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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 영욕의 30년
 관리자  01-19 | VIEW : 3,494
[집중 분석]

끝내 제 몸마저 불태운 ‘主君정치’의 한계

‘동교동’ 영욕의 30년

가문 학벌 경력 등 모든 면에서 정치적 비주류였던 DJ와 동교동계. 선전선동 유격전 합종연횡으로 살아남아 마침내 권력을 거머쥔 그들은 끝내 ‘지역적 비주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몰락했다.

동교동계 30년 정치사에 숨은 얘기들.

  동교동이라는 이름의 정치집단이 이제 무대를 떠난다. ‘3김 정치’라는 이름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지역할거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이다. 파란만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동교동 정치도 종막을 고하고, 출연 배우들도 조용히 짐을 꾸려야 할 시간이다. 더러는 새 무대의 배역으로 발돋움하겠지만 대개는 퇴역하는 DJ와 함께 막 뒤로 사라질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 구속, 아태재단 상임이사 이수동씨 구속 이후 동교동 정권은 부패정권으로 불린다. 게다가 의약분업, 교원 정년 단축은 세금과 국력의 낭비로 규정된다. 언론세무조사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호남인사 중용은 편파·편중인사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대북화해 정책은 일방적 퍼주기로 매도돼도 그리 이상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노벨상을 타기 위한 공작의 일부였던처럼 비아냥거린다. 이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도 단 한마디 변명도 없이 수모를 참아야 했다.

맨주먹 야당으로 명분 있는 선전선동으로 일어서서 합종연횡의 줄타기로 정권까지 잡은 동교동. 4수 끝에 기적처럼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그들의 집권시대가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실패와 과오 투성이로 몰리고, 차기 대통령 선거판에서 부패와 악의 상징처럼 빈정거려지는 현실은 눈뜨고 보기 딱할 지경이었다.

한국 정치사에는 남산 혹은 정보부, 안기부로 불리던 정치공작처가 있었다. 분단 내전 냉전 독재 학생혁명 군사쿠데타라는 특이한 역사가 배태한 제3의 막강 정치집단, 그것은 한국 정치에만 존재하는 괴물이자 어두운 유산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권력보위 기능을 맡았던 이 무소불위의 남산조직, 거기에 맞섰던 가장 두드러진 대항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동교동이었다. 권력욕의 화신이어서였 건, 대통령병에 걸렸기 때문이었 건, 아니면 불굴의 신념으로 뭉친 민주투사여서건 간에 동교동 사람들은 그렇게 불릴 것이다.

비주류 정치인 김대중의 좌절

3선 개헌이 추진되던 196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이하 경칭 생략)이 마지막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1997년까지 적어도 30년 동안, 한국 정치의 핵심적 대립각은 남산과 동교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의 국회의원 낙선(1967년의 마지막 지역구 출마)을 겨냥한 공작에서 1997년 대선 당시 안기부가 꾸민 낙선공작(북풍)에 이르기까지, 말이 대립각이지 따지고 보면 남산의 조직과 돈, 그리고 권력에 기댄 공격과 동교동의 맨주먹 투쟁, 방어의 끝없는 전투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산과 동교동의 양자 대결 양상은 볼 수 없었다. 김대중은 아직 젊었고 동교동이라는 실체는 미약했다. 오히려 김영삼 의원이 김형욱 정보부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하는 등 정보정치와 더 첨예하게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대중은 40대 초반의 곡절 많은 국회의원, 말 잘하고 머리 좋은 신진기예의 일인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김대중은 비주류였다. 그가 비주류로 돌 수밖에 없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제기된다. 번듯한 4년제 대학 졸업장을 갖지 못한 게 원인이라는 해석, 호남 출신이라 겉돌고 주류 중진들로부터 소외됐다는 해석, 머리가 비상하고 성격이 유별나서 주류에는 어울리지 못했다는 분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아무튼 김대중은 비주류의 야당 원로들이 돌봐서 기른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그가 1950년대 목포에서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겉도는 무명에 불과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선박사업을 했고 군소 신문사 사장을 지냈다고는 하나, 손에 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모 덕을 타고난 것도 아니기에 좋은 집안을 자랑할 수도 없는 편모 슬하의 빈궁한 청년이었다. 학벌도 목포상고 졸업장밖에 없었다. 서울에 지인, 친척이 많을 수도 없었다. 주류의 반열에 기대 설 조건이라고는 한 가지도 갖춘 게 없었던 것이다.

비주류라는 것은 신문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듯이 주류가 힘과 돈의 중심을 장악하고 자투리 잉여들이 비주류로 불릴 뿐이다.

주류는 스스로의 선택과 쟁취로 이루어진다. 주류는 승자나 선두주자들의 자랑스런 대열이다. 반면 비주류는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다. 지고 밀리고 소외돼서 도리 없이 불리는 가련한 이름이다. 다만 낙오자 그룹에도 머릿수가 있고 주류에 대항하는 반사적인 입지가 있기에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박순천 홍익표 윤제술 정일형 같은 비주류가 김대중의 정치적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김대중과 동교동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훑어볼 차례다. 국회의원 선거 첫 출마는 1954년 목포에서였다. 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서서 고배를 마셨다. 1958년 5월 4대 민의원 선거 때는 멀리 강원도 인제에 원정 출마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4대 선거는 자유당 정권 말기 여당 후보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김대중은 선거관리당국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상대 후보의 횡포가 심한 가운데 후보 등록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김대중의 근성과 ‘동교동식’이라고나 할 투지는 이때부터 엿보인다. 그는 굴하지 않고 여당 후보에 대항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다른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식 등록하고 싸웠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후에도 선거법 규정에 따라법원에 후보등록방해 문제를 놓고 소송을 제기했다. 1959년 3월 법원은 1년여의 심리 끝에 4대 인제군 민의원선거를 무효로 판결하게 된다.  

가신 권노갑, 선거판 귀재 엄창록 등장

1959년 6월 인제 보궐선거가 실시된다. 그러나 또 실패. 자유당 후보측은 색깔론으로 김대중을 잡았다. 동교동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후보와 일면식도 없는 전라도 사람을 데려다 김후보가 마치 공산당과 관련 있는 것처럼 선거구를 돌아다니며 허위 모략을 하게 만들었다. 또 유권자의 7할 이상이 군인이었는데, 군부대 투표장에서는 여당 후보란에만 기표시키는 부정행위도 공공연히 자행했다”고 한다. 인제 선거는 김대중의 미래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사상(색깔) 시비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인제 선거까지 세 번의 선거 실패로 김대중은 궁핍의 나락에 떨어졌다. 그 와중에 1960년 4·19 혁명이 나고 그해 8월 5대 민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끼니조차 걱정할 정도로 어려워진 김대중은 다시 인제로 나가 근근이 싸웠으나 1000여 표 차이로 낙선하고 만다. 네 번째 실패였다.

그러나 소속 정당인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어 장면 총리 내각이 발족한다. 이때 김대중은 현역 의원들을 제치고 민주당 대변인으로 발탁된다. 머리 좋은 청년 능변가, 그러나 선거에는 지독히도 불운했던 그에게 다행히 중앙정치 무대가 문을 열어준 것이다.

선거 빚 때문에 아내까지 잃는(자살) 비운을 맞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김대중을 이긴 민의원이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의원 자격이 박탈되고 보궐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5월13일 보선에서 김대중은 정계 입문 7년 만에 의원 배지를 달게 된다. 5월14일 인제군 선관위에서 당선 확인증을 받았다. 파란만장의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더 큰 풍파와 좌절의 시작이었다. 이틀 뒤 5·16 군사 쿠데타와 함께 국회 해산. 등원 한번 못한 채 다시 무직이 되고 만다. 그 무렵 DJ 주변에 권노갑 강원채(나중에 삼성당출판사를 세워 출판업으로 성공. 민한당 국회의원) 엄창록 등이 나타난다. 동교동 인맥의 배태기에 해당한다. 권노갑은 목포상고 후배로서 고교 시절 선배 김대중의 즉석 웅변에 감동해 운명적인 끈을 맺게 된다. 동국대를 나와 영어교사를 하다가 인제 선거 때 동지로 합류한다. “내 묘비에 ‘김대중 비서실장’만 적어주면 아무 여한이 없겠다(권노갑의 발언)”고 하는 평생 인연의 시작이다.

엄창록(1988년 사망)은 함북 주을 출신. 선거판의 귀재로 불리는 재주꾼이다. 원산사범학교를 중퇴하고 인제에서 신사장이라는 사업가를 도우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신사장이 김대중을 도왔기 때문에 그도 선거참모가 됐다. 상대(여당) 후보의 조직과 자금을 이기기 위해 의표를 찌르는 전략에 뛰어났다. 한마디로 기발했다.

야당 운동원이 양담배를 꼬나물고 다니며 여당 후보를 찍으라고 권유한다든지, 야당 운동원이 봉투에 담기에는 치사한 액수를 담아 여당에서 돌리는 돈이라고 뿌린다든지, 여당 후보 이름으로 고무신을 돌린 뒤 ‘번지수가 잘못돼 다른 집에 보내야 한다’며 되찾아 간다든지 하는 수법으로 여당을 교란하는 전술은 모두 엄창록의 창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엄창록은 김대중의 마지막 국회의원 출마가 되는 1967년 총선에서 그 출중한 아이디어를 십분 발휘한다. 박정희는 그해 총선에서 목포를 ‘정책지구’라 해 김대중을 의도적으로 낙선시키려 했다. 그 지독한 십자포화에서 김대중을 기사회생케 한 것은 바로 엄이었다. 체신부장관을 지낸 군 출신 김병삼의 자금력과 조직에 맞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김대중 특유의 선전선동과 조직 분야에서 엄창록의 게릴라전(카운터펀치)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김옥두 이수동 한화갑 가세

그 선거에 이김으로써 김대중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4년 후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박정희와 겨루어 540만표(100만표 차로 낙선)를 거두는 놀라운 성취로 내달리는 것이다.

김대중이 1963년 목포 선거에서 당선, 재선(사실상 초선)으로 등원하면서 참모 비서 등 식구도 늘어나게 된다. 1963년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있을 때 선전부 차장이 김상현이었는데 그는 김대중이 인제 낙선을 전후해 소공동에서 웅변학원을 경영할 때 강사로 있었기 때문에 한솥밥 인연이 오래됐다. 그리고 1964년 서울 서대문 보선에서 김상현이 임흥순(2·3대 의원)과 싸울 때 엄창록을 참모장으로 ‘임대’해 줄 정도로 형제가 됐다.

1965년에는 김옥두가 가세한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뒤 형 김원식(역시 동교동 초창기의 일원이다)의 소개로 입문한 것. 장흥 출신 김원식은 동향의 박석교라는 정치인을 도와 선거를 치르다 박석교와 같은 민주당 소속의 김대중을 알게 되고 동생 김옥두까지 데리고 동교동 식구가 된 것이다. 김옥두는 처음 광화문에 있는 DJ의 내외문제연구회 사무실에 1년 가까이 나가다 신임을 얻어 동교동으로 ‘발령’ 받았다.

이때쯤 먼 훗날 경기 성남에서 국회의원이 된 이윤수도 동교동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무렵 하의도 이웃마을의 이수동(나중에 아태재단 이사) 같은 동향 출신만이 주변에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김대중은 벌써 전국적인 지명도를 쌓고 있었다. 1964년 4월21일 김준연 의원 구속을 막기 위해 의사진행 발언을 무려 5시간19분이나 하는 기록을 세움으로써 유명해진 김대중은 민주당 선전부장, 대변인 등으로 지명도를 더욱 높였다.

1967년 총선에 즈음해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직장에 나가던 한화갑이 합류한다. 하의도와 인접한 섬 도초 출신인 한화갑의 입문으로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동교동 3인방의 틀이 잡힌다. 세 사람은 숱하게 명멸해간 동교동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 가장 크게 빛을 보게 된다. 이들은 비교적 젊었고, ‘상대적’으로 우수했으며, 누구보다도 끈끈한 동지애와 의리를 보여주며, 위기와 좌절 속에도 몸 사려 달아나지 않고 김대중을 지키고 보필했다.

1969년의 3선 개헌과 1970년의 야당 대통령후보 경선은 동교동을 확실한 세력으로 승격시키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이철승과 후보 경쟁을 하게 된 김대중은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주류 김영삼(실제로 당권을 장악한 유진산은 김영삼을 밀었다)을 제치기 위해 이철승과 손잡고 대역전극을 시도했다.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후보 김대중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지지 인사들의 고난


1987년 6월항쟁 직후, 그때까지 동교동 자택에 연금돼 있던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시민들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왼쪽에 김옥두, 오른쪽 끝에 남궁진씨가 보인다.  1970년대는 김대중과 동교동에게 천당과 지옥을, 희망과 절망을 교대로 안겨준 10년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제 1야당 대통령후보로 오른 것이, 그리고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맞서 540만표를 얻어 선전한 것이 기막힌 성취이자 천국에 다다른 기쁨이었다. 그리고 대통령후보라는 타이틀은 동교동 인재풀도 넓혀주어 경기도 양평 출신의 천명기(서울대 법대 졸업. 8·9·10대 의원을 지내고 5공 때 보사부장관 역임), 안병규(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부산일보’ 기자를 거쳐 11·12·13대 의원)도 한때 식구가 됐다.

1972년 ‘10월 유신’은 동교동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유신 쿠데타 10일 전 김대중은 고관절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나가고 없었다. 국회해산 비상계엄 헌법정지 대학휴교 언론검열 발표와 함께 동교동 비서 김옥두 조길환 등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 취조를 당해야 했다. 권노갑 한화갑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진 매질과 함께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대통령 선거 때 자금지원을 한 기업인 이름을 대라는 것, 김대중이 용공분자임을 고백하라는 것 등이었다. 김대중을 지지했던 언론인 경제인 정치인들도 정보부와 군부대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뎌야 했다.

김대중은 해외에서 망명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국내(동교동)에서는 김대중과 교신이 불가능해 해외 상황을 알 길이 없었다. 한화갑이 당시 합동통신사에 있던 외신기자클럽에 가서 DJ 관련 기사를 비밀리에 복사해 와 동교동에서 전략을 숙의하곤 했다. 그러다 정보부에 발각돼 불온문서를 본다는 이유로 끌려가 두들겨 맞는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이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된다. 배에 실려가다 수장될 뻔한 김대중은 닷새 뒤 동교동 집에 ‘배달’됐다. 이 납치 음모와 실행에는 정보부장 이후락을 정점으로 중정 요원 9개조 46명이 동원됐다. 정보부 공작선이 동원되고 도쿄 부산 서울로 이어지는 정보부 조직이 풀 가동됐다. 일본은 주권침해라고 들고 일어나고, 한일간 외교분규로 번진다. 총리 김종필이 사죄 사절로 일본에 가고,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경질된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한다. 박정권은 김대중에 대한 일본의 원상회복(납치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보내라는) 주장을 차단하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대중에게 수년 전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내걸어 법원 출석 요구서를 보낸다.

좌절의 시절에도 동교동과 김대중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1976년 3·1절을 맞아 ‘민주구국선언’을 몇 날 걸려 쓰고 다듬어,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함석헌 문익환 정일형 이태영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이우정 김승훈 등과 손잡고 발표했다. 동교동 식구들에 대한 지독한 고문 탄압은 다시 시작됐다. 김대중도 구속됐다.

DJ 팬 김광일의 이탈

김대중은 유죄판결을 받고 진주교도소에 갇힌다. 이때 부산의 젊은 변호사 김광일(통일민주당 국회의원,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이 동교동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김광일은 당시 DJ의 팬이었다. 고교 동창인 김기춘(당시 중앙정보부 국장, 노태우 정부 때 법무부장관)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변호인을 고집했다. 김광일의 회고에 의하면 김기춘은 “김광일, 우리는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고속도로에서 차로 치어 죽일 수 있다. 제발 김대중 앞잡이 노릇을 집어치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광일은 김대중과 세계 언론의 매개 역할을 하는데 미쳐 있었다. 그 무렵 김대중의 언동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김광일이 외부에 옮긴 것이다.

그런 김광일이 김대중을 등진 것은 1987년. 양김 단일화가 옳다고 믿고, 김대중의 양보를 채근하던 김광일은 DJ가 “나는 차기 대선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이번에 양보할 수 없다”고 하자 실망해서 YS 지지로 돌아섰다. 1987년 대선 국면에서 막판까지 동교동을 밀다가 최후의 순간에 김영삼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는 DJ 후계자 노무현을 YS에게 소개한 인연이면서도 2002년 대선 막판에 “노무현이 대통령 돼서는 안 된다. 나는 이회창을 지지한다”고 나서는 특이한 편력을 보였다.

1978년 12월 김대중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리고 곧 1979년 5월의 신민당 전당대회에 개입한다. 이철승은 중도통합을 내걸고 유신정권과의 타협적인 야당을 이끌고 있었다. 김영삼은 당권을 겨냥해 선명투쟁 노선을 내걸고 김대중의 조력을 요구했다. 김대중으로서도 박정희 정권과 대결하기 위해선 김영삼을 밀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은 총재 후보 경선에 나선 조윤형 박영록 김녹영을 동교동으로 불러들여 나서지 말 것을 종용했다.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설득했다. 중국음식점 아서원의 유명한 연설이 이때의 일이다. 김대중은 대의원들을 향해 “이번 신민당 전당대회는 김영삼 이철승의 개인 싸움이 아니다. 유신반대파와 친유신파의 싸움이요, 친민주파와 반민주세력의 결투다. 이철승은 중도통합을 말하고 있으나, 길거리 합승도 방향이 같아야 합승이다. 유신의 길은 동쪽이고 민주의 길은 서쪽인데 어찌해 광화문 한복판에서 왕십리 갈 사람과 신촌 갈 사람이 중도에 통합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선동했다.

이 연설의 약발로 당권은 김영삼에게 기울었다. 겨우 11표 차로 이철승을 이겼으므로 사람들은 연설의 효과를 더욱 과대평가하게 됐다. 이 전당대회는 박정희를 자극하고, 마침내 김영삼 총재 제명 파동, 부마사태, 그리고 10·26 궁정동 암살로 이어진다.

1980년대는 살벌한 유신의 종언과 더불어 도래했지만 동교동에게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3공과 유신정권이 육성해 놓은 군부(신군부)는 나름의 야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상은 독재에서 풀려난 또다른 ‘금단증상’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시끄러웠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의 경쟁도 신군부 음모의 빌미가 됐다. 그리고 3인을 둘러싼 정치꾼들의 흥분과 부추김 또한 요란했다. 유신 내내 정치 공백에 굶주려온 그들이었다.  

이불 호청 뜯어 플래카드

전두환 신군부의 총검에 동교동은 다시 박살났다. 김영삼 김종필 진영과 달리 김대중과 동교동은 내란음모, 즉 학생시위 배후조종세력으로 몰렸다. 예춘호 문익환 고은 이문영 한승헌 등이 다시 정보부에 끌려갔다. 김홍일 배기선 송기원(소설가) 설훈 심재권 이석표 신계륜 이해찬 등이 수배됐다.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이협, 해병대 예비역 장성 박성철(경호실장) 등이 잡혀갔다.

그밖에 박정훈 전대열 권혁충도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갇힌다.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에 저항하는 항쟁이 벌어져 시민과 학생 166명이 살해당한다. 군경 사망자도 27명(군인끼리 오인해 상호교전중 사망자도 10여명)에 달했다. 처참한 재앙이었다.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일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변호사 홍영기의 열띤 변론도 무위였다. 광주사태 주동혐의로 정동년 김종배 등 5명이 사형을 선고받는다. 변호사 홍남순과 정상용 등 7명이 무기징역을, 명노근 김상윤 등 163명이 5∼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김녹영 의원 등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종용, 그리고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김대중 사형집행을 포기했다. DJ는 1982년 3월 무기로 감형되고, 그해 12월 ‘신병치료’ 명목으로 미국으로 추방된다. 미국 체류기간 중 그는 김경재 이영작 박지원의 안내와 도움을 받게 된다. 안전기획부 파견요원들의 감시와 제동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하버드, 예일 등 200여 군데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그 녹음테이프와 활동상을 보도한 기사는 한화갑이 입수해서 동교동 내에서 회람되곤 했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DJ는 귀국한다. 그리고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이 미는 신민당은 선풍을 일으켜 국회 의석 109석을 확보, 전두환 정권을 압박한다. 그래도 김대중은 사면복권되지 않은 신분이어서 동교동에 갇혀 지내야 했다. 남궁진 김옥두가 이불 호청을 뜯어 ‘불법감금 해제하라’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동교동 지붕에서 흔들어 외신을 타고 보도된 것이 이 무렵이다. 배기선 설훈이 1985년부터 동교동 상주 멤버가 됐고 유훈근 이유형(전 한전감사) 배기운 한영애 전갑길 등이 합세해 연금기간 중 동지가 됐다.

1987년의 6월항쟁은 노태우의 6·29선언을 가져왔다. 김대중도 사면복권으로 풀려나 다시 자유인이 됐다. 그것은 또다른 분당과 단일화 실패라는 비극으로 치닫는 계기가 된다. 김영삼과의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3위 득표에 머물며 노태우 당선에 일조하고 만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정계은퇴 번복과 분당

그래도 1988년 총선은 동교동에 기회로 다가왔다. 소선거구제 방식으로 치러진 선거전에서 평민당은 제 1야당으로 약진했다. 의외의 성공은 다시 화를 불렀다. 김영삼 김종필이 노태우의 민정당과 합당을 도모함으로써 동교동계와 호남 고립화라는 최악의 구도로 치달았다. 여소야대에 시달리던 노정권이 1990년 비호남 연합정권의 형태로 민정당에 YS의 통일민주당, JP의 신민주공화당을 합치는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이다. 동교동으로서는 다시 만루홈런을 얻어맞은 격이었다.

1990년대는 동교동에 그처럼 우울하게 다가왔다. 1992년 3월 총선을 앞두고 DJ는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당대당 통합에 들어간다. 67대7의 의석을 하나로 합쳐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제로 한 것이다. 이 체제는 그런대로 선전, 97석을 따냈다. 민자당은 149석, 정주영의 국민당이 31석을 얻었을 때였다.

동교동 식구로 14대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16명. 김상현 권노갑 한광옥 한화갑 김옥두 김태식 이협 이윤수 남궁진 문희상 박지원 김장곤 박광태 최재승 홍기훈 이석현 등이다. 배기선 배기운 윤철상 등은 실패했다. 그해 12월 다시 대통령선거가 있어 세 번째 도전에 나섰으나 김대중은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영남권 득표 실패가 결정적이었다. 김영삼이 영남에서 총 474만표를 얻은 반면 김대중은 68만표밖에 얻지 못했다. 그는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김영삼 정권의 예봉을 피해 영국에 머물던 김대중은 귀국해 아태재단 이사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기택과 결별을 선언,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 복귀했다. 또다시 분당의 방식을 택했다. 이는 또 3년 전의 정계은퇴 선언에 대한 번복이었다. 여론과 언론의 비난에도 그는 1997년 대선의 길만 쳐다보았고 그 길로 내달렸다.

방해가 시작됐다. 대통령 김영삼 자신이 청와대에서 “세계 앞에 정계은퇴 선언을 했지 않느냐”고 견제했다. 여당 사무총장 강삼재가 신한국당 후보 이회창의 편에 서서 비자금공세를 폈다. 그는 “5공 청산 과정에 김대중은 수천억원의 돈을 모았다. 정계를 떠나지 않으면 노태우로부터 받은 20억원+알파를 밝히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검찰에 DJ 친인척 40여 명 명의의 378억원대 비자금을 수사하라고 촉구하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1985년 동교동 몫으로 정치에 발을 딛고 국회에 진출한 강삼재였으므로 그의 포격은 아이러니였다. 1997년 김대중은 김종필 박태준과 손잡고 공동정부를 공약했다. 선거 막판까지 박빙의 리드를 지켜 결국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소외계층 관심과 지지

참으로 기구한 세월을 이기고 네 번의 도전 끝에 오른 정상이었다. 동교동 사람들은 울었다. 미국 망명과 영국 체류 때 손발이 돼준 이강래 김한정 박금옥 등도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박상천 장재식 정균환 박지원 박선숙 임채정 김경재 배기선 이해찬 김한길 정동채 천정배 유선호 정한용 김영환 윤흥렬 황주홍 방용석 조한천 조성준 등도 숨은 유공자들이었다.

집권 이후 김대중과 동교동 집단의 본질적인 과오와 성공을 본격적으로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실패와 실수가 많았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으로 비판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 속에서 보다 깊고 정확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한국 정치사에서 동교동이라는 특수한 집단이 어떤 차별성으로 존재했는가에 초점을 맞춰보자.

김대중과 동교동은 ‘비주류’적 한계 속에서 자라고 정권을 잡았으며 마침내 집권기간 중에도 그 한계에서 발버둥친 측면이 있다. 1960년대 성장기에도 계보가 키워주었다기보다는 스스로 컸다. 독불장군 같은 비주류 중진들을 찾아다니며 인연을 맺고 자력으로 힘을 쌓았다. 우연히 첫 대통령 후보가 된 것도 비주류 연합전선이 성공한 때문이었다. 1970년대 이후 16년간 망명, 옥중생활, 연금이 되풀이됐기 때문에 그와 동교동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햇볕 드는 제도권 야당과는 달리 응달에 적응해야 했고 불편을 참고 살아야 했다.

비주류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동교동 정치의 컬러와 인적 구성도 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가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다. 1990년대까지 한국 정치사에서 혁신 진보 노동을 내세운 운동권 집단을 제외한 제도권 집단 혹은 정당으로서, 근로자 농민 도시빈민들로부터 비교적 뜨거운 지지를 받은 그룹이 김대중과 동교동이었다. 그만큼 DJ와 동교동의 지지기반에 대한 애정과 배려는 다른 정당에 비해 각별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평민당(평화민주당)이라는, 한국 사회의 비주류 표를 의식한 당 이름도 한 예다. 물론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비주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대목과도 함수관계가 있을 터다. 그런 비주류에 대한 김대중의 애정은 어디까지가 철학이고 어디까지가 계산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김원기(전 평민당 원내총무)는 증언한다.

노태우 정부 때 평민당에는 소외계층의 시위대가 잇따라 몰려들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짓눌려 온 노동자 농민들의 욕구가 일시에 폭발하면서 주로 야당 당사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이때 평민당 소속 의원이나 간부들이 짜증스럽게 말하면 DJ는 늘 “우리 당이 그들을 외면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그들을 생각해 주겠는가?”라며 나무랐다고 김원기는 전한다.

비주류 정치의 한계

동교동의 인적구성도 30여 년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가정형편 학벌 경력 면에서 비주류집단의 성격이 강하다. 물론 철새처럼 왔다 가버린 인사 중에는 명문대 출신에 가문 이름을 댈 만한 이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2002년 말 현재 보더라도 동교동의 이름 석자가 이마에 새겨질 정도로 또렷한, 당3역을 지내거나 장관을 거친 지명도 높은 DJ맨 가운데 서울대 출신이라야 한화갑, 고려대 출신은 남궁진 정도가 꼽힌다. 그리고 생활형편이 유복한 인사나 재력 있는 비서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참으로 운명적이다시피 비주류적이었던 것이다.

둘째, 야당 안에서도, 여야 관계에서도 늘 비주류였기 때문에 선거건 경선이건 이기기 위해서는 유격전 방식으로 싸웠다. 이것은 동교동 정치의 특징적 컬러의 하나다. 조직과 자금에서 철저한 열세였기 때문에 엄창록을 동원한 게릴라전 방식, 유언비어 흑색선전 매카시즘까지 동원해서 맞싸우는 식으로 승부를 벌이곤 했다.

게다가 합종연횡이 아니면 지는 게임이 되기 때문에 늘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승산에 도움이 되면 손을 잡는 방식을 택했다. 김대중 자신이 사업가로 출발했다는 특성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늘 승산과 이득을 기준으로 이철승과도, 김영삼과도, 김종필 박태준과도 손잡는 길을 택했다. 1997년의 DJP 공동정부 약속은 그런 비주류적 생존방식의 대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지만 한나라당이라는 거대의석에 포위된, 지역의석 분포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구도에서 ‘소수 정부’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동교동 정치의 운명적 한계였다. 뒤늦게나마 지역적 비주류 정권이라는 제약을 좀더 치밀하게 읽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김대중 정권의 실패 원인이라는 지적이 동교동 내부에도 일고 있다고 한다.

약속과 번복이 많은 ‘거짓말 정치’의 원형으로 비난받는 한 갈래의 원인도 비주류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거대 권력 혹은 주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거북이에 속아 용궁으로 끌려간 토끼가 간을 떼이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했던 것처럼 지하실에서 자백각서도 쓰고 불출마선언도 하고 정계은퇴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동교동 사람들은 변명한다. 이것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비주류들의 생존방식이었을 것이라는 데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도 있다.

동교동 정치의 또다른 특징은 사상적 지향성을 ‘진보혁신’ 쪽에 두었다는 점이다.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 초부터 4대국 안전보장론 향토예비군 폐지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색깔 공세에 시달리면서도 김대중은 재야적 시국관, 진보적 통일관을 갖고 정치에 임했다. 그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식의 주장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정보부와 상대후보로부터 대통령선거 때마다 용공분자로 몰리는 빌미가 됐고 결국 집권기간에 ‘퍼주기’ 시비까지 낳는 원죄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국정치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김대중이 동교동 사람들에게 가르쳐온 것이 있다. 그는 ‘장사꾼 같은 현실인식(승부를 위해서 손을 잡는 합종연횡을 뜻한다)’을 가져야 정치인으로 살아 남는다고 전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선비 같은 문제의식(이상)’을 강조했다고 한다. 후자가 바로 집권기의 대북 햇볕정책에서 엿보이는 동교동 정치의 특징일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반공 냉전적 주류(主流) 사회의식에 반하는 주장과 꿈으로 정치를 지속한 정치인도, 또 그런 정치인이 집권에 이른 예도 없기 때문이다.


   (끝)


글: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seers222@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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