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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저자雷川 金富軾
 관리자  07-25 | VIEW : 3,614
最古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저자雷川 金富軾

“名山에 간직하지는 않더라도 부디 간장병 마개로는 쓰지 말아 주십시오”

글·이재광 월간중앙 학술전문기자

현존하는 국내 最古의 역사책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책을 쓴 이후 최근까지 900여년간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아 왔다. 민족사학자들로부터는‘사대주의적’이라고 비난받는 그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덜 사대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또 고대사 기록에 대해서도 허황된 기록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지나친 실증적 관점으로 우리 고대사의 상당부분을 상실케 한 주범이라는 상반된 지적을 동시에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잇따라 발견되는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는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삼국사기”의 중요성을 새롭게 하고 있다. 21세기와 함께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삼국사기”와 김부식의 일생을 돌아본다.

'중국 사서(史書)에는 통달해 자세히 알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일을 말하려면 망연해지고 그 시발(始發)을 알지 못하니 한탄할 일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중국의 사서(史書)는 너무 간략하고 우리의 고기(古記)는 문자가 거칠어 삼국의 사실을 다 싣지 못했습니다. 이 책을 명산에 간직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디 간장병 마개로 쓰지는 말아 주십시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역사책이라는“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자 김부식(金富軾)은 책 편찬을 완료했다며 임금께 내놓은‘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은 적잖이 음미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일을 너무 모른다’며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사서와 고기를 거론한 것은 이전의 많은 역사책을 섭렵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명산에 간직하지는 않아도 좋다’는 말에는 뭔가 ‘고고한 겸손’이 담겨 있고, 마지막으로 ‘간장병 마개로 쓰지는 말아 달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준다.
이 글은 대략 그의 나이 일흔에 쓴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삼국사기는 고려조 인종 23년인 1145년 편찬이 완료됐고, 그는 1075년 생이기 때문이다. 나이 때문이었는지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신(臣)은 늙고 해 저문 나이여서 날로 혼미함이 더합니다. 비록 부지런히 읽는다 해도 책을 덮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붓을 들어도 힘이 없고, 종이를 앞에 두고서도 붓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는 이처럼 늙음을 자탄하고 있는 것이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역사책을, 3년이라는 세월 동안 편찬했던 그의 노고를 이해할 만하다. 책은 제목 그대로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에 대한 “사기”(史記)다. 사기란 기원전 104년경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전설적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쓴 고대 역사서. 상고(上古)시대에서 시작해 전한의 무제에 이르기까지 무려 2,000년 동안 역대 황제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책은 역대 왕조의 편년사인 본기(本紀), 연표(年表), 부문별 문화사인 지(志), 열국사인 세가(世家), 개인 전기집인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됐다. 서로 다른 역사 부문을 연도와 상관없이 하나로 묶은 역사책이다. 이같은 역사 기술 방식을 통상 기전체(紀傳體)라 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연도별로 사건을 정리한 편년체(編年體)와 더불어 대표적인 역사 서술 방식으로 여긴다.

삼국사기 역시 마찬가지 형식을 취했다. 책은 모두 본기, 연표, 잡지(雜志), 열전 등 네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사마천의 ‘사기’와 비교해 보면 ‘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기와 비교해 보면 그밖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분량의 차이가 눈에 띈다. 사기는 모두 130권에 이르지만 삼국사기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0권에 불과하다.

편찬 기간과 편찬자 수에서도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혼자 10여년의 시간을 투자해 ‘사기’를 편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역적 모의에 연루돼 궁형(宮刑)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도 사마천은 집필을 단념하지 않았다. 반면 삼국사기는 임금의 애정어린 지시에 의해 무려 10명의 관료를 지원받아 3년만에 쓴 책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사기는 여러 측면에서 1,200년전 사마천이 쓴 사기를 능가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요성만큼은 결코 덜하지 않다. 한국 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는 가장 오래 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국 고대사에 관한 책이니만큼 고대 동아시아 관계사를 연구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기도 하다. 또 비록 11명의 편찬진이 동원됐다고는 해도 이 책의 책임은 김부식 개인이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저 이름만 얹어놓은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 기술 방식에서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반영됐다. 게다가 곳곳에서 ‘신(臣)이’라는 1인칭 주어가 사용되고 있다. 마치 김부식 개인이 쓴 것 같은 착각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만일 편찬자가 11명이라는 기록이 없었다면 ‘김부식 개인 집필’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마천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김부식 역시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의 후손에게 귀한 보물을 국보(國寶)로 남겨준 셈이다.

칭찬보다 욕 더 먹는 ‘동네북’ 김부식

삼국사기가 처음 햇빛을 본 지 850년. 그러나 그 오랜 기간 동안 김부식은 칭찬보다 욕을 더 많이 먹었고 삼국사기에 대해서는 혹평 일색이었다. 기본적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려는 의도가 좋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그럼으로써 한국 고대사는 물론 3국의 역사를 망쳐 놓았고 두고두고 후세에 큰 부담을 지워 놓았다고 한다. 더욱이 내용의 진위마저 의심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국이나 일본 등 인근 국가의 역사서들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삼국사기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평까지 나왔다.

혹평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사대주의적 사관에 기초했다는 사실이 책을 접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쓰리게 한다. 삼국의 멸망 이유에 대한 김부식의 해석만 봐도 그의 짙은 사대주의적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백제 멸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 고종은 두번이나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백제는 겉으로는 따르면서 속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그 멸망은 또한 당연하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이유도 엇비슷하다. ‘큰 나라이며 정신적 모국(母國)인 중국에 저항하면 망한다’는 논지다.

‘중국의 봉강(封疆, 영토)을 침범하여 원수를 맺고 그 군현(郡縣)에 들어가 살았으니 병난(兵難)이 끊임없고 화가 미치어 한시도 편안한 세월이 없었다. 급기야 동으로 옮겼지만 수·당의 통일을 무시하고 소명(召命)을 거역하고 불순을 내보였다. 게다가 칙사를 토굴에 가뒀으니 거만하고 모진 성격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은 자주 죄를 묻는 군사를 보내게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경위에 대한 해석도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잘 모셔 은혜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이 산길, 바닷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보내 대궐에 나아가 예의를 배우게 하고 태학(太學)에 보내 배우게 하니 성현(聖賢)의 은혜를 입고 미개(未開)의 습속을 이겨내고 예의의 나라가 됐다. 또 황제의 위력에 의지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차지해 군현을 만들었으니 거룩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사대사상은 자국의 주체성을 높이려는 의지에 조소를 보내게 마련이다. 중국처럼 황제를 칭한다거나 스스로의 연호(年號)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보기에 연호란 ‘하·은·주 3대때 백성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정한 것’이다. 물론 천자 이외의 사람도 연호를 쓸 수는 있다. ‘큰 운을 타고나 천하를 다투거나 간웅(奸雄)이 틈을 타고 나와 신기(神器)를 노리는 처지’라면 연호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 대륙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는 삼국은 물론 고려마저 이같은 ‘큰 운’을 타고나거나 ‘신기’를 다툴 위치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렸다.
‘천자(天子)의 나라에 소속된 변방 소국은 사사롭게 연호를 지을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다. 따라서 법흥왕을 비롯해 몇몇 신라왕이 자칭 연호를 쓴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이후 당의 지시에 따라 다시 당의 연호를 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중에 대한 관념이나 사회윤리관도 지금 보면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는 백성에 대한 유교적 접근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백성의 존재가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조건임을 역설했다. 이를테면 ‘민심은 천심’이라는 유교적 정치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백성은 제후의 첫째 가는 보물’이라는 맹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백성은 국왕의 소유라는 말과 다름아니다. 백성을 주체적 자아로 보는 시각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소유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굳이 민중사관을 꼽지 않더라도,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혐오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다. 남존여비사상은 거의 극단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신분질서보다 확고부동하게 정해져야 할 것이 남녀의 질서였다. 그는 이같은 입장에 기초해 심지어 자신의 뿌리인 신라마저 비난하고 있다. 신라만이 삼국 중 유일하게 여왕을 뒀기 때문이다. ‘신라 출신이어서 신라에 호의적으로 역사를 바꿨다’는 비판을 받는 그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분명 신라의 제도를 비난하고 있다. 그는 ‘중국 역사 어디에서도 여왕은 찾을 수 없다’며 ‘천도(天道)로도 양은 강(强)하고 음은 유(柔)하며 인사로도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다’고 남존여비를 설파한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안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는 것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며 ‘신라가 여자를 추대해 왕위에 앉힌 것은 진실로 난세의 일이니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 여성이라면 질겁할 얘기다.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렸다”

이쯤 해서 그의 역사인식이 어디에 기초하는지 알게 된다. 모든 학자들이 지적하듯 그의 역사인식의 근저에는 유교가 자리잡고 있다. 국가를 다스릴 때는 인정(仁情)을 발휘해야 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서 신분에 맞는 본분을 지키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또 중국과 고려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천자는 중국, 고려는 인근의 속방이라는 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니 고려가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려면 사대를 통해 중국과 군신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민중관이나 남존여비에 대한 사상은 모두 유교에 기초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는 이를 후세에 가르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유교에 기초한다’는 역사관은 삼국사기에 또 하나의 특성을 부과해 준다. 유교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어서 불교나 기독교 등 다른 종교처럼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천당이나 지옥에 대한 개념도 없다. 그러니 철저한 유교론자라면 현실세계 속에서 벌어진다는 기담이나 이적(異蹟) 등은 괴이하고 신비주의적인 것이어서 인정할 수 없다. 비록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라 해도 경험에 비춰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만 수용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종교나 신앙, 신비주의에 입각한 각종 신화나 설화도 인정할 수 없다. 이를 가리켜 학계에서는 ‘유교적 실증주의’라 부른다. 김부식의 ‘쓸 만한 것은 쓰고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렸다’는 얘기에도 이같은 유교적 역사관이 내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적 역사관에 기초한 사대주의, 백성이 소유의 대상이 된다는 민중관, 극단적인 남녀차별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김부식 당대에는 물론이고 사대주의에 몰입돼 있던 조선시대에서조차 김부식과 삼국사기는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 그 평가들을 돌이켜보면 대단히 기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평가의 기준이 지나치게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지나친 사대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누구는 잘못된 사관에 의해 역사를 마음대로 고쳤다며 반발한다. 그런데 누구는 또 김부식이 민족적 주체성을 주장했다며 비판한다. 심한 경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쓴 후 모든 자료를 폐기시켰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비(非)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혼란스럽다.

그에 대한 혹평은 삼국사기 편찬 직후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주로 한가지 사실에 대해 비난이 가해졌다. 왜 신비주의적 요소를 제외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삼국의 역사는 지나치게 간략해졌고 중요한 내용들이 생략됐다고 주장했다. 고려 의종 때의 문장가이자 역사가였던 이규보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가리켜 ‘파략기사’(頗略其事)라고 공격했다. 너무 생략된 것이 많다는 의미다. 황당무계하다며 빼버린 삼국의 초기 역사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매우 소중한 것들로 그대로 살려야 했다는 주장과 다름 아니다. 고대 역사를 그린 대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김부식의 사관을 비판함과 아울러 김부식이 빼먹은 역사를 새로 추가해야겠다는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진실

고려시대에도 이규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아직 유교의 지배권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적과 기이함을 무시한다는 것은 석가의 뜻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삼국사기가 나온 지 120여년 후 고승 일연(一然)은 삼국유사를 편찬함으로써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많은 후대 학자들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뭔가 간절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통적인 역사 기술 방식인 편년체도, 기전체도 아닌 독특한 방식을 취한 데다 내용도 한쪽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취하고 싶은 주제만 취해 기존의 형식을 깡그리 무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역사에는 신이(神異)가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계신데 어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생기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즐비하게 담겨 있다. 특히 나라를 창건한다거나 위대한 인물이 등장할 때는 뭔가 특기할 만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본래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그러니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다는 말인가’라고 묻는다. 마치 김부식을 향한 질문 같다. 책의 표제를 봐도 그가 무엇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신주(神呪) 등이 그들이다.

그렇다면 불교에 대해 유교가 완전한 승리를 거뒀던 조선시대 들어 김부식과 삼국사기는 칭송받았던 것일까? 김부식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경학으로 무장한 조선시대 선비학자들 역시 그를 비난했다. 재미있는 것은 주제만큼은 고려시대 비판론자들이 걸고 넘어졌던 것과 똑같았다는 점이다. 허무맹랑한 내용을 빼기는커녕 삼국사기에는 기담괴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유교가 안정됐던 조선시대 역사학자들은 김부식에 비해 훨씬 엄격한 실증주의를 적용했던 셈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거나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바위 밑에서 개구리 모양으로 누워 있었다는 등의 얘기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구체적인 평가를 살펴 보자. 조선 초기 유학자였던 권근은 삼국사기가 못마땅해 아예 ‘동국사략’이라는 역사서를 따로 편찬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삼국사기가 너무 잡스럽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요, 중복된 내용이 많아 장황하다고 비판했다.

세종때 정도전의 ‘고려사’를 개정했던 문인 윤회의 평가 역시 이와 멀지 않다. 삼국사기를 가리켜 ‘부피가 많고 용장(冗長)하여 읽으면 잠이 올 지경이다. 황당하고 미친 소리같아 입에 담으면 불경스러운 소리가 된다’고 혹평했다. 성종때 훈구파의 거목이었던 이극돈의 말을 들어보자. ‘삼국사기는 조략함이 극히 심하고 거기에 더해 무계불경(無稽不經)한 소리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같은 비난은 조선시대 천재학자 정약용에 이르러 정점에 선다.

그는 ‘신라 개국에서 1,200년이나 떨어져 살았던 김부식이 어찌 감히 삼국의 역사를 쓸 수 있겠는가’라며 ‘동국의 고사(古史)는 황탄(荒誕)하고 비리(鄙俚)해서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평했다.
조선시대 역사가들은 전반적으로 유교적 예(禮)에 매몰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고려 중기의 초기 유학자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선초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권근의 사례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그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지 3개월도 안되어 백제를 침공해 10여개의 성을 차지한 것을 문제로 삼는다. 광개토대왕이 3년상을 마치지도 않은 채 병사를 일으켰으니 ‘비례’(非禮)라는 것이다. 또 ‘의리와 시비를 돌보지 않고 오직 보복을 일삼았으니 세상이 어지러웠다’고 평가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삼국사기는 예가 아닌 것 투성이다. 신라의 박혁거세와 그의 비(妃)를 함께 성인으로 불렀다는 점,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상(喪)중임에도 불구하고 비(妃)를 맞았다는 점, 유리왕이 또 중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제천행사(祭天行使)를 수행했다는 점 등 헤아릴 수 없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김부식의 유학과 사대주의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김부식에 대한 혹평의 내용은 나라를 잃은 민족지사들에 의해 다시 한번 바뀐다. 구한말 이후 지식인들의 문제의식은 왜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는가에 있었다. 그리고 답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사대주의요, 모화(慕華)주의였다. 이들은 또 그 기원을 찾아봤다. 그리고 그 귀결점이 바로 김부식과 삼국사기였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김부식이 사료를 몰래 궁중에 감춰놓고 열람을 금지시켰으며 고려 초의 실록을 허다하게 삭제시켰다”는 주장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학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兵火)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려한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가 편집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빈약하다고 평가하지만 사실 사료는 역대의 병화에서라기보다는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焚滅)한 것으로 봐야 한다. 나아가 그는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조선의 강토를 바싹 줄여 대동강 혹은 한강을 국경으로 정하는 한편 사대적, 유교적 성격에 부적합한 사료는 논폄도개(論貶塗改) 혹은 산재(刪除)했다.”

“‘삼국사기’는 舊삼국사에 대한 개악서”

최남선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삼국사기가 사실에 대한 충실한 기록보다 외형과 문장에 치중했다고 평가한다. 삼국사기 이전의 고대사 사료인 “구삼국사”(舊三國史)에 대한 개악서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삼국사기는 그런대로 체제가 잘 짜여져 있고 문장이 화려하다. 그러나 이같은 외관이 사실상 이 책이 갖는 단점이다. 후대인과 타인의 안목에 번지르르하게 보이게 된 것이 사실은 중화사상과 한문적인 습성으로 국고(國故)의 원형을 왜곡하고 마음대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국가의 고사(古史)를 찾아보려는 시도는 실로 불가능하다.”

신채호와 최남선의 해석은 아직 유효하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입각해 삼국사기를 기술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는 별반 없다. 그렇다면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에 입각했다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해석에 현대 학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삼국사기를 다양하게 해석하려는 현대적 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삼국사기가 어느 역사서보다 민족의 자아 인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에 비하면 이 특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화여대 신형식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같은 주장 역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라의 왕명이나 관직명 등을 단순히 왕명으로 통일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의 대표적인 근거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은 이전의 사료에서는 그저 중국식 표기인 ‘왕’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불리던 것. 김부식은 이들 명칭을 있는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동성(同姓)간의 결혼에 대한 해석도 주체성을 갖는다는 사례다. ‘부인을 얻는 데 동성(同姓)을 취하지 않는 것은 인륜의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동성의 아내뿐 아니라 형제의 조카와 내종, 이종의 자매까지 부인으로 삼았다. 무릇 외국과는 풍속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예속으로 이를 책망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쓰고 있다.

어떻게 이같은 극단적 해석이 생겨난 것일까? 현대 독자들은 그로 인한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의 주장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고대사는 이미 대중적인 관심사가 된 지 오래. 또 고대사는 삼국사기의 해석에서 시작하므로 삼국사기에 대한 이같은 복잡하고 상반된 해석은 일반인의 고대사 이해를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 될 수 있다. 결국 누가 옳은가는 독자들이 판정할 문제다. 삼국사기에 대한 해석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김부식의 출신 성분과 당대의 역사 변동 그리고 그의 지위, 편찬 동기 등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할 것이다.

김부식은 1075년 생이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지 어언 150년이 흘러 안정세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마침 중국의 송나라가 허약해진 틈을 타 거란과 여진족 등이 변방에서 발흥하던 무렵이었다. 가문의 뿌리는 신라의 왕족이었다. 신라가 망할 무렵 김부식의 증조부 김위영은 왕건에게 몸을 의탁해 살아남았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호족들에게 유화정책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왕건은 귀의하는 호족에게는 귀화 직전까지 지배하던 모든 권세를 인정해 주는 한편 필요하다면 혈연의 정까지 맺었다. 그의 아내가 호족 출신 자녀로, 29명에 이른다는 사실도 이를 반영한다. 증조부 김위영 역시 같은 대우를 받았다. 여식을 왕건에게 주지는 못했지만 그는 경주 주장(州長)으로 여전히 호족 행세를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경주는 새 왕조 고려로 보면 변방일 뿐. 김부식의 가문은 숱한 호족 중에서도 별 볼 일 없는 가문이 되고 만 셈이다.

‘1,000年來 大사건’의 전말

김부식은 중앙정계에 진출한 부친 김근 덕에 개경에 머무르며 향후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과거에 급제했던 것은 21세때. 자료는 없지만 우수한 성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그가 급제 직후 요직인 직한림에 발탁됐기 때문이다. 직한림은 당시 과거에서 1~2등을 한 급제자에게만 부여되던 자리였다. 숙종 원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그의 관직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주로 한림원에서 근무했던 김부식은 숙종의 후대 임금인 예종대에 이르러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고 경전과 역사 강의를 도맡을 정도였다.

인종의 즉위와 외척의 등장은 김부식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 때인 1122년 예종이 급작스레 사망하자 열네살의 어린 임금 인종이 즉위했다. 어린 왕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 보통 왕비나 외척들이 득세하게 마련이다. 이로써 어린 임금을 볼모로 권력을 한손에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인종의 외조부 이자겸이었다. 이자겸의 권력 장악은 거의 예정된 수순이었다. 단순히 예종의 장인에 그치지 않고 대를 거듭하며 왕비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자겸의 조부인 이자연은 딸 셋을 모두 문종의 후비로 집어넣었고,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냈다. 인종에게 이자겸의 첫째딸은 생모, 둘째딸은 계모 겸 이모였다. 게다가 나머지 두 딸은 아예 인종에게 시집보내고 말았다. 위의 두 딸은 인종에게 어머니 겸 이모 겸 처형이었고, 이자겸은 장인인 동시에 외조부가 되기도 했다. 인종의 두 부인은 또 이모이기도 했으니 이자겸은 보기 드문 ‘왕비집안’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음은 물론이다. 이자겸을 포함한 인주 이씨 집안은 숙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다섯 임금 모두를 집안 사위로 맞은 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란 나뉘는 것이 아니다. 권력 독식을 방지하기 위해 반대파들이 형성됐고 정권을 잡은 이자겸은 이들을 숙청하는 지경에 이른다. 숙청된 반대파에는 임금인 인종의 숙부까지 포함됐으니 그 권력의 실상이 어땠는지 짐작할 만하다. 반대파를 모두 없애 버린 이자겸은 더 이상이 없다고 할 만큼 갈 때까지 가고 말았다. 자신이 갖고 싶은 직책을 아무렇게나 정하고 인종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라고 강권했다.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갈 때까지 간 이자겸은 인종을 아예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외할아버지요,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으니 네가 와야 한다’는 식이었다.

아무리 손자라지만 이 정도 되면 누구라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종은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이자겸의 집에 군사를 파견, 자신의 외조부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무인 척준경과 손잡은 이자겸은 그 길로 왕궁에 침입해 임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종은 오히려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자겸은 내친 김에 딸을 시켜 외손주이자 사위였던 인종을 시해하기 위해 나섰다. 아버지의 명령보다 남편의 목숨을 귀하게 여겼던 왕비 탓에 인종은 목숨을 건졌지만 뭔가 새로운 대처방식을 찾아야 했다. 연금 상태에다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왕당파’로 분류돼야 할 인종의 측근들은 한가지 묘안을 냈다. 이자겸의 사돈이자 무력의 원천을 제공하는 무인 척준경을 구슬러 이자겸을 제거하자는 안이었다. 인종을 포함해 몇몇 신하들의 반대가 있기는 했지만 달리 뾰족한 방안이 없자 결행에 나섰다. 결과는 의외로 대성공. 단순하기 그지없던 척준경은 인종 측근의 세치 혀에 놀아났고 결국 이자겸 일당을 귀양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척준경이 안전할 리 없었다. 이자겸 일파를 몰아낸 인종은 다음해 척준경을 체포해 귀양보냄으로써 보위를 지켰다. 이로써 인종은 이자겸의 마지막 화근을 잘라낸 것이다.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을 목도했다. 학자로서 예종의 일대기를 쓰는 한편 경학과 강의를 주로 담당했기에 큰 변고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그의 횡포를 혐오했음이 당연했다. 인종이 즉위한 것이 1122년이었으니 김부식의 나이 이미 47세. 이자겸이 귀양감으로써 끝을 맺은 해가 1126년이었으니 김부식은 어느새 50을 넘긴 해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김부식과 인종이 겪은 환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고려 예종과 인종기 동아시아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송의 나약함을 틈타 북아시아에서 발흥한 여진족들은 금(金)을 세움으로써 본격적인 남북조(南北朝)시대를 개막했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1126년에는 송이 함께 금을 치자는 제안을 해올 만큼 아시아의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틈을 타 중앙정계에서 발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었다. 서경은 현재 평양 지역으로 일찍부터 고려시대 수도 개경(송악으로 불리던 곳으로 현재는 개성으로 부른다)을 대체할 만한 좋은 지형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려 3대 임금인 정종이 서경 세력 왕식렴의 힘을 얻어 임금이 된 이후 100여년 동안 서경천도론은 지속적으로 흘러나왔다.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풍수지리설로 인해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지덕(地德)이 쇠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물론 고려는 개경을 버린 적이 없었다.

이자겸의 난이 끝나자 인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바로 묘청이었다. 서경 출신이었고 특히 태조 왕건의 앞길을 예언해 고려 왕조의 신앙이 됐던 도선대사의 후계자를 자처함으로써 묘청은 어렵지 않게 인종의 마음을 빼앗았다. 이자겸에 의해 생사를 넘나드는 곤욕을 치른 인종은 묘청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개경의 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서경천도론이 거론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인종이 묘청의 안을 적극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인종의 입장에서는 이자겸의 난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유를 자기보다 풍수지리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마음이 편했고, 어차피 이자겸이 불태운 개경의 왕궁도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묘청은 한술 더 떴다. 단순한 천도론이 아니었다. 대륙의 혼란기를 틈타 인종을 황제로 격상시키고 대륙을 도모하자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척준경을 귀양보냄으로써 이자겸의 난을 완전히 종결지은 지 1년만인 1128년 인종은 마침내 서경 천도의 결정을 내리고 서경에 궁터를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의 대승리로 보였다. 묘청은 여기서 곧장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궁이 완공된 다음해 서경에 잠시 머무르던 인종에게 묘청은 아예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군사동원을 제안했다. 묘청은 속내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의 일을 두고 신채호는 ‘1,000년래의 대사건’으로 표현했다. 고려와 조선을 합친 1,000년의 역사에서 이처럼 자주의식이 발현된 적은 없었다는 의미다

인종의 통치, 德인가 우유부단인가

백성 사랑으로 보면 이보다 나은 帝王이 또 있을까

고려의 17대 왕인 인종에 대해서는 두가지 평가가 따라다닌다. 덕이 많았다는 것과 우유부단했다는 평가다. 어쩌면 이 둘은 함께 붙어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죄를 어쩔 수 없이 지어 처벌한다 해도 인정을 베풀어 곧 사면해 주면 덕이 있는 것이고 동시에 우유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종의 정치를 살펴보면 꼭 그렇다. 좋은지 나쁜지, 그 호오(好惡)의 판단은 물론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인종은 열네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신료들은 부왕 예종이 죽자 하루도 빠짐없이 통곡하는 인종을 보며 일찌감치 덕치(德治)할 임금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을 어쩔 수 없이 전남으로 유배시켰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효심이 워낙 지극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효심은 이자겸이 죽자 바로 그와 부인의 죄를 사면해 준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인정(仁政)은 살아났다. 그는 토벌 책임자 김부식에게 “난을 일으킨 사람들도 모두 나의 아들딸들이니 우두머리만 죽이고 나머지는 죽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특히 묘청 일파였던 윤첨이 투항하자 그를 후대하며 갱생의 길을 열어 주려 했다. 이미 묘청 등 중심 인물들이 죽었기에 변란을 막겠다는 정치적 계산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후환을 없애겠다는 김부식은 윤첨의 목을 벤 것은 물론 묘청 등 중심인물들의 목을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두번의 반란의 진압 과정을 보면 인종의 ‘덕치’보다 ‘우유부단’이 더 강조될 것이다. 하지만 인종의 덕치는 실상 백성에 대한 마음자세에서 비롯됐다. 백성을 사랑해 형벌을 가할 때도 신중과 관용을 강조하며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고문도 가급적 금지했고, 반역의 혐의가 있어도 죽이지는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김부식은 ‘이보다 더 나은 제왕이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김부식에게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짓도록 한 것도 은퇴하는 노신(老臣)에 대한 인종의 배려였다.

하늘이 막은 西京천도

대륙의 정벌 여부를 떠나 묘청의 계획은 최소한 시도는 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금군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던 데다 혼란기였던 만큼 대륙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가가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앉아서 당하느니 어차피 군사를 정비해야 할 것인데 내친 김에 금나라를 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서경천도와 칭제건원, 금국 정벌은 모두 하나로 묶여 있던 제안이었다.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사안이 아니었다. 인종이 이미 서경천도를 확정한 상태였으니 향후 작업은 불가피하게 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서경천도 자체가 불발로 끝났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서경천도를 가로막았던 주체는 ‘하늘’이었다. 개경파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도를 결심한 인종은 궁궐을 지으라는 지시를 하는 외에도 자주 서경을 찾아 한참을 그곳에 머무르고는 했다. 일부 정사가 서경에서 이뤄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를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서경을 찾을 때마다 우박이 오고 벼락이 치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묘청의 요설이 거짓으로 판명나고는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종은 서경천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개경파는 다시 힘을 얻었다. 서경파는 ‘하늘’이 노하게 된 모든 죄를 뒤집어 써야 할 형국이었다.

서경파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곧 반격을 개시했다. 자칫 목숨까지 내줘야 했으니 순순히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날 데가 없었다. 묘청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투자했던 시간은 무려 7년. 1135년 그는 마침내 최종 패배를 시인했다. 자신을 옥죄는 개경파와의 권력다툼에서도 패색이 짙었고 무엇보다 최고권력자였던 인종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묘청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 개시된 것이다. 묘청은 자신이 일으킨 나라의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짓고 대륙에 복속되지 않은 말 그대로 자주국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때 김부식은 어느덧 개경파의 수장이 돼 있었다. 이때 나이가 예순. 학자에서 정치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정계 원로였다. 인종은 김부식을 묘청반란군 진압의 최고 책임자로 내세웠다. 김부식은 먼저 동생 김부의를 시켜 1차 토벌대를 보내고는 곧 자신도 전장으로 출정했다. 문관 출신인 김부식은 힘보다 머리를 썼다. 인근 주민들의 지지를 제거하기 위해 격문을 붙여가며 임금인 인조의 토벌 명령을 유포시키며 묘청 일파를 분열시켰다. 결국 묘청 일당은 김부식의 전략에 휘말려들었다. 묘청의 부하 중 하나였던 조광은 묘청과 유참, 그리고 유참의 아들인 유호 등 세 명의 목을 베어 김부식에게 내놓고 살길을 찾았다. 이로써 묘청의 난은 진압됐던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담은 세가지 지향점

김부식은 이로써 반란 진압의 1등 공신이 됐다. 하지만 그 역시 한 걸음 더 나갔다. 반란군을 진압하며 함께 공을 세운 정적을 몰아내려 했던 것이다. 반란군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그는 목의 가시같던 두 명의 정적, 윤언이와 한유충을 탄핵했다. 이중 윤언이는 김부식에 버금가는 권력자였다. 예종기 문신이자 명장이었던 윤관의 자제로, 가문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김부식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윤언이가 김부식을 능가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당시 힘이 있던 김부식은 라이벌 윤언이를 제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희망은 그대로 관철됐다. 두 정적은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다. 이들은 귀양을 가며 김부식에게 복수의 칼을 갈았을 것이다.

권불십일홍(權不十日紅). 묘청의 난을 진압해 최고의 공신이 됐고 두 명의 정적을 제거했다고는 하지만 김부식의 권력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가자 나이가 들었고 그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하나둘씩 중앙정계를 떠났다. 3년이 지난 1140년 그의 나이 68세때. 인종은 ‘덕’을 베풀었다. 이자겸의 난이나 묘청의 난 관계자들을 모두 풀어주라는 대사면령을 발포한 것이었다. 이자겸의 정적이었던 윤언이가 풀려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풀려나기만 한다면 정계 복귀가 또한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김부식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김부식이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을 것은 뻔하다.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당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김부식은 결단을 내렸다. 노련한 정치가였던 그가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그 나이에 험한 꼴을 당하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자칫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나이가 들만큼 들었던 그로서는 후손들도 생각해야 했다. 그는 고심 끝에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인종으로서는 그의 생각과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또 덕이 많았던 인종은 공을 많이 세운 구신(舊臣)에 대한 예우가 필요했을 것이다. 관료들을 대주며 김부식이 정치적 부담 없이 할 만한 일을 주는 것이 신하에 대한 주인의 도리였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바로 “삼국사기”의 편찬이었다.

이쯤 되면 삼국사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알 만하다. 40여년간 정·관계에서 잔뼈가 굵은 데다 변란 진압의 1등공신이 퇴임과 함께 임금으로부터 부여받은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여기서 몇가지 점은 추정해 볼 만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임금이었던 인종을 위해 편찬해야 했고 당대의 역사를 반영해야 했다. ‘역사는 역사가 쓰여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사학자들의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우선 유교가 근간이었다는 점부터 임금을 위한다거나 당대 현실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 그는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한 문신이었으며 임금에게 경학을 가르친 유학자였다. 또 사신으로 송(宋)을 찾아간 것만 세 번이나 됐다. 발전된 나라를 보며 고려가 지향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게다가 신분적 질서와 세습제를 표방했던 유교는 지배자의 이해와도 밀접하게 맞아떨어졌다. 지배자로서도 싫지 않은 원리였다. 하지만 당시 유교는 아직 불교의 힘을 누르지 못했다. 국가 건립에 크게 기여한 도선대사는 국부로 자리매김 됐고 왕족 중에서도 승려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김부식이 극단적인 유교적 관점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에는 이같은 복잡한 사연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인종이 西京으로 못간 까닭 : 遷都 발목잡은 알 수 없는 잇단 천재지변

인종은 확실히 묘청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경 천도를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이 싫어진 데다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세우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했다는 말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인종은 서경에 궁궐을 지으라고 지시했고 궁궐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대화궁’이라 이름짓고 자주 서경을 찾아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서경길에는 뭔가 좋지 않은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대화궁 축성을 기념해 서경을 찾았던 1128년 9월 서경의 중흥사탑이 벼락에 맞아 타버리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1130년 다시 서경을 찾았을 때는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날이 어두워져 인종 일행이 길을 잃어버리는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초자연적 현상으로 일을 그르치자 묘청은 꾀를 냈다. 대동강에 기름에 끓인 떡을 빠뜨리고 기름이 떠오르자 “상서로운 기운이 일고 있다”며 서경행(西京行)을 재촉했던 것이다. 심지어 묘청은 이를 ‘용의 침’으로까지 불렀다.

하지만 이는 곧 거짓으로 판명됐다. 묘청의 말을 의심한 개경파들이 대동강 바닥을 수색해 기름에 찌든 떡덩어리들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서경 천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묘청에 대한 신뢰와 심리적 의존도가 그만큼 컸던 탓이다. 1133년 인종은 다시 한번 서경행을 떠났다. 지금 당장 천도하지 않더라도 어의(御衣)를 먼저 보내달라는 묘청의 말에 쾌히 승낙한 후 오른 서경행이었다. 그런데 이때 역시 천재지변이 잇따랐다. 서경 인근에 도달했을 무렵 인종을 수행하던 말 한마리가 미친 듯 날뛰어 화를 입을 뻔했던 데다 대동강에서 물놀이하던 도중 폭풍이 휘몰아쳐 돛이 찢어지고 술상이 뒤집히는 등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인종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천재지변은 끊이지 않아 3월에 눈이 내리고 하늘에서는 별똥이 떨어지더니 4월에 서리가 내리는가 하면 큰 비와 우박으로 농작물이 크게 망가지는 일이 벌어졌다. 개경파들은 이를 모두 묘청의 요사스러움에 하늘이 노한 결과라고 주장하며 묘청 일파에 대한 처벌을 내세웠다. 묘청의 난은 이같은 개경파들의 공세에 인종이 끌려들어가자 어쩔 수 없이 벌인 자위행위였다.

김부식의 事大主義를 둘러싼 논란

그가 지향했던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보인다. 유교와 사대주의, 인종에 대한 충성심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지향점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일관되게 표기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두 개의 지향점을 찾아 달릴 때도 서로 충돌함으로써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몰리게 된다. 세 가지 지향점을 찾아 나선 김부식은 어느 지점에서 한두 가지의 목표를 버려야 했던 상황은 없었을까? ‘있었다’는 확신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대주의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강한 자의식도 있었다”는 평가는 주로 ‘중국은 대대로 근친상간을 문제시 삼지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근친상간을 허용했다’며 ‘이것은 문화적으로 다른 사안이어서 뭐라 말할 수 없다’는 내용에 근거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해석대로 이것이 강한 자의식을 드러내 주는 것인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를 사대주의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의 충돌로 해석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앞서 말한대로 숙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기까지 인주 이씨 집안과 왕실 친인척 관계는 너무도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외조부가 장인이고 이모가 아내며 어머니와 계모는 처형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콩가루 집안’이었음이 틀림없다. 원인이야 인주 이씨 집안의 권력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왕실 스스로 유교의 원리를 그르친 것이었다. 그래서야 어디 유교를 국교로 채택할 수 있겠는가. 유교와 사대주의와 모화주의에 빠져 있던 김부식은 여기서만큼은 ‘강한 주체의식’을 발현한 것이 아닐까? 무조건적으로 유교를 따른다면 임금은 궁지에 몰릴 것이 뻔했다. 유교 및 사대주의와 충성심의 충돌. 여기서 김부식은 앞의 두 목적점을 버리고 임금에 대한 충성을 따랐을 개연성이 얼마든지 있다.

삼국의 초기 역사를 쓰며 기담괴설을 담은 것은 유교적 실증주의 논리가 갖는 자체 결함이다.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얘기들은 요설이니 담지 않겠다’는 그의 논리는 두가지 측면에서 문제에 봉착한다. 우선 그가 참고로 한 숱한 역사서에는 귀신, 난생설화, 동물의 인격화 등 그저 옛날 얘기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이 적지않게 담겨 있다. 유교적 실증주의는 기록에 의존한다. 또 유교적 실증주의는 황당무계한 얘기를 담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록에 남아 있는 기담괴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미 인간사회가 성립된 이후라면 배제해도 하등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회가 성립되기 이전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수천년전 일을 추정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기담괴설을 배제한다 해도 확신이 설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최초로 나라를 만든 사람들 얘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늘’의 특별한 뜻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김부식은 최소한 ‘태초’의 얘기에서만큼은 자신이 그토록 중시했던 유교적 실증주의를 저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다. 삼국사기에서 주장하는 ‘사실’(史實)에 관한 것이다. 유교적 관점에서 쓰여졌든 사대적 사관에 의해 쓰여졌든 역사책이 갖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대사에 관한 자료는 세계 어느 나라든 자료 부족증을 겪고 있다. 삼국사기가 아무리 혹평받는다 해도 기록된 사건이나 내용들이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사료로 인정받을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은 사실일까? 이 역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논쟁에는 인근 국가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사료들에 대한 평가가 걸려 있어 좀처럼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모든 국가들이 역사를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다.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는 아전인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의 사실에 대한 평가는 그래서 더더욱 문제가 된다.

근대 역사학적 시각에서 처음 삼국사기를 검토한 사람은 일본인 사학자 쓰다 소기치(津田左右吉). 20세기 초 일본 사학계의 거두로, 그의 이론 중 많은 것은 아직까지 정설(定說)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919년 삼국사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모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국사기 중 백제에 대한 것은 4세기 중·후반기인 근초고왕부터, 신라의 경우 5세기 초인 실성왕 이후부터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다른 사료의 예를 들었다. 진수가 쓴 삼국지 위지에 따르면 1∼3세기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이 있었고 북부에는 한 군현(漢郡縣)이 설치돼 있었으며 일본의 “일본서기”에 따르면 4세기경 일본은 한국에 출병해 남부를 지배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이같은 어떤 내용도 없다는 것이다. 대신 삼국사기는 3세기 이전부터 한반도에 강력한 국가가 성립됐다고 말한다. 더욱이 삼국 중에서도 가장 뒤쳐졌다는 신라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57년으로 설정, 고구려(기원전 37년)나 백제(기원전 18년)보다 앞섰다고 기록함으로써 신라 출신의 김부식이 쓴 자료에 의심을 사고 있다. 소기치 교수는 그래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버렸다.

소기치 교수의 ‘황국사관’은 해방후 한국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일제하에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학자들이어서 감히 그의 이론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도는 이 기간을 다소 줄이는 데 성공했다. “삼국지”는 인정하고 “일본서기”는 부정하며 삼국사기에서 믿을 수 없다는 초기 기록의 기간을 다소 줄인 것이다. 그러나 이병도가 소기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비록 일본이 남한을 지배했다는 것은 부정했지만 1∼3세기 한반도 남부는 군소국가들이 난립해 있었다는 점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국내 사학계는 이병도의 주장을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이는 한편 일본의 황국사관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해 왔다.

새롭게 조명되는 “三國史記”

그러나 최근 이같은 생각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한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그동안의 ‘정설’에 정면도전했기 때문이다. 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사료 비판을 통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그동안 국내 사학계는 일본의 황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삼국지”와 “일본서기” 그리고 “삼국사기”를 비교하는 자리에서 오직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만을 부정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에는 300∼400년 가량의 정치 공백기가 존재하며 이로써 일본 황국사관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이 유효할 여지를 만들어줬다고 말한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한반도에 일찌감치 강력한 국가가 형성됐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중 일식(日蝕)부분에 대한 기록이 대체로 정확하다는 것을 그는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내세운다.

게다가 최근 잇따라 나타나고 있는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는 김부식과 삼국사기가 새롭게 태어나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경주 일대에서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과 철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국 연대가 기원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했다. 원로 고고학자인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는 이미 1970년대 이같은 주장을 했지만 최근에 와서야 활발하게 수용되고 있다. 이들 연구자들은 지난해 아파트 신축 공사중 우연히 발굴된 풍납토성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게 해주는 결정적 자료로 받아들이고 있다. 폭 40m, 최대 높이 9m, 길이 2.2km인 이 토성의 축성 연대는 최고 기원전에서 최하 2세기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강력한 통일국가가 없었다면 엄두도 낼 수 없을 이 토성의 존재로 서기 300년 이전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존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신뢰가 살아나고 있다.

삼국사기는 빛을 본 지 850년 동안 혹독한 매를 맞고 21세기를 맞았다. 이제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구와 발굴이 계속된다면 삼국사기는 ‘개작’(改作)이라는 오명을 벗고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다음 책들을 참고했다. “인물로 읽는 고려사”(정성희, 청아, 2000),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체계”(이종욱, 소나무, 2000),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상)”(조동걸 외, 창작과비평, 1996), “한국의 역사인식(I)”(이우성 외, 창작과비평,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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