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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4천년 역사상 최고의 영웅”
 관리자  08-22 | VIEW : 5,688
신채호 “4천년 역사상 최고의 영웅”

이덕일 역사평론가

  
고구려의 ‘천하패자’ 정신 잇기 위해 反政 단행

동북아 패권 꿈꾸던 唐의 도전 모두 물리쳐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아직껏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복권되지 않은 인물이다. 아직껏 많은 사람들은 그가 국왕을 살해한 무자비한 독재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런 인식의 출발점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그 부친인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연)개소문이 마땅히 그 자리를 잇게 되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고 미워해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 소문(蘇文)이 여러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 자리에 임시로 있어 보아서 만일 불가한 일이 있으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간청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가엽게 여겨 허락했다.

(연)개소문이 동부 군사를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면서 성의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베풀어 놓고 모든 대신들을 초청해 함께 관람하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오자 (연)개소문은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그 때 피살된 자가 100여 인이나 되며, (연)개소문은 이어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한 다음 그 몸을 몇 도막으로 잘라 개천에 버렸다.’

이 기록은 연개소문을 국왕과 대신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희대의 악한으로 그리고 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을 계속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연개소문이 전국을 호령하며 나라 일을 제 멋대로 하는데 매우 위엄이 있었으며,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있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이나 무장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으며, 출행할 때는 반드시 대오(隊伍)를 벌려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긴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구렁텅이나 골짜기라도 가리지 않고 달아났으니, 나라 사람들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

‘삼국사기’의 위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국왕을 시해한 반역자요,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재자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무슨 근거로 이렇게 기술했을까. 문제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연개소문을 묘사할 때 이용했던 거의 모든 자료가 ‘자치통감’(資治通鑑) ‘북사’(北史)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측 자료라는 점이다. 게다가 중국측의 시각을 검증하는 사료비판도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은, ‘개소문(혹은 蓋金이라고 한다)의 성(姓)은 천씨(泉氏)인데, 자칭 수중(水中)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였다’고 적어 연씨(淵氏) 성을 천씨(泉氏)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 ‘연’(淵)을 휘(諱)한 중국측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수중(水中)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신당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그려진 연개소문의 모습은 그에게 패한 당나라인들이 증오심으로 묘사한 연개소문의 모습이다. 연개소문의 참모습은 어떠할까.

쿠데타 아닌 反政


고구려인의 우주관을 담고 있는 무용총의 벽화.
연개소문에 대한 비난의 출발은 그의 정변에서 시작한다. 군주 시해는 충효가 강조되던 유교 이념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 정변은 승리한 쪽에 의해 ‘반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쿠데타인가, 반정인가.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26대 영양왕(재위 590~618)과 27대 영류왕(재위 618~642)의 외교정책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양왕은 수(隋) 문제의 위협에 맞서 수나라를 선제공격했으며, 수 문제·양제와 벌인 고수(高隋)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수나라를 멸망케 했던 위대한 군주다. 그러나 영양왕의 이복동생 영류왕은 전혀 달랐다.

‘삼국사기’ ‘영류왕조’에 따르면 영류왕은 재위 8년 거듭 당(唐)에 사신을 보냈으며, 11년에는 국가 기밀인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 : 강역도)를 바쳤고, 재위 14년에는 당의 요청에 따라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헐어 버렸다. 급기야 재위 23년(640) 세자 환권(桓權)을 보내 조공하기에 이르렀다.

장차 왕이 될 태자를 장안(서안)까지 보내 조공시킨 것은 고구려의 건국 이념인 천하관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3년(414)에 세운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이었다’고 천제의 아들, 즉 천자라고 여기는 독자적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비문은 ‘영락대왕(광개토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四海)에 떨쳤다’고 하여 고구려가 천하의 지배자라고 선포했다.

이런 나라의 후예, 그것도 중원의 통일제국 수나라를 당당하게 격파한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이 태자까지 보내 입조(入朝)한 것에 대해 연개소문 중심의 대당 강경파는 크게 반발했다. 이는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버리고 당나라의 세계관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영류왕 24년(641)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답례로 보냈는데, 그는 고구려 역로(歷路)의 성읍마다 그 관수자(官守者 : 지방장관)에게 예물을 주면서 고구려의 산천과 지형을 염탐하고 수와의 전쟁 때 포로가 된 중국인들에게 중국내 친척들의 동향을 전해준 간첩이었다.

‘삼국사기’도 ‘진대덕은 사신을 받드는 예절에 의해 아국(我國)의 허실을 엿보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쓸 정도였다. 귀국한 진대덕이 “고구려가 고창(高昌:지금의 중국 신강성에 있던 나라, Turfan)의 멸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해 사신 접대가 보통 이상으로 후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고구려는 본래 4군(郡)의 땅이다. 내가 수만 명의 군대를 내어 요동(遼東)을 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모든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 때 수군을 동래(東萊)에 보내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 수군과 육군을 합치게 하면 고구려를 빼앗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산동(山東) 주현(州縣)들이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당 태종이 고구려가 아무리 굴욕적으로 나와도 기회가 되면 고구려를 침략하려고 했음을 뜻한다.

진대덕이 돌아간 이듬해인 재위 25년 영류왕은 드디어 연개소문에게 장성(長城) 축조의 감독을 맡겼는데, 이는 단순한 전출이 아니라 연개소문을 한직으로 보냄으로써 대당 강경파를 무력화하려고 한 것이었고, 이에 맞서 연개소문은 정변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되살리자는 ‘반정’이자 혁명이었다.

연개소문이 고구려 독자의 천하관을 유지하려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영류왕은 당나라의 천하관에 편입되려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연개소문의 반정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결심했다. 그는 보장왕 3년(644) 전쟁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근본을 버리고 곁가지(末)를 취하며,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데를 취하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좋지 않은 것인데, 고구려를 치는 것이 이러함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했으니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구원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해 고구려 백성들이 구원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명분이다. 자고로 전쟁 도발자들은 이러저러한 명분을 내걸지만 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내세울 수 없는 명분이었다.

이세민은 624년 수도 장안(長安)에서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황태자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부왕을 내쫓고 즉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왕을 내쫓고 형제들을 살육한 당 태종에 대해 ‘삼국사기’는 ‘(史臣이) 논하기를, 당 태종은 현명함이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 난(亂)을 평정함은 은(殷)나라의 탕왕(湯王)과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 견주고, 다스리는 이치는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고…’라고 극찬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그와 맞서 싸웠던 연개소문을 낮춘 것이다.

동북아의 운명 건 ‘高·唐대전’


중국 하남성 낙양 근처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묘지 앞면(왼쪽 사진)과 뒷면.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격돌은 두 개인의 충돌이라기보다 두 사람이 대표하는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중국에서 자신들의 임금을 ‘황제’(皇帝)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고구려도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자신들의 임금을 ‘태왕’(太王)이라고 표현했다.

임금 ‘왕’(王)자 앞에 클 ‘태’(太)자를 쓴 것은 ‘왕중의 왕’, 즉 황제의 고구려식 표현이었다. 따라서 고당(高唐)대전은 고구려를 당나라의 세력권에 넣으려는 당 태종과 고구려 독자의 천하관을 유지하려는 연개소문 사이의 싸움이었다.

그렇다고 연개소문이 무작정 당나라에 강경책만 쓴 것도 아니었다. 연개소문이 보장왕 2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도교를 받아들이자’며 당의 국교였던 도교 수입을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당 태종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도사 숙달(叔達)과 노자 ‘도덕경’을 보냈으면서도 같은해 윤6월 “연개소문은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國政)을 제 마음대로 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며 고구려 침공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의 명분으로 든 것은 연개소문의 전횡 외에 신라를 자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로 출병하던 해인 서기 644년 사신 현장(玄奬)을 보내 “신라는 우리나라에 귀의해 조공이 끊이지 않으니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각기 전쟁을 정지하라.

만일 또 다시 신라를 친다면 내년에는 군사를 발하여 너희 나라를 칠 것”이라고 협박했는데, 이에 대해 연개소문은 현장에게 “우리가 신라와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아마 그칠 수 없을 것”이라고 거절했다.

실제로 연개소문은 현장이 당 태종의 위협적인 국서를 휴대하고 고구려 경내에 진입하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 두 성을 빼앗았다. 이는 당 태종에 대한 정면도전이었고 당 태종은 드디어 직접 군사를 몰고 친정을 준비했다.

수나라 때 고구려 정벌에 나섰던 전 의주자사 정천숙(鄭天璹)이 “요동은 길이 멀어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동이(東夷)는 수성을 잘 하여 갑자기 항복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반대했으나 태종은 “지금은 수에 비할 바가 아니니 공(公)은 나의 뜻을 좇기만 하라”고 묵살했다.

보장왕 4년(645) 3월 요하(遼河)를 건넌 당 태종의 친정군은 초반 개모성(蓋牟城)과 전략 요충 요동성까지 함락했다. 연개소문은 4만명의 군사를 보내 요동성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스스로 항복하고,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이 함락되는 등 고구려는 위기에 빠졌다.

그해 6월20일 시작된 안시성(安市城) 회전이 전쟁의 분수령이어서, 연개소문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과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에게 대군을 보내 구하게 했으나 패배하면서 안시성은 고립됐다. 그러나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면서 당 태종은 9월18일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삼국사기’에는 전하지 않지만 훗날 만주를 거쳐 청(淸)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윤근수(尹根壽)와 박지원(朴趾源) 등에 의해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전해졌다.

당군은 매번 이기다 안시성에서 한 번 패해 물러난 것이 아니라 패배를 거듭한 끝에 철군한 것이다. 당군의 철군길이 이런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요하 하구는 지름길이지만 개펄이 펼쳐진 늪지대여서 군사가 지날 길은 아니었다.

심지어 당 태종 자신이 “스스로 말의 칼집에 장작을 매 일을 도와야 할” 정도였는데 ‘풍설(風雪)이 사나와 사졸(士卒)이 젖고 죽는 자가 많았다.’ 굳이 이런 험로를 선택한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구려군의 공격 때문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 때 연개소문이 북경 북쪽의 상곡지방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이 전쟁의 진상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현재도 북경시 북쪽에는 고려진과 고려영이 있다.

‘삼국사기’는 ‘당주(唐主)가 돌아가려고 할 때 궁복(弓服)을 주었는데, 연개소문은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고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라고 비판했지만, 연개소문에게 중요한 것은 침략자를 응징하는 것이지 궁복에 감읍하는 것이 아니었다.

645년 11월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은 647년 이세적 등을 보낸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649년 5월 세상을 떠나면서 비로소 유조(遺詔)로 고구려 정벌을 중지시켰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보장왕 17년(658) 정명진(程名振)·설인귀 등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하자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대군으로 공격했다. 661년 정월에는 하남(河南)·하북(河北)·회남(淮南) 등지에서 4만4,000여 명을 뽑아 침공했고, 4월에는 무려 35군(軍)이 수륙(水陸) 양면으로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당의 고구려 공격 모두 실패


중국 요녕성의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성벽 일부.
662년 정월에는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해 고구려의 위기가 드높아지자 연개소문이 직접 사수(蛇水)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아들 13인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소정방(蘇定方)도 평양 포위를 풀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못했다.

나당연합군이 다시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연개소문 사망 이후인데, 그 아들들은 연개소문의 공백을 끝내 메우지 못하고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나라인들은 역대 최고의 황제 당 태종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긴 연개소문에 대한 저주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 최근까지 우리 역시 당나라인들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은 민족의 영웅 연개소문을 고스란히 복원하고 있다.

‘살펴보건대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아, 우리 연개소문은 우리 광개토왕의 자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는 말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나는 이것으로서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다….’  



[기록으로 본 연개소문] ‘천개소문’ ‘갓쉰동’ ‘규염객’ 등으로 불려



김병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삼국사기>에 실린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


中 소설 “무술 뛰어나나 포악하고 사나운 장수”로 묘사
강원도 원주에서 자라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무예 닦아

‘삼국사기’(三國史記) 연개소문 열전은 그를 전형적인 독재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가 중국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채용한 결과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우리 시각으로 기록한 연개소문 관련 사적이 없음을 개탄했다.

그는 광범위한 사료를 수집해 우리 시각으로 연개소문을 재구성했다. 1912년 백암 박은식이 만주에서 저술한 ‘천개소문전’과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독사신론’ 등이 이런 시각에서 기술한 책들이다.

단재가 이를 위해 전거로 든 책들은 중국소설 ‘갓쉰동전’, 장 열의 ‘규염객전’ ‘해상잡록’을 비롯해 당나라 사람의 ‘태평광기’, 유공권의 ‘잡저’, 여련거사의 ‘패담’, 왕안석의 ‘경연강론’ 등 광범위하다. 이 외에도 이 색의 ‘정관음’, 김창흡의 ‘천산시’, 당나라 사람 번한의 ‘고려성 회고시’ 등을 인용했다. 이 외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에도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가 나타난다.

단재는 ‘독사신론’에서 ‘연개소문이야말로 우리 4,000년 역사 이래 제일로 꼽을 영웅’이라고 극찬했으며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즉, ‘연개소문은 (1)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2)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해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3)이를 위해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살해해 자신의 독무대를 만들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했으니, 그 선악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어 단재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등 중국사를 초록한 것으로 연개소문에 대적하던 당 태종의 군신의 입과 붓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설파했다.

동북아 전쟁사의 중심 인물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연개소문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제일로 꼽을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충북 청원군 단재 사당 안에 있는 영정.(왼쪽 사진)과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두려워하는 인물로 전해진다. 영화 <패왕별희>의 한 장면.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 ‘신당서’는 동부대인으로 ‘구당서’는 서부대인으로 기술했는데, 신채호는 연나부와 연결해 서부 출신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편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의 직을 수행했고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 귀족세력으로 보기도 했다.

단재는 당나라 사람 장열(張悅)의 ‘규염객전’을 소개하면서 규염객이 곧 연개소문임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이다. 수나라 양제 때 중국의 태원에 이르러 이 정(李靖)과 교분을 맺고 이 정의 처 홍불지(紅拂枝)와 남매의 의를 맺었다. 중국의 제왕이 되기를 도모하다 당공(唐公) 이 연의 아들 이세민을 보고는 그 영명한 기운에 눌려 이 정에게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한다고 고한 후 귀국해 난을 일으켜 부여국왕이 되었다.’

단재는 여기서 부여국이란 곧 고구려를 뜻하는데, 당 태종의 기운에 눌려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했다는 것은 중국의 권징적 필법일 뿐이라고 했다. 다만 연개소문이 국정을 탐지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간 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단재는 연개소문의 탄생 및 성장과 관련한 중국 소설을 소개했다.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갓쉰동전’이 그것인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다. 나이 쉰 살에 이르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치성을 드린 끝에 아들을 낳으니 갓 쉰 되던 때 낳았다는 뜻으로 갓쉰동이라고 이름했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출중하고 재주가 총명해 연국혜가 장중의 구슬처럼 아꼈으나 일곱 살 되던 해 어떤 도사가 지나다 보고 “아이가 타고난 수명이 짧아 비범한 재주를 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를 막는 방법은 15년 동안 이 아이를 내다버려 부모와 서로 만나지 못하면 그 흉액을 면하리라는 것이었다.

연국혜가 도사의 말을 믿고 차마 할 수 없었으나 아이의 장래를 위해 갓쉰동을 멀리 산도 설고 물도 선 어느 시골에 가져다 버리라고 했다. 다만 후일 아들을 찾을 표적을 위해 먹실로 등에 ‘갓쉰동’이라는 3자를 새겨 넣었다.

갓쉰동을 버린 곳은 원주의 학성동인데, 그 마을의 장자였던 유씨(柳氏)가 꿈에 황룡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 보니 한 준수한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키웠다.

유장자는 비록 갓쉰동을 사랑하나 남의 시비를 싫어해 그 신분을 높여 주지 못하고 다만 글 몇 자를 가르쳐 자기 집 종으로 부렸다. 하루는 갓쉰동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퉁소 소리를 따라 가니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후 갓쉰동은 그 노인에게 검술·병서·천문·지리 등을 배우게 되었다.

유장자는 아들이 없이 딸 셋만 두었는데 문희·경희·영희라고 이름하였으며 모두 절세의 미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희가 가장 뛰어났다. 어느날 장자가 갓쉰동을 불러 세 아기씨를 가마에 태워 꽃구경을 하라고 하니 그가 문희 방문 앞에 가마를 대령했다. 문희가 버선발로 마루 끝에 나서더니 “아이고, 맨땅을 어떻게 디디겠느냐. 갓쉰동이 네가 거기 엎드려라” 하고 갓쉰동의 등을 밟고 내려가 가마에 들어갔다.

경희를 태울 때 경희도 그러한지라 갓쉰동은 영희의 방 앞에 가서는 미리 뜰에 엎드려 있었더니, 영희가 문을 나서다 보고는 놀라며 ‘갓쉰동아, 이것이 무슨 짓이냐? 아서라. 사람의 발로 사람의 등을 밟는 일이 있겠느냐” 하고 갓쉰동을 일으켰다.

갓쉰동이 일어나 영희의 꽃 같은 모습을 보고 “나도 어렴풋이 어릴 때의 일을 기억하면 너와 결혼할 만한 가정인데…” 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영희도 갓쉰동의 용모가 비범하며 음성이 우렁참을 보고 “너 같은 남자가 어찌 남의 집 종이 되었느냐” 하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했다.

이로부터 갓쉰동은 영희를 생각하고, 영희는 갓쉰동을 사랑하여 두 사람 사이의 정이 더욱 가까와졌다. 영희는 갓쉰동에게 자기는 귀인의 아내가 되기보다 대장부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갓쉰동은 우리를 괴롭히는 달딸국을 평정하려는 포부를 말하고 달딸국을 쳐부순 후에 영희와 혼인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갓쉰동은 유장자의 집을 떠나 달딸국으로 잠입했다.

갓쉰동이 달딸국 왕의 가노(家奴)가 되어 지내던 중 달딸국 왕의 둘째아들이 갓쉰동의 비범함을 알아채고 장차 죽이려고 그를 가두어 놓고 사냥을 떠났다. 그는 공주에게 인정으로 호소하고 달딸국을 탈출했다. 갓쉰동은 귀국해 아버지를 찾고 과거에 급제했으며 영희와 결혼하고 마침내 달딸국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

단재는 이를 연개소문이 중국을 정탐하던 때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연국혜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이며,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는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는데, 이는 갓쉰동이 곧 연개소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달딸국 왕이 바로 당 고조이고, 둘째아들이 당 태종이라는 것이다.

‘갓쉰동전’은 국내 지명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주목의 속현인 주천현이 일명 학성(鶴城)인데, 갓쉰동을 내다 버렸다는 원주 학성과 같다. 본래는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이었으나 신라 때 주천현(酒泉縣)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 고조의 이름 이연(李淵)을 피해 중국 기록들이 천(泉)씨라고 적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지만 ‘주연현’ ‘주천현’ 등 연과 천은 서로 상통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실제 이 연의 이름을 피해 기휘한 것인지는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강화도 일대에도 연개소문과 관련한 전설이 남아 있다.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대(馳馬臺)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다는 것인데, 이곳에는 현재 연개소문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京劇)에서도 비도(飛刀)를 휘두르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무술은 뛰어나지만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경극은 중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연개소문이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정, 고구려 정벌 만류

당시 동아시아의 두 영웅,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우열을 겨루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니,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라.’

당 태종은 처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장손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침공을 연기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된 것이다.

당 태종은 고구려 보장왕 3년(644) 11월 원정 명령을 내렸다. 정벌의 명분은 우선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고수(高隋)전쟁 때 전사한 백성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 셋째는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형을 죽이고 부왕의 자리를 찬탈한 이세민이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은 아니었다.

단재는 현재는 전하지 않는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해 당 제일의 명장 이 정(李靖)이 연개소문의 제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당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 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 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이다.

태종이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 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 정은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불쾌해하자 이 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진 인물로, 일찍이 중국 북쪽의 설연타·위구르·철륵 등 투르크 계통의 유목민족을 정벌한 당대 제일의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 정을 가르쳐 이 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 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송 때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밖에도 단재는 요동 지방의 요양·해성·금주·복주 등지에 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으며, 북경 부근에도 고려성·고려영 등 고구려 유적이 산재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연해주의 개소산(蓋蘇山)에는 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 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블나고베시첸스크에 가려면 바다 가운데에서 그 산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고 기술했다.

당 태종, 왼쪽 눈에 화살 맞아


연개소문의 활동 무대인 중국 연해주 들판. 발해 시대 동경용원부에 속했던 염주성(끄라스키노성)이 보인다.
당 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한 후 패주하는 광경은 중국의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구당서’와 이를 그대로 옮겨 적은 ‘삼국사기’에는 오직 현군(賢君) 당 태종과 당군이 연전연승하는 모습만 보인다. 보장왕 4년(645) 7월 안시성을 공격하다 실패한 당 태종은 9월18일 철군한다.

중국 사서에는 철군 이유를 ‘당 태종이 요동 지방이 일찍 추워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무르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하려고 하므로 군사를 거두게 하였다’고 기후와 양식 때문에 철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후퇴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 태종은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넜다. 요택에는 진흙 수렁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써 다리를 삼도록 하였다. 당 태종 스스로도 말채찍 끈으로 나뭇단을 묶는 것을 도왔다.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니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당 태종이 (원정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으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고구려군의 추격이 뒤따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당군이 악전고투하며 도망가는 모습을 짐작하게 해 준다. 단재는 당 태종의 갑작스러운 철군에 대해 연개소문이 정병 3만명으로 적봉진을 경유해 장성을 넘어 상곡(上谷) 등지를 급습하니 당 태자 치(治 : 후의 고종)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 크게 놀라 급히 봉화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또한 당 태종이 철군을 명하자 안시성주 양만춘이 성문을 열고 공격하는 바람에 당군이 큰 혼란에 빠져 인마가 서로 밟혔는데, 그 와중에 당 태종의 말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급기야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사로잡힐 뻔하다 당의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달려와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만주 토착민들 사이에는 전해지고 있다고 단재는 기록하고 있다.

단재는 이러한 안시성 패주의 사실을 당의 사서류를 좇지 않고 ‘해상잡록’ ‘성경통지’ 및 만주 토착인의 전설 등을 재료로 하여 적는다고 명기했다. 수나라와 전쟁은 당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패전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나오지만 당과의 전쟁은 저들이 직접 적었기 때문에 역사 왜곡이 심할 수밖에 없다고 직시한 때문일 것이다.

단재는 ‘구당서’ ‘태종본기’와 ‘신당서’ ‘자치통감’에 보이는 당 태종의 사인(死因)이 서로 다른 것을 역사 왜곡의 증거로 삼았다. 즉, 1)은 당 태종이 내종(內腫)으로, 2)는 한질(寒疾)로, 3)은 이질(痢疾)로 죽었다고 기록했는데, 황제의 죽은 병을 늑막염인지 장티푸스인지 모르게 기록한 것은 고구려인의 화살에 죽은 치욕을 기록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요동에서 얻은 병이라고 함은 모든 기록이 동일하니 이는 양만춘의 화살의 여독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확증했다.

어쨌든 당 태종은 안시성 패주의 후유증으로 4년 뒤인 649년 5월 5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에 태자 치에게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고 유언했는데, 이는 방현령이 죽기 전 병석에서 고구려 정벌을 그칠 것을 간곡히 상소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전쟁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끝내 종말을 맞게 되었다.  




[연개소문 VS 唐 태종] “다시는 고구려 쳐들어가지 말라”



지배선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안시성 싸움 상상도.


중국 최대의 정복군주 당 태종, 유언으로 남겨
직접 군사 끌고 출정하고도 안시성 공략 실패

당(唐) 태종 때 무측천(武則天)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무측천은 뛰어난 미모로 나이 14세에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무측천은 황제가 죽자 잠시 감업사에서 여승으로 지내다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황후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정략적인 여걸이었다.

무측천이 아들뻘 되는 고종의 황후가 된 사실은 유목민의 ‘수혼제’(Levirate) 풍습과 같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태종은 이민족에 대해 ‘화하일가’(華夏一家, 중국 본토에서 같은 집안을 이룰 만큼 가까운 핏줄이라는 의미)를 말하고는 했다. 어쩌면 태종 스스로 유목민족적 기질을 소유했던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 제국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인물은 태종이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신하의 올바른 충고를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훌륭한 관료를 임명했다. 그리하여 명재상 방현령(房玄令)·두여회(杜如晦)와 장군 이정(李靖)·이적(李勣), 간관(諫官) 위징(魏徵)·왕규(王珪) 등의 보필을 받아 ‘정관(貞觀)의 치세’(627∼649)라고 일컬어지는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정관치세’라는 태평성대 이룩

하루는 태종이 창업(건국)과 수성(발전)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를 묻자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은 생사가 달린 일이므로 더 어렵다”고 하였고, 위징은 수나라의 멸망을 교훈 삼아 “창업도 어려우나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하였다. 태종은 위징의 수성지난론(守成至難論)을 옳다고 여겨 국가경영에 참조했다.

태종이 남긴 말들은 그의 사후 50여 년이 지난 후 오긍(吳兢)이 편찬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남아 있는데, 이 책은 이론서라기보다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엮은 정치 실천 지침서다. ‘정관정요’는 태종과 신하들 간의 국정운영에 대한 모든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후일 황제들이 애독하는 제왕학 교과서가 되었다.

정관치세는 태종의 아버지 고조(이연)에 의해 그 기초가 다져졌다. 당 건국 초기의 지배 영역은 관중에 국한될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정치를 바로잡고 법령을 간소화해 수양제의 실정으로 어지러워졌던 민심을 수습했다. 군사상으로도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해 원교근공 정책으로 개별적 병합을 추진해 통일을 완성했고, 그 결과 태종은 많은 병사를 얻게 되었다. 이들 병사를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태종은 대외 정벌을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첫 대외 정벌로 629년 11월 통한도(通漢道)행군총관으로 이적, 정양도(定襄道)행군총관으로 이정을 임명해 돌궐을 공격했다. 그 결과 돌리(突利) 가한이 투항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계속하여 630년 정월 이정이 돌궐을 대파했다. 2월에 이정이 음산에서 돌궐을 공격하자 힐리 가한이 멀리 도망갈 정도로 이정의 전과는 매우 컸다. 그는 끝까지 추격해 3월 대동도(大同道)행군부총관 장보생이 힐리(署利) 가한을 생포했다. 다음달 당은 돌궐을 제압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태묘에서 고사를 올렸다.

당나라는 돌궐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게 되자 631년 4월 수나라 말기 돌궐로 잡혀간 많은 중국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면서 비단과 금은을 보냈다. 이에 돌궐은 5월 남녀 8만명을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태종은 이어 수나라 병사로서 고구려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유해 처리 문제에 손을 댔다.

같은해 8월 태종은 당의 사신을 고구려에 파견해 중국인의 유해를 수습해 장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던 것은 당시 고구려의 실정을 염탐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631년 8월부터 당 조정에서는 동북방의 고구려를 제압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있었다.

고구려 침공 분위기 무르익어


고구려 정벌에 유달리 애착을 가졌던 당 태종.
태종은 즉위 초만 해도 고구려를 공격하던 수나라가 멸망했던 사실이 잊혀지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정관정요’ 권9 ‘의정벌’(議征伐) 제34에서 태종은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해마다 수많은 백성을 동원해 전쟁터로 몰아 넣었소.

백성의 원한이 폭발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마지막에는 백성의 손에 피살되었소. 돌궐의 힐리 가한도 틈나는 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다 자기들 백성이 지칠 대로 지쳐 끝내 망하고 말았소”라고 신하들에게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태종은 수의 멸망 원인이 고구려와 전쟁이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태종의 입장에서 고구려가 돌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을 신하들에게 증언한 셈이다. 당시만 해도 당의 군사력이 고구려를 제압할 정도로 강성하지 못한 데다 돌궐 공격에 국력이 너무 많이 소모되어 더 이상의 영토 확장 전쟁을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은 돌궐에 이어 서북방의 여러 국가를 점령하고 나서 대외 정벌에 자신감이 생기자 고구려 침공을 꿈꾸기 시작했다. 당의 서북에 위치한 당항(黨項, 632)과 토욕혼에 대한 대대적 토벌(635년)에 놀란 구차(龜玆)· 토번(吐蕃)· 고창(高昌)· 여국(女國)· 석국(石國) 등이 사신을 파견해 태종을 알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의 서북쪽이 어느정도 평정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631년 8월 당의 광주사마 장손사가 죽은 수나라 병사의 유해를 거두어간 뒤 8년 동안 당과 공식적인 교섭이 없었다. 정관 13년(639) 고구려는 당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싶다. 다만 태종이 고구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당 태종은 백제 무왕이 죽자 의자왕을 책봉했지만 고구려의 경우 이와 유사한 기록이 없다. 고구려와 당 태종의 관계를 밝혀 주는 기록은 640년 고구려의 세자 권(영류왕의 아들)이 장안에 갔던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당은 고구려의 권력 변화에 상당히 신경썼다. 예컨대 당은 641년 고구려 태자의 입조 답방 형식으로 직방랑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파견했는데, 사실 그는 첩자였다.

한편 641년 11월 설연타(薛延陀)가 동라(同羅)·복골(僕骨)·회흘·말갈과 연합해 낙양까지 진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으로서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유목 기마민족의 기동성을 감안한다면 신속한 게릴라전으로 낙양까지 진격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구려에서는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다. ‘구당서’의 ‘태종본기’ 정관 16년(642) 조에는 ‘고구려 대신 연개소문이 그 임금 고무(영류왕)를 시해하고 영류왕 형의 아들 보장을 왕으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연개소문의 군사쿠데타는 당과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관 18년(644) 10월 서역에서 당에 평정되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였던 언기(焉耆)마저 안서도호 곽효각(郭孝恪)에 의해 멸망했다. 태종은 당의 북방과 서방에 대한 평정이 완료되자, 644년 11월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다.

이는 당이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많은 군사를 확보했던 시점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구당서’의 ‘태종본기’ 정관 18년조에는 태종이 ‘태자첨사·영국공 이적에게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유성(柳城)에서 출정하도록 하고, 예부상서·강하군왕 도종을 요동도행군부총관으로, 형부상서·운국공 장량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각각 삼아 래주(萊州)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또 좌령군 상하·노주도독 좌난당을 평양도행군부총관으로 임명, 중국 안의 정예 군사 10만명을 징집해 출정토록 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는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첫 조치였다.

연개소문 응징하려고 출정

정관 19년(645) 2월 6군을 거느린 태종은 고구려로 쳐들어가기 위해 낙양을 출발했다. 태종 재위시 군사를 거느리고 황제가 직접 출정했던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이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태종의 염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낙양에서 출정한 태종은 3월 정주(定州)에 도착하자 신하들에게 고구려 공격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태종은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차례 원정해 모두 패퇴했다.

지금 내가 동으로 진격한 것은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때 죽었던 중국인의 원수를 갚고 한편으로는 고구려 임금을 죽인 연개소문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다. 또 사방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은 데다 내가 아직 늙지 아니할 때 사대부의 여력을 빌려 이를 정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3월 태종의 군대가 정주(定州)를 출발할 당시 사도· 태자태사 겸 시중·조국공 장손무기(長孫無忌), 중서령 잠문본과 양사도가 수행했다. 당나라의 전 군이 동원된 것이었다.

4월 태종은 유주(幽州) 남쪽에 도착해 승리를 다짐하면서 군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였다. 같은달 요동도행군총관 이적이 고구려의 개모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보병과 기병 4만명을 급파해 반격을 개시하자 당의 행군총관 장군예는 도망쳤다.

5월 태종이 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패장 장군예의 목을 베어 죽였다. 요하의 임시다리를 이용해 요동 땅을 밟은 태종은 이적과 함께 요동성을 포위한 뒤 화노(火弩)를 성 안으로 비오듯 퍼부으며 공격했다. 결국 요동성은 함락됐다. 태종이 패장의 목을 친 것은 고구려 정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될 듯싶다.

그해 6월 태종이 이끄는 당의 군대는 안시성에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 고연수와 고혜진이 병사 15만명을 거느리고 지원하러 왔으나 당의 군대가 안시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았다. 이 때 당군을 지휘해 싸운 장군은 이적이었고, 태종은 군사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지켜보고 있었다. 고구려 군의 피해가 커지자 고연수는 어쩔 수 없이 무리를 거느리고 당에 투항했다. 이 때 강하군왕 도종이 안시성에 수십만 명의 무리가 있다고 태종에게 아뢴 사실과 안시성에 고구려와 말갈 병사들이 친 진이 무려 40리나 달했다는 것은 막강한 고구려의 군사력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7월에도 이적은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례씩 안시성을 공격할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다. 이 때 도종의 부장 부복애(傅伏愛)가 흙으로 쌓은 인공산을 지키지 못하고 패퇴하자 태종은 그의 목을 베었다. 태종은 패전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본보이려고 부복애의 잘린 목을 군사들에게 돌렸다.

그러나 당군은 9월이 되도록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게다가 요동 지방에 일찍 추위가 찾아와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자 태종은 후퇴를 결정했다. 태종이 안시성 주위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돌아서자 성주 양만춘이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취했다. 이에 태종은 안시성을 끝까지 지킨 그의 용맹과 고구려에 대한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보냈다고 한다.

10월 태종은 임유관(臨 關)으로 돌아갔다. 고구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태종의 완패였다. 이때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인이 7만명에 달했다. 이들 고구려인들이 다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태종은 후퇴를 너무 슬퍼하면서 “위징이 만일 있었다면 이 원정을 막았으리라”라고 탄식했다. 태종 스스로도 고구려 원정이 무모했다는 것을 절감했던 모양이다.

태종은 그 다음해에도 고구려를 친정(親征)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필산(駐?山)의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을 합친 군대가 40리에 뻗쳤는데,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고구려가 승세를 탄 데다 당나라 전군의 전투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첩자가 태종에게 아뢰기를 이적이 거느린 부대가 포위되었다고 하자 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기록들에서 보듯 태종은 고구려를 넘지 못할 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관 23년(649) 5월 태종이 나이 52세로 죽으면서 유언으로 ‘요동지역’(遼東之役)을 그만두게 했다는 사실도 태종이 고구려를 무서워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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