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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1
 관리자  08-22 | VIEW : 2,370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1]
  
    
석굴암 호위보살상 좌우
바뀐 채 100년간 방치됐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석굴암은 석가세존이 상주하는 영산(靈山) 불국세계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이 부왕인 성덕왕(聖德王, 690년경∼737년)과 모후인 소덕왕후(炤德, 700년경∼724년)의 추복을 위해 부모의 왕릉이 모셔진 산자락의 주산(主山)인 토함산에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창건을 기획하여 불국사를 지을 때 석굴암도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으로 함께 지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의 ‘대성이 2세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이에 현생(現生)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였다. 또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해다 각각 머물러 살게 하였다. 성대하게 상설(像設; 예배를 위한 불보살상 등 조각상과 불사를 위한 각종 설비)을 베풀어서 길러준 노고에 보답하니 한 몸으로 2세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예전에도 듣기 어려웠던 일이니 보시를 잘한 영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하나의 큰 돌을 다듬어 감실 덮개로 삼으려 했더니 돌이 홀연 세 쪽으로 갈라졌다. 분하고 성이 나서 자는 척하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만들기를 끝마치고 돌아갔다. 대성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남쪽 잿마루로 달려 올라가서 향을 살라 천신에게 공양하였다. 그래서 그 땅을 일컬어 향령(香嶺)이라 한다.”

이로 보면 경덕왕이 토함산에 화엄불국사를 지어 화엄불국세계를 지상에 구현(具顯)해 내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을 때 벌써 그 설계도 속에 석굴암이 불국사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화엄불국사가 일체 경전에서 얘기하는 각종 불국세계의 총체적 집합체로서 전륜성왕으로 군림한 자신의 절대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석굴암은 전대의 전륜성왕으로 자신의 절대 왕권 기반을 마련해놓은 부왕 성덕왕과 모후 소덕왕후의 불변하는 근원적 권능을 상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도 김대성이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세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원적이고 불변적이며 신라 국토에 현실로 존재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에 합당한 부처님을 석굴암의 주불로 삼아 성덕왕의 모습으로 재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신라화엄종에서는 종조(宗祖) 의상대사(義湘, 625∼702년)가 문무왕 16년(676)에 그 근본사찰인 부석사를 세울 때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통이 세워져 있어 신라화엄종의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불변적인 요소를 지닌 아미타불상이 주불로 모셔질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님이 아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도하는 타방교주(他方敎主; 다른 지방의 교주)이시다. 그러니 신라 국토에 상주해야 한다는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가능성이 있는 부처님은 화엄불국세계의 구심점인 화엄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인데, 이 부처님은 법신불(法身佛)로 형상 없는 이념의 세계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주불이시니 현실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조건에 더욱 맞지 않는다.

이에 각종 불교 경전에 정통했던 경덕왕과 그의 측근 참모 내지 표훈, 신림 등 의상대사의 법통을 이은 신라화엄종 대덕들은 고심 끝에 석굴암의 주존을 기사굴산(耆山), 즉 영취산(靈鷲山) 석굴 속에 상주하여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고 있다는 석가세존을 택했던 듯하다.

‘신동아’ 20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법화경’ 권5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석가세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을 뿐 실제로는 멸도하지 않고 한량없는 세월 동안 영취산 상봉 석굴 속에 머물러 살아오고 계시며 또 영원히 이곳에 상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영취산에 상주하시는 석가세존이라면 근원적이고 불변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분히 갖추게 된다. ‘화엄경’을 비롯한 일체 경전의 설주(說主; 말씀하신 주인공)이시니 근원적이라는 조건은 충분하게 되고, 영취산 즉 영산 정토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무수한 세월을 상주하신다고 하니 불변적인 조건도 충분하다.

따라서 인도의 영취산을 신라로 옮겨오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낙산사나 금강산, 오대산 등을 신라 국토 안으로 옮겨다 놓은 경험이 있으니 영취산을 토함산으로 옮겨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인도의 영취산은 마가다국 왕사성 동북쪽 14∼15리 지점에 위치했다 하니, 경주를 왕사성으로 생각하는 신라 사람들로서는 위치로 보아도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40리 쯤 떨어진 토함산이 왕사성의 영취산과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성덕왕릉을 그 기슭에 쓰고 토함산에 화엄불국사 건립을 계획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법화경’을 비롯한 수많은 대승경전이 이 기사굴산, 즉 영취산 중에서 설해지고 있어서 불경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그 경전의 첫머리에서 항상 이 이름을 접해 무척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도처에 영취산이란 이름이 이미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니 신라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에 해당하는 토함산을 왕사성의 동악인 영취산으로 인식하는 것에는 조금의 무리도 없었을 것이다.

  
인공 석굴을 조성한 까닭  


    당 태종 정관 20년(646)에 현장(玄, 602∼664년)이 지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29 길속타라구타산(粟陀羅矩山), 즉 영취산 대목에서 그 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궁성(宮城; 왕사성의 궁성) 동북으로 14∼15리를 가면 길속타라구타산에 이른다. 당나라 말로는 취봉(鷲峯)인데 또 취대(鷲臺)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기사굴산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북쪽 산의 남쪽에 이어져서 외롭게 우뚝 솟아 있고 독수리가 이미 많이 깃들이고 있으며 고대(高臺)와 비슷하다. 하늘 빛과 푸르름을 서로 비춰 짙고 옅음이 나누어진다. (석가)여래께서 세상에 사시던 50년 동안 이 산에 많이 계시며 신묘한 법을 널리 설하셨다. (중략) 그 산정(山頂)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데 서쪽 절벽에 기대 벽돌집 정사가 지어져 있다. 높고 넓고 제도가 기이하며 동쪽으로 그 문이 열려 있다. 여래께서 예전에 많이 계시며 설법하셨다고 한다. 요즘 설법상(說法像)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여래의 몸과 같다.”

현장이 갔을 때인 636년경까지 이 영취산 정상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거하시던 곳인 벽돌집 정사가 남아 있고 그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크기와 같은 장륙(丈六; 16자)의 설법좌상이 모셔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 장륙설법좌상은 그 어름에 새로 조성했던 듯 ‘지금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정사 동쪽에 긴 돌이 있으니 여래께서 경행(經行; 좌선하다가 졸음을 막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일정 구역을 거니는 것)하시며 밟던 것이다. 곁에 큰 돌이 있는데 높이가 14.5자(당나라의 큰 자 1자는 30cm)가 되고 둘레가 30여 보(步; 1보는 151cm)이다. 이는 제바달다(提婆達多; 석가세존의 사촌아우로 석가세존을 시기하여 항상 해치려 하다가 지옥에 떨어져 죽었음)가 멀리서 부처님께 돌을 던져 공격한 곳이다. 그 남쪽 절벽 아래에 스투파가 있는데 예전에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하셨다. 정사의 남쪽 산 절벽 곁에 큰 석실이 있는데 여래께서 예전에 여기서 선정(禪定)에 드셨다.”

이어서 시자인 아난(阿難)존자가 거처하던 석실과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나 경전을 설할 때마다 문답의 대상으로 선발되던 사리불(舍利弗)이 거처하던 석실이 남아 있는 것도 밝히고 있다. 실재하는 영취산의 형상을 묘사해 놓아 영산정토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 것이다. 이런 기록과 더불어 이곳을 참배하고 왔을 신라 출신 구법승이나 인도 출신 전도승들의 신심에 의해 윤색된 순례담(巡禮談)은 이 영산정토의 신비감을 더욱 고조시켜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법화경’을 통해 영산정토의 분위기를 머리 속에 새겨 놓고 있던 석굴암 설계자들은 자연히 토함산 정상에 가까운 동쪽 절벽 아래에 그 영산정토를 구현해 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함산 정상 부근의 동쪽 기슭에는 인도의 영취산처럼 자연 석굴이 뚫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석굴을 뚫을 만한 절벽도 없으려니와 절벽이 있다 해도 바위의 성질이 굳센 화강암이라 도저히 석굴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석실을 지어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하에 석실을 짓는 것은 이미 고구려에서 봉토 석실 벽화분을 지은 경험이 있었으므로, 평양 이남의 영유권을 확실하게 보장받은 당시의 신라 조정이 그 기술의 확인이나 전수자를 확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터이니 이런 기획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 석실 고분은 그 천장 처리를, 4면에서 판석을 켜켜이 덮어 층급을 좁혀 내려오다가 마지막 단계에서는 네 모서리를 차례로 줄이면서 마름모를 만드는 형식으로 마무리짓는 소위 말각조정법(抹角藻井法; 모를 죽이고 마름모를 만드는 천장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무덤과 같은 석실일 경우 평면이 네모진 형태일 것을 전제로 하는 이런 천장 마감법은 짜임새로나 생김새 및 네 벽과의 어울림에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화엄경’을 비롯한 일체 불경을 설하여 갖가지 불국세계가 어우러진 화엄불국세계를 토함산에 재현케 한 주인공인 석가여래께서 상주하는 영산 불국토의 상징으로 조성되는 석굴암이 이런 통속적인 구조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천연동굴로부터 비롯된 수행생활 공간인 인도의 석굴사원과 인공으로 굴착하여 예배 대상을 조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중국 석굴의 특징을 종합하여 이상적인 불국세계를 꾸미려 하였다.


  
수호(守護)대중과 전법(傳法)대중  


    부처님과 그 권속(眷屬; 돌봐야 하는 식솔, 즉 딸린 식구)이 사는 생활공간인 불국세계도 안과 밖의 구분이 있다. 부처님으로부터 불법을 전수받아 이를 일반 대중에게 전파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는 성문(聲聞;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이), 연각(緣覺; 스스로 깨달은 이), 보살(菩薩; 일체 중생과 함께 깨달으려고 깨달음을 유보하고 있는 이) 등 전법대중이 부처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공간은 불국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수호대중은 당연히 불국세계 밖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석굴암도 내외 2실 구조로 설계되어 문으로 들어오는 전실(前室; 앞방)과 현관은 8부중(八部衆)과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사천왕(四天王) 등 불법을 수호하기로 맹세한 수호대중이 차지하고 있으며, 주실(主室; 주인 방)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를 둘러싼 여러 보살과 제자들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이 주실 안에도 부처님을 밀착 보호하는 경호원이 있으니 범왕(梵王)과 제석(帝釋)이 그들이다. 범왕은 대범천왕(大梵天王; maha--bra-hman)의 줄임말로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정상을 다스리는 천왕이다.

색계는 음욕(淫欲)이나 식욕(食欲)과 같은 욕망에서는 벗어났으나 아직 무색계(無色界)와 같이 완전히 물질을 여의어 순정신성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세계, 즉 색신(육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일컫는다. 초선천에 3천(天)이 있고 2선천에 3천이 있으며 3선천에도 3천이 있고 4선천에 9천이 있어 도합 18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는데 대범천왕은 초선천의 제3천을 다스리는 천왕이다.

이 대범천왕은 아득한 옛날 사바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해서 사바세계주(主) 범왕이라고도 일컬었으니 ‘잡아함경(雜阿含經)’ 권44에서 구가리(瞿迦梨)가 네가 누구냐고 묻자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나,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3 탄생품(誕生品)에서 탄생하는 석가태자를 받아내는 장면을 서술하는 데서도 사바세계주 범천왕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제 그 대목을 옮겨서 이를 확인해 보겠다.

“비구는 마땅히 알라. (석가)보살이 태 속에 머물면서 위와 같이 가지가지 공덕과 신통변현(神通變現; 신통을 부려 변화를 나타냄)을 성취하고 몇 달을 다 채운 다음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편안하게 탄생하셨다. (중략) 이때에 제석(帝釋) 및 사바세계주 범천왕이 공경 존중하는 태도로 몸을 굽히고 나아가서 일심정념(一心正念;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생각함)으로 양손에 교사야의(奢耶衣, ka-sika-; 산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짜낸 얇고 투명한 비단)를 가지고 있다가 곧 보살을 받들어 올렸다. 그 일이 끝나고 나자 곧바로 보살을 태 속에 계시던 때 거처하시던 보전(寶殿)으로 옮기고 범궁(梵宮)으로 돌아갔다.”

석가여래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범왕과 제석은 그 호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밀착경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탄생하는 석가를 둘이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받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제석천은 누구인가. 본 이름은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s첺kra-deva-na-m-indra)로 욕계(欲界) 6천(天) 중 제2천에 해당하는 도리천(利天)의 천왕이다. 욕계는 식욕과 수욕(睡欲; 자고 싶은 욕망), 음욕 등 3욕을 버리지 못한 하늘세계를 일컫는데 사천왕천(四天王天), 도리천,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6천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석가제바인다라천왕, 즉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은 땅과 허공이 나뉘는 수미산(須彌山) 상봉에 있어 수미산 사방에서 각기 한쪽씩을 차지하고 사는 4천왕천과 함께 지거천(地居天; 땅에 사는 천인)으로 불린다. 도리천은 33천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4방에 각각 8천씩 있고 중앙에는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어 모두 33천이 되기 때문이다.

제석천을 교시가(尸迦, kas쳃ka)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가바(摩伽婆, maghava-n)라고도 부른다. ‘대지도론(大智度論)’ 권56에 따르면 이것이 제석천 전생의 성과 이름이라고 한다. 제석천은 원래 마가다국의 바라문으로 성이 교시가, 이름이 마가바였는데 지혜가 출중하여 그 친구 32인과 함께 복덕(福德)을 많이 닦았으므로 죽은 뒤에 친구 32인과 함께 도리천으로 상생하여 그 자신은 천왕이 되고 그 친구인 32인은 32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제석천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싸움을 좋아하는 악신인 아수라(阿修羅, asura)의 군대를 가끔 쳐부수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 그런데 세상에 착한 무리가 늘어나면 제석천의 힘이 커지고 악한 무리가 늘어나면 아수라의 힘이 커지므로 일찍이 석가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루고 그 깨달은 불법(佛法)을 사람들에게 전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착한 무리들이 늘어나야 하니 불법을 설해야 한다고 범천왕과 함께 간청하여 석가세존의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10 대범천왕권청품(大梵天王勸請品)에서 그 정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증득한 심히 깊고 미묘한 법은 가장 지극히 고요하여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분별하고 생각하여 풀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오직 여러 부처님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중략) 만약 이 법으로 사람들을 위해 연설한다면 저들은 모두 깨달아 알 수 없을 터이니 헛되이 그 공력만 버리고 이익될 바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응당 잠자코 있어야 한다.

저때에 대범천왕이 부처님의 위대한 신통력으로 여래께서 가만히 계시는 까닭을 알고 석제환인의 처소에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교시가야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 중생들이 사는 곳에 생사의 검은 수풀이 드리워져서 선법(善法)이 줄어들고 악법이 늘어나고 있다. 어째서냐 하면 여래께서 버리시고 법륜(法輪)을 굴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부처님 계신 곳으로 함께 가서 여래께 권청(勸請)해야 한다. 어째서냐 하면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서도 만약 권청하지 않으면 모두 가만히 계셨기 때문이다.(중략)

저때에 대범천왕 및 석제환인, 사천왕천, 33천, 야마천, 도솔타천, 낙변화천, 타화자재천,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광음천(光音天), 광과천(光果天), 편정천(遍淨天), 정거천(淨居天) 내지 아가니타천(阿迦尼天)이 빛을 발하며 한밤중에 다연림(多演林)에 이르러 부처님께 향하여 정례(頂禮)를 드리고 나서(중략) 석제환인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향하여 게송으로 법륜을 굴리시기를 청하였다.

(중략) 저때에 여래께서 그대로 가만히 계시니(중략) 대범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단우견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며 합장하여 부처님께 향하여 법륜 굴리시기를 게송으로 청하였다.”

이렇게 제석천과 범천왕이 계속 권청하였으나 석가세존은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면서 어찌할지를 고심한다. 그 결과 중생을 상·중·하 3종의 근기(根機)로 나눌 수 있는데 상근기를 타고난 이들은 설법을 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고 하근기의 중생은 설법을 해도 깨닫지 못하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근기의 중생들은 설법을 하게 되면 바로 깨달아 알 수 있으니, 자신이 출현한 것은 이들에게 설법해주기 위해서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게송으로 대범천왕에게 설법하기로 한 사실을 통보한다. 이 허락을 받아낸 범왕이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다가 세존께 정례를 드리고 날아가버리자 이때에 지신(地神)이 허공신(虛空神)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여래께서 지금 범왕의 권청을 받아들여 법륜을 굴리고자 하신다. 한량없는 여러 중생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고, 한량없는 여러 중생을 이익되게 하시려는 때문이며, 한량없는 여러 중생을 안락하게 하시려는 때문이고, 선인(善人)을 늘리고 악한 무리를 줄이려는 때문이며, 여러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려 하신 때문이다.” 지신이 이 말을 마치자 한 순간에 허공신이 듣고 차례로 전해서 아가니타천까지 이르렀다.


  
석굴암의 범왕과 제석 자리배치 틀리다  


    범왕과 제석은 석가세존께 이렇게 친근하고 특별한 존재였으므로 수호대중임에도 불구하고 전법 공간에 배치되어 석가세존을 밀착호위하고 있다. 그러니 이 범왕과 제석은 당연히 밖을 경계하는 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석굴암 주실에 배치된 범왕상과 제석상은 거꾸로 내면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으니 이는 그 밀착호위 임무와는 상반된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덩달아서 좌우 협시보살로 등장한 문수(文殊)보살상과 보현(普賢)보살상까지 시선을 안으로 돌려 10대 제자와 마주보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불을 협시하는 시위(侍衛)대중이 지을 자세는 아니다.

더구나 그 지물을 보면 아수라와 싸워야 할 제석천이 마땅히 금강저를 들고 있어야 하고 사바세계를 창조했다는 범왕은 정병(淨甁, 물병)을 들어야 하니 현재 보는 쪽으로 좌측에 정병과 불자(拂子, 떨이개)를 들고 서 있는 인물을 범왕으로 보고, 보는 쪽으로 우측에 금강저(金剛杵)와 불자를 들고 서 있는 인물을 제석천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제석천보다 우위(優位; 윗자리)에 있어 제석천으로부터 최고의 경례를 받는 범왕이 당연히 부처님의 좌측, 즉 보는 쪽에서 우측에 시립해야 한다.

그런데 그 위치가 바뀐 것이다. 제석이 범왕자리에 와 있고 범왕이 제석자리에 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범왕과 제석의 위치가 뒤바뀔 때 함께 움직인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도 그 위치가 서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 금강저라는 확실한 지물 때문에 범천왕과 제석천의 이름은 바뀌지 않았으나 문수보살을 상징하는 확실한 지물인 경권(經卷; 두루말이 형태로 되어 있는 경전)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주불을 협시할 때 주불 쪽에서 보아 좌측이 문수이고(보는 쪽에서는 우측) 우측은 보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원칙에 따라 보현을 문수라고 부르고 문수를 보현이라고 부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사실 부처님을 시위할 경우 좌범왕, 우제석의 원칙은 깨뜨릴 수 없는 철칙이다. 아마 문수보살과 범왕상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즉 현재의 문수보살상과 범왕상을 보현보살상과 제석천상과 맞바꿔 놓는다면 범왕과 제석 및 문수와 보현의 시선이 모두 십대 제자의 시선과 가지런하게 밖을 향하게 될 것이고 문수보살의 지물인 경권(經卷)도 본디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밖을 경계하는 범왕과 제석의 경호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실수는 석굴암의 주실 천장 앞부분이 붕괴되었던 1900년 전후한 시기에 저질러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라가 망해가는 정신없던 때에 천장이 무너지며 그에 연결되었던 앞부분 석벽까지 휩쓸려 쓰러지자 대강 응급 복구한다고 하다가 좌우를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 관한 식견도 부족하고 옛 모습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능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다. 그런데 일제가 1913년부터 중수를 시작하면서 학술적인 진단을 거치지 않은 채 이런 현상을 고착시켰기 때문에 그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승불교가 피워낸 마지막 꽃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이를 뿌리로 하여 불상이 출현하였다. 문화를 식물에 비유할 때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대승불교사상이라는 새로운 뿌리에서 불상이라는 새로운 꽃이 피어난 것이다. 이 꽃은 비단길을 통해 동서남북을 잇는 길목에서 국제무역의 차익을 얻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쿠샨제국이라는 기름진 밭에서 거름을 먹으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데, 그 뿌리도 계속 성장하여 인류가 이제까지 보지 못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팔만사천 경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승경전이다. 수많은 천재 학승이 국가와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편찬해낸 대승경전들은 그것이 출현하던 서기 1세기 전후부터 점차 그 분량을 더해가고, 그 체제와 내용도 더욱 정비되어 나간다. 그래서 ‘법화경’이나 ‘반야경’같이 수준 높은 철학체계를 자랑하는 대승경전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불상미술이 예배의 대상으로 화려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과 바퀴자국을 함께 남기는 현상이었다.

그 결과 취지를 달리하는 수많은 경전이 나오게 되니 이들을 총괄하여 원융무애한 논리로 종합할 필요가 있어 ‘화엄경’ 같은 방대한 체계의 경전이 출현하기도 한다. 백천 줄기의 강과 시내가 모여들어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러니 석가세존이 대각을 이루어 성불(成佛)한 다음 최초로 설했다고 하는 ‘화엄경’은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최후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시내와 강과 같은 소규모 경전들이 없고서는 바다와 같은 대부의 경전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방대한 고급 대승경전들은 무착(無着)이나 세친(世親) 같은 대승논사(大乘論師)들이 키다라쿠샨왕국을 중심으로 서북인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4∼5세기에 정비를 끝내는 듯하다. 5세기 초에 서역계의 대역경사(大譯經師)들인 구마라습(鳩滅什, 343∼413년)이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59∼429년)에 의해서 ‘법화경’ 7권(406년 번역)과 ‘화엄경’ 60권(418년 번역)이 번역되는 것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법화경’을 이념 기반으로 하여 돈황석굴과 운강석굴을 비롯한 거대한 불상굴(佛像窟)을 굴착하는 등 대규모 조상(造像)활동을 벌여 중국 조각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다.

그 영향은 우리에게도 미쳐와서 삼국시대에 법화신앙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백제의 태안반도에서는 <예산사방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등이 조성되고 백제와 신라에서는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 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과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미륵반가상을 조성해낸다.

이후 신라가 통일하는 과정에는 신라화엄종의 독자적인 선도(先導)에 의해 화엄종 사찰에서 아미타불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아미타불상과 관세음보살상 조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제 통일신라왕국이 문화 절정기를 맞이하여 토함산에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해 내려 하면서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차별을 이루는 만 가지 현상은 근본을 이루는 하나의 원리로 돌아옴)과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게 녹아들어 서로 거리낌이 없음)의 화엄종지에 입각하여 그 동안 꽃피워왔던 각종 불교상들을 화엄 일승(一乘)의 질서 아래 총체적으로 함축 표현하려 하였다.

그래서 불국사 대석단 위에 각종 불국세계를 원융무애하게 함축해 놓듯이 석굴암 석굴 안에는 각종 대승경전에서 설하는 서로 다른 불국세계의 모든 성중상(聖衆像; 신성한 무리들의 형상)의 성격을 함축하여 최소한의 표현으로 일체를 상징하려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이는 신라 화엄종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湘, 625∼702년)가 일찍이 40권 내지 60권 혹은 80권 등으로 번역되어 10조9만5048자(字)로 그 분량이 과장 표기된 방대한 ‘화엄경’의 내용을 다만 210자의 ‘일승법계도시(一乘法界圖詩)’, 즉 법성게(法性偈)로 함축 표현해 놓은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우리의 기후풍토는 사계절이 분명하고 거의 전 국토가 바위산이어서 초목(草木)의 일시적인 조락(凋落;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짐)을 항상 경험하게 되므로 우리 민족은 아무리 복잡한 표현이라도 그것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줄거리만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일승법계도시’의 제작이나 석굴암의 조성은 모두 우리 민족성의 발로(發露)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210자의 ‘일승법계도시’(법성게)도 다만 14자의 7언(言) 대구(對句; 상대를 이루는 한 쌍의 시구)로 압축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원리 속에는 일체의 현상이 있고 수많은 현상 속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그러니) 하나의 원리는 곧 일체의 현상이 되며 수많은 현상은 곧 하나의 원리가 된다.(一中一切 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

이런 신라 화엄종의 ‘일중일체다중일’의 이념이 석굴암의 조형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석굴암은 각종 대승경전에서 서술하는 불국세계의 모든 특징을 함축 표현하여 하나로 종합하는 양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일본 제압하는 석굴암 본존불  


    우선 영산정토의 터전은 ‘법화경’ 권1 서품과 권5 여래수량품에 기술되고 있는 영취산, 즉 기사굴산의 실상과 비슷한 토함산 상봉 동쪽 기슭에 잡았다. 그리고 본존 석가여래좌상은 막 마군(魔軍)을 항복시키고 대각(大覺)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신 순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를 드러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게 하였다.

이는 아마 ‘구화엄경’ 권1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이나 ‘신화엄경’ 권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서 밝힌 것처럼 마가다국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대각을 얻어 막 부처님이 되고 나서 환희에 넘쳐 ‘화엄경’을 설하려 하는 장면을 상징하는 것일 듯하다.

그러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항복받아 삼국통일을 이루어냄으로써 전륜성왕으로 군림해온 신라 진골 왕통의 절대 권위를 과시하는 동시에 문무왕 이래 신라 왕실의 숙원이던 일본의 항복을 염원하는 표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 본존불이 성덕왕의 초상조각이라 할 때 일본 제압은 당면문제였으니 항마촉지로 동쪽을 향해 위엄을 과시할 필요가 절실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상 형식은 편단우견에 결가부좌한 6∼7세기 굽타 말기 사르나드식 항마촉지인 상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이런 상 양식은 이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상에서 그 선구를 보였다. 김리나(金理那)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밝혀냈듯이 이런 상 양식은 현장법사(玄, 602∼664년)와 왕현책(王玄策)에 의해서 중인도 마가다국 부다가야의 석가여래 성도처(成道處)로부터 전해져온 초당 시기(618∼712년)의 새로운 양식기법이었다.

현장은 당 태종 정관 3년(629) 3월8일에 태종의 공식적인 후원 아래 서역(西域, 인도 문화권)으로 구법(求法; 불교 경전을 구함)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17년 동안 130여 개국에 이르는 인도 곳곳을 돌아보고 대소승 경전 520질(帙) 657부(部)와 불상 8구(軀) 불사리(佛舍利) 150과를 가지고 정관 19년(645) 1월에 장안으로 돌아온다.

표면적으로 내건 명분은 구법여행이었으나 사실 천하 제패를 꿈꾸던 야심만만한 당 태종이 서역의 영토확장 가능성과 교역의 득실을 탐색하기 위해 밀명을 내려 보낸 탐색여행이었다. 그래서 현장은 정관 10년(636)에 중천축 마가다국에 이르러 마침 4천축의 맹주로 군림하던 시라일다(尸羅逸多)왕을 만나고 이를 설득하여 정관 15년(641)에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하게 하여 중인도와 중국이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한다.

당 태종은 중인도와 교역이 성사될 듯하자 중국과 중인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티베트와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 이미 정관 15년 1월에 종실녀(宗室女; 종실의 딸)를 문성(文成)공주로 삼아 티베트왕 기종농찬(棄宗弄讚)에게 시집보내 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정관 15년부터 마가다왕 시라일다와 몇 차례 사신을 교환한 다음 정관 17년(643) 3월에는 위위시승(衛尉寺丞) 이의표(李義表)를 정사(正使)로 하고 황수현령(黃水縣令) 왕현책(王玄策)을 부사(副使)로 하여 22인의 공식수행원을 거느리고 가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다.

왕현책 등은 이해 12월에 마가다국에 도착하여 시라일다왕의 배려로 각처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고 정관 19년(645) 1월27일에는 왕사성 기사굴산, 즉 영취산에 오른다. 여기서 영산정토를 배관한 감격과 당 태종의 위덕을 칭송하는 기념비문을 석벽에 새겨 놓고 2월 초에는 부다가야로 내려와 마하보리사, 즉 대각사(大覺寺)에 들러 석가여래의 항마성도상에 참배한다. 그러고 나서 2월11일 여기에다가도 기념비를 세운다. 그 다음 대각사의 항마성도상 등에 매료되어 수행했던 송법지(宋法知) 등의 화가들에게 이를 모사하게 하여 10권의 도상집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당나라에 우호적이던 시라일다왕이 정관 20년(646)경에 죽자 혼란을 틈타 왕위를 찬탈한 아라나순(阿羅那順)은 왕현책 일행을 구금하고 그 사이 여러 나라로부터 받은 교역품을 빼앗는다. 이때 왕현책은 우위솔장사(右衛率長史)로 벼슬이 올라 정사의 지위에 있었는데 밤중에 탈출하여 티베트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한다.

문성공주의 남편인 농찬왕은 정예병 1200명과 네팔 기병 7000명을 내주어 중천축국, 즉 마가다국을 정벌하게 한다. 정사 왕현책과 부사 장사인(蔣師仁)은 왕성을 공격한 지 3일 만에 아라나순왕과 그 일족을 사로잡고 남녀 포로 1만2000인 및 소와 말 2만 여 필을 획득한다. 그래서 드디어 정관 22년(648) 5월에는 왕현책 일행이 이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해 돌아온다.

왕현책은 귀국한 다음에 6년 동안 중천축을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중천축행기(中天竺行記)’ 10권으로 저술하고 또 ‘서역국지(西域國志)’ 100권을 지어 그 풍물을 소개하는데 그중에 도화(圖畵)가 40권이었다 한다. 아마 석굴암 불상 형식의 조본(祖本)이 되었을 <편단우견항마촉지인석가불좌상>도 그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의 좌상 총 높이는 345cm다. 당나라 큰자 한 자가 30cm이니 이를 당나라 큰자로 환산하면 11자 5치가 된다. 그런데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8에서 부다가야의 마하보리사, 즉 대각사에 모셔진 항마성도상의 치수를 기록하면서 총 높이가 11자 5치라 하였다. 여기에 착안하여 석굴암 본존상이 대각사 항마성도상을 모본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나 이는 우연의 일치일 개연성이 크다.

만약 석굴암을 조성하면서 당나라 자를 기준으로 썼다면 하필 11자 5치 높이로 치수를 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석굴암 주불 좌상은 장륙상(丈六像)일 터이므로 그 높이가 16자에 해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 큰자로 이것을 재어보니 11자 5치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굴암 본존좌상을 조성하면서 쓴 자는 당나라 큰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석굴암 주불을 조성할 때 사용한 영조척(營造尺)의 기본 단위는 좌상 높이를 16자로 놓고 계산해야만 산정될 것이다. 인도에서는 보통 사람의 크기가 8자라 하는데 이는 자기 뼘(걸)을 한 자로 쳤을 때 그와 같은 수치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키가 172cm인 사람의 한 뼘(1자 혹은 1걸) 길이는 21.5cm가 되어 이 자로 8자의 두 배인 장륙상의 높이를 계산하면 344cm가 나오므로 석굴암 본존상이나 부다가야 대각사 본존상의 높이가 비슷하게 산정된다. 따라서 장륙상의 일반적인 기준을 적용하다 보면 이런 치수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높이로 좌상을 조성하게 되면 어깨 폭이나 무릎 폭, 좌대 높이, 좌대 폭 등은 자연스레 그 비례를 따르게 되니 서로간의 유사성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키가 얼마만한 사람을 기준으로 장륙 높이를 산정했느냐에 따라서 장륙상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니 석굴암 본존상이 성덕왕의 초상조각이었다면 성덕왕의 키는 172cm 정도가 되었을 듯하다. 따라서 석굴암을 짓는 영조척의 길이는 바로 본존좌상을 장륙(16자) 높이로 계산할 때 산출되는 1자의 길이가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불상 조성 기준자가 각각 키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황복사지3층석탑출현 금제아미타여래좌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성 내역을 밝히는 명문(銘文)에 높이가 6치라 했는데 현재 높이가 12cm이니 기준자가 20cm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자로 재어 8자 높이라면 160cm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불상이 효조왕을 위해 조성한 것이고 효조왕은 불과 16세에 돌아갔으므로 돌아갈 때의 키가 이쯤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밀교에서 비롯된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석굴암 본존불좌상 바로 뒷면의 후벽 정중앙에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입상 높이가 220cm이니, 석굴암 영조척으로는 10자 남짓 되는 높이로 8자인 보통 사람보다는 큰 키다.

머리에 모란당초무늬를 두른 화관(花冠)을 쓰고 그 관띠를 양쪽 귀 뒤로 층층이 내려뜨렸는데 화관 아래 보발(寶髮; 보배로운 머리칼, 불보살의 머리칼을 높여 부르는 말) 위로 좌3면(左三面; 왼쪽으로 세 개의 얼굴), 우3면(右三面; 오른쪽으로 세 개의 얼굴)이라는 6면의 관세음보살 얼굴을 조각하고 화관 위 정면에 다시 3면의 관세음보살 얼굴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화관 정면 중앙에는 모란꽃잎 한 장을 높이 세워 놓고 나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짓고 서 있는 아미타불상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그 안에 표현해 놓았다. 온몸에서 솟아오르는 광명(光明)을 상징하는 거신광(擧身光)과 연화대좌(蓮花臺座)까지 모두 갖춘 모습이다.

위층에 있는 3면의 관세음보살상 머리 위로 현재는 아마타화불좌상이 표현되어 있지만, 이는 1962년에서 1964년에 걸친 중수 기간에 잘못 보충해 넣은 것이고 원래는 불면(佛面; 부처님 얼굴)이 새겨져 있던 곳이다. 1907∼1908년에 이 석굴암의 존재가 일본인들에게 알려지자 일본인 불량배들이 아랫단 화불 우측(보는 방향에서) 보살면과 함께 이 불면도 떼어 갔다고 전해진다.

앞에 3면, 좌에 3면, 우에 3면, 합하여 9면인데 뒷면에 있어야 할 1면은 이 조각상이 돋을새김상이라 표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화관을 쓰고 있는 본 얼굴과 합하면 11면이 되는 까닭에 11면관세음보살이라 부른다.

이런 11면관세음보살상도 현장이나 왕현책이 정관 19년(645)과 정관 22년(648)에 각각 그려오거나 가져온 굽타 말기 내지 팔라 왕조 시대의 중인도 밀교상에서 비롯된 신형식 불보살상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이미 측천무후(則天武后) 장안(長安) 3년(703)경에 장안 보경사(寶慶寺)에다 이런 11면관세음보살입상을 많이 조성하여 봉안한다.

현장이 당 고종 현경(顯慶) 원년(656)에 ‘십일면신주심경(十一面神呪心經)’ 1권을 번역하여 11면관세음보살입상의 조성 공덕을 널리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11면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해 모시고 11면관세음보살신주를 독송하면 이익과 안락을 얻을 수 있고 일체 병이나 좋지 않은 일을 소멸할 수 있으며 악몽에서 벗어나고 비명횡사를 막을 수 있으며 악심 먹은 사람이나 원망하는 사람을 달랠 수 있고 귀신의 장애를 막을 수 있으며 소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11면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응당 먼저 단단하고 틈이 없는 좋은 전단향나무로 관자재(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야 한다. 길이는 1걸수(手, 뼘) 반이어야 한다. 왼손은 붉은 연꽃이 담긴 군지(軍持; 정병, 즉 물병)를 잡고 오른쪽 팔뚝을 펴서 염주를 걸되 손은 시무외인을 짓는다.

그 상은 11면을 짓는데 앞에 해당하는 3면은 자비상(慈悲相; 자비로운 상호)으로 만들고 왼쪽 3면은 진노상(瞋怒相; 성나서 분노한 상호)으로 만들며 오른쪽 3면은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흰 이빨을 겉으로 드러낸 상호,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상호)으로 만들고 뒤에 해당하는 1면은 포악대소상(暴惡大笑相; 포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크게 웃는 상호)으로 만들며 정상(頂上; 정수리 위) 1면은 불면(佛面; 부처님 얼굴)상으로 만든다. 여러 머리의 보관 속에는 모두 불신을 만들고 그 관자재보살 몸 위에는 구슬꿰미 등 여러 가지 장엄을 갖춘다.”

사실 이 밀교경전은 이미 후주(後周) 무제(武帝, 재위 561~577) 때 천축 삼장(三藏) 야사굴다(耶舍多)가 ‘불설십일면관세음신주경(佛說十一面觀世音神呪經)’이란 이름으로 번역해 놓고 있었다. 내용은 현장이 번역한 ‘십일면신주심경’과 대동소이한데 문장이 오히려 평이하고 담박하며 뜻이 분명히 드러나서 현장의 신역경전보다 읽기에 편하다.

그래서 현장이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전해와 이의 조성과 신앙을 권면하기 위해 ‘십일면신주심경’을 번역해내자 사람들은 오히려 야사굴다가 번역한 ‘불설십일면관세음보살신주경’을 재평가하여 이를 더욱 널리 읽고 이에 의해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만들어낸 듯하니 이제 그 십일면관세음보살의 조성 방법을 지시한 대목만 옮겨 보겠다.

“저때에 관세음보살마하살이 이렇게 (석가)세존께 아뢰었다. 만약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으로 능히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만드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저 선남자 선여인은 반드시 흰 전단향나무로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나무는 반드시 정밀하고 속이 차야 하니 마르고 터져서는 안 된다.

몸 길이는 1자 3치다. 11개의 머리를 만드는데, 앞에 해당하는 3면은 보살면(菩薩面; 보살 얼굴)을 짓고 왼쪽 3면은 진면(瞋面; 성난 얼굴)을 짓고 오른쪽 3면은 보살면과 같으나 개 이빨이 위로 솟아나게 한다. 뒤에도 1면이 있는데 대소면(大笑面; 크게 웃는 얼굴)으로 만들고 정상(頂上)의 1면은 불면(佛面)으로 만든다.

얼굴은 모두 앞을 향하고 뒤에는 광배를 붙인다. 그 십일면은 각각 화관(花冠)을 쓰고 그 화관 안에는 각각 아미타불이 있다. 관세음의 왼손은 물병을 잡는데 병 주둥이에 연꽃이 나와 있다. 그 오른손을 펴서 구슬꿰미를 걸고 시무외의 손을 짓는다. 그 상의 몸에는 반드시 구슬 꿰미를 새겨서 구슬꿰미로 장엄해야 한다.”

이런 ‘불설십일면관세음보살신주경’과 ‘십일면신주심경’이 널리 유포되면서 중국에서는 초당 시기 후반부터 11면관세음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듯하다. 일본 내량 법륭사에 전해 내려오는 전단목 <구면관세음보살입상>이 이 시기 당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자재장(資材帳)에 원정(元正) 천황 양로(養老) 3년(719)에 전래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719년은 성덕왕 18년이며 동시에 당 현종 개원(開元) 7년에 해당하여 성덕왕과 현종의 밀월(蜜月)관계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시기이니 신라에 이런 당나라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었는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양국간의 빈번한 외교관계와 문물교류를 생각해 보면 이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유입과 모각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나라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 신라화의 성공결과인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례라면 아무래도 장안 <보경사 전래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군(群)과 법륭사 소장 <구면관세음보살입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너무 커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우수하다. 그 사이 무수한 시험조각을 거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보경사 전래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조성하던 시기와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조성 시기의 시차가 거의 반세기에 이르니, 당나라에서 보경사상을 만들 때부터 신라가 이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의 조성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면 족히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과 같은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양식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가사유상 양식이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에서 완성되듯이 십일면관세음보살 양식도 석굴암에서 그 상 양식이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으니 통일신라 사람들은 이 십일면관세음보살 신앙에 매료되어 그 조각에 몰두하였던 모양이다. 이제 그 완성된 양식이 어떤 것인지 대강 살펴보기로 하겠다.


  
소덕왕후 모습 그려낸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상  


    우선 관세음보살의 11면과 화불 및 불면의 배치를 경전에서 말한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냈다.

<보경사 관세음보살입상>에서는 11면을 배치하는 데 급급하여 중앙 정면에 화불을 배치하는 것을 놓쳤고 <법륭사 구면관세음보살입상>에서는 구면의 무게에 눌리고 말아 11면을 다 채우지 못하고 3면을 생략하였다.

그런데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에서는 이를 경전에서 설한 내용대로 완벽하게 처리하였다. 보관 정면에 화불을 입불로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좌 3면, 우 3면의 6면을 그 좌우로 배치하였으며 정면 3면은 보관 위 보계(寶; 보배로운 상투, 불보살의 상투를 일컫는 정중한 말) 앞에 올려놓고 그 위에 불면 하나를 올려놓았다. 3층 표현법으로 11면의 배치를 유감없이 처리해낸 것이다. 물론 뒷면 1면은 숨겨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이는 뒷면은 보이지 않는 부조상(浮彫像; 돋을새김 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관 위에 배치된 9면의 관세음보살 보관에도 아미타여래의 화불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경전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아미타좌상을 화관에 크게 돋을새김해 내었는데 무게와 공간을 줄이기 위해 화불좌상만 크게 표현하고 화관 전체를 거신광(擧身光)으로 삼게 하였다. 화불 표현을 엄두도 내지 못한 <보경사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과 화불을 표현했으되 쓸데없는 연꽃테 장식으로 무게와 간격만 늘리고 화불을 왜소하게 만든 <법륭사 구면관세음보살입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조형감각이다.

그리고 십일면이 쌓인 머리 위의 무게를 가능한 한 정수리 위로 집중시켜 무게의 사방 확산을 막고 부피를 축소시키기 위해 좌3, 우3, 상3의 구면 간격을 최소화하고 화불을 세워 그 구심점을 이루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 얼굴을 압박하는 머리 위 10면의 무게와 부피를 분산시키기 위해 화관의 끈치레를 장엄하게 하고 층층이 귀 뒤로 내려뜨려 어깨를 지나가게 함으로써 얼굴 폭을 넓히지 않아도 아래 위 균형이 잡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의 얼굴을 보살면의 특징인 지마면(芝麻面; 참깨와 같이 길쭉한 얼굴)을 유지하게 하여 청수(淸秀)한 기품이 드러나게 한 비결이다.

귀를 정도 이상 크게 표현하고 귀고리를 무겁게 단 것도 머리 위의 무게에 대응하려는 지혜다. 상대적으로 얼굴은 조금의 과장도 필요 없게 되었는데, 보경사 상이나 법륭사 상이 완벽하게 표현해 내지도 못한 머리 무게 때문에 도리 없이 얼굴 폭이 넓어져 비만(肥滿)과 둔중성(鈍重性)이라는 반보살성(反菩薩性; 보살과 배치되는 성품)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머리 무게를 단속하여 무게중심을 귀 뒤로 옮겨 놓은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은 목 놀림이 자유로워져 긴 목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보경사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나 <법륭사 구면관세음보살입상>은 머리 무게에 짓눌려 목이 짧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으니 답답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을 타고 전해 내려오는 무게를 가슴과 배에서 받아내야 하므로 가슴과 배의 근육이 긴장하여 전신이 경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유연한 몸매를 뽐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머리 무게중심을 귀 뒤로 보내는 조형적 기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의복 표현은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투명하게 처리하면서 여러 벌을 덧입혀 속살이 비칠 듯 가려주었다. 그래서 더욱 신비감이 고조되는데, 깔끔하게 접혀 구분이 명확하게 층급진 옷주름은 다림질을 막 끝내고 새로 입은 옷인 듯 산뜻한 청결미를 보태준다.

그리고 미풍을 맞은 듯 살랑거리는 옷자락들에서 넘쳐나는 율동감은 돌로 다듬은 육신에서 숨결을 느끼도록 부추긴다. 경전에서 왼손으로 붉은 연꽃을 꽂은 물병을 든다고 했으므로 그와 같은 표현을 하였는데, 손목을 부드럽게 휘감아 병목을 왼쪽 젖가슴에 지그시 대고 끌어안은 모습에서 진정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뜨거운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구슬꿰미를 오른손에 건다든지, 오른손을 구슬꿰미에 꽂으면서 시무외인을 짓는다는 내용은 그에 얽매이지 않고 대담하게 번안(飜案)하였다. 오른손을 내려 두 어깨에서 발 아래까지 걸어 내린 긴 구슬꿰미를 엄지와 중지로 가뿐하게 들어올린 것이다. 치렁거려 걸음걸이를 방해하는 장신구를 살짝 걷어드는 것은 마치 치맛자락을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드러내니 지금 동작을 진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더구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는 듯한 사려 깊은 표정은 그대로 대자대비로 가득 찬 어머니의 얼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얇은 옷감만큼이나 희미할 정도로 투명한 구슬꿰미들의 흐릿한 표현은 고귀한 신분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데, 연꽃 위의 씨방을 힘주어 밟고 있는 오른발 표현에서는 어린 자식을 우물가에 내놓은 듯 조마조마 애태우는 모정을 읽을 수 있다.

경덕왕이 한두 살 젖먹이 때 여의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모후 소덕왕후 김씨(700년경∼724년)의 모습을 이렇게 재현해 놓았으리라 생각된다. 복잡한 십일면 주변으로는 아무 장식이 없는 두원광(頭圓光)이 단순하게 돌려지고, 발 밑에는 연꽃 한 송이가 사실적으로 돋을새김되어 생동감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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