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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
 관리자  01-25 | VIEW : 7,123
퇴색하는 화랑… 앞선 지식인…
[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 <1> 월명사 vs 최치원


향가에서 한시로 넘어가던 신라末 향가와 한시의 대가
화랑의 풍류는 이미 사라지고 문인이 우대받기는 이르고… 배회와 은둔의 삶을 살다

우리 고전문학사를 주름잡으며 시대적 숙명 혹은 역사관, 세계관의 차이로 대립한 문인, 학자들의 발자취를 비교 조명하는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을 오늘부터 매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가 올 가을 진행하고 있는 대중강좌 내용을 압축하고 확장한 이번 연재는 시대를 빛낸 문사들의 열정적 예술세계와 삶을 오늘의 눈에 비춰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집필은 정출헌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이형대 고미숙 조현설 고려대 연구교수 등이 맡습니다. 삽화는 화가 박성태씨가 그립니다. 박씨는 특히 초등학생인 두 딸과의 공동작업으로 상상력 넘치는 필치로 인물의 모습을 구성, 매회 신선한 시각적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비감한 내면을 노래한 음유시인 월명사

신라 경덕왕 19년(760년) 서라벌에 느닷없이 해가 두 개 떠서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는 변괴가 일어났다. 당시 경덕왕은 산화공덕(散花功德)의 불교 의식으로 이 재앙을 물리치고자 했다. 그때 부름을 받고 ‘도솔가’를 지어 변괴를 사라지게 한 승려가 월명사(月明師)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신라인은 향가를 숭상했는데 그것이 천지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월명사는 그 신라 전통 시가인 향가에 뛰어난 시인이었다.

‘생사의 길은/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너는 간다는 말도/못다 이르고 갔느냐./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한 가지에 나고서도/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죽은 누이동생이 서방정토로 가기를 기원하며 부른 ‘제망매가(祭亡妹歌)’는 월명사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친근한 비유와 절실한 시상의 전개로 현전하는 향가 가운데 절창으로 꼽힌다. 오죽했으면 이 노래를 부르자마자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아갔겠는가.

현세를 중시하는 미륵불을 섬긴 화랑집단에 속했으면서 아미타불을 외우며 내세를 희구했다는 이유에서 월명사의 승려로서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월명사의 내면세계이다. 그는 인간의 번뇌를 초탈해야 하는 불제자이기 전에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낀 인간이었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해야 하는 낭도승(郞徒僧)이기 전에 내면의 비감을 진솔하게 노래한 음유시인이었다.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경계인 최치원

이보다 조금 뒤에 활동한 최치원 역시 혼백을 감동시킬 정도의 천부적 재능을 지닌 신라의 문인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걸었던 길은 월명사와 달랐다. 그는 당나라에서 관리를 지낸 유학파 지식인이었고, 주로 한시에 능했다. 당나라 지방관리 시절 임지 부근에 원한을 품고 죽은 자매의 무덤인 쌍녀분에서 시로써 혼령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중국의 ‘육조사적편류’, 박인량의 ‘수이전’에 나와있다.

‘글로 밭을 일군다’는 뜻으로 제목을 삼은 ‘계원필경(桂苑筆耕)’에서 보듯 최치원은 창작 활동에 목숨을 건 작가였다. 그래서 월명사보다 남아 있는 작품이 많다. 육두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에 유학 가 그곳에서 문명(文名)을 떨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방인이라는 한계로 소외감에 시달렸고, 고국 신라로 되돌아 와서도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그가 남긴 작품에는 시대와 불화한 천재의 비애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장안(長安)에서 고생하던 일 생각하면(每憶長安舊苦辛)/어찌 고향의 봄을 헛되이 보내랴(那堪虛擲故園春)/오늘 아침 또 산놀이 약속 저버리니(今朝又負遊山約)/뉘우치노라, 속세의 명리인 알게 된 것을(悔識塵中名利人).’ 봄나들이 가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약속을 저버리자 서운함을 자조적으로 읊은 시다.

‘가을바람에 홀로 쓰라린 시 읊조리니/세상엔 내 노래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로 시작하는 ‘가을 밤 비 내리는데(秋夜雨中)’, ‘늘 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봐/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게 했네’로 마감하는 ‘가야산 독서당에서(題伽倻山讀書堂)’도 비슷한 고독감이 담겨있다.

중국에서 겪은 떠돌이 생활의 비참함, 고국 신라에서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들뜬 기대감, 그러나 자신을 돌보기는커녕 모두 외면해버리는 냉혹한 현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신을 되돌아보지만 그의 젊은 꿈은 그렇게 스러져 갔다.

최치원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계림(鷄林)은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은 푸른 솔이로다”라는 글을 보내 고려의 창업을 은밀하게 도왔다는 얘기도 있다. 무너져 내리는 고국 신라를 배반할 수도 없고, 새롭게 떠오르는 신왕조 고려를 선택할 수도 없던 ‘경계인’ 최치원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의 뒷모습

월명사와 최치원은 신라시대 향가와 한시의 최고 작가였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달밤에 혼자 피리를 불며 거리를 배회한 월명사와 전국을 떠돌다가 가야산에 은둔한 최치원의 뒷모습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의 행적은 왜 그리 쓸쓸했을까? 몸담았던 시대와 불화했기 때문이다.

산화공덕 의식을 치르려던 경덕왕에게 불려온 월명사는 이렇게 말했다. “승은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향가나 알 뿐 범패(梵唄)는 잘 모릅니다.” 그러자 왕은 “이미 인연이 있는 승려로 지목되었으니 향가를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들 대화에서 국가적 의식은 불교식 범패를 부를 줄 아는 승려가 주관해야지 화랑에 속한 낭도승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화랑 세력은 통일 이후 급속히 하강곡선을 그렸다. 경덕왕 대에 이르면 이미 지난날의 영화는 거의 스러져버리고 만다. 화랑의 풍류도를 대신해 불교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아가던 그때 월명사는 점차 왜소해지는 자신의 모습에서 인간사의 부침을 곱씹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낡은 인물’ 월명사는 그래서 쓸쓸히 피리를 불며 달밤을 배회했던 것이 아닐까.

최치원도 사정은 비슷하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중국에서 쌓은 경륜과 새로운 지식을 맘껏 펼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혼란한 국정을 수습하기 위해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은 그런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운수가 막히고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다.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는 벼슬할 뜻을 가지지 않았다”고 김부식이 썼듯 그는 결국 제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최치원 같은 선구적 지식인을 용납하기에 말기의 신라는 너무 썩어 있었다. 어쩌면 그를 알아볼 만큼 사회가 성숙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낡은 시대’를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인물’ 최치원은 그래서 쓸쓸히 산림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이벌로서 월명사와 최치원의 면모는 그들이 특장으로 삼았던 향가와 한시의 부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라 후기는 전통으로 이어져오던 향가와 새롭게 전래된 한시가 문학사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팽팽하게 맞선, 그러나 무게 중심이 점차 한시로 옮겨가던 시대였다. 향가의 고수 월명사와 한시의 대가 최치원은 이런 추세를 보여주는 대표 문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시대와 불화한 작가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월명사가 너무 늦게 태어났고, 최치원은 너무 일찍 태어났다. 월명사가 삼국통일 즈음에 활동하고 최치원이 고려 건국 시기에 났더라면 그들은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때는 화랑집단과 문인 지식층이 우대 받던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그들은 탁월한 작가로 고전문학사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문학은 언제나 궁핍한 시대에 그 시대와 불화한 작가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한 승려라고 밝힌다든가 신라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세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통해 화랑집단에 소속된 낭도승(郎徒僧)으로 국가의 안녕과 관련된 일을 맡았으리라 짐작된다.

월명사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자료는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에 실린 몇몇 일화가 전부이다. 경덕왕(재위 742~764) 때 해가 두 개 나타난 변괴를 '도솔가'를 불러 물리쳤으며, 죽은 누이동생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망매가'를 불렀다, 피리를 잘 불어 달조차 운행을 멈추게 했다 등등이다.


최치원
  
헌안왕 1년(857년)에 태어나 죽은 해는 알지 못한다. 12세에 육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 갔다.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해 율수현위( 水縣尉)를 지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해 턱없이 낮은 직위로 여기고 그만두었다.

중국에서 문명을 떨쳤지만 이방인의 한계를 절감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주변사람의 배척과 시기로 제대로 쓰이지 못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으며 가야산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율자가 삼수변에 밤 율(栗)자입니다)

/정출헌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儒-佛의 눈'으로 역사를 쓰다
[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 <2> 김부식 vs 일연

● 삼국사기-김유신에 집착 유교적 君臣觀표출
'설씨녀' 얘기선 생략 통해 信·孝 부각

● 삼국유사 - 현실·합리 뛰어넘어 기존 史觀 전복
'호녀' 통해 사랑대신 불교 영험 강조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는 시대적 사명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우리는 흔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함께 기억한다. 130여 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까닭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초에 편찬된 '구 삼국사'가 있었지만 김부식이 인종 23년(1145년)에 새로 쓴 역사서이고, 삼국유사는 국사(國史)인 '삼국사기'가 있었지만 일연이 충렬왕 8년(1281년) 무렵 새로 쓴 역사서이다.

그들의 나이 각각 70세와 75세 때였다. 죽음을 앞두고 혼불로 담금질하며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무엇이 만년의 그들을 흔들어 깨웠을까? 해답은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격변의 시대상황에 감추어져 있다.

김부식은 임금의 권위를 넘보던 외척 이자겸의 전횡과 서경천도를 내건 묘청의 난으로, 일연은 전국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무신의 난과 몽고의 침입으로 얼룩진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안팎에서 들이닥친 극심한 혼란과 혹독한 시련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들은 역사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김부식이 두 차례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문벌귀족의 시대를 열었다면, 일연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개경환도(開京還都) 세력의 후원에 힘입어 불교계의 정점에 올라섰다.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던, 저 격변의 한복판을 지나온 그때 그들에게 역사의 전범을 수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절실했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 개인의 사적인 역사가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이다. 아니 고려 중기와 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에 의해 재구성된 삼국의 역사이다. 삼국인의 주체적 역사가 아니라 고려인의 시각에 의해 타자화한 역사인 것이다. 모든 역사가 사실의 객관성을 표방하지만 언제나 '거대한 허구'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시대정신이라는 명분 아래 거듭거듭 씌어지는 법이다.


김부식의 유교적 합리주의, 일연의 불교적 세계관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본기(本紀)'로 시작해 삼국의 무대를 활보하던 인물을 기록한 '열전(列傳)'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이 '열전'이야말로 편찬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데 더없이 훌륭한 텍스트이다. '열전'은 생동하는 역사인 동시에 문학적인 역사이며, 김부식은 이 '열전'에 가장 큰 공을 들였다.

여기에는 52명의 삼국인이 등장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김유신 한 사람에게 '열전' 전체의 3분의1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했다는 사실이다. 김부식이 김유신에게 그만큼 역사적 무게를 실었다는 방증이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거둔 인물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김부식이 덧붙인 사평(史評)은 참으로 뜻밖이다. 그는 이곳에서 김유신의 공업을 기리는 한 마디의 찬사도 바치지 않았다. 대신 김유신이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던 군주의 자세에 주목한다. 김부식은 임금과 신하의 행복한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사례로 김유신을 든 것이다. 문벌귀족의 권위를 확고하게 틀어쥔 김부식이 김유신의 행적을 빌어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유교적 군신관을 천명하려 했던 의도가 분명하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말하려던 바는 이와 사뭇 다르다. 절반 가까운 분량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기이편(紀異篇)' 서문은 그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연은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태어났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이것이 책머리에 기이편을 두게 된 까닭이며, 그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선언은 삼국사기에 대한 역사적 도전에 다름 아니다. 김부식은 유교적 합리주의에 배치되는 신이한 사건을 철저하게 배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연은 전란에 의해 황폐해진 자신의 시대가 유가적 합리주의로는 온당하게 설명되거나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현실세계 저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합리성이라는 잣대로는 논외가 되어버리는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삼국의 역사를 재구성한 뒤 불교의 신이사(神異事)를 조목조목 배치한다. 불교가 전래된 유래, 불탑과 불상의 영험, 고승의 비범한 행적과 능력, 인간과 부처의 놀라운 감응 등등이다. 김부식이 유교적 합리주의로 읽은 삼국의 역사를 일연은 불교적 세계관으로 완벽하게 전복했던 것이다.


여성 이야기에 스며든 역사가의 작위

역사를 살아 숨쉬는 인간들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충신열사(忠臣烈士)라든가 고승대덕(高僧大德)과 같은 인물에 주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하찮았던 존재, 예컨대 여성들이 간혹 얼굴을 내밀고 있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설씨녀(薛氏女)'와 삼국유사 '감통편(感通篇)'에 실려 있는 '호녀(虎女)'가 그들이다.

설씨녀가 약혼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난을 이겨낸 여성이라면 호녀는 사랑하는 낭군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흔쾌히 바친 여성이다. 사랑하는 남성을 위해 참으로 힘든 행실을 실천한 인물이기에 여성인데도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설씨녀는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수자리를 살겠다는 가실(嘉實)과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돌아오겠다는 3년 기한을 훨씬 넘기고도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도록 강요한다. 가실과의 굳은 약속과 부친의 지엄한 명령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때 가실이 돌아와 결혼을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찬찬히 읽다 보면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 가실은 자신이 기르던 말을 설씨녀에게 맡기면서 "이는 천하에서 드문 좋은 말이니 후일에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고 떠났다. 혼약을 방해하는 곤경에 빠지면 이를 타고 도망하라는 복선(伏線)이다. 하지만 설씨녀는 탈주하려다 포기하고 가실이 맡겨둔 말을 어루만지며 슬퍼할 따름이다. 이것이 '후일에 반드시 쓸 데가 있으리라'던 복선의 전부였을까?

그렇지 않다. 김부식이 사료로 채택한 '설씨녀'의 원 텍스트는 약혼자와의 신의(信義)와 부친에 대한 효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설씨녀가 신의와 효행을 함께 실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친의 강압으로부터 탈주하는 중요한 대목을 생략하는 '이념적 은폐'를 도모했던 것이다.

반면 호랑이의 변신인 호녀는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만난 김현(金現)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호녀가 세 오라비의 악행을 대신해 죽음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김현과의 극진한 사랑과 인간으로의 환생하려는 염원 사이에서 갈등하던 호녀는 축생(畜生)의 삶을 마감하기 위해 죽음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호녀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고 싶어 했다. 포악한 호랑이를 죽인 공으로 낭군의 벼슬길이 열리리라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일연은 호녀의 헌신적 자기희생에 주목한다. 오라비의 악행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의로움(義),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낭군의 벼슬길을 열어준 어짊(仁)에서 관음보살의 자비심을 읽은 것이다. 김현의 정성스런 흥륜사 탑돌이로 관음보살이 감동했고, 관음보살은 보답으로 잠시 호녀의 몸을 빌려 나타나 벼슬이란 복록을 내렸다고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독특한 독법은 원 텍스트가 담고 있던 이류(異類) 간의 눈물겨운 사랑을 외면한, 아니 불교적 영험을 강조하기 위해 승려 일연이 감행한 '종교적 왜곡'에 다름 아니다.

김부식과 일연은 문학적 성격이 짙은 텍스트까지 동원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던 '역사적 진실'을 관철시키려고 무척 노력했다. 여성의 도리를 완벽하게 실천한 설씨녀의 절의와 효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택한 호녀의 자기희생은 그런 의도의 산물이다.

유교적 덕행이라든가 불교적 영험으로 포장되거나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권장되더라도 그것이 본래 이야기가 담고 있던 진정성과 거리가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읽을 때 은폐되거나 지워진 인간의 가녀린 숨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부식

고려 문종 29년(1075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의종 5년(1151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라 왕족의 후예로 유교적 이념을 지킨 정치가, 역사가, 문장가였다. 외척 이자겸을 숙청하고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종 때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고자 했고,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해 자신이 추구한 정치이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삼국사기에는 유교적, 사대적, 신라 중심적 정치이념과 역사인식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문집 20권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일연

고려 희종 2년(1206년)에 경산에서 태어나 충렬왕 15년(1289년)에 84세로 죽었다.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무신집권기를 지내는 동안 이름을 크게 날리지는 못했다. 원종ㆍ충렬왕대에 이르러 두각을 나타내 자신이 속한 가지산문파(迦智山門派)의 위세를 크게 떨치며 국존(國尊ㆍ고려말 조선초 덕행이 높은 중에게 준 최고의 승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만년에 편찬한 삼국유사는 불교적, 자주적, 민중적 입장에서 씌어졌다고 평가된다. 100여 권에 달하는 저작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김부식

고려 문종 29년(1075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의종 5년(1151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라 왕족의 후예로 유교적 이념을 지킨 정치가, 역사가, 문장가였다. 외척 이자겸을 숙청하고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종 때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고자 했고,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해 자신이 추구한 정치이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삼국사기에는 유교적, 사대적, 신라 중심적 정치이념과 역사인식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문집 20권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경계의 시대… 구귀족과 사대부의 '충돌'
[한국고전문학사의 라이벌] <3> 이인로 VS 이규보 - 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

대숲 아래 깨진 술판
열 아홉 살의 청년 이규보는 1186년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런 제안을 받았다. “우리 모임의 오세재(吳世才)가 경주에 놀러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자네가 그 자리를 메워주겠는가?” 이담지의 초대에 대해 이규보는 “칠현(七賢)이 조정의 벼슬입니까? 어찌 빈자리를 보충한단 말입니까? 혜강(?康)ㆍ완적(阮籍) 뒤에 그들을 계승한 이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비꼬듯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던져진 ‘춘(春)’과 ‘인(人)’ 두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었다.

‘영광스럽게도 대 아래 모임에 참석하여(榮參竹下會)/ 유쾌하게도 독 안의 봄에 자빠졌네(快倒甕中春)/ 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未識七賢內)/ 누가 오얏씨를 뚫은 분이신지(誰爲鑽核人)’

이 시는 동석자들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는 무신란(1170년) 이후 진나라 죽림칠현을 본뜬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이들 문인들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짓밟은 것이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이 자기 집 오얏나무 씨를 남이 가져다 심을까 봐 오얏을 먹은 후 늘 송곳으로 씨를 뚫어서 버렸다는 고사를 끌어와 시비를 걸었으니 말이다.

이규보 스스로 작성한 ‘백운소설(白雲小說)’의 현장보고서에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인로는 아마도 배알이 뒤틀렸을 것이다. ‘어린놈이 재주만 믿고 까부는군. 우리를 이따위로 비웃다니!’ 그러나 이규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나하게 취해 거만한 태도로’ 나와 버린다.

고려 전기와 후기의 경계에 살던 두 사람, 각각 문벌귀족과 신흥사대부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라이벌 이인로와 이규보는 이렇게 만났다. 35세 이인로와 19세 이규보의 만남, 12세기 말 고려 문인지식인 사회의 상징적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술판이 깨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옛 사람의 문장을 갈고닦는 '用事'의 정신을 문학에 구현 현실부정의 보수성향 강해


문벌 귀족과 신흥 사대부

대나무 아래로 이규보를 초대한 문인들은 이른바 죽림고회(竹林高會) 멤버들이었다. 오세재, 임춘(林椿), 황보항(黃甫抗), 조통(趙通),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그리고 이인로(李仁老). 나이로는 오세재가 좌장이었지만 문학으로는 이인로가 대변인 혹은 대표였다. 이들은 모두 고려사의 분수령이 된 무신란으로 몰락한 옛 문신귀족의 후예들로 ‘무부(武夫)’들이 지배하는 현실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죽림칠현이 그랬듯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의 정신을 지니지는 못했다. 이들은 애초에 확고한 세계관적 선택에 의해 죽림에 자리 잡은 인물들이 아니라 무인들의 칼날에 밀려 쓴 잔을 마시고 있던, 한때는 ‘잘 먹고 잘 살던’ 세력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죽림(竹林)은 옛 영화를 동경하는 공간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곳은 무신들이 지배하는 개경의 풍림(楓林)을 향한 욕망이 감춰진 모순된 공간이었다. 이들의 냉소는 아마도 개경을 향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종 10년(1180년) 과거를 통해 이미 관직에 나가 있던 이인로는 이들 가운데 풍림을 향한 욕망을 가장 먼저 실置?인물이었다.

그러나 이규보의 출신 성분은 문벌귀족이었던 경원 이씨의 후예 이인로와는 전혀 달랐다. 부친 윤수(允綏)가 호부낭중(戶部郎中)이라는 재경 관료의 지위에 있었던 것이나 고향 황려(여주)에 조상 전래의 가전(家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이규보는 막 개경으로 진출해 조금씩 기반을 형성해 가던 신흥 세력의 일원이었다.

스물 세 살 때 예부시(禮部試)에서 낮은 등수로 뽑힌 것이 못마땅해 사양하려고 했다가 부친에게 크게 꾸중을 당한 일화도 이 같은 집안의 성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이규보에게 문벌귀족에 대한 적대의식, 나아가 강한 현실지향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녔던 이인로와 이규보의 충돌,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 귀족과 신흥사대부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답습넘어 새로운 뜻을 표현 현실지향적 '新意'를 중시 신흥세력의 자신감 보여

용사와 신의_두 시대의 충돌

이들의 라이벌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이 문학창작 방법론이다. 최자(崔滋)는 ‘보한집(補閑集)’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인로는 “나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황정견, 소식 두 사람의 문집을 읽은 뒤에 말이 굳세고 운이 맑은 소리를 내게 되었으며 시 짓는 지혜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규보는 “나는 옛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신의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이 들어간 문이 다르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문으로 들어가 다른 문으로 나왔다는 것이 최자의 생각이었다. 옛사람의 문장과 뜻을 읽고 배우는 것은 같지만 이인로는 옛사람의 문장과 문체를 갈고 닦아 자신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태를 지향했고, 이규보는 답습을 넘어 생경하더라도 새로운 뜻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이 바로 ‘용사(用事)’와 ‘신의(新意)’라는 다른 문이다.

본래 한문학은 정해진 틀이 있는 규범적 문학이기 때문에 용사 없이는 시를 창작할 수 없다. 하지만 용사만으로 창작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규범적 한시에서나 자유로운 현대시에서나 새로운 뜻의 표현, 새로운 의미의 발견은 시의 당연한 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로가 용사만이 아니라 신의를 말했고, 이규보가 신의만이 아니라 용사를 언급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인로가 용사를 강조하고 이규보가 신의를 중시한 차이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들어간 문이 아니라 나온 문이고, 나온 문의 차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위치나 세계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규보가 친구 전이지(全履之)에게 보낸 답장에서 “소동파의 시를 읽고 좋아해서 해마다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들이 모두 올해에 또 서른 명의 동파가 나왔다”고 떠든다고 했듯 당대의 주류 시풍은 소동파 따라가기였다. 이인로 역시 ‘보한집’에서 “문을 닫아걸고 깊이 틀어 박혀 황정견ㆍ소동파를 읽은 후에야 말이 힘차고 운이 또랑또랑해져 시를 짓는 삼매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소동파 본받기를 일삼고, 또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당대의 시풍이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이규보는 시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인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말을 꾸미는 일에만 공을 들인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규보는 용사에 대해 글 도둑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과거에 묶인 이인로, 내달리는 이규보

용사와 신의, 두 창작방법론은 적어도 이들의 시대에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에게 그것은 그들이 속한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관직을 위해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 귀족 이인로가 보수적 용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면 현실을 긍정하면서 자신 있게 내달리던 신흥 사대부 이규보는 신의라는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라이벌의 대결은 어쩌면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는 한 판이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밀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구세대가 새로운 현실에 대안을 제출하지 못할 때 패배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두 중세 지식인을 부딪치게 했던 용사와 신의에 대한 우열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대에 있어 우열은 분명했다. 이인로와 그의 시대가 이규보와 그의 시대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이인로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인로(李仁老)

1152년에 나서 12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에서 인종까지 7대 80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던 경원(인주) 이씨의 후예이다.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칼날을 피했다. 5년 후 환속하여 경대승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명종 10년(1180년)에 장원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지만 구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죽림고회를 결성해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했다.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 문집이 여럿 있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아들 세황이 엮은 우리나라 첫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뿐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년에 나서 1241년에 별세했다. 막 서울로 진출하기 시작한 중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동(奇童)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별명이 말하듯 두주불사,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또 침입한 몽골군을 진정표(陳情表)로 물리칠 정도의 문장가였다.

젊어서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명종 20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간 후 최충헌의 환심을 사서 출세길에 오르면서 현실 비판이 약해진다. 백운소설(白雲小說), 동명왕편(東明王篇) 등 그의 작품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모두 정리돼 있다.

/조현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격렬한 당쟁 피내음속 완성된 시시계
松江에겐 호방함이, 孤山엔 섬세함이…
<4> 정철 vs 윤선도 - 조선시대 강호 미학의 두 거봉

정철과 윤선도는 강호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우리말로 직조해 낸 조선 조 최고의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품에는 각자의 뚜렷한 개성적 미학이 내재해 있지만, 그 노래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차이점 못지않은 유사점도 존재한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나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청소년기에 전라도로 이주해 호남 시단의 감각적이고 풍류 넘치는 시적 전통을 체득했다.
그러나 이들 시학의 가장 큰 공통점은 다소 의외의 지점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섬세한 서정과 주옥 같은 언어가 실은 16세 말~17세기 중엽의 격렬한 당쟁의 피내음 속에서 완성됐다는 아이러니컬한 창작 정황이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은 시적 감수성이 탁월한 천재적 시인인 한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국량(局量)을 지닌 경세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당 위의 사나운 범, 정철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통해 정철이 그렇게도 애틋하게 그리워했던 선조 임금은 그의 강직성과 충성, 절개를 높이 평가해 ‘이른바 봉황의 대열에 드는 한 마리 수리요, 전당 위의 사나운 범’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맹금ㆍ맹수의 이미지는 통상 비타협과 독선의 행동 방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정철의 대쪽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있다. 27세에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한 정철은 사헌부지평에 임명돼 명종의 사촌형인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탈취하려고 처남을 살해한 사건을 맡았다. 친인척 관련 사건이어서 관대히 처분하라는 명종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지만 그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 경양군을 기어이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철의 처신은 강직하다는 평과 동시에 편벽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정철의 40ㆍ50대 시절은 동서분당을 거쳐 극심한 권력투쟁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 또한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이전투구의 한복판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동서대립의 극렬한 쟁투를 제유(提喩)적으로 보여주는 시 한 편을 보자.

‘푸른 버들 북문에 말굽소리 요란한데(綠楊官北馬蹄驕)/ 객의 방엔 사람 없어 고요와 짝을 하네(客枕無人伴寂寥)/ 두어 개의 긴 수염을 그대 뽑아 가니(數箇長髥君拉去)/ 노부의 풍채 문득 쓸쓸하여라(老夫風采便蕭條)’_‘운을 따서 지어 이발에게 주다(次贈李潑)’

당시 다수당이던 소장파의 동인(東人) 이발(李潑)이 취중에 농을 하며 서인의 수장인 정철의 긴 수염을 뽑아 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희화화한 시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사람 없는 방으로 대비되는 수적 열세의 불리한 상황이 암시되고, 어처구니 없는 사건 뒤의 쓸쓸한 심사가 배어나는 작품이다. 훗날 정철이 위관을 맡아 사건을 처리한 기축옥사(己丑獄事ㆍ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서는 1,000여 명의 동인 인사가 숙청됐는데 여기에 이발이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4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 정철은 당쟁으로 수 차례 진퇴를 거듭하였는데 바로 이때 내려가 있던 경기도 고양과 전라도 창평에서 국문시가의 명편들이 쏟아졌다. 네 편의 가사를 포함해 강호적 삶을 지향한 대다수의 시조 작품들이 이때 창작된 것이다.

죽을지언정 말하리라, 윤선도

당파적 입장에서 윤선도 가문은 정철의 집안과 대립했다. 윤선도 집안은 호남에서 몇 안 되는 동인 가문이었으며, 정철이 처리한 정여립 모반사건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정개청 옥사 사건에 연루돼 윤선도의 조부 윤의중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동인은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뉜다. 정철보다 두 세대 뒤에 태어난 윤선도는 붕당기의 정치 권력 역학 관계에서 열세에 있었던 남인이었다.

거침없는 직언과 강직한 처세라면 윤선도 또한 정철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관직에 발을 들이기도 전인 30세에 그는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대북파 수장 이이첨의 국정 농단과 이를 묵인한 유희분, 박승종의 죄상을 신랄하게 비판해 7년 유배 생활을 겪었다. 이런 중에 ‘견회요’(遣懷謠ㆍ32세에 유배지인 함경도 경원에서 지은 시조)와 같은 빼어난 작품을 창작했다.

42세에 문과 별시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師傅)가 되고, 47세에 증광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에 오르는 등 앞길이 트이기도 했지만, 인조의 신임을 시기한 재상 강석기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낙향하고 말았다.

‘환희원 안에도 환희는 없으니(歡喜院中歡喜無)/ 강남 가는 나그네 긴 탄식 일어나네(江南歸客興長?)/ 경륜을 펴지도 못한 채 여기서 병드니(經綸未展病於此)/ 수많은 창생들 어느 날에나 소생시키리(萬億蒼生何日蘇)’_‘환희원 벽 위의 시에서 운을 따서 짓다(次歡喜院壁上韻)’

귀향 도중에 지은 이 시에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이상을 펼치지 못한 채 낙향해야 하는 쓸쓸한 심회가 담겨 있다. 치열한 정쟁의 붕당기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그가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의 문예 창작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은 50세에 발발한 병자호란이다. 향족과 가솔을 이끌고 강화도로 달려갔지만, 강화도는 이미 함락됐고 인조는 난리를 피해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만 전해 들은 그는 제주도 은거를 결심한다. 제주도로 가던 중 발견한 보길도의 부용동, 다시 영덕 유배에서 풀려난 뒤 발견한 해남의 금쇄동과 수정동 등은 심미성의 절정에 이른 강호미학의 산실이 되었다.

이후로도 윤선도는 현실정치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며 진퇴를 거듭했다. 74세의 노년에도 복제(服制)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가 삼수에 위리안치(圍籬安置ㆍ중죄인을 격리해서 가둠)되기도 했다. 생애 가운데 도합 20여 년에 이르는 신산한 유배 생활과 그에 상응하는 기간의 은거생활이 강호의 체험적 서정을 엮어낼 수 있는 터전이었음은 두 말 할 여지가 없다.

호방한 상상력과 심미적 세계 인식

시조보다 가사에서 더욱 빼어난 성취를 보인 정철의 시세계는 웅혼하고 호방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정철은 무엇보다 역동적인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 능해 작품 전체에 생동감이 넘친다. ‘관동별곡’의 망양정 장면을 보자. ‘천근(天根)을 못내보와 망양정(望洋亭)에 올른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 노한 고래 뉘라서 놀래관대/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長天)에 백설(白雪)은 무슨일고?’

바다 밖의 우주에 관한 사유, 파도 치는 장면의 장엄한 묘사를 통해 놀랍도록 웅장한 화폭을 펼쳐내고 있다. 정철의 낭만적 상상력은 자주 현실계를 초월해 신선이 노니는 신비로운 도선(道仙)의 세계를 배회하기도 하고, 취흥에 젖은 질탕한 풍류로 달리기도 한다.

이에 비해 윤선도의 시세계는 지극히 정적이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정치적 행적과 유배생활을 관류했던 꺾일 수 없는 기개가 그토록 매혹적인 시정(詩情)과 도대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었는지가 사람들의 오랜 관심사이다. ‘고운 볕이 쬐엿는데 물결이 기름같다/ 이어라 이어라/ 그믈을 주어두랴 낚시를 놓아둘까/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탁영가의 흥(興)이 나니 고기도 잊을로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봄 노래 가운데 하나에서 자연세계가 빚어낸 우연하고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놀랍도록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내고 있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사하는 바다 물결, 그 황홀한 세계에 취해서 고기잡이마저 잊어버린 서정적 자아의 드높은 흥취를 시화(詩化)한 솜씨는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 것이다.


정철(鄭澈)

西人의 영수… 강직함뒤엔 독선이
역동적 자연 묘사 능해 '생동감'

1536년(중종 31년)에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나 1593년(선조 26년) 강화도 송정촌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안이 왕실과 혼인해 행복한 유년을 보내다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집안이 풍비박산한 후 담양의 창평으로 옮겼다. 송순, 김인후 등 호남의 학자ㆍ문인을 스승으로 삼아 문예를 익혔으며, 훗날 선조의 신임을 받아 서인의 영수로 성장했다. 기축옥사에서 동인들을 가혹하게 처리한 일 때문에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송강집' '송강가사' 등 문집과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윤선도(尹善道)


南人출신… 현실정치에 진퇴 거듭
정적인 아름다움을 놀랍도록 포착

1587년(선조 20년)에 서울 연화방에서 출생해 1671년(현종 12년)에 보길도 부용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8세 때 백부에게 입양돼 해남에서 생활했다. 경사(經史)뿐만 아니라 의약, 복술, 음양, 예학 등 다방면에 밝았고 봉림ㆍ인평대군의 스승을 맡기도 했다. 왕권강화론을 펼친 남인의 일원이었으며 강직한 상소로 숱한 유배생활을 겪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년)에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돼 이조판서가 추증됐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비극적 죽음도 닮은 동갑내기
[한국고전문학사 라이벌] <5> 허균 vs 권필 - 체제의 아웃사이더

'홍길동전' 통해 정면으로 체제공격한 허균에 비해
권필은 남녀의 애정다룬 '주생전'통해 우회적 지향

1612년 4월7일 함경도 경원 유배길에 오르려던 권필(權?)이 세상을 떴다. 국가 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외척 유희분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는 혐의로 광해군의 친국(親鞫ㆍ임금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아래 혹독한 형벌을 받은 직후였다. 들것에 실려 동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청해 마셨는데 장독이 올라 이튿날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6년 여의 세월이 흐른 1618년 8월26일, 서울의 서쪽 저자거리에서 허균(許筠)이 처형됐다. 본인이 승복하지 않아 마지막 판결문도 없었지만 역모죄로 다스려진 까닭에 그의 머리는 막대에 매달려 거리에 내걸렸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고, 절친한 벗이었으며,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비극적 최후가 말해 주듯 횡포한 봉건 지배체제로부터 가혹하게 제거됐다는 점도 비슷했다. 행적과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은 누구보다 체제의 아웃사이더 또는 저항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천 개의 얼굴과 반역의 삶, 허균

‘예교(禮敎)에 어찌 묶이고 놓임을 당하겠는가(禮敎寧拘放)/ 부침(浮沈)을 다만 정(情)에 맡길 뿐이라네(浮沈只任情)/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君須用君法)/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吾自達吾生)’ _‘벼슬에서 파직됐다는 소리를 듣고(聞罷官作)’

관청에서 부처를 받들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면된 허균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시이다. 그의 뜻은 예교에 속박되지 않고 정의 이끎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교란 무엇인가? 삼강오륜으로 규범이 된 조선 제일의 윤리도덕이며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던 불변의 당위이다.

하지만 허균은 통념적 도덕률에 굴종하기보다는 본성과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방식의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이때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됐지만 그는 불교에 심취했고, 도교에 빠져드는가 하면, 양명학 좌파를 넘나들었고, 서학을 수입했다.

양천 허씨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나 문명을 날리던 허균이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20대 전반기에 겪은 가족사의 비극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아껴주던 형님 허봉의 정치적 좌절과 죽음, 누이 허난설헌의 요절, 임진왜란의 피란길에서 당한 아내와 아들의 죽음 등 큰 충격을 연속으로 겪었다.

하지만 이미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한 데서 알 수 있듯 허균은 당시 조선시대 체제의 모순에 더 근원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적서차별의 신분 모순과 백성들의 황폐한 삶, 피비린내 나는 당쟁 등에 대한 허균의 비판적 인식은 그의 수많은 시 작품과 ‘호민론’ ‘유재론’과 같은 산문, ‘홍길동전’ 같은 소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표준이나 중심을 거부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자유와 개성의 향기가 뚜렷하다. 허균은 서얼이나 천민 등이 지닌 재능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했으며 그만큼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이들과의 사귐도 도타워서 넉넉지 않은 월급을 쪼개서 생계를 몸소 돕기도 했다.

허균의 혁명적 사고는 이런 휴머니즘의 실천과정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행동은 종종 예측하기 어렵고 괴상하기까지 한데 특히 만년의 정치적 선택이 그러하다. 광해뗌?거물 이이첨과 제휴하여 대북파(大北派ㆍ선조때 북인 중에서 홍여순 등이 남이공 등의 소북에 대립해 이룬 당파)에 참여하고 폐모론(廢母論ㆍ선조의 왕비이며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하자는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등의 주장)을 주창한 데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며, 역모 사건에 대해서도 시빗거리가 남아 있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허균은 역적이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참으로 다양했다. 체제의 이편에서는 ‘천지간의 한 괴물’로, ‘성품이 올빼미 같고 행실은 개와 돼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그가 중세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뚜렷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닌 천의 얼굴의 소유자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비판적 지성과 풍자의 정신, 권필

‘궁궐 버들 푸르고 꽃잎 어지러이 날리는데(宮柳靑靑花亂飛)/ 성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떠네(滿城冠蓋媚春暉)/ 조정에선 입 모아 승평의 즐거움 하례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포의(벼슬없는 선비)의 입에서 위태로운 말이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_‘임숙영의 삭과 소식을 듣고(聞任茂叔削科)’

1611년에 재야 선비 임숙영이 전시(殿試ㆍ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왕실 외척의 교만함과 왕비의 정사 관여를 문제 삼는 글을 지었다. 이를 본 광해군이 대로하여 방(榜)에서 그의 이름을 빼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권필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즉시 그 일을 풍자하여 지은 시가 바로 이 ‘궁류시(宮柳詩)’이다.

그리고 이 시 한 편 때문에 권필은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다. ‘궁궐 버들’은 유희분 등의 외척 유씨, ‘봄볕’은 광해군, ‘포의’는 책문을 쓴 임숙영에 대응된다. 이렇게 보면 궁정의 봄 풍경에 빗댄 권력과 그 주변 아첨꾼들의 행태가 우스꽝스럽게 드러난다.

권필의 사상은 허균처럼 체제 전복적이거나 일탈적인 정도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중년에 그는 강화도에 머물면서 성리학의 연원과 도통을 살핀 저술을 남기기도 하고, 성리학적 수양에 더욱 침잠하기도 했다. 그의 사유는 때때로 탈주를 꿈꾸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체제 수호적이다. 그러나 항상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는 청소년기의 독특한 가정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의 부친 권벽은 여러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는 등 오랫동안 사관을 지냈는데 절친한 벗이 직무와 관련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하는 중에도 평생 남과의 교유를 끊고 폐쇄적 삶을 살았다. 세상에 말없이 항의하며 침울하게 살아간 아버지, 불의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형들 아래 권필은 강인한 비판적 지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존경했던 스승 정철이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이산해 등 동인 세력의 모략으로 귀양길에 오르자 권필은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입신출세의 길을 아주 접어버린다. 이후 방랑의 시절을 보내며 전란으로 유린된 강토와 백성들의 찢긴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지배계급에 풍자의 비수를 겨누는 시적 태도를 유지했다.

탐욕스러운 세도가의 신도비(神道碑ㆍ종이품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를 세우기 위해 파헤쳐지는 돌과 그것을 나르는 민중의 노역을 묘사한 ‘충주석(忠州石)’, 당쟁을 뼈다귀를 놓고 싸우는 개들에 빗댄 ‘투구행(鬪狗行)’ 등은 사회 모순을 포착, 현실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빼어난 작품들이다.

중세적 삶의 질곡과 낭만적 해결의 두 방식

허균과 권필은 당대의 빼어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사에서도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의 대표 소설은 ‘홍길동전’이며, 권필의 대표작은 ‘주생전(周生傳)’이다. 중세적 삶의 질곡과 그 해결을 향한 낭만적 상상력을 담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주제와 형상화 방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홍길동전’은 16세기 연산조에 실재했던 농민저항 지도자 홍길동을 소재로 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의 실현이라는 중심주제를 담고,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며 신분차별을 극복하는 민중적 영웅상을 낭만적으로 구현했다. 율도국의 건설, 즉 유토피아적 이상사회 건설로 끝나는 이 소설은 당대 모순을 해결하는 주된 동력으로 민중의 저항적 에네르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주생전’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전기소설의 형식에 담은 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만난 명 나라 군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주생, 배도, 선화라는 세 남녀가 벌이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애정 갈등과 죽음, 그리고 조선 출병으로 인한 기약 없는 이별 등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적 삶의 과정을 낭만적 상상력으로 펼쳐낸 것이다.

허균이 신분갈등이라는 사회적 주제를 가지고 정공법으로 더 나은 삶을 설계했다면, 권필은 애정갈등이라는 남녀간의 문제를 통해 다분히 우회적으로 현실 삶의 불안을 떨쳐내려 했다. 주제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는 속박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 있다.


허균  

1569년(선조 2년)에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1618년(광해 10년)에 역모죄로 서울 서쪽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됐다.

손곡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26세 이후 벼슬길에 들었으나 불도를 숭상한다는 등의 이유로 자주 탄핵을 받았다.

불교, 도교, 양명학 등에도 밝았고 서얼ㆍ천민과도 교류, 현실비판적인 시문과 체제 저항적인 산문 및 소설을 남겼다.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 시문집 '성소부부고' 등이 전한다.


권필

1569년(선조 2년)에 서울 마포의 현석촌에서 태어나 1612년(광해 4년)에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정철의 문인이며 허균과도 절친했다. 신묘당사(辛卯黨事ㆍ1591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벌어진 동인의 서인 탄압)로 정철이 유배되는 것을 보고 정계의 뜻을 접고 다시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훗날 벼슬 없는 선비로 원접행차에 시나 글을 짓는 제술관(製述官)으로 발탁돼 이름을 떨쳤으나, 평생 벼슬하지 않고 풍자적 저항시인으로 살았다. '주생전' 등의 소설과 '석주집(石洲集)'이 남아 있다.

/이형대ㆍ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예술에 눈떠가는 市井…
탈속과 풍류로 거닐다
<6> 김천택 vs 김수장 - 18세기 閭巷 예술인의 두 초상
둘 다 중인 출신… 전문 시조歌客·작가로 歌團 이끌어

18세기 서울 거리에는 자못 예술의 향기가 넘실거린다. 평민들도 그 예술을 향유할 수 있
을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것이 물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7세기부터 진행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도시 유흥공간의 생성이 큰 몫을 했다.

신분제가 동요하고 국가로부터 독립한 예인(藝人)이 늘면서 예술이 상품화하고, 예술 수요가 증대한 것이 한 요인이었다. 말하자면 국가나 일부 사대부층이 독점해 온 상층 예술이 바야흐로 시정(市井)의 세계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변화한 예술 환경의 중심에는 중간 계층이 있었다. 조선 후기 예술의 창작과 수요에서 이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천택(金天澤)과 김수장(金壽長)은 중인 출신으로 18세기 시가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예인들이다.

그들은 노래로 한 나라에 이름을 떨친 전문 가객이자, 100수 전후의 시조 작품을 창작한 작가였으며, 가단(歌團)을 조직한 음악 그룹의 활동가였다. 또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시조문학 작품을 소중히 갈무리해 노래책으로 엮어낸 편찬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가 아직 미미했던 탓에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이 드물어 생몰 연대조차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서검(書劍)을 못 이루고 산림(山林)의 주인 되어-김천택


"白鷗야~ 이제는 너를 좇아 놀리라"
신분 한계에 울며 현실 너머를 꿈꿔

김천택의 신분을 양반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중인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해동가요’에는 숙종 때의 포교라고 기록돼 있고, 1728년 그 자신이 편찬한 노래집 ‘청구영언’에서는 스스로를 사대부와 구분되는 ‘여항육인(閭巷六人)’에 넣어 다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복소라는 사람이 ‘김수장과 남파 김천택이 경정산의 고사와 같이 서로 마주하니 두 옹(翁)은 그 당시 노래에 통달한 자들이었다’고 언급한 사실이나 역대 가창자(歌唱者)의 이름을 연령순으로 기록한 ‘고금창가제씨(古今唱歌諸氏)’라는 명단에 김천택이 김수장의 바로 앞에 기재됐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김천택이 노래로는 김수장과 쌍벽을 이루었고, 나이는 1690년(숙종 16년)생인 김수장보다 몇 살 더 많았으리라고 추정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장검(長劍)을 빼어 들고 다시 앉아 헤아리니/ 흉중(胸中)의 먹은 뜻이 한단보(邯鄲步) 되야괴야/ 두어라 이 또한 명(命)이어니 일러 무엇하리오’(진본 청구영언 265번 작품)

시에서 장검은 흔히 남자가 품은 웅대한 포부나 이상을 상징한다. 작자는 서슬 푸르던 자신의 꿈이 한단보(邯鄲步)가 돼버렸다고 탄식한다. 연(燕) 나라의 한 젊은이가 조(趙)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 사람들의 맵시 있는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자신의 원래 걸음걸이마저 잊어 엉금엉금 기어왔다는 고사이다.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흉내내다가는 모두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작자가 운명의 탓으로 돌리며 끝내 꿈을 접고 체념하는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김천택의 양반 지향 의식과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따른 좌절을 읽는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왕족의 후예였던 이정섭은 김천택에 대해 ‘사람됨이 밝고 유식하여 능히 시경 300편을 외우니 한갓 노래만 하는 자는 아니다’고 평가했고, 정윤경 또한 그가 ‘성률(聲律)에 능하고 문예를 닦았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보아 나름대括?학식과 지성을 갖추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천택의 시조 작품에는 강호의 한가로운 삶을 노래한 작품이 적지 않다. ‘백구(白鷗)야 놀라지 마라 너 잡을 나 아니로다/ 성상(聖上)이 버리시니 갈 곳 없어 예 왔노라/ 이제는 찾을 이 없으니 너를 좇아 놀리라’와 같은 노래가 그 예이다. 조선 전기 양반사대부의 강호가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깨끗한 자연에서 갈매기를 벗삼아 노니는 삶의 지향을 노래한 이 작품의 해석도 논란거리다. 그의 강호 지향을 양반 취향의 모방으로 보는 견해와 신분 갈등으로 인한 도피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양립하고 있다.

김천택의 양반 취향과 관련한 논란의 책임은 누구보다 김천택 자신에게 있다. 중간 계층의 예인으로서 양반사대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현했다면 이와 같은 시비는 없었을 것이었다.

노래같이 좋은 것을 벗님네야 아시는가-김수장

"눈썹은 그린듯~ 입은 丹砂찍은듯"
도시의 유흥에 취한 호방한 삶 노래

숙종 때 서리를 지낸 김수장은 다소 경박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노래 같이 좋고 좋은 것을 벗님네야 아시는가/ 봄 버들 여름 청풍 가을 달 겨울 설경에 필운대 소격대 탕춘대와 남북 한강 절경처에 술 안주 난만한데 좋은 벗 갖은 악기 아름다운 어떤 계집 제일 명창들이 차례로 벌여 앉아 엇걸어 불러 내니 중대엽 삭대엽은 요순(堯舜) 우탕(禹湯) 문무(文武) 같고 후정화 낙시조는 한당송이 되었는데 소용 편락은 전국(戰國)이 되어서 창칼 쓰는 솜씨를 각자 떨치어 관현성(管絃聲)에 어리었다. 공명도 부귀도 나 몰라라/ 남아(男兒)의 호기(豪氣)를 나는 좋아 하노라.’(주씨본 해동가요 548번 작품)

사시사철 좋은 날에 서울 경치 빼어난 곳에서 술 마시고 벗들과 악공, 기녀, 명창들이 가곡 한바탕을 엮어 부르며 솜씨를 다투는 질탕한 풍류의 현장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처럼 김수장의 노래는 유락(遊樂) 지향적이며 득의의 정감이 넘쳐 난다. 장복소는 김수장을 일러 ‘그는 진실로 이른 바 티끌세상의 호걸 군자이며, 김군은 대개 노래의 법통을 얻어 뜻과 기개가 속되지 않다’고 평가했다. 도시 유흥 공간에서 자신의 기예를 발휘하며 만족스럽게 살아간 김수장을 온당하게 평가한 것이다.

그는 가난하여 자주 밥그릇이 비었지만 만년까지 가악 활동을 주도했다. 1755년에는 ‘해동가요’를 편찬했고 이후 몇 번에 걸쳐 수정ㆍ증보했다. 1760년에는 서울 화개동에 노가재를 짓고 노가재 가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김천택이 가슴에 품은 이상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번뇌와 갈등의 세월을 보냈다면, 김수장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고 중인 가객으로서 예인의 삶에 자긍심마저 느꼈다.

탈속의 정취와 세속의 풍류 사이에서

김천택과 김수장의 관계와 관련해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사람이 팽팽한 라이벌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다. 근거는 첫째, 김수장은 자신이 편찬한 ‘해동가요’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료 가객이라 하더라도 ‘군(君)’자를 붙여 친밀감을 표시했는데 김천택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둘째, ‘청구영언’에서 김천택이 스스로 뽑은 30수의 작품 가운데 김수장은 절반 이상을 버리고 14수만을 인정했던 점, 김수장에 다른 가객과의 교분을 표 나게 강조한 것과 달리 김천택과의 우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 등이다. 작품 세계는 물론 기질조차 현저하게 달랐던 두 사람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서로를 폄하하면서 은근한 질시를 보내었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에 대한 이들의 관점도 크게 다르다. 김천택은 김성기(金聖器ㆍ조선 후기 가인)의 작품에 대해 ‘표표하여 세속의 일에 구애되지 않는 정취가 있다’고 평가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노래가 지향하는 목표점이기도 했다. ‘오수(午睡)를 늦게 깨어 취한 눈 열어 보니/ 밤비에 갓 핀 꽃이 그윽한 향 보내도다/ 아마도 산가(山家)에 맑은 맛이 이 좋은가 하노라’와 같은 작품을 보면 게으른 잠과 취한 눈에서는 예교를 뛰어넘은 은자의 탈속함이 엿보이고 매화 향기 그윽한 산가의 모습에서는 맑고 깨끗한 기품이 느껴진다.

김수장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평가할 때 ‘호탕(豪宕)’이나 ‘호방(豪放)’ 등의 용어를 썼다. 자신의 풍류가 추구하는 길이기도 했다. 김수장의 작품에는 농염한 도회지의 미학이 스며 있다. ‘눈썹은 그린 듯하고 입은 단사(丹砂)로 찍은 듯하다/ 날 보고 웃는 양은 햇빛이 비치는 데 이슬 맺힌 벽련화(碧蓮花)로다/ 네 부모 너 낳아 내올 때 나만 사랑하게 하도다’라는 작품을 보자. 아마도 어느 기녀에게 보내는 희롱의 노래인 듯한데 연꽃처럼 아리따운 그녀의 자태를 햇빛 아래 금세 스러질 이슬의 운명에 빗대어 절묘한 여운을 남겼다.


탈속의 정취 김천택

조선 숙종조와 영조조에 활약한 중인 가객이다.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수장보다 약간 연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노래를 잘하는 가객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문예도 겸비했다고 한다.

1728년에 당시까지 전해지던 시조 작품을 모아 곡목별, 작가별, 주제별로 안배한 최초의 가집 '청구영언'을 편찬했다. 그 자신 또한 80수 정도의 평시조 작품을 남겼다


세속의 풍류 김수장  

1690년(숙종 16년)년에 태어나 최소한 80세인 1769년까지는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병조 서리를 역임한 일이 있다.

김천택과 쌍벽을 이루는 가객으로 서울 화개동에 노가재를 짓고 노가재 가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1755년 조선조 3대 가집 중의 하나인 '해동가요'를 편찬했고, 이후 여러 차례 개정해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사설시조를 포함, 대략 130수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문체반정때 패관잡서의 배후-척결 최선봉
<7> 박지원 vs 정약용 - 평행선을 달렸던 두 지성


1792년 10월19일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명청소품(明淸小品) 및 패관잡서(稗官雜書)에 대해 강경한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와 더불어 과거를 포함해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 검열이 실시된다.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아 고문(古文)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을 놓고 국왕 정조와 노론계 문인들이 첨예하게 대립한 이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文體反正ㆍ문체를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건의 정점에서 정조는 문풍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를 지목했다. 연암은 당시 개성 근처의 골짜기인 연암협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때 혈기방장한 20대 후반의 관료였다. 경력을 쌓고 있던 다산은 이 즈음 패관잡서를 천지간에 비할 바 없는 재앙이라 규정하고, 이 책자를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 오는 자는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책문을 지어 올렸다.

연암협에 은거하면서 배후조종자로 낙인 찍힌 연암과 최선봉에서 발본색원을 외친 다산. 한 사람이 부귀도 권세도 없는 50대 문장가였다면 또 한 사람은 생의 절정기를 맞은 젊은 관료였다. 18세기 지성사의 빛나는 두 별, 연암과 다산의 팽팽한 대립과 긴장을 그들의 생애와 글쓰기 전반에 걸쳐 두루 확인할 수 있다.

유쾌한 노마드와 비운의 정착민

연암은 당시 주류 집권층인 노론 경화사족(京華士族ㆍ한양이나 그 인근에서 대대로 살아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가문의 촉망 받는 천재였지만 일찌감치 입신양명의 길을 접었다. 신분과 당파의 경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연대를 실천했고, 백탑(탑골 공원) 근처에서 서유구, 이덕무, 박제가 등 소위 ‘연암그룹’ 문인들과 어울려 북벌론에 맞선 ‘북학(北學ㆍ청나라 문명 배우기)’ 패러다임을 창안했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단을 따라 중국여행에 참가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남겼다. 잠시 벼슬살이를 한 적도 있지만, 곧 물러나 조용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생애는 밋밋하기 짝이 없다. 이름깨나 날리는 사대부들이 겪은 유배나 정치 스캔들도, 시대와 불화한 천재의 고독한 그림자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삶과 글을 관통하는 건 경쾌한 유머와 패러독스다. 말하자면 그는 권력과 직접 맞서기보다 그 외부에서 새로운 경계를 열어 젖힌 유쾌한 노마드(유목민)였던 것이다.

다산은 그와 정확히 대칭될 만한 인물이다. 권력에서 배제된 남인 출신이었지만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스물 두 살에 과거에 합격했고, 스물 세 살에 ‘중용’에 대한 답변을 올린 이후 정조가 관료들을 상대로 시험을 치를 때마다 계속 수석을 차지했다. 연암의 생애가 아련한 운무에 휩싸인 것이라면, 다산의 생애는 상승과 하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 눈부신 도약의 시절을 맞은 그의 삶은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1801년 순조 즉위 초 천주교를 믿었던 그의 가문은 신유박해로 풍비박산 된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그는 이후 장기와 강진에서 장장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가혹하게 추방당했어도 그는 한번도 유교적 이상사회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꽃핀 다산학의 엄청난 양과 질은 그 꿈에 대한 열렬한 표출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원한 제국’ 내부의 정착민이었다.

전위적 스타일리스트 연암 박지원

다산을 대표하는 시는 ‘생식기를 자른 것을 슬퍼하다’는 뜻의 ‘애절양(哀絶陽)’이다. 강진 유배 시절 노전(蘆田)에 사는 한 백성이 낳은 지 사흘 된 아이가 군보(軍保ㆍ병역을 면제 받은 사람에게 병역 나간 집안의 농사일을 돕게 한 것)에 등록되자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베어버렸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식기를 가지고 관가로 가서 울면서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 섰다. 그 사연을 그대로 옮긴 것이 이 시다.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그 내용을 직설로 옮긴 다산의 ‘뚝심’도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1980년대 문학 비평 공간에서 다산의 시가 각광을 받았다.

거기에 비하면 연암은 전위적 스타일리스트에 속한다. 의미를 몇 겹으로 둘러치거나 다방면으로 분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반전’을 보자. 정선 부자가 가난한 양반에게 돈을 주고 ‘양반증’을 산다. 양반이란 무엇인가? 그걸 해명하는 게 첫 번째 문서다.

부자가 “양반이 겨우 요것뿐이란 말씀이우”라고 투덜거리자, 두 번째 문서가 작성된다. 증서를 반쯤 써갈 때, 부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빼면서 “아이구 그만두시유. 참 맹랑합니다그려. 당신네들이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유” 하고 머리채를 휘휘 흔들면서 달아나 버렸다.

결국 이 작품의 골격은 두 개의 문서가 전부이다. 그것을 통해 양반의 위선과 무위도식, 패덕 등을 간결하게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해학과 풍자, 아이러니와 역설 등 다양한 수사적 전략이 담겨 있다. 저자의 의도를 한눈에 간파하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연암은 표현 형식의 전복에 몰두한 반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연암이 보기에 당대의 지배적 문체인 고문은 마치 부호체계처럼 경직되어 생동하는 흐름을 질식하는 억압기제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삼라만상에 흘러 넘치는 ‘생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문의 전범적 지위를 와해해야 했다. 그러한 욕망이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ㆍ옛 사상이나 문체에서 벗어나 현실의 다양한 면모와 각양각색의 인물군상을 생동감 있게 담은 새로운 문체)와 접속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연암의 문체 실험이 소품체로만 향한 건 결코 아니다. ‘열하일기’가 잘 보여주듯 그는 고문과 소품체, 소설 등 다양한 문체를 종횡했다. 연암의 특징은 무엇보다 유연한 ‘횡단성’ 자체에 있다. 대상과 소재에 따라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이런 능동성이야말로 ‘표현 기계’로서 연암의 우뚝한 경지이다.

지배담론에 맞선 다산의 '혁명적 의미화'

다산은 그와 달리 지배적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거대한 의미체계를 새롭게 구축했다. 그에게 진정한 시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세상을 경륜하려는 욕구가 충일한 상태에서 문득 자연의 변화를 마주쳤을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닌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그는 문장이 담아야 할 내용을 ‘수기(修己)’에서 ‘치인(治人)’, 곧 사회적 실천에 관한 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는 시의 도(道)를 ‘도덕적 자기완성의 내면적 경지’가 아니라 ‘외부로 뻗어나가 실제 성취에 도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瀏린?해서 도를 선험적 원리의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범주로 전환한 것이다.

그의 맥락에서는 ‘실천해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이 불타는 열정이 그를 요ㆍ순, 주공, 공자가 다스리던 ‘선진고경(先秦古經)’의 세계로 인도했다. 즉, 다산은 경학(經學)을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다산이 패사소품체를 격렬히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가 보기에 소품문들은 “음탕한 곳에 마음을 두고 비분한 곳에 눈을 돌려 혼을 녹이고 애간장을 끊는 말”들일 뿐이다. 따라서 그런 글들은 제거해야 마땅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세가인 다산이 엄청난 양의 시를 쓴 데 비해 정작 문장가인 연암은 시의 격률이 주는 구속감을 견디지 못해 극히 적은 수의 시만 남겼다. 전자가 시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면, 후자는 시의 양식적 코드화 자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않는 평행선의 운명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하나는 동시대를 풍미한 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길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연암이 다산처럼 살 수 없듯, 다산 또한 연암의 길을 갈 수는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그들은 분명 평행선의 운명이었다.

평행선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평행선은 결코 헤어지지도 않는다. 치열하게 맞서면서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 바로 평행선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만들어내는 이 도저한 열정이 있었기에 18세기 조선의 사상사는 놀라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암 박지원
유쾌한 '주변인'…
한발짝 뒤서 통렬한 독설을 날리다

1737년 서울 서소문 밖 야동(冶洞)에서 태어났다. 명문거족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거지와 부랑자, 분뇨장수 등 거리의 떠돌이들과 교유했다.

고전소설사의 한 봉우리를 차지하는 '방경각외전'이 바로 이들에 대한 체험담이다. 홍대용, 정석치, 박제가 등과 더불어 북학에 입각한 燭恝?문명론을 모색했다.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꿈에 그리던 중국여행을 했고, 그때의 충격과 감동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 '열하일기'다. 주옥같은 묘비명과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을 다수 남겼다. 1805년 69세로 생을 마감했다.


다산 정약용
치열한 '앙가주망'…
제도에 몸을 섞어 정면으로 맞서다

1762년 경기도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39세 되던 해 정조가 승하하고, 이듬해 1801년 신유사옥으로 장기와 강진에서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수많은 농민시를 비롯해 '목민심서' '아방강역고' '논어고금주' 등을 쓰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1818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변함없이 학문적 열정을 불태우다가 1836년 75세로 운명했다.

/고미숙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문수학한 두 천재… 名利좇아 名分따라
<8> 서거정 vs 김시습 - 조선전기 사대부 문인의 두 초상
후세 평가는 김시습 節義에 손 들어줘

선조의 명을 받아 율곡 이이가 지은 ‘김시습전’에는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어느 날 서거정(徐居正)의 화려한 행차가 조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 길을 비켜서는데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강중(剛中)아, 잘 지내느냐”며 길을 가로막고 섰다. 강중은 서거정의 자(字)였다.
무례함에 놀라 보니 바로 김시습(金時習)이다. 수행하던 벼슬아치가 벌주려 하자 서거정이 “그만 두어라. 미친 사람에게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만류했다. 그리고 “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뒷날 그대 이름에 누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율곡이 말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김시습의 행색은 서거정의 화려한 행차와 대비된다. 하지만 김시습은 권세에 주눅 들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서거정이 수모를 당하고도 감히 벌주지 못했던 것은 김시습이 그만큼 정신적으로 우월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현실의 지위를 따진다면 견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김시습이 어떻게 이런 우위에 있었을까?

계유정란으로 엇갈린 두 지식인의 행로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없었다면 서거정과 김시습의 운명은 그처럼 엇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어릴 때부터 비범한 능력으로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김시습은 다섯 살 때 세종 앞에서 재주를 보여 장차 크게 쓰겠다는 약조를 받았고, 서거정은 여섯 살 때 시를 지어 중국 사신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게다가 당대 최고 문인 관료였던 이계전에게 동문수학한 처지였으니, 그들의 앞날은 보장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든 왕위 찬탈은 21세의 순수했던 젊은 선비 김시습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삼각산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소식을 접한 김시습은 삼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하다가 모든 책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승복으로 갈아입은 뒤 평생 이어진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때 서거정은 침묵했다. 조선시대 초대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외손자로 최대 문벌가의 자손이었을 뿐 아니라, 선조가 대군일 때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집현전 교리로 있던 젊은 관료 서거정은 나서지 않았다. 아니 왕위찬탈을 주도했던 한명회, 권람, 신숙주 같은 공신들의 삶을 찬양하는 글을 수없이 지어 바쳤다.

그랬으니 서거정이 세조ㆍ성종이라든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고 권력자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육조 판서를 빠짐없이 두루 거쳤을 뿐만 아니라 당대 문풍을 좌우하던 대제학의 자리를 무려 23년 동안 독점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김시습 만큼 불운한 삶을 산 지식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서거정 만큼 영화로운 삶을 산 지식인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서거정의 여유와 김시습의 번뇌

한 작가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 안팎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작가와 고통스런 삶을 견뎌야 했던 작가의 작품은 한 눈에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서거정과 김시습도 마찬가지다. 삶의 행로에서 예감할 수 있듯 서거정은 술과 시를 매우 좋아한 작가였다. 시벽(詩癖)과 주벽(酒癖)이 있다고 곳곳에서 고백했다. 현재 전하는 작품만 해도 6,000수가 넘는데, 술을 노래한 것 또한 상당수에 달한다.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세상을 살아왔는데(白髮紅塵閱世間)/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世間何樂得如閑)/ 한가로이 읊조리고 한가로이 술 마시며 또 한가로이 거닐고(閑吟閑酌仍閑步)/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사랑한다네(閑坐閑眠閑愛山)’

‘한가로운 가운데(閑中)’라는 작품이다. 짧은 7언 절구 속에 한가롭다는 뜻인 ‘한(閑)’ 자를 무려 일곱 번이나 쓰고 있다. 한시를 지을 때 같은 글자를 두 번 쓰는 것도 금기로 여기는데 일곱 번이나 썼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그만큼 한가로움을 사랑했고 실제로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가로운 삶을 살았다. 한가롭게 시를 짓고, 한가롭게 술 마시고, 얼큰하면 한가롭게 거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다가 한가롭게 앉았거나 느긋하게 낮잠을 즐겼다. 때론 정원에 가꾸어 놓은 가산(假山)의 경치를 감상하던 그런 한가로운 삶!


김시습도 그에 못지않게 시와 술을 사랑했지만 그가 그려낸 실상은 판이하다. 자신의 깊은 고뇌를 토로하고 있는 ‘번민을 서술하다(敍悶)’의 첫째 수는 이렇다.

‘마음과 세상일이 서로 어긋나니(心與事相反)/ 시를 짓지 않고서는 즐길 일이 없다네(除詩無以娛)/ 술에 취한 즐거움도 눈 깜짝할 새의 일(醉鄕如瞬息)/ 잠자는 즐거움도 다만 잠깐 사이라(睡味只須臾)./…/ 인연 없어 나라님께 몸 바칠 수도 없으니(無因獻明薦)/ 눈물 닦으며 탄식이나 하리라’

자신과 세상이 어긋나기만 해서 시로 풀어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깊은 시름이 선연하다. 술로도 잠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깊은 번뇌, 그래서 어찌할 도리 없어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바로 김시습의 자화상이다.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탐욕스러운 지배층이나 부조리한 세태를 조롱하고 풍자한 것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시 세계의 본령은 이처럼 자기 연민과 갈등을 절절하게 토로하거나 정신적 방황 속에서도 자신의 실존적 주체를 깊이 응시하는 작품들이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극도의 분노와 기행(奇行)만큼 내면세계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고독한 시인이었다.

이들이 엮어낸 서사 세계 역시 그러했다. 서거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화집(笑話集)인 ‘태평한화골계전’을 썼다. 세상의 근심 걱정을 잊기 위해 문인 관료 주변에서 떠돌아다니던 우스갯소리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거기에는 화락한 웃음이 흘러 넘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반면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집 ‘금오신화’를 남겼다. 거기서 소외돼 쓸쓸한 최후를 맞는 남자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비극적 분위기는 김시습이 보였던 세계와의 불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과 화합할 수 없었던, 그래서 평생을 비분과 방랑으로 지내야 했던, 그러다가 충청도 조그만 절간에서 고독한 생을 마감했던 것이 그였다. 그것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과 너무도 닮아있다. ‘금오신화’를 써서 석실(石室)에 감추었다는 일화는 자신이 품고 있던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만한 지기(知己)를 기다렸다는 뜻일 것이다.

죽어서 잊혀진 자, 죽어서 살아난 자

조선전기 문인은 흔히 조정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던 관각파(館閣派)와 산림에 은거해 심성을 도야하던 사림파(士林派)로 나뉜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판적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부른다. 서거정이 관각파 문인을 대표한다면 김시습은 방외인을 대표한다. 실제로 서거정이 조정에서 보인 역할은 대단했다. 개인 저술을 제외하고 국가의 요구로 편찬한 것만 해도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수백 권에 이른다. 거기에 비하면 김시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뒷사람의 평가는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서거정이 죽던 날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고 후진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고 혹평했다.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이다. 김시습은 생전에 한번도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오르지 못했지만 죽고 나서 상황이 달라진다.

그가 남긴 글을 수습해 간행해야 한다는 논의로 시작된 ‘김시습 다시 보기’는 시간이 갈수록 확산됐다. 대의명분을 중시한 사림들이 김시습의 절의(節義)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정조는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죽어서도 엇갈린 삶을 살았다. 역사는 준엄하며 그것은 올곧게 산 자의 편이다.


서거정

계유정난 찬양 현실과 타협, 부귀영화 누려… 詩속에 여유
1420년(세종 2년)에 태어나 1488년(성종 19년)에 69세의 나이로 숨졌다. 명문 가문의 일원으로서 평생 정계의 핵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여섯 임금을 섬기는 동안 육조 판서를 두루 거쳤을 뿐만 아니라 대제학(大提學)을 무려 23년간 독점했을 정도다. '사가집(四佳集)' '태평한화골계전' '필원잡기' '동인시화' 같은 개인 저술을 남겼는가 하면,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경국대전' 같은 관찬서의 편찬 작업을 주도해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김시습

왕위찬탈 소식에 평생 방랑 자기번뇌·풍자 등을 그려내
1435년(세종 17년)에 태어나 1493년(성종 24년)에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변변치 못한 무반(武班)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쫓아내는 불의를 목도한 뒤 속세를 등지고 승려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간혹 현실세계로 복귀를 희망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충청도 무량사에서 쓸쓸한 삶을 마쳤다. 유고를 모아 편찬한 '매월당집'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전한다.

/정출헌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변혁의 시대…'혁명과 수성' 다른 꿈
<9> 정도전 vs 권근 - '勇猛'과 '文雅'로 시대의 초석이 된 지성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다같이 고려의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이자 높이 오른 벼슬아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도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벼슬을 얻었는데, 권근은 제 명에 죽었고 정도전은 자신이 살해 당하였으며 집안도 멸망시켰다.” _허균 ‘정도전권근론(鄭道傳權近論)’
정도전은 경상북도 봉화를 본관으로 하는 향리의 후손이다. 그의 고조인 정공미가 이 지역의 호장을 지냈으며 뒷날 봉화 정씨의 시조가 되는 것을 보면 봉화에 오랫동안 토착 세력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안동이 관향인 권근은 대대로 명현을 배출한 고려 시대의 중요한 가문 출신이다. 조부인 권부(權溥)만 하더라도 조선의 기반이 될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해 들여온 주인공이다. 권근의 저술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비롯해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이 있는데, 이것은 가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면서 동시에 당대 조선 유학의 최고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신분 차이에서만 생긴 게 아니다. 고려 말기는 정치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미묘한 시기였다. 이들이 관직에 진출했을 때 공민왕은 원나라와 멀리하고 명나라와 친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등극하자 이인임 일파의 친원(親元) 정책이 다시 불붙었고, 그 와중에서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과 함께 귀양을 갔다.

2년 간의 나주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4년 동안 고향에 물러나 있다가 이후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우왕 9년, 함주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만날 때까지 정도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도전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고려 최하층민의 삶을 몸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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