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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후백제 견훤(甄萱) 대왕
 관리자  08-22 | VIEW : 8,615
견훤

비운의 후백제 견훤(甄萱) 대왕, 그는 전주에 성을 쌓고 백제의 복원에 나섰지만 호족들과의 불 타협, 나주 지역과 안동 지역의 상실, 장자 신검의 난 등으로 꿈을 접고 말았다. 후삼국시기 왕건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견훤은 한때 삼국의 최강자로 떠올랐으나 스스로 자신이 세운 나라를 버리고 왕건에게 투항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전주는 36년간 후백제 도읍지

지난 92년,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전주시 동남쪽의 동고산성에서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됐다. 산성의 정상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에 따라 230여 개의 초석이 놓여있는 건평 약 400평의 건물 지와 초석들, 그리고 당시 건물에 사용됐던 당와인 암막새와 수막새가 발견됐다. 기와 양식으로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해본 결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었다. 수막새 한가운데는 '전주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주성이라 불렸던 이 건물은 서기 900년에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왕궁이었다.

이 전주성을 영상복원해본 결과, 정면 22칸짜리로서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에 가장 큰 규모였다. 면적이 경복궁 근정전보다 2배, 500평정도의 기단으로 봐서는 건평이 400평정도 되는 큰 규모였다. 산 능선을 따라 10여개의 건물지가 더 발굴됐다. 이 건물들은 창고, 전각, 막사 등 제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됐고, 동고산성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요새를 이루고 있었고, 동고산성에서 평지인 전주시내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이 쌓았다는 평지 성인 고토성이 언급돼있다. 또한 1728년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북쪽 5리 되는 지점에 견훤이 쌓은 고토성이 있다고 하였다. 지도상에서 고토성의 위치를 추정한 결과, '전주부성 북쪽 5리'면 풍남문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지점, 현재 전주고등학교 뒤편으로 빽빽이 집들이 들어선 지역인데, 오래 전부터 견훤의 궁궐터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지만 고토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은 30년전 집을 재건축하면서 옛건물의 주춧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일제시대까지 이 동네 일대에는 초석들이 만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집단거주지가 형성됐을 가능성을 강하게 하는 곳이다. 고토성 자리에서 나타난 만여개의 주춧돌로 이곳에 내성 역할을 했던 견훤의 평지성인 고토성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토성은 4㎞ 떨어진 동고산성까지 이어져 있고, 그 사이로 시가지가 형성됐던 것이다. 도성을 둘러싼 산성으로 전시에도 훌륭한 방어체계를 갖췄던 전주. 이곳에서 후백제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견훤의 탄생지 경북 문경

후백제 왕 견훤이 출생했다는 문경시 가은읍에는 궁터로 불리는 마을이 있다. 견훤출생 관련 설화로 이런 것이 있다. 이 마을처녀가 밤마다 찾아오는 총각과 동침을 했는데 그 총각에 대해 알고 싶어 바늘을 꽂아 몰래 따라가 보니 그 총각이 지렁이였고, 이때 낳은 아이가 견훤이라는 이야기다. 이 출생설화에서 지렁이가 있었다는 금하굴은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다. 가은읍 궁기리에서 멀지 않은 개천가의 암벽도 견훤이 용마를 얻어 훈련시켰다는 설화에서 말 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말 바위나 금하굴 외에도, 이 지역에는 견훤설화를 간직한 수많은 유적지들이 있다. 이 모든 유적들은 견훤의 출생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견훤은 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을 떠나 후백제를 세웠을까? 견훤을 시조로 하는 완산 견씨 집안에는 견훤의 뿌리에 대해 대대로 전승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완산견씨의 족보에 따르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아자개 조상은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의 태자 융씨의 8대 손으로서 완산 견씨 가승으로 내려와 있어서 부여씨로 알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견훤은 백제 왕가의 혈통이 된다.

과연 견훤은 멸망한 백제의 후손일까? 오랫동안 견훤에 대한 연구를 해온 이도학 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는 '경상북도 가은읍 아차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힘깨나 썼던 유력한 가문들이 풍비박산이 돼서 흩어졌다. 그 가운데 한패가 산간오지인 문경시 가은읍의 아차 마을로 흘러 들어왔고, 그 후손이 바로 견훤이기 때문에 백제의 유민이 되고 백제인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찍부터 확고하게 견지했기 때문에 신라 땅에서 태어났지만 백제를 부활시킬 수 있었고 그것이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완산견씨 집안에는 견훤의 성이 진씨로 발음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옥편에 보면 질그릇 견, 진이라는 두 개의 음가가 다 나와있다. 진이라고 하는 것은 지렁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렁이가 아버지라고 하는 출생설화속에서 진훤이 나오게 됐다고 봐야한다.

신라의 관군이었던 견훤, 새 국가를 창건

신라의 관군이 된 견훤은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서남해안지역에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군사 지휘권을 갖는 자리에 오른다.순천에 있는 김총 사당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순천의 대호족이었던 김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금도 순천의 성황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김총은 견훤의 초기 세력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후에 왕의 경호실장인 인가별감을 지내는 김총과 사위인 박영규를 중심으로 견훤은 순천에서 독자적인 힘을 키워나갔다.

서기 892년, 견훤은 25세의 나이로 순천 호족의 지지를 받아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따르는 무리가 5천이 넘을 정도로 당시 광주 주변 호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견훤은 광주에서 거병했을 때 대외적으로는 자신을 신라의 관리로 알렸다. 전주, 무주, 공주를 관할하는 전주 관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견훤이 전주 중심의 나라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전주로 천도하여 백제의 중심거점을 북상시켜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전라북도 남원의 실상사(實相寺)는 통일신라 말, 신라의 골품제도에 반기를 든 혁명적인 성격의 선종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인데, 그 실상사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예전에 암자로 쓰이던 조계암터가 나타난다. 이곳 부도에서 특별한 글귀가 발견됐다. 부도에는 '정개10년'이라는 글귀가 있다. 그것은 경오년이라는 뜻이다. '정개'는 연호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부도는 홍척국사의 제자, 편운화상의 부도였다. 실상사의 명강스님의 말에 의하면, 홍척스님의 제자들 중에 편운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실상사 조계암터에서 홍척스님의 불법을 잇고 사람들을 교화했다. 이곳에서 열반을 하고 홍척스님의 부도 탑을 세웠다고 한다. 홍척의 활동연대는 9세기이니까 편운이 열반한 시기는 9세기 말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경오년은 60년만에 한번씩 돌아온다. 9세기말에서 10세기초의 경오년은 910년 한번뿐이다. 따라서 정개10년은 서기 910년이 된다. 910년에 후백제의 영역인 남원에서 사용된 연호인 정개는 견훤이 공포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라든가 고삼국기의 신라였다. 대외적인 자주성 자부심이 천명되고 있는 것이 자주적인 연호의 사용이다. 정개라고 하는 연호를 사용한 것은 백제적인 세계관과 문화관이 정립됐다는 것을 말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를 구상해 나갔던 견훤은 927년 11월,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했다. 포석사에서 경애왕은 견훤에게 자진을 강요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후, 견훤은 또 다른 왕족인 김부를 경순왕으로 옹립하고 경주를 떠났다. 당시, 경애왕을 제거할 정도로 힘을 가졌던 견훤은 왜 신라를 정복하지 않았을까?

견훤의 입장에서 신라를 붕괴시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신라는 약체국가로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지만 천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권위 있는 나라였다. 견훤의 라이벌은 고려 왕건 정부였기 때문에 왕건 정부를 흡수 통합한 다음에 선양의 형식을 빌어서 통일신라로부터 왕통을 교체 받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경주를 침략한 견훤은 대구 팔공산에서 왕건의 군대와 맞부딪힌다.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고 출병한 왕건과 대구 공산에서 조우한 것이다. 당시 견훤과 왕건의 격전지였던 살내라는 지명은 당시 치열했던 전쟁상황을 보여준다. 견훤의 기세에 밀리던 왕건 군대는 이곳에서 구원병을 지원 받고 다시 격전을 치렀다. 때마침 신숭겸 김락 두 구원병과 합세하게 된다. 그래서 고려 군과 후백제 군이 살내를 중심으로 해서 양군이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고 해서 살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여기서 전열을 가다듬은 왕건은 치열한 접전을 계속하며 북상했고 파군재에 이르러 견훤과 마지막 격전을 벌인다. 왕건의 군사가 대파 당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 파군재에서 왕건의 군대는 몰살당했다.

파군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왕건의 오른팔 신숭겸 장군의 사당, 표충사가 있다. 신숭겸은 고려 군이 대패한 파군재 전투에서 전사했다. 신숭겸은 전사 후에도 고려왕조의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의 희생으로 왕건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말 한 필에 의지해 홀로 산을 넘었다. 견훤 군사의 삼엄한 경계를 피해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고 공산의 막다른 부락까지 도망친다. 왕건은 야밤을 틈타 실왕리에서 봉우리를 하나 넘어 안심까지 갔다. 안심이란 이곳에 와서야 왕건이 겨우 안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산 곳곳의 지명들은 당시 왕건의 위기일발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이 승리를 한 이후 경상도 지역에 대한 주도권은 후백제에 들어가게 된다. 후백제와의 쟁패 과정에서 경상도 지역은 고려와 후삼국통일의 결정적 변수였다. 공산전투를 계기로 후백제가 경상도 주도권을 잡았고, 그를 기반으로 북쪽으로 남쪽으로 넓혀나갈수 있었다. 그후, 견훤은 929년까지 많은 전투에서 승전을 올렸고, 건국이래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했다. 당시 후백제는 삼국 중 가장 강한 국가로 떠오르고 있었다.

왕건 군대에 대패한 견훤

경상북도 안동의 병산과 석산이 맞닿은 지역은 930년 왕건과 견훤의 치열한 격전장이다.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전세가 바뀌어 견훤이 8천명의 군사를 잃고 대패한다. 오랜 전투에서 세 호족이 왕건 측에 가담했기 때문이다.안동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삼태사묘에는 안동고창전투에서 왕건을 승리로 이끈 세 호족 즉 김선평, 장길, 권행 장군의 비석과 위패가 모셔져있다. 당시 왕건은 이들에게 대광태사라는 벼슬을 내리고 안동 지역전체의 세금을 면제해줬다. 위패를 모신 사당 뒤편에는 보물각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에 있는 22점의 보물은 모두 현재 보물 451호로 지정돼있다.

안동고창전투 승패에 미친 삼태사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삼태사는 왜 왕건의 편을 들었을까? 후백제 군대가 경애왕을 살해한 사건으로 인하여 경상도 지역의 신라계 호족들이 왕건에게 붙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안동고창전투 직후, 경북지역의 30개 군 현과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0여 성의 호족들이 왕건 쪽으로 돌아섰다. 독립적인 자신의 영역을 보장받기 원했던 당시 호족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복활동을 벌이던 견훤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932년, 견훤에게 결정적인 비수를 꽂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왕건에게 귀부를 한 것이다. 고창전투에서 왕건이 대승하자 공직은 백성들을 보장받기 위해서 귀부를 했다. 호족들의 독자성을 엿볼 수 있다. 이해 관계에 따라 향배를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직의 귀부로 인해 오랫동안 후백제 세력에 있던 호족들이 하나 둘 동요하기 시작한다. 934년에는 충남지역의 30여개 성이 왕건에게 귀부한다. 견훤 세력은 점점 쇠락해갔다.

후삼국시기, 나주지역이었던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반도 곳곳에는 청자 가마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서 생산된 그릇의 형태를 보면 중국의 월주(越周)양식을 거의 그대로 많이 닮아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중국에서 그대로 기술이 들어왔거나 기술지도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월주 지방의 청자에서 시작된 월주요양식청자는 당시 청자를 굽는 기술 중, 가장 뛰어난 선진기술이다. 멀리 중국의 최첨단 청자 기술이 어떻게 이곳에 전해져 대규모 생산지를 이뤘을까?

화원반도에 위치한 가마터는 60개. 청자 가마터의 약 80%가 이곳에 몰려있다. 당시 도자기는 국내외적으로 하나의 중요한 고부가 상품이다. 그 시대를 전후해서 도자기 무역선들이 지방에 굉장히 빈번하게 왕래를 했던 흔적들이 해저유물에서 확인된다.가마터에서 작은 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당포라는 바닷가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둑을 세우기 전까지 포구가 있었고, 그곳으로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화원반도에 중국과 이어지는 대규모의 도자기 생산지 형성이 가능했다. 그 포구는 나주 호족세력과 섬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던 해상세력이 만나는 지역이었다. 바로 당포라는 포구는 당나라로 떠나는 포구라는 의미답게 국제무역이 이뤄졌던 항구였다.

세 지역의 물줄기가 합쳐져 나가는 바닷길의 거점, 당포. 무역을 통해 이곳으로 엄청난 부가 모여들었고, 나주의 호족들은 강력한 독자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 해상 호족들을 누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나주지역에 대한 쟁탈전은 후삼국 초기부터 시작됐다. 901년, 견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에 왔지만 호족들의 저항으로 영산강 지역을 약탈만 했을 뿐 점령하는데 실패한다.

나주지역은 오래 전부터 해상세력으로서 서해안일대에 여러 세력과 연관돼있었다. 개성에 있었던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낌새를 눈치챈 견훤이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 나주인근 부락을 약탈하자 나주 세력은 왕건 쪽으로 넘어가게 됐다.나주세력이 왕건 쪽으로 기운 상황에서 903년,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지역의 10여 군 현을 공략해 장악했다. 그러자 909년, 견훤은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전함을 배열하고 육지에도 진을 쳤다. 견훤의 전세에 왕건은 급히 수군을 이끌고 덕진포로 들어왔고, 양국 군대의 대접전이 벌어졌다.

덕진포에서 나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파군교에서 견훤은 왕건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다. 당시 왕건은 바람에 따라 견훤의 군함을 불살라버리는 화공책으로 군사적 열세를 뒤집어 버렸다. 이것으로 나주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벌어졌던 양국의 쟁탈전이 일단락 됐다. 덕진대전에서 견훤이 패배하면서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지방을 상실했다. 왕건은 서남해지방을 확보하면서 국내외적인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활동의 장이 넓어졌다. 견훤의 경우는 해상 네크워크의 결정 점을 상실함으로서 그 이후의 활동에 있어서 크게 타격을 받는 결과를 가져왔다.초기의 후백제는 군사력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고려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나주를 뺏김으로써 처음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나주는 후백제의 바로 뒤에서 견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장자 신검의 반란과 사라진 꿈

전라북도 김제의 금산사. 첫째 왕자, 신검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견훤을 이곳에 유폐시키고 넷째 아들, 금강을 살해한다. 금강은 견훤이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왕자였다. 그렇다면 신검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신검과 견훤 개인간의 갈등이라든가 다툼이라기보다는 신검 파와 견훤 내지 금강 파의 대립 때문이다. 운주전투에서 패배한 견훤은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왕건 쪽으로 귀부를 하거나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했고, 금강을 둘러싼 세력도 여기에 찬동했다. 그러나 신검 양검을 비롯한 세력들은 끝까지 항거하면서 대세를 결정하자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입장이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후백제 말기에 견훤과 신검형제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견훤과 아들간의 갈등이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세력간의 노선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신검 3형제와 금강은 배다른 형제로 추정된다. 당시에 이들 왕자를 둘러싸고 정치 세력의 갈등이 형성됐던 것이다. 맏아들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지만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귀부한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를 칠 것을 먼저 제안했다. 936년 후백제 최후의 전투가 있던 날. 견훤은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직접 나섰다. 후백제의 멸망을 지켜 본 견훤은 자신도 며칠만에 황산(연산)에 있는 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전주 무악 산이 바라보이는 논산 청화산에 묻혀 있다. 견훤은 지략이 많았고 정치적인 안목이 빼어났던 인물이다. 일개 신라 군인출신이었지만 한나라를 창건하고 백제의 땅에서 백제유민들의 한을 풀어주고 국가를 부활시킬 수 있었던 이상과 역량을 갖고 있었던 걸출한 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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