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역사교실


  
동아시아의 패자 고구려
 관리자  08-22 | VIEW : 2,171
동아시아의 패자 고구려


윤명철(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

.............................

고구려·백제 전쟁의 결과

광개토대왕이 즉위 6년 되던 병신년에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토벌한 다음 58개 성과 700촌을 얻었다는 내용의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사가 있다(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取五十八城村七百…').

이 비(碑)의 주인공은 우리 역사상 가장 넓게 영토를 확장했고 군사전략에 탁월했으며, 세계국가적인 성격이 강했던 시대의 대왕, 왕중의 왕인 태왕, 즉 광개토대왕이었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군사전략에 능하고 영토확장에만 힘쓴 정복군주 정도로 간단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4∼5세기의 동아시아와 고구려는 국제질 서가 재편되는 시대였고, 그 힘의 중핵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4세기 후반 중국 지역은 남북분단과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중심으로 북방종족들과 화전 양면의 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특히 해양을 활용, 군사외교를 펼쳤다.

이때 백제는 근초고왕이 황해도지역으로 북진하였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황해중부 해상권을 획득해 일본열도와 한반도 중부이남, 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백제 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정면 충돌을 하였고, 결과는 고구려의 좌절로 일단락 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다. 18세에 즉위한 청년군주인 광개토 대왕은 첫해부터 왕성한 정복활동을 펼쳤다. 북방종족들과는 화전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숙군성, 요동성을 공격하고,406년에는 3,000리를 행군해온 연(燕)을 물리치면서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는 요동반도와 서 한만,대동강 하구를 잇는 황해동안의 해상로를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대왕은 즉위 초에 비려(碑麗)를 토벌하고, 3개부락 6,700영(營 )을 공파했으며, 수많은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획득했다고 한다. 요동과 동몽고 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의 상류 초원지대까지 진출했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친정하여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일대도 영역으로 하였다. 북부여의 옛땅도 이때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런데 비문에는 백제와 관계 등 주로 대왕의 남진정책에 비중을 둔 듯하다.

그리고 해양활동이나 수군작전이 여러 번 기록되고 있다. 대왕은 즉위 2년에 4만의 군사로 백제의 10현을 함락하고, 10월에는 최전방기지이자 수군함대사령부가 있음직한 관미성(關彌城:강화도 북부)을 함락시켰다. 그 후 6년(396) 대규모 수군을 투입해 백제의 58성과 700촌을 탈취했다. 기병과 수군을 활용 한 선제공격 및 협공의 수륙양면작전이다. 관미성 외에도 당시 비성(沸城:김포) 아단성(阿旦城:아차산) 미추성(彌鄒城:인천) 모로성(牟盧城:용인)등이 점령된 것으로 보아 육군 외에 수군은 3개 방향으로 상륙했던 것 같다. 첫째는, 대동강유역에서 출발, 예성강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남양만으로 상륙하여 수원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치는 것이다. 이런 전쟁양상은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만은 해상교통 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 광개토대왕은 한성을 공멸하면서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여 백제의 수군활동을 마비시키고, 황해 중부연안의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해양봉쇄를 통한 차단전략을 꾀하자 외교적으로 고립된 백 제는 왜(倭)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 비문에는 영락(永樂)10년 경자년(400년) 대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 백제 가야 왜의 군대를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했다고 한다. 이는 신라를 복속시키고, 해양을 고리로 부상하는 백제와 가야, 왜의 외교질서를 신라를 이용하여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대왕은 이어 가야 영역까지 침범하였다.

가야·신라를 복속시킨 광개토대왕

함안 말산리, 고령 지산동, 동래 복천 동 고분군 등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야지역은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출구이자 교섭 창구였다. 고구려가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대왕 14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황해도지역 인 대방계를 침입했으나 대왕의 친정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궤멸시켰다. 이러한 상황과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고구려는 이미 일본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왕 18년(실성왕 7년),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려다 중지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 영내에 주둔해 있을 가능성으로 보아 공조체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렇듯 광개토대왕은 전통적 육지질서를 기반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질 서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아지중해 내부의 각 국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중핵)을 구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황해 해상권를 확보함으로써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북부, 황해중부 이북의 해양에 걸쳐 있는 동아지중해의 중핵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1,600년 가까이 만주벌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 글자 하나하나는 21세기를 맞으면서 우왕좌왕하는 후손들에게 해양력의 강화와 국제질서 재편전략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전방위 공략한 고구려

한반도를 중심으로 4강 외교가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동아질서가 재편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고 주변 4강은 분단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동아시아의 중핵에서 능동적으로 주변국가를 요리한 나라가 있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으로 전방위 공략을 펼치고, 수군과 기마병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한 다음 경기만을 장악하였다. 장수왕은 즉 위한 후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다. 그 비에서 ‘고구려는 세계의 중심’이며 ‘하늘과 해의 자손’이라는 성스러운 선언을 국내외에 하였다.

그리고 그 의지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국제질서 및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평양은 대동강과 예성강을 아우르며 평안도와 황해도를 동시에 장악하는 전략적인 거점이다. 부채꼴로 펼쳐진 하계망(河系網)을 통해 내륙을 통치하고, 바다와 연결되어 해양진출과 황해북부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조선시대 이래 대외교섭과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장수왕은 북방에서 연(燕) 북위(北魏)등과 전쟁을 하면서 남진정책을 전개하였다. 신라를 계속 압박하여 468년에는 실직주성(悉直州城:현재의 삼척지방 )을 공격하였다. 481년에는 청송지역과 포항 밑 흥해(興海)까지 공격하였다.

이는 동해중부는 물론 남부지역까지 해양활동의 범위를 확대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수도를 압박하고,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이곳을 출발하면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일본열도의 시마네(島根)와 돗도리(鳥取)현 등지로 도착한다. 이 지역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제기된다.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백제 개로왕은 죽음을 당하고 백제는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이렇게 고구려의 국경선은 아산만에서 충주지역을 거쳐 동해안의 영덕까지 이르렀고, 이 땅의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황해중부 이북과 동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5세기의 동아시아에는 역학관계가 매우 복잡했다. 중국은 남북조시대, 즉 분단국가가 되어 전쟁을 하는 등 적대관계에 있었다.

해양비밀외교의 성공

북방에서는 ‘유연 ’이라는 유목국가가 북위와 싸우고 있었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성장을 하면서 중국지역과 교섭하며 국제질서에 진입하고자 하였다. 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모든 나라들을 유일하게 연결시키는 외교통로는 바다였다. 육지만 장악해서는 동아시아의 강국이 될 수 없었다. 장수왕은 이와같은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하고, 해양능력을 강화시켰다. 20세기와는 정반대로 중국 남북조를 대상으로 실리를 추구하는 동시 등거리외교를 하였다.

양자강 유역에 도읍한 송(宋)과는 해로를 이용한 해양비밀외교를 펼치며 당시의 기갑전력인 군마 800 필과 화살, 석궁 등을 배에 실어보내기도 했다. 또한 북방의 유연과 남방의 송을 외해양(外海洋)으로 연결시키면서 북위를 협공하는 환상적인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러한 해양비밀외교는 양국의 사신선이 산동 해상에서 북위의 수군에게 나포되면서 외교분쟁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황해중부의 해상권과 항로를 장악, 백제와 신라가 북위와 교섭하는 것을 통제했다. 이러한 질서에 도전하던 백제 개로왕은 결국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백제 신라, 왜는 남조 (南朝)정권만 교섭하는데 그마저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대륙과 한반도, 해양을 장악한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서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대사회에서 정치적 교섭은 주로 교역을 동반한다. 고구려는 해양을 경제활 성화에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다. 군마 등 갖가지 물품을 송나라에 수출하고, 남방의 물자를 수입하였다. 고구려는 중계무역도 하였다. 예를 들면 흥안령지역에서 생산되는 말과 담비가죽 등을 수입하고, 대신 요동의 철을 수출하였다.

이러한 북방의 특산물은 다시 고구려 배에 실려 남방으로 수출된다. 뿐만 아니라 섭라(涉羅:제주도로 추정)의 특산물인 가(珂:흰 마노로 된 구슬)라는 보물을 북위에 보내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279년부터 일본열도로 진출한 것으로 돼있다. 특히 월(越:현재의 후쿠이현) 지역은 고구려와 호족들간의 교역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능력을 갖게 한 고구려의 현실적인 해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고구려의 항로는 황해와 동해로 다양했으며 어느 지역으로도 항해가 가능했다. 황해북부 연근해항로, 황해중부 횡단항로, 황해사단(斜斷)항로, 동해중부사단항로 등 다양했으며, 특히 홋카이도(삿포로 근처)까지 이어주는 연해주 항로도 있었다.

선박은 사신선, 전투선, 민간교역선 등이 있었다.800필의 말을 싣고 황해를 종단 항해, 양자강 유역까지 들어가는 등 큰배로 이루어진 대선단이 있었다. 배안에 2개의 돛대를 갖추고, 기록으로 보아 50∼100명 내외의 인원을 태웠다 .근해 항로를 많이 활용하였지만 동해를 건너거나 황해를 종단하기 위해서는 별과 해를 관측하는 천문항법을 하였을 것이다.

이같이 고구려 장수왕은 활발한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을 통해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 만들었다. 이러한 해양력의 강화와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은 21세기를 앞 둔 우리에게 의미 있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PREV :   비운의 후백제 견훤(甄萱) 대왕 관리자 
 NEXT :   신채호 “4천년 역사상 최고의 영웅” 관리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