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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전두환 그 닮은 꼴 쿠데타
 관리자  07-25 | VIEW : 2,861
TV사극 「왕과 비」 제대로 보기

수양대군·전두환 그 닮은 꼴 쿠데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과 1979년 전두환이 일으킨 12·12쿠데타는 그 동기와 과정, 결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유사하다. 문제는 TV드라마 「왕과 비」가 쿠데타의 주인공인 수양대군 쪽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덕 일 역사평론가

무릇 역사물을 기술하거나 제작하는 경우 반드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사관(史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료 해석 능력이다. 이 두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그 역사물은 역사의 진실에서 멀어진다. 역사의 진실에서 멀어진 역사물은 「무익(無益)」한 것이 아니라 「유해(有害)」한 것이 된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역사는 한 사회를 살아갔던 인간들의 삶의 총체이자 그 사회를 주도했던 인간들의 행위에 대한 평가여서 잘못된 역사해석은 후세 사람들의 가치관 형성에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소설이나 드라마, 특히 미디어 시대에 엄청난 영향을 갖고 있는 TV 역사드라마의 경우 이러한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TV 드라마는 역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을 주 시청 대상으로 삼는다. 일반인들은 드라마 속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혼동할 우려가 높고, 자칫하면 왜곡된 역사를 진실인 양 인식하고 유포할 가능성도 크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물을 기술하거나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사관과 정확한 사료 해석 능력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사관과 사료 해석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현재 TV에서 방영되는 역사 드라마를 소재로 살펴보기로 하자.

「왕과 비」, 그 사관의 한계

K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왕과 비」는 조선조 단종과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역사드라마다. 그런데 이 드라마만큼 사관의 한계를 노출시키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간 단종과 수양대군은 드라마 뿐 아니라 소설로도 많이 다루어졌다.
그 중에서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大首陽)』은 꽤 유명하다. 두 작품은 같은 일제시대에 쓴 것인데도 그 시각은 완전히 상반된다. 이광수의 『단종애사』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단종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소설이며, 반면에 김동인의 『대수양』은 그 제목처럼 수양대군에게 정통성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광수는 단종을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에, 그리고 수양대군을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비유했기 때문에 당연히 단종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1929년에 발간된 이 소설이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맥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동인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인정했기 때문에 수양대군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김동인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수양대군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라는 생각에서 수양대군에게 정통성을 주었을 뿐이다.
하나의 역사 현상이 이처럼 두 개의 진실을 지닐 수도 있는 것일까. 모든 역사 현상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긍정과 부정의 측면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역사의 평가에 있어서 긍정과 부정이 같은 값(等價)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 현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값을 재는 시각이 바로 사관이다.
수양대군이 주도한 시대는 과연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긍정적인 면이 더 많을까 아니면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을까? 「왕과 비」는 그 시대를 바라보는 두 시각 중 수양대군에 정통성을 준, 그리하여 김동인의 『대수양』과 같은 궤도를 달리는 작품이다. 이것은 과연 옳은 평가일 수 있을까?
「왕과 비」의 시각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세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필요하다. 1450년 32년간 재위하던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장남 문종이 뒤를 이었으나 병약한 그는 재위 2년 3개월만인 1452년에 사망하고 만다. 그 뒤를 12세의 어린 세자 단종이 이음으로써 파란은 시작된다.
대왕대비나 왕대비 모두 사망해 수렴청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미성년의 임금에게서 보이는 틈을 메울 장치가 없었다. 그 틈을 파고 든 두 세력이 문종의 형제인 대군들과 황보인, 김종서 같은 대신들이었다.
「왕과 비」는 이 두 세력 중 대신들의 문제점을 부각하면서 왕권 강화의 적임자로 수양대군을 꼽는다. 당시 정국을 김종서로 대표되는 신권파(臣權派)와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왕권파(王權派)의 대결 구도로 묘사하면서 수양대군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왕조국가에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왕 한 사람뿐이라는 점이다. 대군이든 대신이든 임금 앞에서는 모두 신하일 뿐이다. 수양대군이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다면 어린 임금을 내쫓고 자신이 즉위하는 정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종의 입지를 끊임없이 강화시켰어야 했다.

성삼문의 세조 비꼬기

수양은 곧잘 자신을 중국 역사에서 주나라(1050~256 BC)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공(周公)에 비유했다. 문왕(文王)의 아들인 주공은 형인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켰고, 무왕이 죽은 후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을 끝까지 보호하여 공자로부터 성인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당시 주공 주위에는 왕위를 찬탈할 것이란 소문이 있었고 실제로 이를 명분으로 한 봉기도 있었으나, 주공은 끝내 왕위의 유혹을 누르고 어린 왕을 보호했다.
주나라 초기의 정치적 상황은 단종이 맞고 있는 상황과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수양대군도 조카의 왕위를 찬탈할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그래서 수양은 이를 부인하고 자신에게 두 마음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자신을 주공에 비유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왕(上王;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된 후 세조(수양대군)로부터 국문을 당하면서 성삼문의 그 유명한 항변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가 평일에 자신을 곧잘 주공(周公)에 비유했는데 주공도 어린 조카의 왕위를 뺏은 적이 있었소?』

이처럼 수양대군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그가 기존 헌법과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점이다. 그러나 「왕과 비」의 작가는 수양대군이 보여준 헌정파괴적인 행위를 외면하는 대신 수양대군과 대결을 벌이게 되는 황보인을 무능한 인물로, 김종서를 안하무인의 성격을 지닌 인물로 묘사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들 신하의 성격적인 하자(?)가 아니라, 신하들이 『어린 임금을 부탁한다』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았다는 점이다. 선왕 문종은 수렴청정할 대비도 없는 미성년 임금의 부족한 권위를 대신할 정치체제로 대신들의 보좌를 택했기 때문에, 선왕의 유명에 의한 원상(院相)들의 통치는 합헌적인 것이었다.
사실 수양대군이 저지른 「계유정난」 자체가 이런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였다. 수양대군은 단종 1년 10월 「불법적」으로 대호(大虎) 김종서를 제거한 후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 주륙하였으나 사변이 갑자기 일어나 상계(上啓)할 겨를이 없었다』고 사후 결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를 어찌 1979년의 12·12 사태 때 신군부 전두환 일파가 불법적으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한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후 재가를 강요했던 상황과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계유정난과 12·12 쿠데타

수양의 계유정난과 12·12사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우연의 일치」를 보인다. 수양의 주장과는 달리 김종서가 모반했다는 증거가 없는 것처럼 정승화가 박대통령 사해에 관련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수양은 계유정난 후 「영의정부사·영집현전·경연·춘추·서운관사 겸 이조·병조판서·중외병마도통사」란 긴 관직을 차지했다. 이 정도면 임금이란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임금과 다름없다. 이 또한 12·12 사태 후 보안사령관·중정부장을 겸직하고 이어서 초헌법적인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은 전두환의 경우와도 같다. 당시 전두환도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따름이지 대통령의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수양이 김종서를 추살한 직후 왕명을 빌려 신하들을 부른 후 「살생부」의 살조(殺條)에 이름이 올라 있는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을 타살한 행위도 전두환의 그것과 같다. 전두환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김대중 등을 내란 음모로 투옥해 사형선고를 내렸다.
나아가 수양대군은 재위 3년째인 단종에게 선위 형식을 빌려 상왕으로 내밀고 자신이 즉위했다. 이 또한 최규하 대통령을 사퇴시키고 형식적인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경우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시대의 고금을 떠나 정변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한 정치집단이 걷는 일반적인 길일 따름이다.
더 큰 문제는 헌정 파괴는 어김없이 특권층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임금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공신 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공신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임금이 되려니까 거사를 같이 할 동지를 모아야 하고, 거사가 성공한 다음에는 정통성 부족을 공신들의 지지로 메워야 하기 때문에 공신의 존재가 「필요악」이 되는 것이다.
김종서를 추살한 계유정난 후 일단의 특권층이 형성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난리를 평정한 공신」이란 뜻을 가진 43인의 「정난공신」이 그것이다. 수양대군, 한명회, 정인지, 권람 등이 1등공신에 책봉된다. 이 또한 12·12 사태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후 샴페인을 터뜨리며 훈장을 나누어가졌던 신군부의 행태와 유사하다.
또 수양대군이 즉위한 후 「임금이 되는 것을 도왔다」는 뜻을 가진 46명의 「좌익공신」이 책봉되고 이들이 요직을 차지하는데, 이 또한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노태우 등의 공신들이 주요 공직을 나누어 가진 것과 유사하다.
조선시대에 공신에 책봉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급(資級)이 몇 급 더 올라가는 데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는 막대한 토지와 많은 수의 노비가 지급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경제적으로는 세습이 가능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게 되므로 이들 공신들은 대대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권층의 부패

이 또한 1960~70년대의 5·16 군사쿠데타 세력과 1980년대의 신군부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소수의 재벌들과 정경유착 관계를 형성해 산업과 금융을 독점해 특권층을 형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IMF 위기는 비단 김영삼 정부만의 책임이 아니라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구조화된 특권층과 부패공화국의 폐해가 누적된 결과물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조의 집권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런 배타적인 특권층을 형성했다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종영된 「용의 눈물」을 살펴보자. 이 드라마는 당시 사실을 비교적 정사에 입각해 그려 호평을 받았지만, 태종 이방원의 공신 숙청을 개인적인 의리 차원에서 바라보는 한계를 보인 점이 아쉬웠다. 태종의 공신 숙청을 동지들을 배신하는 행위로 그림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훼손한 것이다.
태종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공신 숙청이다. 그가 공신들을 과감하게 숙청했기 때문에 세종의 문치주의가 가능했다. 태종의 공신 숙청이 없었다면 세종은 왕 노릇을 제대로 하기가 곤란했을 것이 분명하다. 태종이 배신자란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공신이란 특권층들을 깨끗이 정리한 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기에 세종은 안정된 문치주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세조는 공신이란 특권층을 정리하지 못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군화」란 특권층을 정리하지 못하고, 김영삼이 「등산화」란 특권층을 정리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조는 태종처럼 국가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개인적인 소의(小義)에 더 집착했던 것이다. 그는 공신들의 경우 역모가 아닌 한 어떠한 잘못도 감싸안는다는 집권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원칙에 의해 공신들의 특권은 보호받은 반면 일반 백성들은 이들의 탐학에 시달려야만 했다.
심지어 정난공신 홍윤성은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도와준 숙부를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세조가 온양의 온궁에 거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숙모가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길게 울부짖으며 이 만행을 고발했지만 세조는 홍윤성 대신에 그의 수하를 베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보호받는 공신들의 특권집단은 하나의 역사 용어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바로 「훈구파(勳舊派)」다. 조선 역사에 등장하는 사화(士禍)는 신진 사림파가 부패한 특권층인 이들 훈구파의 비정을 공격하고 나서자 훈구파가 자행한 정치 탄압인 것이다. 실로 훈구파는 초·중기 조선의 정치와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은 암적 존재였으며 그 시초가 수양대군의 집권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조를 지지하는 측도 할 말은 있다. 세조가 남긴 업적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세조는 비록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으나 즉위 후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그가 정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즉위했다면, 그는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 현군(賢君)이 될 재질을 지니고 있던 경세가(經世家)였다.
그는 궁중에 잠실을 두어 왕비와 세자빈에게 직접 양잠을 하게 할 정도로 농본주의에 입각한 중농책을 실시해 백성들의 생활 향상에 기여했다. 그 외에도 둔전(屯田) 증설, 양전(量田), 상평창 개창 등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잡는 한편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했다.
또한 『국조보감(國朝寶鑑)』 같은 역사서와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한 것도 그였다. 세조의 이런 치적들 때문에 조선의 국가체제가 완성돼간 것은 사실이며, 이런 치적들이 집권 과정의 흠을 상쇄하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리학 사회인 조선에서 그는 끊임없는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에서 원각사를 설립하는 등의 불교 진흥책을 쓴 것은 비단 신앙의 차원 뿐만이 아니라 명분에 집착하는 성리학 사회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실제로 그는 세종 생존시에도 『공자는 석가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한다』라고 말해 사대부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세조는 또 이적(異蹟)을 만들어낸다. 세조는 속리산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병이 나았다고 주장했으며, 온양의 온궁에서는 찬 샘물을 발견했다면서 이를 상서로운 조짐이라 하여 「주필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이적들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평생 시달렸던 정통성 부족을 메우기 위한 노력과 관련있는 것은 틀림없다. 정통성 부족을 문수동자나 찬샘 같은 이적의 힘을 빌려 하늘의 명(天命)을 받았음을 구구하게 변명해야 했던 것이다.

「왕과 비」의 색깔론

「왕과 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의 하나는 수양대군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섰던 모든 인물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먼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친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은 음모가에다 야심가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왕위를 빼앗으려 한 자들이 아니라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부당하게 여기거나 빼앗긴 단종의 왕위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여기다가 사형당한 인물이다. 이는 마치 군사정권 시절 민주인사들에게 멍에처럼 씌워졌던 색깔론을 연상케 할 정도다.
황보인과 김종서, 그리고 어린 단종을 보살피기 위해 궁중에 출입하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도 지나치게 권력의 화신으로만 그려진다. 우상 김종서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이 두려움에 안절부절 못한다는 묘사나, 수양의 사저를 방문한 김종서가 상석에 앉는다는 묘사 등은 작가의 「목적」을 위해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기본질서까지 무시하는 것이다.
김종서가 어떤 형태로든 단종을 위협했다면 곧바로 대간의 탄핵 기능이 움직였을 것이고, 「협군(脅君)」의 혐의가 인정되면 그대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세종 때에 대신이 왕자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받을뻔 했다가 왕자가 미복을 입어서 알아보지 못했다 하여 무사했던 전례에서 보듯이, 김종서가 대군보다 상석에 앉을 수는 없었다. 우의정은 정1품이지만 대군은 품계를 뛰어넘는, 자급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종서의 전횡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하는 의정부서사제는 단종 때가 아니라 세종 18년에 이미 시행됐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의정부서사제는 물론 세조가 실시한 육조직계제도 운영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 제도일 뿐이다.

사육신 사건의 본질

필자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사육신 사건을 어떻게 그릴지 궁금하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일부 학자들의 평가처럼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유신들이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 체제를 복위시키려는 권력투쟁으로 그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육신 사건은 권력투쟁의 일환이다. 그러나 사육신 사건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권력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세조가 강화한 전제 권력에 심각한 불편을 느끼고 대결을 결심해야만 할 정도로 권력이 강했던 인물들도 아니었다.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에 아무 관련이 없었던 성삼문을 정난공신과 좌익공신 3등에 봉하고, 사건 이후에도 박팽년을 끝까지 회유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사육신 대부분은 세조가 포섭하려 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거사는 성리학자로서는 명분을, 신하로서는 의리를 지켜 정상적인 성리학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지로 보아야 한다.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유신들의 관료체제 복위 기도라는 해석은 인간의 모든 행위의 동기를 이익으로만 바라보는 편협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육신 이개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칠언 절구를 지었다. 그 뒷구절을 보자.

『새벽도 덜 깼는데 문밖에 나서니 /
현릉(문종과 그 비의 능) 송백만이 꿈속에도 푸르구나(明發不寤出門去/顯陵松柏夢中靑)』

수양대군의 모사 한명회가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며 압구정을 짓고도 돌아가지 않는 것을 풍자한 이윤종의 시도 있다.

『정자를 지어놓고 돌아가지 않으니 /
이 인간 참으로 갓 씌운 원숭이일세(有亭不歸去/人間眞沐)』

드라마 「왕과 비」에서 경박하고 겁 많은 인물로 그려지는 단종도 유배지 영월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하늘은 귀먹어서 이 하소연 못 듣는데 /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은 귀만 홀로 밝았는가(天聲尙未聞哀訴/胡乃愁人耳獨聰)』

필자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왕과 비」 제작진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왕과 비」는 이전 드라마의 문제였던 정사와 야사의 혼동 차원을 넘어 당시의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인생을 걸었던 선조들의 삶을 부정하거나 무가치하게 묘사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일신의 안일보다는 대의(大義), 즉 시대 정신에 인생을 걸었던 선조들의 삶을 부정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진실과 다른 「대왕의 길」

내친 김에 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대왕의 길」도 살펴보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그리는 「대왕의 길」은 장희빈과 함께 역사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졌던 소재다.
사도세자 이야기는 소설이나 드라마가 갖추어야 할 흥미로운 소재를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다. 게다가 사도세자 사건은 장희빈 사건을 다룬 『인현왕후전』처럼 한글로 쓴 『한중록』이란 기록이 있어서 현대의 작가들도 쉽게 다가설 수 있기 때문에 자주 드라마의 소재가 돼 왔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대왕의 길」은 사도세자를 다룬 기존 역사 드라마와는 이용 자료면에서 한 차원 진보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 드라마들이 일방적으로 『한중록』만을 텍스트로 사용했다면 「대왕의 길」은 『영조실록』 등의 정사들도 자료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이 점은 역사 드라마 서술에 있어서 분명한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새로운 자료를 채택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료는 반드시 엄정한 사료 검증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대왕의 길」은 사도세자와 노론의 갈등, 사도세자의 무인적 기질에 대한 조명 등 기존 드라마와는 분명히 다른 세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더불어 뚜렷한 한계도 보이고 있다. 그 결정적 원인이 바로 정확한 사료 해석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에 관한 기본 사료는 크게 세가지다. 사관들이 편찬한 『영조실록』과 정조가 편찬한 『어제장헌대왕(추증한 사도세자의 시호)지문』 그리고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이다.
문제는 이 자료들이 그리는 사도세자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정조의 『어제장헌대왕지문』이 사도세자에 대한 일방적 찬사라면 『영조실록』은 사도세자에 대한 건조한 기록이다. 이는 세자의 아들인 정조 재위 시에 편찬되었으나 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노론이 다수 편수관에 참여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한중록』이다. 지금껏 수많은 소설가와 시나리오 작가들이 『한중록』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모습을 왜곡되게 그려 놓았는데, 「대왕의 길」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록』은 지금까지 엄정한 사료 검증을 받은 경우가 별로 없다. 아마도 작자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 세자가 뒤주 속에서 갈증과 기아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나약한 여인의 피맺힌 기록이란 선입견이 일반인들은 물론 일부 전문가들까지 사료 비판을 생략한 채 사실로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28세에 동갑인 세자를 잃은 그녀가 젊은 과부를 뜻하는 청상과부(靑裳寡婦)로서 『한중록』을 썼다고 지레 짐작했던 것도 『한중록』을 오독(誤讀)하게 만든 원인의 하나였다.
그러나 홍씨가 이 책을 쓴 시기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비참한 생을 마친 20대 때가 아니라 일흔이 넘은 순조 5년(1815) 이후였다. 그간 국왕도 영조→정조→순조로 세 번이나 바뀌었다. 즉 그녀는 이십대의 청상과부로서 한중록을 쓴 것이 아니라 일생의 대부분을 권력투쟁 현장에서 보낸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한중록』을 쓴 것이었다.

홍씨 가문을 위한 『한중록』

『한중록』은 한자로 한스러운 날의 기록이란 뜻의 『恨中錄』, 또는 피눈물의 기록이란 뜻의 『泣血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한가한 날의 기록」이란 뜻의 『閑中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스러운 날의 기록과 한가한 날의 기록이 주는 의미의 격차만큼이나 일반인이 심정적으로 인식하는 진실과 실제의 진실 간의 거리도 멀다.
『한중록』이 한가한 날의 기록이 아니라 한스러운 날의 기록이라 해도 혜경궁 홍씨의 그 「한」은 남편인 사도세자가 당한 비참한 죽음의 한이 아니라 친정인 풍산 홍씨가가 당한 멸문지화의 한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홍씨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부터 그녀의 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야말로 역설의 변증법이다. 그 몰락 이유가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를 죽인 범인이라는 점에 이르면 그녀가 어떤 시각으로 『한중록』을 기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3개월 후 사헌부집의 박치륭이 『홍봉한에게 세손(훗날의 정조)의 보도를 맡긴다면 3백년 종사가 이 사람 손에서 망할 것』이란 상소를 올려 서인으로 강등된 후 유배됐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친정이 세자를 죽인 주범이란 인식은 세자 사망 당시부터 공유되고 있었다.
이는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동부승지 정이환에 의해 『전하의 원수이자 온 나라의 원수가 홍봉한인데 그가 지은 천만가지 죄악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일)에 범한 죄입니다』라는 공격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친정은 이런 공세 끝에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받아 몰락했던 것이다. 정조가 사망하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으나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자신의 친정을 신원시키면서 홍씨의 친정을 공격해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은 그녀는 정순왕후가 사망한 순조 5년 이후 본격적인 친정 신원에 나서서 『한중록』을 저술했던 것이다. 저술 동기가 친정 조카의 부탁인 것은 『한중록』의 성격을 분명히 해준다.
『한중록』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영조는 정신병에 가까운 이상 성격자이고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인데 두 사람의 「이상한 성격」이 부딪쳐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홍봉한은 일편단심 세자와 세손(정조)을 보호하려 한 충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조는 외가의 신원을 망설일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이 『한중록』의 결론이다.

역사기록에 목숨건 선조들

그러나 「대왕의 길」은 『한중록』이 지닌 이런 정치적 이면을 파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전 작품들과 질적인 차별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간단하게 말해 혜경궁 홍씨와 그녀의 친정을 사도세자의 적이 아니라 세자편으로 형상화하는 인식의 한계를 보임으로써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을 조명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역사물 서술에 있어 사료 해석은 이처럼 가해자와 피해자, 적과 동지를 혼동시킬 정도로 무섭다.
옛사람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데 매우 엄격했다. 중국의 『자치통감』이나 우리나라의 『동국통감』처럼 역사서에 「거울 감(鑑)」자를 쓰는 이유는 거짓없는 사실을 쓰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여기에는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거울이란 뜻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들의 역사 서술 자세는 진지하고 엄정했다. 때로 그들은 올바른 역사 기록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 연산군 때의 사화(士禍)를 사화(史禍)라고 부르는 까닭도 역사 서술에서 발단된 사건으로 김일손 등 수많은 사관(史官)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종주 김종직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중국의 의제를 단종에 빗대 애도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썼고, 그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史草)에 실음으로써 무오사화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사실 하나를 후세에 올바르게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만큼 역사 기록을 중히 여겼다.
돈 이외의 모든 것은 가볍게 여기는 오늘날 옛 사관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 해도 오늘날은 너무도 가벼운 마음으로 역사물을 기술하거나 제작한다. 역사물 제작에 관련된 뭇 사람들의 성찰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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