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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榮華’와 ‘잃어버린 고향’ 찾는 5박6일의 시간여행
 관리자  08-22 | VIEW : 2,284
‘옛 榮華’와 ‘잃어버린 고향’ 찾는 5박6일의 시간여행


고구려백두산역사기행記


글·사진 / 정재령 월간중앙 차장 (ryoung@joongang.co.kr)  




고구려를 찾는 여행의 출발점은 선양(沈陽)이다. 누루하치가 일으켜 중원까지 다스린 청(淸)제국의 수도이자 본거지였으며 만주국의 수도였다. 지금도 인구 700만명인, 중국에서 다섯번째로 큰 동북지방의 중심도시다. 청조 때는 선양으로 불렸으나 만주국을 세운 장쉐량(張學良)이 펑톈(奉天)으로 개명했던 것을 대륙을 침략한 일제가 이어받아 사용했다. 장쉐량은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렸다’는 의미로 평톈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나, 일제는 ‘천황에 봉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니 광복후 중국 정부가 평톈을 버리고 선양으로 되돌아간 것은 당연한 조치로 보인다.

선양이 고구려를 찾는 여행의 출발지인 것은 이곳이 대한항공의 취항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항공은 서울∼선양 노선에 현재 주5회 운항하고 있는데, 6월1일부터 주 7회로 증편할 계획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 비행기가 만주의 한복판인 이곳에 취항하기 때문에 고구려를 찾는 여행을 한결 손쉽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이징(北京)으로 가 다시 중국의 국내선 비행기를 갈아타고 이곳을 찾거나, 인천에서 배를 타고 20시간 넘게 타고와 단둥(丹東)에 내려 다시 육로로 지안(集安)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선양은 고구려 시대에도 중요한 본거지였다. 고구려의 북쪽 강역(疆域)이 몽고와의 접경인 대능원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니 북방의 넓은 영토를 경영하는 요충지로 이곳 선양을 중시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선양에 있는 랴오닝(遼寧)성 박물관은 고구려 관련 유물을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도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선양은 또 조선조의 가슴 아픈 역사가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7세기초 만주를 배경으로 건국한 청의 태종은 군신의 예를 갖추기를 거절했던 조선을 침략했다. 이름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명(明)을 종주국으로 사대(事大)했던 조선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항복하고 만다. 임금이 삼전도(三田渡)에서 무릎을 꿇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하여 역사는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청은 조선의 포로들을 10여만명이나 이곳 선양으로 끌고와 노예로 부렸다. 현재 청나라 태조(누루하치)의 아버지 무덤으로 전하는 북릉(北陵)공원 안에 있는, 지금은 놀이공원으로 사용되는 거대한 호수는 조선인 포로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던 조선에 대한 청의 보복은 잔인했다. 북릉을 만드는 노역에 포로들을 동원한 데 이어 능이 완공되자 다시 이들을 노예로 전국 각지에 내다팔았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돈이 있는 자들은 이때 돈을 주고 지아비와 자식들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 각지로 팔려나갔으니 그들의 고통과 한이 얼마나 깊었을 것인가? 나라가 허약하면 이렇듯 그 국민들이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선양에서는 북릉과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조선족 거리인 서탑(西塔)거리, 그리고 선양에서 차로 40분거리에 있는 번시(本溪)의 석회암 동굴인 번시수이둥(本溪水洞) 등이 볼 만한 구경거리다. 특히 번시수이둥은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가며 빗물이 만들어 놓은 갖가지 모양의 종유석(鍾乳石)과 석순(石筍)의 지하세계를 여행하는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동굴의 규모도 상상 이상으로 커 마치 설악산 계곡을 지하에 옮겨놓은 듯한 웅장한 느낌을 준다. 동굴 밖은 한여름 더위에 푹푹 찌는 날씨라도 동굴 안은 서늘한 냉기가 흐르므로 동굴여행에는 반드시 긴팔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중국 여행에서 화장실은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준다. 대부분 1960년대 한국의 공중변소 수준인데 그마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큰일을 보는 화장실조차 칸막이 아랫부분이 트여 있는 형태가 많다. 일반적으로 지저분하고 더럽다. 별 3개급의 고급호텔에서조차 화장실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공중화장실의 경우 돈을 받는 곳이 많다. 심지어 무료 공중화장실인 데도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자릿세를 받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 자릿세는 이용하는 상대방이 급한 만큼 값이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 출근 시간에는 출근길이 급한 가장이 아이들을 시켜 ‘큰일’볼 자리를 미리 맡아놓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영문도 모르는 외지인들은 아이들에게 볼일 다 봤으면 나오라고 재촉하지만 아이들은 “우리 아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곤 한다는 것이다.



1,500년 시간 건너뛴 고구려 기행

고구려가 있는 지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퉁화(通化)로 가야 한다. 선양에서 퉁화까지는 밤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저녁 9시차를 타면 다음날 아침 6시에 도착한다. 장쩌민(江澤民)이 이용했다 하는, 한칸에 4명이 잘 수 있는 최고급 침대칸 열차인데도 그리 깨끗하지는 않다. 에어컨과 히터도 달려 있으나 제때 제대로 작동할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여름철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추위를 각오해야 할 것 같다. 화장실 수도꼭지에서는 녹물 섞인 수돗물이 나오고 변기도 불결하다.

승무원들의 서비스도 기대 이하다. 아무런 양해 없이 침대칸으로 불쑥 들어와 자고 있는 사람들의 베갯잇을 쑥 빼간다. 이들에게 자신들의 할 일보다 승객들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인 것 같다. “중국이 왜 ‘차이나’인 줄 아느냐? 한국과 모든 면에서 그만큼 격차가 있기 때문에 차이 나”라는 가이드의 익살 속에 그 정도의 고생은 흘려버릴 수 있어야 고구려 기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이번 역사기행 5박6일 중 절반(3일)을 기차에서 숙박하기 때문이다. 백두산 갈 때와 옌지(延吉)에서 다시 선양으로 돌아올 때 등 세번의 밤기차를 타야 한다. 고구려 기행에 기차 숙박이 많은 것은 그만큼 고구려 옛땅인 이곳 만주땅이 광활하기 때문이니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퉁화에서 지안까지 오는 길은 두갈래다. 남도와 북도가 있는데 남도는 멀고 험한 반면, 북도는 비교적 평탄하다. 140km쯤 되는 북도가 최근 포장돼 오고가는 시간이 3시간대로 짧아졌다. 게다가 삼림이 울창한 오녀봉(五女峰) 국가삼림공원을 지나기 때문에 눈이 전혀 피로하지 않다. 그만큼 경관이 수려하다. 특히 오녀봉 중턱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각종 거대 구조물들을 만들 때 필요한 석재를 구했던 채석장이 남아 있다. 장군총 등에 사용된 돌덩이 중 큰 것은 무게가 무려 50t이 넘는 것들도 있다. 이곳에서 지안의 국내성까지 30∼40km 거리인데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그 거대한 돌덩이들을 잘라 옮길 수 있었을까. 겨울철 계곡의 눈길을 타고 옮겼다는 설이 있지만, 아무튼 그 규모나 크기로 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원전 37년 졸본성에서 건국한 고구려는 기원 3년 이곳 지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다시 장수왕 때인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遷都)하기까지 425년간 이곳을 근거지로 동북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다. 고구려가 668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할 때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니 평양시대는 241년이다. 따라서 고구려 역사를 통틀어 지안이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수도였음을 알 수 있다.



集安은 기후 좋고 물산 풍부한 ‘小江南’

고개를 넘어 지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고구려를 상징하는 거대한 무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이드는 ‘집밖’에서 이제 ‘집안’으로 들어섰다고 농담한다. 지안을 가리켜 ‘새외소강남’(塞外小江南)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즉, 한적한 변방이지만 강남과 같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지안으로 들어서는 고개를 넘어서자 봄이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버드나무 잎의 연두색이 훨씬 짙푸른 향기를 뿌리고 있고, 넓게 열린 토지의 빛깔은 비옥한 흑갈색이다. 지안은 실제로 오늘날 머루와 인삼의 산지이고, 과일과 곡식 등 각종 물산이 풍부하다. 그 옛날 강력한 고구려의 힘이 이렇듯 비옥한 땅과 기후 등 물질적 기반에 힘입은 것임을 짐작케 한다.

현재의 지안은 사실 조그마한 읍 정도의 도시에 불과하다. 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6.4m 높이의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를 직접 만져보고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규모의 장군총에 올라서면 압록강 건너편 자강도 만포시의 비료공장이 보일 정도로 북한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1,500년의 세월 속에서도 울긋불긋한 색깔이 살아있는 오회분 오호묘의 화려한 벽화, 4개 지역에 흩어져 있는 거대(巨大)무덤만도 약 1만2,000∼1만4,000기(基)로 추정된다. 국내성이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산 중턱에는 고구려 시대의 방어성이던 환도산성(丸都山城)이 있다.

지안은 도시 전체가 고구려의 유적으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무덤이 주택가와 농경지에 인접해 있으며 얼마나 많은 무덤들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무덤의 기반석들이 농가의 울타리나 축대 등으로 사용되고, 도심 한복판의 국내성은 이미 본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게다가 이곳저곳에서 아파트 같은 건물 신축이 붐을 이루고 있어 보존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지 않는다면 국내성은 머지않아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거대무덤 또한 이미 4,000∼6,000기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선조들의 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군총조차 왼쪽 돌계단 일부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해 선조들의 영광을 보존조차 하지 못하는 후손들의 무능함을 꾸짖는 것 같다.



미인송과 자작나무로 뒤덮인 백두산 삼림

고구려 무덤 700기가 밀집해 있는 동구고묘군(洞洞古墓群)을 거쳐 환도산성에 오르면 전통적인 우리 민족의 전쟁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즉, 평상시에는 도성에서 살다가 위급할 때는 산성으로 옮겨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식이다. 서울의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과 같은 역할을 이 환도산성이 해냈던 것이다.

환도산성은 사관생도들이나 군 관계자들은 필수적으로 들르는 코스로 알려져 있다. 둘레 7km에 5개의 문이 있었다는 이곳의 입지조건이 방어군사전략의 교과서라 할 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사방은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단 한곳 남쪽으로만 통로가 열렸는데, 그곳으로 물길이 있어 굳게 지킨다면 어느 곳으로든 적이 공격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적은 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능히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보였다. 게다가 산성 안에는 넓은 밭과 개울,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을 정도의 못’(飮馬池)이 있어 오랜 적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췄다.

백두산 가는 길은 퉁화에서 시작된다. 퉁화에서 8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얼도바이터(이도백하·二道白河)로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40분가량 달리면 백두산의 중국 이름인 장백산 입구 매표소가 나온다. 백두산 가는 길은 원래 옌지에서 가는 길이 처음 열렸으나 길이 워낙 멀고(250km) 육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비싸 최근 얼도바이터 코스가 새로 개발됐다. 이 때문에 인구 5만명 정도의 조그만 소읍이던 이곳 얼도바이터는 여름철이면 백두산을 찾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으로 바뀌었다.

백두산에 이르면 먼저 눈에 띄는 풍경은 끝없이 펼쳐

진 평원의 삼림지대다. 한국에서처럼 산지가 아니라 끝없는 평원에 울창한 삼림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다는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소나무가 미인송이고, 나무껍질에 마치 흰 페인트를 칠한 듯이 희게 빛나는 나무가 자작나무다.

장백산매표소에서 미인송과 자작나무가 가지런히 펼쳐진 삼림지대를 갈라놓은 비포장도로를 30분쯤 달리면 백두산온천이 있는 호텔촌에 이른다. 백두산 산행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천지로 가는 산행은 6월부터 9월까지 1년 중 4개월만 허용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외의 시간에는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온천장호텔에서 40분쯤 걸어가면 높이 68m에 이르는 장백폭포가 있다. 백두산 천지는 이곳 만주지방 3개의 큰 강(압록강·두만강·쑹화강)의 원천이다. 그 중 하나인 쑹화강(松花江)의 원류가 바로 이 장백폭포다. 그러나 5월 초인데도 장백폭포의 윗부분만 모습을 드러냈을 뿐 계곡과 폭포의 아랫부분은 아직도 깊은 얼음에 묻혀 있다. 비록 천지에는 가까이 갈 수 없었어도 흰 눈이 덮인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들과 웅장하게 버티고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없이 펼쳐지는 눈덮인 평원, 장백폭포의 높이 등에서 큰산이 내뿜는 장대함을 느낄 수 있다.

눈이 녹는 6월부터는 보통 이곳에서 지프를 타고 천지 입구까지 갈 수 있다. 시간은 30분 남짓 걸리는데 올라간다고 해서 천지를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워낙 날씨가 변화무쌍해 천지를 볼 확률은 반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번 고구려·백두산 여행은 두가지 의미에서 시간여행이다. 1,500년전 선조들의 발자취를 만져보고 돌아보는 역사기행인 데다 해란강이 내려다보이는 북간도 룽징(龍井)에 있는 일송정(一松亭)에 올라 광복을 위해 말달리고 싸웠던 우리 선조들의 활동무대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잃어버린 1960년대의 고향 풍경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어디를 가도 무리지어 피어 있는 진달래꽃·살구꽃이 어울린 초가집을 볼 수 있고, 동구밖 논밭에서는 황소를 앞세워 쟁기로 밭을 매거나 논을 가는 농부들의 낯익은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목덜미의 깃을 곧추세운 수탉들의 짱짱한 울음소리와 병아리들을 줄세우듯 끌고다니는 암탉, 달구지를 타고 가는 노인과 손자들의 한가로운 모습들과 마주칠 때면 문득 잃어버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회상에 잠겨볼 수 있다. ‘그때를 아십니까’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모습들을 현실에서 문득 만날 수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선조들의 자취를 더듬는 것보다 더욱 생생한 시간여행이라 할 수 있다.

백두산에서 옌볜(延邊)의 중심도시인 옌지까지는 버스로 5시간 거리다. 옌지는 중국내 조선족자치주인 옌볜의 수도다. 이곳 옌지는 도무지 중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글 간판이 많다. 모든 간판은 한자와 한글의 병기가 의무화돼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옌지에는 한말과 일제시대 북간도의 중심 도시였던 룽징이 40분 거리에 있고 북한과 러시아·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투먼(圖門)시가 40∼50km 거리에 있다. 이 모든 지역의 조선족 비율이 50∼60%여서 어느 곳이든 한글과 한국어가 통용된다.



북간도 龍井의 일송정과 해란강

게다가 최근 들어 인 한국붐 때문에 화장과 패션 등이 모두 한국 일색이다. 이 때문에 부작용도 만만찮다. 모두들 힘들여 일할 생각은 않고 손쉽게 돈벌 생각만 한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한국행을 꿈꾸는 코리안드림이 가라앉지 않고 있으며, 도시로 도시로 몰리는 도시집중현상도 심각하다. 농촌에서, 젊은이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고 남아 있는 총각들은 처녀 기근으로 결혼적령기를 넘기기 일쑤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1970년대 한국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 풍경도 한국의 모습을 닯아가고 있다. 옌지시에서 가장 흔한 것을 들라면 우리의 단란주점식 영업을 하는 노래방과 택시, 안마시술소 같은 위락시설이다. 최근에는 이런 유흥업소들이 도시 외곽으로 옮겨가고 있는 모습도 한국과 닮은꼴이다. 옌지 중심을 벗어나면 길 주변에서 신촌 닭갈비·고려집·만세오리음식점·양반오골계집·솔밭집 같은 한글 간판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모두 최근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가든’형 음식점들로 한국의 초기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 이들 음식점은 한국의 러브호텔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한다.

시내를 벗어난 교외 언덕에 별장형 고급주택 3채가 나란히 건축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넓은 대지에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목조 자재로 지어지는 고급 저택이다. 그런데 그 집들의 주인이 한채는 포주이고, 다른 한채는 밀수꾼이며, 나머지 한채는 공산당 고위간부라고 한다. 또 공무원사회에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아닌 ‘흑서백서론’(黑鼠白鼠論)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흰 쥐든 검은 쥐든 안잡히는 쥐가 좋은 쥐’라는 뜻이라고 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등소평의 실용주의적 노선이 이렇듯 ‘아무리 해먹어도 안잡히면 그만’이라는 뜻으로 교묘히 탈바꿈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고급주택의 주인이 정말 포주와 밀수꾼·공산당 간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회적 현상이 된다. 돈만 벌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에 오염돼가는 현재 중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옌지에는 최근 지어진 별 다섯개급의 대우옌볜호텔이 있어 잠자리 불편을 덜 수 있다. 또 이름난 냉면집이나 북한에서 요원들이 나와 운영하는 음식점 등이 있어 정통 북한식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또 과거 북간도의 중심이었던 룽징이 가까워 한말과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선조들의 유적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말 유적으로는 노래 ‘선구자’에 나오는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과 해란강(海蘭江), 용정교 등이 있다. 일송정은 비암산 봉우리에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독립운동 활동가들이 자주 이곳에서 회합을 가져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옛날 선구자들과 호흡을 가까이하던 늙은 소나무는 찾아볼 길이 없다. 일제가 북간도를 점령하자마자 제일 먼저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정자 앞 새로 심은 어린 소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이곳을 지키는 거목이 돼 그 이름에 어울리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재는 한국의 여러 단체와 의인들의 지원으로 정자가 지어졌고, 일송정 기념탑이 세워졌으며, 그 앞에 ‘선구자’와 ‘고향의 봄’ 가사가 적힌 두개의 비석들도 들어섰다. 정자와 탑으로 오르는 길도 돌계단과 진달래꽃으로 단장돼 선조들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 돈 있는 이들이 이렇듯 의미있게 쓴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도 훨씬 건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곳에 올라서면 선구자의 가사에 나오는 해란강이 서쪽의 룽징에서 시작해 비암산을 끼고돌아 동쪽의 허룽(和龍)현으로 굽이굽이 길게 사라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지 사방이 트여 북간도 어느 지방에서든 접근하기 쉽고,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어 적의 공격에 기동성있게 대처할 수 있는 점 등, 독립군들이 왜 이곳을 모임의 장소로 애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독립군이 일제의 정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봉오골 항일 전적지도 찾아볼 만한 유적지 중 하나다.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뒤쫓아온 일본 정규군을 이곳 봉오골에서 매복 기습하여 150여명을 사상시키는 전과를 거뒀다고 한다. 봉오골 전적지는 비정규군인 독립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격파한 최초의 전투라는 의미 외에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대첩의 원인이 된 중요한 전투였다. 즉, 봉오골 전투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해 약이 오른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보복공격에 나섰다가 청산리에서 김좌진·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의 매복에 걸려 수천명이 몰살당했던 것이다.

그밖에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던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교와 윤동주기념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다리 하나를 경계로 북한땅을 마주 보는 투먼시 등도 둘러볼 만한 관광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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