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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건파일
 관리자  01-25 | VIEW : 6,718
[조선시대 사건파일] <1> 경상도 문경 황씨부인 사건

목 맨 시신…목 뒤의 '一字' 액흔은 타살

상놈에게 겁탈 당한 양반 부인의 죽음

매주 화요일 조선 후기의 형사 사건을 소개하는 '조선시대 사건파일'을 연재합니다. TV 드라마 '다모(茶母)' 방영 이후 조선시대의 수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진 데다 최근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 후기 형사 사건 조사 보고서로 나름대로의 과학수사 양상을 보여 주는 '검안(檢案)'의 번역이 마무리된 데 따른 것입니다.
'검안'을 통해 드러난 대표적 사건을 골라 10회 연재하는 이번 시리즈는 당시 사회상과 민중생활, 수사 체계를 살피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집필은 '검안'을 번역한 서울대 규장각 김호(36) 책임연구원이 맡습니다.


양반 여자에 법도는 아니지만 犯人 안 나타나 검시
온몸 검푸른 색 '구타흔적'…목맨 서까래에 먼지도 그대로
사또가 의심스런 남편 다그치자 "살해후 위장" 자백
아내방에 들어가던 상놈이 달아나자 아내의심 끝 범행


아내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의 일이다. 음력 6월이라 더운 날씨였다. 문경군수 김영연은 아침 일찍 서둘러 관아에 출근해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북면 화지리의 존위(尊位ㆍ마을 어른) 최상보가 동헌으로 들어섰다. 그는 같은 동네에 사는 양반 안도흠의 고발장을 들고 왔다.

'사또 나리, 제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5월 동네 상놈 정이문에게 겁간당할 뻔한 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달 2일 목을 매고 말았습니다. 어찌 상놈이 반가(班家)의 여성을 겁탈하려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죽다니 참으로 큰일이로다. 또 상놈이 양반 부인을 겁탈하려 하다니 이건 또 무슨 변고인고?" 김영연은 서둘러 검험(檢驗ㆍ현장에 나가 시체나 상처를 확인하는 일)에 필요한 도서와 도구를 준비하도록 서리들에게 명하고 기록 담당 서리를 비롯, 검시에 동반할 의생(醫生), 율생(律生) 및 오작사령(시체를 다루는 관비) 등을 이끌고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우선 사건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마을 존위 최상보를 심문했다. 그의 대답은 형식적이었다. "6월2일 밤 정이문의 집에서 통곡소리가 나기에 가 보았더니 안도흠의 식구들이 모여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며느리 황씨 부인이 목을 맨 채 숨져 있었다는 것이었지요. 안씨 부자가 숨진 황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며 나에게는 빨리 관안에 사건을 보고하라고 다그쳐 다음날 보고하게 됐습니다."

사건의 열쇠를 쥔 정이문은 이미 달아났으므로 황씨 부인의 남편 안재찬을 불러 심문했다. 30세의 젊은 양반인 안재찬은 5월에 상놈 정이문이 안방에 잠입해 아내를 겁간하려다가 자신의 눈에 띄어 담을 넘어 도주했고,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또 수치심을 느낀 아내가 여러 차례 자진하려는 것을 자신과 아버지가 말려 오던 차에 이런 변고를 당했다는 주장이었다. 숨진 아내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26세이며 결혼한 지 12년이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겁탈, 또는 간통?

동네 사람들을 심문했지만 모두들 모르쇠였다. 다만 달아난 정이문의 조부 정태극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손자가 황씨 부인을 겁탈한 게 아니라 5,6년 전부터 둘 사이가 남달랐다"고 했다가 이내 "정신이 혼미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믿기도 어렵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검시를 해야 할 차례였다. 먼저 사건 현장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필요해 자를 꺼내 시체가 놓여 있는 곳을 쟀다.

시신은 머리를 동남쪽으로 향한 모습으로 동쪽 문지방에서 3촌, 서쪽 벽에서 6척5촌, 남쪽벽에서 3척1촌 떨어져 있었고, 북쪽 벽에 두 발이 닿아 있었다. 방 안이 너무 좁아 여러 사람이 몸을 움직이기 불편했고 검시는 더더욱 어려워 시체를 밖으로 꺼내게 했다.

오작사령이 밝은 곳으로 시체를 떠메어 옮겼고 시체의 옷가지며 버선 따위를 하나씩 벗겨냈다. 원래 양반집 부녀자 시체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겨 검시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는 법례(法例)가 있긴 했지만 검시(檢屍)를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작사령 김일남은 능숙한 솜씨로 죽은 황씨의 9폭 치마를 벗겨냈다. 그리고 허리띠를 풀고 적삼과 목면 홑바지를 벗겨 낸 후 마지막 남은 속옷을 벗기니 똥이 어지럽게 묻어 있는 변사체였다. 최종적으로 신고 있던 버선까지 벗겨 내니 25세쯤으로 보이는 신장 4척9촌의 여성이 머리를 산발한 채 얼굴을 위로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얼굴은 엊어맞은 듯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고, 희기도 했다.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錄諺解)의 구타살해 조항과 너무 흡사한 시반이 나타났으므로 자살로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 정수리 좌측에 피부가 벗겨진 상처도 있었다. 무언가로 되게 맞은 흔적이 분명했다. 점점 더 타살 혐의가 짙어졌다.

독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비녀 모양의 은으로 만든 뾰족한 도구를 입안에 넣어 색깔이 변하는지를 살폈으나 색이 변하지 않아 독살은 아닌 듯했다.

목 부위의 혈흔을 살펴보니 상처가 여러 군데 나 있었는데 목 졸린 흔적이 뚜렷했다. 갈비뼈와 가슴 부위도 얻어맞은 흔적이 있어 타살 혐의는 점점 더 짙어졌다. 시체를 뒤집어 보니, 등쪽 역시 전체적으로 피부색이 검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한 등 구타 흔적이 역력했다.

검시를 마치고 시장(屍帳) 3부를 작성했다. 하나는 죽은 황씨 부인의 집에 주고, 하나는 상부 보고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사또가 관아에 두고 참고할 것이었다.

검시 결과는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사건임이 분명했다. 누가 범인인가? 일단 아무도 범행을 자백하지 않아 증거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시체는 곧바로 방 안에 다시 들여놓고 횟가루를 뿌려 훼손하지 못하도록 표시를 해 두고, 사람을 시켜 밤새 주변을 지키게 했다.

'증수무원록언해'의 위력

검시 내내 황씨 부인의 목에 일자(一字)로 난 상처를 미심쩍게 생각하던 문경군수 김영연은 '증수무원록언해'의 해당 조항을 꼼꼼히 읽었다. 시체의 목 뒤에 '일(一)'자로 길게 난 상처는 주로 타살일 때 많으며 자살이라면 대개 목 앞에서 귀밑 쪽으로 사선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타살? 보다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 '증수무원록언해'를 다시 살피던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목 매달아 자살한 경우 대들보나 서까래의 올가미 흔적은 한 줄이 아니다. 먼지가 많은 곳이라면 어지럽게 줄 자국이 흩어져 있어야 스스로 목을 맨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올가미 자국이 한 줄로만 나 있고 먼지가 어지럽혀져 있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맨 것이 아니다.'

그는 즉시 황씨 부인이 목을 맨 장소로 달려가 서까래 위에 단 한 줄의 자국만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목 졸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게 분명했다. 그는 안재찬을 다그쳤다. "네 이놈, 네 처가 진정 자살을 했다 해도 슬픈 일이거늘 이렇게 아내를 때리고 목 졸라 죽여 서까래 위에 매달아 자살을 위장하다니 참으로 간악하구나. 꾸며댈 생각 말고 이실직고하라."

안재찬은 그제서야 범행 모두를 털어놓았다. 심지어 자신이 개 잡듯 올가미를 씌워 등에 짊어진 채 부인을 죽였다는 끔찍한 말까지 쏟아놓았다. "5월14일 정이문이 안방에 들어가려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 처를 의심해 홍두깨로 때렸더니 그날 이후로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습니다.

이달 초 2일 밤 제가 아들과 함께 자는데 애 우는 소리가 나서 처를 살펴보니 거의 죽을 듯했습니다. 정이문에 대한 복수심에서 끈으로 아내의 목을 묶고 정이문의 집에 업고 가 서까래에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민 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

황씨 부인의 죽음은 남편에 의한 살해로 밝혀졌다. 이제 달아난 정이문을 붙잡는 일만 남았다. 비록 정범은 아니더라도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이므로 마땅히 그를 잡아 들여 벌주어야 했다. 정이문의 인상착의는 '용파(容?)'라 하여 검안 말미에 첨부됐다.

관성적 반상 구별과 출가외인 의식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조선의 신분제 사회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그럼에도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반상의 구별이 유지되고 있었다. 안재찬이나 사건 처리를 맡은 문경군수 공히 '상놈의 도발'에 분노하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 안재찬은 아내를 죽여 양반 부녀의 절개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안씨 집안의 이름을 더럽히기보다 차라리 타성(他姓)의 죽음을 선택했다.

시집 간 딸의 죽음을 두고 친정 식구들을 소환해 증언을 듣거나 이들이 딸의 죽음에 항의한 흔적이 전혀 없는 점도 흥미롭다. 다른 검안 진술에도 나타나듯 당시 시집 간 여자는 남의 식구라는 의식은 뿌리깊었다. 이미 20세기가 밝은 때였지만 오랜 전통은 근대의 도전에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호(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契…門中…호랑이 같은 사또
사조직과 관아의 폭력이 난무
[조선시대 사건파일] <2>평안도 용천 '의계'(義契) 사건

백성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라

1896년 8월8일 저녁 무렵 평양 진위대 소속 중대장은 용천 읍내(邑內)에 출동했다. 읍내 시장에 400여명이 모여 깃발을 흔들고 총을 쏘아 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첩보였다. 현장에 달려가 보니 시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義)’라고 쓴 깃발을 치켜 세운 채 술을 먹고, 고함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느라 소란했다. 기세로 보아서는 당장 폭동이라도 일어날 듯했다.

진위대 중대장은 손수 200여명의 군인을 인솔해 운집한 그들을 해산시키는 동시에 군중 가운데서 두목급으로 보이는 몇 사람을 체포했다. 시장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달아나는 사람들로 부옇게 먼지가 일었다. 2년 전 1894년에는 농민들이 못살겠다며 무기를 들고 봉기해 정부에 대항해 이듬해에야 겨우 진정되지 않았던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 뚜겅 보고 놀란다고 정부에서는 조금이라도 백성들이 모였다는 첩보가 있으면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진위대라는 군대까지 새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잡혀온 자들은 시장에서 계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던 계장(契長) 이추규와 최봉일, 김여성이었다. 이들은 5월부터 ‘의계(義契)’라는 이름을 걸고 시장 사람들의 치안과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을 운영해 왔는데 이날 다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이며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던 차였다.

의계 계원들 대다수가 무뢰배였음은 물론이다. 8일 늦은 밤 진위대 중대장은 체포한 계장들을 용천군 관아로 압송해 매질했다. 압송하는 도중에 이들의 등에 ‘사(射)’ ‘포(砲)’와 같은 글자를 새겨 마을 사람들에게 죄를 알리기도 했다. 계장 이추규는 50여 대 가까운 태장(笞杖)으로 거의 초주검이 되어 감옥에 갖혔다.

어떻게 평양 진위대 중대장이 시장 계원들의 모임을 알고 급습했을까? 이추규가 알아본 결과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문시정이 고발했다. 문시정은 읍내에서 여각(旅閣)을 운영하며 술과 음식을 팔아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추규에게 원한을 품고 진위대 중대장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시장契員 400여명 총쏘며 읍내 활보 '勢과시'
契長에 수모당했던 族閣주인이 진위대에 고발
契長 곤장맞아 죽고 族閣주인은 門中도움 탈옥
군수 보고서 曰 "계 만들어 불법자행 禍를 자초"

문시정과 이추규의 갈등

7월15일 이추규의 계원 가운데 한 사람인 김기남은 자신의 선영(先塋)에 누군가가 투장(偸葬ㆍ남의 땅에 몰래 묘를 지음)을 꾀해 소금물을 부어 막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도리어 너무 심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이에 아버지 김윤백은 읍내 문시정의 여각에 머물면서 아들 김기남의 억울함을 풀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전부터 관아에 줄을 대고 있던 문시정에게 100냥의 소개비를 주고서야 어렵사리 옥중의 아들을 빼낼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추규는 19일에 문시정을 불러 돈 100냥을 다시 돌려주도록 훈계했는데 이 과정에서 술에 취한 이추규가 문시정의 상투를 잡고 땅바닥에 팽개치는 등 모욕을 주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면서도 문시정은 “형님, 힘 자랑 하지 마시오, 그리 해도 내 상투를 뽑지는 못하잖소”라는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고는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이추규가 계속 구타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문시정은 항상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들었다.

격분한 이추규는 계원들을 동원해 문시정을 흠씬 두들겨 팼고, 그리고도 분이 덜 풀려 문시정의 집으로 몰려가 살림살이를 모두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용천 군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도 사람이 다칠까 걱정해서 문시정을 잡아 20여 대를 친 후 성 밖으로 쫓아버리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겨우 이 소동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의계 계원들에게 몰매를 맞고 가재 도구가 모두 망가진 것도 억울한데 관에 끌려가 곤장까지 맞게 된 문시정은 복수에 골몰했다. 그러던 중 진위대가 의주 일대 지역을 순행(巡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뢰배들이 시장에 모여 소동을 피울 예정이라고 고푀염痼潔駭?

이추규의 죽음을 조사하다

이미 중대장에게 수십 여대를 얻어맞아 기진맥진한 이추규는 투옥 중이던 8월11일, 용천 관아 사령들에게 다시 십 여대의 곤장을 맞았다. 문시정이 계원들이 부순 자신의 가산(家産)을 보상할 것과 이를 방조한 이추규를 엄벌하도록 용천 군수에게 요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며칠 사이에 수십 여 대의 곤장을 맞은 이추규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 돈을 마련해 문시정의 부서진 가재도구를 보상해 주어야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들 이명록을 불러 읍내 고리대금업자 김석산에게 1,000냥짜리 어음을 받아 관아에 내도록 했다. 이추규는 비로소 풀려나는 듯 했으나 현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곤장을 더 맞게 됐다. 결국 그는 매를 이기지 못하고 장독(杖毒)으로 8월17일 새벽에 숨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방도가 없었던 아들 이명록은 날이 밝자 계원들의 도움을 받아 문시정을 잡아 관아에 고발했다. 아버지 이추규의 죽음은 바로 문시정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틀 후인 19일 문시정의 친척 수백 여명이 관아로 돌진해 옥을 부수고 문시정을 탈출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문시정은 문중 사람들을 동원해 공권력을 무시한 채 탈옥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용천 군수는 사건을 담당할 수 없게 됐다. 관할 감옥이 공격받아 죄수가 도주한 데다 문시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 그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1차 조사(초검ㆍ初檢)는 인근 선천군수가 맡기로 하고 2차 조사(복검ㆍ復檢)는 곽산 군수에게 이첩됐다. 사건 조사를 완료한 곽산 군수는 이추규가 죽어 마땅하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상 여러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하나하나가 모두 패악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계장(契長)의 죄는 마땅히 처벌해야 할 것이었다. (중략) 행동하는 데 마땅함을 일컬어 ‘의(義)’라 하는 것인데 그 마땅함을 잃었으니 ‘의’라 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을 ‘계(契)’라 하는데 도리어 악행을 서로 도왔으니 이를 ‘계’라고 부를 수 없는 법이다.

깃발을 세우고 총을 쏘았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해괴하며, 또한 사람을 때리고 가산을 파괴하였으니 중대장이 순행 중에 이런 폐단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계인들이 모여 큰 집회를 벌이는데 400여명이나 모였으니 이를 금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는 무리들 가운데 우두머리를 체포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으니 (중략) 이제 죽은 이추규는 항상 몸을 조신하여 분수에 맞게 근신해야 하는데 어찌 백 여명을 모아 계를 만들고 불법을 자행하였는가? 이 모두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契, 현재의 조폭과 다를바 없어
조선시대에 한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온 동네가 쑥대밭이 되었다. 포졸과 사령들은 사건 관련자들을 수배하느라 동네에 들어와 야단법석을 떨었고 그 와중에 토색질이 대단했다.
심지어 구타와 재산 파괴를 일삼아 백성들이 포졸을 호랑이처럼 여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옥중에 갇힌 수많은 백성들은 사또의 엄벌 명령에 따른 포졸의 난장(亂杖ㆍ마구 때리는 매)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전답(田畓)을 돌볼 수 없어 집안 살림이 엉망이 됐다.

그러나 포졸과 사령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향촌사회에서 끊이지 않았던 사적 폭력의 위협이었다. 사적인 모임은 종종 '계'의 형태를 띠었으며 일반적으로 동일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조직이 가장 많았다.

오늘날 '계'라고 하면 아주머니들의 동호인 모임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더욱 강한 결속력과 강령 아래 계원들을 보호하는 이익집단이었다. 심지어 자신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늘날의 조직 폭력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추규의 의계 역시 그 강령을 보면, 시장에서 술과 잡기에 골몰하는 무뢰배들을 징벌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은 이추규와 같은 주점업자들의 이익을 위한 모임에 불과했다. 심지어 계원들이 모일 때 '의(義)'라는 깃발을 내걸고 총을 쏘며 거리를 활보했으니 그 자신들이 바로 무뢰배였다.

이런 동업조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보부상 모임이다. 이들은 상단 우두머리 의 지휘 아래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로 결심한 가족 공동체와 같았으며, 두목은 계원들의 부부싸움 등 가정생활에까지 간섭하는 등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공권력이나 향촌사회 사조직의 이런 폭력으로부터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逑?방패막이는 '혈연'이었다. 문시정이 문중(門中) 사람들의 도움으로 공권력까지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문시정과 달리 문중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동업조직의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민초들은 호랑이 같은 사령배, 혹형을 남발하는 사또일망정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관아의 온정과 정의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김호·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과부가 通하였다" 입방아…자살로 몰아
<3>소문의 힘-충청도 서산 과부 유씨 사건

동네 선비가 근거없이 通文돌려 설마…그럴수도… 기정사실化
누명쓴 여인은 유서남기고 음독 "班家의 부녀이니 검시는 면제를"

부단리 마을 분들에게 알립니다
“옛 사람들이 남녀는 유별하여 비록 남매 사이라 하여도 일곱 살이 넘으면 같은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옛날 계강자(季康子ㆍ중국 노나라의 승상)가 그 종조모(從祖母)를 찾아가 문을 열고 함께 대화했으나 모두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고 하니 이를 공자(孔子)가 듣고 ‘참으로 옳구나’라고 하였다 한다.

자고(自古)로 아내를 맞이할 때는 반드시 이성(異姓)을 택해야 하고, 첩을 취하더라도 그 성을 물어본 연후에 하니 모두가 수치스러움을 피하고자 함이다. 오직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로 각자가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남자는 하고 싶은 대로 처신하지 아니하고 여자는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만일 이를 어기는 경우라면 엄히 벌하는 것이 선왕의 법도와 법전에 실려 있다. 지금 세상이 복잡하고 사람들이 예절을 모른다지만, 오직 우리 선비들이 근근히 보존하는 것은 다만 선왕의 법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거주하는 유치극(柳致克)이 자신의 친인척이 많은 것을 믿어 선왕의 법을 무시하고 그의 종고모(아버지의 사촌 누이) 유씨 부인과 기탄 없는 행동을 하니 이를 차마 참을 수 있는가?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것이며 마을에 예절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를 징벌하지 않는다면 지금 한 동네가 모두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질 것이니 조선 사람으로서 금수의 땅에 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이제 피가 끓어 참을 수 없어 통문(通文)을 돌린다. 이 달 13일 마을 회의가 열리는데 유치극과, 아울러 통정하는 과부 유씨의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쫓아내 정풍(正風)으로 교화함이 천만 다행일 것이다. 만일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로 여기고 함께 처벌할 것이다. 기해년 9월6일 임충호 알림.”

죽음으로 소문에 맞서다

한 장의 통문이 돌면서 조용한 마을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어쩜 그런 일이!” 마을에는 소문이 번져 나갔다. “남편이 죽은 지 3년이 채 되지도 않은, 아주 지체가 높은 양반 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지렁이 농사꾼도 아닌 반가(班家)의 부녀자가 그런 음행을 일삼다니 세상이 망했도다.”

혀를 끌끌 차며 임충호의 통문에 따라 그런 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내야 된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설마 유씨 부인이 그럴 리 있겠소”라며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미 유씨 부인은 음행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소문은 금세 유씨 부인의 귀에 들어갔다. 치욕에 떨던 그녀는 곧바로 임충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한 손에 낫을 든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임충호를 죽이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임충호는 부단리에서 가장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었으니 쉽게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유씨 부인의 한바탕 소란으로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임씨 집안 여자들 역시 뛰어나와 낫을 들고 소리치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소문을 낸 주인공 임충호는 이미 상황을 감지하고 서울로 도주한 상태였다.

망연자실한 유씨 부인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그녀가 체념하고 마음을 다잡은 줄 알았다. 그런데 13일 새벽 유씨 부인의 열 두 살 난 수양아들 한옥동은 잠결에 무슨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일어나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니가 배를 부여잡고 방바닥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고 방 한 쪽에는 조그마한 그릇이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옥동이는 이웃에 사는 외삼촌 유덕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급히 달려온 유덕수는 그릇에 남아 있던 간수를 맛본 후 쌀뜨물과 녹두 갈아낸 물을 준비해 얼굴빛이 누래져 사색이 완연한 유씨 부인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반가의 부녀이니 검시를 면해 주소서

유덕수와 옥동의 친부(親父) 한사석 등은 유씨 부인을 수습한 후 관아에 그 죽음을 알렸다. “사또, 저의 재종 형수님은 청상(靑孀)으로 늙어 마음이 빙설(氷雪)과 같았습니다. 한 마리의 풀벌레와 같이 고고하였으며 생전에 지병이 없었으나 지난 13일 이른 아침 형수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달려 가 보았더니 과연 이미 운명했습니다.

제 아들 한옥동의 양외숙(養外叔)인 유덕수가 말하기를 ‘옥동이 와서는 어머니가 복통으로 괴로워하며 울고 있다’고 해서 급히 함께 가서 등잔을 들고 사방을 살펴보니 간수를 졸인 그릇 한 개가 깔개 위 베개 근처에 있거늘 심히 괴이하고 의심쩍어 그릇을 기울여 맛을 보니 과연 간수를 졸이고 남은 찌꺼기였습니다.

간수를 마시고 어찌 목숨이 온전하길 바라겠는가 하면서도 손발의 맥을 짚어보았더니 약간 뛰는 듯해 깨어나길 바라며 쌀뜨물을 여러 번 입안에 흘려 넣었으나 몇 숟가락 넘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의 사연으로 말하자면 이 마을에 사는 임충호가 계략을 써서 근거 없는 소문과 애매한 말을 통문으로 발송해 퍼뜨리니 이를 듣고 괴롭고 모욕을 느낀 형수께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간수를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더러 피고 임충호는 도주한 상태였으므로 먼저 출상(出喪)을 하고 나중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그리한 후 고발한 것입니다. 이미 염하여 출빈(出殯)한 데다가 또 반가(班家)의 부녀(婦女)이니 검시는 특별히 면해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라나이다.”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부녀자들에게 주어졌던 면검(免檢) 권리를 요청한 것이었다. 검시를 할 경우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온 몸이 발가벗겨져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꼴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상놈 경우는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누가 내 원수를 갚아줄까

한편 자진(自盡)한 유씨 부인의 방에서는 유서가 발견됐다. 거기에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지 못하고 애매한 소문 때문에 죽음을 택한 자신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비장한 내용과 함께 시집 간 딸과 사위를 보지 못하고 가는 애절함이 가득했다.

‘유서를 쓰려고 하니 홍광취지(紅光聚之ㆍ눈자위가 붉어짐)하여 눈물이 솟아 (눈)동자를 가리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이 몸이 죽는 것은 슬프지 아니하나 악명(惡名)을 입고 부명(賦命ㆍ타고난 운명)으로 죽게 되니 어찌 절통하지 아니하리오. 또한 모녀(母女) 상봉(相逢)할까 하였더니 그도 못하고 홍(洪) 서방도 다시 못보고 죽으니 어찌 구천지하(九天地下)에선들 눈을 감으리오.

남에게 적원(積怨)한 바 없건만 삼년상을 지내지 못하고 슬픈 누명을 쓰고 죽으니 나의 원수 누가 갚아 줄까? 살다가 누명을 쓰고 끝을 여미지 못하고 이 지경을 당하니 어찌 절도(絶倒)하지 않겠는가? 나의 원수를 갚아 주옵소서. 홍 서방에게 술 두어 잔 받아주지도 못하고 세상을 이별하니 절통(切痛)하지 않겠는가.’

유서를 읽고 난 서산군수 김홍규는 서울로 도주하였다는 임충호을 당장 체포해 대령하도록 명했다. “임충호란 자는 사족(士族)으로 독서하는 선비인데 이와 같은 통문을 돌리고 무근(無根)한 소문을 퍼뜨려 화근을 만들었으니 이른바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어찌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임충호란 자가 아무 문제도 없는 부인을 원귀(寃鬼)로 만들었으니 유아지율(由我之律·직접 살인하지 않았지만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죄를 물어 처벌한 조선의 행형 제도)에 해당하는 것이요, 피고(被告)를 면키 어려운 것이다. 뚫린 구멍을 엿보고는 종적을 감추었으니 그 한 짓을 보면 더욱 극악하다. 따로 군의 순교를 보내어 잡아들이도록 하라.”

실제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소문의 힘이 막강했음을 알게 된다. 단지 소문만으로도 마을에서 쫓겨나고, 관에 끌려가 도둑으로 취급당한 후 매를 맞고 심지어 유씨 부인처럼 자진하기에 이르렀으니 법보다 소문이 더욱 강한 구속력을 가졌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도망간 선비를 잡아라"
몽타주 일종 '용파' 이용
서산군수는 서울로 도망간 임충호를 잡아들이기 위해 그의 인상착의를 담은 '용파(容)'를 작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몽타주 같은 것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얼굴과 상처'라는 뜻이지만 그림은 없고 글로 사람의 생김새 등을 묘사했다. 키와 얼굴빛, 머리 모양과 그 사람만의 특이한 생김새, 주로 얼굴이나 팔 등의 상처 혹은 뜸을 놓았던 부위 등을 기록해 포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요즘은 유전자 감식처럼 과학기술을 이용해 죽은 사람이나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용모나 병력(病歷)에 따른 상처, 혹은 문신 등이 매우 중요했다.

조선시대 수사ㆍ법의학 지침서인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錄諺解)에도 검시할 경우 반드시 '생전에 팔ㆍ다리가 부려졌는지, 곱사등이였는지, 조막손이나 절름발이였는지, 대머리였는지, 사마귀나 혹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병의 상처나 문신, 뜸을 뜬 자국, 옴이나 버짐, 종기나 뾰두라지 부스럼 등의 흔적이 원래 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못박았다.

/글=김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달군 칼에 초(醋) 부으니 '핏자국'
부인하던 살인범 "공범 있다"
[조선시대 사건파일] <4>욕심의 끝 - 경기 여주 김인규 사건

피살자 집안의 집문서 훔친 머슴과
그 머슴에 빚있던 머슴이 주인 살해

형님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소서

“사또 나으리, 제 형님 김인규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 주옵소서.” 김완규는 처절한 마음으로 고발장을 적어 내려갔다.

“이달(2월) 21일 밤의 일입니다. 저의 둘째 형님께서 술에 취해 홀로 건넌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밤중에 ‘으악, 사람 살려’하는 소리가 방에서 들렸습니다. 형수님께서 놀라 건너가 보니 상투머리를 한 괴한이 지게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더랍니다.

놀란 형수께서 촛불을 밝혀 형님을 들여다보니 이미 칼에 찔려 돌아가셨는데, 상처를 살펴보니 머리 위와 귀 뒤에 모두 찔린 자국이 있었으며, 턱 아래 인후부가 칼에 찔려 피가 흐르고 있었답니다. 또한 형님의 양 손에도 피가 낭자했는데 칼날을 잡았던지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형님이 돌아가시는 변고를 당해 경황이 없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의심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흥곡면 군옥동에 사는 주사(主事) 이춘경입니다. 그는 제 큰 형님인 참판 김정규의 집에서 다년간 일을 보던 사람이었는데 큰 형님이 돌아가신 후 저희 형제가 형님의 용산 집을 처분할 때 그가 집문서를 훔쳐 저당 잡힌 후 자신의 빚을 갚은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돌아가신 둘째 형님께서 이춘경을 다그쳐 함께 상경해 저당 잡힌 집문서를 돌려 받기로 몇 번 채근하였으나, 그는 몸이 아프다거나 장사하러 급히 나가야 한다는 등의 변명을 일삼으며 계속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변고가 그 사이 발생하였으니, 어찌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제가 하인 김경학을 시켜 몰래 이춘경의 며칠 동안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했더니 과연 의심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춘경과 그의 친인척을 잡아 심문하면 죽음의 원인이 밝혀질 듯합니다. 이미 둘째 형님의 시신은 관에 넣고 빈소에 모셨으므로 검시는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칼에 찔린 부위는 급소였음을 말씀드렸으니 피자치사(被刺致死ㆍ흉기에 찔려 죽음)를 사인으로 결정하셔도 무방할 듯합니다. 억울한 죽음을 꼭 복수해 주십시오.”

일단 이춘경을 의심하다

여주군수 이준규는 소장을 접한 후 곧 사건 조사를 위해 현장에 출동했다. 먼저 사건 현장의 이웃들로부터 혹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심문했으나 한결같이 사건 당시 외출 중이었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해답은 의심을 받고 있는 이춘경과 김인규의 집에서 수십 년간 머슴으로 일해 온 김인길에게서 나올 것 같았다.

김인길은 동네 사람들에게 이번 사건의 범인이 이춘경인 듯하다는 말을 흘린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과연 이춘경의 살해 장면을 보았는지, 아니면 이춘경과 원한이 있어서 그리 말했는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춘경을 의심했는지 물었다.

김인길은 주인 나으리가 변고를 당한 후 장례 치르는 일에 몰두하느라 누구를 만나거나, 이춘경이 의심스럽다고 말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이춘경이 집문서를 훔쳐 저당 잡힌 일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이춘경의 답변이 궁금했다. 그는 김씨 집안의 용산 소재 집문서를 훔쳤을 뿐만 아니라, 살해당한 김인규가 평소 사랑하던 애비(愛婢) 청순이와도 상통(相通)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돈 문제 아니면 치정으로 이춘경을 살해했을 동기는 충분히 의심을 살 만했다. 하지만 이춘경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신은 사건 당일인 21일 종조부 댁에 갔다가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와 잠을 잤으며, 22일 오후에야 변고를 듣고 김인규의 집으로 달려갔다는 답변이었다. 22일 아침에 자신을 보았다는 동네 사람들의 증언은 모두 모함이라는 주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청순이와 화간한다는 소문에는 대꾸조차 하기 싫다는 투였다.

머슴 김인길의 사주

그런데도 동네 사람들은 이춘경을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여러 정황이 이를 방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황이 분명하다고 해서 범행 일체를 확정할 수 없었으므로 이준규는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그때 사건과 관련한 새 소식이 전해졌다. 기찰포교가 이춘경의 버선과 평소 차고 다니던 칼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버선의 혈흔은 아주 미미하여 꼭 살인의 증거로 삼기 어려웠지만 이춘경의 칼은 달랐다. 여기서 혈흔을 찾아내기만 하면 증거물로 삼을 수 있었다.

이준규는 서리들에게 숯불로 칼을 달구도록 했다. 칼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준비한 고농도의 초(醋)를 그 위에 들이부었다. ‘치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칼에는 선명한 혈흔이 나타났다. 이 광경을 보고 이춘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뜻밖의 내용을 자백했다.

“살인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법전의 조항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버선과 칼에서 혈흔이 드러났으니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김인규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은 비록 이 몸의 소행이오나 실제로는 본심이 아니라 누군가 시켜서 한 행동입니다. 지난달 13일 김인규 나리 댁에 갔더니 그 댁 하인 김인길이 제게 ‘그대가 김인규 댁 일을 맡아본 지 3, 4년이나 되었으니 잘 알 것이다.

사실 수십 여년 동안 내가 이 댁 일을 맡고 있는데도 나를 믿지 못하고 꺼리는 이가 있으니 바로 진사 김인규이다. 만일 그대가 김인규를 죽인다면 나는 집사가 될 수 있으며 그대는 부채와 집문서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김 진사를 살해한다면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감언이설을 듣고 꼬임에 넘어가 김인규 나리를 죽이기로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21일 저녁 김인길을 만났더니 제게 조용히 ‘오늘 김 진사가 엄청나게 취했으니 죽이기 딱 좋은 시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둘이 함께 김 진사 댁 근처 산기슭으로 가서 숨어 있다가 김인길이 먼저 내려갔습니다. 한 밤중이 되자 김인길이 제게 먹을 것을 갖다 주면서 진사 나리가 자고 있는 방을 알려 주었습니다.

제가 몰래 들어가니 이미 김인규는 취해서 졸고 있었으므로 가지고 간 칼을 꺼내어 여러 차례 찌른 후 너무도 무서워 이리 자빠지고 저리 넘어지면서 겨우 포구 비석거리로 도망했습니다. 김인길이 미리 기다리다가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넌 후 그는 다시 강을 건너 귀가하고, 저는 다부리 종조부 댁에 갔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이외에 달리 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돈이 문제의 근원

김인규를 죽이기로 계획하고 이를 사주한 자가 머슴 김인길이라니 도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또한 김인길이 이에 대해 뭐라 말할지도 궁금했다. 김인길은 처음에는 이춘경을 만난 적이 없다고 잡아뗐지만 계속되는 추궁에 결국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 돈이 필요해서 진사 나리를 살해했다는 답변이었다.

“제가 40여 년 종 노릇을 하면서 어찌 감히 불충한 마음을 먹고 이춘경을 사주해 주인 나리를 살해했겠습니까? 다만 2월21일 제전(祭田) 고갯길을 지나다가 이춘경을 만나 인사한 후 어디 가는지를 묻자 주인 나리 댁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제가 ‘저당 잡힌 집문서를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이춘경은 ‘자네도 내게서 빌려간 돈을 갚아야 할 것이네’라며 빚 독촉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마련하겠노라고 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춘경에게 ‘저당 잡힌 문서를 찾기도 어려우며, 나 역시 가난하여 인생이 불행한데 혹 김 진사 나리만 없어진다면 좋겠다’고 슬쩍 말했더니 과연 이춘경은 정색을 하면서 어떻게 그를 제거할 수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오늘이 한식이니 분명 나리가 형님의 무덤에 다녀올 것이다. 취해서 골아 떨어지면 행동하기 제일 좋은 시간이니 그를 죽이고 전당 잡힌 집을 완전히 팔아 반씩 돈을 나누어 갖자고 제의한 것입니다.

서로 약속하고는 첩의 집에 가서 밥 한 그릇을 얻어 진사 나리 댁 근처 산기슭에 숨어 있는 이춘경에게 주고는 진사가 방금 취해서 건넌방에 자러 들어갔다고 말해주고, 저는 먼저 비석거리로 가서 춘경을 기다렸다가 강을 건너 도망한 것입니다. (중략)이 몸이 노비로 감히 끝없는 욕심을 부려 상전의 살해를 모의했으니 이 어찌 법을 피하겠습니까.”

진술을 끝까지 들은 여주 군수는 할 말이 없었다. 땅에 떨어진 인륜을 보고 있노라니 보고서를 작성하는 그의 마음 역시 한없이 무거웠다. ‘아아, 김인길은 김인규의 노비다.

40여 년 동안 의탁하고 힘입은 은혜가 골수에 새겨지니 이미 그 은택이 지극하거늘 어찌 그에 화답하지 않고 감히 당치도 않은 욕심을 내서 집 안 일을 홀로 맡아 관리하는 집사 일에 마음을 두었으며, 또 집문서를 팔아 반분(半分)할 생각으로 주인을 죽일 계획을 도모하였는가?

(중략)처음에는 입을 다물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자복하니 돈이란 것이 죽은 자도 살려내고, 산 자도 죽일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머슴과 상전 사이에 이런 불충한 변고가 있을 수 있는가? 다른 이의 손을 빌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죽인 것과 다름없어 죄상으로 보자면 정범 이춘경보다도 더 나쁜 놈이로다.’

오늘날엔 어떻게
루미놀·과산화수소수 뿌리면 血痕서 빛이 나와


국내에서도 방영된 미국 TV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는 높은 인기를 누렸다. 시리즈가 막을 내리자 MBC는 비슷한 구성의 'CSI 마이애미'를 방영하고 있다. 두 드라마에는 사건 현장에서 혈흔을 찾아내기 위해 분무기로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현대 수사에서 혈흔 확보의 공식처럼 돼 있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용액은 질소화합물인 루미놀(Luminol)과 과산화수소수의 혼합액이다.
이 루미놀액은 혈흔에 남아 있는 헤민(Hemin)이라는 성분과 작용해 강렬한 화학 발광(發光)을 한다. 어두운 사건 현장에서 이 용액을 뿌리면 청백색의 형광이 나타나 핏자국을 쉽게 판별할 수 있다. 이 용액은 혈흔 이외의 물체에서도 발광하는 경우가 있어서 추가 검증이 필요하지만 조작이 간편하고 반응이 확실하다는 이점 때문에 교통사고 등 범위가 넓은 사건 현장에서는 필수품으로 사용된다.

이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주 군수가 칼에서 혈흔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도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錄諺解)에서는 이 검사를 '살인흉도(殺人凶刀) 일구난변(日久難辨)이어든 수용탄소홍(須用炭燒紅)고 이고초세지(以高醋洗之)라, 혈적자현(血跡自見)이니라' 고 적어 놓았다. '살인한 칼이 오래되어 분별하기 어렵거든 숯불로 달구어 붉게 한 후 고농도의 초(醋)로 씻으면 핏자국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는 뜻이다.

입력시간 : 2003/11/17 20:32

검게 부은 배… 튀어나온 눈…
시신은 독살임을 말하는데
[조신시대 사건파일] <5> 남편을 독살한 여인 - 전주 이경선 사건

1901년 8월 전주 군수 이삼응은 부서면에 사는 이경선이 자신의 부인과 싸운 후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17일 조사를 위해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우선 이경선의 부인 장씨를 심문했다. 나이 35세였다. "네 남편과 무슨 일로 다투었는지 자살인지 아니면 타살인지, 남편과 결혼한 지 얼마나 되는지, 자식은 몇인지 남편의 나이는 또 몇 살인지, 무슨 물건으로 목을 매었는지 사실대로 말하여라."


장씨 부인은 무능한 남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몸은 매우 빈한하여 술을 팔아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런데도 제 남편은 항상 도박과 술로 세월을 지새웠습니다. 지난 14일에도 술 팔아 번 돈을 도박에서 모두 잃었습니다. 서로 다툰 후 남편은 외출했고 닭이 우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잠이 들었다가 날이 밝아 깨어보니 남편이 허리띠로 서까래에 목을 매어 죽어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 이웃사람 이광숙에게 부탁하여 끈을 풀어 내렸지만 이미 죽었습니다. 결혼한 지는 17년 째이며 그 동안 1남 2녀를 낳아 기르고 있습니다. 목을 맨 허리띠는 경황이 없어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신을 검험(檢驗ㆍ현장에 나가 시체나 상처를 확인하는 일)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염을 하려고 관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사람이 죽었는데 관에 알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언뜻 봐서도 시체는 자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측한 몰골이었다. 충분히 타살을 의심할 만했다.

40대 중반의 남자 시신은 머리를 북쪽으로, 다리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 있었다. 오작사령(시체를 다루는 관비) 유덕만을 시켜 차례로 옷을 벗겼다. 신장은 5척1촌이었고 풀어진 머리카락을 재 보니 1척5촌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두 손은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으며 다리는 곧게 펴고 있었다.

방이 좁아 실내에서 검험할 수 없어 밖으로 옮겨 더 자세히 살폈다. 눈동자는 튀어 나와 있었고 청흑색으로 부풀어 오른 복부를 두드리니 소리가 났다. 배꼽 아래는 청홍색을 띈 채 크게 부어 있었고 뒤집어 항문을 보니 역시 돌출해 있었다. '증수무원록언해'의 중독사 조항과 너무 흡사했다. 독살이 분명했다.

추호도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장씨 부인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시 그를 심문했다. "너를 도와 목을 맨 남편의 시체를 풀어 내린 이웃 이광숙의 진술을 들어보니 네가 이미 수년 전부터 박사권과 간통하는 사이로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으니, 네가 박사권과 내통해 남편을 모살한 것이 아니더냐. 꾸며대지 말고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장씨 부인도 거침이 없었다. "제가 술장사를 하기로 우연히 박사권을 알게 되어 간통하였는데 동리에 소문이 나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예 올 7월에는 박사권과 함께 도망가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 생각이 나고 남편과 사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8월14일 남편이 만취해 "내 반드시 박가 놈을 잡아 죽이고 말 테다"며 술을 연거푸 마셔댔습니다. 사건 당일 밤에도 술을 마시길래 저도 옆에서 한 잔 마시고 지난날의 잘못을 빌고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박사권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하고 이렇게 목을 매 죽고 말았으니 자초지종을 모르겠나이다.

깨어나 보고 당황하여 우리 집에 기숙하던 김국서와 이웃사람 이광숙을 불러다가 남편을 끌어 내리고 참기름을 먹여보는 등 구활하려고 했으나 이미 절명한 뒤였습니다. 제가 일찍 남편의 자진을 보았더라면 어찌 말리지 않았겠습니까? 박사권과 논의하여 남편을 모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나이다."

이웃 이광숙과 대질심문도 이어졌다. 장씨 부인과 이광숙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먼저 이광숙이 장씨 부인을 보고 말했다. "당신이 지난번에 나한테 그러지 않았소. 남편이 박사권과 간통한 일 때문에 자주 때리므로 술에다 양잿물을 타 먹였다고. 내 분명히 들었소." 그러자 장씨 부인은 이광숙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면서 "네 놈이 지금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근거도 없는 소리를 娩遊윰?며 큰소리를 질렀다.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무능한 남편이 목맸다" 주장하던 부인은
무고한 간통男 들먹여 "양잿물주며 시켜"

간통남 박사권의 사주입니다

초검 당시 발뺌을 일삼던 장씨 부인은 하지만 복검(復檢) 때 뜻밖에도 진술을 번복하고 독살을 시인했다. 간부(姦夫) 박사권의 사주라는 것이었다. 항상 남편을 살해하면 평생 같이 살 수 있다던 박사권이 양잿물을 주면서 술에 타서 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부의 인정상 곧바로 죽이지 못하다가 드디어 15일 밤 결행했다는 진술이었다.

과연 박사권의 사주가 사실일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장씨 부인을 믿을 수 없는 데다 문제의 박사권은 도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가 수월치 않았다. 박사권을 잡을 때까지 사건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2년 뒤 드디어 박사권이 체포됐다. 이경선 살인 사건의 범인 및 증거들에 대한 보충 수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백한 장씨 부인과 사건 관련자들은 그 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 전주 군수는 박사권에 대한 심문에 들어갔다. 그리고 장씨 부인의 진술이 모두 거짓이라는 진술을 얻어냈다.

박사권은 고리대금업자로 장씨 부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종종 만나 통간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장씨 부인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잡혀갈지 모른다고 생각해 도망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경선을 죽이려고 장씨 부인에게 독약을 주거나 사주한 일은 전연 없다는 주장이었다. 장씨 부인이 무고한 사람을 물고 늘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진술을 들이대고 장씨 부인을 다시 추궁하자 그는 또 말을 바꾸었다. '박사권의 사주'는 이웃 이광숙이 시켜서 꾸며댔다는 것이었다. 이광숙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박사권이 독약을 주면서 남편을 죽이라고 사주했다고 하면 도망 간 박사권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쓸 테니 그리하라고 했다는 말이었다.

姦夫잡히자 "이웃이 시켜 꾸며댔다" 말바꿔
당시도 人權중시… 물증없자 범인확정 못해

아니 도박 빚 때문에 자살했나이다

전주 군수는 더 이상 거짓으로 꾸며대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장씨 부인은 또 다른 진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편 이경선이 원래 도박 빚이 많아 이를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짓 증언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조사자인 진산 군수 서상경에게 사건이 넘어갔다. "너는 어찌하여 초검 때는 남편이 자살하였다고 하고 복검 때는 박사권의 사주로 양잿물을 먹여 살해한 것이라 했느냐. 그것도 모자라 전주 군수의 질문에는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빚을 져 이를 비관하여 목을 매었다고 거짓말을 늘어 놓았느냐. 이제 더 이상 꾸며댈 생각말고 이실직고하라."

진산 군수는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하지만 장씨 부인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소리뿐이었다. 게다가 장씨 부인을 도와 이경선의 사체를 서까래에서 풀어 내렸던 이광숙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 사이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이광숙은 장씨 부인의 독살을 주장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사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됐다. 형편을 파악한 장씨 부인은 이제 거칠 것 없이 자신은 무죄이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진산 군수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장씨 부인의 행동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증이나 증언이 확보되지 않으면 의법 처리할 수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진산 군수는 단지 장씨 부인과 박사권을 엄벌하도록 요청하는 선에서 사건 조사를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관들은 장씨 부인을 범인으로 확신했지만 수 차례의 검시와 대질 심문 그리고 관련자 체포와 재조사를 통해서도 확실한 증거와 자백이 나오지 않아 결국 그를 범인으로 확정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처럼 인명(人命)이 관련된 사건의 경우 함부로 조사를 끝내거나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의문이나 의혹을 남김 없이 풀어 원통함이 없도록 하려는 인정(仁政)의 원칙이 확고했다.

이 사건과 달리 서울대 규장각의 검안(檢案) 가운데 검시를 통해 살인사건의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거나 또는 범인을 확정했던 사례들이 상당수 있다. 이 역시 당시 조사가 그저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증거 확보나 과학적인 조사 등 조선시대에도 법 집행에서 현대에 못지 않게 인권을 중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은비녀 입에넣어 검게 변하면 '독살
시신입에 넣었던 찹쌀밥 닭에게 먹여 죽는지 보기도

오늘날은 살인 사건 검시에서 해부가 기본이다. 독살 여부도 해부를 통해 채취한 시료를 독물학 검사로 확인하므로 과학적으로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체의 외형 검사를 우선하고 추가로 은비녀를 이용해 독살 여부를 판단했다.
조선시대 수사ㆍ검시 지침서인 '증수무원록언해' 중독사 항목은 독극물 때문에 죽은 사람의 모습을 '독살당한 시체는 입과 눈이 모두 열려 있고 얼굴이 검붉은 빛이거나 청색이다.

(중략) 특히 전신이 청흑색을 띠며, 입술은 부어오르고 터지기도 하며, 손톱 끝은 검게 되고, 목구멍과 배는 부풀어 올라 검은색을 띤다. 피부가 부풀어 오르고, 몸에 푸른 반점이 생기며, 눈동자가 튀어 나오며, 입 코 눈에서 검붉은 피가 나기도 한다.

죽기 전에 오물을 토하거나, 항문이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대장이 돌출하는 현상 등이 나타난다'고 묘사했다. 또 독살이 의심되는 경우에는 은비녀를 목구멍에 넣어 검게 변하는지도 확인했다. 당시 흔히 쓰던 독약인 '비상'은 비소와 황의 화합물이어서 은의 색깔을 검게 바꾸는 성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반계법(飯鷄法)이란 독극물 검사법이다. 독살이 의심되는 시신의 입에 찹쌀로 지은 밥을 넣었다가 닭에게 먹여 닭이 죽는지 살피는 방법이다. 시신의 위 내용물을 쥐에게 먹여 이상이 나타나면 독성 물질을 본격 조사하는 현대의 독극물 예비검사와 비슷하다.

/글 김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가난한 부부 도와준게 화근
남편독살 사주 누명쓰고 옥사
<6> 새로운 세상의 虛와 失 - 충청도 황간현 음작용 사건

동학혁명당시 음작용이란 者가 별사


1894년 9월 충청도 황간현 남면 신평리에서 음작용이라는 사내가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의 죽음이 부인과 그녀의 정부(情夫)에 의한 독살인가 아니면 단순한 병사(病死)인가 하는 점이었다. 9월12일 죽은 음작용의 숙부 음복원은 조카가 타살됐다고 관아에 고발했다. 음작용의 부인 이씨와 정부 이치장의 공모 살해가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헌(東軒)에서 이치장은 전연 다르게 진술했다. 이치장은 음작용의 건강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보신이나 하라며 닭국을 준 것뿐인데, 음작용이 죽자 자신과 음작용의 아내 이씨 부인의 화간 사실을 안 음복원이 동학교인들과 짜고 닭국에 독을 넣어 조카를 죽인 게 분명하다며 자신을 구타하고 주리를 틀었다고 말했다.

이씨 부인 역시 협박에 못 이겨 거짓으로 그리했노라고 증언했으나 사실은 음복원과 동학교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벌인 공모극이라고 주장했다.

재산을 탐낸 음모?

“동학교도들과 음복원이 저를 잡아다가 주리를 틀고 결박하고 위협하며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따지기에 ‘내 본시 잘못이 없고 죄명도 알지 못하겠소’라고 답하니 교인(敎人)들이 다시 ‘네가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간통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다 할 것이며, 또 약을 타서 음작용에게 먹게 해 병을 얻게 했으니 이것은 또 누구의 잘못이더냐. 이래도 죽을 죄가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는 본래 극약을 타서 먹게 한 일이 없는지라 극구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음작용의 처 이씨 역시 잡혀와 저처럼 결박 당했는데 그들이 주리를 틀며 독약을 먹였는지 묻자 그녀는 참으로 맹랑한 말이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이씨 부인의 주리를 틀었고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제가 닭국을 주어 남편에게 먹였다고 답한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교인들은 제게 ‘인명이 중하냐, 아니면 재산이 중하냐?’고 묻기에 제가 ‘인명이 중하오’라고 했더니 그럼 ‘돈 1,000냥을 당장 내 놓으라’며 계속 주리를 트는 바람에 그 자리를 면하고자 준비하겠다고 간청했던 것뿐입니다.” 이치장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 모든 일은 음복원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꾸며낸 일로 자신의 재산을 노린 일이라고 극구 주장했다.

하지만 음작용의 처 이씨는 이치장의 주장대로 협박에 못 이긴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일관되게 모든 일이 이치장이 사주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게다가 자신과 이치장을 모두 엄벌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이치장이 저의 부부에게 빌려준 돈을 계속 독촉하더니 하루는 제게 돈을 갚기 어려우면 나와 동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하자 그 후에는 함께 도망가자는 말 대신 약을 사다 주며 남편에게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제 남편은 본시 가슴에 통증이 있었지만 복통 증세는 없었는데 이치장이 준 닭국을 먹은 후에 복통과 설사가 심해져서 무슨 일인지 의심스러웠는데 일전에 약을 사다 주며 먹이라고 한 이치장의 말을 떠올리고는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씨 부인은 이치장이 국을 주면서 남편에게만 먹이고 자신은 자신의 집에 와서 따로 먹도록 권유한 일도 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자신과 이치장을 대질 심문하면 되지 않느냐고 따졌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더니

양반 이치장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이씨 부인과 마주 앉아 대질심문을 받았다. 계속해서 이씨 부인은 자신의 남편 음작용이 사망한 이유는 자신이 독극물을 먹인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 자신에게 음심(淫心)을 품었던 이치장이 시킨 일이며 남편에게 먹이라고 준 독이 든 닭 국물 역시 이치장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치장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언제 그랬느냐. 내가 너희 부부를 살려준 죄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너를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겠도다. 도대체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내 이치장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9월26일 마침내 황간현감은 관찰사에게 이치장의 범행 일체를 보고했다. 음작용의 독살을 사주한 죄로 처벌함이 마땅하다는 발사(跋辭ㆍ사건조사를 마친 사또의 견해)였다.

지난날을 떠올리자 이치장은 더욱 억울한 생각뿐이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온정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슬픔이 복받쳤다. 얼마 전 마을에 이사 온 음작용 내외가 살길이 없어 굶주리는 것을 보다 못해 술집이나 하고 살라며 돈을 꾸어준 일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 물론 돈을 제 때에 갚지 못한 이씨 부인의 미안해 하는 마음을 이용해 몇 번 간통한 적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독극물을 주어 음작용을 살해하라고 한 적이 없는 것은 하늘이 아는 일인데 말이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놈의 세상이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새로운 세상이 온다며 그 해 초 전라도 지방에서 불같이 일어난 동학교도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충청도에까지 들이닥쳤을 때 무언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그였다. 스스로 도인(道人)이라고 자처하며 무리 지어 다니는 동학교인들은 마을에 들어와서는 억울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며 아무나 잡아다가 고문하고 마음대로 처벌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자신의 돈을 뜯어내려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어 이렇게 살인 누명마저 씌우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해서 기대했건만 이제 감옥에서 죽게 생겼으니 나의 운명이 애석할 따름이다.” 이치장은 하염없이 세상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다

사건 발생 후 몇 달이 지난 1894년 12월 황간현감에게 재조사를 지시하는 한 통의 비밀 훈령이 내려왔다. ‘음작용 사건의 경우 각인(各人)들의 진술에 모호한 점이 있어 재조사를 해야 하나 당시 비도(匪徒ㆍ동학교인들을 정부에서 부르는 명칭)들의 소요가 크게 일어나 제대로 조사할 수 없었다. 이제 소요가 잦아들었으니 다시금 조사한 후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라.’

그런데 재조사 결과 사인(死因)이 독살(毒殺)에서 병사(病死)로 바뀌는 상황이 발생했다. 더욱이 모든 일은 음복원이 동학배들과 함께 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공모한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초검과 복검의 조사 결과가 판이하자 삼사(三査ㆍ3차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1895년 2월21일에 실시된 세 번째 조사에서 사건의 전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결정적 증언을 한 사람은 이치장의 친척이자 마을 존위(尊位ㆍ나이 든 어른) 이극선이었다. 그는 그 동안 말 못하고 지낸 자신을 책망하듯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고발했다.

“1894년 2월 음작용이 타관에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살 방도가 없자 이치장이 사정을 애처롭게 여겨 쌀과 누룩 등을 빌려준 것이 40~50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6월이 되어 이치장이 돈을 받으러 갔는데, 이때 음복원은 도리어 50냥을 내놓으면 조카며느리를 아예 내어주겠다고 협박하였고, 이에 이치장이 유부녀를 매매하려 든다며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8월이 되어 음복원이 동학배 100여명과 무리를 지어 이치장을 결박하고 구타한 후 가산을 빼앗았으며,

(중략)음작용의 처 역시 여러 차례 악형(惡刑)을 견디지 못해 독약을 타 먹였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제 문중 사람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전후 곤욕을 당한 것이 음복원의 음모가 아닌 것이 없는데도 동학배들이 기세등등할 때라 원수를 갚을 도리가 없어 오직 세상이 안정될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치장은 그 사이 그만 옥중에서 죽고 말았으니 원통함을 어찌 하오리까. 이제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라나이다.” 이극선의 한 맺힌 흐느낌이 이어졌다.


개인의 이익위해 혁명 악용 많아

1894년의 동학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봉기였으며 억압 받는 민중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대의(大義)를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지만, 음복원처럼 개인의 이익을 위해 혁명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남도(南道) 일부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고 동학교인들이 지방의 권력을 장악하자 억울한 사람들은 그 동안의 불평등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를 들추어 보면 꼭 그렇게 희망적인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에서 동비(東匪)를 토벌하는 사이 공권력을 능가하는 동학 조직에 기대어 여러 가지 불법을 자행하는 동학교인들, 그리고 여기에 빌붙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없는 민중에게는 어차피 권력이란 나누어 갖지 못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894년 한해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그 피해자였다.

관찰사의 사건 최종 처리서
이제 3차 조사의 보고를 받았더니 음작용이 병으로 천수(天壽)를 다하였으므로 죽음에 의심이 없는 법인데, 비적들이 위협하고 흉악한 계획을 세워 죽은 자를 팔아 산 자를 해치려 하였으니 의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호의로 닭국을 만들었으나 도리어 중독되었다고 공갈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릇된 판결이 오래되어 이 때문에 사람이 죽었으니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음복원이란 놈이 앞장서서 모의하고 이씨 여인도 이를 따랐으니 둘의 잘못이 차이가 없도다. 엄벌에 처하도록 할 것이다.


젊은 군수 우국충정 자결에 '뒷소문'
<7> 시국(時局)을 탄하노라 - 1906년 서흥 군수의 죽음

의원 '火病'진단… 이부자리서 '시국 한탄'유서 나와
"검험말라" 유언 불구 內部의 日人고문이 검험 주장
시신 옮긴뒤 감감… "공금유용 손실 비관" 소문만

1906년 8월29일 아침 황해도 서흥 군수가 병을 앓다가 사망했다는 보고가 황해도 관찰사에게 올라왔다. 잠을 자던 서흥 군수 최동식이 갑자기 머리를 심하게 떨더니 아무 말도 못한 채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고를 목격한 사람은 오직 관아에 남아있던 향장(鄕長ㆍ조선 시대 향청의 우두머리) 문정순과 통인(通引ㆍ수령 아래서 잔심부름 하던 하급 서리) 오영창 뿐이었다.

■ 젊은 군수의 뜻밖의 죽음

문정순은 군수의 죽음이 너무나 뜻밖이라고 말했다. “8월27일에는 군수께서 통인 한 명을 데리고 각 관청을 순시했는데 이튿날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공무(公務)를 폐하고 아무도 방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28일 저물 녘에 군수께서 저를 부르시기에 즉시 들어가 안부를 여쭈었더니 ‘내가 본래 앓고 있는 병이 있어 늘 환절기만 되면 발병하네’라고 말씀하시더니 ‘역참(驛站ㆍ역마를 바꿔 타던 곳)의 주사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손이 떨려 답장을 쓰지 못하겠으니 대신 써 주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나이가 많고 눈이 어두워 대신 써드리지 못하였고 통인 오영창을 불러 쓰게 했습니다. 답장을 하고 나자 군수께서 제게 ‘밥은 먹었느냐’고 묻고는 나가서 밥을 먹고 돌아오라고 하시므로 제가 저녁을 먹고 향유사(鄕有司ㆍ서울과 교류가 있는 시골 단체의 직원) 임상율과 함께 들어가 건강 상태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군수는 ‘향청(鄕廳)이 비어있을 것이니 향유사는 나가서 향청을 지키시고 향장은 잠시 내 방에 머물면서 병중의 무료함을 덜어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내 한밤중이 되어 돌아가 쉬려는데 군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오영창과 함께 침소에 들어가 병세를 살폈습니다. 군수께서 눈을 감고 머리를 마구 흔드는데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다급하게 몸이 어떠시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고 이어 정신 차리라며 여러 차례 불렀으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황당하여 방자에게 여러 서리들과 향청의 유사(有司ㆍ사무직원)를 불러 모으라고 하였는데 당시 김성대는 신병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향유사 임상율, 서리 박근호ㆍ박용화ㆍ한문규 등이 차례로 들어와 서로 상의한 후에 상장벌 사는 의사 김씨를 청해 진찰하였습니다.

김 의원은 ‘이는 화증(火症)이라 지극히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배 즙으로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답하였고 저희는 급히 배 즙을 짜서 숟가락으로 군수님의 입에 흘려 넣었지만 전혀 삼키지 못하였고, 전신이 펄펄 끓다가 인시(寅時ㆍ새벽 4시 전후) 즈음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 망국을 개탄한 유서가 발견되다

문정순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군수께서 급사하자 저희들은 당황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시신을 수습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시신을 관아에 두는 것이 예의가 아니므로 즉시 다른 방에 옮기려 하다가 이부자리를 들추어보았더니 거기에 종이 몇 장이 있었습니다. 통인 오영창이 꺼내 보았더니 서울 본댁에 보낼 서간 하나와 서리들에게 내리는 고시(告示), 그리고 유서(遺書)였습니다.

시신을 수습하다가 유서를 발견하게 된 저희들은 군수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할지 서로 논의하다가 유서에 스스로 자결한다는 말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자살로 보고하기보다는 일단 병환으로 숨졌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군수와 가장 가까운 오영창 역시 같은 진술을 했다. “28일 군수께서 계속 자리에 누워 계시면서 공무를 중지하므로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진지를 올릴지 여쭈었더니 ‘아직 먹을 생각이 없으니 분부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녁 때 또 다시 물었더니 그때는 가지고 오라고 하셨지만, 수저를 들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장탄식을 하며 돌아 누우셨는데 그날 새벽 갑자기 향장이 불러 달려가 보니 그만 이렇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8월29일 서흥 관아의 사령 옥선일은 부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울 옥인?군수의 집으로 자전거를 달렸다. 부고를 전해들은 가족들은 크게 놀랐고 군수의 큰 형님과 조카가 우선 서흥 관아로 떠날 채비를 했다. 상 치를 물건들을 마련하라고 가족들에게 분부한 그들은 30일 옥선일과 함께 서흥으로 향했다.

군수의 큰 형님은 관아의 서리들이 전해주는 서간과 유서를 받아 들고 망연자실했다. 그리고는 서리들을 향해 비장하게 말했다. “이는 내 아우의 친필이 옳구나.

일전에 내 아우가 보낸 편지에 반드시 죽겠다는 말은 없었으나 내용이 시국을 대단히 개탄하는 것이었는데 끝내 이런 변고가 생겼구나. 내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혹이 없지 않았는데 이제 이 편지를 보니 의혹이 풀린다. 만일 노친이 안 계셨더라면 나 역시 따라가고 싶구나.”

9월2일 서울에서 내려온 군수의 형은 철도를 이용해 시신을 집으로 이송했다. 값싼 철로로 운반한 것은 군수의 유언 때문이었다. 서흥군의 오영창과 서리 김재민 등이 함께 호상(護喪)해 서울로 따라갔다. 혹 문제가 생기거나 조사할 일이 있으면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군수의 가족은 이미 친필 유서를 본 데다 검시를 하지 말라는 망자의 유언도 있고 해서 급히 선산으로 옮겨 시신을 매장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옥인동 집에서 급한 전갈을 들고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매장을 멈추라는 것이었다.

■ 일본인 고문의 개입과 뜬금 없는 소문

내부(內部ㆍ지금의 행정자치부)에서 검시를 하겠다니 즉시 서흥 군수의 시신을 서서(西署ㆍ서울 서쪽을 관할하던 경찰서)로 옮기라는 명이었다. “애초에 검험을 청한 일이 없는데 검험이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내 당장 내부에 들어가 검험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할 것이다. 일단 운구나 하관을 하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군수의 조카가 자리를 떴다. 그는 한참이 지나 어스름할 무렵에서야 돌아왔다.

내부에 들어가 유서를 보여주고 의심할 것이 없다고 누누이 설명하고 면검을 요청했지만 내부 관리들은 그저 모든 결정은 일본인 고문(顧問)이 한다는 답변뿐이었다. 차라리 일본인 고문에게 직접 가서 면검을 요청해보라는 식이었다. 결국 일본인 고문실에도 들어가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질 않았다는 말이었다.

군수의 가족은 세상을 한탄하면서 시신을 일단 서서로 유치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검시를 했는지 안 했는지, 검시를 했다면 사인에 대한 정확한 결과는 나왔는지 전연 알 수 없었다. 참으로 답답했지만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아마 일본인 고문은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그런데 희한한 소문이 서흥군 사람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실은 군수가 시국을 한탄해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세금으로 거둔 공금을 가지고 쌀 무역을 하다가 6만 냥을 손해보고 이를 채워넣기 어렵자 비관해 죽은 것이라는 말이었다.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소문인지 모르겠으나 군수의 죽음을 악의적으로 조작하는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서흥군 서리 김성대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관아의 재정 문제도 책임지고 있었다. “유서를 여러 사람이 보았으며 친필 여부를 군수의 형님께서도 확인하신 바입니다. 어찌 비밀이나 감추어진 진실이 있겠습니까. 제가 군수의 가장 가까운 서리로 의외의 죽음을 당한 것만도 통분(痛憤)을 금할 길이 없는데, 지금 공금으로 무역하다가 실패하여 비관하였다니 도대체 이 무슨 말입니까?

돈으로 말하자면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군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인데 읍내의 우매한 백성들이 사정도 알지 못한 채 어디서 망설을 듣고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지 만일 추호라도 의심할 만한 형적이 있다면 제 몸을 바쳐서라도 사실을 밝혀낼 것입니다.” 그는 비통하게 마지막 진술을 늘어놓았다.

군수의 시신은 서울로 보내져 일본인 관할 하에 놓인 상태이며, 심문만 따로 황해도 서흥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이미 검시와 심문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사를 담당한 황해도 관찰사는 차라리 내부에서 서흥군의 서리를 불러다가 조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볼멘 목소리를 했다. 내부 관리들 역시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일본인 고문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1906년 이미 대한의 국운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다. 의병장 신돌석, 최익현, 민종식, 기우만 등이 모두 그 해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심지어 평해 군수 강재천은 군수직을 버리고 의병운동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젊은 서흥 군수 역시 우국충정으로 애국의 자결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흘러나온 애매한 소문과 함께 그의 죽음은 역사 뒤로 사라져 버렸다. 곧 이을 망국의 운명처럼 말이다.

서흥군수의 유서
시국에 대해 생각하니 다만 통곡하고 유감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본래 용렬하고 우매하여 살아도 세상에 이익이 될 것이 없고 죽어도 나라에 손해가 될 것이 없으니 살고 죽는 것에 경중이 없으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스스로 금할 수 없어 보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하여 이제 이와 같이 하련다. 괜히 주변 사람을 의심하지 말 것이며 시신도 드러내 검험하지 말기 바란다.

1906년 8월 27일 서흥 관아에서 쓰다

/김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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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 가셨단다”

35세의 정씨 부인은 고향 본가에서 20리나 떨어진 황해도 신계에 출가해 살고 있었다. 그런데 1795년 9월21일 오후 열 살 가량의 아이가 집에 달려와서는 아버지 정완석이 졸지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했다. 너무 놀란 정부인은 그 길로 친정으로 향했다.

20리는 여자 걸음에 그리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지만 급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에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버지 정완석은 이불을 덮은 채 죽어 있었고 옆에서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동네 사람 이노미한테 맞아 돌아 가셨단다.

청심환도 먹이고 심지어 참기름과 똥물마저 드시도록 했으나 끝내 이렇게 되셨구나.” 이 말을 듣자마자 정씨 부인은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이노미는 현재 마을의 상여계(喪輿契) 계장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정완석은 작년의 상여계 계장이었다.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데다 싸울 일이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런 변고가 발생했을까? 정씨 부인은 이노미를 당장 쳐 죽일 생각으로 밖으로 달려 나가다가 멈칫했다.

마당에는 이미 이노미가 결박돼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인의 동생 정금산과 형부 등이 이노미를 붙잡아 기둥에 묶어 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가?” 이노미의 대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내가 어찌 네 아버지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겠느냐. 삽선(羽 아래 妾, 扇ㆍ상여로 운구할 때 쓰는 일종의 의례도구)으로 무심코 쳤는데 의외로 돌아가신 것뿐이다.”

저간의 사정은 이랬다. 9월21일 한동네에 사는 김씨 양반 댁이 초상을 치렀다. 동네 상여계 계원들이 상여를 가지러 마을 창고로 갔더니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상여계 전ㆍ현 소임(所任)인 이노미와 정완석이 다투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이미 정완석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노미는 “상여에 사용되는 죽장(竹杖)이 본래 아홉 개인데 지금 한 개가 없어져서 그 이유를 지난해 계장 정완석에게 물었더니 이미 인수인계가 끝난 일을 가지고 전임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도리어 화를 내는 바람에 서로 욕을 하다가 죽장을 들고 휘두르며 싸우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정완석이 먼저 자신의 엉덩이를 두 차례 가격하므로 화가 나서 정완석의 머리 부위를 몇 차례 때렸더니 그만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도주한 이노미의 부인

이노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씨 부인은 삽선을 찾아 들고 묶여 있는 이노미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결박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노미는 몸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이며 맹타를 피했다. 그러자 정씨 부인은 더욱 화가 나서 “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비를 죽여 놓고서 어찌 감히 몽둥이를 피하려 하느냐”고 소리치며 다시 마당에 놓인 새끼줄로 이노미의 목을 감아 마구간 기둥에 세게 묶었다.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이노미는 그저 정씨 부인의 독타(毒打)를 맞고 신음소리를 내며 죽어갔다. 이노미가 죽을 때까지 난타를 그만두지 않던 정씨 부인은 저녁 무렵 아버지의 원수가 죽자 곧바로 읍내 유향소(留鄕所)로 달려갔다. 원수 이노미를 살해했다고 자수할 참이었다.

졸지에 한 마을에서 두 명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후환이 두려워 슬금슬금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거나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집에 있다가는 사건과 무관해도 일단 잡혀가 매를 맞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건 발생 후 도주한 사람은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들 뿐이 아니었다.

사망한 이노미의 부인 이씨는 남편이 결박된 채 정완석의 집 마당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고는 그 길로 내뺐다. 그녀는 후일 포교에 붙잡혀 사또 앞에 대령했다. “네 이년, 어찌하여 남편을 사지(死地)에 두고 도망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더냐?”

42세의 이씨 부인은 남의 이불이나 옷가지를 대신 빨아주고 먹을 것을 얻는 것을 호구지책으로 삼고 있었다. 사건 당일에도 빨래를 構?있는데, 이웃 여자가 와서 소식을 알려주어 남편이 정완석의 집에 결박돼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창황 중에 달려가 보았더니 과연 남편 이노미가 결박돼 꿇어앉아 있었는데 급히 다가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남편은 “슬쩍 때린 듯한데 액운(厄運)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죽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네가 보고 있어도 이득이 없으니 빨리 멀리 도망가라”고 했다는 진술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은 촌부(村婦)인지라 겁을 먹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쳤는데 이틀이 지난 23일 아침 포교에게 붙들려 이렇게 신문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일을 죽은 남편의 지시에 따라 한 것 뿐이며 남편이 죽는 광경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고발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오히려 자신의 시누이가 내막을 잘 알고 있으니 그녀를 신문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수안군수의 보고_정씨 부인을 유배에 처하심이

관련자들을 신문한 후 사망한 정완석과 이노미의 시신을 차례로 검험한 수안군 사또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증인들의 진술을 보면 정완석과 이노미가 언쟁할 때 정완석이 삽선으로 먼저 이노미의 좌측 엉덩이를 후려치고 이노미 역시 다른 삽선으로 완석의 머리를 맹타하였는데 이때 완석이 즉시 고꾸라졌으므로 정완석이 강하게 맞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노미의 처 이씨 부인의 공초를 보면, 결박된 남편이 “내 이제 죽을 것이니 너 역시 죽을지 모른다. 도망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니 실로 이노미가 그 죄를 스스로 알고 죽기를 기다렸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노미가 정완석을 타살(打殺)한 것이 분명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원록’에도 귀 근처는 속사처(速死處)라 하였다. 또한 칠십 난 기운 약한 노인이 급소를 맞았으니 즉시 사망하였음이 분명하다. 실인(實因)은 ‘피타치사’(被打致死)로 기록한다. 한편, 정 여인의 공초를 보면 2개의 죽장(竹杖)으로 이노미를 난타하였는데 이노미가 좌우로 피하므로 끈으로 목을 기둥에 다시 묶은 후 타살하였다고 하니 이노미의 치명상 역시 ‘피타(被打)’가 원인이다.

우매한 소견으로는 정 여인이 인명(人命)을 타살(打殺)한 것이 실로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살옥(殺獄) 조항에 ‘그 아비가 구타 당해 중상을 입은 경우 아들이 그 사람을 죽일 때는 사형을 면해 유배에 처한다(減死定配)’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비가 살해된 경우 관의 조사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원수를 마음대로 죽인 경우에도 감사정배(減死定配)한다’고 하였으므로 이제 정 여인은 율문(律文)에 따라 유배함이 마땅할 듯하다. 그리고 이노미의 부인 이씨는 남편을 돌보지 아니하고 도주하였으므로 비록 우매하고 겁을 먹었다고는 하나 윤상(倫常)을 헤친 죄가 크므로 그대로 둘 수 없을 듯하다.]

황해도 관찰사의 최종 판결_ 말리지 않은 동임, 면임들도 벌하라.

보고서는 잘 받아 보았다. 과연 살옥(殺獄)의 죄값은 반드시 정범을 확정한 후에 처리해야 하는 중대한 일이다. 정완석이 맞은 후 금방 사망하였고, 귀 부위가 급소인 데다가 여러 사람의 증언을 참고하면 칠십 노인을 가격한 흉한(兇漢)이 이노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정씨 부인의 복수는 천리(天理)에 따름이니 형틀을 채우거나 고문하지 말 것이다.

만일 사람을 죽인 자는 역시 죽여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정씨 부인은 법전(法典)에 의거해 특별히 사면하고, 두 구의 시신은 모두 가족에게 내주어 매장하도록 할 것이다. 물론 정씨 부인으로 말하자면 부모의 원수와 한 하늘에 살 수 없다는 의리를 보인 것이지만 범행 당시 이웃들이 마땅히 극구 말리고 사또의 조사를 기다림이 당연한 일이다.

면임(面任), 풍헌(風憲) 등이 금지할 뜻이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었으니 이는 실로 후일의 폐단을 야기할 것이다. 본면(本面)의 면임(面任), 이임(里任)을 모두 이러한 뜻으로 엄히 분부하는 의미에서 각각 결장(決杖) 30도에 처해 후일의 징계로 삼도록 할 것이다.

"부모원수와는 한하는 못인다"
사람을 죽여도 사형않고 유배

부모를 죽인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이 조선 시대 사람들의 윤리의식이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복수라면 비록 살인이라도 용서됐다. 다만 공권력(公權力)에 의한 처리를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살인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하지 아니하고 형을 줄여 유배형을 내렸다. 그런데 정씨 부인처럼 여자의 몸으로 원수를 때려 죽였다면 문제는 달랐다.
이는 효녀나 장부(壯婦)만이 가능한 일이니 더욱 장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하여 정씨 부인은 유배형도 면한 채 '사면(赦免)'을 받게 되었다. 도리어 남편을 죽음에 몰아넣은 채 혼자 도주한 이노미의 부인이 처벌되었으니, 조선 사람들의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입력시간 : 2003/12/15 17:11

"첩이 바람피웠다" 살해 양반에 솜방망이
음란한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 - 황해도 배천 김씨 부인의 죽음

'通하던' 여인이 다른 이와 '새로 通하자' 죽여
살인범이 "때린적 없다" 거짓말 했어요 관용

1795년 8월22일 이른 아침 황해도 배천군수 이술원은 관아에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배천군 유향소(留鄕所)에서 한 장의 소장(訴狀)이 날아왔다. 배천군 하금산방 상일리에 사는 원재한이라는 자가 자신의 의붓어머니 김씨가 며칠 전인 19일 상이리에 사는 양반 이봉진에게 맞아 죽었다며 유향소에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지방 사또에게 살인사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명의 중요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술원은 급히 관아의 서리배와 의생(醫生), 율생(律生) 및 오작노(검시를 돕는 관노)를 불렀다. 관아로부터 북으로 50리쯤 되는 먼 거리였지만 한시가 급하였으므로 아침 일찍 서둘러 현장에 갈 셈이었다.

상일리의 시장 변에 있는 김씨 부인의 집에 도착하자 구타 흔적이 역력한 시체가 놓여 있었다. 이장과 동수(洞首) 등 마을 책임자들, 유족과 이웃을 포함한 사건 관련자들이 현장에 모여 있었다.

어머니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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