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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間諜활동에 대한 小考
 관리자  08-22 | VIEW : 2,816
삼국시대 間諜활동에 대한 小考

이 름 直木孝次郞    


이 논문의 작자인 나오끼 고우지로우(直木孝次郞)는 1919년 고베에서 출생하여 京都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大阪시립대 교수를 거쳐 현재 相愛대학 교수로 재직 중임. 주요저서에 "일본 고대국가의 구조", "壬申의 亂" "일본 고대 씨족과 천황" 등 다수가 있음 - 옮긴이: 이강기

목차
1. 金庾信과 藤原鎌足
2. 金庾信과 간첩
3. 삼국시대 여러 간첩 사례
4. 고대 일본의 간첩
5.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간첩 迦摩多
6. 間諜으로 국사에 분주했던 三國의 승려들

1. 金庾信과 藤原鎌足

고려의 金富軾에 의해 1145년에 완성된 三國史記 전 50권 중 41권부터 43권까지의 3권은 金庾信傳으로 되어 있다. 김유신은 金春秋(훗날 태종무열왕)를 도와 통일신라건국의 기초를 닦은 영걸이다. 때문에 그는 일본 학계에서 간혹 나까노오오에(中大兄)皇子(훗날 天智천황)를 도와 대공을 세운 것으로 日本書紀에 기록돼 있는 후지와라노가마타리(藤原鎌足)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비유가 실체에 어울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가마타리는 정치의 표면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參謀의 臣이다. 소가노이로까(蘇我入鹿)를 太極殿에서 암살하는 장면에서도 가마타리에 대해서는, 나까노오오에가 長槍을 꼬나 잡고 태극전 옆에 숨어 있을 때「弓矢를 잡고 호위에 임했으며」, 긴장한 나머지 구토를 했던 일당인 사에끼노무라지꼬마로(佐伯連子麻呂)를「꾸짓으며 격려했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을 뿐 실제의 행동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 외의 경우에서도 가마타리가 실제로 얼마만큼 당시의 정치에 공헌했는지 의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이에 비해 김유신은 매우 행동적이다.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예컨대 善德여왕 13년(644년) 9월, 김유신은 上將軍으로 임명되어 백제의 加兮城, 省熱城, 同火城 등 일곱 성을 공략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 신라로 귀환하였는데, 백제의 대군이 신라의 買利浦城에 來攻하였다는 급보가 있자,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알현하지도 않고 上州장군에 임명하여 이것을 방어하라고 명했다. 김유신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그대로 전선으로 나아가 백제군을 쳐부수고 수급 3천을 베었다. 3월에 서울로 귀환하여 왕궁에 복명했는데, 또 백제의 대군이 국경에 몰려와 신라로 침공하려 한다는 보고가 있자 왕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있는 유신에게 세 번째로 출정을 명했다.

이하 삼국사기의 이에 관한 기록을 보자.

"유신은 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 군사를 훈련하고 兵器具를 수선한 다음 서쪽으로 백제군을 막으려 나아갔다. 이 때 그의 집 家人들이 모두 문 밖에 나와 장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유신은 문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다가 50보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 말을 멈추고 시종하는 사람에게 집에 가서 물을 떠 오라 명령하여 물을 마신 후 말하기를 「우리 집 물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 맛이 있구나」하고 그냥 길을 떠나니 이를 보는 모든 군사들이 말하기를「대장군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어찌 가족들과 이별함을 한탄하리오?」했다."

이리하여 김유신군이 戰場에 이르자 백제군은 유신군의 위세에 눌려 퇴각했다. 선덕여왕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의 작위를 더하고 상을 내렸다.

이러한 기사에는 윤색이나 과장이 있겠지만, 김유신이 임금을 위한 정략가로서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矢石이 비오듯하는 전장에서도 거침없이 말을 타고 달리는 용장으로서도 공적이 다대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제와 고구려, 더욱이 唐을 몰아내고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鼎立하고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통일국가 건설이, 야마도(大化) 정권 외에는 강력한 정권이 없었던 7세기 일본에서의 고대국가 형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웠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김유신과 가마타리의 인물상의 차이는 주로 이들 두 사람이 처한 정치적인 경우가 아닌 배경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일본과는 사뭇 다른 한반도의 심각한 政情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몇 개인가의 현상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흥미를 돋구는 것 하나가 本稿의 주제인 간첩들의 활약상이다.



2. 金庾信과 간첩

우선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여러 간첩의 사례들을 열거해 보자.

(1) 列傳 第一의 金庾信傳 上에「高句麗諜者浮屠德昌」이라는 말이 보인다. 선덕여왕 11년(642년) 신라가 백제와 싸워 패한 후 金春秋가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고구려왕은 김춘추가 고구려의 형세를 정탐하러 온 것이라고 의심하여 그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는다.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간지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음으로 김유신은 3천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구출계획을 세운다. 이 때 신라에 잠입해 있던 고구려 첩자 浮屠 德昌이 사람을 보내어 고구려왕(보장왕)에게 김유신의 계획을 통보하고 있다. 고구려왕은「첩자의 말을 듣고 무리하게 붙잡아 두려하지 않고 예를 갖추어 춘추를 돌려보낸다」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2) 列傳第二의 김유신전에는 이 무렵 백제의 첩자도 신라에 잠입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덕여왕 太和2년(648년) 8월에 백제 장군 殷相이 來襲해 오는 바람에 진덕여왕은 김유신 등에게 명하여 이를 방어케 했다. 兩軍의 싸움에 승패가 쉽게 나지 않았으며 유신軍은 道薩城 아래 주둔했다. 이 때 물새들이 갑자기 동쪽으로부터 날아와서 유신군의 兵幕위를 날아가니 군사들은 이를 보고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고 생각하므로 유신은「이는 아무 괴이한 일이 아니다」하고, 곧 군사들에게 이르기를「오늘 틀림없이 백제의 간첩이 올 것이니 너희들은 짐짓 모른 체 하며 그를 조사하지 말라」고 명하고는, 軍中에 포고하여「성벽을 굳게 지키고 조금도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린 다음에 백제와 결전할 것이다」하였다. 백제 첩자는 이 말을 듣고 돌아가 殷相에게 보고하였다. 殷相 등은 신라군의 원병이 온다는 말에 두려움을 품고 후퇴하려 했다. 이를 기화로 유신군은 일시에 진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3) 역시 列傳第二의 김유신전에는 신라 간첩 租未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야기가 다소 복잡하게 뒤얽혀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지 2년 후인 永徽6년(655년) 9월에 김유신은 백제의 刀比川城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이보다 앞서 신라의 租未坤은 天山縣令으로 있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어 佐平 任子의 家奴가 되었다. 조미곤은 부지런히 힘써 任子의 신뢰를 얻게 돼 출입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신라로 몰래 돌아와 김유신에게 백제의 사정을 보고했다. 유신은 조미곤에게「내 들으니 백제의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자가 任子라 하였다. 그와 모의하여 백제를 넘어뜨리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우리 나라를 위하여 다시 任子에게로 가서 이러한 내 뜻을 말하라」며 중대한 사명을 주었다. 조미곤은 백제로 돌아와 任子에게 한동안 부재했던 이유를 적당한 말로 둘러대었다. 임자는 조미곤의 말을 믿었다.

조미곤은 기회를 엿보다가 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사실은 그 동안 신라에 갔다왔습니다. 그 때 김유신장군이 저에게 백제에 가서 佐平에게 알리기를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 하는 것은 가히 알 수 없는 일인즉 만약 백제가 먼저 망한다면 좌평은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신라가 먼저 망한다면 나는 백제에 의지할 것이다"고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任子는 묵묵히 듣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미곤은 저윽이 두려운 마음으로 그 앞을 물러 나왔다. 몇 달 후 任子는 조미곤을 불러「지난 번에 네가 이야기 한 유신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렸다?」며 주의를 환기시킨 후「너가 전하는 것은 이미 내가 다 알고 있으니 돌아가서 그렇게 하자는 뜻을 유신에게 알리라」고 말했다.
이하 삼국사기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遂來說 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愈急幷呑之謀

「來說」이하 문장의 주어가 생략돼 있는데, 任子 자신이 직접 신라로 와서 백제의 내외정세를 보고했다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국내의 삼국사기 번역본에는 "조미곤이 곧 신라로 돌아와서 임자의 이야기를 유신에게 알리고 겸하여 백제의 국내사정을 모두다 낱낱이 알렸다. 이에 유신은 드디어 급히 백제를 병탄할 것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 옮긴이). 조미곤의 설득에 의해 佐平 任子까지 신라의 첩자 역할을 한 것이다.

(4) 김유신전에는 또 하나, 고구려 첩자 이야기가 있다. 백제의 夫餘城이 함락되고 백제가 일단 망했던 660년의 이듬해인 龍朔원년, 신라의 북한산성이 고구려.말갈兵에게 포위되었는데, 天變(갑자기 큰 별이 적진으로 떨어지고 또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쏟아 진 것 - 옮긴이)이 있자 고구려.말갈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그 보다 앞서 김유신은 中秋날 밤에 자제들을 거느리고 대문 밖에서 소요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서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유신은 그가 고구려의 첩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체포하지 않고 말하기를「우리 나라 대왕은 위로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인심을 잃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쁘게 그 생업을 즐기고 있다. 지금 너는 이를 보고 너의 나라로 돌아가서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어라.」고 말하며 그를 보내 주었다. 고구려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신라는 소국이지만 유신 같은 이가 재상으로 있으므로 가히 가볍게 보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상이 김유신전에 나와있는 내용들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각각 상대국에 첩자를 보내어 국정, 軍略의 정찰이나 정치공작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2)의 백제의 첩자, (4)의 고구려의 첩자 모두 김유신이 이를 간파하고 신라에 유리하게 첩자들을 이용하고 있다. 유신전의 성격상 각색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삼국이 서로 첩자들을 잠입시켜 이용하고 이용당한다고 하는 복잡한 정황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3)의 백제의 좌평 任子가 유신의 회유에 응하여 내통을 약속했던 이야기도 소설적이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의심스럽지만, 적국의 첩자를 적국으로 돌려보내 고급관리층을 동요케 하는 고도의 첩보활동이 널리 행하여 진 점은 인정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敵情정찰을 위한 단순한 간첩파견, 그 간첩을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어 거꾸로 상대국을 속이는 데 이용하는 고등전술, 적의 고관을 포섭하기 위한 첩자의 활동 등, 간첩책략전도 고도화하고 있는 점이 김유신전에서 잘 드러나 있다.


3. 삼국시대 여러 간첩 사례

이처럼 간첩조종에 뛰어난 수완을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김유신도 하마터면 적국의 첩자에게 속아넘어갈 번했던 이야기가 있다. 14세기 초경에 중 一然이 쓴 삼국유사의 卷第一 김유신 항목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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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아직 젊을 때의 일이다. 당시 白石이란 자가 있어 어디서 왔는지 그 근본은 알 수 없었으나 유신의 낭도에 끼어 여러 해 있었다. 유신은 그 때 한창 고구려와 백제의 攻伐문제를 두고 밤낮으로 깊이 궁리를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백석이 그 계획을 알아채고 유신에게 제의해 오기를,

「公이 저와 함께 저쪽 적국에 잠입해 들어가 먼저 저들의 내정을 탐지하고 나서 일을 꾀하는 것이 어떻소?」라고 했다.

유신은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백석을 데리고 밤을 타서 적국을 향해 출발했다. 도중에 세 사람의 여인과 길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 세 사람의 여인들은 실제로는 신라의 護國神들이었는데, 유신을 수풀 속으로 꾀어내 백석이 적국의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유신은 그 날 밤을 보낸 후「집에 중요한 서류를 놓고 왔다」며 백석을 데리고 급히 되돌아 왔다. 집에 당도한 즉시 백석을 결박하여 문초했다.

백석은「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입니다. 당신은, 고구려를 망치려는 말을 한 바람에 참살된 유명한 점술사인 楸南이 환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꾀어 고구려로 데려가려고 파견돼 온 것입니다」고 자백했다. 유신은 백석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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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역시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間諜戰이 격렬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물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얘기에 앞서 (4)의 조미곤의 얘기는 첩자가 적국의 고관에게 접선한 사례인데, 고구려 長壽王시대의 浮屠 道琳의 사례는 아주 성공한 간첩 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삼국사기 百濟本紀 第三의 蓋鹵王 二十一年(475년)條에, 고구려가 백제의 서울인 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기사로 채워져 있다. 다음은 그 개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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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21년(475년), 앞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공략할 요량으로 은밀히 간첩으로 보낼 사람을 구했다. 중 道琳은 국은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에 응모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백제로 파견했다. 도림은 나라에 죄를 짓고 백제로 도망쳐 왔노라고 거짓으로 꾸몄다. 이 때 백제왕 近蓋婁(蓋鹵王)는 바둑을 즐겼다. 도림은 궁성으로 찾아가 자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그 묘리를 깨닫게 되었다며 원컨대 왕을 곁에서 모시게 해 달라 하므로 왕은 곧 그를 불러들려 대국하여 보니 과연 국수이므로 드디어 그를 높이 받들어 상객으로 삼고 심히 친밀해지게 되었다. 하루는 도림이 왕을 모시고 조용히 말하기를,
「백제는 사방이 산과 바다로 되어 있으니 이는 하늘이 마련해 준 險地라, 사방의 나라가 백제를 감히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왕의 성곽과 궁실이 수리가 되어 있지 않고 先帝의 능묘도 손질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집도 강물에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이 모든 것이 대왕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하였다.

백제왕은「알았다」며 곧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으로 성을 쌓고, 궁실누각을 짓고, 큰돌을 가져다가 부왕의 묘를 수축하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했다. 이 때문에 국고가 고갈되고 백성들이 곤핍해져 국세가 기울어졌다. 도림은 이것을 보고 곧 고구려로 돌아가 장수왕에게 보고했다. 장수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정벌하였으며, 백제의 서울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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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많이 윤색된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간첩활동이 고도화하고 광범위했다는 것을 생각케 하는 이야기다. 직접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간첩활동 뿐 아니라 적의 후방교란을 위주로 하는 정치적 전략적 간첩활동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선 상당히 높은 식견과 역량을 필요로 할 것이다. 또한 후방교란 뿐 아니라 타국에 잠입하여 그 실정을 파악하는 것에도 특별한 才智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삼국사기 列傳 第四(卷四十四)에서 보이는 신라의 居柒夫는 이러한 첩자였다.

알려진 바 거칠부의 성은 金씨였고 4세기 후반에 재위했던 奈勿王의 5세손이며, 아버지 勿力이 伊滄(신라의 官位 17등급중 2위) 벼슬에 있은 것으로 봐 대단한 가문 출신이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선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少X弛 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0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 堂說經 遂詣聽講經

거칠부는 어릴 때부터 원대한 뜻이 있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으로 유랑하다가 마침내 고구려를 엿보고자 그 나라로 들어갔다고 했으니 광의의 첩자이다. 고구려의 중인 惠亮법사는 거칠부가 비범한 신라인이라는 것을 간파하곤 그에게「노승이 불민하지만 또한 능히 그대를 알아보겠는데, 이 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를 신라사람으로 알아보고 잡을까 염려되므로 이를 비밀히 알려주는 것이니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며 귀국시켰다. 거칠부는 신라로 돌아와 大阿 (제5등급)이 되었으며, 眞興王 12년(576년)에 장군이 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혜량법사와 재회하고 신라로 함께 돌아왔으며, 眞智王 원년(576년)에 최고 관직인 上大等에 임명되었다.

이상이 居柒夫傳의 개략이다. 혜량법사와의 관계가 이러쿵저러쿵 했고, 거칠부가 어렸을 때 중의 모습으로 고구려에 잠입하여 시찰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에 관한 기록은 新羅本紀의 眞興王 6년, 12년, 眞智王 원년의 諸條에 보이는 외에 黃草嶺과 磨雲嶺에 있는 진흥왕 拓境碑에도 보이고 있어, 그가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앞서 김유신전에 보이는 간첩들에 관한 것을 이야기할 적에 김춘추가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하려 갔을 때, 고구려왕은 춘추가 고구려의 형세를 정탐하려 온 것이라 의심하고 그를 억류했다고 소개했는데, 고구려왕이 무근한 사실을 의심한 것이 아니었다. 외교관이 정세를 정찰 - 광의의 간첩역할 -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이 김춘추가 大和3년(647년)에 遣新羅使高向黑麻呂 등을 데리고 일본에 왔다고 일본서기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서기는「仍以春秋爲質」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은 정찰 목적을 가진 첩자 외교관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는「春秋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담소를 잘 한다」고 적고 있다. 뛰어난 화술로 정보수집 임무에 열중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춘추는 자신의 눈으로 고구려와 일본의 실정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648년에는 唐에 入朝하여 당과의 연합전선 형성에 성공한다. 과연 뛰어난 외교수완이다.

물론 김춘추같은 외교사절까지 첩자의 범위에 넣으려는 것은 아니다. 첩자.간첩은 정보활동을 주로 하는 것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본래의 - 협의의 - 간첩 사례는 한국측 사료뿐만 아니라 新唐書 등 중국측 사료에도 보이고 있는데, 그 사례를 2, 3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新唐書 東夷傳의 고구려전에는 貞觀19년(645년)에 唐이 제 1차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을 때 安市城 전투 후 당의 候騎가 고구려의「점人」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資治通鑑에는 그것이 다음과 같이 신당서보다 더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八月甲辰, 候騎獲 莫離支諜者高竹離, 反接詣 軍門 上召見解 縛, 問曰, 何獲之甚, 對曰, 0道間行, 不食數日矣, 命賜之食 (卷189)

新唐書가「점人」이라고 한 것을 資治通監은「諜者」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스파이라고 하기보다는 將校斥候와 같은 것인 것 같다. 고구려와 당 양군의 장교척후의 충돌이라고 한다면 간첩의 사례로 보는 것은 아마 부적당한 지도 모르겠다.

고구려는 이로부터 23년 후 豪勇의 재상인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망하게 되는데, 연개소문의 아들 가운데 男建은 최후까지 평양성을 사수했다. 그러나 大將 浮屠 信誠이 唐에 내응했기 때문에 城이 떨어지게 된다. 이 信誠의 내응 대목을 舊唐書 高句麗傳에서는,

總章元年(668년) 九月, 勣(唐 장군 李勣을 말함) 又移營於平壤城南, 男建頻遣兵出戰, 皆大敗,男建下捉兵總管僧信誠. 密遣人詣軍中, 許開城門爲內應, 經五日 信誠 果開門

라고 기록하고 있고, 新唐書 高句麗傳은,

(前略) 大將浮屠信誠, 遣諜約內應, 五日闔啓

로 쓰고 있다. 삼국사기는 약간 상세하지만 거의 같은 내용이다. 여기에 보이는, 信誠이 파견한「사람」또는「간첩」은, 적정을 살피는 스파이는 아니고, 이쪽의 정보를 적에게 알리는 사람인데 첩자의 일종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 2절에서 보아온 것처럼 삼국시대엔 각종 첩자.간첩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첩자는 무엇보다 은밀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첩자의 활동은 소설의 재료는 되어도 역사의 표면에는 남지 않는다. 앞서 기록한 약간의 사례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첩자활동들의 극히 일부를 전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삼국간의 무력투쟁과 외교전이 격렬했던 것과 비례하여 첩보전 또한 격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고대 일본의 간첩

이러한 조선 삼국과 비교하여 고대 일본에서의 첩자활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大化5년 3월에 소가노히무까(蘇我日向)가 소가노꾸라야마타노이시가와노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를 참소했으며, 사이메이(齋明)4년 11월에 소가아까에(蘇我赤兄)가 아리마(有間) 皇子에게 모반을 권유했는데, 이것을 나까노오오에(中大兄) 皇子에게 밀고했다던가(이상 日本書紀), 덴표(天平) 원년 2월에 누리베키미타리(漆部君足)와 中臣 미야꼬아즈마히또(宮處東人)가 나가야노오오사미(長玉王)의 일을 조정에 밀고했다던가, 덴표보우지(天平 字) 원년6월에 카미쯔미찌노히타쯔(上道斐太都)가 타찌바나노나라마로(橘奈良麻呂)의 策謀를 후지와라노나까마로(藤原仲麻呂)에게 밀고한(이상 續日本紀) 사례가 있는데, 첩자라고 할 정도의 것은 아니다.

日本書紀와 續日本紀에서 일본의 간첩의 유일한 사례는, 續日本紀에서의 덴표(天平)12년 9월 戊申(24일)條에,「又間諜申云, 廣嗣於遠珂郡家 造軍營儲兵弩而擧 烽火徵 發國內兵 矣」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후지와라노이로쯔꾸(藤原廣嗣)의 亂이라고 하는 전쟁상태에서 官軍側이 敵情 정찰을 위해 풀어놓은 간첩으로 평상시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활동하는 간첩의 사례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첩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大化 원년 9월에 후루히또노오오에(古人大兄) 皇子의 모반기도를 나까노오오에(中大兄) 皇子에게 알렸던 키비노카사노오미시타루(吉備笠臣垂)는 어쩌면 나까노오오에가 內廷 정찰을 위해 그를 후루히또노오오에에게 보낸 첩자인지도 모른다.

또한 요시나가 미노루(吉永登)씨는 万葉集 卷二(109)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노래와 그 詞書(그 노래를 지은 날짜, 장소, 배경 등을 적은 머리말 - 옮긴이)에서 쯔모리노무라지또오루(津守連通)가 스파이를 이용하여 大津 皇子의 신변을 살핀 게 아닌가 고 추정하고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大津皇子, X婚 石川郞女時, 津守連通占露其事, 皇子御作歌一手

또한 궁정내의 정쟁이 격화된 奈良시대 후기에는, 藤原仲麻呂 등이 첩자를 이용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스파이나 첩자를 인정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궁정귀족내의 세력쟁탈전에 이용되었을 뿐 국제적인 활동을 한 한반도의 삼국시대 첩자들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히로쯔꾸(廣嗣)의 亂에서의 간첩들의 활동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이 한반도와는 전혀 달리 평온한 환경에서 파란을 크게 일으키지 않고 진행됐기 때문일 것이다.


5.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간첩 迦摩多

한데, 이처럼 일본과 한반도의 첩자 또는 첩보활동의 차이를 이야기하다보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日本書紀에 나오는 스이고(推古) 9년9월 戊子 條의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戊子, 新羅之間諜者迦摩多倒對馬, 則捕以貢之, 流上野,

日本書紀와 續日本紀를 통해「間諜」이라는 말을 볼 수 있는 곳은 전술한 히로쯔꾸(廣嗣)의 變의 기사에서의 2개뿐이다. 그리고 국제적인 간첩의 사례는 이 신라간첩 迦摩多 뿐일 것이다. 그것도 일본이 파견한 것이 아니고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것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신라는 6세기 전반 경부터 國勢가 興隆하여 伽倻지방에 진출한 이래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됐는데 스이고(推古)朝에 들어와서도 그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스이고 8년에 사까이베노오미(境部臣)과 하즈미노오미(穗積臣)을 大將軍, 副將軍으로 하여 만여명의 대군이 신라를 공격하였고, 이듬해 9년11월에도 스이고 조정은 신라를 공격하기로 의논을 하였고, 더욱이 그 이듬해 10년 4월에는 쿠노노미(來目)皇子를 擊新羅將軍으로 하여 2만5천명의 軍勢가 쯔꾸시(筑紫)에 도착한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 기간인 스이고 9년(신라 진평왕23년)에 신라가 일본의 국정을 정찰하기 위해 간첩을 파견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스이고의 조정사람들도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첩보활동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간첩 迦摩多의 기사에 관심을 가진 선배학자로 타끼가와마사지로우(瀧川政次郞)씨가 있다. 이 분의 학설은, 迦摩多의 도래와, 스이고 10년10월에 백제의 중 觀勅이 來日하여 曆本, 천문지리서와 함께 遁甲方術의 책을 전하고, 陽胡史인 祖玉陳이 曆法을, 大友村主 高聰이 天文遁甲을, 山背臣 日立이 方術을, 각각 觀勅에게서 배웠다는 日本書紀의 記述을 상고할 적에 일본의 遁甲術의 원류를 여기서 찾아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사지로우씨가 특히 중시한 것은 遁甲術로서, "스이고(推古)천황대에 우리가 백제의 중 觀勒을 불러들여 遁甲術을 傳習시킨 것은, 한반도에 있는 우리 軍이 신라의 간첩 때문에 누차 곤경에 처했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도 遁甲術을 배워 여기에 대항할 필요를 통감했기 때문이다."고 논하고 있다.

재미있는 착안이지만, 간첩과 遁甲術이 결부되어 닌쟈(忍者: 둔갑술을 써서 은밀히 정탐행위를 하는 사람 - 옮긴이)의 원류가 되었다는 생각은 고대에 있어서 간첩의 역할이나 성격을 왜소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간첩에는 적의 눈을 속여 敵地에 잠입하여 신체의 안전을 지킨다는 점에서 이른바 닌쟈와 공통되는 일면이 있지만, 앞서 논한 바와 같이 한반도의 史料에서 보이는 첩자활동의 범위가 매우 넓다. 일본 조정이 신라의 간첩활동에 자극을 받아 자국 간첩들에게 遁甲術을 배우게 하고 이것을 이용했다면, 그들은 뒷날의 닌쟈보다 스케일이 큰 첩보활동에 종사했을 것이다.

또한 마사지로우씨는 구메(來目) 皇子가 스이고 11년 2월에 쯔꾸시(筑紫)에서 薨逝했다고 日本書紀에 보이는 것을 迦摩多의 일당인「신라 간첩의 凶刃에 살해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마아지로우씨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聖德太子傳曆」의 스이고11년 2월 條에,

大將軍來目皇子薨於筑紫, 太子謂侍從 曰, 新羅奴等遂殺將軍

이라 돼 있는 것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新羅의 奴」는 신라의 간첩을 말하는 것이다. 간첩인지 어떤지는 잠시 두고보기로 하고,「凶刃」운운 하는 것은 과잉해석이다. 왜냐하면 스이고 11년條의 이 기사는 동시에「傳曆」10년 4월條의 다음과 같은 기사와 관련지어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4월條에는

來目皇子倒筑紫, 臥病不進, 太子聞之, 謂左右 曰, 新羅奴等厭魅將軍

으로 되어 있다. 구메(來目)皇子가 신라인에 의해 저주를 받았는지 어땠는지가 의문인데,「傳曆」의 문맥에 따르면, 소또꾸(聖德)太子는 스이고 10년4월에 구메 皇子가 臥病했다고 듣고「新羅의 奴에 의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으며,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1년2월에 來目皇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新羅奴의 저주로 來目皇子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칼에 찔려 암살됐다는 것은「傳曆」의 기사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이「저주」라는 것도 日本書紀에는 스이고11년 2월 丙子條에「來目皇子, 薨於筑紫」라고만 되어있기 때문에「傳曆」의 潤色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저주로 사람을 죽인다는 呪法은, 일본에서는 대개 奈良시대 후기 경에 시작되었으며 平安시대에 들어와 유행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이러한 呪法의 유행에 대한 기록은 소상한 것이 없는데,「傳曆」의 성립이 平安시대 중기라고 할 수 있는 延喜17년(917년)인 것을 감안하면, 앞서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奈良시대말 이후에 성립.부가된 說話로 생각된다. 이 說話로부터 來目皇子의 죽음의 진상을 찾는다는 것은 공연한 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6. 間諜으로 국사에 분주했던 三國의 승려들

삼국시대 간첩의 사례를 조사하면서 일본과의 國情이나 政情의 차이를 실감하게 되는데, 삼국의 간첩들을 보면, 승려들이 간첩의 역할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보인다.

우선 앞서 얘기한 고구려 첩자인「浮屠德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浮屠나 浮圖 둘 다 승려를 의미함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둘째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낸 첩자는「浮屠道琳」이다. 셋째로 신라의 居柒夫는 고구려에 잠입할 때「머리를 깎고 중의 형색을 하고」있다. 넷째로 고구려의 浮屠信誠은 스스로 첩자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첩자를 이용하여 唐에 내응하고 있다. 승려와 간첩의 관계가 예사롭지가 않다.

승려는 出家.脫俗을 本旨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와 담을 쌓는 것이 본래의 모습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낯선 타국에 가도 의심받을 염려가 적다. 간첩에 승려 또는 승려의 형색을 한 경우가 적지 않는 것은 이러한 특색을 역이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간첩들 가운데는 일시적으로 승려의 형색으로 치장한 경우가 많았다.「四方을 觀遊하는」편의를 이용하여 승려의 형색을 하고 고구려에 잠행한 居柒夫의 경우가 그 사례이다. 「浮屠德昌」도 어쩌면 일시적인 승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려형색을 한 간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浮屠道琳」은 어느 정도 승려생활을 한 후에 간첩을 지원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일은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장수왕의 요구에 응해 간첩이 되기로 작정했을 때의 그의 말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어리석은 소승은 이미 도를 깨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여 국은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발 대왕께서는 신을 그로 해서 불초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시고 이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이용토록 하옵소서. 신명을 다 바치겠나이다."

물론 道琳이 이런 말을 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승려도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고대 삼국시대 佛徒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비단 간첩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무렵엔 장군 또는 군인이 된 승려들도 있었다는 것도 참고가 될 것이다. 668년 고구려가 唐의 공격을 받아 망했을 때 승려 信誠이 대장 또는 捉兵總督으로서 男建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던 일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660년 백제의 부여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일단 망한 후 遺臣인 鬼室福信이 殘兵들을 규합하여 백제부흥을 위해 분투했을 때, 백제 승려 道琛이 함께 싸웠다는 사실이 舊唐書, 新唐書와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기록돼 있다.

신라의 驟徒 이야기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태종무열왕 때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출가하여 道玉이란 승려가 되었다가 훗날 武人이 되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다. 三國史記 列傳 第七에 보이는 인물인데 군인이 되는 사정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에는 중이 된 자는 첫째는 術業이 정통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여야 하고, 다음은 道를 일으키고 이를 잘 활용하여 남을 유익하게 하여야 된다는데, 나 같은 사람은 모양만 중일뿐이지 한 가지의 선행도 취할만한 것이 없었으니 차라리 군사를 따라가서 몸을 죽여 國恩을 갚는 것만 같지 못하겠다."

이것도 三國史記 내지 그 原史料 編者의 潤色이 있었을 테지만, 前述한 浮屠道琳이 간첩을 지망했을 때의 말과 비교해 보면 그 사이에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종교에 우선한다는 생각이다. 승려 信誠이 평양성에서 농성했던 것도, 승려 道琛이 백제부흥군에 참여했던 것도 꼭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6, 7세기 삼국시대의 불교가 온통 국가불교 일색이지는 않았겠지만,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에다 隋.唐제국으로부터 큰 압력을 받았다는 현실 때문에 불도들도 나라에 헌신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승려들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얘기한 驟徒나 道琳의 말은 단순히 三國史記의 文飾이나 作爲가 아니라 당시의 佛家思想의 일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신라의 승려 圓光이 신라왕으로부터 隋에 兵을 청원하는 上奏文을 초안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했던 말이다. 圓光은 三國史記 卷四, 新羅本紀 眞平王 十一年(589년)條에

春三月 圓光法師入 陣求法(춘 3월에 원광법사가 陣나라에 들어가서 佛法을 구하였다)

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陣나라는 이 해 정월에 隋에 멸망당했기 때문에 圓光이 陣에 갔을 때는 이미 隋의 천하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 후 隋에 머물며 수업하기 만 11년, 진평왕 22년에 신라가 隋에 보낸 朝聘使를 따라 귀국한다. 일본이 처음으로 遣隋使를 파견했던 서기 600년경이다. 이 무렵부터 신라는 고구려.백제 두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일본의 압력을 받기도 하여 國勢艱難의 시기가 계속된다. 진평왕 30년(608년)에 들어와 왕은「隋에 援兵을 요청하여 고구려를 정벌키로 하고 圓光에게 명하여 乞師表를 짓도록」했다.
이에 대해 圓光은 이렇게 대답했다.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沙門의 할 행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貧道가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수초<곡식>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이 명령을 좇지 않으오리까?)

그리하여「곧 불러주는 내용을 듣고」表文을 기초하여 올렸다. 양심적인 승려가 본의 아니게 佛道에 어긋나게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심사가 간결하게 드러나 있다. 佛道로서는 타락한 것이지만 국가에 봉사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군인이 되고 간첩이 되어 국사에 분주했던 승려들도 간단히 말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스이고朝 전후에 간혹 일본에 건너오는 三國의 승려들 중에는 간첩의 임무를 띄고 오는 경우가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스시윤(崇峻)원년(588년)에 백제에서 惠總, 令斤, 惠X, 聆照, 惠衆, 惠宿, 道巖, 令介등이 건너오고, 고구려에서 僧隆, 雲聰이 건너왔다. 道를 전하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에 온 이들 승려들 가운데 간첩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고대의 정치사, 외교사의 냉엄한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주로 한국의 史料에서 보이는 고대한국의 간첩에 대한 소견을 밝혔다. 간첩의 모습들을 통해 일본과는 다른 6,7세기의 한국의 엄중한 정치정세의 일면을 탐구한 것인데, 한국사에 관한 필자의 조그마한 시론에 지나지 않는다. 부디 제현들의 비판을 바라마지 않는다.

불충분하지만 이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北村秀人, 中村圭爾, 龜井輝一郞 제씨 등과 함께 하는 조그마한 규모의 조선사연구회 덕분이다. 이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해마지 않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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