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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20
 관리자  08-22 | VIEW : 2,055
[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20]    

세계 불교탑의 최고봉 불국사 다보탑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불국사가 구현한 화엄 불국의 세상  



    불국사는 경주시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토함산(吐含山) 서남쪽 기슭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토함산은 통일신라 왕국의 5방(五方) 중심 산악 중 동악(東岳)에 해당하는데, 일찍이 석탈해(昔脫解) 왕이 차지하여 석씨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선덕여왕 때 비담(毗曇)의 반란으로 석씨들이 거의 멸족당하자 그 소유권은 김씨 왕족들에게 돌아간다. 이에 선덕여왕 이후부터 김씨 왕들의 왕릉이 차츰 그곳으로 통하는 길목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드디어 문무왕이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龍堂里) 대종천(大鍾川) 입구 대왕암에 자신의 수중릉(水中陵)을 건설하기에 이르자, 태종 무열왕의 내외 혈손들은 동해구(東海口)로 불리던 감포 일대의 동해안에서 토함산을 거쳐 경주로 들어오는 지역 전체를 차지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문무왕 이후 신문왕이나 효조왕의 왕릉이 모두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일대에 자리잡고, 성덕왕릉은 더 동쪽으로 나가 토함산 서북쪽 줄기가 뻗어내린 양장곡(楊長谷)의 산자락 끝과 조양뜰의 너른 분지가 마주치는 곳에 모셔진다.

경덕왕은 부왕과 모후가 합장되어 있는 이 <성덕왕릉>을 전륜성왕의 왕릉 제도에 합당하게 십이지신상을 곁들인 호석(護石)과 요도(褥)형 지면석(地面石) 및 돌난간으로 봉분을 장엄하게 꾸민 다음 전륜성왕의 추복사찰답게 완벽한 불사(佛事)의 건립을 기획하였던 듯하다.

일체 대·소승 경전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불국세계를 신라 화엄종의 만법귀일(萬法歸一)과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종지에 입각하여 한 가지 기준으로 융합해내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마치 하나의 태양 아래 산하대지(山河大地; 산과 강과 평야)와 숭산심해(崇山深海; 높은 산과 깊은 바다)가 각자 자태를 마음껏 뽐내며 서로가 서로를 빛내며 어우러지듯이, 일체 경전에서 말하는 불국세계를 신라 화엄의 질서 속에서 한자리에 모두 표출해보려 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라가 일체 경전에서 얘기하는 그 불국세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자부심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실로 수많은 불국세계를 설정해 붓끝이 닳도록 기록하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온 불설(佛說; 부처님의 말씀)의 내용들이 이제야 신라 사람들의 종합적인 불교 이해와 창조적인 조형 정신을 통해 지상에 총체적으로 구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토함산 전체를 화엄불국세계(華嚴佛國世界)로 보고 우선 그 서남쪽 산허리에 당시 신라사람들이 가보기를 가장 염원하던 대표적인 불국세계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우선 현재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敎主)로서 우리에게 무수한 불국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가르쳐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루어낸 불국세계인 영산정토(靈山淨土)가 있어야 하니,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하는 한 구역의 불국세계가 그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가는 과정에 무수하게 죽어간 영가(靈駕)들이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소원하였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있어야 하니,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한 대웅전 서쪽 구역이 바로 그 아미타불국토이다.

대웅전 구역 뒤로는 동쪽 언덕에 관음전(觀音殿)이 가장 높게 자리잡고 있다. 사바세계에서나 극락세계에서나 일체 중생들의 고뇌를 해소해주는데 가장 앞장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기 때문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7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루어내는 영산정토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고,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에서 말한 대로 아미타정토에서는 아미타불의 좌협시(左脇侍) 보살로 첫째 보좌역을 맡고 있으며,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도 53선지식 중의 하나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당시 신라 사람들의 관음신앙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구조다.

그 관음전보다 한 단계 낮게 비로전(毘盧殿)이 있어 ‘화엄경’에서 말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일승(一乘)의 화엄 종지로 여러 불국세계를 원융무애하게 조화시켜 제망중중(帝網重重; 제석천궁의 구슬발이 서로 빛을 반사하여 무수한 아름다움을 몇 곱절로 발산하는 것을 일컫는 말)의 효과를 드러내도록 배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당시 아직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던 미륵불의 용화세계(龍華世界)가 빠져 있다. 혹시 지금 법화전 터로 추정하고 있는 극락전 뒤쪽이 용화전(龍華殿) 터로서 미륵불이 하생할 용화세계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불국세계와 중생세계 구분하는 대석단  

    이렇게 된다면 이 당시 신라사람들이 가서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하던 모든 불국세계는 이 불국사 대석단(大石壇) 위에 모두 구현된 셈이다. 불국사가 화엄 불국사로 불리며 불국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절로 꼽히는 것은 여러 경전에서 얘기하는 대표적인 불국세계를 총체적으로 구현해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우선 불국사를 다른 절과는 비교할 수 없게, 즉 불국사를 불국사답게 만드는 점이 불국세계와 중생세계를 나누어 놓은 대석단의 건설에 있다. 대석단은 전체적으로 보아 2단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사바세계의 정토(淨土)인 영산불국토를 불국사의 중심구역으로 삼기 위해 이 터를 가장 높게 쌓아올리니, 그 아랫단이 백운교(白雲橋) 18계단 높이에 해당하고 그 윗단은 청운교(靑雲橋) 15계단 높이에 해당한다(국보 23호). 이곳이 대석단의 중심으로 정문이 설치된 곳이니, 백운교 18계단과 청운교 15계단 도합 33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자하문(紫霞門)이 나오게 된다.

이 대석단은 동서로 뻗어가며 단 위의 불국세계와 단 아래의 중생세계를 나누어 놓는데, 서쪽으로 이어지면서는 범영루(泛影樓)를 끝으로 그 윗단이 사라지고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아랫단 높이에 전개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랫단 높이를 다시 2단 구조로 나누어 놓으니, 그 아랫단은 연화교(蓮華橋) 10계단 높이에 해당하고 윗단은 칠보교(七寶橋) 8계단 높이에 해당한다(국보 22호). 결국 정문의 백운교 18계단 높이와 같은 평면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위에 곁문인 안양문(安養門)이 세워져 극락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대석단은 기본적으로 목조건축의 축조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세계 석조건축사상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돌을 쌓아올리는데 돌 쌓는 방법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나무집 짓는 방법으로 돌을 쌓아올린 것이다. 기둥을 세우고 아래· 위에 방목(枋木)을 끼워 벽면을 만들고 그 벽면을 판석(板石)이나 잡석으로 채워나가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자니 아래·위 단을 나눌 때는 보 끝 형태의 받침돌을 목조건축의 첨차(遮) 형태로 다듬어 빼내기도 하였으니, 극락전 대석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범영루 돌기둥에서는, 기둥머리를 높여 들보를 쌓아가기 위해 고안된 포작(包作)을 아래위로 맞붙여놓은 목조와 같은 장식성이 석조로 번안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목조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짜임새 있는 결구미(結構美)를 표출해 석조미술 특유의 딱딱하고 냉랭한 기운을 모두 거둬들였다.

이런 석축기법은 백제에서 비롯한 <미륵사지 9층석탑>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기법이 신라로 전해져 <감은사지 쌍3층석탑> 등으로 계승되다가 이곳 불국사 대석단 축조에 원용되었던 듯하다.

잡석으로 벽면을 채우는 방법은 <전(傳) 신문왕릉 호석> 축조 경험이 그 발상을 도왔을 것이다. 대석단 축조의 발상도 성덕왕릉의 호석을 첨가하는 과정에 얻은 묘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석단 주변에 돌난간을 두르는 것은 성덕왕릉 호석 주변에 돌난간을 두른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난간을 두르는 것은 경계를 표시하여 출입을 통제하는 금지와 보호의 의미도 있지만 내부를 공개하여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으니, 난간이 있는 자리에 벽을 쳐서 시야를 가리는 것은 난간 설치의 본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입체조형예술은 만인에게 시각적 쾌감을 제공하는 데 조형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하문으로 오르는 백운교와 청운교는 계단 밑으로 각각 무지개 문을 설치하여 그 문으로 통행할 수 있게 했는데, 안양문으로 오르는 연화교와 칠보교에서도 연화교 밑에만 무지개 문이 나 있다. 칠보교는 8계단 높이밖에 안 돼 무지개 문을 내기에 너무 낮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본래 이 대석단 아래에는 칠보연지(七寶蓮池)가 있어 연꽃이 만발했고 그 사이로 배를 띄워 백운교와 연화교 아래 무지개 문으로 드나들었다 하나 아직 그 유구는 발굴을 통해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칠보연지는 반드시 이 대석단 밑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저 국토를 어째서 극락이라 하는가. 그 나라 중생은 온갖 괴로움이 없고 다만 온갖 즐거움만 받으므로 극락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사리불아, 극락국토에 일곱 겹의 난간과 일곱 겹의 구슬발과 일곱 겹의 가로수가 있는데 모두 네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서 두루 주변을 에워싸니 이런 까닭으로 저 나라를 극락이라 부르느니라.

또 사리불아 극락국토에 일곱 개의 보배연못이 있어 8공덕수(八功德水; 달고, 차고, 맑고, 가볍고, 깨끗하고, 냄새 없고, 마셔서 탈나지 않는 물, 즉 일급수)가 그 안에 가득하고 못 밑바닥은 순금모래로 덮여 있으며 사방 계단은 금, 은, 유리, 파려()로 합성되어 있고 위에 누각이 있는데 역시 금, 은, 유리, 파려, 자거(), 붉은 구슬, 마노(瑪瑙)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못 속의 연꽃은 크기가 수레바퀴만한데 푸른색은 푸른 빛을 내고 노란색은 노란 빛을 내며 붉은색은 붉은 빛을 내고 흰색은 흰 빛을 내며 미묘하고 맑은 향기를 내느니라.”
  
영산 불국토를 증표하는 다보탑  

    백운교 18계단과 청운교 15계단을 올라가 자하문을 지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 불국세계에 도달한다. 여기서 처음 마주치는 것이 대웅전 앞에 좌우로 벌려 서 있는 국보 20호 <다보탑(多寶塔)>과 국보 21호 <석가탑(釋迦塔)>이다. 바로 이 <다보탑>과 <석가탑>이 대웅전이라는 현판과 함께 이곳을 영산(靈山) 불국세계로 인정하게 하는 증표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즉 ‘법화경(法華經)’ 권5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석가세존은 미륵보살의 청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영취산(靈鷲山), 즉 영산불국세계에 무수한 세월을 살면서 불국세계를 이루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대들은 여래의 비밀스럽고 신통한 힘에 대해 자세히 들으라. 일체 세간과 천인, 아수라가 모두 이르되, ‘지금의 석가모니불은 석씨의 왕궁에서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한다.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제로 성불한 이래로 이미 한량없고 끝도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 지났다….

이로부터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법을 전해 중생들을 이롭게 했으며 또 다른 곳의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국토에서도 중생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였다. 모든 선남자여, 이 중간에 내가 연등불(燃燈佛)의 일들을 말하였으며 또 그 열반에 듦을 말하였으나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방편(方便)으로 분별한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펼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겁을 지나온 이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으나 실제로 멸도하지 않고 항상 이곳(영취산)에 머물러 설법하였다. 내가 항상 여기(영취산)에 머물러 있어도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 삐뚤어진 중생은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중생이 이미 믿고 따라서 곧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부처님을 뵙고자 하며 목숨조차 아끼지 않으면 그때 나와 뭇 승려들이 함께 영취산에 나타나리라….

겁이 다하여 큰불에 모두 타는 것을 중생이 볼 때도 내 이 국토는 안온하여 천인(天人)이 항상 가득하고 동산 숲과 여러 집들은 갖가지 보배로 꾸며지며 보배로운 나무에는 꽃과 과일이 많이 달리고 중생들이 노는 곳에 여러 천인들이 하늘 북을 치면서 항상 온갖 기악을 연주하며 만다라 꽃으로 비를 내려 부처님과 대중에게 뿌리리라.”

그러니 영산 불국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에 현존하는 불국세계로 우리에게 불법을 가르쳐서 교화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상주처(常住處; 항상 머무는 곳)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 불국세계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고 중요한 불국세계이므로 불국사의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심에 놓아 정문을 통해서 맨처음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이곳이 영산 불국토임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보탑>과 <석가탑>을 대웅전 앞에 쌍으로 벌려 놓았다. 그 이유는 ‘법화경’ 권4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시자 그 앞에 높이가 500유순, 가로 세로가 250유순이 되는 칠보탑(七寶塔)이 땅에서 솟아나온다. 이에 법회에 모여 있던 모든 회중(會衆)이 보탑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보탑 속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런 말이었다. “석가모니 세존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시어 법을 가르치시니 이는 모두 진실이다.”

이에 무리 속에 있던 대요설(大樂說)보살이 석가세존께 그 까닭을 여쭈니 석가세존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득한 옛날 동방의 먼 나라인 보정국(寶淨國)에 다보불(多寶佛)이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보살도를 닦으실 때 이런 서원(誓願)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성불하고 나서 멸도(滅度; 열반에 듦, 즉 돌아감)한 후에 시방국토(十方國土; 모든 국토)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다면, 나의 탑묘는 이 경을 듣기 위해 그 앞에 솟아나서 증명하며 잘한다고 찬탄하게 하소서” 하는 내용이다. 이 말을 듣자 대요설보살은 이 다보불을 뵙고 싶다고 한다. 석가세존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다보불께서는 깊고 깊은 소원이 있으니, 만약 보탑이 ‘법화경’ 설하는 것을 듣기 위해 나타났을 때 다보불 자신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부처님의 일체 분신불(分身佛)을 모두 그곳으로 모이게 한 뒤에라야 대중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석가세존은 이 말씀 끝에 대요설보살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눈썹 사이 백호(白毫)에서 솟아나오는 백호광(光)으로 신호를 보내 사방 무수 국토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일체 분신불을 불러모은다. 헤아릴수없이 많은 분신불들이 모두 달려와 나무 아래 사자좌(獅子座)에 자리잡고 각기 시자를 보내 석가모니불께 문안드리고 나서 보탑의 문을 열어주십사 하고 청한다.

이에 석가세존께서는 오른손으로 칠보탑의 문을 여니 성문을 여닫을 때 나는 것처럼 큰 소리가 나며 열리는데 다보불은 사자좌에 앉으시어 선정(禪定)에 든 듯 몸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석가불께서 이 ‘법화경’을 설하시므로 내가 이 경을 듣기 위해 여기에 이르렀노라.” 모여 있던 대중은 헤아릴수없이 많은 과거의 천만겁 전에 멸도하신 다보불이 이와 같이 말씀까지 하시는 것을 듣고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찬탄하며 하늘의 보화(天寶華)를 모아 다보불과 석가모니불 위에 뿌려 공경한다.

이때 다보불은 보탑 가운데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모니불께 내어드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어,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청을 받아들여 보탑 안으로 들어가서 그 반쪽자리에 앉아 결가부좌를 트셨다. 이렇게 두 분 부처님께서 칠보탑중의 사자좌 위에 결가부좌하시는 것을 본 대중은 부처님들이 너무 높이 올라앉아 뵐 수 없으니 신통력으로 우리를 허공에 뜨게 하소서 하고 염원(念願)하니 대중이 모두 허공에 떠올랐다.

이때 큰 소리가 있어 대중에게 고하되, “누가 능히 사바국토에서 ‘묘법연화경’을 널리 설할 수 있겠느냐.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여래께서 머지않아 열반에 드실 터이므로 이 ‘묘법연화경’을 전해주어 세상에 남게 하고자 하심이다”라고 하였다.

독창적인 불국사 다보탑  

    이런 내용을 조형예술로 표현한 것이 <다보탑>이다. 다보여래의 전신탑이라는 의미로 <다보탑>이라 하였는데 칠보로 장식된 화려하고 장엄한 탑으로 묘사되어 법화신앙이 팽배하던 남북조시대에 벌써 중국사람들이 다보탑을 널리 만들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당고종 건봉(乾封) 2년(667)에 혜상(惠祥)이 지은 ‘홍찬법화경(弘贊法華經)’ 권1에서 다보탑 건립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진(東晋) 애제(哀帝) 흥녕(興寧) 2년(364)에 혜력(慧力)이라는 승려가 건강(建康; 현재 남경) 와관사(瓦官寺)에 돌로 다보탑 하나를 만들었다.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5년(428) 팽성(彭城) 사람 유불애(劉佛愛)가 건강에 다보사를 짓고 또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제(齊)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479)에 예주(豫州)자사(刺史) 호해지(胡諧之)가 종산(鍾山)에 법음사(法音寺)를 지으니 사인(舍人) 서엄조(徐儼助)가 석조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당나라 국자좨주 소경(簫璟)은 난릉(蘭陵) 사람인데 양무제의 현손으로 누님이 수양제의 황후가 되었다.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불법을 깊이 믿었으므로 수양제 대업(大業, 605∼616년) 중에 스스로 ‘법화경’을 외우다가 경문(經文)에 의지하여 다보탑을 만들었는데 전단 향나무로 하였다.”

4세기 중반부터 혜상이 ‘홍찬법화경’을 지을 당시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다보탑이 끊임없이 조성되고 있었던 사실을 헤아려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와 더불어 다보탑 안에 다보불과 석가모니불이 반자리씩 차지하고 함께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도 무수하게 만들어졌다.

따라서 불국사 다보탑도 중국의 이전 역대 다보탑을 널리 참고한 다음 그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독창성을 발휘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아야겠다. 현재 중국에서 기록에 남은 다보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아 전체 중국 다보탑 형식을 일괄해서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운강석굴에서 보이는 다보탑은 한결같이 지붕과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목조다층탑 양식으로 그 초층이나 3층 등에 <이불병좌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와 비교해보면 불국사 다보탑은 그 조형적 연계성은 그만두더라도 다보탑에 대한 기본 이해에서 판이한 자세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불국사 다보탑은 중국식의 누각형 층탑개념에서 벗어나 스투파(stu-pa) 원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우리 석탑양식의 진전 성과를 총체적으로 종합해내려는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는 그 동안 성덕왕릉을 비롯한 스투파식 왕릉을 축조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다보탑 건립의장에 영향을 끼친 결과일 수도 있다. ‘법화경’ 권4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을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탑(七寶塔)이 있으니 높이는 500유순이고 가로와 세로는 250유순인데 땅에서 솟아나와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갖가지 보물로 장식하니 오천의 난간과 천만의 감실(龕室)이 있고 무수한 당번(幢)으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보배영락을 드리우고 보배방울 만억을 그 위에 달았다. 사면(四面)에서 모두 다마라발전단향(多滅跋檀香)의 향기가 나와 세계에 두루 가득 차고, 모든 번개(幡蓋)는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진주, 매괴 등 칠보(七寶)로 합쳐 만드니 높이가 사천왕(四天王) 궁전까지 이르렀다.”

이런 내용을 가능한 한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불국사 다보탑이다. 그래서 층마다 난간이 둘리고, 감실이 2층 탑신석 둘레 팔면(八面)에 새겨졌다. 지대석과 초층기단은 일반 석탑이 가지는 구조대로 기둥을 세우고 벽면을 친 목조결구의 번안 형태인데, 다만 초층 탑신으로 오르는 계단이 사방 중앙에 설치되어 기단 평면이 십(十)자형으로 된 것이 일반 석탑과 크게 다르다.
  
인도탑과 중국탑  

    본래 인도에서 전륜성왕이거나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봉안하기 위해서 스투파(Stu-pa, 塔婆)를 건립하였는데 그것이 곧 왕릉(王陵)에 해당하는 무덤이라 사발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반구형(半球形; 공을 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모양) 봉분(封墳)을 갖는다는 말을 이미 한 바 있다.

그래서 서기전 1세기경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산치대탑도 적색 사암(砂巖)으로 깎은 벽돌로 쌓은 둥근 봉분으로 이루어지고 그 주변은 역시 적색 사암으로 깎은 돌난간을 둘렀으며 돌난간과 봉분 기단 사이에는 지면석(地面石)을 깔아 요도(褥; 주변을 에워싸며 빙 둘러 난 길)를 삼았다.

그리고 봉분 상부에는 이를 장엄하는 둥근 합(盒; 밥 그릇) 뚜껑 모양의 윤보(輪寶)가 켜켜이 무쇠 찰주(刹柱; 탑의 중앙을 관통하는 기둥)에 꽂혀 있고 다시 이를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네모로 둘러쳐져 있다. 이것이 스투파의 원형이었으니 대승 율장(律藏)의 기본인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33 명잡송발거법(明雜誦跋渠法) 중 탑 만드는 법에서 그 제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구살라(拘薩羅)국에 머무시면서 나돌아다니시는데 그때에 바라문이 있어 땅을 갈다가 세존이 지나시는 것을 보고 소부리는 막대를 땅에 짚고 예불을 드린다. 석가 세존이 이를 보고 문득 미소를 지으니 여러 비구들이 무슨 까닭으로 웃으시느냐고 묻자 석가 세존은 이 바라문이 지금 두 분 세존께 예배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를 묻자 나에게 예배하였지만 그 막대기 아래에는 가섭불 탑이 있기 때문이라 하며 곧 그 자리에 흙으로 높이 1유순 사방 반 유순의 가섭불탑을 지어내 보이신다.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때에 세존이 스스로 가섭불탑을 세우는데, 아래 기단 사방에 난간을 돌렸다. 둥글게 2중으로 일으키어 모난 이빨 사방으로 빼내고, 위에는 반개(槃蓋; 쟁반같이 둥근 뚜껑)를 베풀어 윤상(輪相; 바퀴 모양)을 길게 표시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탑을 짓는 법은 응당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다.(爾時世尊, 自起迦葉佛塔, 下基四方 周欄楯. 圓起二重 方牙四出, 上施槃蓋 長表輪相. 佛言 作塔法應如是)”

이때 구살라국왕인 파사익(波斯匿)왕이 이 소문을 듣고 벽돌 700수레를 싣고 부처님께 찾아와서 이 탑을 벽돌로 짓고 싶다 한다. 석가세존은 이를 쾌히 허락하며 과거에도 가섭불탑은 벽돌탑이었다고 가르쳐 준다. 과거 가섭불이 열반에 들었을 때 길리(吉利)라는 임금이 칠보탑을 세우려 하였지만 한 신하가 이렇게 말하였다.

“미래세에 마땅히 불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나와 이 탑을 파괴하고 중죄를 지을 터이니 대왕께서는 응당 벽돌로 짓고 금은으로 그 위를 덮으십시오. 만약 금은을 취하는 자라면 탑은 그 때문에 온전할 수 있습니다.” 왕이 곧 신하의 말대로 벽돌로 짓고 금박으로 위를 덮으니 높이가 1유순이고 가로 세로가 반 유순이었다. 구리로 난간을 만들었는데 7년 7개월 7일이 지나서 완성되었다.

이로 보면 불사리탑은 벽돌로 둥글게 2단 봉분을 쌓고 그 상부를 금은 보화로 덮어 장식하며 그 둘레를 난간으로 두르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산치대탑과 같은 대형 탑도 이 제도를 따르게 되고, 그런 대탑 안에 봉헌(奉獻; 받들어 드림)되는 수많은 소형탑도 그 제도를 따르게 되었던 모양이다.

산치 제1탑의 북문기둥 <불탑예배도(佛塔禮拜圖)>돋을새김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고, 서기 1세기경에 중인도 아마라바디에서 만들진 <돋을새김 불탑도>에서도 이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으며, 2세기 후반경 간다라 지방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소형 봉헌탑 양식에서도 그 제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다라지방에서 만들어진 소형 봉헌탑의 경우는 공예적인 장식성이 보태져서 네모진 방형(方形) 기단부가 복발형(覆形; 사발을 엎어놓은 형태) 탑신(塔身; 탑의 몸체) 아래에 첨가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아마 대형 탑의 경우도 이렇게 방형 기단부를 더 첨가하여 방형과 원형의 변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탑파 양식을 진전시켰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로리안 탕가이 출토 봉헌탑>은 네모진 1층 기단 위에 2중의 둥근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난간을 두른 복발형 탑신을 안치한 다음 네모진 난간 받침을 사각 지붕처럼 여러 층으로 쌓아올리고 나서 7개의 사발 뚜껑 모양의 윤보를 찰주에 차례로 꽂아 나가 탑 전체를 덮었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윤보의 크기는 작아져서 전체적으로 원뿔 모양이다.

그런데 이때 이 방형 기단 네 귀퉁이에 아소카왕의 사자기념주와 같은 사자장식기둥을 세운 것도 있고 기단을 8각으로 변형시켜 탑신으로 오르는 계단을 그 사방에 설치한 경우도 있다. 이런 스투파 양식의 진전현상은 곧 중국에 영향을 끼쳐 중국 특유의 목탑(木塔)과 전탑(塼塔; 벽돌탑) 양식을 출현시킨다.

중인도나 서북인도에서는 각각 조각과 건축에 알맞은 부드러운 성질의 사암(砂岩)과 편암(片岩)이 대량 산출되므로 이런 석재로 불상을 조성하고 탑파도 건립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고운 황토와 목재가 풍부하여 건축이나 조각을 모두 이 두 가지 재료에 의존하였으므로 탑파도 나무로 짓는 목탑이거나 흙을 구운 벽돌로 짓는 전탑이 대종(大宗)을 이루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것이 목탑이었던 듯하니, 진수(陳壽, ?~279)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권49 유요전(劉繇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착융(融)이라는 자는 단양(丹陽)사람인데 처음 수백명을 모아 서주(徐州) 목사 도겸(陶謙)에게 가서 의탁하니 도겸이 광릉(廣陵)과 팽성(彭城)의 조운(遭運; 물길로 재화를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드디어 방종해져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3군(郡)의 일을 마음대로 하여 보내라고 맡긴 것들을 제 스스로 차지하였다. 이에 크게 부도사(浮屠祠; 佛塔)를 세웠는데 구리로 사람을 만들어 황금을 몸에 바르고 비단옷을 해 입혔으며, 구리 쟁반을 아홉 겹으로 드리우고 아래는 여러 층 누각으로 길을 내어 3000여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분명히 3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여러 층으로 된 누각 형태의 목탑을 건립하고 그 안에 금동불을 조성해 모셨던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 시기는 대체로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189)에서부터 헌제(獻帝) 초평(初平) 4년(193) 사이로 추측되는데, 이 시기 목조 누각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한묘(漢墓) 출토의 <도루(陶樓;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누각)>에서 대강 그 양식을 헤아려볼 수 있다.

사실 이런 형태의 목조탑 양식은 서기 480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운강석굴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개중에는 이불병좌상이 탑신 감실 안에 조각된 다보탑인 경우가 많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방목을 걸어 3층, 5층, 7층의 중층 건물을 올려가면서 각층의 지붕은 기와로 덮어간 사실을 기와 골과 연목까지 분명히 표현하면서 밝혀주고 있으니, 당시 목조탑이 이와 같은 양식을 갖추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강 제6굴 남벽 중층 중앙 불감 오른쪽 5층 다보탑도>에서 보면 2중의 석조 방형 기단 위에 5층의 목조 탑신이 세워지고 수미단 형태의 노반(露盤)이 최상층 기와지붕을 덮고 있는데 그 위로 국화잎처럼 생긴 두 가닥 풀잎 형태의 앙화(仰花)가 양쪽으로 피어나면서 공 모양의 복발(覆)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노반까지 꿰뚫고 내려온 찰주는 복발 위에서 삼지창(三枝創) 모양으로 갈라지면서 중앙에는 9개, 좌우에는 7개씩의 보륜을 촘촘하게 꿰고 끝에는 역시 공 모양의 둥근 구슬을 달고 있다. 보주(寶珠)이다. 이 노반 이상이 상륜부(上輪部)라 부르는 것으로, 인도의 스투파가 중국 문화권으로 들어오면서 중국식 탑으로 변형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요소이다.

사실 이 상륜부야말로 인도 스투파의 원형을 간직한 핵심 부분이다. 수미단 모양의 노반이 방형 기단에 해당하고, 풀잎 모양의 앙화가 난간에 해당하며, 공 모양의 복발이 복발형 탑신이고, 찰주와 보륜만이 원래 상륜부에 해당한다. 그러니 누각 형태의 여러 층 목조 건축은 사실 스투파의 중층 기단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문화권에서는 이 기단부를 탑이라 하고 스투파의 원모습인 상륜부는 탑의 최상부 장엄으로 치부하여 본말(本末)을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스투파의 의미가 극도로 왜곡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중국에 들어와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간다라지역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었는지는 갑자기 결론짓기 어렵다.

북위(北魏) 양현지(楊衒之)가 지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권5에 따르면 간다라성 동남 7리 밖에 카니슈카대왕이 세운 작리부도(雀離浮屠)가 13층 목탑으로 지어졌는데 높이가 700척(약 175m)이고 철간찰주(鐵杆刹柱) 높이만도 88척이고 금반(金槃), 즉 보륜이 15겹이었다 하니 벌써 이 13층 목탑에서부터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런 탑 양식의 변화는 건축이라면 당연히 목조가 기본이고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지으려면 반드시 여러 층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적 건축 상식과 만나게 되니, 스투파를 높이 짓기 위해 고층의 목조 건축을 이룩한다는 생각보다는 고층의 목조 건축 그 자체가 탑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것은 벽돌로 짓는 전탑에서도 같이 진행된 현상이었다. 그래서 수(隋) 문제(文帝) 인수(仁壽) 2년(602)에 지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소재 <영태사 11층 전탑(永泰寺十一層塼塔)>에서도 이런 본말전도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불탑의 기원  

    우리나라에서 불탑이 언제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불탑 초건을 짐작하게 할 만한 기록도 없고 그 유적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1938년 평양 모란봉 동북쪽 약 3km 지점인 주암산(酒岩山) 서쪽 기슭의 청암리(淸岩里)에서 절 터를 찾아내 발굴한 결과 8각 목탑 터가 확인됐는데, 이곳이 ‘삼국사기’에서 밝힌 대로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7년(498) 7월에 지었다는 금강사(金剛寺)로 추정하고 8각 목탑 터를 가장 오래된 목탑 터로 지목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 탑파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을 꼽자면 백제 무왕 원년(600)경에 세워졌으리라 추측하는 익산 <미륵사지 9층석탑>의 잔존 유구를 들 수 있다. 현재는 6층 옥개석 일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탑으로 복원 높이가 20여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은 미륵사의 삼소(三所) 전탑(殿塔) 중 서탑(西塔)에 해당하는 것으로 1980년부터 발굴 조사한 결과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서 밝힌 것처럼 동쪽에 이와 똑같은 석탑 터가 있고 그 사이 중앙에 이보다 더 큰 규모의 목탑 터가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이 석탑 양식이 어째서 목조탑의 번안 형식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이미 중앙의 목조탑을 거대한 규모로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석재(石材)를 써서 그 목조탑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 현재 일부만 남은 <미륵사지 9층석탑>이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석재가 석조적 기능을 살려내지 못하고 목조적 결구로 일관하게 되니 재질과 기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미숙하고 어설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석재를 건축 자재로 쓰면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짜맞추는 방법을 썼다는 것은 석조 건축사에서 일대 혁신이 아닐 수 없었다. 석조 건축에 대한 보편적 관념을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기둥을 세우고 아래위로 방목을 짜맞추어 벽면을 만들고 장혀를 걸고 연목을 얹어 지붕을 받치는 목조 누각 형식이 기본 골격을 이루는 독특한 석탑 양식을 탄생시킨다.

<미륵사지 9층석탑>에서 최초의 실험을 거친 목조 결구의 석탑 양식은 의자왕 초년(640)경에 만들어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서 석조적 기능을 살리는 쪽으로 대폭 양식정비를 이룩한다. 별개의 돌기둥을 별개의 주춧돌이 하나하나 받칠 만큼 석재의 석조 기능을 외면했던 <미륵사지 9층석탑>의 미숙성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석재의 석조적 기능을 대폭 강화하여 기둥과 면석을 합쳐 나가고 창방과 평방이나 하방을 아래위 굄돌로 단순화시키며 포작이나 장혀, 연목도 마름모꼴 옥개 받침으로 세련되게 통합해낸다. <미륵사지 9층석탑>에서 얇은 판석으로 물매를 느리게 잡고 내림마루의 네 귀를 살짝 들어 경쾌한 기와 지붕을 상징했던 옥개석은, 사면의 처마 끝을 곡선으로 처리하면서 내림마루 끝을 더욱 가볍게 추켜 올려 산뜻한 느낌을 한층 강조하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3년(634)경 분황사(芬皇寺)에 <분황사 9층모전탑(芬皇寺九層模塼塔)>을 건립한다. 북중국으로부터 고구려를 거쳐 전해진 벽돌탑 양식의 영향을 받아 안산암(安山岩)을 벽돌처럼 다듬어 벽돌탑처럼 쌓은 것이다. 그러니 그 지붕은 지붕 밑도 벽돌로 층급을 이루며 받쳐 나가게 되었고 지붕 위 물매도 벽돌로 층급을 이루며 쌓여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고구려계의 벽돌탑 옥개석 양식과 <미륵사지 9층석탑>으로부터 <정림사지 5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계의 목조탑식 옥개석 양식이 혼합되어 신문왕 초년(681)경에 건립되는 <감은사지 쌍3층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지는 <고선사(高仙寺)지 3층석탑)>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백제식 물매에 고구려식 층급받침을 가진 독특한 통일신라 석탑 옥개석 양식을 창안하여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이루어놓는다. 이 탑들에서는 벌써 상하 2층 기단에 각각 아래층은 기둥이 5개, 위층은 기둥이 4개라는 양식 기준도 생긴다.

<고선사지 3층석탑>에서는 옥개석과 옥개석 층급받침돌들이 각각 네 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데 비해 <감은사지 3층석탑>에서는 옥개석 아래위가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네 쪽이 나 있어서 <고선사지 3층석탑>이 조금은 앞선 양식인 듯하다.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완성시킨 석가탑  

    이런 석탑 양식이 <불국사 석가탑>에 이르면 또 한 단계의 과감한 양식 진전을 감행하여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완성해 놓는다. 기둥이나 면석, 옥개 등 각 부재를 짜맞추어 석탑을 짓는 목조적 잔재를 청산하고 석재가 가지는 괴체성(塊體性)을 살려내 가능한 한 통돌로 쌓아올리는 축조적(築造的) 석조 건축 방식을 되살려낸 것이다.

그래서 석재 수를 줄이기 위해 하층 기단부에서는 기단부 전체를 몇 개의 통돌로 나누어 기둥과 면석 갑석 등을 새겨서 표시하고, 상층 기단에서도 면석과 기둥을 한 돌에 새겼으며, 상층 기단 갑석도 초층 탑신의 받침까지 한 돌에 새겨서 네 쪽을 조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초층 탑신석부터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모두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져 여러 개 돌로 조합하던 이전의 목조 양식의 잔재에서 완전 탈피한다.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한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 돌을 짜맞출 때 생기는 불필요한 결구적 과장성이 생략되어 옥개석의 물매는 짧아지고 층급받침도 얇아지며 물매와 내림마루의 네 귀솟음이 더욱 날카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자연 초층 탑신은 폭이 좁아지면서 높이가 높아지고 2층 이상의 탑신석 높이와 폭에서 체감률이 둔화되니 탑 모양은 전대의 목조적 잔재가 남아 있던 석탑 양식에 비해 훨씬 고준(高峻; 높고 험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굳세고 날카로우며 산뜻한 느낌을 자아내니 우리 민족의 고유 미감인 강경명정성(剛硬明正性)에 합치되는 양식 기법이라 하겠다.

이에 <불국사 석가탑>은 이후 통일신라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일반적 석탑 양식의 절대 기준으로 영원히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이 석가탑 주위 사방 지면에는 각 모서리와 중앙에 활짝 핀 연꽃 한 송이씩을 조각해 깔아놓고 있는데 그 사이를 각각 2매의 장대석으로 연결해서 탑을 에워싸도록 하였다.

탑의 존엄성을 살리기 위해 접근을 금지하는 성역의 표시였으리라 생각되지만 다보탑의 4방 계단과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특수 의장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서는 팔방금강좌대(八方金剛座臺)라 일컫고 있다.

석가탑의 높이는 8.2m이고 기단 폭은 4.4m인데 상륜부는 원래 노반과 복발, 앙화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불국사 복원 공사를 하면서 남원 <실상사(實相寺) 쌍3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따서 현재와 같이 만들어 놓았다.

이 탑은 1966년 9월 두 차례의 도굴 시도가 있고 나서 10월에 탑 속의 사리장치 안전 여부를 검색하기 위해 상층부를 해체하였는데 이때 2층 탑신석 중앙에 마련한 사방 41cm, 깊이 19cm의 네모진 사리공안에서 사리장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각종 공양구에 둘러싸여 있던 금동제 사리외함은 인동무늬로 맞뚫린 벽을 가진 가마 모양인데, 그 안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길이 6.45m 폭 6.7cm)’과 금동제의 네모난 사리함과 은제 사리합 등이 들어 있었고 다시 그 속의 녹유리 사리병 등에는 46과(顆)의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다.

세계 불탑양식의 총화인 다보탑  

    석가탑에서는 목조의 잔재를 청산하여 석조 건축의 본령인 축조로 환원하는 획기적인 양식정비를 하였는데, 동시에 대칭으로 세워진 다보탑에서는 정반대로 철저하게 목조탑의 결구 방식을 완결짓는 과감한 양식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래서 지대석 위에 기단을 한층만 높이 세우되 기둥과 벽면으로 이루어진 목조적 결구를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 각 부재를 딴돌로 사용하였으며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의 부재도 독립된 별개의 돌로 짜맞추고 있다.

초층 탑신은 네모진 큰 돌기둥 넷을 세워 그 사이 빈 공간으로 하여금 벽면이나 문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게 하였다. 그런데 방목(枋木)이나 포작(包作), 뺄목 등 기둥 위에 얹는 복잡한 결구를 함축하기 위해 각 기둥머리 위에는 십(十)자형의 굄돌을 첨차(遮) 형태로 깎아 받쳤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장혀나 연목, 부연 등 지붕을 받치는 복잡한 목조 부재들을 상징하기 위해 양 끝을 첨차 형태로 다듬은 장대석을 4면에 가로로 걸쳐 얹어놓은 다음 <정림사지 5층석탑>의 옥개석 같은 얇은 옥개석을 그 위에 덮었다. 목조 결구를 석조로 추상화한 것이다. 탑 내 중앙에 다시 그만한 크기의 네모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은 목탑의 찰주(擦柱)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2층으로 가면 네모지게 돌린 난간 안에 각면마다 감실(龕室)이 설치된 8각 탑신이 있고 그 위 3층으로 가면 다시 난간이 8면으로 돌려지면서 8개의 대나무 형태 돌기둥이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을 받치고 있는데 그 대나무 기둥 안에는 8각형의 탑신석이 있다. 꽃잎 16장으로 이루어진 만개한 연꽃 위에는 8모로 이루어진 씨방이 놓이고 그 씨방에서 8개의 꽃술이 마치 목화(木靴; 예전 벼슬아치들이 신던 목이 긴 신발)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솟아나서 최상층 옥개석을 떠받치고 있다.

최상층 탑신석은 8면으로 8개의 꽃술이 에워싸 보호하고 있으며, 최상층 옥개석은 최하층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정림사지 5층석탑> 계열의 평판형 옥개석인데 다만 최하층 옥개석과 달리 8면으로 되어 있어 물매귀가 8개이다. 철저하게 목조적 결구 방식으로 일관되게 짜맞춰진 건축기법이다.

그러나 2층 이상의 탑신석은 중국문화권 내 일반 탑파의 탑신석과 같이 단순한 건축적 요소가 아니다. 인도의 스투파에서 보이던 복발형 탑신석의 원래 의미를 되찾은 왕릉 봉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난간을 층마다 돌려가며 그 봉분을 장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보탑은 목조 결구로 석조탑의 원뜻을 살린 3단 변화의 완성체라 할 수 있다. 석탑을 목탑으로 바꾼 다음 목탑을 석탑으로 다시 바꿨는데 그 목조적 석탑 양식으로 반구형의 봉분을 가지고 있던 초기 석탑의 본뜻을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최상층 옥개석 위로는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륜이 차례로 석조 찰주에 꽂혀 있다. 본래는 석사자 4마리가 초층 탑신 4방에 놓여 있었다 하는데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다.

그리고 현재는 연화대좌가 상하로 설치되어 있지만 그 사이 간주(間柱)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간다라 출토 사리소탑>에서 사자 기둥이 기단 네 모서리에 세워진 예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보탑은 가까이는 <미륵사지 9층석탑>으로부터 <정림사지 5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의 목조 결구를 이어받고, 멀리는 운강석굴의 다보탑이나 간다라 지방의 여러 석조탑 양식까지 참고하여 여러 탑 양식의 기본 구조와 건축 방식을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완성해낸 석탑 양식이라 해야 하겠다.

즉 모든 재료로 지어졌던 세계적 불탑 양식을 총체적으로 종합하여 한 송이 연꽃으로 승화시켜낸 추상적인 탑이라 할 수 있다. 총 높이 10.4m, 기단폭 4.4m이다. 1925년경 일본인들이 수리하였으나 기록이나 출현 유물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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