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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史 최초 異國여성 許黃玉은 누구인가?
 관리자  07-25 | VIEW : 1,965
古代史 최초 異國여성 許黃玉은 누구인가?

가락국의 허왕후는 인도 아닌 ‘한반도倭’ 출신

글·이희근 역사학자

허왕후는 과연 이역만리 인도로부터 가야로 시집온 것일까?
우리의 본격적인 고대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이 국제결혼은 과연 가능했을까? 후대에 불교를 통해 끊임없이 윤색된 허왕후 전승신화의 허와 실. 풍부한 철을 매개로 동아시아 국제무역을 주름잡았다는 금관가야의 경쟁력과의 관계는?

‘신비의 왕국’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 그의 출신지를 추적하는 작업은 한반도 남부와 중국, 그리고 인도·태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넘나들어야 하는 어렵고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허왕후는 과연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초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으로 알려진 김해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조(駕洛國記條)에 실려 있다. 그 가운데 허왕후의 출생과 관련된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천지개벽후 이 땅에는 나라가 없었다. 후한(後漢) 광무제 건무(建武) 18년(서기 42) 3월 계욕( 浴)날 황금알 여섯개가 든 황금상자가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왔다. 다음날 새벽에 알 여섯개가 사내아이로 변하였고, 그중 한 사람이 김해에 나라를 세웠다.
그가 바로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다. 6년후 아유타국(阿踰 國)의 공주인 허황옥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그를 왕비로 맞았다’는 것이다.

추측 무성한 기존의 허왕후 출생론

허왕후가 왔다는 ‘아유타국’이 어느 나라인가를 두고 지금껏 추측과 추적이 난무했다. 일찍이 한 아동문학가는 문제의 아유타국이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읍에 위치한 고대 인도의 ‘아요디아국’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허왕후는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 메남강 유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 출신의 왕녀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특히 김해에 남아있는 수로왕릉 정문의 현판(懸板) 좌우에 있는 네개의 장식판(裝飾板)에 그려진 쌍어문(雙魚文)이 바로 아요디아국의 문장(紋章)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후 김병모(金秉模) 교수는 쌍어문의 조사를 더욱 심화시켰다. 허왕후의 후손인 허 적(許積:1610∼80)이 조선조에 세운 허왕후 능비에 나타나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글귀에 착안해 그럴싸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그 주요 얼개는 허왕후 일행이 쌍어문을 나라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옛 보주(普州:현 四川城 安岳縣) 일대로 왔다가 다시 김해의 가락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수로왕릉 정문에 쌍어문이 그려졌고, 허왕후 능비에는 보주태후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아요디아국의 문장이고, 그것도 서기 1세기 허왕후 때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또 그 그림이 있는 수로왕릉 정문과 안향각(安香閣)이 그뒤로 보수되면서 어떻게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는지도 함께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 기록에는 그것을 입증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다.
다만 “삼국유사” 가락국기조는 수로왕릉 묘역(墓域) 안에 사당이 존재했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사당조차 조선 초까지만 해도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묘역도 거의 폐허 상태였다. 이러한 사정은 “세종실록” 20년 10월 기묘조에 나타나 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이 선(李宣)의 보고 내용이다.
‘신이 순행하여 김해에 이르러 읍성 서쪽 길 옆을 살펴보았는데, 가락 시조의 능침이 논에 잠겨 있어 혹은 길을 열어 밟고 다니고, 혹은 소나 말을 놓아 기르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수로왕릉 雙魚紋은 조선 정조 이후 조성된 것

조정은 그후 수로왕릉과 그 부속시설을 수축(修築)하는 조치를 여러 차례 취했다. “정조실록” 정조 16년 4월 을사조에 관련 기록이 있다.
‘가락왕릉은 김해부의 성 서쪽 2리쯤 되는 평야 가운데 있습니다. …설치한 물건은 혼유석(魂遊石) 1좌(坐), 향로석(香爐石) 1좌, 진생석(陳牲石) 1좌이고, 능 앞의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릉’이란 네글자를 써서 거북머리의 받침돌에 세워 놓았으니, 이는 바로 경자년(1780)에 특별 전교로 인해 고쳐 세운 것입니다. (또한) 돌담으로 둘러 쌓았는데 앞은 제각(祭閣)까지 닿았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지금의 쌍어문이 그려진 수로왕릉 정문이나 안향각에 대한 언급은 한줄도 나타나 있지 않다. 결국 쌍어문은 그 건물들의 건립과 더불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면 이 건물들은 과연 어느 시기에 조성된 것일까?
정조 16년(1792) 이후 왕명에 따라 수로왕릉에 배치된 능감(陵監)들의 기록을 정리한 “숭선전지”(崇善展誌)에 따르면, 순조 24년(1824)에 제각 동쪽에 안향각을 신축했다. 그후 내신루(內神樓) 3간(間)이 기울어져 전복될 염려 때문에, 헌종 8년(1843)에 내신루를 헐고 그 자리에 단층 건물인 외삼문(外三門)을 옮겨 세워 정문으로 삼았다. 이 외삼문은 정조 17년(1793)에 세운 건물이다. 따라서 정문의 쌍어문은 정조 17년의 신축 때이거나 헌종 8년의 이전 때, 안향각의 쌍어문은 순조 24년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쌍어문을 새긴 주체는 누구일까? “숭선전지”에 따르면, 수로왕릉의 정문과 안향각 등을 세울 때 승려들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이 쌍어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쌍어문은 본래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장으로, 왕릉 정문의 현판에는 그밖에도 불교와 밀접한 그림들이 다수 등장한다. 현판 좌우에 있는 네 개의 장식판에 그려진 남방식 불탑이 그렇고, 두 마리의 코끼리나 연꽃 봉우리가 그렇다. 더구나 쌍어문이 정말 아요디아국 문장이라면 오히려 수로왕릉이 아니라 허왕후릉쪽에 그려져 있어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허왕후의 출신지를 둘러싼 종래의 주장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아 말 그대로 가설에 머물러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는 허왕후 본인의 입을 빌려 이런 기사가 등장한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허왕후는 이렇게 스스로 아유타국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이 아유타국과 아요디아국의 가설이 성립한다면 아유타국은 분명히 불교가 크게 융성한 나라였을 것이다. 그곳에는 오늘날까지 아소카왕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고 보이라다(寶利邏多)·무저(無著)·세친(世親) 등의 쟁쟁한 불조사(佛祖師)들이 머물렀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확실한 점은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후라야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야인들로서는 당시 수만리 인도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터이고, 아유타국의 존재도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불교가 전래된 후에야 비로소 불교의 성지인 인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을 것이다.
결국 허왕후가 불교의 성지인 인도 출신으로 윤색된 것은 후대인들이 허왕후 시조전승의 신성화 작업을 하면서 불교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으로 필자는 믿고 있다. 허왕후가 한반도로 온 시기는 1세기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허왕후의 시조전승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신화들은 일반적으로 불교·유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세부내용이나 요소들이 상당히 윤색·변용된 것이 사실이다. 그중 불교의 영향은 단연 컸다.
예컨대, 단군신화의 ‘환인’이라든지, 부여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가섭원’은 좋은 예다. 혁거세신화 가운데 알영이 계룡(鷄龍)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다름아닌 마야부인의 석가 출생 이야기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수로신화에서 수로가 나라터를 잡으면서 말했다는 ‘이 땅은 여뀌잎만큼 좁고 작지만 산천이 수려하여 16나한이 거주할 만한 곳이다’라는 구절 또한 우리 신화 속에 불교적 관념이 투영된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듯 우리 신화는 불교적 관념과 요소를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윤색되어 왔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영향력이 커지자 신화도 불교의 권위를 빌어 신성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허왕후는 애시당초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허왕후 신화는 역사 속에서 신성화되어 가면서 불교의 권위를 빌리면서 다시 꾸며졌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 시기를 가늠해 보는 것이 중요한 수순이 된다.
수로왕을 비롯한 허왕후 신화가 불교와 접목된 것은 대략 가야에 불교가 정착된 시기로 보이는 질지왕대(8대) 이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정은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불교 통해 지속적으로 윤색된 허왕후 전승 신화

‘수로왕이 그녀(허왕후)를 아내로 맞아 나라를 다스린 지 150여년이나 되었지만, 당시 이 땅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본기(本記:가야 역사서)에도 사찰을 세웠다는 기사가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452)에 이 땅에 절을 설치하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 …모두 이 나라 본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구절에서 가야에 불교가 언제 보급되기 시작했는지 금방 드러난다.
가야로의 본격적인 불교 전래는 질지왕 2년 452년부터인 것이다. 또 허왕후 시대와 질지왕 시대 사이에는 무려 400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허왕후의 인도 출생설을 기정사실화하는 논자들은 가야에의 불교 전래를 허왕후의 가야 입국 시기와 동일시한다. 당시 가야에 불교를 전래한 인물을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長遊和尙)으로 꼽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 불교사는 완전히 새롭게 쓰여져야 할 판이다.
하지만 현재 불교사의 기본 텍스트인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는 왕후사를 세운 지 500년뒤 그 터 주변에 장유사(長遊寺)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초기에 생긴 장유사라는 사찰 이름에서 유래한 장유화상이 어떻게 가야에, 그것도 허왕후 시대에 불교를 전래했다는 말인가? 비약도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가락국기조에서는 질지왕이 왕후사를 창건한 것은 시조 수로왕과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거기에다 질지왕이 그 사찰 이름을 특별히 왕후사라고 붙인 것은 이 절이 수로왕보다 오히려 허왕후 시조전승과 더욱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준다.
허왕후 시조전승의 윤색작업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금관고사급허성제문집”(金官古事及許性齊文集) ‘가락국기’의 기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씨가 배에 탑을 싣고 바다를 건너 (가야에) 이르렀다. 왕이 장막을 치고 친히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왕후의) 이름은 황옥이며 보주태후라 불렀다.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거등(居登)으로 태자에 봉해졌고,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으며, 일곱째 아들은 모후의 동생인 보옥선인( 玉仙人)을 따라 신선술을 배워 쌍계사(雙溪寺)의 7불이 되었다.’
여기에서 수로왕과 허왕후의 소생 가운데 2남(男)은 허왕후의 성인 허씨를 칭했고 7남은 쌍계사의 칠불이 되었다는 것은 허왕후 시조전승이 지속적인 신성화 작업을 거쳐왔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한 작업은 20세기까지 계속됐다.
1910년경에 지어진 하동의 ‘칠불암현판기’(七佛庵懸板記)에는 수로왕이 잠룡(潛龍)으로 있을 때 서역 월지국(月支國) 보옥선사(寶玉禪師)가 그 누이동생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와 수로왕과 배필을 이루게 했고, 아들 열명을 낳았다. 그 가운데 한명은 태자로 책봉하고, 두명은 허왕후의 성을 따르게 했고, 나머지 일곱명은 선사를 따라 방장산(方丈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모두 성각(成覺)하여 칠불암을 창건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허왕후가 결코 불교 성지인 인도와 관련된 인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유독 불교 관련 신화들이 많은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 불교가 가야에서 최고 신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던 시절인 5세기 중엽에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를 창건한 이후부터 그가 본래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사람임을 강조한 것 말고도 삼국시대에도 시조전승을 신성화하는 데 불교의 권위를 빌리는 일들이 잦았다.

수로왕­허왕후 세력 한동안 交婚관계 유지

대표적 사례로는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의 연기설화를 들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왕이 황금 3만푼중과 쇠 57,000근을 보내는데 이를 가지고 진흥왕(539∼575년) 때 장육존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800∼900년 전에 보낸 황금과 쇠로 불상을 만들었다는 설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는 단지 아소카왕의 권위를 빌려 장육존상을 신성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후대인들의 윤색일 따름이다.
고구려 요동성에 있었다는 육왕탑(育王塔)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다. 육왕탑은 아소카왕이 인도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불교 진흥을 위해 세계 전역의 4만8,000곳에 세웠다는 불탑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소카왕의 인도 통일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불교가 전해지지도 않았던 시기에 불탑이 세워졌다는 것은 단지 불교 선교에 큰 업적을 남긴 아소카왕의 권위를 빌리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후대인들은 왜 허왕후 신화를 신성화시켰을까? 보통 건국신화의 신성화 과정은 왕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원칙이다. 가령 신라의 건국신화가 김씨 왕족에 의해 신성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그 본보기다. 그러나 금관가야의 경우에는 시조인 수로왕뿐만 아니라 허왕후도 신성시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 이유를 수로왕(왕족)과 허왕후(왕비족)의 두 집단이 개국 때부터 멸망 때까지 금관가야의 왕실을 배타적 연합 형태로 경영했을 것으로 본다.
수로왕과 허왕후 집단이 제3대 마품왕(麻品王)까지 교혼(交婚)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도 이를 증명한다. 결국 두 집단은 최소한 초기 금관가야의 왕실 구성원을 상호 배타적으로 공유했던 것이다. 두 집단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금관가야 왕실은 6대 좌지왕(坐知王) 대에 이르러 한때 위기에 직면한다.
‘가락국기’의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좌지왕은)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당(女黨)을 관리로 등용해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계림국(신라)이 (이 틈을 타) 정벌하려 하였다. …또 복사(卜士)가 점을 쳐 해(解)괘를 얻었는데 그 설명에 이르기를 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울 것이라고 하니, 왕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옳다고 여겨 사과하고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개혁하여 오랫동안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허왕후 집단은 좌지왕 때 새로 등장한 용녀 세력에 의해 그동안의 전통적인 기득권을 위협받게 됐다. 그러나 좌지왕은 신라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국 이래 강력한 세력을 유지해 왔던 허왕후 집단의 도움을 다시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왕비족으로 등장했던 용녀 집단을 다시 제거하게 된 것이다.
그후 금관가야의 주도집단인 허왕후 세력은 예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왕실 내에서 보다 강한 주도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8대 질지왕이 동왕 2년에 허왕후를 기리기 위해 왕후사를 창건한 사실은 그 단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왕후사는 수로왕과 허왕후를 숭상하기 위해 창건했지만, 그 이름으로 보아 허왕후 시조전승과 보다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질지왕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당시 왕실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허왕후 집단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해 줄 필요성이 있었고, 이를 위해 왕후사를 창건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다른 나라들의 개국신화와 달리 허왕후 신화가 수로왕 시조전승과 함께 신성족 관념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은 개국 이래 두 집단이 계속해서 금관가야의 주도세력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허왕후의 출신지는 과연 어디란 말인가? 이는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신(452)에… 왕후사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으며 아울러 남쪽의 왜까지 진압시켰으니 모두 이 나라 본기(本記)에 적혀 있다.’

질지왕의 왕후사 창건은 倭 무마용

가락국의 본기에 따라 이 구절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허왕후의 8대손인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라는 원찰을 세웠다. 그를 모신 왕후사를 세운 후 허왕후 신령의 도움을 받아 당시 적대적 세력이었던 왜세력을 통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허왕후 신령의 도움으로 왜를 통합할 수 있었다는 내용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구나 이는 설화가 아닌 정사(正史)인 본기에 나온 사실이 아닌가. 결국 이는 허왕후의 출신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왕후사 창건 시기에 가야는 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왜는 서기 400년에 가야지역을 공격한 광개토대왕 군대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왜는 가야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패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왜의 중심세력은 일본열도로 이동했다. 이는 “후한서”(後漢書) 등 5세기 이전의 중국 사서(史書)들에서는 왜의 중심지를 한반도 서남부로 적고 있는데 비해, “송서”(宋書) 등 5세기 이후 사서들에서는 일본 열도로 기록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때까지 가야지역에 잔존했던 왜 집단은 질지왕 때 금관가야에 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정을 증언해 주는 것이 다름아닌 왜를 진압했다는 앞의 기록인 것이다.
가락국은 이런 국제질서의 변동에 따른 시급한 현안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가야 지역에 잔존한 왜 세력을 온전하게 통합해야 하는 문제였다. 이는 단순히 무력적 수단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통합은 물리력에 의해 진행되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수단이고 영구히 왜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가야인과 왜인이 과거부터 하나였다는 이념을 공유해야 했다.
이때 가야와 왜라는 두 집단의 일체감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 허왕후였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수로왕 신화에 보이는 허왕후와 수로왕의 결합도 단순한 결혼이 아니라 나라를 건국할 정도의 세력을 지닌 두 집단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허왕후의 출신지는 기존의 가설처럼 인도가 아니라 왜국 출신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왕후사를 세우자 왜가 복속했다는 본기의 기록은 그의 출신지가 왜국이었다고 가정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 허왕후가 왜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를 위해 왕후사를 창건했다고 해서 왜가 복속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왕후사 건립은 단순히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대변되는 가야지역의 왜 집단을 무마하기 위한 상징적 조치로 봐야 할 것이다.
서기 1∼3세기 한반도에 관한 정보가 실려 있는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는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에는 변진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들 정보를 통해서도 금관가야의 건국 주체인 수로집단이 그 인접세력인 왜와 연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추론해 볼 수 있다.

허왕후 세력은 한반도의 서남해 해양세력

“후한서” “삼국지” 말고도 중국과 우리측 자료에 따르면 1세기경부터 5세기경까지 왜의 중심세력은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또한 이런 추정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또한 허왕후가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왔다는 신화 내용에서도 그 비밀을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배를 타고 왔다는 사실은 그 집단이 해양세력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의 ‘(수로왕이) 왕궁에서 서남쪽으로 60걸음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으로 궁실처럼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가 산너머 벌포 나루목에서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난 다음,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에게 보냈다’는 구절은 주목할 만하다.
허왕후가 수로왕을 만나기 전에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제사한’ 의식은 고대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 행해졌던 제사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가락국의 한 집단을 이룬 허왕후 집단이 왜인일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에 나타나는 ‘변진(弁辰)은 왜국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는 구절도 허왕후가 왜국 출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대목이다. 즉, 가야의 전신인 변진이 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문신하는 풍속도 흡사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한전은 금관가야가 철을 매개로 동아시아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허왕후로 대변되는 해양세력인 왜가 가야의 한 세력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다.
결론을 내자면 허왕후는 한반도 남부 가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왜국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현재까지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라는 가설에 비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고대사회에서 왕족이나 귀족의 결혼은 정략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서로 다른 두 집단이 결혼동맹을 맺었다면 두 집단 사이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 전까지 가야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도의 결합은 비약이 너무 심하다. 더군다나 이역만리나 떨어진 인도 출신의 허왕후가 인도에서 뱅골만과 남중국해라는 수만리의 험한 뱃길을 뚫고 한반도 동남부의 가야왕국으로 시집올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 1세기 무렵에는 인도 아요디아국과 김해 가락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시로서는 중국조차 인도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기 1세기의 항해술로 인도에서 가야까지 그 긴 항해를 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설혹 이 머나먼 항해가 가능하더라도 목숨을 무릅쓰고 인도 어느 왕국의 공주가 가야 시집행을 강행할 리는 만무하다.
이런 내용은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신화 그 자체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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