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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5
 관리자  08-22 | VIEW : 5,013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5]


  통일신라 이끈 3대 패밀리의 불교신앙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황복사지 3층석탑에서 쏟아져 나온 국보들


    1942년 6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경주 낭산(狼山) 북동쪽 구황동 (九黃洞)에있는 황복사지(皇福寺址) 3층석탑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해체하였다. 이곳이 의상(義湘, 625∼702년)대사가 출가한 사찰이며 의상이 만년에 제자들과 더불어 허공에 떠서 탑돌이를 하였다는 내용이‘삼국유사’권4 의상전교(義湘傳敎)에 실려 있었으므로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일인 학자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금당(金堂, 법당)터 기단부에서 12지신상(十二支神像; 열두 해 띠를 상징하는 동물신상) 조각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결과였다.
  이때는 일본이 1941년 12월8일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싱가포르와 자바 등을 차례로 점령하여 표면적으로는 승승장구하던 시기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내심 그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조선 점령 이후 30여년간 우리 문화 유산을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의 실습대상으로 삼아 학술적인 조사라는 명목으로 발굴과 해체를 거침없이 자행하여 수많은 중요 문화유산들을 공식 비공식적으로 파괴하고 탈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호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감이 엄습하자 일인 전문가들은 우리 문화 유산의 해체와 발굴에 더욱 조급증을 내며 광분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보 37호인 <황복사지 3층석탑>도 해체 수리의 수난을 겪게 되었다. 과연 그들이 예측했던 대로 <황복사지 3층석탑>을 해체해 나가자 제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돌) 위에서 사리(舍利; 화장하고 남은 부처의 유골, 각종 보석 형태의 낱알을 이루고 있음)를 봉안하기 위해 마련한 사리장치(舍利藏置; 사리를 넣어두기 위한 설비)가 발견되었다.
  네모지게 파낸 사리공(舍利孔; 사리장치를 모시기 위해 파낸 구멍) 안에는 금동으로 만든 외함(外函, 겉함)이 꽉 들어차 있었다. 외함은 각변이 30cm에 높이 21.3cm인 정방형 함인데,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은으로 만든 네모난 은제 합(盒, 각 변 5.9cm)과 순금으로 만든 2구의 불상(국보 79호, 80호) 및 높이 6cm 정도의 고배 (高杯)형 금잔 한 쌍과 은잔 한 쌍,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1권, 각종 유리 옥(玉)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네모난 은합 속에는 다시 높이와 각 변이 2.3cm인 정방형 금합이 들어 있고 금합 안에는 녹색 유리병 속에 사리가 모셔져 있었다. 외함 사방 표면에는 99기의 소탑이 점각(點刻; 송곳 끝으로 점을 찍어 조각함)되어 있고, 뚜껑 안쪽 면에는 350여 자나 되는 장문의 명문(銘文)이 철필(鐵筆, 쇠붓)로 씌어 있었다.

  3층석탑의 내력

  탑 안 유물들을 대강 확인하고 이를 수습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오자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모여들더니 천둥 번개를 치며 장대같은 비를 퍼부었다. 이에 탑의 해체를 주도했던 일인학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랐고 이를 목도한 경주 사람들은  불벌(佛罰)이 무심치 않음에 쾌재를 불렀다 한다.
뚜껑 안쪽에 새겨 놓은 명문은 이 탑의 조성 내력을 밝힌 것인데, 이 시대에 남겨진 완전한 일차사료(一次史料; 일차적인 역사 자료)가 전무하던 상황에서 가히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아래에 문장 전체를 모두 옮겨보겠다.

“대저 성인(聖人)은 팔짱을 끼고 있어도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창생(蒼生;세상의 모든 사람 내지 모든 생명체)을 길러내고 지덕(至德;지극히 큰 덕이니, 임금이나 성자를 가리킴)은 하는 일이 없어도 염부(閻浮;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알맞게 군유(群有; 세상의 모든 존재)를 제도(濟度; 보살이 중생을 고해에서 건져 저쪽 언덕에 있는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줌)한다.
  신문(神文)대왕도 5계(五戒; 세속인이 지켜야 할 5 종류의 금계 - 殺生, 偸盜, 邪淫, 妄語, 飮酒)로 세상을 이끌고 10선(十善; 5계 외에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5종류의 금계 - 食肉, 邪見, 毁謗, 欺, 貪을 범하지 않는 것을 10선이라 함)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정치가 안정되고 공업(功業)이 성취되자 천수(天授) 3년(692) 임진 7월에 승천(乘天)하니 그런 까닭으로 신목(神穆)태후와 효조(孝照)대왕은 종조(임금의 시신)와 성령(聖靈; 임금의 혼령)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 선원이나 가람 모두 절이라는 의미)에 3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성력(聖曆) 3년(700) 경자 6월 1일에는 신목태후가 드디어 길게 이별하고 깨끗한 나라로 오르시었으며(돌아갔으며), 대족(大足) 2년(702) 임인 7월 27일에는 효조대왕이 등하(登霞; 노을 속으로 올라감, 즉 임금이 돌아감. 登遐, 昇遐 등으로 쓰기도 함)하였다.
  신룡(神龍) 2년(706) 병오 5월 30일에 지금의 주상인 대왕(성덕왕)이 부처님 사리 4알과 전금(全金, 순금) 미타상 6치(寸)짜리 1구(軀)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 제 2층 위에 안치한다. 이 복전(福田;복을 낳게 하는 밭이라는 의미니 사리장치를 봉안한 공덕을 일컬음)으로 밑천을 삼도록 올리니 신문대왕과 신목태후와 효조대왕의 대대 성조는 열반(涅槃, 해탈)의 산을 베고 보리(菩提, 大覺)의 나무 아래에 앉으소서.
  융기(隆基)대왕(성덕왕)의 목숨은 산하(山河)와 같이 오래고 지위는 마른 시내와 같이 영원하며 대천(大千; 1000의 제곱이니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의미)의 아들들이 충족하게 갖추어지고 칠보(七寶; 전륜성왕이 가지고 있는 7종 보배- 輪寶, 象寶, 馬寶, 如意珠寶, 女寶, 將寶, 主藏臣寶)가 상서로움을 드리게 하소서.
  왕후의 몸은 월정마니(月精摩尼, 月愛珠, 달과 같이 생긴 구슬)와 같고 수명은 임금과 같은 숫자가 되게 하소서. 내외 친속이 점점 자라나 커져서 옥수(玉樹, 임금의 자손)가 보배로운 가지를 더욱 무성하고 알차게 하도록 하소서. 범천왕과 제석천 및 4천왕은 위엄과 덕망이 더욱 밝고 기력(氣力)이 자유로워 천하를 태평하게 하고 항상 법륜(法輪; 불타의 정법으로 이루어진 수레바퀴, 즉 막힘 없이 전파되어 나가는 불교 교법)을 굴려가게 하소서.
  3도(三途;地獄, 餓鬼, 畜生)에서 어려움을 면하게 하고 6취(六趣; 天, 人, 阿修羅, 畜生, 餓鬼, 地獄)에서 즐거움을 받게 하며 법계의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佛道)를 이룩하게 하소서. 사주(寺主)인 사문(沙門) 선륜(善倫)과 소판(蘇判) 김순원(金順元)과 김흥종(金興宗)이 특별히 교지(敎旨)를 받들다.
승인(僧人)영준(令儁), 승인 영태(令太), 한내마(韓柰麻)인 아모 (阿摸), 한사(韓舍)인 계력(季曆), 탑전승(塔典僧)인 혜안(惠岸), 승인 심상(心尙), 승인 원각(元覺), 승인 현방(玄昉), 한사인 일인 (一仁), 한사인 전극(全極), 사지(舍知)인 조양(朝陽), 사지인 순절 (純節), 장인(匠人)인 계생(季生), 알온(閼溫).”

  여기서 돌아간 신문왕(650년 경∼692년)의 추복(追福)을 위해 신문 왕의 왕비인 신목태후(神穆太后, 655년 경∼700년)와 새 왕으로 등극한 신문왕의 장자 효조왕(孝照王, 687∼702년)에 의해 기왕에 지어져 있던 황복사 경내에 3층 석탑이 새로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19세(‘삼국유사’에서는 29세에 출가했다고 하고있으나,‘부석본비(浮石本碑)’나 최치원이 지은 ‘기진원문 (寄進願文)’에서는 모두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고 했으므로 19세 출가로보아야 한다)에 출가한 절이므로 이미 선덕여왕 12년(643) 이전에 창건된 절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동쪽 부근 보문동에 <진평왕 릉>(사적 180호)이 있으니 혹시 진평왕의 추복사찰로 지어졌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뒤바뀐 신문왕릉과 효조왕릉

  그러던 것이 신문왕의 추복을 위해 이 3층 석탑을 세우면서 신문왕 추복사찰이 되었다. 그 이유는 <신문왕릉>을 이 황복사 바로 동쪽 곁에 썼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강우방 경주 박물관장은 일찍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재 < 신문왕릉>(사적 181호)으로 알려진 <망덕사지>(사적 7호) 동편 낭산 남쪽 기슭의 왕릉을 효조왕릉으로 보았다. ‘삼국사기’권8 효소왕 (孝昭王,照를昭라고 한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오자를 낸 것이 그대로 굳어진 탓이라 생각되니 마땅히 원래 시호대로 효조왕이라 불러야 한다) 본기 11년(702)년 가을 7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왕이돌아가서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편에 장사지내었다.”

  그런데 현재 <효소왕릉>(사적 184호)이라고 알려진 곳은 <망덕사지> 에서 동쪽으로 20여 리 떨어져 있는 <성덕왕릉>(사적 28호) 바로 서쪽 곁에 있다. 강우방은 이 사실의 불합리성을 간파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 지냈다”(‘삼국사기’ 권8 신문왕 12년 추 7월 조)는 기록에 따라 신문왕릉의 소재를 황복사지 3층 석탑에서 불과 250m 떨어진 동쪽 지점에서 이를 확인하는 연구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왕릉 호석(護石)의 출현과 12지신상 조각 장식의 양식 진전 상황을 추적하여 황복사지 금당 기단석으로 사용한 12지신상 호석이 파릉된<신문왕릉>에서 옮겨 쓴 것이라는 명쾌한 결론을 내려 이론(異論)을 제기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그의 주장을 간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왕릉에 호석을 두르기 시작한 것은 효조왕릉부터인데, 효조왕릉에서는 네모난 잡석을 대강 다듬어 축대를 쌓듯 축조하고 나서 다듬은 삼각형 받침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빙 둘러가며 받쳐 놓아 그 붕괴를 막으려한, 서툰 기법을 보인다. 그러던 것이 그 아우 성덕왕(聖德王, 690년 경∼737년)의 왕릉에 가서는 소형 잡석 대신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 낸 판석(板石)을 둘러가며 받침기둥돌(撑柱石)을 사이 사이에 박아서 짜맞추어 나가는 방식으로 발전시키면서, 외부에서 호석을 받치던 3각형 받침돌은 효조왕릉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받침 기둥돌을 외부에서 맞받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경덕왕(723년 경∼765년) 13년경(754) 성덕왕릉에 비석을 세우면서 왕릉 호석의 받침기둥 사이 공간에 12지신상을 입체상으 조각하여 장식하고 또 왕릉 둘레에 돌난간을 세워 이를 장엄하였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성덕왕릉의 12지신상 조각은 일정한 공간 배분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난간과 받침돌이 서로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타당한 견해다.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왕의 왕릉 장엄에서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나서 호석이 없던 조부 신문왕의 왕릉에 본격적인 호석 추가 사업을 벌이게 되었으리라 추정하였다. 그 결과 신문왕릉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12지신상 호석 양식을 최초로 갖추게 되었다고 하였다.
  외면에서 받침기둥돌을 받치던 삼각형 받침돌과 내면에서 호석의 판석을 고정하던 받침기둥돌을 하나로 합쳐 받침 기둥돌뿌리를 삼각형으로 길게 뽑아 봉토 안으로 깊이 박아 고정하면서 그 표면을 넓혀 장방형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12지신상을 하나씩 돋을새김해 나갔다는 것이다.
  당연히 호석 전체를 12등분하여 일정하게 공간을 배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발굴과 실측 조사 및 복원도 작성 등으로 확인하여 논고로 세상에 발표하였으므로 황복사지 3층석탑에서 동쪽으로 250m 떨어진 지점에 신문왕릉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신문왕릉에 신문왕과 그 왕비인 신목태후가 합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과부가 된 신목태후가 바로 부군인 신문왕을 위해서 맏아들인 효조왕과 함께 <황복사지 3층석탑>을 건립하였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목태후의 둘째 아들인 성덕왕이 등극하고 나서 왕 5년(706)에 모후인 신목태후와 형왕인 효조왕의 추복을 함께 빌기 위해 부처님 사리 4알과 순금제 아미타불 상 1구 및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 등을 추가 봉안하며, 사리와 함을 다시 만들고 그 뚜껑 안쪽에 그런 사실을 글로 지어 새겨 놓고 있음에야!

  신문왕비 신목태후는 요석공주의 딸

  사실 이 황복사 3층 석탑을 건립한 사람은 신목태후 자신이었다. 효조왕이 즉위할 때 그는 겨우 6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다. 그러니 신목태후가 섭정이 되어 만기(萬機; 만 가지 일의 기틀이란 의미로 임금이 보살피는 모든 정사)를 재단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때 신목태후 나이는 38세 어름이었다. 전회에서 잠시 언급하였듯 신목태후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사위인 김흠운(金運, ?∼655년)과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따님으로 유복녀였을 듯하다. 그의 부친인 김흠운이 무열왕 2년(655)에 왕명을 받고 낭당대감(郎幢大監)이 되어 백제를 정벌하려고 양산(陽山, 옥천)의 조비천성(助比川城, 飛鳳山城)을 공격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권 47 김흠운전(金運傳)에서 그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흠운은 내물왕 8세손으로 부친은 달복(達福) 잡찬이었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김문노(金門努)의 문하에 나가 놀았는데 그때 낭도들이 서로 말하기를 아무개는 어느 전투에 나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들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흠운은 정의감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격려하며 그와 같고자 하는 생각을 얼굴에 드러내었다. 동문의 승려였던 전밀(轉密)이 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한다.‘이 사람이 만약 적진에 나간다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영휘(永徽) 6년, 즉 태종 무열왕 2년(655)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집적거리는 일에 분통을 터뜨리고 이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출동하면서 흠운으로 낭당대감을 삼았다. 이에 흠운은 집에 서 자지도 않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빗물로 목욕하며 사졸과 더불어 달고 쓴 것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에 이르러 양산 아래 군영을 설치고 조비천성을 공격하려 하는데 백제인이 밤을 타고 급히 몰려와서 새벽에 보루(堡壘)를 타고 넘어 들어오니 신라군은 놀라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진정할 수 없었다. 백제군이 이런 어지러움을 틈타 급히 공격하자 나르는 화살이 비처럼 모여들었다.
  흠운이 말을 빗겨 타고 창을 꼬나 잡아 적을 기다리자 대사 전지(詮知)가 이렇게 달랬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서로 가릴 수가 없으니 공이 비록 죽는다 해도 알아볼 사람이 없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골(貴骨)이요 대왕의 반자(半子, 사위)임에야! 만약 공이 적들 손에 죽는다면 백제는 자랑하며 떠들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은 깊이 부끄러워 할 것이다.’
  그러자 흠운은 이렇게 말하였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면 남이 알고 모르고는 매 한가지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겠는가.’ 버티고 서서 움쩍도 하지 않자 시종한 사람이 고삐를 잡고 돌아갈 것을 권하니 흠운은 칼을 빼 이를 뿌리치고 적과 싸워 몇 사람 을 죽이고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도 함께 나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는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분은 골품이 귀하고 가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까워하는 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거늘 하물며 보용나처럼 살아도 이익될 게 없고 죽어도 손해날 게 없음에서이겠는가!’ 그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태종대왕은 이를 듣고 몹시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을 추증하고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지위를 추증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따라서 김흠운의 장렬한 전사는 진골 귀족 청소년들의 귀감이 되어 장차 백제 정벌전에서 소년 화랑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에 뛰어드는 용맹을 떨치게 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김흠운의 장렬한 전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태종 무열왕의 체면을 세우고도 남는 것이었다. 태종 대왕에게는 맏사위 김품석(金品釋, ?∼ 642년)이 대야성 도독으로 있다가 백제 장군 윤충(允忠)에게 패하여 항복하고 나서 처자와 함께 살해당한, 치욕스러운 과거가 있었기에 더욱이를 드높이 평가하였던 모양이다. 항상 태종대왕을 멍에처럼 속박하던 그 불명예를 씻어내기에 충분할 만큼 둘째 사위의 장열한 전사가 백성들의 심금을 울리고 진골의 연소 자제들의 마음을 격동시켰기 때문이었다.

  신목태후는 무열왕계와 김유신계의 결속 상징

  이에 태종대왕은 김흠운의 혈손들을 특별히 애호하여 양육하도록 하고 그들과의 혼인을 통해 이후 신라 왕실 진골 혈통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기를 희망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태종대왕의 적장손인 신문왕이 즉위한 후에 왕비가 그 부친 김흠돌(金欽突, ?∼692년)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폐출되자 왕실에서는 새 왕비로 김흠운의 막내딸을 간택하여 성대한 혼인의식을 치르면서 맞아들이니 이 분이 바로 신목왕후였다.
  ‘삼국사기’권8 신문왕 본기에 기록된 혼인관계 기사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신문왕 3년(683) 2월에 신문왕은 10세 연하의 고종 사촌누이 동생인 신목왕후를 맞아들이기 위해 셋째 고모부인 김유신의 심복으로 통일과정에 수훈을 세운 전쟁 영웅인 김문영(金文穎, 652년경∼695년)과 김유신의 장자로 신문왕의 고종사촌 동생이며 신목왕후에게는 이종 사촌동생이 되는 파진찬 김삼광(金三光, 656년 ∼?)을 요석공주궁으로 보내 납기(納期; 맞아들이는 날짜)를 정한다. 이때 왕후의 모친이자 신문왕의 고모인 요석공주(632년 경∼?)는 50대 초반의 한창 나이였으며 요석공주와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게 했던 원효(元曉, 617∼686년)대사도 67세의 나이로 아직 생존해 있었다.
  또한 신문왕의 일가인 대아찬 김지상(金智常)으로 하여금 납채(納采 ;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혼인을 청하며 보내는 예물)를 가지고 가게 한다. 비단이 15 수레, 쌀과 술, 기름과 꿀, 장과 메주, 포와 젓갈이 135 수레, 벼가 150 수레였다.
  5월 7일에는 혼인 예식을 거행하는데 역시 이찬 김문영과 막내 숙부 김개원(金愷元, 645년 경∼720년)을 책봉사로 보내 왕비를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고 파진찬 김대상(金大常), 김손문(金孫文), 아찬 김좌야(金坐耶), 김길숙(金吉叔)으로 하여금 각기 그 처와 딸 및 급량부(及梁部)와 사량부(沙梁部)의 늙은 부인들 30여명씩을 거느리고 가서 왕비를 수레에 태워 왕궁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혼인예식을 치르고 맞이한 신목왕후가 4년 뒤인 신문왕 7년(687) 2월에 원자를 낳으니 이가 곧 뒷날 효조왕이 되는 이홍(理洪)이다. 늦도록 아들이 없던 신문왕이 42세 경에 첫 왕자의 출산을 보게 되자 기쁨에 겨워 원자가 겨우 5세 나던 해인 11년(691) 3월 1일에 태자로 봉한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태자를 책봉한 지 1년 남짓 지난 뒤인 신문왕 12년(691) 7월 2일에 신문왕이 48세쯤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효조왕이 6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고 38세쯤 된 신목왕후가 섭정을 하면서 신문왕릉을 황복사 동쪽 가까이에 쓰고 황복사를
원찰로 삼아 그곳에 3층 석탑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신문왕릉을 이곳에 쓴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가 경주에서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 대왕암과 문무왕의 원찰인 감은사로 가는 길 초입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문무왕릉 비석이 세워진 사천왕사나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능지탑(陵旨塔)이 지척에 있는 낭산(狼山) 기슭이라는 점이다.
  남쪽기슭에 사천왕사가 있고 남서쪽 기슭에 능지탑이 있으며 북동 쪽기슭에 황복사와 신문왕릉이 있게 된 것이다. 원래 동해안 일대는 석(昔)씨 세력 판도 안에 있어서 토함산과 명활산이 모두 그들 소유였고 낭산 일대도 그 세력권에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선덕여왕 16년(647)에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으로 석씨 일족이 멸족 당하자 이곳에 세력 공백이 생겨 왜구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가 되자 문무왕 자신이 스스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해의 호국용왕이 되기를 자청하여 이 지역을 자기 혈족 집단의 근거지로 삼아나갔던 듯 하다.
  그때 감포에서 토함산, 명활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문무왕계의 혈족 집단이 차지하고, 입실과 모화를 거쳐 울산으로 연결되는 길목은 김유신 집안에서 차지했던 듯하다. 장차 성덕왕릉이 토함산 기슭에 자리 잡고 불국사와 석굴암이 그 원찰로 지어지는데 반해 모화의 원원사(遠源寺)는 김유신 집안의 원찰이 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문무왕계의 혈족 집단은 문무왕이 사천왕사, 망덕사를 지어 가며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낭산 일대를 자신들의 근거지로 확보하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게 되니, 그 첫 작업이 신문왕릉을 황복사 경내에 써서 황복사를 그 원찰로 삼는 일이었다.
  신목태후가 섭정을하며 이와 같이 대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당나라에서도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가 섭정을 하다가 천수(天授) 원년(690) 9월에 스스로 황제가 되어 성신(聖神) 황제를 자칭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신라의 형편을 보면 통일전쟁에 공훈을 세운 전쟁 영웅들이 원로가 되어 아직 건재했고, 통일의 주역이던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자손들이 굳건하게 결속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있었다. 사실 신목왕후는 무열왕계와 김유신계의 결속의 상징으로 선택된 인물이었다.  그러니 신목태후가 섭정이 되어 대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목태후가 신문왕릉을 황복사 경내에 쓰고 황복사를 그 추복사찰로 삼아 그를 위해 3층 석탑을 건립하는 일에 털끝만큼도 장애가 있을 수 없었다.

  신문왕 초상조각인 금제여래입상

  신목태후는 신문왕을 위해 <감은사지 쌍3층 석탑> 양식을 계승하는 <황복사지 3층 석탑>  1기(基)를 건립하는데 그 규모는 <감은사지 쌍3층 석탑>(높이 13.4m)의 반밖에 안돼 높이가 7.3m에 불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탑신석이나 옥개석을 한 개의 통 돌로 쓸 수 있어 이후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을 이루어 놓는다.
  그리고 사리와 함께 순금 불상 1구를 조성하여 탑안에 봉안하였다. 그것이 현재 국보 80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구황리 금제여래입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立像)>즉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여래입상>이다. 총 높이 14.4cm밖에 안 되는 이 작은 황금불상은 탑 속에 1250년 동안 모셔져 있다가 일인들의 손에 끌려나와 현재는 국립박물관 진열실에 전시되는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130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우리나라 불상 연구에 움직일 수 없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여래입상>은 아주 특이한 몇 가지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겉옷 표현이 종래 포복식불의(袍服式佛衣)의 영향을 받아 곤룡포나 도포를 입은 것같이 표현하던 삼국 시대 불상의 겉옷 표현과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다. <연가7년 명불입상>이나 <서산 마애삼존불>의 주불에서처럼 도포깃을 연상시키던 느슨한 양쪽 깃 표현이 사라지고 <태평진군4년명 불입상>이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불입상>과 같이 옷깃이 목을 둥글게 바짝 감고 넘어가는 형식을 보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간다라나 굽타불상의 통견(通肩) 양식 불의 표현방식을 재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터인데 옷깃 표현만 그렇지 그 아래 겉옷의 옷주름 처리는 <연가7년명불입상> 계열의 삼국시대 불입상 겉옷 표현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타원형 호(弧)가 물결처럼 일정 간격으로 중복되어 내려가는 옷주름 표현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옷주름이 만들어지려면 도포처럼 느슨한 옷깃이라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런 옷주름 표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보통은 팔을 내려 허벅지 근처에서 옷깃을 잡도록 되어 있는 왼손을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손 높이까지 들게 하여 옷깃을 끌어 올려다 잡게하는 억지를 부려 놓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억지도 합리적인 이해 기반 위에서만 수용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니, 통일초기 신라 문화의 건실성이 어떠했는지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대좌 형식이다. 씨방 아래에 연꽃잎을 엎어 붙여놓고 씨방 위에 올라서 있는 것이 일반 불입상의 연화대좌니 그 연꽃잎 표현이 둥근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연꽃잎을 강제로 펴서 뒤집어 놓은 듯 씨방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펼쳐 놓았다. 그 결과 대좌는 낮아지고 경쾌한 긴장감이 무게 중심을 결속하여 더욱 안정감을 느끼게 하였으니 중후한 불신의 후덕한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표현의 주체와 객체를 분명히 구분하여 종합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정신의 발현이라 하겠다.
  또 하나 다른 데서 보기 힘든 것은 촛불꽃 형태의 두원광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광배가 대부분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기 때문에 파손되어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는 형편에, 이 불입상에서 완전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으니 이를 통해 이 시대 이전의 광배 형태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투각(透刻; 맞뚫림 조각)기법으로 만들어서 불꽃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였는데, 머리 뒤쪽에 연꽃 한 송이를 표현해 놓고 그를 중심으로 세 가닥 동심원(同心圓)을 그려나가며 투각 장식으로 광염(光炎; 빛나는 불꽃)을 상징하고 그 밖으로는 이를 에워싸며 불꽃이 촛불 모양으로 둥글게 타오르는 양 불꽃무늬를 어지럽게 투각해 놓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철저하게 좌우대칭이라, 밑그림을 반쪽에 그려서 엎어 뜨는 기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얼굴이 몸체에 비해서 상당히 크지만 작은 규모의 불상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옷자락 끝이 아래에서 날개 깃처럼 펼쳐지는 것은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포복식불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반해 둥근 깃으로 옷깃을 조인 것은 당고종 상원(上元) 2 년(675)에 당고종의 초상 조각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중국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 봉선사동(奉先寺洞)의 주불인 <노사나불좌상(盧舍那佛坐像)>에서 그 형식을 확인할 수 있어 이것이 당시 당나라로부터 새로 들여온 양식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신목태후가 효조왕 원년(692)에 부군인 신문왕의 추복을 위해 조성한 이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여래입상>은 전통양식과 외래양식이 이상적으로 조화된 특이한 불상이라 하겠다. 이것이 당시 통일신라 초기의 문화성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문 봉선사 동주불인 <노사나불좌상>이 당고종의 초상 조각이듯이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여래입상>도 신문왕의 초상 조각일 수 있다. 합리적인 사고로 계산된 억지를 부려 신·구양식을 무리없이 조합한 조성자의 예술감각이라면 신문왕의 모습을 충분히 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되니 이 얼굴이 48세 경에 돌아간 신문왕 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김인문의 공 기리는 신목태후

  이렇게 신문왕의 초상 조각이 만들어진 후인 효조왕 3년(694) 4월 29일에 당나라 문화 수입의 창구 노릇을 해오던 무열왕의 둘째 왕자 김인문(金仁問,629~694년)이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66세의 나이로 돌아간다. 당고종에게 숙위하러 갔다가 그의 마음에 들어 무려 7차례나 고국을 드나들며 22년간이나 고종 측근에서 숙위하던 그가 당 고종이 돌아간 다음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측천무후의 측근에서 벼슬 살다가 그곳에서 돌아간 것이다.
  문무왕14년(674)에 문무왕이 당군을 몰아내는 전쟁을 감행하자 당고종은 문무왕에게 준 작위를 거두고 곁에 있던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귀국하게 한 적이 있었다. 현명한 김인문은 백방으로 손을 써서 문무왕의 작위를 돌려주게 하고 자신은 중도에서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당고종을 구슬러 신라를 더 이상 침공하지 못하게 하는 안전판 구실을 하며 평생을 보냈던 것이다. 김인문의 현명함이 없었다면 신라의 통일은 자칫 무위(無爲)로 돌아가고 우리는 당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주변 민족을 흡수 소멸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이 그들의 통치자들 사이를 이간해 서로 권력다툼을 하다 자멸하게 하는 것인데 김인문은 당고종의 속셈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꾐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김인문을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워하였겠는가.
  그래서 김인문이 장안에서 돌아가자 신목태후는 고관을 파견하여 그 시신을 운구해 오도록 하여 효조왕 4년(695) 10월 27일에 부왕인 태종 무열왕의 왕릉 아래에 배장(陪葬; 임금이나 조상 산소 곁에 장사 지냄)한다. 신목태후에게는 친정으로 둘째 외숙부가 되고 시집으로는 둘째 숙부가 되는 종실의 제일 어른이었다. 그리고 무덤 아래에 태종 무열왕릉비와 거의 같은 형식의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석 역시 파괴되어 그 파편 일부가 최근 수습되어 있는 데 비석을 지고 있던 귀부(龜趺)만은 아직 무덤 곁에 남아 있다. 이것이 보물 70호로 지정된 <경주서악리 귀부(慶州西岳里龜趺)>이다.
  규모는 국보 25호인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보다 작지만 그 양식 기법을 거의 그대로 이어 받고 있어 이를 모각한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비신을 꽂았던 비좌(碑座) 주변 장식의 연꽃잎 표현에서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가 인동 무늬 장식을 더한데 반해 <경주서악리 귀부>에서는 보상화(寶相華) 무늬 장식을 더한 것이 다르다.
  목의 주름살 표현이 김인문 묘비 귀부가 조금 더 많으며, 뒷발 발가락이 무열왕릉 귀부가 넷인데 비해 다섯 개인 것이 다를 뿐이다. 부왕인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직접 짓고 써서 그 비석을 새겨 세우는 것을 총감독했던 당사자의 비석이니 그가 도안하여 건립했던 모양 그대로를 그의 비석으로 만들어주었을 것은 당연하다.
  신목태후는 김인문이 돌아가던 해 정월에 자신을 왕비로 삼는데 앞장섰던 원로 장군인 이찬 김문영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그런데 김인문의 부고가 당도하자 그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김문영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서 그랬는지, 다음 해인 효조왕 4년(695) 정월에 막내 숙부인 이찬 김개원을 수상인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50대 초반의 수상이 들어서자 총무처 장관격인 중시(中侍) 김원선 (金元善)이 늙은 것을 핑계대고 물러나서 다음 해(696) 정월에는 이찬 김당원(金幢元)을 중시로 임명하여 신목대비의 섭정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그런데 신목대비의 섭정체제가 통일 원훈세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는지 효조왕 7년(698) 2월에는 중시 김당원이 다시 물러나겠다고 한다. 전쟁을 몸소 체험하지 않은 신세대들이 정권을 장악하자원로들이 세대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현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자 신목태후는 대아찬 김순원(金順元)을 중시로 임명한다. 이후 김순원의 두 딸이 장차 성덕왕과 효성왕에게 차례로 출가하는 것을 보면 김순원이 김흠운과 요석공주 사이에서 난 아들로 신목대비의 오빠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효조왕 9년(700) 5월에 이찬 김경영(金慶永)이 반란을 일으키다 잡혀 죽고 중시 김순원이 이에 연좌돼서 파면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효조왕 9년조에 보인다. 그리고 < 황복사지 3층석탑 금동사리함명>에는 신목태후가 성력(聖曆) 3년(700) 6월 1일에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모반이 신목태후의 섭정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것이었고, 신목태후는 그 후유증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신목태후가 이때 45∼46세로 한창 때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태후의 친오빠인 중시 김순원이 어떤 계략에 말려들어 결과적으로 태후를 가해한 꼴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중시라는 요직에 있던 중신이 모반 사건에 연루되고도 파면으로 그 죄를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김순원은 그 6년 뒤인 경덕왕 5년(706)에 신목 태후와 효조왕의 추복을 위해 <황복사지 3층석탑>의 사리장치 내용을 첨가할 때 그 주관자가 되어 이름을 사리탑명의 조성 공덕자 명단 첫 머리에 남기고 있음에야!
  중시일 때 관등이 대아찬(제 5위)이었는데 사리함명에는 소판(蘇判, 제3위)으로 올라 있다. 경덕왕의 외숙부가 아니고서는 모반사건에 연좌되어 중시직을 파면당한 처지에 이와 같은 승진이 이루어진다거나 왕실을 위한 대작불사(大作佛事; 크게 일으키는 불교 행사)에 최 고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신목태후가 돌아갈 때 효조왕은 겨우 14세였다. 그런데 3년상을 치르고 채 두 달을 넘기지 못한 대족(大足) 2년(702), 즉 효조왕 11년 7월27일에 돌아갔다고 하니 이때 효조왕의 나이 16세였다. 국왕의 나이가 16세이고 재위 기간이 11년이라면 그 사이 반드시 국혼이 있었을 터인데 효조왕비에 관한 기사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신목태후가 돌아가고 김경영이 모반하던 사건이 모두 효조왕의 왕비 간택을 둘러싸고 일어나서 효조왕이 장가들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효조왕이 섭정이던 모후 신목태후의 3년상을 겨우 치르고 나서 후사 없이 16세 어린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니 신문왕계의 왕위계승 문제는 심각한 도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성덕왕의 새 시대 문화

  그러나 태종 무열왕은 참으로 아들들을 잘 두었다. 이제껏 살아남은 막내왕자 김개원이 상대등이라는 수상 지위에 있으면서도 왕위를 탐하지 않고 맏형인 문무왕의 혈통으로 보위가 이어지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겨우 13세밖에 안된 신문왕의 둘 째 왕자 김융기(金隆基, 690년 경∼737년)를 왕위에 올려놓으니 이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사실 당시 성덕왕의 처지는 부모 형제 하나 없는 천애고아였다. 그런 그를 종조부인 김개원이 보위에 올렸으니 무열왕과 문명태후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정당하고 엄격했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데, 실제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신라로 하여금 삼국을 통일하게 하였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해 갈 때 의자왕의 여러 아들이 서로 대권을 차지하려 다투다가 나라를 멸망으로 끌고가던 것이나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대권을 다투다 패가망국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이때 성덕왕에게 외숙부가 되는 김순원도 성덕왕 옹립에 적극 나섰을 것이고 신목태후의 이모이며 김유신의 부인인 지소(智炤, 640년 경∼720년 경)부인도 이를 적극 도왔을 것이다. 그러니 태종 무열왕계와 요석공주계, 즉 김순원계 및 김유신계의 혈족집단이 단결하여 태종 무열왕의 적장자 혈통으로 자신들의 구심점을 삼아 나가기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김개원과 김순원의 모친 요석공주, 김삼광의 모친 지소부인은 모두 태종무열왕의 자녀들로 이들 3남매가 세 집안의 수장이 되어 무열왕의 내외손을 통솔하고 있었을 터이니 이들이 건재하는 한 성덕왕의 지위는 반석 위에 올라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덕왕은 즉위한 지 3년 되는 해인 성덕왕 3년(704)에 승부령(乘府令; 교통부장관에 해당)인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다.

  신라 상류사회의 자식교육

  김원태가 어떤 인물인지 밝힐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김개원 3남매가 그들 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에서 성덕왕비를 간택해 왕권을 위태롭게 하려 했을 리 없으니 그들 세 집안에서 이를 찾아본다면 김유신 집안이 가장 유력할 듯하다. 김유신의 자제 중에 원술(元述), 원정(元貞), 원망(元望) 등 원자 돌림이 있고 그중에 원술은 소판의 벼슬에 올랐다 하였으니 이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삼국사기’권7 문무왕본기 문무왕 12년(672)과 같은 책 권 43 김유신열전을 종합해 보면 원술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문무왕 12년 8월에 평양을 침공해 들어온 당나라 장수 고보(高保)의 1만 군사와 말갈 추장으로 당나라의 앞잡이가 된 이근행(李謹行)이 몰고온 3 만군사를 격퇴하기 위해 대병이 파견되는데 원술도 장군 효천(曉川)의 비장(裨將)으로 참전한다. 그런데 석문(石門, 양주)벌 전투에서 대패하여 장군 대아찬 효천과 사찬 의문(義文) 등이 전사하였다.
  이때 원술도 싸우다 죽으려 하니 보좌관인 담릉(淡凌)이 이렇게 말린다.“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찾아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만약 죽고도 이루지 못한다면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 원술이 “사내자식은 구차히 살지 않는다 하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겠는가” 하고 말을 몰아 달려가려 하니 담릉이 고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 죽을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상장군을 따라 무이령(蕪夷嶺)을 넘어 돌아왔다.
  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유신에게 그 대책을 물으니 당나라 사람의 꾀는 헤아릴 수 없으니 패하고 돌아온 장졸들에게 각기 그 요해처를 지키게하고 책임을 묻지 말되 다만 원술만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훈(家訓)을 저버렸으니 참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원술의 외숙부이기도 했던 문무왕은 원술은 다만 비장일 뿐인데 홀로 그에게 중형을 내릴 수 없다고 사면한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부친을 뵙지 못하고 시골로 달아나 숨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문무왕 13년(673) 7월 1일에 김유신이 천수를 다하고 돌아간다. 이에 원술이 어머니를 뵙고자 하니 그 어머니 지소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보지 않았다 한다. “여자에게는 삼종지의(三從之義; 어려서는 부친을 따르고, 출가하면 남편을 따르며, 과부 가되면 아들을 따른다는 법도)가 있는데 지금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만약 원술이란 사람이 이미 선군(先君; 돌아간 아버지)에게 아들일 수 없었다면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원술이 통곡하고 뒹굴며 가지 않았어도 끝내 보지 않았다. 참으로 대단한 어머니다. 상류사회 어머니의 교육이 이와 같았으니 신라사회가 건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회가 건전하니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원술이 한탄하기를 담릉이 그르쳐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구나 하고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무왕 15년(675) 을해 9월에 이근행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 혹은 買肖城,인천)에 주둔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원술은 죽어서라도 예전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나아가 싸워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겨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성덕왕이 등극하고 나서 처음으로 중시를 삼은 사람은 아찬 김원훈 (金元訓)이었고 그 다음에 중시를 삼은 이는 아찬 김원문(金元文)이었다. 이들이 모두 김유신의 전처 소생일 수 있다. 지소부인은 김유신이 환갑되던 해에 출가해 가서 김유신이 79세로 돌아갈 때까지 5 남 4녀를 낳았으니 수많은 전처 소생 자녀가 있었을 것이고 김원태가 그중 하나일 수도 있다.
  성덕왕은 왕비를 맞아들인 다음 모후 신목태후와 형왕 효조왕의 추복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신룡(神龍) 2년(706), 즉 성덕왕5년 5월 30일에 황복사3층탑의 사리공을 다시 열고 불사리 4알과 6치(寸)짜리 순금아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추가로 봉안하여 선망 부모와 선망 형왕의 명복을 빈다. 아마 그 전해인 성덕왕 4년(705)에 누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무구 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를 읽고 그 내용대로 탑안에 사리 장치를 첨가하여 복전(福田)을 삼으려 했던 듯하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원력

  ‘무구정광대다라니경’1권은 측천무후 말년인 장안(長安) 4년(704)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했는데 바로 그 다음 해에 신라에 전해졌던 모양이다.‘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0권을 의정(義淨)이 장안 3년(703)에 번역해 내자마자 그 다음 해인 경덕왕 3년(704) 3월에 김사양(金思讓)이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이를 구해다 국왕에게 바친 사실로 미루어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는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평생 죄를 많이 지어 당장 지옥에 떨어지고 이후로 16번이나 지옥에 다시 떨어지며 그 뒤에는 불가촉 천민으로 태어나거나 돼지로 태어나서 항상 냄새나는 거름통 속에서 분뇨나 먹고 살 사람이라도 오래 되어 무너진 탑을 수리하고 무구정광대다라니를 베껴서 그속에 안치한 다음 공양을 올리며 무구정광대다라니를 7번 외우면 그 죄업이 사라져서 다음과 같이 된다.
  명이 늘어나 오래 살다가 죽고 나면 극락세계에 나서 백천 겁 동안 크게 좋은 쾌락을 누린 다음 다시 묘희(妙喜)세계에 나서 역시 백천 겁 동안 쾌락을 누리고 뒤에 다시 도솔천 궁에 나서 다시 그만한 즐거움을 누리는데 일체 지옥의 고통은 영원히 벗어난다. 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 명이 짧거나 병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응당 옛탑을 수리하거나 작은 진흙탑을 만들어 이 다라니를 써서 그곳에 안치하라. 그러면 이 복으로 곧 죽을 사람도 수명이 늘어나고 여러 가지 병고는 모두 치유되며 지옥, 축생, 아귀에서 영원히 벗어난다.
  만약이 다라니를 77벌 써서 77개의 작은 진흙탑에 하나씩 넣어 사리탑안에 넣는다면 죽어가던 사람도 수명이 늘어나고 일체의 묵은 악업이 모두 소멸하여 영원히 지옥, 아귀, 축생에서 벗어나며 일체 소원을 모두 이루게 된다. 이 다라니를 99벌 써서 99개의 작은 진흙 탑속에 넣으면 99만9000 보탑을 만든 공덕과 같아서 일체 죄업이 모두 사라지고 항상 일체 제불이 보호해주게 된다.
  만약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스스로 탑을 만들거나 남을 시켜 만들거나 옛탑을 수리하거나 그 속에 들어갈 작은 탑을 만드는데 혹 진흙을 쓰기도 하고 벽돌이나 돌을 쓰되 먼저 이 다라니를 1008번 외우고 나서 만든다면 그 탑의 크기가 손톱만 하든지 팔뚝만 하든지 1유순이 되든지 상관없이 그 복덕으로 수명이 짧은 사람은 수명이 늘어나고 죽은 후에는 극락세계에 태어나서 무한한 쾌락을 누리다가 결국 성불하게 된다.
  대강 이런 내용이므로 성덕왕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가르쳐 준대로 부왕인 신문왕의 추복을 위해 세운 <황복사 3층석탑>에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하며 아울러 사리 4알과 모후의 추복을 위한 순금제 아미타여래좌상 1구를 첨가해 부왕과 모후 및 형왕 의 극락왕생을 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오래 살 것과 아들을 많이 둘 것, 일족이 번창할 것, 천하가 태평할 것, 일체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즐거움을 얻을 것, 끝내 모든 중생이 성불할 것 등을 기원한다.
  이처럼‘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신라에 전해옴에 따라 신라의 불교신앙형태는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사리탑 조성이나 수리공 덕이 결코 불보살상 조성이나 수리 공덕만 못하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탑 쌓는 공덕을 지으려는 염원이 상하로 확산되어 절마다 탑이 세워지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최초로‘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한 <황복사 3층석탑>이 모본이 되어 모두 이를 본떠서 석탑을 만들어 가게 되니 자연스럽게 <황복사 3층석탑> 양식이 신라 석탑 양식의 전형이 되었다. 탑신석과 옥개석을 한 개의 통돌로 만드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무엇을 단번에 해치우고 싶어하는 우리민족의 무모한 과감성과 합치되어 우리 고유의 석탑 양식으로 자리를 잡아나가게 된다.

  효조왕 기리는 황금아미타불좌상

  이제 17세가 된 성덕왕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겨우 16세의 어린 나이로 돌아간 형 효조왕을 생각하면 불쌍하고 죄송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황금으로 아미타불좌상 1구를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하였던 것 같다.
  부왕을 위해서는 모후인 신목태후가 이미 미륵불입상을 황금으로 만들어 봉안해 놓았으니 부모의 복전은 이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 살 위인 형 왕은 겨우 6살에 왕위에 올라 모후의 섭정 아래 힘겨운 국왕 노릇을 하느라 동생인 자기와 함께 마음껏 뛰어놀아 보지도 못하고 숨죽이며 살다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갔으니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그래서 성덕왕은 그 왕릉을 부모의 능이 있는 낭산 남쪽 기슭인 망덕사 동쪽에 쓰고 호석을 둘러 각별히 보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왕릉에 호석을 두르는 무덤 양식은 이런 배경 아래 나타났을 터인데, 그 호석을 두르는 무덤 형식은 당나라로부터 새로 유입된 새로 운 것이었다. 전후 세대들이 당나라 문화에 순치되어 거리낌없이 이를 수용해 들이는 세계화 현상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성덕왕 5년(702)에 성덕왕이 효조왕을 위해 그 초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아미타불좌상>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상양식이 <정관13년명 불좌상>이나 <돈황328굴 불좌상>과 같은 초당(初唐, 618∼712년, 당나라를 4기로 나누는 시기 구분에서 그 첫번째에 해당하는 시기의 명칭) 양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만감이 증폭하여 얼굴은 팽팽하게 살이 오르고 몸도 살집이 넉넉해 종래 남북조시대 불상들이 보이던 근육질의 경쾌한 육체미가 사라지고 있다. 거기에다 자세도 점잖게 굳어서 정지된 느낌을 보여주는 것이 이 시대 불상 양식의 특징이니, 대당 통일제국을 건설해가던 초창기 강력한 권위주의가 불상 양식을 이토록 근엄하게 유도해 갔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아미타불좌상>도 언뜻 보면 이런 초당의 불상 양식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여 비만형에 상당히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의 전통 기법이 곳곳에서 계승되고 있어 당나라 불상과는 상당히 다른 양식을 나타 내고 있는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얼굴 표정이 근엄하기만 한 초당 시기의 불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린이다운 천진한 미소가 얼굴 전면에 서려 있다. 입에도, 눈에도, 코에도 그리고 볼과 이마, 턱에도 웃음기가 살짝 배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남북조시대 불상 양식으로부터 비롯되어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로 이어져온 전통적인 얼굴 표현기법으로 신라에서 특히 선호하던 순박한 미소법이다. 이 불상이 효조왕의 초상 조각이라면 그의 생시 표정이 이와 같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의복 표현에서 삼국시대 불상에서 흔히 보던 대로 겉옷 자락을 단순하게 정면으로 흘러내리게 하고 있다. 초당 불좌상들이 겉옷으로 양다리를 휘감게 하여 답답하고 복잡하게 표현하던 것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치맛자락 앞폭을 정면 중앙으로 길게 늘이고, 깔고 앉다 남은 겉옷의 뒷폭과 옆폭은 무릎 밑에서 좌우로 빼 내포수좌(袍垂座,裳懸座)를 이룩해 놓음으로써 좌세에 정연하고 경쾌한 안정감을 더해주었다.
  이 역시 <국보83호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같은 최고 수준의 금동보살상 좌대를 만들어냈던 전통의 기반이 자연스럽게 계승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접혀 내린 옷자락 끝을 버선코처럼 박 차고 날아갈 듯 날렵하게 마무리지은 기법이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상>과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아미타불좌상>에서 함께 보인다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광배와 대좌는 순금이 아닌 금동으로 별조(別造; 따로 만듦)하여 붙였다. 촛불꽃 모양의 두광(頭光)과 촛불꽃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신광(身光)이 결합하여 광배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맞뚫림 조각 기법이기는 하지만, 신목태후가 조성한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제여래입 상>의 두광 조성 기법과는 다르게 두광과 신광 모두 가장자리에 테를 둘러 마무리지음으로써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한 사실감이 떨어진다. 그 대신 불꽃 무늬를 크고 엉성하게 배열하여 답답함을 해소하였으며 두광과 신광 모두 그 막힌 뒤판 주변 구역에는 인동 무늬를 돌려 장식하였다.
  두광 중심에는 씨방이 달린, 활짝 핀 연꽃 한 송이를 펼쳐 놓아 머리를 가리게 하였고 신광 중심에는 연꽃 한 잎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의 몸(등판)가리개가 만들어졌는데 몸가리개 표면에도 인동무늬가 대담하게 새겨져 있다.
  대좌는 하대와 중대, 상대를 갖춘 3중 연화대좌다. 연화대좌는 전체적으로 장구통처럼 생겼다. 쌍가락지 형태의 중대(中臺) 아래 위로 복련대(覆蓮臺; 연꽃을엎어 만든 좌대)와 앙련대(仰蓮臺; 연꽃을 바로 세워 만든 좌대)를 연결하니 이와 같은 형태가 된 것이다. 상 대의앙련판은 2중으로 겹쳐져 있고 하대의 복련판은 홑잎이다. 이런 좌대 양식도 초당 시대에 유행하던 불상양식의 특징적인 요소다.

  성덕왕과 김유신가의 밀착

  성덕왕이 이와 같이 성덕왕 5년(706) 5월 30일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말한 대로 황복사 3층석탑 안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하고 사리와 불상 등을 추가 봉안하는 사리탑 보수 공덕을 짓고 나자, 그 공덕 때문이었는지 왕자가 태어났다. 그가 간절히 기원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덕왕 11년(712) 8월에 대고모인 김유신 처 지소(智炤) 대장공주(大長公主)를 왕비에 해당하는 칭호인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매해 1000석의 곡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삼국사기’ 권43  김유신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뒤에 지소부인이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어 비구니가 되었는데 그 당시 대왕(성덕왕)이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나라 안팎이 평안하며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걱정이 없는 것은 모 두 태대각간이 내린 것입니다.
  다만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고 경계하여 서로 이룩한 일이니 숨은 공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과인이 그 덕에 보답하려고 하여 일찍이 마음속에서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남성(南城)에서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벼 1000석을 매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김유신의 지나간 공훈에 대한 치사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외호하고 있는 지소부인의 현실적인 능력에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의 왕비가 김유신가에서 출가해 와서 원자를 낳았다면 더욱 지소부인에게 감사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덕왕은 김유신의 적손인 김윤중(金允中)을 기용하여 몹시 우대했던 듯하니 김유신전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적손 김윤중이 성덕대왕에게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었는데 자주 은고(恩顧; 은혜를 베풀며 돌아봄)를 입으니 왕의 친속들이 자못 질투하였다. 때마침 추석날이 되어 왕이 월성(月城)의 산봉우리 끝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시종한 관원들과 술을 놓고 즐기다가 윤중을 불러 오라 명하니 간하는 사람이 있어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종실(宗室)과 척리(戚里; 외척) 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다만 먼 촌수의 신하만 부르시니 어찌 이른바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그러자 성덕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의 할아버지 덕이다. 만약 공의 말대로 잊고 이를 버린다면 착한 이를 좋아하되 그 자손에까지 미친다는 뜻이 아니리라.’ 드디어 윤중을 가까이 앉게 하고 그 할아버지 의 평생을 언급하다가 날이 저물어 물러가겠다고 하니 절영산 말(부산 앞바다 絶影島의 목장에서 길러낸 말로 가장 품질이 좋았다) 한 필을 하사하였다. 군신들이 섭섭해할 뿐이었다.”

  왕실의 음모

  성덕왕과 김유신가의 밀착관계는 김개원을 중심으로 한 무열왕 친손 계통과 김순원을 중심으로 한 요석공주 계통의 가까운 친척들의 시기심을 유발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성덕왕 14년(715) 12월에 원자 중경(重慶, 706년 경∼717년)을 태자로 책봉하자 이들은 힘을 합쳐 왕비를 쫓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던 듯하다.
  결국 성덕왕 15년(716) 3월에는 김원태의 따님인 성정(成貞)왕후(嚴貞왕후라고도함)는 출궁당하고 만다. 성덕왕의 나이 27세 경의 일이다. 성덕왕이 성정왕후를 출궁시키면서 비단 500필과 밭 200결, 벼1만석, 저택 1채를 하사하는 것으로 보면 성덕왕이 부득이하여 죄 없는 왕비를 출궁시킬 수밖에 없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6년(717) 6월에는 태자 중경이 죽는다. 시호를 효상(孝傷)이라 하였다 하는데 12세 정도의 나이였다. 성정왕후를 출궁시킨 세력들의 음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성덕왕 19년(720) 3월에는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을 맞아 들여 새 왕비를 삼는다. 김순원은 <황복사지 3층석탑 금동사리함명>에서 석탑 수리를 총지휘했던 대표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자, 신목태후가 돌아가기 직전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중시자리를 내놓은 인물로 우리는 앞에서 신목태후의 오빠로 추정하고 나왔다.
  그렇다면 성정왕후의 출궁과 효상태자의 죽음이 김순원 세력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김순원은 성덕왕의 외숙이며 김흠운과 요석공주 사이의 아들로 자신의 외숙인 김개원과 이모인 지소부인의 도움을 받아 생질인 성덕왕을 등극시킨 뒤에 섭정 행세를 했을 듯하다.
  그런데 성덕왕이 그의 처가인 김유신 집안, 즉 지소부인 집안과 밀착되어 가자 이를 시기하여 김개원 집안과 함께 김유신 집안을 성덕왕 측근에서 몰아내기 위해 성정왕후를 쫓아내고 효상태자를 제거한 다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여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에서는 성정왕후를 배소(陪昭)왕후라 하고 시호가 엄정(嚴貞)이었다 하였으니 폐위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순원의 딸인 후비(後妃)는 점물(占勿)왕후라 했으며 시호가 소덕(炤德)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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