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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은 누구인가
 관리자  08-22 | VIEW : 5,301
[스페셜 리포트/고구려인은 누구인가①] 多민족 多문화의 세계제국 만든 사람들


윤명철 동국대 사학과 교수


혈통·언어·문화·신앙 등은 백제·신라인과 차이 없어
多민족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해 대륙적 기질 발달

고구려 사람들은 백제·신라 사람은 물론이고 부여·가야·왜(倭) 사람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혈통도, 언어도, 문화도, 신앙도 대체로 유사하다. 그래도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주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각각 누리는 자연환경을 골고루 체험하고 있었고, 이질적인 종족들을 자국 국민으로 새로 편입시켜 상생하게끔 만들었다. 그들의 문화를 고구려 문화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보편적 문화도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에서는 특이하게 다종족적이고 다문화적인 세계국가를 만들고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방에 포위된 채, 특히 군사력이 강한 북방 유목종족들이나 강대한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줄기차게 공방전을 펼치면서 700년 이상 강국으로 발전한 나라의 국민들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태어나 자라고 죽은 곳의 자연환경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평범하지 않다. 북부여와 동부여의 초원 지대를 근거지로 국가를 세운 추모(주몽)왕은 초기에는 압록강 중류 지역의 산악과 강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민족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점차 영토를 넓혀 가면서 더욱 색다른 자연환경을 그들의 삶과 인식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미 6대 태조대왕 때부터 요동 지방에 대해 강한 의지를 지니고 공격했다. 그러다 미천왕과 고국원왕을 거치며 성공과 좌절을 거듭하다 마침내 광개토대왕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전방위 공략 작전을 펼쳐 영토를 넓혔다.

장수왕 때는 남진 정책을 확고하게 추진하는 한편 동몽고 지역에 대한 영향권을 강화했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자연환경대에 속하게 되었다. 송화강과 두만강·혼하·요하·눈(嫩)강 등 길고 수량이 많은 큰 강들이 영토 내부를 흘렀다. 산들은 한반도 중부 이북과 함께 연해주 지역과 흥안령의 대삼림 등으로 확대됐다.

이어 선비족을 몰아내고 요동 지방의 대평원을 차지했고, 북방의 초원 지대와 남쪽 한강 유역의 비옥한 농토들을 새로 얻었다. 기후도 다양해져 건조한 초원, 추운 삼림지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온대 등을 동시에 소유하게 됐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식생대도 다양해졌다. 생산양식이나 생활방식, 통치방식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집단의 세계관·신앙 등 문화도 역시 달라졌다. 당연히 사람들의 사고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농경문화는 전보다 더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새로 확보한 황해도 지역은 물론 한강 유역의 경기만 지역과 요동 반도 남단은 농사가 발전한 지역이었고, 부여의 옛 땅인 송요(松遼) 평원 역시 농경에 적합했다. 그래서 고구려에는 창고인 부경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농경과 관련된 각종 의례와 신앙들이 발전했다.

그들은 시조의 어머니이면서 지모신(地母神)인 유화(柳化)부인을 신으로 숭배했다. 동맹제에서 모신 수신(隧神)은 곡식신이었다. 백제나 신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편 북방과 서북방으로는 유목문화의 영향을 더 광범위하고 강하게 받았다. 고구려가 점령한 북류 송화강 하류와 눈(嫩)강 하류 및 동류 송화강이 만나는 지역은 끝없는 초원 지대로 일찍부터 유목문화가 발달했다.

여기에 계단(契丹)·선비(鮮卑)를 거쳐 유연(柔然)·돌궐(突厥) 등과 갈등을 벌이면서 유목문화의 성격을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동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은 동류 송화강 일부와 우수리강이 흐르고 삼림이 무성하게 발달해 고기잡이와 수렵으로 생활했다.

해양문화도 발달해 전기부터 동해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고 소금을 생산했으며, 고래를 잡는(민중왕·서천왕) 등 근해어업을 발전시켰다. 태조대왕 시대에는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西安平, 현재 단동 지역)을 공격하면서 황해로 진출을 시도해 미천왕 시대에 마침내 숙원을 풀었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요동 반도를 영토로 만든 이후에는 황해 중부 이북은 물론 요동만도 고구려의 내해(內海)가 되었으므로 해양문화가 더욱 발달했다.

이 같은 해양 능력을 토대로 양자강 유역의 송나라 및 남조의 여러 국가들과 빈번하게 교섭해 남방문화가 들어왔다. 또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로 진출해 문화 교류와 교섭을 하였다.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교차점

이렇게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모든 다양한 문화가 한 군데로 모인 집결지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는 군인이나 정치인들 외에 토지를 일구는 농사꾼과 양 떼·말 떼를 모는 목동, 바다에서 고래와 물고기를 낚는 어부,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천렵꾼, 숲 속을 뛰면서 산짐승들을 잡아 모피를 생산하는 사냥꾼들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 간에 다양한 물건들을 교환해 주기 위해 오가는 상인들도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누릴 줄 아는 사람으로 적응했을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백제나 신라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을 보고 겪었다. 심심산골에서 짐승을 쫓으며 살아 가는 사람과 끝없는 초원을 말을 타고 달린 사람의 세계관은 같을 수 없다. 망망대해의 밤바다에서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 사람과 부드러운 산자락과 강물이 흘러 가는 들판에서 저녁 노을을 본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누리는 방식에서 같을 수 없다.

고구려인들은 초원의 풀내음이 밴 말 떼들과 산 속을 헤매던 모피들을 배에 싣고 해풍이 넘실대는 바다를 항해해 먼 강남 지방에 팔았다. 고구려인들의 신화와 고분 벽화에서 하늘을 신령스럽게 여기고, 기마문화를 강조하고, 별자리들을 집요하게 그린 이러한 삶의 경험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백제·신라 사람들과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 그들은 우리 한민족 공동체의 원형이 된 사람들 외에도 주변에 살았던 다른 종족들까지 받아들여 또 다른 우리의 내용을 채웠다. 발전기에 이르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자 그 지역에 살던 다양한 종족들은 당연히 고구려라는 나라의 정치 체제 안에 흡수되었다.

남쪽의 백제· 신라, 북방의 동부여·북부여 등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땅을 빼앗기거나 흡수됐다. 이들은 비록 국가체제는 달랐지만 종족은 동일했다. 여기에 화북의 한족들이나 낙랑·대방군의 주민들도 고구려에 흡수됐다. 또한 시라무렌 유역의 거란계 북방 종족들과 요하 유역에 있었던 연의 선비족들도 고구려 영역 안에 흡수됐다. 동몽고 지역에 살았던 지두우족도 일부는 편입됐을 것이다. 동만주와 연해주의 넓은 지역에 거주하던 말갈계는 일찍부터 고구려의 강력한 구성원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족을 중핵으로 삼았지만 일종의 다종족적인 국가가 되었고, 이것은 분명히 백제·신라와는 다른 점이다. 고구려인들은 일찍이 겪어 보지 못했던 일종의 거대한 제국이 되어 문화와 종족의 용광로가 돼 버렸다. 따라서 문화도, 세계관도, 가치관도, 삶의 양식도, 통치 방식도, 경제 행위도 달라졌다.

그 달라짐 속에서 종족 간에는 계급적 갈등이 생기고,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종족적 소외감이 넘실대고, 국가의 정체에 대한 혼란이 극심해졌을 것이다. 또 불교나 도교, 오행 사상 등 신종교와 사상을 받아들이는 와중에 외래문화에 매몰돼 주체성을 상실할 가능성 역시 많았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필요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아의 확인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을 담당해 나간 주체는 원고구려인들이었다. 그들은 개방적 태도로 다양한 외부문화를 수용해 고유문화로 흡수했다. 그리고 이것을 용해시켜 새로운 형태의 고구려문화를 만들어 냈고, 질 높은 문화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그래서 문화 현상, 특히 고분 벽화에는 도교나 불교적 요소와 함께 단군신화적 요소가 공존하고, 한족 및 북위, 중앙아시아의 영향이 함께 나타난다. 또 더욱 구체적으로 천손 의식을 강조해 주변 세계와 차별성을 꾀하면서 자신들이 부여계 종족의 적장자라는 정통성을 주장하는 일에 비중을 두었다. 건국신화나 광개토왕릉비에는 독자적인 연호와 함께 대왕·천제·황천지자 등의 표현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노력을 기울여 세계국가 내부에서 자기 존재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계발하고,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을 완수해 고구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든 것이다.

강인한 성격, 죽음에 초연

고구려 사람들의 정치 환경은 백제나 신라와 달랐다. 고구려인들은 2대 유리왕 때의 기록에서 보듯 처음부터 이민족과 전쟁을 벌였다. 한의 잔재 세력들, 위·선비 계통의 연, 거란·돌궐·말갈 등의 북방종족 심지어 남쪽의 송과도 치열하게 싸웠다. 또한 산동의 남연(南燕), 화북의 후조(後趙), 강남의 오·송 등과 외교 교섭 및 교역을 했다. 전쟁의 규모도 백제나 신라가 겪었던 수준이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수만 명의 군사가 동원됐으며 동천왕 때는 철기병(鐵騎兵) 수천 명이 작전을 개시한 경우도 있다.

후기에 들어 고구려와 수·당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612년에 감행된 수 양제의 침입은 정병만 113만3,800명이고, 동원된 선박은 수백 척이었다. 전장도 들판이나 야산이 아닌 대평원과 바다 등 전체였다.

이민족과 대결하면서 긴장과 실존의 극한상황을 때때로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다른 성격과 능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나라를 운영해야 했으므로 삶에 적극적이었다. 바보 온달을 대장군으로 만든 평강공주의 예를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들인가를 알 수 있다.

벽화에 묘사된 그들의 정신은 쌍영총·무용총 등에서 보이는 날렵한 사냥 그림, 삼실총 등에 나타난 호쾌한 무사그림, 그 외 무용총·각저총 등에 묘사된 활달한 동작의 춤과 화려한 옷들, 덕흥리고분에 그려진 당당한 군사들의 행렬도 등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역동성에 질려 중국인들은 ‘고구려인들은 기력이 있고 싸움을 즐긴다’고 기록했다.

고구려인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한 자세를 지녔던 것 같다. 그들은 탄생과 동시에 수의를 만들었고, 죽으면 무덤을 호화스럽게 꾸몄다. 아마도 삶과 죽음을 일체화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해명(解明)태자·호동왕자·밀우·유유·양만춘처럼 생명을 걸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이 나타나 국가를 구한 것이다. 온달장군은 죽어서도 시신이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국토 수복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셜 리포트/고구려인은 누구인가②] 기층민중은 남쪽에서 온 농경민족

한반도와 중국 남부, 일본 연결 가능성… 두개골, 서양인과 비슷한 長頭型

김병호 남방문화전문가·소설가


고구려 고분 각저총에 그려져 있는 씨름을 하는 고구려인들. 부리부리한 눈과 큼지막한 코가 서양인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 논란이 되고 있다.

고 구려인들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 동안 세월이 너무 흘러 버렸고 남아 있는 자료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과연 체질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고구려의 극히 일부 계층은 북방 민족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일반 기층 민중은 동북아시아의 주변 민족과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고구려 민족의 시원(始原)이라고 할 수 있는 인종 집단은 우리의 남서방(南西方)인 인도 등지에서 남부 중국을 경유해 간헐적으로 한반도와 일본 큐슈, 중국 요녕성 등지로 이동한 농경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와 중국 남부,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지금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과거에는 서로 붙어 있었다. 지구가 온난해져 극 지방의 얼음이 녹으면서 바다의 수위가 올라가자 붙어 있던 땅이 서로 떨어졌다. 반면 다시 빙하기가 찾아오면 바다 수위가 낮아지고, 떨어졌던 땅이 다시 합쳐지는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70만∼60만년 전, 55만∼45만년 전, 35만∼32만년 전, 24만∼21만년 전, 18만∼12만년 전, 7만∼7만5,000년 전, 5만8,000∼3만8,000년 전, 3만2,000∼2만8,000년 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한반도가 중국 남부 및 일본 열도와 붙어 있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육로 ·해류 이용해 한반도로 이동

따라서 고구려인들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집단은 남서쪽에서 육지로 이동해 왔거나 북상하는 쿠로시오(黑潮) 해류를 이용해 한반도·큐슈·요녕성 등지의 해안 지방으로 상륙했을 것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 남하한 북방 민족과 섞이고, 또 고구려 건국 이후 수차례에 걸쳐 난을 피해 왔거나,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전쟁 때 포로가 되어 돌아가지 못한 중국의 한족(漢族)들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인들에게 동화돼 고구려 민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반도에서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70만∼60만년 전이다. 그들은 약 20만년 전부터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간단한 어휘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했다. 구석기 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나·너·하나·둘·셋·해·바다와 같은 우리말의 원시 어휘는 대부분 소아시아 및 인도 지방과 연결된다. 어법(語法)도 팔리어·드라비다어·아삼어·미얀마어 등과 유사성을 보인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면 한반도에 살았던 최초의 인간 집단은 한반도의 남서쪽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상정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고고학 지도까지 바꿔 놓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전곡리의 한탄강 주변에서 발굴된 주먹도끼다. 이 주먹도끼는 구석기 시대 서양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것인데, 어찌해서 멀고 먼 동북아시아의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일까.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서양 인종이었고, 그들이 주변의 이질적 민족들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말인가.

고대 우리 민족 구성원 가운데 하나였던 일본의 아이누족도 3만∼2만년 전에 건너온 서양 인종이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것은 고구려 지역인 평안도에서 발견된 약 1만년 전인 구석기 시대 말엽고대인의 인골(人骨)이다. 그들은 ‘승리산인’과 ‘만달인’으로 명명되었는데, 놀랍게도 서양인과 비슷한 장두형(長頭型)의 두개골을 갖고 있다.

만약 다른 장소로 이동해 가지 않았다면 그들이 바로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시초가 되었을 것이다(북한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현재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주장한다).

그 이후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 고구려 지역에서 비로소 중두형(中頭型) 두개골이 나타난다. 이것은 북방 민족의 남하를 추측하게 해 준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단두형(短頭型)이 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남아인들과의 접촉과 고려말 124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몽골의 직·간접 지배 시기에 발생했던 엄청난 규모의 강제적 혼혈의 결과일 수 있다.

고대 사서인 중국의 25사서 가운데 고구려인들의 체질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고구려인들은 힘이 세고 용맹스러웠다’고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고구려와 백제·부여 사람들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는데 ‘후한서’ ‘부여조’에는 ‘그 사람들은 추하고 크고 씩씩하고 용맹스럽다’고 했다. 또 ‘후한서’의 ‘한(韓)전’에 의하면 ‘사람들의 모양은 모두 키가 크고 몸이 장대하며 머리털이 아름답다’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인들은 부여나 훗날 백제인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한(韓)족처럼 체격이 커서 주변의 중국인이나 북방 민족과 차별화됐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그처럼 체격이 컸던 것은 그 때까지 서방적 유전 요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더욱 확실한 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인의 모습이다. 벽화를 보면 지배 계층의 상당수는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이나 북방 민족이어서 그렇다는 일방적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고대 수메르인들도 동양인의 모습이었고, 동남아와 동부 인도인들 가운데도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이른바 ‘남부 몽골로이드’ 계통 사람들인 것이다.

더구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서양인의 얼굴도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각저총이다. 우리나라 일부 학계에서는 큰 코의 서양인이 고구려인임을 용납할 수 없었던지 ‘각저총의 씨름꾼들은 시범 경기를 하는 서양인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을 초월한 비약적 발상이다. 비행기도, 여객선도 없던 그 시절 서양인들이 어떻게 아시아 끝머리인 한반도까지 와서 씨름 경기를 한다는 말인가. 벽화 속의 주인공은 주먹도끼를 사용하고 장두형 머리를 지녔던 조상들의 체질적 흔적을 지니고 있던 일부 토착 고구려인들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역사상 우리의 체질이 가장 많이 변한 시기는 124년이라는 장기간의 몽골 지배 시기였다. 그 무렵 우리는 몽골의 언어와 민속을 차용했고, 15만명이 넘는 처녀들이 강제로 끌려가 그네들의 자식을 낳았다. 한편 국내에서도 엄청난 혼혈을 강요당했다.

학계 일부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즐문토기, 고구려 시대의 적석묘, 알타이어족설 등을 앞세워 우리 민족의 시원이 북방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방의 토기 등은 제작 방법이 우리 것과 다르다. 설혹 같다고 해도 고고학적 연대가 우리 것이 더 빠르다. 따라서 우리의 것이 북방으로 전파됐다고 생각해야 옳다.

알타이어족설이 허구라는 주장도 만만찮은 실정이다. 더욱이 가장 오래 된 청동기는 한반도 남단인 전남 영암의 것이고, 최근 제주도 남단에서 인간의 발자국 화석까지 발견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부 학자들은 고증이 빈약함에도 북방 유목 민족이 우리 민족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북방 민족의 후예라며 자부심을 갖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남서방 민족이 인더스와 갠지스 문명을 창출하고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일굴 당시 북방 민족은 방에서 대변을 보고, 소변으로 세수를 하는 등 지극히 야만적이었다. 고대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은 가장 깨끗했던 반면, 숙신 등 북방 민족은 가장 더럽게 생활했다고 한다.

언어와 설화, 남방문화 특성 지녀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궁전에서 발견된 벽화. 오른쪽에 깃털 장식을 한 두 사람이 당시 고구려에서 파견된 사신이다.
고구려인들의 탄생설화는 중국인 또는 중국인에 동화된 북방 민족들의 설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고구려 민족의 탄생설화의 특징을 살펴보자.

고구려인들은 자기네들의 시조인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卵生)설화를 채택했다. 부여의 탄생설화는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天孫)설화다. 이러한 고구려와 부여의 설화는 같은 고조선의 환웅 천왕을 주인공으로 한 천손설화, 신라와 가락국의 난생설화 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난생설화 또는 천손설화는 남서방 지역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북방 민족의 동물설화(사슴·이리 등)나 변변한 탄생설화조차 없는 중국인들과 확연히 다르다. 이것은 고구려인의 뿌리가 중국인 또는 중국인과 연결된 북방 민족이 결코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다음은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언어가 어떠했는지 추적해 보자. 우리 민족은 유난히 고대 자료가 빈약하다. 고대 자료가 많았음에도 1,000여 차례에 이르는 외세의 침략 등으로 소멸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언어의 특성은 부득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등을 토대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어 가운데 중세 언어와 연결지을 수 있는 것은 전체의 30% 정도다. 인간의 언어가 의외로 빠르게 변화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 중세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감안하면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의 모체가 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여기서는 지명(地名)과 수사(數詞)를 중심으로 고구려어의 특징을 살펴 보자.

고구려의 지명은 대개 ‘부리’ ‘골’ ‘라’로 대표된다. ‘평양성’(平壤城)은 ‘불이성’이라고도 불렸는데, 고구려를 이은 발해에도 ‘부리’라는 지명이 있었다. 이 같은 지명은 백제의 ‘소부리’(부여), 신라의 ‘서라벌’(경주) 등과 뿌리가 같은 것으로, 삼국이 같은 민족이었음을 나타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부리’의 어원은 유럽의 ‘폴’ ‘풀’, 인도의 ‘푸르’, 태국의 ‘부리’, 우리나라의 ‘부리’로 이어지는데, 이 지역에는 공통적으로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도 특징이다.

‘골’과 ‘라’도 동북아시아에서는 우리 민족만 사용했던 고유한 지명이다. 특히 ‘라’는 당시 우리 민족의 태양 숭배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골’은 인도의 ‘갈’과 ‘골’에서 그리고 ‘라’는 태양을 상징했던 중동 지방의 ‘라’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학계에서 ‘라’를 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라’는 ‘펴라’(평양) ‘새라’(신라) ‘구다라’(백제) ‘탐라’(제주도) ‘하슬라’(강릉)‘나라’(일본) 등 다양한 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골’은 힌디어로 ‘치안이 확보된 읍락’ 또는 ‘평지보다 약간 높은 산골’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말의 ‘골’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구려와 백제·신라는 더러 원수처럼 죽기살기로 싸우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모두 종족적으로 같은 핏줄이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이 용을 섬기고, 북방 민족들이 사슴 같은 동물을 섬길 때 고구려인들은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천신(天神)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매년 10월 ‘동맹’이라는 제천 의식을 거국적으로 거행했다. 이 밖에도 소아시아와 인도 등지와 연관이 있는 태양 숭배도 고구려인들의 보편적 신앙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주신(主神)은 여신이었으니, 이러한 특징은 일본 및 남서방과 일치한다.

고구려인들의 생업은 농사였지만, 풍족하지는 못했다. 이 같은 사실을 ‘후한서’(後漢書)는 ‘밭이 적어 아무리 노력해 농사를 지어도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 때문에 그 지방 풍속은 먹는 것을 절약하고 집만 호화롭게 짓는다’고 적고 있다.

우리 민족은 신석기 시대 이후 줄곧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다. 고구려인들은 신라·백제인들과 함께 인도의 아삼, 남부 중국 등을 거쳐 온 순수 농경민족의 후예였던 것이다. 고구려 민족이 북방 민족처럼 유목을 했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고구려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양이나 말 기르기를 주업으로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전통은 신석기 시대부터 내려왔다. 고조선 시대의 ‘8조금법’ 중에는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변상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곧, 유목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이나 말이 아닌 곡식으로 변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를 오도하게 만든 두 가지 허상이 존재해 왔다. 하나는 몽골반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마민족설이다. 몽골반점은 동아시아의 2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 특징에 지나지 않는다. 아프리카 대륙과 일부 도서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인들이 일찍부터 말을 탔으므로 사실상 전 세계 민족 모두 기마민족이었다. 중국의 삼국시대 때 여포가 탔던 적토마를 생각해 보라. 중국인들은 기원전부터 이미 기마전(騎馬戰)을 할 정도였지만, 자신들을 기마민족이라며 차별화하지 않았다.

설혹 고구려인들이 기마민족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중국이나 이웃 민족들처럼 북방과 연결된 기마민족은 아니었다. 고구려 말의 주종은 산악지대를 오르내릴 수 있는 과하마였다.

키가 고작 3자밖에 안 되는 과하마는 북방 지역에는 없었다. 반면 인도 서쪽부터 파키스탄·이란·중동 등지에서는 지금도 보편적으로 사육된다. 또한 ‘말’(馬)이라는 어휘는 중세 몽골과 중국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 이전의 삼국시대 때는 ‘가라’라고 불렀다. 이 표현은 지금도 방글라데시와 인도·이란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다. 소아시아인들의 기마 실력은 결코 동양인들에 뒤지지 않았다.

탈라스 전투에서 모하마드 이븐 살리가 이끈 아랍 연합군 기마병단은 고선지 장군의 기마군을 패배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일부 학자들이 고증도 빈약한 북방의 기마민족, 알타이어족설 등을 계속 주장하자 중국이 우리의 역량을 가볍게 여기고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무리한 도발을 해 오는 것 아닐까.

고구려인들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민속적 특징 가운데 놀이문화를 살펴보자. 고구려인들이 즐겨 했던 놀이는 가무(歌舞) 외에 씨름·줄타기·장대타기 등이 있다. 고구려의 것과 비슷한 씨름은 스페인과 스위스, 중부 아프리카 등에서도 목격된다. 고구려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씨름 경기는 인도의 아삼 지방에서 지금도 거국적인 행사로 열린다. 샅바도 있고, 상대방을 거꾸러뜨리려고 애 쓰는 모습이 우리의 씨름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고구려 시대의 줄타기와 장대타기 등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대표적 놀이로 내려오다 오늘날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러나 이들 놀이는 자치기와 비석치기, 팔방놀이, 공기놀이 등과 함께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민속 놀이다. 원래 농경민족은 땅 위에서 하는 놀이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민족에게는 남방문화의 특성이 많다. 이것은 한족이 중심인 중국은 물론 수시로 중국을 지배했던 북방 민족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며, 고구려가 결코 중국일 수 없는 또 다른 근거가 될 것이다.  
  




[스페셜 리포트/고구려인은 누구인가③] “고구려인은 療東人”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다 … 독자 언어와 문화, 역사의식 가져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




고구려인들의 주무대였던 요동 벌판.


한 국’이나 ‘중국’ 등의 나라의 역사적 개념은 특정한 생활 공간과 고유한 문화, 동류 의식을 갖는 역사적 집단, 계승 관계를 갖는 일련의 국가 체제 등의 요소를 갖춘 역사 공동체를 뜻한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측면에서 고구려가 한국이나 중국 혹은 제3의 다른 역사 공동체들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었나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공간적 측면부터 살펴 보자. 국내성, 즉 집안(輯安) 방면에 중심부를 두고 있었던 고구려는 5세기 초에 요하(療河) 중류 유역을 점거했다. 이로 인해 수(隋)·당(唐) 시대의 중국인은 고구려를 ‘요동’이라고 불렀고, 고구려 정벌을 가리켜 ‘정요’(征療)라고 했다. 당시의 고구려인들도 ‘요동인’(療東人)이라고 자칭했다.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요동은 요동군이나 요동성을 가리키는 좁은 개념과, 산해관 동쪽에서 한반도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개념이 함께 존재했다. 수·당 대에는 후자가 일반화되었다. 그것은 고구려 국가의 영토 범위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후 고구려의 영토는 한국의 북부 일대를 가리키게 되었다.

고구려는 여러 계통의 인적 집단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그러나 그 주축이 된 인적집단은 맥인(貊人)이었다. 고구려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수맥(大水貊)과 소수맥(小水貊), 양맥(梁貊) 등 여러 맥계 집단을 통합했다. 여기에 다시 예계(濊系) 여러 집단과 말갈(靺鞨) 등이 섞이고, 천도 이후에는 한계(韓系)의 여러 집단이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 맥·예계 및 말갈 등은 모두 요동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한계는 한반도 중남부에 분포했다. 따라서 고구려인은 중국인이라는 동류 의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한국인과도 천도 이전에는 동류 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 양식에서도 초기 고구려의 문화는 중국이나 한국과 뚜렷이 구분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기록된 고구려의 자연·지리환경과 산업, 관제와 국가 조직, 신앙과 법속, 풍습과 의복 등은 모두 중국이나 한국의 문화와 매우 달랐다.

고구려가 후기에 이르러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한국의 일부를 통합한 뒤에는 한국문화와 융합도 상당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인이 창조하고 향유한 문화 양식은 중국인이나 한국인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특히 고구려 무덤의 축조 양식이나 부장품의 내용은 고유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고구려의 언어는 중국의 한어(漢語)와 전혀 다른 계통에 속하며, 한국의 언어와도 달랐다. 백제와 신라는 모두 삼한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동일한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고구려의 언어는 백제나 신라의 언어와 달랐다. 특히 평양 천도 이전에는 퉁구스 계통의 독자적 언어를 사용했으며, 천도 이후에야 한국어 요소가 고구려어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고구려 언어의 계통적 특성은 고구려와 중국, 고구려와 한국의 관계를 좀 더 명료하게 보여 준다.

역사적 경험에서도 고구려인은 중국인이나 한국인과 달랐다. 고구려인은 중국에서 성립된 어떠한 국가들, 예를 들어 한(漢)이나 조위(曹魏)·서진(西晉)·북위(北魏)·북제(北齊)·수·당 등의 직접적 지배를 받지 않았다. 삼한 연맹체나 백제·신라 등 한국 국가들의 정치적 지배를 받은 적도 없다.

한국 정치 지배 받지 않아


갈림성 집안에 있는 국내성 서벽. 최근 복원된 모습이다.
오히려 고구려는 요동에서 장기간 존속했던 고조선이나 부여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고구려인 가운데는 조선의 후예나 부여의 유민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천도 이후 고구려가 한국의 일부를 지배함으로써 한국인과 고구려인은 역사적 경험을 함께 나누게 되었을 뿐이다.

역사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동류 의식과 역사 의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였는지, 한국의 일부였는지 알 수 있는 가장 명확한 기준은 고구려인이 중국인 또는 한국인이라는 자의식을 표명한 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고구려인과 동류 의식을 갖고 있었는가도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과 고구려인이 동류 의식을 가졌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중국인들이 고구려인을 가리켜 ‘오군삼한’(五郡三韓)인으로 지칭한 자료가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고구려가 중국인들에게 5군(요동군·낙랑군·현도군 등 5군)과 삼한, 즉 한국의 통합 국가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인은 부여의 건국 신화를 계승했고 기자신(箕子神)을 설정해 제사하는 등 기자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 의식을 갖고 있었다.

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발해인이 다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명해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발해로 이어지는 요동사적 역사 의식을 형성했다. 이처럼 고구려인은 중국인이나 한국인과 생활 공간을 함께 하지 않았으며, 동류 의식도 갖지 않았고, 역사 의식이나 문화 양식·언어, 역사적 경험 등도 달리했다.

그들은 요동 고유의 생활 공간과 문화 양식과 언어, 역사적 경험, 동류 의식과 역사 의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이나 한국이 아닌 요동에서 출현한 요동 국가였다.  




[스페셜 리포트/고구려인은 누구인가④] 무엇을 먹고,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강영경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강사




안악3호분 주인공상. 4명의 신하가 가운데 인물을 향해 무슨 보고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실용적인 옷과 고기·술 즐기고
온돌 난방에 돌기둥 세운 목조 가옥에서 살아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몹시 궁금하다. 다행히 그들이 직접 그린 벽화가 고분 속에 남아 있어 조금이나마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의생활부터 살펴보자.

옷은 더위와 추위를 막기 위해 입는다. 이러한 기본적 기능과 함께 고대 사회에서는 일정한 형식의 복식을 갖추는 것이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베나 비단, 동물의 가죽 등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뚜렷했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한 베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모피(毛皮)를 이용해 추위를 이겨냈다. 오늘날에도 최고의 옷감 가운데 하나인 비단옷도 입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모자도 썼다. 더위를 막으려면 햇볕을 가려 주는 챙이 필요하고, 추위를 막기 위해서는 귀까지 덮어 주는 형태의 모자가 유용하다. 그러나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모자는 이러한 모양새가 아니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은 내관과 외관을 갖추고 백라관(흰색 비단으로 만든 관)을 착용하고 있다. 말을 타고 있는 귀족들은 모자에 새의 깃을 높이 꽂고 있다. 이는 실용적으로 멀리서도 눈에 잘 띄도록 하기 위한 것일 수 있고, 새처럼 하늘을 마음껏 날기를 동경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이상(理想)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일반 평민들은 머리에 삼각형 모양의 고깔을 썼다. 고깔은 스스로를 크고 빛나게 보이기 위해 쓰는 모자였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도 자신의 존재를 크고 빛나게 보임으로써 당당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체의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실용적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신분과 이상과 자부심을 함께 상징하는 모자를 착용했던 것이다.

여성들은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기 위한 수건을 썼는데, 특히 결혼한 부인들은 아름답게 장식한 모자를 썼다.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에는 실용적이고 단정하면서도 검소한 복장을 했지만,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과 자수를 놓은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몄다.

5세기 중엽에 그려진 집안 지역의 장천1호분 벽화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인물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림 속에는 남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점무늬 옷을 입고 있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여럿이 모인 장소에서는 모두 자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귀천의 구분 없이 깨끗하게 하는 것을 스스로 기뻐했다’는 기록을 그림으로 보여 준다. 또한 그들의 평등 의식도 엿볼 수 있다.

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인들의 기본적인 복장은 깃과 소매에 선을 두르고 엉덩이를 덮는 긴 윗옷과 바지에 허리띠를 맨 형태다. ‘선’은 깃과 소매 등에 진한색 계통의 옷감을 덧댄 것으로, 이 곳은 자주 손이 가고 스치는 곳이기 때문에 나중에 더러워지거나 닳더라도 이 곳만 다시 바꿔 줌으로써 옷감을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색을 통해 단조로움을 피하고 조화로운 표현을 할 수 있는 미의식도 담을 수 있다. 남녀는 물론 귀족과 시종(侍從)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이 같은 형태의 옷을 입고 있다. 이는 활동하기에 편리하고 추위도 잘 막을 수 있으며 말을 타기에도 적합한 것이다.

여성들은 긴 주름치마와 두루마기도 입었다. 주름치마는 먼저 추위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수산리 벽화에는 주름마다 다양한 색을 입혀 화려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또한 주름치마는 너비가 넓어 말을 타기에 적합한 기능도 갖추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는 또 긴 소매 옷이 많이 그려져 있다. 긴 소매는 포갠 양손을 덮어 줌으로써 추위를 막아 준다. 또한 손을 옷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단정함과 겸양의 태도를 갖게 해 준다. 벽화 속의 무용수들도 이러한 긴 소매의 옷을 입었다. 춤출 때 이 소매를 펼치거나 모으고 휘저으면 천상(天上)으로 비상(飛上)하는 새의 날갯짓을 연상시키고,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듯 날렵하고 활달한 기상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목이 긴 장화를 신었다. 물론 목이 짧은 신도 신었다. 벽화에서는 목이 길거나 짧은 신에 모두 코가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오늘날 버선이나 고무신의 코가 솟은 모양새와 같다. 이는 발 모양을 예쁘게 표현해 주기도 하고, 말을 탈 때 신발이 말 안장에 잘 걸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감신총에는 긴 치마 위에 짧은 앞치마를 덧입은 그림이 있다. 앞치마에는 겹선을 두르고 허리끈을 뒤로 길게 늘임으로써 여인의 우아한 자태를 표현해 준다. 이러한 행주치마는 정장과 작업복 사이를 순발력 있게 전환시켜 주며, 옷의 더러움을 막아 주고, 돌도 나를 수 있으며, 장식적 효과까지 지닌 여러 기능의 여성 의류다. 이러한 행주치마를 이미 고구려 여성이 착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사람들의 의생활은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머리에 쓴 고깔과 새의 깃은 그들의 당당하고 신성한 자의식을 표현하며, 기마에 편리한 바지와 주름치마·코신 등은 고구려가 북방 계통의 수렵민 전통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농경 위주, 육류·어류도 즐겨


삼실총에서 발견된 우람한 모습의 고구려인(왼쪽 사진)/ 상투를 튼 고구려인. 뱀을 목에 감고 한손으로 천장을 떠 받치고 있다.
고구려는 추운 지역인 데다 산과 골짜기가 많아 좋은 밭이 드물었다. 농사를 짓더라도 풍족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때문에 음식을 아꼈다. 이 밖에 육류와 어류도 많이 먹었다. 음식이 부족한 중에도 부경(?京)이라는 곡식 저장고가 집집마다 있었다. 부경은 지면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땅의 냉기와 열기가 직접 전달되지 않았다. 여기에 바람도 잘 통해 곡물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 주는 기능도 갖추었다.

지금도 중국 집안 지역의 조선족 농가에는 부경과 비슷한 옥수수 저장고가 있다. 그 기둥에는 ‘식량만석’(食糧萬石) 등의 글이 흰 종이에 붓글씨로 씌어 있다. 이는 부경이 단순한 곡식 저장 창고가 아니라, 곡식이 만석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는 신성한 곳임을 말해 준다.

고구려인들이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보·준·뇌 등의 제기(祭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변’은 대나무로 만든 과일 담는 제기이며 ‘두’는 다리가 있고 뚜껑이 있는 고기 담는 제기다. ‘보’는 안은 둥글고 밖은 네모진 형태로 곡식을 담는 제기이고, ‘준’과 ‘뇌’는 술을 담는 그릇이다.

4세기께 만들어진 각저총의 벽화에는 높은 다리의 상에 음식이 가득 차려진 장면이 있다. 무용총 벽화에도 높은 다리의 상 위에 놓인 큰 그릇에 음식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이러한 그릇을 사용한 것은, 음식은 신이 주신 귀한 것이며 따라서 이를 먹는 행위도 신성한 행위로서 신에게 감사하며 신에게 먼저 바치고 신과 함께 공식(共食)하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부뚜막 위의 시루 같은 그릇에서 음식을 떠 유리 그릇에 담는 여인의 모습이 있다. 시루는 증기로 찌는 조리 그릇이다. 찰기가 없는 곡류도 떡처럼 먹기 좋은 상태로 조리할 수 있고, 음식이 그릇에 눌어 붙지 않아 곡식을 절약하기에도 유용한 조리 기구다. 벽화에는 고기 창고에 고기가 많이 그려져 있다. 이는 육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고구려인들이 북방 수렵인들의 전통을 계승했음을 알려 준다.

고대 사람들은 술을 가장 좋은 약으로 귀하게 여겼는데, 고구려 사람들도 술을 담가 먹기를 즐겼다. 술을 마실 때는 서로 권하고 사양하며 겸손하게 마심으로써 덕과 예를 드러냈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은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했다. 겨울에는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 난방을 하는 온돌 시설을 갖추고 살았다. 온돌은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효율적 열 관리 방법일 뿐 아니라 습기를 제거해 쾌적한 실내를 만들어 주고 화재로부터 안전한 고구려의 독창적 주거 시설이다.

고구려인들은 거주지의 좌우에 큰 집을 지어 그 곳에 귀신을 모시고 제사지냈다. 곧 돌아가신 조상들을 집 가까이에 모시고 살았다는 뜻이다. 고분 벽화에는 다양한 목조 가옥을 그렸으며, 고분 내부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목조 기둥과 돌기둥을 설치했다. 도리·공포·주공 등 다양한 목조 기둥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하기도 했다.

돌기둥에도 용·구름 등을 그리고 화려하게 채색했다. 이러한 기둥은 우주의 중심이며 하늘을 떠받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다양한 형태로 화려하게 장식한 목조 기둥과 돌기둥 등은 주거 공간을 안전하게 확보한다는 실용적 의미와 더불어 주거 공간이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도 지녔던 것으로 풀이된다.

실내는 화려한 장방(帳房)으로 보온과 장식을 했다. 쌍영총 벽화에는 목조 가옥 위에 이를 덮는 커다란 장방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장방은 몽골의 ‘겔’과 비슷한 것으로, 추울 때는 장막을 내리고 더울 때는 올림으로써 실내 온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가벼워 이동하기에도 편리하고 기동성도 확보할 수 있는 이 같은 구조는 전통적으로 북방 기마민족에게 적합한 주거 양식이었다. 그들은 평시에는 이러한 가옥에 살다 전쟁 때는 성 안으로 대피해 살았다.

결혼하면 수의 만들어 백년해로


각저총에서 발견된, 연지 찍고 바지 입은 여인(왼쪽 사진)/ 수산리 고분 벽화에서 나타난 간결하고도 우아한 고구려 여성의 옷차림을 복원해 만든 옷.
고구려인들은 자식을 원할 때 신에게 제례를 올렸다. 이러한 전통은 고조선의 웅녀가 ‘잉태가 있기를 원해 나무 아래서 주술을 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도 통한다. 그리고 생명의 잉태와 출산의 예시를 꿈을 통해 받기도 했다. 신은 직접 모습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태몽을 통해 예시해 주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출생은 신이 주관하며 신의 점지로 태어나 신의 가호 속에 자라는 신성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결혼 전에는 경당이라는 큰 집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무예를 닦았다. 이는 신라의 화랑과 같이 미성년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서로 인격을 도야하고 무예를 수련함으로써 문무를 겸비한 성인으로 성장했음을 알려 준다. 특히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것을 숭상했다. 그리하여 왕이 참석한 가운데 매년 봄·가을에 수렵 대회를 개최해 인재를 발탁했다. 온달이 이 때 발탁되었던 것으로 보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은 남녀가 서로 기뻐하는 것을 중시했다. 결혼할 때는 남자의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낼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보내지 않았다. 재물을 주고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고구려 시대의 결혼은 재물을 배제한 가운데 당사자들의 의사를 존중했음을 말해 준다. 결혼한 부부는 신혼 살림을 시작하면서 바로 수의(壽衣)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는 부부가 죽은 뒤에도 그 인연을 함께 이어가기를 원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장례는 후하게 예를 갖추어 지냈는데, 돌을 쌓아 묘역을 삼고 그 주변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줄지어 심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북방 지역의 침엽수로, 사철 잎을 바꾸지 않는 상록수다. 고대인들은 소나무와 잣나무를 변치 않는 늘 푸르른 마음을 지닌 나무로 인식했다. 묘역에 이를 심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후의 세계에서도 생전과 변함 없으라는 믿음과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묘 안에 화려한 벽화를 남긴 것을 보면 사후에도 생시와 같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숭모하는 사람이 죽으면 스스로 따라 죽는 경우도 있었다. 동천왕이 죽었을 때 자발적인 순사자(殉死者)들이 많아 그 시체를 모두 무덤으로 만들어 줄 수 없어 나무로 덮어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인들은 신이 점지해 준 신성한 존재로 태어나 신의 가호 속에 문무를 겸비한 성인으로 성장한 다음 서로 기뻐하는 사람과 결혼했음을 알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자신의 신분과 빛나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모자를 썼으며, 음식은 제기를 사용해 높이 쌓아 먹고, 하늘의 중심을 상징하는 기둥을 세우고 거주하는 등 신성한 자의식을 지닌 생활을 했다.

생을 마감할 때는 후손들의 애도 속에 예를 갖춘 후한 장례가 치러졌고, 후손들은 거주지 좌우에 큰 집을 만들어 조상신을 모시며 함께 살아간 것이 고구려인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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