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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백정
 관리자  01-19 | VIEW : 12,313
[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지대 있었다

‘서울의 게토’ 반촌(泮村)

조선시대에도 이방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 있었다. 반촌(泮村)이라 불리는 특수집단 거주지가 바로 그곳. 그들만의 언어와 풍습, 삶의 방식을 고집했던 반촌 사람들. 과연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


인간은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 살 권리와 자유가 있다. 그러기에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내가 아무리 북한산 아래 경치 수려한 곳에 살고 싶다 한들 나는 거기에 살지 못한다.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는 오로지 돈과 권력을 가졌을 때 가능한 자유일 뿐이다. 돈과 권력이 없다면, 거주이전의 자유는 더욱 나쁜 거주지로 갈 자유이지 좋은 거주지로 갈 자유는 아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거주지에는 구획이 생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은 돈과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른 인간의 어울림을 뜻한다.

요즘 세상이 이러할진대,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의 서울은, 양반 거주지와 중인 거주지, 상인 거주지가 대충 구분돼 있었다. 그리고 심한 경우 서울 시내에 오로지 특정 부류 인간으로 주거가 제한된 그런 공간도 있었다. 물론 그 잘난 양반들은 아니다. 이런 특수한 공간의 존재는 거주민의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조선시대 서울 안에 존재한 특수한 주민의 특별한 거주공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소의 도살이 가뭄을 초래한다?

엉뚱하지만 쇠고기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옛말에 육식자(肉食者)란 말이 있다. 채식주의자의 반대말이 아니라 귀족이나 고급관료를 뜻한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지배계급을 의미했듯, 중세사회에서 고기는 극히 귀한 음식이었다. 농업사회인 조선사회에서 고기는 당연히 귀한 음식이었고, 특히 쇠고기는 정책적으로 식용을 제한한 식품이었다.

‘태종실록’을 말머리로 삼아보자. 태종 15년 6월5일 임금은 육선(肉膳), 곧 고기반찬을 물리치고 술을 끊었다. 동양사회에서 가뭄이나 홍수, 기타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은 근신하는 의미에서 고기가 없는 밥(素饌)을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태종 역시 그런 전례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육조와 승정원에서 아뢴 가뭄을 초래한 여러 원인 중에 ‘소의 도살’이 끼여 있다는 것이다.

“소를 도살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이 있는데, 근래에 도살이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도살자를 붙잡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 범인의 가산(家産)을 상(賞)으로 주고, 대소 인원은 쇠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되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논하소서. 그리고 저절로 죽은 쇠고기는 서울은 한성부에서 세금을 매기고, 지방은 관청의 명문(明文)을 받은 뒤에 매매를 허락하되, 어기는 자는 또한 법에 의해 죄를 논하소서.”

금령에도 불구하고 소의 밀도살이 가뭄을 초래했으므로, 밀도살을 엄금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의 도살이 왜 가뭄을 불러왔다는 것인가. ‘숙종실록’ 9년 1월28일조를 보면 송시열(宋時烈)이 가뭄을 걱정하면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해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정자의 말은 이렇다. “농사가 흉년이 드는 것은 소를 잡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이어지는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면서도 소를 도살해 먹기 때문에 소의 원한이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이것이 자연의 운행 질서를 깨뜨려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 소의 육신을 부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기마저 먹는 것은 정말 잔인하지 않은가? 이것이 정자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 이면에는 농사를 위해 요즘의 트랙터격인 농우를 보호해야 한다는 농업사회의 실용적 동기가 있겠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생명에 대한 자연스런 배려가 아니었을까? 정말 수입 쇠고기라도 고기를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자면, 율곡 이이는 이런 이유로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고, 율곡 집안에서도 율곡의 제사에는 쇠고기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거나 소의 도살이 가뭄을 초래한다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결코 지켜질 수 없는 법

위 인용문에 나와 있듯, 조선 정부에서는 법령을 정해 금지할 정도로 강력한 도살 억제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 초기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으로 나오므로, 본조(本朝)에서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였고, 중국에서는 쇠고기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령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후하게 하려는 것이다.”(‘세종실록’ 7년 2월4일).

즉 금살도감이란 관청을 설치하면서까지 소의 도살을 막았고 실천도 강력했다. 1411년(태종 11년)에 소의 도살을 전문으로 하는 신백정(新白丁)을 도성 90리 밖으로 내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고기를 밝히는 인간의 욕망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세종 7년에는 신백정이 도성으로 되돌아와 도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성부에서는 이들을 바닷가로 축출하고, 밀도살된 쇠고기를 사먹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로 다스릴 것을 논단하라고 요청하고 있다(‘세종실록’ 7년 2월4일).

이런 법과 행정조치에도 불구하고, 소의 도살과 쇠고기의 식용이 멈춘 적은 없었다. 성종 4년 7월30일 부제학 이극기의 상소문의 일부를 보자.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령이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서울 성내의 대소인(大小人)의 집에서 아침저녁의 봉양(奉養)이나 빈객(賓客)을 연향(宴享)할 때에 대개 금지한 쇠고기를 쓰고, 관가(官家)에서 공급하는 것도 또한 간혹 쓰니, 이러한 고기들이 어찌 모두 저절로 죽은 것들이겠습니까? 이러한 일들이 나날이 반복되어 그치는 때가 있지 아니하니 정히 사방의 농민들의 가축이 점차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쇠고기 식용 금지는 결코 지켜질 수 없는 법이었던 것이다. 이후 쇠고기의 식용을 두고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처벌도 강화되어 ‘정당한 이유 없이’ 소를 잡은 사람은 전가사변(全家徙邊)이란 극형에까지 처했으나(‘연산’ 11년 4월20일), 고기를 밝히는 인간의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쇠고기에 관련된 적지 않은 정보를 갖고 있으나, 그것을 여기서 낱낱이 주워섬길 수는 없다. 다만 법은 존재하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은 때로 강화되었다가 이내 느슨해지는 식의 반복을 거듭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쇠고기를 소비하는 주 계층이 다름아닌 조선의 지배계급인 사대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뜬금없이 쇠고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쇠고기를 먹으려면, 소를 도살하는 사람과 유통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소의 도살이라 하면 곧 백정을 떠올리고, 또 백정 하면 홍명희가 창조한 양주(楊州) 백정 임꺽정을 떠올릴 것이다. 뭔가 좀더 아는 사람이라면, 백정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형평사(衡平社) 운동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 또한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정작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런 사회학적 문제가 아니라 쇠고기의 생산과 유통, 곧 누가 언제 어떤 필요에 의해 소를 도살하고, 어떤 유통망을 통해 어떤 가격으로 판매하였는가, 또 어떻게 쇠고기를 소비(요리)했는가 하는 문제다. 일종의 생활사적 문제인 것이다.


하루에 도살되는 소가 500마리


서울은 조선시대 최대의 인구밀집 도시이고, 또 생활의 수준이 가장 높았으니, 당연히 음식과 요리의 수준도 다른 곳과 비할 바가 못된다. 서울은 생산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거의 모든 식료품이 서울 외곽 지역이나 지방에서 공급되었다.

이 식료품을 유통시키는 곳이 곧 시전(市廛)이었다. 시전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에서 국가와 왕실, 서울 시민들의 수요에 응하기 위해 설치한 공식 시장이었다. 시전에서 판매하는 물품을 분석해보면, 당대 서울 시민, 나아가 조선사람의 일상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사인 식료품을 다루되, 고기류에 한정해 살펴보기로 한다.

유본예(柳本藝)는 서울의 인문지리지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시전(市廛)’에 시전의 종류와 판매 물품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바, 여기에 서울 시내에 판매되는 고기의 종류가 나온다. 쇠고기를 뺀 나머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생치전(生雉廛) 건치전(乾雉廛) 생선전-병문(屛門)에 있다.

닭전(鷄廛)-광통교에 있다. 계란전도 그 곁에 있다.

저육전(猪肉廛)-여러 곳에 있다.


생치는 산 꿩, 건치는 말린 꿩이다. 꿩은 아마 사냥으로 잡은 것일 터이다. 꿩고기, 닭고기와 돼지고기(猪肉)가 서울 시민들에게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이 쇠고기를 제외한 서울 시전에서 판매하는 고기의 종류다. 꿩을 제외하면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저육전이 여러 곳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돼지고기가 꿩과 닭에 비해 많이 소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쇠고기 쪽을 보자.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서울의 쇠고기 소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통계를 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成均館)과 한양 5부(部) 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역, 돌베개, 2003, 81면)

나라 전체에서 하루에 소 500마리를 도살한다는 것이 과연 정확한 통계 수치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이 숫자로 보아 여러 가지 고기 중에서 쇠고기는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고기였을 것이다. 쇠고기는 위에서 든 바와 같이 국가의 제사, 호궤(?饋) 등에 소비되는가 하면, 뇌물로도 인기가 있었다. 물론 모든 쇠고기의 최후는 음식으로 요리되어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특히 서울 사람들에게 있어 쇠고기는 일종의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편 박제가의 시대, 즉 18세기 후반기가 되면 서울 시정에 술집과 음식점이 출현한다. 시정에서의 고기 소비가 늘어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설렁탕과 너비아니는 서울 음식이 아닌가.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명에서 30만명 사이였으나, 쇠고기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생각해보면 서울 시내 24개의 정육점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 푸줏간 풍경

이제 이 정육점에 대해서 좀더 소상히 살펴보자. 앞서 인용했던 유본예의 ‘한경지략’ ‘시전’ ‘현방(懸房)’조다.


현방(懸房)-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이다. 고기를 매달아서 팔기 때문에 현방이라 하는 것이다. 도성 안팎에 모두 23곳이나 있다. 모두 반민(泮民)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를 삼게 하고, 세(稅)로 내는 고기로 태학생(太學生)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


현방이란 쇠고기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푸줏간이다. 현방의 ‘현(懸)’은 원래 ‘달아맨다’는 뜻이다. 이것은 시전에 속하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정식 인허를 받은 공식적인 가게다. 현방은 도성 안팎에 23곳이 있다고 하는데, 서울 성곽 십리 안까지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해서 한성부의 관할에 속한다. 따라서 서울에 23곳의 정육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관계없다. 다만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24곳이라 했는데, 유본예는 23곳이라 하고 있으니, 어떤 사정으로 1곳이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방은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에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일제시대의 자료다.  


지금은 고기 파는 집을 수육판매소(獸肉販賣所) 또는 ‘관(館)집’이라 하지만, 전일에는 ‘다림방’이라 하였다. 다림방은 한자로 ‘현옥(懸屋)’이니, 그때에는 소를 매달아서 잡는 까닭에 현옥이라 하였다. 그리고 현옥도 제한이 있어서 경성에 전부 오현옥(五懸屋)을 두었는데, 수표교 다림방이 가장 큰 것으로 수십년 전까지도 있었다.(‘경성어록(京城語錄)’, ‘別乾坤’, 1929년 9월호)


현방을 현옥이라 쓰기도 했고, 이것은 우리말로 ‘다림방’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경성에 전부 5곳의 현옥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일제시대 사람인 위 인용문의 필자의 기억에 그렇다는 얘기다.

이제 소를 도살하는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다. ‘경성어록’에 현옥(懸屋)도 제한이 있다고 한 말은 정육점의 허가가 자유롭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마도 현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이제 ‘한경지략’의 “모두 반민(泮民)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를 삼게 한다”는 말을 음미해 보자. 이 말은 ‘반민’만이 서울 시내에서 소를 도살하고 판매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민은 백정인가? 그렇지는 않다. 황재문(黃載文)은 1949년에 쓴 글에서 반민에 대해 언급하면서 백정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黃載文, ‘서울 동명에 숨은 이야기’, ‘民聲’, 1949, 11월호)

다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시내의 소의 도살과 판매를 독점했던 반민(泮民)이란 도대체 어떤 부류인가?

반촌민은 안향의 노비 후손들

성균관을 다른 말로 ‘반궁(泮宮)’이라 한다. 반궁이란 말의 유래는 중국 고대로 소급한다. 주(周)나라 때 천자(天子)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벽옹(?雍)이라 하고, 제후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반궁(泮宮)이라 하였다. 반궁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반궁이란 말의 내력은 또 어떤 것인가? 반궁은 ‘반수(泮水)’에서 온 말이다. 벽옹의 사방은 물이다. 쉽게 말해 큰 연못 속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따라서 벽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서·남·북으로 놓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에 비해 반궁은 동쪽 문과 서쪽 문을 연결하는 선 한편만 물이다. 즉 연못은 반달 모양이 된다. 천자의 벽옹에 비해 물이 ‘반(半)’밖에 되지 않는다. 이 물을 반수(泮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인 것이고, 반수가 있기 때문에 그 건물을 반궁이라 부른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궁(宮)’은 궁전이란 뜻이 아니고, 단순히 건물이란 뜻이다. 이것이 성균관이 반궁이라 불린 내력이다. 이런 내력으로 인해 성균관과 관련된 곳에 흔히 ‘반(泮)’자를 붙였으니, 성균관 주위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 하고 그곳의 주민은 반민(泮民), 반인(泮人)이라 불렀던 것이다.

반촌은 적어도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구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의 저명한 문인이자 학자인 서명응(徐命膺, 1716~87)이 쓴 ‘안광수전(安光洙傳)’(‘保晩齋集’ 9권)에 반촌의 유래와 반촌 주민에 관한 소상한 언급이 나온다.


반촌은 고려말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자기 집안의 노비 100여 명을 희사하여 학교를 부흥할 것을 도운 데서 비롯된다. 본조(朝鮮)가 한양에 정도(定都)하여 국학(國學)을 옮기자, 노비 자손이 수천명이 되어 반수(泮水)를 둘러싸고 집을 짓고 살아, 거리와 골목, 닭울음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엄연히 하나의 동리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을 반촌(泮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자손들은 생장하면 반촌 밖을 나서지 않는다. … 총각이 되면 억센 자는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 노릇을 하며, 인색한 자는 말리(末利, 상업)를 좇아 예교(禮敎)를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안유는 곧 안향(安珦, 1243~1306)이다.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성균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유학의 진흥을 위해 충렬왕 30년(1304년) 5월 관료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여 성균관의 섬학전(贍學錢)을 조성하고, 이 돈의 일부를 중국의 강남에 보내 경전과 역사서 등을 수입하였던 바, 이로 인해 성균관의 교육 분위기는 일신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다음 달인 6월에 성균관의 대성전이 완성되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그는 고려말기 성균관의 부활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노비를 성균관에 기증했다 하여 이상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반촌민의 형성과 관련, 또 하나 사료가 윤기(尹햍, 1741~1826)가 남긴 시다. 윤기는 오랫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성균관에 기거했던 인물인데, 그는 자신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반궁잡영(泮宮雜詠)’이란 220수의 독특한 한시를 남기고 있다.


성균관과 불가분의 관계

그는 220수의 한시에서 성균관의 역사, 교육, 학생회 조직, 학생 처벌, 학생들의 집회, 결사 등등 성균관에 관한 거의 모든 일을 한시로 읊어내고 있다. 우리나라 학교사, 교육사, 풍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희귀한 자료인 것이다. 여기에 반촌과 반인에 관한 언급이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의 유약(有若)이신
안문성공(安文成公)은
선성(先聖)의 초상과 경전을 사오시어
다시 학교에 두셨지.
백 명의 노비
후손들이 번성해
지금도 제단을 세워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드네.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 있다.

“안문성공 향(向)은, 본명이 구슬 옥(玉) 변의 향(珦) 자인데, 어휘(御諱, 임금의 이름)를 피한 것이다. 고려의 찬성사(贊成事)로 학교가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중국에 돈을 보내어 선성(先聖, 공자)과 제자 70명의 초상, 그리고 제기(祭器)·악기(樂器)·경적(經籍)을 구입해 오게 하였다. 국학을 세우고, 노비 백 명을 바쳤는데, 지금의 반인(泮人)은 모두 그 노비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반촌의 북쪽에 제단을 세우고 문성공의 기일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데, 애모와 정성을 바침에 있어 조금도 게으르지 않다.”

서명응의 ‘안광수전’과 같은 내용이다. 안향이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의 후손들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서울로 따라와 서울의 성균관에 그대로 복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명응과 윤기의 기록이 18세기 후반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안향으로부터 거의 5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이다. 반촌민(泮村民)이 유전학적으로, 아니 계보학적으로 500년 전 노비들의 후손인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중간에 임진왜란과 같은, 성균관을 잿더미로 만든 미증유의 사건이 있었음에랴. 하지만 조선 후기 반인들은 자신들이 안향의 노비의 후손이라는 점을 믿고 있었고, 또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알았던 것이니 무슨 상관이랴.

반촌의 형성 유래가 이러했으므로, 반촌의 거주자 반인(泮人)의 삶은 성균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대사성(大司成) 이하 관료조직과 교수진이 있었고, 유생들이 있었다. 이들을 위한 자질구레한 노역(주로 육체노동)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욱이 성균관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강의동인 명륜당(明倫堂) 이외에도 숱한 건물이 있었다. 예컨대 학생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기숙사(東齋·西齋)와 식당이 있었다. 이런 건물을 관리하고, 학생들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반인들은 바로 이 성균관의 잡역을 세습적으로 맡아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윤기의 시를 보자.


관비(館婢)의 소생은
직동(直童)이 되고
다른 계집종 자식은
서리(書吏)에 이름이 오른다네.
재직(齋直)은 장성여
수복(守僕)이 되니
반인(泮人)들이 지는 역은
본디 길이 다르다네.


여기에도 주석이 붙어 있다.

“이것은 반인(泮人)들의 신역(身役)이 각각 다름을 읊은 것이다. 관비의 소생은 재직(齋直)이 되고, 다른 계집종에게서 난 자식은 서리(書吏)가 된다. 재직은 장성하면 수복(守僕)이 된다. 반인들도 그 신역이 각각 다른 것이다.”

반촌의 남자가 성균관 소속의 계집종과 관계하여 자식(아들)을 낳을 경우, 그 자식은 성균관의 직동이 된다. 직동은 재직인데, 재직이란 성균관의 기숙사인 동재·서재의 각 방에 소속되어 유생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다. 재직(직동)이 장성하면, 성균관 내의 제향에 관련된 육체노동을 맡는 수복이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여관촌

이와는 달리 반인이 관계한 여자가 성균관 이외의 계집종이라면, 그 자식은 서리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서리 역시 성균관의 서리일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반인의 사회적 지위란 대단히 낮은 것이었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옥(李鈺, 1760~ 1813)의 ‘호상관각력기(湖上觀角力記)’란 글을 보면, 호상인(湖上人), 곧 마포 일대의 주민들과 반인들이 마포 북쪽의 도화동(桃花洞)에서 씨름을 겨루는 풍속을 소개하고 있는데, 호상인이란 마포 일대의 짐꾼이나 막노동자들이었으니, 반인들의 사회적 지위란 이들에 상응하는 사회의 저층이었던 것이다.

반촌의 반인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균관과 공적인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유생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반촌은 평소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방을 잡아 공부하는 하숙촌인가 하면, 과거철이면 거자(擧子)들이 주인을 정하여 머무르는 일종의 여관촌이기도 하였다. 정조 5년 11월4일 사성(司成) 채정하(蔡廷夏)는 과거철이 되면, 성균관 유생들의 절반은 성균관에 머물면서 성균관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절반은 반촌에서 기식하고 있다면서 성균관 식당의 정원을 늘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정조실록’ 5년 11월4일).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반촌에서 머무르는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식당의 정원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보다 훨씬 전인 신임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기지(李器之)도 기해년 봄 증광 초시(增廣初試) 때문에 반촌(泮村)에 나가 거접(居接)하여 여름을 넘기고 가을로 접어들 때까지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경종실록’ 2년 5월5일). 아마도 기숙사 식당의 밥보다는 하숙집 밥이 나아서였을까. 아니면 기숙사의 딱딱한 규정을 지키기 싫어서였던 것인가?

이념서클의 온상

하숙촌이 된 반촌이 빚어낸 가장 흥미로운 사건은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의 천주교 학습 사건이다. 1787년 10월 이승훈과 정약용, 강리원(姜履元) 등은 과거 공부를 핑계대고, 반인(泮人)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진도자증(眞道自證)’ 등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이기경(李基慶)에게 발각된다. 이 사건이야 천주교사에서 널리 다루는 것이어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성균관 일대의 하숙촌이 일종의 이념서클의 온상 같은 역할을 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여간 흥미롭지 않은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반촌 사람 김석태의 제문이 다산의 문집에 ‘숙보(菽甫)의 제문(祭文)’(숙보는 김석태의 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읽어보자.


지극한 정성은 하늘에 통하고 지극한 정은 땅까지 통하였네. 깬 것도 나를 위해 깨고 자는 것도 나를 위해 잤었네. 가정에 소홀하면서도 나를 위해서는 치밀하였고 달리고 쫓는 일에는 동작이 느렸으나 나를 위해서는 빨랐네. 나의 잘못을 남이 지적하면 칼을 뽑아 크게 성내었고 사람이 나와 잘 지내면 그를 위해 온 힘을 다 쓰더니, 혼마저 천천히 감돌며 아직 내 곁에 있네. 구원(九原)이 비록 멀다고 하나 앞으로 서로 생각하리.


반촌인의 이름이 좋은 의미로 기록에 남은 것은 김석태가 유일한 경우이리라.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보잘것없는 인물에 대한 다산의 제문이 여간 다정스럽지 않다. 다산의 인품을 보는 듯하다.


반촌에서 소를 도살하게 된 기원 역시 정확하지 않다. 조선 전기에는 유관한 기록을 찾기 어렵고, 17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반촌과 소의 도살에 관한 자료가 보인다. ‘숙종실록’ 24년(1698) 1월21일조에 호조 판서 이유(李濡)가 반인(泮人)들에게 2개월을 한정하여 도살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사료가 있으니, 적어도 숙종 연간에 오면 반인이 국가의 공인을 얻어 소의 도살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 소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 이 시기에 와서 반인이 소의 도살과 쇠고기 판매에 종사하게 되었는지도 역시 분명하지 않다. 조심스럽게 추정하자면, 반촌민의 도살은 성균관 학생들의 식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종실록’ 7년 10월30일조에 의하면, 원래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쇠고기를 반찬으로 제공한 것이 오랜 유래였는데, 성균관에서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한다는 일부 학생들의 의견이 있어, 회의를 열어 결정을 보았던 바, 재(齋, 기숙사)와 명륜당에서는 먹고 식당에서는 먹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좀 유별난 짓거리가 아닌가 하는데, 과연 이 기사를 쓴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학생들의 행동이 특이한 체하는, 즉 뭔가 튀어보려는 행동으로 생각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쨌건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에 쇠고기를 제공하는 관습은 오래된 것이고, 이 때문에 반촌민들에게 소의 도살이 허락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반촌민들이 이를 계기로 서울 시내 쇠고기의 판매를 전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마 순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인용했던 유본예의 ‘한경지략’ 현방조에 “성균관의 노복들로 고기를 팔아서 생계를 하게 하고, 세로 바치는 고기로 태학생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고 한 말은 역시 이런 내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응란교 이북이 반촌

이제 쇠고기와는 결별하고 이 반촌민의 특수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늦었지만, 반촌의 위치를 챙겨보자. 반촌은 그 범위가 정확하게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6년 3월11일부터 3월26일까지 실린 ‘경성행각(京城行脚)’이란 기사에 의하면, 그 위치는 이렇다.


현금 경성식물원 입구 길 옆에 한 개의 석비(石碑)가 있으니, ‘응란교(凝? 橋)’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정조대왕이 이곳에 다리를 놓게 하시고, 그 곁에는 연지(蓮池)를 파서 부근의 풍경을 돕게 하심이니, 지금은 연지도 없고 다리의 흔적도 없으나, 석비만은 홀로 남았으며, 이 석비의 북쪽은 반인(泮人)이 거주하는 곳이요, 이남은 보통 인민의 주거지로 구별하였다.


경성식물원은 지금의 서울대병원과 동숭동 대학로 자리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 경모궁(景慕宮)터였다. 19세기 서울 지도를 보면, 창경궁 오른편에 경모궁이 그려져 있고, 경모궁의 오른쪽 위편에 궁지(宮池) 또는 연지(蓮池)라는 이름의 연못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것이 정조가 세운 응란교다. 이 응란교 이북이 반촌인 것이다. 윤기의 ‘반궁잡영’을 보면 좀더 정확하다.


하마비 남쪽에

길 하나 가로로 뚫렸으니,
반촌의 경계는
여기서 분명히 정해지네.
지금 돌을 세워
표시한 곳 어디메뇨.
경모궁 연지의
연꽃이 핀 곳이라네.


‘매일신보’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 시에도 주석이 있다.

“옛날의 반촌은 관현(館峴)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을 경계로 삼았는데, 당저조(當흦朝, 정조)에 경모궁 앞 연지 가에 돌을 세우고 반촌의 경계로 삼았다. 연지 이북이 모두 반촌이다.”

원래 관현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이 반촌의 하한선이었으나(관현은 어디인지 미상), 정조 때 경모궁의 연지를 반촌의 하한선으로 삼았던 것이다. 반촌은 또 동반촌과 서반촌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은 성균관 쪽에서 경모궁 방향으로 곧장 내려오는 시내를 따라 난 길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은 동반촌, 왼쪽은 서반촌이 된다. 서반촌의 시작은 지금의 창경궁 월근문(月覲門) 앞의 박석고개부터다.

외부인 거주 허락 않은 별천지

이상이 반촌의 지역적 구획이다. 그러나 이 구획은 단순히 행정 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반촌민이 아니면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 특별 구역이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매일신보’의 ‘경성행각’을 다시 들추어보자.


반인이라 함은 즉 속설(俗說)에 소의 도살을 생업으로 삼는 자를 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다. 그러나 이 명칭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 상고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소문 안 부근 일대의 주민은 금일까지도 소 도살을 영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옛날에는 그 수가 곱절이나 많았음은 정칙(定則)이다. 그러나 이 영업을 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천하게 여겨 서로 교제와 혼인 관계를 맺지 아니하므로, 이 부락의 주민은 세인(世人)의 압박과 수치와 결교(結交)·혼인의 불허 등의 모욕을 당하는 관계로 인하여, 자연히 분개심을 야기하고 분격심이 일어나는 때에 이곳 주민들은 일체 단결되어 남을 위하여 의리를 세우는 데 생사를 돌아보지 않는 기개가 있었으며, 옛날에는 다른 동 사람으로서 이 동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며, 이 동 사람이 다른 동으로 이사 가서 사는 일도 없어서, 일개 별천지를 형성하였다.


반촌은 외부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일개의 별천지였던 것이다. 이런 풍습이 언제 형성된 것인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영조 때에는 이미 사회적 약속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실록’ 19년 11월6일 지평 조재덕(趙載德)은 외인의 입주가 불허된 반촌을 재상의 아들들이 점거하였다고 조사해 치죄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데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선후기의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만은 들어가서 조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금란이란 조선이 500년 동안 단속의 대상으로 삼았던 소나무의 벌채 금지, 임의적 도살의 금지, 양조(釀造)의 금지, 곧 금송(禁松), 금도(禁屠), 금주(禁酒) 등이 주종목인데, 범인이 반촌에 숨어버리면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것이다.

‘영조실록’ 6년 10월11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말을 들어보자.

“형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의 말을 듣건대, 반인(泮人)이 한 짓이 매우 해괴하다 합니다. 북부(北部)의 장의동(壯義洞) 주위에 금송(禁松)의 정령(政令)이 행해지지 않기에 사람을 시켜 살펴봤더니, 반인의 무리가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기에 사람들이 잡으려고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하여 그대로 반촌(泮村) 안에 숨었는데,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엔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잡아낼 길이 없다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원래 서울 시내에서 소나무를 베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던 바(서울의 나무장수는 서울 시내에서 벤 나무를 판매하지 못한다) 반인이 장의동 주변의 생솔을 베어갔고, 체포하려 하자 도끼를 휘두른 뒤 반촌 안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일단 반촌 안으로 들어가면 금란이 미치지 못한다. 포교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단식투쟁

영조는 성균관 대사성에게 반촌을 뒤질 것을 지시하지만, 이번에는 성균관에 기식하고 있는 유생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다. 권당(捲堂)이 그것인데, 이것은 식당에 들어가 식사하기를 거부하는 단식투쟁이다. 성균관 유생은 항의할 일이 있으면 종종 권당을 한다. 영조가 좋은 말로 달랜 끝에 유생들은 스트라이크를 풀었다.

실제로 성균관 근처에서 도둑을 체포하였다가 포도대장이 파직된 경우도 있었다. ‘영조실록’ 41년 5월13일조에는 사간원에서 포교(捕校)가 반촌(泮村)에서 도둑을 잡았는데, 성묘(聖廟)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포도대장의 파직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반촌이 이렇게 독특한 구역이 된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포교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성묘(聖廟), 곧 대성전이란 성화(聖化)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반촌민이 다른 지역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이라는 점도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즉 반인들의 신분이 백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소의 도살과 판매에 관계하는 이상 천대를 받았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이로 인해 반촌민은 반촌 바깥 사람들과 친교, 결혼 등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이다. 반촌은 사실상 게토(ghetto)였던 것이다. 이것이 반촌을 특수한 구역으로 만든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게토화로 반촌민들은 독특한 에토스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했던 서명응의 ‘안광수전’의 “억센 자는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 노릇을 한다”는 구절도 그런 의식의 일단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폭력적인 것인데, 실제 그런 사례가 보이기도 한다. 정조 1년 7월15일 반인(泮人) 정한룡(鄭漢龍)이 환도(環刀)로 사람을 공격하여 무릎뼈가 절반이나 떨어져나갔고, 상해를 입은 사람이 그 상해로 인해 치명(致命)한 사건으로 인해 살인으로 성옥(成獄), 살인 사건을 재판하는 것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양반이나 보통 시민에게 기대되는 행동은 아니다.

외부인 거주 허락 않은 별천지

이상이 반촌의 지역적 구획이다. 그러나 이 구획은 단순히 행정 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반촌민이 아니면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 특별 구역이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매일신보’의 ‘경성행각’을 다시 들추어보자.


반인이라 함은 즉 속설(俗說)에 소의 도살을 생업으로 삼는 자를 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다. 그러나 이 명칭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 상고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소문 안 부근 일대의 주민은 금일까지도 소 도살을 영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옛날에는 그 수가 곱절이나 많았음은 정칙(定則)이다. 그러나 이 영업을 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천하게 여겨 서로 교제와 혼인 관계를 맺지 아니하므로, 이 부락의 주민은 세인(世人)의 압박과 수치와 결교(結交)·혼인의 불허 등의 모욕을 당하는 관계로 인하여, 자연히 분개심을 야기하고 분격심이 일어나는 때에 이곳 주민들은 일체 단결되어 남을 위하여 의리를 세우는 데 생사를 돌아보지 않는 기개가 있었으며, 옛날에는 다른 동 사람으로서 이 동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며, 이 동 사람이 다른 동으로 이사 가서 사는 일도 없어서, 일개 별천지를 형성하였다.


반촌은 외부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일개의 별천지였던 것이다. 이런 풍습이 언제 형성된 것인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영조 때에는 이미 사회적 약속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실록’ 19년 11월6일 지평 조재덕(趙載德)은 외인의 입주가 불허된 반촌을 재상의 아들들이 점거하였다고 조사해 치죄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데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선후기의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만은 들어가서 조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금란이란 조선이 500년 동안 단속의 대상으로 삼았던 소나무의 벌채 금지, 임의적 도살의 금지, 양조(釀造)의 금지, 곧 금송(禁松), 금도(禁屠), 금주(禁酒) 등이 주종목인데, 범인이 반촌에 숨어버리면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것이다.

‘영조실록’ 6년 10월11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말을 들어보자.

“형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의 말을 듣건대, 반인(泮人)이 한 짓이 매우 해괴하다 합니다. 북부(北部)의 장의동(壯義洞) 주위에 금송(禁松)의 정령(政令)이 행해지지 않기에 사람을 시켜 살펴봤더니, 반인의 무리가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기에 사람들이 잡으려고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하여 그대로 반촌(泮村) 안에 숨었는데,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엔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잡아낼 길이 없다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원래 서울 시내에서 소나무를 베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던 바(서울의 나무장수는 서울 시내에서 벤 나무를 판매하지 못한다) 반인이 장의동 주변의 생솔을 베어갔고, 체포하려 하자 도끼를 휘두른 뒤 반촌 안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일단 반촌 안으로 들어가면 금란이 미치지 못한다. 포교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단식투쟁

영조는 성균관 대사성에게 반촌을 뒤질 것을 지시하지만, 이번에는 성균관에 기식하고 있는 유생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다. 권당(捲堂)이 그것인데, 이것은 식당에 들어가 식사하기를 거부하는 단식투쟁이다. 성균관 유생은 항의할 일이 있으면 종종 권당을 한다. 영조가 좋은 말로 달랜 끝에 유생들은 스트라이크를 풀었다.

실제로 성균관 근처에서 도둑을 체포하였다가 포도대장이 파직된 경우도 있었다. ‘영조실록’ 41년 5월13일조에는 사간원에서 포교(捕校)가 반촌(泮村)에서 도둑을 잡았는데, 성묘(聖廟)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포도대장의 파직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반촌이 이렇게 독특한 구역이 된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포교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성묘(聖廟), 곧 대성전이란 성화(聖化)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반촌민이 다른 지역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이라는 점도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즉 반인들의 신분이 백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소의 도살과 판매에 관계하는 이상 천대를 받았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이로 인해 반촌민은 반촌 바깥 사람들과 친교, 결혼 등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이다. 반촌은 사실상 게토(ghetto)였던 것이다. 이것이 반촌을 특수한 구역으로 만든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게토화로 반촌민들은 독특한 에토스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했던 서명응의 ‘안광수전’의 “억센 자는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 노릇을 한다”는 구절도 그런 의식의 일단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폭력적인 것인데, 실제 그런 사례가 보이기도 한다. 정조 1년 7월15일 반인(泮人) 정한룡(鄭漢龍)이 환도(環刀)로 사람을 공격하여 무릎뼈가 절반이나 떨어져나갔고, 상해를 입은 사람이 그 상해로 인해 치명(致命)한 사건으로 인해 살인으로 성옥(成獄), 살인 사건을 재판하는 것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양반이나 보통 시민에게 기대되는 행동은 아니다.


안광수의 제자들은 성균관의 서리가 되고 수복이 되었던 바, 그들은 모두 성균관의 업무에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었던 것이다. 안광수가 죽자 반촌 사람들은 그의 제자건 아니건 남자건 여자건 애통해하면서 그의 장례를 도왔다. 또 제자들은 그를 기념하여 기일 생일 사시의 절기마다 제수를 마련해 제사를 도왔다고 한다.

나는 안광수란 인물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유가(儒家)의 예에서 벗어나 있던 부류들의 독특한 성격이 유가의 예에 감염되는 것을 보면 되레 서글픔을 느낀다. 하지만 ‘안광수전’은 원래 반인의 독특한 성격을 반증하는 구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안광수전’을 통해 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통제할 수 없었던 인간의 원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성균관 몰락과 함께 사라진 반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대적 교육제도가 시행되자 성균관은 옛날의 위상을 잃고 중세의 유물이 되었다. 성균관이 무너지자 반촌도 따라서 해체되었다. 신분제의 붕괴와 함께 반촌 사람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차별 역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1920년대 신문기사에 의하면, 반인들은 여전히 소의 도살과 쇠고기 판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과 싸우기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1910년 보통학교 과정의 사립 숭정학교를 세워 반촌의 아동들을 가르쳤다. 특기할 것은 이 학교는 재정이 전혀 곤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차별을 생각해 쇠고기 판매 금액의 일부를 내놓아 학교의 재정을 충당했으니, 지방에 이사해 살더라도 숭정학교를 위한 헌금은 우편으로 부칠 정도로 열성이었다는 것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이 시대에 반촌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왜 의미가 없을까.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돈과 권력, 학벌, 출신지로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여전하다. 돈과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라 사는 곳 역시 경계가 지어져 있다. 서울 시내에는 지금도 반촌과 같은 게토가 존재한다.

이상한 일이다. 쇠고기는 모두 먹기 좋아하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인도에서도 소를 잡는 사람은 모두 천한 사람이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으니 농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람인데도 농민의 사회적 지위는 왜 늘 낮은가.

이뿐이랴.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왕과 양반처럼 고귀한 사람들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큰 사고를 낸 사람이어야 한다. 홍경래처럼, 임꺽정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까? 불과 몇 십년을 지나지 않아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될 것이다.

반촌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사람이다. 게토(ghetto) 속에 살던 이들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반촌 사람들에 관한 자료를 챙기면서 영웅의 열전이 아니라, 그런 잊혀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오른다.   (끝)


  강명관
● 1958년 부산 출생
● 1981년 부산대 국어과 졸업
● 성균관대 한국한문학 박사
● 저서 :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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