 총회에는 黨중앙위원과 후보위원 등 141명의 정규 자격자 이외에 섭원재 등 「혁명적 교원·학생대표」 47명도 참석했다. 毛澤東의 처 江靑 등 중앙文革소조의 멤버들도 가세하고 있었다.
  
  <중앙文革소조라는 것을 설치하고 여기다 중앙권력의 대부분을 집중시켰다. 毛澤東 동지의 그릇된 좌경적 개인영도가 당중앙의 집단영도를 실질적으로 대치하고 毛澤東 동지에 대한 개인숭배가 열광적으로 고취되었다. 林彪·江靑·강생·장춘교 등은 주로 「중앙文革소조」의 이름을 빌려 「일체타도 전면내전」을 선동하였다>
  
  국가주석 劉少奇는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보고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발언 도중 毛澤東에게 몇 번이나 질책을 당했다. 毛澤東의 북경 不在中 대학 등에서 文革 급진파의 과격 활동에 대해 劉少奇가 주도한 당중앙이 공작조를 파견한 바 있었는데, 그것이 시비의 초점이 되었다.
  
  『90% 이상의 공작조는 완전히 잘못했다. 대중을 진압하고 운동을 방해하여 나쁜 영향을 주었다』
  
  8월4일, 毛澤東이 예정을 변경해 소집한 정치국 상무委 확대회의에서 공작조의 파견은 「노선의 오류」로 결정되었다. 劉少奇는 『毛주석이 北京에 부재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자아비판했다. 毛澤東의 질책은 더욱 거칠었다.
  
  『당신은 北京을 독재의 독무대로 만들었어. 잘 해먹은 것이다!』
  
  
  毛澤東에 대한 神格化
  
  8월12일, 정치국원, 정치국 상무위원 선임을 위한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명부는 사전에 毛澤東이 일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劉少奇는 국가주석직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당내 서열은 2위에서 8위로 떨어졌다. 한편 서열 6위였던 林彪가 2위로 약진했다. 상무위원은 11명으로 증원되었는데, 늘어난 4인 중 3인이 陳伯達 등 극좌파인 중앙文革소조 멤버였다. 제1선에 복귀한 毛澤東에 대한 신격화는 더욱 강화되었고, 그것과 더불어 文革은 광적인 고양기를 맞게 된다.
  
  홍위병은 「혁명경험의 교류」라는 미명하에 北京으로 올라와 毛澤東의 깃발과 초상화가 물결을 이루는 가운데 군중대회를 열었다. 군중대회에 몰린 인파는 많을 경우 무려 250만 명에 달했다.
  
  8월18일, 천안문광장의 「100만인 집회」에서 毛澤東을 만나 고무된 홍위병은 기세를 억누르지 못하고 군복 차림으로 北京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천안문 집회 다음날인 8월19일, 北京市 제2중학 홍위병에 의해 北京 거리 곳곳에 「舊세계에 宣戰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우리들은 낡은 세계의 비판자」라고 자임한 홍위병은 소위 「四舊(舊사상, 舊문화, 舊풍속, 舊관습) 타파」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무수한 지식인들이 테러를 당했고, 전국 곳곳의 고적·유물· 묘지 등이 함부로 파괴되었다.
  
  毛澤東은 지식인을 신용하지 않았다. 文革은 지식인의 근성을 때려부수는 인간개조와 사회개조의 이념으로부터 생겨났다. 毛澤東은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찬 젊은이들의 직선적 열정에 교묘히 불을 질렀다.
  
  8월23일, 홍위병은 「四舊타파」의 일환으로 북경시 문화국에 보관되어 있던 연극의 대도구·소도구를 시내에 있는 孔子廟(공자묘)에서 불태웠다. 예술가 30여 명이 꽁꽁 묶인 채 린치를 당했다. 「牛鬼蛇神」이라고 쓰인 간판이 목에 걸린 그들은 무릎을 꿇린 채 가죽 벨트로 구타당했다. 폭행당한 사람들 중에는 세계적인 작가 老舍(노사)도 있었다. 심야에 이르기까지 학대당한 67세의 그는 상처투성이로 다음날 귀가했지만,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홍위병의 「四舊타파」는 다시 「四類分子」 및 「黑五類」 등을 공격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四類分子는 지주·부농·反혁명분자·악질분자를 가리키고, 黑五類는 여기에 우파분자를 덧붙인 것이었다. 홍위병에 의한 造反의 바람이 중국 전토를 석권해 가던 1966년 8월27일 北京 남쪽 大興縣에서 지주가족에 대한 집단학살사건이 발생했다. 8월24일부터 9월1일까지 北京에서 학살당한 사람만 해도 1529명에 달했다.
  
  1966년 10월, 홍위병 대회에서 劉少奇와 鄧小平은 처음으로 거명되어 「부르주아 반동노선의 두목」으로 비판되었다. 중앙文革소조 조장 진백달은 10월23일 「黨지도부內에 타도해야 할 敵이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와 당조직의 수뇌를 「敵」이라고 규정한 데 대해 대중들은 처음엔 긴가민가 했지만, 그것이 毛澤東의 의지인 것으로 알고 부화뇌동하여 「劉-鄧 타도」의 물결에 휩쓸려들었다.
  
  그래도 毛澤東은 아직 속셈을 감춘 「魔王(마왕)」이었다. 1966년 11월3일 천안문 누각 위에서 100만 명이 넘는 홍위병을 접견하고 있던 毛澤東은 천천히 劉少奇 쪽으로 돌아서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 근황을 물었다. 劉少奇는 『나도 대중 속에 들어가 단련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毛澤東은 『당신도 이제 나이가 들었어. 그럴 필요는 없겠지』라면서 휴게실로 들어가 쉬도록 권했다.
  
  
  『天下大亂 통해 天下大治를 이룬 적 없다』
  
  <문화대혁명의 역사는 毛澤東 동지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주요 논점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의 실정과도 맞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논점은 당시 우리 나라의 계급상황이나 당과 국가의 정치상황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1)문화대혁명은 修正主義 노선이나 자본주의 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논법에는 근거가 없다….
  
  2)위와 같은 시비의 혼동은 필시 적과 우리 편을 혼동하게 마련이다. 「문화대혁명」이 타도한 「走資派」는 당과 국가의 각급 조직의 영도간부, 곧 사회주의 사업의 핵심역량이었다. 당내에는 劉少奇⊂小平을 위시한 「자산계급 사령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劉少奇 동지에게 뒤집어씌운 반역자(叛徒), 내부간첩(內奸), 노동귀족(工賊)이라는 죄명은 완전히 林彪·江靑 등의 모함이었음이 확실한 사실로써 증명되었다. …「문화대혁명」이 이른바 「반동적 학술권위」로 몰아 가한 비판 때문에 재능 있고 성과를 낸 많은 지식분자가 공격과 박해를 받았으며….
  
  3)「문화대혁명」은 직접 군중에 의거한다는 명분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당 조직이나 광범한 군중에서 이탈해 있었다….
  
  4)실천이 증명하듯이 「문화대혁명」은 어떤 의미에서도 혁명이나 사회적 진보가 아니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문화대혁명」은 근본적으로 「적을 혼란시킨다」는 것이 우리 쪽을 혼란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천하대란」을 통해 「天下大治」를 이룬 적이 없었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당과 국가의 구조 속에 분명히 남아 있던 일부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합당한 평가를 내린 다음 헌법·법률·당규약에 부합하는 올바른 조치로써 해결할 필요가 있었지만, 「문화대혁명」과 같은 이론과 방법을 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어떠한 강령도 제시하지 못하고 심각한 혼란·파괴·후퇴만을 몰고 왔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역사가 이미 판명했다시피 「문화대혁명」은 영도자가 잘못하여 일으켰고, 反혁명집단에게 이용되어 당과 국가와 인민에게 심각한 재난을 가져다 준 內亂(내란)이었다>
  
  
  二月逆流―軍원로와 江靑 일파의 격돌
  
  <1967년 2월 전후에 譚震林(담진림), 陳毅(진의), 葉劍英(섭검영), 李富春, 李先念, 徐向前, 섭영진 등 정치국 중앙군사위원회의 영도동지들이 각종 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의 잘못된 방법을 맹렬히 비판하였지만, 도리어 二月逆流(2월역류)로 몰려 압제와 공격을 받았다>
  
  毛澤東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공식 발동되어 9개월이 지난 1967년 2월14일 오후 北京 中南海의 懷仁堂(회인당)에서 국무원총리 주은래가 주최한 중앙연락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軍의 원로들이 文革을 추진하는 江靑이 주도하는 黨중앙文革소조를 격렬하게 성토했다.
  
  『당신들(중앙文革소조)이 하고 있는 짓은 정부·공장·농촌을 휘젓고다니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軍까지 어지럽히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군사委 부주석이며 黨정치국원 섭검영의 발언이었다. 군사委 부주석 서향전도 『부모를 타도하기 위해 아이들까지 달아맨다. 그래서 가족 전원이 박해를 받는다. 무엇을 위해서냐』고 힐문했다.
  
  『당신들의 목적은 고참 간부들을 때려눕히자는 것인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 축출하려는 것인가』
  
  軍정치위원을 오래 지낸 국무원 부총리 겸 黨정치국원인 담진림의 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머리가 잘리든 투옥되든 당에서 제명하든 철저히 투쟁하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군사委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 진의(黨정치국원)가 『나가선 안 돼. 여기서 저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만류했다. 軍원로로서 국무원 부총리인 이선념은 『과오를 범하면 그 병을 치료하는 것이 結黨(결당) 이래의 방침이다』면서 「탈권공작」에 맹렬하게 반발했다. 침묵하던 주은래도 文革소조의 독선을 비판했다.
  
  연락회의가 산회되었던 그날 밤, 文革 소조 멤버들은 그들의 거점으로 삼고 있던 정부 영빈관인 釣魚臺(조어대) 15호 樓에 모여 전화로 毛澤東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중남해의 毛澤東 집무실에 들어간 江靑은 『그 무리들의 창 끝은 내가 아니라 주석을 향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毛澤東은 처음엔 그 말을 무시했지만, 장춘교 등이 각색해 정리한 의사록을 읽기 시작하면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선념이 말하기를, 스탈린 死後에 흐루시초프가 출현 (스탈린을 격하)했다. 스탈린의 생존 중 누구보다 스탈린을 찬양한 사람은 흐루시초프였다』
  
  이 발언은 毛澤東에 아부하는 林彪를 빗댄 말이었는데, 毛澤東에겐 충격을 주었다. 毛澤東은 담진림의 발언 중 『나는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대목에서 노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軍장로들)이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이로부터 文革의 흐름을 바꾸려했던 軍장로들의 언행은 反혁명적이라는 이유로 江靑 등에 의해 「2월역류」로 규정되었다.
  
  《 2월16일 간담회 이튿날, 담진림은 林彪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江靑을 「측천무후보다 더 흉악하다」고 욕하였으며 …. 林彪는 이 서한을 毛澤東에게 보내면서 또 한 통의 서한을 써서 「담진림의 최근 사상이 이토록 흐릿하고 타락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軍장로들은 전국에서 일제히 전개된 비판 공격을 받아 실각했다.
  
  
  매 맞은 국가주석의 한탄 『제군들의 행동은 中國을 모욕하는 짓』
  
  毛澤東의 처 江靑과 국방상 林彪 등이 칼자루를 잡은 文革은 이제 그 표적을 劉少奇로 좁혔다. 1967년 3월21일, 毛澤東의 동의를 얻어 당내에 「劉少奇특별심사조」가 설치되었다. 당기관지 紅旗(홍기)는 劉少奇가 1939년에 쓴 「공산당원의 修養을 논함」을 비판하는 평론을 게재했다.
  
  『修養論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맞지 않는 唯心論(유심론)이어서 계급투쟁을 논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을 기만한 것이다』
  
  위의 결론은 毛澤東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劉少奇에 대한 개인공격이 거칠었던 4월10일, 그의 처 王光美(왕광미)가 홍위병에 의해 청화대학으로 연행되어 집단공격을 받았다. 홍위병들은 劉少奇의 집에서 「부르주아 반동노선의 증거물」로서 탈취한 하이힐과 몸에 맞지 않는 차이나 드레스를 왕광미에게 입혔다. 목에는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도록 강요되었다.
  
  그것은 江靑의 질투 때문에 저질러진 만행이었다. 1963년 왕광미는 퍼스트 레이디인 국가주석의 부인으로서 劉少奇와 함께 동남아를 순방했다. 출국 전, 江靑은 『혁명적 전통을 고려해서 목걸이는 착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참견했지만, 왕광미는 그것을 무시했던 것이다.
  
  당시 劉少奇는 北京의 중심부인 중남해의 福祿居(복록거)라 불리는 건물을 주택 겸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복록거의 문전에 홍위병들이 집결해 「劉少奇 규탄 전선지휘부」를 설치하여 하루 24시간 「劉少奇 끌어내기」 소동을 벌였다.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毛澤東의 대자보가 黨중앙위원들에게 배포된 지 꼭 1년째 된 1967년 8월5일 복록거에 연금되어 있던 劉少奇가 홍위병들에게 끌려나갔다. 부인 왕광미와 함께 비판대 위에 세워진 劉少奇는 두 시간에 걸쳐 양손을 뒤로 뻗고 허리를 굽힌 채 머리를 숙여야 하는 소위 「제트式 꽁꽁 묶기」 고문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저항은 처절했다.
  
  『君들이 나 개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위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군들의 행동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
  
  
  「71세의 無職老人」으로 火葬 처리된 劉少奇
  
  그러자 살기등등한 조반파는 劉少奇를 구타했다. 劉少奇의 얼굴은 몹시 부어올랐다. 구두도 벗긴 채 양말 차림의 劉少奇는 이미 국가주석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있었다. 규탄집회가 끝난 뒤 劉少奇는 복록거의 집무실에 감금되었다. 劉少奇는 곧 毛澤東에게 「나는 이미 자유를 잃었습니다」라는 편지를 쓰고 국가주석의 사임을 거듭 신청했다. 하지만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毛澤東은 北京을 떠나 있었다. 毛澤東은 화북·화중·화남·화동을 순회한 뒤 9월5일에야 北京에 되돌아왔다.
  
  정신적으로 부숴진 劉少奇는 매일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9월 들어 왕광미도 체포·감금되고 두 자녀도 중남해에서 추방되었다.
  
  취사담당자도 조수도 劉少奇로부터 떠나갔다. 위장이 나쁜데다 오래 전에 조리된 음식을 먹었던 탓에 劉少奇는 설사를 계속하여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혁명전쟁 때 부상한 그의 손은 비판대회에서 묶여 구타를 당해 더욱 부자유스러워져 옷을 입는 데 한두 시간이 걸렸다. 겨우 30m 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는 데도 50분이 걸렸다.
  
  그에 대한 의사들의 대우도 냉담했다. 조반파로부터의 비판을 겁내서 진료 때마다 「중국의 흐루시초프 놈」이라고 매도했다.
  
  1968년 10월13일부터 31일까지 계속된 8기12中총회에서 「자본주의 길을 걸은 實權派 劉少奇는 당내를 어지럽힌 배신자, 적의 첩자, 노동귀족」이라는 심사보고서가 채택되었다.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과 내외 일체의 직무 해임」도 결의되었다.
  
  黜黨(출당)처분을 받은 지 1년 후인 1969년 10월17일 劉少奇는 하남성 開封으로 옮겨져 창고에 감금되었다. 그로부터 1개월도 지나지 않은 11월12일 劉少奇는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국가주석을 지낸 인물의 사체는 無職 노인으로 火葬(화장) 처리되었다. 그의 죽음은 공표되지 않았고, 가족에게 통지되지도 않았다.
  
  
  林彪의 浮上과 몰락
  
  文革을 통해 劉少奇⊂小平 등의 실무파가 제거되자 자연히 毛澤東과 그 추종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黨지도부가 형성되었다. 1969년 4월에 개최된 제9차 全人大에서 毛澤東의 우상화·신격화 작업이 진행된 한편으로 軍을 배경으로 毛澤東에게 적극 협력했던 林彪가 毛澤東의 「유일한 후계자」로 黨憲에 明記되었다. 이와 함께 毛澤東의 부인 江靑이 이끄는 4인방도 浮上했다. 두 세력 간에는 새로운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毛澤東과 林彪 사이에 毛의 死後 지도체제 문제, 軍의 黨·政에 대한 영향력 등의 문제로 암암리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異見도 심화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중국은 文革 이전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었다. 더욱이 1969년 3월 우수리江의 珍寶島, 8월 신강성의 中·蘇 접경지대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난 이래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베트남戰 개입에 의한 위기감도 점증했다. 이런 南·北의 두 위협을 놓고 毛澤東과 주은래는 反蘇論을 폈고, 林彪는 反蘇·反美 양면대결을 주장했다.
  
  林彪는 1970년 7월 제7기 중앙위원회 제2회 총회에서 자신의 국가주석 취임을 요구하여 毛澤東의 심기를 건드렸다. 毛澤東은 文革에서 자신의 이념을 대변했던 江靑 일파를 권력의 상층부로 끌어올려 후계자로 양성하고, 林彪를 제거하려고 했다.
  
  <1970년부터 1971년 사이에 林彪 反혁명집단이 최고권력을 탈취하고 反혁명 무장정변을 음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毛澤東·주은래 동지는 이 반란을 슬기롭게 분쇄하였다. 1972년 주은래 동지는 林彪를 비판하면서 극좌사상도 비판해야 한다는 정확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毛澤東 동지는 당시의 임무가 여전히 「極右」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林彪는 1971년 毛澤東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소련으로 탈출하는 도중 탑승기의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러면 林彪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페어뱅크는 그의 「新中國史」에서 林彪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林彪는 유능한 야전사령관이었지만, 야위고, 어느 정도는 약삭빠르고, 카리스마적인 면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며 항상 모자를 쓴 채 다녔다(그는 대머리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재능 있는 투사였고, 여우처럼 교활한 사람이었지만, 毛澤東의 비대한 모습이 그의 위엄을 더해 주었던 반면(중국에서는 야윈 것이 높게 평가받지 못한다), 林彪는 왜소하여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제10차 당대회는 제9차 당대회의 좌경오류를 계승하고 王洪文을 부주석에 앉혔다. 江靑, 張春橋, 姚文元, 王洪文은 중앙정치국에서 「四人幇」(4인방)을 결성, 江靑 반혁명집단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批林批孔운동의 표적은 周恩來
  
  왕홍문은 林彪가 차지하고 있던 黨부주석에 임명되었는데, 이러한 발탁은 毛澤東의 개인적 선택이었다. 장춘교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되었다.
  
  <1974년 江靑, 왕홍문 등은 批林批孔(비림비공: 林彪를 비판하고 孔子를 비판한다)운동의 전개를 제안하였다. 이는 일부 지방이나 단위에서 林彪 반혁명집단의 음모활동에 연루된 사람이나 사실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江靑 등이 周恩來 동지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린 것이었다>
  
  毛澤東의 비호 아래 4인방의 세력이 신장되는 가운데 국무원총리 周恩來는 文革기간 중 파괴된 黨·政 조직의 재건과 피폐한 경제를 부흥시키고 사회질서를 잡는 일에 全力을 기울이고 있었다. 毛澤東이 여전히 제1인자의 지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경제발전을 꾀하는 행정기구는 점차 周恩來 중심으로 결집되고 있었다.
  
  4인방이 주도한 「비림비공」 운동에서의 孔子는 周恩來를 의미했다. 4인방은 劉少奇·林彪의 몰락으로부터 제2인자의 위상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毛澤東의 唯我獨尊(유아독존)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은 급속한 세력신장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소수집단이었고, 지지세력은 소수 극좌파의 적극분자·청년·대학생 등이었으므로 중국 사회에서 깊은 조직과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다. 江靑 등은 권력을 장악한 후에 각지의 당조직, 청년단, 총공회(노동조합) 등의 조직에 추종세력들 박아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취약한 軍 기반에 대한 대책으로 도시민병을 조직하여 軍에 대항하려 했다.
  
  <1975년 周恩來 동지가 중병을 앓자 鄧小平 동지가 毛澤東 동지의 지지를 받아 중앙의 일상활동을 주재하였다. 鄧小平 동지가 군사위원확대회의나 공업·농업·교통·과학기술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중요한 회의를 열어 많은 분야의 사업을 정돈한 결과, 정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러나 毛澤東 동지는 鄧小平 동지가 「문화대혁명」의 오류를 체계적으로 시정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또다시 「鄧小平을 비판하고 우경부활풍조를 반격하는 운동」(批鄧反擊右傾飜案風)을 일으킴으로써 전국이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암을 앓았던 周恩來는 鄧小平이 자신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맡게 하려고 움직였다. 文革에서 타도의 목표가 되었지만, 鄧小平은 劉少奇처럼 버려지기에는 너무도 유능하고 정력적이었으며, 특히 軍과도 관계가 깊은 고참이었다. 1975년 1월 제4차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리기 직전 鄧小平은 당의 부주석이 되었으며 권력의 핵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 全人大에서 그는 국무원 부총리와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선출되어 毛澤東과 周恩來에 이어 서열 3위에 올랐다. 周恩來는 이 대회에서 자신의 마지막 공식활동의 하나인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의 요구」를 제시했다.
  
  <1976년 1월 周恩來 동지가 서거하였다. 周恩來 동지는 당과 인민에게 끝없이 충성하였으며 나라를 위하여 온몸을 다 바쳤다. …그의 서거는 全黨과 인민을 끝없는 슬픔에 빠지게 하였다>
  
  周恩來가 사망하자 4인방은 어떤 조문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4월5일 淸明節이 되자 사람들은 죽은 총리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어 인민영웅기념비에 화환을 봉헌했다.
  
  <그해 4월에는, 天安門사건으로 대표되는 周恩來 총리를 추도하고 4인방에 반대하는 강력한 항의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중앙정치국과 毛澤東 동지는 천안문사건의 성격에 잘못된 판단을 내려 鄧小平 동지가 黨 안팍에서 가진 모든 직책을 박탈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4인방의 지시를 받은 北京市 공안국은 시민들이 바친 조화를 치워 버렸다. 분노한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격렬한 시위를 벌이면서 공안기관의 기물과 차량을 파괴했다.
  
  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은 鄧小平 제거의 기회로 판단하여 이를 「反혁명적」이라고 규정하면서 鄧小平이 뒤에서 조정 선동하고 있다고 당시 병상에 있던 毛澤東에 보고했다. 鄧小平은 毛澤東의 지시에 의해 당적만 유지한 채 권좌에서 쫓겨나 행동까지 감시당했다.
  
  
  華國鋒의 벼락 출세
  
  毛澤東은 文革 온건파에 속하는 華國鋒(화국봉)을 周恩來의 후임으로 국무원총리(代行) 겸 黨 제1부주석으로 임명했다. 華國鋒은 毛澤東의 고향 湖南省(호남성) 湘潭縣(상담현) 黨서기 출신으로 외모도 毛澤東과 비슷하다. 그는 상담현 黨서기 시절부터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의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비판받고 있던 毛澤東을 적극 옹호함으로써 일약 호남성 黨서기로 발탁되었다. 이어 黨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林彪사건이 발발하자 조사위원이 되어 林彪의 「反黨罪」를 밝혀 毛澤東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974년에는 국무원 공안부장을 맡아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했다.
  
  한편 천안문사태를 통해 폭발한 민의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4인방은 華國鋒의 국무원 총리대행 취임을 환영하고 그들의 권력장악에 있어 장기적으로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4인방은 신문·잡지·방송 등 대중매체를 통해 실무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강화하면서 각종 캠페인을 전개했다.
  
  1976년 7월, 北京 동쪽 공업도시 唐山市에서 强度 7.8의 지진이 발생하여 사망자 65만 명이라는 대참변이 빚어졌다. 4인방에 대한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天災와 人災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믿고 싶어했다). 엄청난 재난 이후 毛澤東이 할 수 있는 죽는 일밖에 없었다.
  
  
  毛澤東 死後의 4人幇 숙청
  
  <1976년 9월, 毛澤東 동지가 서거하자 江靑 반혁명집단은 당과 국가의 최고 영도권을 탈취하려는 음모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해 10월 상순, 黨중앙정치국은 당과 인민의 뜻에 따라 江靑 반혁명집단을 단호히 분쇄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재난에 終止符를 찍었다. …江靑 반혁명집단을 분쇄하는 투쟁에서는 華國鋒, 葉劍英, 李先念 등의 동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毛澤東의 사망으로 권력투쟁은 새 국면을 맞았다. 華國鋒은 4인방의 극좌노선이 인민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毛澤東의 후원 외에는 권력투쟁에 필요한 조직기반이나 무력적 배경이 허약하고 가진 것이라고는 「펜과 큰 목소리뿐」이라는 약점을 간파했다. 華國鋒은 葉劍英·李先念 등 軍·黨 원로들의 지지 속에 毛澤東의 경호를 맡아 오던 汪東興(왕동흥)을 포섭했다. 4인방은 왕동흥 휘하의 중앙경호부대(8341부대)에 의해 저항 한번 해보지도 못한 채 체포되었다.
  
  4인방 체포 이후 당 안팎에선 鄧小平의 복권, 4인방의 파벌에 대한 철저한 분쇄, 천안문사건을 포함해 잘못 처리된 사건의 시정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았다. 毛澤東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華國鋒으로선 모두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당의 중앙업무를 주관하던 華國鋒은 「毛주석의 기치를 높이 들자」는 구실로 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지속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작하고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鄧小平 비판 계속」을 요구하다가 후에는 천안문사건이 反혁명사건임을 다시 한 번 밝혔으며, 독소가 매우 강한 4인방의 반동적인 글과 「문화대혁명」의 잘못된 이론·구호에 대하여 층층이 禁區(금구)를 설치하여 비판을 못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적발과 비판과 조사운동이 깊숙이 전개되지 못하였으며, 반란을 진압하고 회복하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두 가지 무릇은 안 된다』
  
  1977년 3월 중앙사업회의에서 華國鋒은 「두 가지 무릇(兩個凡是)」이라는 관점을 밝혔다. 「두 가지 무릇」이란 『무릇 毛주석이 내린 결정은 우리 모두가 굳건히 유지해야 하고, 무릇 毛주석의 지시는 모두가 줄곧 어기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鄧小平은 黨중앙에 서한을 보내 「두 가지 무릇」에 대해 반대했다. 같은 해 5월24일 鄧小平은 「중앙의 두 동지」와의 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 「두 가지 무릇」은 안 됩니다. 「두 가지 무릇」에 따르면 나를 명예회복시키는 문제는 말도 안 되며, 또한 1976년 천안문 광장에서 광범한 군중이 벌인 행동이 「도리에 맞다」고 인정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1977년 7월에 개최된 제10기 3中全會에서는 4인방을 黨籍(당적)에서 영구제명했으며, 華國鋒의 黨주석 취임을 정식으로 추인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의미심장했던 것은 이 회의에서 鄧小平이 黨부주석, 정무원부총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당 안팎에서 鄧小平의 복귀와 천안문사태에 대한 再평가의 요구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華國鋒은 그의 정권 수립과 함께 1980년까지 식량 3억5000만t을 생산하고, 1985년까지 탄광·유전·가스전·발전소·철도·항만의 개발과 건설 등 120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국 경제를 세계 선두그룹에 진입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1978년 이후의 「제2차 대약진」 계획은 중공업에 치중했기 때문에 농업분야에서부터 파탄이 일어났다.
  
  이같은 華國鋒의 경제실책은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권력투쟁으로 번졌다. 복잡하게 얽힌 권력투쟁의 최후 승자는 鄧小平이었다. 毛澤東에 의해 키워진 華國鋒은 권력기반이 취약하여 鄧小平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鄧小平은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그는 1979년 3월에 네 가지 항목의 기본원칙을 제기하였다. 中國은 반드시 1)사회주의의 길, 2)프롤레타리아 독재, 3)공산당의 영도, 4)마르크스-레닌주의와 毛澤東 사상을 견지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毛澤東이란 偶像(우상)이었다. 그는 이미 亡者였지만, 중국의 레닌이자 스탈린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지녔던 神性을 약화시키지 않고 단순히 비난만 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毛澤東의 格下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鄧小平 자신의 정치역정에도 흠이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해결책은 毛澤東의 생애 전반기의 업적과 후반기의 과오를 나누어 평가하는 방법이었다. 이에 따라 毛澤東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60%의 功과 40%의 過로 안배되었다. 1981년 6월 제11기6中全會에서 통과된 역사결의는 1978년 12월의 제11기3中全會 이후 확립되기 시작한 鄧小平 체제를 확실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 놓은 문건이었다.
  
  <1978년 12월에 개최된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제11기3중전회)는 건국 이래 우리 당의 역사에서 매우 깊은 의의를 가진 위대한 전환이었다. (中略) 전체회의는 「두 가지 무릇」이라는 잘못된 방침을 단호하게 비판하고, 毛澤東 사상의 과학적 체계를 전면적이고 적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전체회의는 진리의 기준에 대한 토론을 높이 평가하고, 사상을 해방시키고 생각을 깊이 하여, 實事求是를 견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앞을 내다본다는 지도방침을 확정하였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면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심각한 좌경오류는 毛澤東 동지에게 주된 책임이 있다. 그러나 毛澤東 동지의 오류는 궁극적으로 한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가 범한 오류였다>
  
  <毛澤東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전략가, 이론가이다. 그가 10년 동안에 걸친 「문화대혁명」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全생애를 놓고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이 잘못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의 공적은 1차적이고, 오류는 2차적이다>
  
  
  時代精神과 同行하는 역사인물 평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필자는 北京 등지의 택시 안에서까지 毛澤東의 사진이 神主처럼 모셔져 있는 모습을 더러 목격할 수 있었다. 아직도 北京의 중심 天安門 광장에는 毛澤東의 초대형 초상화가 나붙어 있기는 하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中國 청년들에게 『존경하는 현대 중국의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 『1위 周恩來, 2위 鄧小平』 혹은 『1위 鄧小平, 2위 周恩來』라고 답변한다. 毛澤東은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서 갈수록 멀어져 가는 人物이 되고 말았다.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時代精神과 同行한다. 周恩來는 제2인자의 대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던 毛澤東의 魔王的(마왕적) 권력의지를 꿰뚫어보고 毛澤東의 面前에서 무릎까지 꿇는 카멜레온의 處世로 한 번도 黨서열 3위 밖으로 밀려나지 않은 不倒翁(부도옹: 오뚝이)이긴 했지만, 부드러운 행정력으로 文革期의 국가위기를 관리했으며 毛澤東의 눈 밖에 난 鄧小平 등 많은 同志들을 求命(구명)했다.
  
  자기 신념에 목숨을 건 끝에 인생의 마지막 16년간 大權을 휘어잡고 세계 인구의 20%를 점하는 中國을 변화시킨 鄧小平과 德望과 和合의 인물인 周恩來가 최근 중국인들의 選好度에서 莫上莫下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물론 두 사람에 대한 앞으로의 역사적 평가는 죽 끓듯 표변하게 마련인 인기투표식 순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일 것이다.
  
  
  鄧小平은 朴正熙 경제모델 模倣
  
  美國의 아시아문제 전문가로서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18人 대외정책자문위원회의 멤버로 활약했던 윌리엄 H. 오버홀트는 그의 저서 「超强國으로 가는 중국」에서 1980년 이후의 중국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중국은 경제성장을 추구하기 위해 국제적 갈등과 지정학적 야망을 청산했다. 중국은 「혁명의 수출」을 포기했고, 주변국가와 화해를 도모했으며, 군비지출을 축소시키고, 거의 100만 명의 병력을 감축했다』
  
  中國은 개발연대의 韓國을 제외하면 후진국으로서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10여 년간이나 기록한 유일한 나라다. 더구나 중국은 인구에 있어서 한국의 30배가 넘는 大國인 만큼 세계사적 의미가 크다. 중국의 경제정책에 대해 오버홀트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西洋의 전문가들은 중국도 소련의 실패를 답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중국과 소련은 둘 다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주의 종주국의 모델보다는 韓國의 경제모델을 모방했다』
  
  그렇다면 그가 관찰했던 「韓國의 경제모델」은 어떤 모습이었던가.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朴正熙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그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추구하였다. 은행에 대한 정부의 소유권과 10여 개 대규모 재벌기업에 대한 정부 통제를 통해 경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中略) 그는 자신의 급진적인 평등주의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정권 말기까지, 한국이 세계적인 컬러 텔레비전 수출국이었음에도 국내에 컬러 텔레비전 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中略) 朴正熙의 평등주의적 정책(호화제품에 대한 높은 세금, 평등주의적 교육정책)은 소비산업의 발판이 되었던 평등주의적 경제성장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등장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鄧小平의 「歷史決議」 채택, 고르바초프의 「개방·개혁」 선언으로 그 存立의 근거를 상실했다. 이런 맥락에서 흐루시초프, 鄧小平, 고르바초프는 20세기에 성립된 「惡(악)의 帝國」을 70년 만에 청산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 3人이다.
  
  특히 鄧小平은 實用路線으로 中國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이로 인해 韓·中 경제교류가 심화되고, 드디어 時代錯誤的(시대착오적)인 북한의 金正日 체제를 고립시켰다는 점에서 歷史決議는 한반도에도 엄청난 임팩트를 가한 文件이었다.
  
  
  政治發展을 위한 「제3의 歷史決議」에의 초대장
  
  歷史決議 채택 이후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된 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아직도 숱한 내부모순을 안고 있다. 예컨대 지역에 따른 엄청난 소득격차, 온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法이나 합리성보다 인간관계를 重視(중시)하는 「시(關係·관계)」에 의한 부조리 등이 광범한 인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점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현재 중국의 공산당 一黨獨裁(1당독재) 체제가 複數政黨(복수정당) 체제로 변화하지 않는 한 그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역사의 경험으로 보면 경제발전은 정치발전의 요구를 높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경제성장 優等國」 中國도 언젠가는 정권을 바꾸는 韓國의 4·19혁명이나 6월항쟁과 같은 시민적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鄧小平은 中國의 발전을 방해한 毛澤東의 極左路線을 청산하면서 단 한 사람의 政敵(정적)도 사형에 처하지 않고 「歷史決議」의 채택이란 지혜로운 방식으로 實用主義 체제를 개막시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中國은 공산당이 王朝처럼 영구적으로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체제다. 中國의 경제성공은 「또 다른 歷史決議」를 필요로 하는 政治發展에의 招待狀(초대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 彭德懷(1898∼1974)

「10元帥」의 1인으로 毛澤東의 「대약진」 정책을 비판하다가 실각했다. 毛澤東과 동향인 호남성 湘潭縣(상담현) 출신. 湖南육군군관講武堂 졸업. 1928년 중국공산당 입당. 長征(장정)에 참가 항일전쟁·國共內戰 때 八路軍 副총지휘, 중국인민해방군 副총사령, 同제1야전군 司令員(사령원) 및 정치위원 등 역임. 건국 후 黨중앙 서북국 제1서기·서북군정위원회 主席. 1950년 소위 「인민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서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을 총지휘. 1954년부터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 部長으로서 軍의 근대화를 추진. 1959년 廬山회의에서 毛澤東의 미움을 받아 직무에서 해임당함. 1966년 文革 시작 이후 다시 박해받음. 1978년 명예회복.


◈ 劉少奇(1898∼1969)

호남성 寧鄕縣 출신. 호남육군강무당에서 수학. 1921년 모스크바 東方공산주의노동자대학 입학. 동년 중국공산당 입당. 1922년 安源철도·광산노동자 파업을 지도. 1925년 노동자 조직인 중화전국총공회 副위원장. 동년 체포됨. 1926년 석방된 후 廣州, 武漢에서 노동운동 조직함. 1934년 長征에 참가하여 毛澤東이 당의 지도권을 장악한 遵義회의에서 毛澤東을 지지. 1943년 延安에서 黨중앙서기처 서기 겸 군사위 副주석. 1945년 제7회 당대회의 당규약개정보고에서 「毛澤東사상을 당의 활동지침」으로 할 것을 제의, 黨부주석이 됨.

1949년 건국 후 중앙인민정부 副주석, 인민혁명군사위 副주석. 1956년 제8회 당대회에서 穩健前進의 사회주의 건설을 제창했지만, 毛澤東이 대약진·인민공사화의 극좌노선을 추진하자 이를 지지. 1959년 毛澤東을 대신하여 국가주석·국방위 주석에 취임. 1966년 文革에서 타도의 표적이 됨. 1968년 10월 全직위에서 해임됨. 1969년 감금상태로 하남성 開封으로 이송됨. 동년 11월 獄死. 1980년 명예회복.


◈ 江靑(1915∼1991)

毛澤東의 세 번째 처. 본명은 李進. 산동성 諸城縣 출신. 木手인 아버지와 헤어져 地主집에서 더부살이하던 어머니에게 양육됨. 1929년 山東實驗劇院 입학. 1933년 靑島대학 도서관 직원이 됨. 동년 공산당에 입당. 1934년 上海에서 배우생활 시작. 1934년 국민당 당국에 체포됨. 석방 후에도 「란빈」이란 예명으로 영화와 무대에서 활동 계속. 이 무렵 영화감독 唐納과 결혼했지만, 곧 이혼하고 1937년 혁명근거지 延安에 들어가 毛澤東을 처음 만남. 1938년 毛와 결혼, 江靑으로 개명.

문혁기에 4인방의 중심인물로 활동. 毛澤東 사후 한 달도 안 된 1976년 10월6일 華國鋒(화국봉)·葉劍英(섭검영) 등 주류파에 의해 체포됨. 1981년 「반혁명집단」의 首謀者로서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원에서 사형판결 받음.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1991년 자살.


◈ 康生(1890∼1975)

산동성 膠縣(교현) 출신. 1925년 중국공산당 입당. 1931년 黨조직부장. 1933년 黨의 駐코민테른(모스크바)대표단 副단장. 1934년 黨정치국원. 1937년 귀국, 延安에 들어감. 1942년 黨중앙 정보부장으로서 「반당분자」 적발 등 특무공작에 종사. 건국 후 黨산동분국 서기가 되었지만, 질병을 이유로 장기간 당활동 중단. 1956년 黨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복귀, 反우파투쟁에서 우파 적발을 담당. 文革 발동과 더불어 「중앙文革지도소위」 고문에 취임. 1969년 정치국상무위원, 1973년 黨부주석. 1975년 病死. 1980년 「林彪·江靑 반혁명집단」의 수모자로 규정되었지만, 사망으로 형사소추되지는 않았음.


◈ 林彪(1906∼1971)

「10元帥」의 1인. 호북성 黃岡縣 출신. 1925년 黃군관학교 입학, 중국공산당 입당. 국민혁명군의 소대장으로서 北伐에 종군. 1927년 南昌폭동에 참가. 1928년 井崗山의 혁명근거지에서 毛澤東 부대에 합류. 1932년 紅제4군 軍長. 長征에서는 紅제1군 군단장. 항일전쟁 중 제115師長으로서 일본군 1개 사단을 궤멸시켜 武名이 높았음. 1938년 被彈에 의한 척추 부상,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한 이래 마약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짐. 국공내전 때 遼沈戰役에서는 제4야전군 사령원으로서 국부군 50만 명의 투항을 받아낸 전과를 올림. 50년 한국전쟁 때는 稱病하며 참전을 회피.

1959년 국방부장 취임. 대약진·인민공사화의 실패로 毛澤東이 자기비판을 했던 1962년의 중앙공작회의(7000人대회)에서 고립당했던 毛澤東을 강력히 옹호함. 1964년 「毛澤東語錄」을 출판하는 등 毛澤東 신격화를 추진. 1965년 毛澤東의 전략론에 따른 「인민전쟁의 승리만세」라는 논문을 발표, 군내의 政治優先에 반대하는 軍간부들의 추방을 추진.

문혁기엔 軍장로들에 대한 비판 공격을 강화하고 劉少奇 등 실권파 실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 1969년 제9회 당대회에서 당규약에 「毛澤東의 후계자」로 명기됨.

그러나 문혁의 수습기에 毛澤東에 의해 周恩來 등 실무파가 국가행정을 장악하자 국가주석 취임을 요구하다 毛澤東에게 불신당함. 더욱이 周恩來가 對美수교의 실무를 주도함에 따라 林彪의 고립감은 깊어짐. 毛澤東의 林彪 비판이 강화되던 1971년 몽골에서 처 葉群, 장남 林立果와 함께 비행기 추락사. 黨중앙은 林彪 등이 毛澤東 암살과 쿠데타를 기도하다 실패하자 도망치려 했다고 斷罪함.


◈ 周恩來(1898∼1976)

건국 이후 사망 때까지 계속 국무원 총리로 재직(1949∼19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 文革을 비롯한 격렬한 권력투쟁 속에서도 항상 黨內 서열 3위 이내에 들었던 處世의 達人. 강소성 淮安縣에서 태어남. 1917년 천진 南開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東亞고등예비학교에서 수학. 1919년 귀국하여 학생운동 지도자가 됨.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현지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1924년 귀국 후 황포군관학교(교장 蔣介石) 정치부 주임 등을 거쳐 1927년 黨 중앙위원·정치국원·중앙군사위 서기·중앙비서장을 겸임하고 南昌폭동 지휘. 1928년 당의 실직적 최고지도자가 됨.

1934년 국민당에 쫓긴 중국공산당은 江西의 中央소비에트를 버리고 長征 개시. 1935년 귀주성 遵義의 확대정치국회의에서 군사지도의 실패를 규탄하는 「부하」 毛澤東의 비판을 받아들여 毛澤東의 지도권 확립에 협력.

1936년 張學良 등이 국공내전 중지를 호소하며 장개석을 감금했던 西安사건 때 中共 대표로서 조정역을 맡아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토대를 만들었음. 文革 수습기에 毛澤東에 이어 당내 서열 제2위가 되어 4인방과의 대립이 예각화되던 가운데 사망.

◈ 華國鋒(1921∼ )

毛澤東 사망 후 중국공산당 주석에 취임. 산서성 交城縣 출신. 1938년 입당. 1959년 毛澤東의 指名에 의해 일약 호남성 黨委 제1서기로 발탁됨. 1966년 文革 초기에는 극좌 造反派에 저항했지만, 1967년 『毛주석의 혁명노선으로 돌아간다』고 발언, 毛澤東에게 칭찬을 받음. 1976년 10월 江靑 등 4인방을 체포하고 정치국회의에서 黨주석에 지명되었고, 1977년 제11기6中총회에서 그 직위를 승인받음. 그러나 毛澤東 노선의 계승을 반대하는 鄧小平 세력과 불화를 빚은 끝에 1980년 8월 국무원총리직 사임. 동년 12월 정치국확대회의는 華國鋒의 黨 주석·중앙군사위 주석 사임을 通達. 1981년 6월 11기6中총회에서는 黨 부주석으로 降格(강격)되었고, 1982년 9월 제9회 당대회에서의 직위는 黨중앙위원일 뿐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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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 200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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