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역사교실


  
大伽倻의 왕들은 왜 高地에 묻혔을까
 관리자  07-25 | VIEW : 2,115
大伽倻의 왕들은 왜 高地에 묻혔을까

연맹 주도권 유지 위해 가야산신의 適統 과시

李熙根 : 역사학자. 1960년 전남 담양 출생. 단국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논문 ‘동학교단과 갑오농민봉기’등 저서 “우리역사의 수수께끼1·2”(공저)

우리 고대사에는 사료 부족으로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많다. 伽倻 또한 그 중 하나로 이 나라는 아직까지도 온통 비밀에 쌓인 왕국으로 남아 있다. 예컨대 “삼국유사”에 실린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 이야기도 수많은 추측을 불러온 비밀이다. “삼국유사”는 허황후의 입을 빌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許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허황후가 왔다는 아유타국이 어디인가를 두고 아직까지 많은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한때는 이곳이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읍이라는 설이 지지를 받더니, 태국 메남강가에 있는 古都 ‘아유티야’라는 설이 그럴 듯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되기도 했다. 또 허황후의 諡號인 ‘普州太后’에서 힌트를 얻어 중국 泗川省 嘉陵江 유역의 보주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모두 나름대로 근거들을 가지고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나오지 않아 대부분 가설로만 남아 있다.
다행히 1970년대 이후 많은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신비의 왕국 가야’의 비밀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령 이미 기원전 1세기경부터 조성되기 시작된 가야 고분들에 부장된 철제품의 양과 질이 오히려 신라·백제·倭보다 훨씬 우월하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BC 1세기부터 삼국에 못지않은 강력한 정치세력이 가야지역에 위치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고대사회에서 국가간의 전쟁 승패는 우수한 철제 무기를 확보한 세력에 의해 좌우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가야고분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태왕릉과 장군총, 백제의 무령왕릉, 신라의 황남대총과 금관총 등은 ‘고분(古墳)시대’ 각 나라를 대표할 만한 무덤들이다. 삼국을 제외하고 가야지역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형 고분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가야가 자리잡은 고령의 지산동고분군, 아라가야가 있던 함안의 말이산고분군, 비사벌가야가 있던 창녕의 교동고분군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고분은 대개 야산의 경사면이나 구릉 혹은 그 주변의 평지에 자리잡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필자가 최근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산동고분군이었다. 왕릉으로 추정되는 지산동 대형 고분들이 매우 특이한 장소에 터를 잡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들 고분은 여타의 것들과 달리 해발 270m가 넘는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의 고도(古都)에 해당하는 고령읍을 둘러싸고 있는 주산(主山) 남쪽 산사면을 따라 위치해 있다. 수백기에 달하는 이 고분군은 봉분(封墳)의 규모에 따라 대·중·소형의 고분으로 나뉜다. 직경 20m가 넘는 대형분들은 주로 능선상에, 중형분(10∼15m)은 능선 중턱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소형분은 봉토 없이 발견되어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능선의 위·아래 구분 없이 산재해 있다.
말하자면 대가야 사람들은 죽어서도 현실세계의 대가야 왕국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처럼 고분군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중 능선상에 위치한 대형 고분들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고령조에서 ‘현의 서쪽 2리쯤 되는 곳에 옛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서 금림왕릉(錦林王陵)이라고 일컫는다’면서 대가야의 왕릉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후 1970년대부터 계명대와 경북대 박물관에 의해 다시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44호분의 경우, 그 규모가 동서 27m, 남북 25m, 높이 6m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다. 그러나 48∼51호분은 규모면에서 그보다 더 큰 것으로 가야지역에서는 가장 거대한 고분들로 꼽히는 것이다. 그 조성시기는 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으로 성장한 5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여기에서는 왕족의 무덤답게 금동관 등 장신구류, 환두대도(環頭大刀) 등 철제 무기 및 마구류, 구슬류, 토기류 등이 가야지역의 다른 고분군과 비교해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출토되었다.

◎ 대가야 시조를 가야산신 適統으로 부각

그러면 왜 대가야의 왕릉들은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대가야의 건국신화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건국신화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게 된 내력에 관한 신화이다. 또 그것은 나라를 세운 시조에 관한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여서 시조신화라고도 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부여와 가야, 삼국의 건국신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밖에 고려·후백제 그리고 조선의 시조들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시대에 형성된 만큼 역사적 전설의 성격이 강하다.
우리나라 건국신화의 형식과 구조는 일정하지 않지만 그 기본형이 존재한다. 즉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기본형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건국시조가 하늘에서 강림(降臨)하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두가지 요건인데, 이것이 우리 역사상 나타난 건국신화의 최소한의 기본요소다. 고대 통치자들이 이렇게 건국신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 곧 선택된 사람이라는 관념을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하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지배를 신성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대 통치자들이 건국신화를 만든 본질적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히 신화는 그 담당자들에 의해 과장될 수도 있고 전승되는 과정에서도 필요에 의해 윤색될 수 있다. 결국 건국신화는 역사 자체는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대가야의 왕들은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왜 평지나 구릉지가 아닌 높은 산에 묻혀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필자는 대가야의 건국신화 내용에서 찾아냈다. 그 기사는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실려 있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다. …시조는 이진아시왕(伊珍阿舅王)인데,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백20년이다.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살펴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하였다.”

대가야 건국신화의 특징은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천신 이비가지는 신화 속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의 건국신화와 달리 하늘에서 강림했는지 여부가 분명치 않고 단순한 감응에 그치고 있다. 즉, 천신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권위가 특히 강조되어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석순응전’(釋順應傳)에도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月光太子)를 ‘이비가지의 10세손’이 아닌 ‘정견모주의 10세손’이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이런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신화에 따르면 대가야 왕들은 고령·성주·합천 등 경상우도 지역의 진산(鎭山)인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후손을 자처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어서도 가야산신의 자손답게 평지나 구릉지가 아닌 높은 산 위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 후계자들도 조상들의 뜻에 따라 높은 곳에 매장했던 것이다. 또한 대가야인들은 죽어서도 가야산신의 후손인 왕들을 호위하듯 그 주변에 묻혔는데, 이는 대가야 구성원 역시 자신들의 왕들을 산신의 후손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 신화는 곧 가야연맹 주도권 인정받기 위한 통치이념

왜 대가야 왕들은 신화에서 가야산신의 자손이라고 자처한 것일까. 당시 가야인들은 그 지역의 진산인 가야산을 매우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대가야 왕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대가야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근 연맹국들에게도 신성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통치이념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가야산신의 후손, 즉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내용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신화에서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수로왕과 형제, 그것도 형이라고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내용은 가야연맹의 주도권이 김해 금관국에서 고령 대가야국으로 옮겨간 이후의 사실을 반영한 것이며, 결국 가야지역 주도권 교체의 이념이 종래의 건국신화에 부가되어 변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대가야인들이 건국신화 내용을 변형시킨 것은 주변 연맹국들에게 금관가야의 정통성을 계승한 점을 부각시켜 그 주도권을 인정받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대가야는 주변 세력들을 통합하고 ‘전기연맹’의 소속국들에 하나의 정신적 명분을 제시하여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연맹’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대가야는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이 되었다.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침입한 왜를 토벌하기 위해 5만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남정(南征)을 단행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낙동강 하류지역까지 쳐내려와 가야까지 토벌하였다. 그 결과 가야, 특히 전기연맹의 중심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상황은 고고학의 연구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기연맹의 중심지인 김해·창원지역에는 초기 고분 유적이 풍부한 데 비해, 5세기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고분의 수효가 줄어들고 그 규모도 소규모화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김해 등 경남 해안지역에 위치한 중심세력은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어 갔던 것이다.
이에 비해 고령·합천·함안 등 산간 내륙지방의 가야세력은 5세기에 이르러 많은 대형 고분들을 남겼는데, 이는 이 지역이 후기 가야연맹의 중심지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 지역은 전기연맹의 중심지와 달리 고구려군의 남정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전기연맹의 해체 시기에 그 중심지인 경남 해안지역 선진문화의 파급으로 철 산지 등이 개발되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출현이다. 이 고분군 중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고분은 그 봉토 규모가 50m급이나 되는 대형 고분도 등장하고, 그 출토 유물도 가야지역의 다른 고분군과 비교해 볼 때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고 풍부하다.
후기연맹의 주도국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그 지위를 국제적으로 공인받게 된다. 이런 사정은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전(東南夷傳) 가락국조에 보인다. 즉, 대가야의 하지왕(荷知王)은 479년에 중국 남제(南齊)와 통교해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제수받았던 것이다. 이 보국장군은 송(宋)·남제의 제3품에 해당하는 것으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등 제2품을 인정받은 고구려·백제·왜보다는 못하더라도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본국왕이라는 작호(爵號)도 본국, 즉 가야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는 왕이라는 것을 중국으로부터 공인받은 것이다.

◎ 국제적으로도 대가야의 통치권 인정받아

이보다 11년 뒤인 남제 무제(武帝) 8년(490)의 일로 추정되는 “남제서” 동남이전 백제국조의 기사에 따르면, 백제왕 모대(牟大:동성왕)가 표(表)를 올려 행직(行職)의 칭호를 요구했다가 허가받은 관군장군 도한왕(冠軍將軍都漢王), 영삭장군 아착왕(寧朔將軍阿錯王), 용양장군 매로왕(龍塗將軍邁盧王), 건위장군 불사후(建威將軍弗斯侯) 등은 제3품 내지 4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하지왕은 독자적으로 남제와 통교하여 그들이 받은 관계(官階)와 같거나 한 등급 높은 제3품을 제수받았던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9년(522)조에 따르면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는 등 신라로부터도 연맹의 주도권을 인정받게 된다. 이때 법흥왕은 제2등급인 이찬(伊祚)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 이는 백제 동성왕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기 원했을 때 신라가 그 배우자로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낸 것으로 보아, 당시 대가야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신라로부터도 백제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가야연맹의 맹주로 인정받은 것이다.
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이 되었다는 것은 고고학적 자료도 뒷받침하고 있다. 대가야가 위치한 고령지역은 협소한 산간지대이기 때문에 주변이 트인 해양지역인 김해는 물론 다른 지역에 비해 지리적 조건이 매우 불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야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가야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철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고령과 그 인근지역인 야로현(冶爐縣)·산음현(山陰縣)·삼가현(三嘉縣)에는 철 생산지가 있었다. 특히 야로현의 철 산지는 조선시대 3대 철 생산지로 꼽힐 정도였다. 철이 풍부한 이 지역을 확보하였던 것은 바로 대가야가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고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철을 장악한 세력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어 있었다. 고대사회에서 철은 오늘날의 ‘핵무기’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동기는 철처럼 재질이 단단하지 못해 장신구로는 제격이었지만 무기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또한 청동기로는 농사도 지을 수 없어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신석기와 마찬가지로 돌이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해야 했다. 때문에 농업 생산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 대가야의 철 장악은 오늘날 核 보유에 맞먹는 우위

이에 비해 철은 농기구로도 활용되었다. 이에 따라 농업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농업 생산력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잉여 생산물을 낳았으며, 이 잉여 생산물을 둘러싸고 개인간, 집단간 투쟁이 더욱 격화되었다. 이런 투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철제 무기였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남보다 강해야 했으므로 자연히 칼·창·화살촉 등 공격용 무기와 방패·투구·갑옷 등 방어용 무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전쟁 방식도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말을 이용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각종 철제 마구류도 개발되었다. 철이 발견된 이래 전쟁의 승패는 완전히 우수한 철제 무기를 확보한 집단에 의해 좌우되었다. 한국 고대사는 전쟁의 시기, 즉 전국(戰國)시기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 중심에는 다름 아닌 이 철제 무기를 지닌 집단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대가야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해서 전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인 김해 가락국을 대신하여 후기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이 필요했다. 당시 가야인들은 그 지역의 진산인 가야산을 매우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때문에 대가야 왕들은 자신들이 바로 가야산신의 후손, 즉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어서도 가야산신의 후손답게 다른 나라의 왕들과 달리 평지나 구릉지가 아닌 높은 산에 묻혔던 것이다.


古墳이란?

현세의 지배관계와 조상 우월성을 과시

고고학계에서는 흔히 고구려·백제 그리고 신라 등 삼국을 포함한 가야가 존속했던 시대를 ‘고분시대’라고 부른다. 고고학상 고분은 이 시기의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 일종의 표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시 지배층은 죽음을 현실세계의 연장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현세에서 누리던 우월한 지위를 죽어서까지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각자는 생전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거대한 무덤의 주인공이 되었다. 후손들도 마찬가지여서 그 규모와 형식으로 자신의 조상들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동시에 현재의 지배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고분시대 지배층의 무덤에는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이며, 순전히 껴묻기 위한 목적으로 수백개의 토기를 제작해 수장자와 함께 묻었다. 심지어 그의 시종이나 노예들을 강제로 순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저승에서도 아무런 불편없이 살기를 바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듯 고분은 단순히 시신을 모시는 곳이 아니라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집단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하나의 조형물인 것이다. 이곳에는 시신과 더불어 많은 부장품들이 묻혀 있는데, 칼·창·갑옷·투구·마구 등 철제 무기류, 금동관 등 각종 장신구, 토기 등 생활용품 등이다.
거대한 고분을 만들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하나의 무덤을 조성하는 데도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인원이 동원될 정도였다. 이런 대형 고분에 묻힐 수 있는 자들은 왕족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귀족들은 그보다 작은 무덤에 묻혔다. 부장품의 양과 질도 신분에 따라 엄격한 구분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부를 쏟아부은 대형 무덤들이 출현했는데, 이것이 바로 고분이다. 자연 이들 고분과 그 부장품에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당시 시대상이 총체적으로 반영돼 있다.

 PREV :   마동과 선화공주 사건은 백제와 신라의 미륵 쟁탈전 관리자 
 NEXT :   오해와 편견의 역사는 그를 ‘姦雄’으로 분칠했다 관리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