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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바다를 누빈 선조들
 관리자  08-22 | VIEW : 1,879
동아시아의 바다를 누빈 선조들

윤명철(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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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을 건넌 선조들

1991년 오사카에서는 히미꼬(卑彌呼) 특별전이 있었다. '히미꼬'는 일본의 신화속에서 태양의 여신으로 나타난다.‘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무녀로서 몸을 숨긴채 남동생을 시켜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을 다스린 신비로운 여왕으로 기록돼 있다. 1986년에 그녀가 다스린 야마다이국이 사가현 간사키(神崎)평원 요시노가리 (吉野ケ里)에서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그런데 엄청난 수의 옹관묘군과 유물들은 거의 우리 것과 동일하였고, 유골들 또한 우리와 똑같은 형태였다. 한륙도(韓陸島:대륙과 한반도를 포함한 개념) 남부 어느 항구를 출발한 그들은 단지에 볍씨(短粒米)를 넣어가지고 바다를 건너와 일본땅에 뿌리고, 고향의 농기구를 사용해서 쌀을 생산하였다. 또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들은 농기구는 물론 칼 같은 무기를 만들어 토착인들을 정복하는 한편 질좋은 그릇(야요이토기)을 만들고, 거울과 같은 신성한 물건들을 사용하면서 신종교의 전파자가 되었다.

이렇게 신천지인 일본열도는 대한해협을 건너간 개척자들에 의해 서 문화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바다를 건너 왔을까? 원래 한륙도와 일본열도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1만여 년 전을 전후한 충적세에 빙하가 녹으면서 평균 200m 정도의 수면상승으로 대한해협이 생겼다. 그때 물에 잠기지 않은 높은 산봉우리가 대마도(對馬島)와 이끼(壹岐)등 크고 작은 섬들이다. 부산의 동삼동(東三洞)패총과 조도( 朝島)패총 등에서 7,000년전 일본열도계 조오몽(繩文) 토기들이 발견된다. 반면 대마도나 큐슈지역에서는 오래된 융기문토기나 빗살무늬토기, 동해안형과 유사한 낚시바늘이 발견됐다.

그러면 수천 여년 전 사람들은 그 험난한 바다를 어떻게 건너다녔을까? 부산과 대마도 사이의 직선거리는 53㎞이고, 대마도와 이끼섬도 마찬가지로 50여km이다. 그리고 큐슈는 가시거리안에 있다. 항해민들에게 200km도 안되는 좁은 바다는 고난도의 항해가 아니다. 날씨가 좋은 날 부산 태종대에서는 대마도가 보인다. 좀 멀지만 거제도에서도 대마도는 바다 위의 까만 선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목적지를 보면서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바다를 쉬엄쉬엄 건너 다녔던 것이다.

더구나 대마도에서 출발하여 항상 북동 방향으로 흐르는 대한난류(쿠로시오)와 좌우로 이동하는 조류의 흐름을 타고, 봄철에 동남풍을 이용하면 자연스럽게 남해동부나 동해 남부해안에 도착한다. 왜(倭)가 주로 봄철에 신라의 해안을 습격한 것은 이 자연조건 때문이다. 반면에 한반도 남해안에서 해류와 조류를 적절히 이용하고 가을에 부는 북풍계열의 바람을 타면 자연스럽게 대마도와 일본열도에 도착한다. 자연이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을까? 한국의 동해안과 일본열도, 황해 등 동아지중해권에서는 5,000년도 더 된 배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항해자들은 초기에 큰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서 만든 독목주(獨木舟)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특히 원시항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뗏목이다. 지금도 남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서는 뗏목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자연조건을 이용해 수천 년 전부터도 교섭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당시의 항로를 찾기 위해 1982년과 1983년 2차에 걸쳐 뗏목탐험을 실시하였다. 한편 어업인류학자인 일본의 국립 나가사키대학의 시바다 게이시(柴田惠司)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선사항해를 실험하였다. 양측의 실험결과는 놀랍도록 일치하였다. 뗏목 해모수호가 거제도의 다대포항을 출발하여 대마도의 사고마을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44시간이었고, 항로 역시 항해시간을 단축하려는 탐험대의 의도를 벗어나 사고마을 앞으로 연결되었다. 탐험대는 대마도를 다시 출발하여 큐슈 북부를 향하였으나 태풍 애비호의 영향으로 큐슈서부의 고토(五島)열도에 도착했다.

고토열도에서도 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 지역은 제주도인들과 백제인들이 도착한 지역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천 년 동안 이렇게 건너 다니던 우리는 기원전 3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열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일본 도쿄대 하나하라(埴原和郞)교수는 두개골 형태변화 등 여러 실험을 한 끝에 놀라운 결론을 발표하였다. 즉 기원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1,000년동안의 일본열도 원주민과 이주민의 비율은 서부 일본의 경우 1대 9 내지 2대 8이라는 압도적인 수치였다.

숱한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뗏목이나 조그만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육군의 나라였던 로마가 함선을 건조하여 유럽 지중해를 장악해나갈 때, 한륙도의 주민들은 탐험정신을 갖고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 연안 곳곳에 해양 식민도시(小國)들을 건설하였다. 후한서 동이전에 의하면 위만조선이 패하고 일본열도에서 30여개 소국들이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바다를 건너간 우리 의 해양개척자들의 상징적인 우두머리가 바로 일본의 태양여신인‘히미꼬’였던 것이다.

만주벌에서 바다로

고구려는 군사력이 강하고,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이다.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부터 만주벌 요하 일대, 연해주와 멀리 북방의 초원까지 장악한 나라. 하늘과 빛을 지향하는 자의식이 강한 천손(天孫)민족으로 늘 자유를 꿈꾸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철기로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달리는 기마 군단과 강건한 문화가 있다. 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힘의 원천이 있으니 그것은 하얀 돛을 단 범선으로 동아지중해를 누비던 광범위하고 활달한 해양활동과 그 문화이다.

중국에는 황하와 양자강의 유장한 흐름이 수 천년간 대하드라마를 연출해왔다. 우리들의 배냇고향인 만주에도 큰 강이 초원과 평원 사이를 흘러가며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고 물자를 배분해줬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은 장춘을 지나 북으로 흘러 초원지대인 대안에서 대흥안령 산맥을 출발한 눈(嫩)강과 만나 동류 송화강으로 거듭난다. 북부여 천제인 해모수(解慕漱)가 따라 내려왔을지 모르는 눈강은 배가 다닐 수 있는 통항(通航)거리가 700여㎞이다.

송화강은 북만주를 거쳐온 흑룡강과 만나 동해로 들어가는데 통항거리가 무려 1,890㎞에 달한다. 수도인 국내성 옆을 흐르던 압록강도 통항거리가 750여㎞다. 그외에도 요하, 혼강, 두만강 등은 수로가 깊고 길며 바다로 이어져 큰배들이 항행할 수 있다. 이러한 강에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건 이른바 강상수군(江上水軍)이 있다.

고구려는 교역과 전쟁을 하면서 영토를 넓히기 위해 만주벌에 그물처럼 뻗은 강을 관리하는 수군이 필요했다. 주몽의 아버지인 천제 해모수는 물의 신으로 불린 하백의 딸 유화부인과 결합했다. 고구려는 태양숭배집단과 물에 세력기반을 둔 토착세력이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통합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배도 띄웠던 것이다. 고구려는 내륙수군에만 만족하지 않고, 초기부터 동해로 진출하였다. 동옥저가 동해에서 잡은 해산물들을 공급하였으며, 민중왕과 서천왕 때는 고래잡이도 성행한 듯 야광눈을 왕에게 바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동아(東亞)의 지정학적인 구도나 본격적인 국제교역을 위해선 황금 의 바다인 황해로 진출해야 했다. 그렇다면 험준한 산성전투에 능하고 기마전을 장기로 하는 고구려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배타고 활동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말을 탄 채 수천리를 행군하는 정복욕이 강한 집단은 해양에도 과감하고 신속히 진출한다.

유목문화와 해양문화는 똑같이 이동성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때부터 황해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많지만 태조대왕(146년) 때에는 출해구(出海口)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공격,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하였다. 그런데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중국대륙은 위오촉(魏吳蜀) 삼국시대였고, 고구 려는 위나라와 대결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때 강남에 터전을 굳힌 오나라의 손권은 위(魏)를 배후에서 압박하면서 군마와 사치품인 담비가죽을 수입하기 위해 고구려를 필요로 했다. 반면에 고구려는 중계무역과 남방의 귀중품을 수입할 목적으로 원교근공책을 취했다. 해양활동을 활용해 국가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고구려는 233년 동천왕시대 양자강유역의 오(吳)와 황해를 천수 백km나 종단하면서 본격적인 해양외교를 펼쳤다.

당시 오는 최고의 수군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해양에 관한 기술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위는 대방을 일본열도까지 이르는 해상 네트워크의 중계지로 삼아 황해 횡단항로를 구축했는데 이것은 교역뿐만이 아니라 고구려를 겨냥한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황해 북부의 해상권을 장악해가면서 남쪽에 있는 낙랑 대방 등의 한족세력을 고사시켜갔다. 그러면 고구려와 오나라 사이의 항로는 어떠했을까?

당시의 국제관계와 황해의 해양조건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갈 때는 압록강하구인 서안평을 출발, 요동만을 우측으로 보면서 멀리 나가서 산동반도 근해를 통과한 다음 위의 세력권을 벗어나 양자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 공손씨의 배반으로 요동반도를 거치는 연근해항로는 피해야만 했다. 실제로 오의 수군함대는 산동반도에서 위나라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남에서 출발할 경우 안전을 위해 산동권으로 진입하기 전 일단 먼 바다로 나가 종단으로 북상하다가 압록강하구로 들어갔다. 위험부담이 많은 원양항해에 가까운 항로이다. 양쪽을 오간 배의 크기와 규모는 정확히 알수가 없다. 그런데 235년 오나라 의 사굉(謝宏)이 탄 사신선이 적어 고구려가 준 수백필 가운데 80여필만 싣고 돌아갔다. 수십필의 말과 군사, 화물을 실고 다닐 정도이니 큰 선박임이 틀림없다. 육지의 나라, 기마군단의 나라였던 고구려는 바다로 나가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경영하면서 고조선의 역사를 재현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에 보면 즉위 6년 되던 병신년에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토벌한 다음 58개 성과 700촌을 얻었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가 실수(?)로 빠뜨린 대왕의 수군작전을 동양에서 가장 큰 금석문이 새겨놓았다. 이 비(碑)의 주인공은 우리 역사상 가장 넓게 영토를 확장했고 군사전략에 탁월했으며, 세계국가적인 성격이 강했던 시대의 왕중의 왕인 태왕, 즉 광개토대왕이었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군사전략에 능하고 영토확장에만 힘쓴 정복군주 정도로 간단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4∼5세기의 동아시아와 고구려는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시대였고, 그 힘의 중핵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4세기 후반 중국 지역은 남북분단과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중심으로 북방종족들과 화전 양면의 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특히 해양을 활용, 군사외교를 펼쳤다.

이때 백제는 근초고왕이 황해도지역으로 북진하였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황해중부 해상권을 획득해 일본열도와 한반도 중부이남, 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백제 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정면 충돌을 하였고, 결과는 고구려의 좌절로 일단락 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다. 18세에 즉위한 청년군주인 광개토 대왕은 첫해부터 왕성한 정복활동을 펼쳤다. 북방종족들과는 화전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숙군성, 요동성을 공격하고, 406년에는 3,000리를 행군해온 연(燕)을 물리치면서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는 요동반도와 서한만, 대동강 하구를 잇는 황해동안의 해상로를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대왕은 즉위초에 비려(碑麗)를 토벌하고, 3개부락 6,700영(營)을 공파했으며,수많은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획득했다고 한다. 요동과 동몽고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의 상류 초원지대까지 진출했다.410년에는 동부여를 친정하여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일대도 영역으로 하였다.

북부여의 옛땅도 이때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런데 비문에는 백제와 관계 등 주로 대왕의 남진정책에 비중을 둔 듯하다 .그리고 해양활동이나 수군작전이 여러번 기록되고 있다. 대왕은 즉위 2년에 4만의 군사로 백제의 10현을 함락하고, 10월에는 최전방기지이자 수군함대사령부가 있음직한 관미성(關彌城:강화도 북부)을 함락시켰다.

그후 6년(396) 대규모 수군을 투입해 백제의 58성과 700촌을 탈취했다. 기병과 수군을 활용한 선제공격 및 협공의 수륙양면작전이다. 관미성 외에도 당시 비성(沸城:김포) 아단성(阿旦城:아차산) 미추성(彌鄒城:인천) 모로성(牟盧城:용인)등이 점령된 것으로 보아 육군 외에 수군은 3개 방향으로 상륙했던 것 같다. 첫째는, 대동강유역에서 출발, 예성강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남양만으로 상륙하여 수원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치는 것이다. 이런 전쟁양상은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만은 해상교통 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

광개토대왕은 한성을 공멸하면서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여 백제의 수군활동을 마비시키고, 황해 중부연안의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해양봉쇄를 통한 차단전략을 꾀하자 외교적으로 고립된 백제는 왜(倭)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 비문에는 영락(永樂)10년 경자년(400년) 대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 백제 가야 왜의 군대를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했다고 한다. 이는 신라를 복속시키고, 해양을 고리로 부상하는 백제와 가야, 왜의 외교질서를 신라를 이용하여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대왕은 이어 가야 영역까지 침범하였다.

함안 말산리, 고령 지산동, 동래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야지역은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출구이자 교섭 창구였다. 고구려가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읽을수 있다. 대왕 14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황해도지역 인 대방계를 침입했으나 대왕의 친정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궤멸시켰다. 이러한 상황과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고구려는 이미 일본열도 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왕 18년(실성왕 7년),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려다 중지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 영내에 주둔해 있을 가능성으로 보아 공조체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렇듯 광개토대왕은 전통적 육지질서를 기반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질서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아지중해 내부의 각국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중핵)을 구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황해 해상권를 확보함으로써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북부, 황해중부 이북의 해양에 걸쳐 있는 동아지중해의 중핵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1,600년 가까이 만주벌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 글자 하나하나는 21세기를 맞으면서 우왕좌왕하는 후손들에게 해양력의 강화와 국제질서 재편전략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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