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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4
 관리자  08-22 | VIEW : 3,043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4] 험난한 통일의 길


관음보살 상주처로 변신한 신라

험난한 통일의 길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형제 싸움에서 이기려고 강도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것과 같은 짓이었다. 그러니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와 백성을 차지하고 나서 신라까지 넘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다음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문무왕 9년(669) 5월 23일에 평양 부근의 고구려 백성 3만8200호를 양자강과 회수 이남 및 사천성·섬서성 등지의 빈터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리고 신라가 백제의 땅과 백성을 마음대로 차지했다 하여 이를 해명하러 간 각간 김흠순(金純)과 파진찬 김양도(金良圖) 등 신라의 대신급 외교 사절을 잡아 가둔다.
그러자 문무왕은 10년(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태대형(제2위의 벼슬) 고연무(高延武)로 하여금 각각 군사 1만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 당병을 치게 한다. 이에 힘입은 고구려 유민들은 수림성(水臨城, 水谷城, 황해도 평산 협계) 출신의 대형(大兄;14관등 중 제7위) 모잠(牟岑)을 중심으로 궁모성(窮牟城, 弓次云忽, 大峴城, 지금 황해도 서흥)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켜 대동강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당나라 관인들을 살해해 나간다. 이들은 보장왕의 조카 고안승(高安勝)이 마침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해 있다는 사실을 탐지해 내고 그를 한성(漢城, 황해도 재령 長壽城)으로 데려와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나라는 좌감문위(左監門衛)대장군 고간(高侃)을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우령군위(右領軍衛)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燕山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모잠의 부흥군을 토벌하게 한다. 그런데 이근행이 말갈 추장의 아들이었다 하니 고간도 고구려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들이 모두 고구려 출신으로 본국의 부흥운동을 저지하러 왔으니 부흥운동군측으로서는 이쪽 사정에 정통한 저들의 출현이 더욱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모잠은 6월에 소형(小兄, 14관등 중 제11위) 다식(多式) 등을 문무왕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한다. 문무왕은 이들을 이용하여 당군을 몰아낼 요량으로 이들에게 금마저(金馬渚, 전북 익산)를 내주어 나라의 근거지로 삼게 한다. 당의 웅진도독부를 배후에서 위협하면서 백제의 곡창지대를 당군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면서 신라는 7월에 웅진도독부 유진(留鎭)장군 유인원(劉仁願)에게 대아찬 김유돈(金儒敦)을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하고 화해를 요청했다. 그러나 주둔군 사령관으로서 관할권을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배후에 강적을 맞이하게 된 유인원이 이를 용납할 리 없다. 즉각 웅진도독부 사마(司馬) 예군을 서라벌로 보내 거부 의사를 밝히고 문무왕을 힐책한다. 이에 문무왕은 예군을 잡아두고 군대를 보내 백제의 80여 성을 빼앗아버린다. 그리고 8월1일에는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금마저로 보내 고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한다. 결국 유인원은 위기를 느끼고 백제 유민들과 합세하여 신라군을 격파하는 전략적 전환을 모색하는 한편 본국에 신라 정벌군의 증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문무왕은 11년(671) 6월에 장군 김죽지(金竹旨)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가림성(加林城, 충남 임천)의 벼농사를 짓밟고 석성(石城)을 공격하게 하여 당군 5300여명을 참수하고 백제 장군 2명과 당 과의(果毅) 6인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린다.

당의 신라 정벌

당 고종은 대로하여 설인귀를 계림도(鷄林道) 총관으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를 정벌하게 한다. 설인귀는 7월26일 신라 승 임윤(琳潤)법사 편에 문무왕에게 장문의 서찰을 보내 협박과 회유로 귀순을 권고한다. 그러자 문무왕은 명문장 강수(强首)의 손을 빌려 그보다 더 긴 편지를 써서 신라가 당군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를 낱낱이 밝히고 자존(自存) 자구(自救)를 위한 부득이한 자위책(自衛策)임을 강조한다. 또 당 태종이 태종 무열왕에게 약속한 대로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를 돌려주고 신라 정벌 계획을 포기하도록 당 고종에게 권고해줄 것을 당부한다.
사실 당은 그 사이 왜국을 정벌한다는 핑계로 선박을 수리했는데, 이는 신라 정벌을 위한 계획이었다. 신라의 한성도독 박도유(朴都儒)에게 백제 여인을 시집보내 신라 병기를 훔쳐내 백제에 넘긴 것도 당나라의 계책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당이 백제를 다시 세워 신라를 견제하게 하는 것이나 신라의 옛 땅인 비열홀(比列忽, 함남 안변)을 고구려에 돌려주라는 요구는 신라의 자존(自存)을 위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들짐승이 다하자 사냥개를 삶으려는 격이며, 한 고조가 미워했던 옹치(雍齒)를 상주고 위기에 몰린 한 고조를 살려주었던 정공(丁公)을 죽이는 격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중국 고사를 빌려 당의 처사를 힐난하였던 것이다.
결국 명분과 논리에 밀린 설인귀는 더 이상 신라를 공개적으로 성토할 수 없게 되자 신라 침공을 포기하고 회군하고 만다. 설인귀의 대군이 전과 없이 회군했으나 당 고종의 신라 정벌 의지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문무왕 12년(672) 8월에는 고간(高侃)과 이근행으로 하여금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가게 한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이를 물리치려 하지만 여의치 않아 대아찬 효천(曉川)과 사찬 의문(義文) 등이 전사하고 만다.
결국 신라는 문무왕 12년(672) 9월에 급찬 원천(原川)과 내마 변산(邊山)을 당나라에 사죄사로 보내면서 그 동안 포로로 잡아두었던 당나라 조운선(漕運船, 양곡을 운반하는 배)의 낭장(郎將) 감이대후, 내주(萊州) 사마 왕예본(王藝本),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등을 함께 돌려보내고 상표(上表)를 올려 사죄를 청한다. 그 동안의 저항은 백제의 복수설치에 맞서 파멸을 막으려는 자구책에서 나온 것이며, 분골쇄신해도 큰 은혜를 다 갚지 못할 판에 억울하게 흉역(凶逆)의 누명을 쓰게 되었으니 사건 경위와 품은 뜻이나마 전하고 형벌을 달게 받겠다는 비굴한 내용이었다.
신라는 강국의 힘을 빌려 형제 나라를 멸망시킨 과보를 철저하게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은 3만3500분(分)과 동 3만3000분, 금 120분, 우황 120분, 40승포 6필, 30승포 60필 등을 공물로 바친다. 이로써 웅진도독부 관내의 백제 지역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일단 억제되었다.
한편으로 강수는 명문장으로 당나라 침략의 명분을 잃게 하여 대군을 물리쳤으니 이보다 더 큰 전공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무왕 13년(673) 정월에 강수에게 사찬(沙)의 벼슬을 주고 해마다 벼 200석을 내려주게 하였다.
어떻든 백제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억제되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백제 유민들은 점차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였다. 당의 식민통치와 신라의 통일의지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맹목적인 반신라적 적대감만으로는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차차 인식해 나갔다. 강도를 불러들여 집안을 망친 못난 형제가 강도보다도 더 미워서 강도로 하여금 저마저 파멸시키도록 부추겨왔는데, 하다 보니 결국 그것 역시 강도가 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이미 당의 꼭두각시가 되어 실권 없이 당나라를 드나드는 망국태자 부여 융과 그 일족은 백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백제 유민들은 신라와의 타협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점차 의식을 전환해 나간다.
한편 신라 쪽에서도 백제를 멸망시키기만 하면 쉽게 그 영토와 백성을 차지하여 제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10년 넘게 저항하는 백제 유민의 자세에서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더구나 강도를 끌어들여 집안을 망쳤다는 죄책감과 강도의 야욕이 자신의 집안을 독차지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스스로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통감하게 된다. 그래서 차차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권익을 보장하며 포용하려는 정책을 펴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의 귀족과 관료 등 지배 계급은 그 지위를 인정하여 기득권을 보장해준다.
이에 백제 유민들은 당나라 주둔군 세력과 신라 세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 안위를 지켜가려는 자세를 보이니 백제 부흥운동의 길목에 서 있던 연기(燕岐) 비암사(碑巖寺)의 비상(碑像) 조각과 그 명문(銘文) 내용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계유명(癸酉銘) 전(全)씨 아미타불삼존비상(碑像)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에 비암사(碑巖寺)라는 절이 있다. 1960년 9월10일 황수영 선생은 이 절에서 사방에 불보살이 새겨진 불비상(佛碑像) 3개를 확인하고, 이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에 보고하여 국보로 지정케 한 다음 학계에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중 두 개의 불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그 조성 연대와 조성 발원자 및 불보상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면에 아미타삼존상이 새겨진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碑像)>이다. 현재 국보 106호로 지정된 이 불비상은 마멸이 심하여 명문의 전문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나 2단으로 이루어진 앞면 아래 테부터 새기기 시작하여 양쪽 측면의 화면 여백에 가득 새겨 놓은 명문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글자만 가지고 파악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상과 관세음, 대세지 보살상을 석불로 삼가 조성한다. 계유년 4월15일에 내말(乃末) 전씨, 달솔(達率) 진차원(眞次願), 진무(眞武) 대사(大舍), 목(木)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과 7세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

이 명문 내용을 분석하면 우선 불비상의 주체가 아미타삼존상이라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 협시로 하는 삼존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성 발원의 중심 인물은 내말 벼슬에 있는 전씨였고, 동심(同心) 발원자는 달솔 진차원, 대사 진무, 대사 목씨 등이라 하였다.
전씨(全氏)는 읽을 수 있는 글자 중에서 3자나 발견되어 이 불비상 조성의 주체가 전씨였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내말이라는 벼슬 이름은 신라의 관직이다. 대사 역시 신라 벼슬이다. 이로 보아 신라의 벼슬아치들이 이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겠는데, 그중에 달솔이라는 백제의 벼슬 이름이 나와 잠시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삼국사기’권40 잡지(雜志) 제9의 백제인 직위 조의 내용으로 명쾌하게 해결된다. 그 내용을 옮겨보자.

“문무왕 13년(673)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내외 관직을 주었는데 그 위차(位次, 지위의 차례)는 본국에 있을 때의 벼슬에 견주었다. 서울 벼슬 대내마(大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0위)는 본래 달솔(達率, 백제 16관등 중 제2위), 내마(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1위)는 본래 은솔(恩率, 백제 16관등 중 제3위), 대사(大舍, 신라 17관등 중 제12위)는 본래 덕솔(德率, 백제 16관등 중 제4위)이다.”

이로 보면 내마 전씨는 본래 백제의 제3위에 해당하는 은솔 벼슬에 있던 백제 고관이었음을 알 수 있고, 진차원은 백제 제2위의 벼슬인 달솔의 지위에 있었고, 진무와 목씨는 백제 제4위 관등인 덕솔의 지위에 있어 모두 백제의 상층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가 포용정책을 펴면서 이들의 지위를 인정할 때 위와 같이 그 지위를 원래의 반 이하로 강등했으니 이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7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당나라 점령군의 주둔과 간섭을 청산하지 못했던 큰 원인이 이렇게 속좁은 승자의 우월주의로 백제와 고구려 유민 위에 군림하려 한 데 있지 않았나 한다. 그 이후 삼국 지역의 지방색이 서로 대립적인 양상을 띠며 계승되는 것도 원인을 따지자면 신라의 옹색한 통일방식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 주둔군과 신라군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던 백제 유민들은 문무왕의 서찰을 받고 설인귀의 대군이 회군해 가자 이제는 복국(復國, 나라를 되찾음)의 희망을 버리고 불만스럽지만 신라의 회유책에 순응해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문무왕 13년(673) 계유년에 백제 지배층에게 강등된 지위로 신라 벼슬을 내릴 때 이들은 그 벼슬을 그대로 수용하였던 듯, 바로 그 계유년(673) 4월15일에 이 불비상을 조성해 세우면서 강등된 신라 벼슬을 그대로 써놓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달솔 진차원만은 백제 벼슬을 고집하고 신라 벼슬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동참 발원한 인물들의 성씨도 전씨를 비롯해서 진(眞)씨, 목(木)씨 등 백제 최상층 지배 씨족의 성씨들이다. 진씨는 태안반도와 삽교천 유역인 내포 일대를 장악하고 해상활동을 주도하던 씨족이었고, 전씨는 온양과 천안 일대의 곡교천 유역을 세력 기반으로 삼던 지배 씨족이었다. 이로 보면 이들은 내포를 중심으로 한 태안반도 일대에서 부여 복신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끝내 실패하자 이곳 전의로 밀려온 백제 유민들인 듯하다. 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은 이곳이 전씨들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온양과 천안, 목천에서 공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데다 증산(甑山)산성, 운주산(雲住山) 남북산성, 고산(高山)산성 등이 에워싸 외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의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이 비암치(碑岩峙)다. 그래서 그 길목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비암사를 세우고 그 절에 아미타삼존상을 새겨 놓은 불비상을 조성하여 봉안했던 것이다. 백제 부흥운동중에 전사한 무수한 생명들이 극락국토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고 그 동안에 돌아간 의자왕과 풍왕, 복신 등 국왕대신들의 영가도 극락에 왕생할 것을 빌며, 자신들의 일가 친척과 돌아간 선조들의 극락왕생도 아울러 기원하였으리라.

인도식 전통의 화면충전법

비상의 조상 내용을 살펴보면 명문에서 밝힌 대로 전면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사방에 2중의 테를 둘러 네모난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한 구도인데, 권속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하여 서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는 4인의 불제자들이 승려 모습으로 시립하고 있어 7존불 양식을 보여준다. 그 양쪽 끝으로는 범왕과 제석으로 보아야 하는 호위 신장이 위세를 과시하며 옹위하고 있다.
아미타좌상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불의(佛衣)를 입고 네모난 수미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가사 자락이 대좌를 3중으로 덮어 내리는 포수좌(袍垂座, 裳懸座) 형식을 보여준다. 수인(手印, 손짓)은 설법인(說法印; 설법할 때 짓는 손짓)을 지어 가슴 앞에서 오른손 가운데 세 손가락을 꼬부려 보이고 왼손으로 하여금 명치 근처에서 무엇을 받쳐든 듯한 손짓을 하게 하였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데 어깨가 넓고 커서 당당한 체구를 자랑한다. 이렇게 어깨가 넓고 큰 것은 초당시대 당나라 불상 양식의 특징이니, 660년대에 당에서 만들어진 <용문석굴 잠계사동(潛溪寺洞) 5존불좌상>의 주불에서도 그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좌우에 시립한 관세음보살 입상과 대세지보살 입상은 경주 <배리미륵불삼존상>의 오른쪽 보살 입상과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긴 구슬걸이를 어깨에서 무릎 아래까지 걸어내리고 천의를 비슷한 길이로 늘어뜨려 서로 교차시키는 몸치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각기 바깥쪽 손을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잡고 안쪽 손은 가슴으로 들어 올려 구슬 모양의 지물을 받쳐들고 있는 것은 <배리미륵불삼존상>의 왼쪽 보살 자세 그대로다.
두 보살상 역시 얼굴이 뭉개져서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데, 두원광은 그 안에 든 연꽃잎 표현이 국화꽃처럼 꽃잎 수가 많고 끝이 뾰족하다. 둥글고 꽃잎 수가 적은 불상의 두원광 형식과는 대조적인 표현이다. 두원광 뒤로는 보통 주형(舟形) 광배라고 부르는 촛불꽃 모양의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빛)이 2중으로 표현되고 있다. 안쪽 거신광은 5구의 화불 좌상이 연화좌 위에 합장하고 앉은 모습으로 높게 돋을새김 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파서 새긴 불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두 가닥 둥근 띠 사이로 구슬 띠를 둘러 안쪽 거신광을 구별짓고 나면 그와 같은 모양의 바깥 거신광이 펼쳐지는데, 무엇인가를 가지고 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모습의 천인이 좌우에 각 4구씩 새겨져서 공간을 가득 메워 놓는다. 양쪽 공간이 만나는 정상에는 가부좌를 틀고 연화좌 위에 앉은 인물이 전각을 두 손으로 머리 위에 받쳐든 형상으로 새겨져 있다.
전각 안으로부터 2좌의 불상이 기둥 사이로 보이니 아마 이 인물은 제석천일 듯하다. 불꽃 형태의 거신광 상부와 불비상의 위쪽 네모틀 사이에 생겨난 양 모퉁이 삼각형 공간은 인동(忍冬) 무늬로 불꽃 주변을 장식한 다음 불상을 모신 전각 한 채씩을 한 손으로 떠받들고 각각 비천을 1구씩 새겨서 장식해 놓았다.
3층의 옷주름이 덮어내린 네모진 수미좌대 아래로는 엎어진 연꽃잎이 표현되고, 그 좌우로는 사자가 1마리씩 엎드려 있어서 연화좌와 사자좌를 모두 상징하고 있다. 불타의 좌대를 수미좌라고도 하고 연화좌라고도 하며 사자좌라고도 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 표현해 놓은 것이다. 놀랄 만한 종합의 장이다.
협시보살상을 비롯한 모든 협시 권속들은 각각 연꽃 줄기로 연결된 둥근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데, 이런 모든 좌대를 큰 연꽃 잎으로 이루어진 우람한 연화좌대가 받치고 있다. 정녕 화면을 빈틈 없이 채운 화면충전법(畵面充塡法;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기법)의 인도적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낸 보기 드문 불비상 조각이라 할 만하다.
양쪽 측면은 각기 한면에 4구씩의 주악천(奏樂天;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을 돋을새김해서 전면의 아미타삼존상을 찬탄하게 하고 있다. 연꽃 줄기가 뻗어가면서 4송이의 연꽃들을 각각 피워내고 그 위에 각종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주악천을 1구씩 표현해 놓은 것이다. 악기는 요고(腰鼓), 금(琴), 젓대(笛), 소(簫), 생(笙), 비파(琵琶) 등이다. 그리고 명문은 이 주악천들 사이의 공간에 새겨 넣고 있다.
뒷면 역시 긴 네모꼴 평면인데 4단으로 나누어 각 단에 5구씩 화불 좌상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모두 연화좌 위에 앉아 팔짱낀 모습이니 북위시대 이래로 천불을 표현하던 방식이다. 20불 모두 가슴에 만(卍)자가 새겨져 있으니 앞면 아미타불상과 동일한 불격(佛格)임을 나타낸 것이다. 명문은 각단 화불 좌상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본래 이 불비상은 지붕과 받침이 딴 돌로 만들어져서 끼워 맞추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반신라적 의중 담긴 비암사 미륵보살사유반가비상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불비상 중에는 <미륵보살사유반가비상(彌勒菩薩思惟半跏碑像)>도 있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비상>과 <기축명 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보물 367호)이 모두 아미타불상이라는 명호와 조성 연대 및 조성자를 밝힌 명문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미륵보살사유반가비상>(보물 368호)은 어떤 명문도 새겨져 있지 않고 그 규모도 가장 작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당시 신앙 형태를 짐작케 해주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니, 백제 유민들은 아직까지도 무왕(武王, 580년 경∼641년)과 같은 미륵보살이 백제 땅에 다시 내려와 신라와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미륵 불국토를 재건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신라적인 의중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규모도 작게 하고 명문도 새기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만드는 정성만은 가장 절실하고 간절했을 듯하다.
그래서 비첨(碑; 비석의 처마, 즉 비석 덮개)과 비좌(碑座; 비석의 좌대)를 한 돌에 새기는 완벽성을 과시하면서, 비신(碑身; 비석의 몸돌) 정면에 미륵보살사유반가상 1구를 단독으로 돋을새김해 놓는 과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륵반가상 양식은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사유반가상>에서 <방형대좌금동미륵보살사유반가상(方形臺座金銅彌勒菩薩思惟半跏像)>으로 이어지는 양식 기법을 보이고 있다.
극도로 추상화된 가냘픈 몸매에 길고 무거운 구슬 꿰미 장식을 목과 전신에 걸어 내리고 보관의 띠도 이마에서 어깨까지 늘어뜨린 모습이다. 팔뚝도 가늘고 무릎과 어깨도 빈약한데 반해 얼굴은 자못 크나 마멸되어 그 상호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일반 사유반가상과 크게 다른 점은 바닥을 짚은 왼발이 반가한 오른쪽 무릎 밑에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체 구조상 이런 자세는 나올 수 없는데, 이렇게 무리한 표현을 한 것은 아무래도 기획 단계에서 오른쪽에 연화발 받침을 먼저 조성해 놓는 실수로 말미암아 비롯된 파행이 아니었던가 한다. 더구나 무릎 이상의 상체가 정면을 하고 있어 오른쪽 연화발 받침 쪽으로 틀어 댄 왼발의 방향과는 도저히 연결될 수 없음에야!
이런 실수를 감추기 위해 천의 자락을 왼쪽 무릎 아래로 지나치게 모아 떨어뜨려서 무게를 너무 실어 놓았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적당주의가 빚어 놓은 신비한 초논리적 표현 기법이라 하겠다.
전체 구도를 살펴보면 용화수 나무 가지가 뒤엉킨 모양으로 표현된 나무 그늘 형태의 비첨석을 두 개의 둥근 기둥으로 받쳐서 신묘한 실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꽉 차도록 미륵반가상 1구를 안치해 놓은 구도다. 용화수 아래에 하생한 미륵보살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다.
그 분위기를 장엄하게 하기 위해 머리 위 나무 그늘 아래로 꽃 덮개를 띄우고 양쪽으로 구슬 띠를 늘여 각기 기둥 머리에 고정시킨 다음 그 늘어진 구슬 띠로부터 세가닥 2중 구슬 띠를 반가사유상의 네모난 대좌 위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그렇게 되니 둥근 기둥과 비석 덮개, 비석 받침이 만들어 놓은 비신 정면의 방형 공간은 꽉 차게 되었다.
이 미륵보살의 권위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양쪽 측면에는 연꽃 위에 올라서서 꽃을 받쳐들고 각각 미륵반가상을 향해 공양을 드리는 1구씩의 보살 입상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대좌 부분에는 큼직한 향로에 향을 사르며 차를 달여 공양하는 모습의 승려와 속인을 1명씩 정면에 표현하였다. 양쪽 측면에도 반가상을 향해 합장하고 꿇어앉은 인물을 1명씩 추가해 새겨 놓아 비신 측면과 마찬가지로 양쪽 측면이 정면과 연결된 한 화면임을 암시하였다.

신라는 관음보살 상주처

이렇게 미륵 하생신앙이 백제 옛 지역에서 사그라들지 않자 신라 조정에서는 신라가 이미 미륵보살과 미륵불이 하생한 미륵 불국토일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물고 있는 관음 성지라는 사실을 유포하여 민심을 다잡으려 한다.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적임자는 당시 40∼50대의 장년기에 접어들어 신라 불교계를 이끌던 원효(元曉, 617∼686년)와 의상(義湘, 625∼702년)뿐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이미 태종 무열왕(654∼660년) 재위 기간에 과부가 된 그의 둘째 딸 요석(瑤石) 공주에게 장가들어 파계하였으므로 표면에 나설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의상대사가 앞장서게 되는 듯하니, ‘삼국유사’ 권3 낙산의 두 큰 성인 관음과 정취(洛山二大聖觀音正趣)조에 의하면 의상이 동해변에서 관세음보살의 참모습(眞身)을 직접 뵙고 그곳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막 당나라로부터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 관세음보살의 진짜 몸)이 이 해변 굴속에 머물러 산다는 말을 들은 까닭에 그로 인연해서 낙산(洛山)이라 이름지었다. 대개 서역의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은 여기서 이르기를 소백화(小白華)라 하는데 곧 백의대사(白衣大士; 관세음보살)가 머물러 사는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를 빌려 그렇게 이름지었다. 7일을 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 함)하고 방석을 던져 물 위에 뛰어드니 천룡팔부(天龍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장, 천·용·야차·아수라·가루라·건달바·긴나라·마후라가, 이상은 사천왕의 권속임)가 모시고 굴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공중에 대고 절을 올리니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꿰미를 준다. 의상이 받아가지고 물러나자 동해용왕이 또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준다. 대사가 받들고 나와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들어가니 이에 참모습(眞身)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앉았던 자리 위 산꼭대기에 쌍대나무가 솟아날 터인데 마땅히 그 땅에 전각을 지으면 좋으리라.’
대사가 이를 듣고 굴속에서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나온다. 이에 금당을 짓고 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봉안해 놓으니 원만한 용모와 아름다운 자태가 꼭 하늘에서 나온 듯하였다. 이후에 그 대나무가 도로 사라졌으므로 이곳이 바로 진신이 머무르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 하였다. 의상대사는 받아온 두 종류의 구슬(염주와 여의보주)을 성전(聖殿)에 모셔두고 떠났다.
후에 원효법사가 뒤따라 와서 뵙고 예배를 드리려고 맨처음 남쪽 들판에 이르니 무논에서 한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다. 법사가 장난으로 그 벼를 좀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흉년이 들었다고 장난으로 대답한다. 또 한참 가서 다리 아래에 이르니 한 여자가 월수백(月水帛; 여자의 월경대)을 빨고 있다.
법사가 물을 청하자 여자가 그 더러운 빨래물을 떠서 준다. 법사가 엎어버리고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푸른 새가 ‘아이구 이 젓먹이 화상아’라고 울더니 홀연히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데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다.
법사가 절에 도착해보니 관세음보살 좌대 아래에 또 전에 보았던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다. 이제야 겨우 전에 만났던 성녀(聖女)가 곧 진신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일컬었다. 원효법사가 성굴(聖窟)에 들어가 다시 참모습을 보려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갔다.”
의상대사는 원효보다 8세나 어렸으나 진골 귀족 출신으로 1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한 이래 원효와 뜻이 맞아 늘 함께 수련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진덕여왕 4년(650)에는 34세의 원효와 26세의 의상이 같이 당나라로 가려다가 고구려군에게 잡혀 간첩으로 오인돼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도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달게 마시고 대오각성하여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게 되고, 의상은 37세 때인 문무왕 원년(661)에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그래서 장안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 화엄종 제2조사(사실상 화엄종의 창시자)인 지엄(智儼, 600∼668년)화상을 만나 그 의발을 전수받는다.
의상이 지엄을 찾아가기 전날 밤 지엄이 꿈을 꾸니 나무 한 그루가 바다 동쪽에서 자라나 점점 커지더니 그 가지와 잎이 온 중국을 다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봉황이 둥지를 틀어서 올라가 보았더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어 광명을 멀리 비추고 있다. 놀라 꿈에서 깬 지엄은 의상이 올 줄 알고 집안을 청소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보고 크게 만족하여 입실(入室; 제자로 들어감)을 허락하였다 한다. 이에 의상은 지엄이 돌아가기까지 8년 동안 지엄의 문하에 있으면서 화엄종지를 철저히 전수받으니 사실상 의상은 지엄의 상수제자였다.
그러나 문무왕 11년(671) 당 고종이 설인귀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정벌하게 하자 이 소식을 탐지한 숙위왕자 김인문이 신라에 이 정보를 알려 대비케 하기 위해 의상을 조기 귀국시키니, 의상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화엄종주의 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급히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무왕의 조리 정연한 답서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의상의 공이 태반이라 하겠다.
다행히 의상에 의한 사전 정보 유출이 효과를 발하여 설인귀 대군이 전단을 열지 않고 회군하자, 문무왕은 한편으로 백제 유민을 회유하고 한편으로 고구려 부흥군을 부추기며 민심을 합일시켜 삼국 통일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움직임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그래서 신라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불국토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의상으로 하여금 동해변 양양 땅에서 보타락가산을 찾아내게 하고 원효로 하여금 다시 이를 증명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낙산사의 주전각은 원통보전(圓通寶殿)이고 그곳에 봉안된 주존은 <관세음보살상>이다.

당나라 점령군과의 싸움

문무왕 13년(673) 7월1일에 삼국통일의 원훈(元勳)인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이 79세의 천수를 누리고 돌아간다. 사적으로는 문무왕의 외숙부이자 매제인 지친이며 조정에서는 군부의 구심점이었던 그가 돌아간 것은 문무왕에게 여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해 윤5월에도 당의 이근행이 임진강까지 쳐내려오는 등 당의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 대당 항쟁이라는 큰 과업이 남아 있는 데다, 그 동안 삼국통일 과정에 공을 세운 무장들의 발호가 만만치 않은 마당에 이들을 제압할 군부의 중심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무왕은 김유신의 장자 삼광(三光) 이찬으로 하여금 김유신을 이어 집정(執政)을 담당하게 하였지만 이전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이 달에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군에 빌붙으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처자가 천민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당군의 침략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해의 제해권 확보가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대아찬 철천(徹川) 등으로 하여금 병선(兵船)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에 진치게 하여 당군의 해상 침략에 대비한다.
당나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이 달에 말갈과 글안병을 이끌고 신라 북변을 전면 공격해 들어온다. 이에 신라는 9회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여 2000여명을 참수했다 하는데, 임진강변의 호로하(瓠蘆河, 장단, 고량포) 전투와 한강변의 왕봉하(王蓬河,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익사한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격노한 당 고종은 문무왕 14년(674) 2월2일에 문무왕을 폐하고 당나라에 있는 그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시키는데,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하고 이필(李弼)과 이근행을 부장으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동행하게 한다. 그러나 문무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점령지를 5경 9주로 나누고 그곳에 진골들을 보내 직접 통치하게 하는 여유를 보이며 9월에는 고구려왕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장율사의 생질이자 명랑법사의 둘째 형인 의안(義安)법사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으로 삼아 불교계를 총괄하도록 한다.
드디어 문무왕 16년(675) 2월에 유인궤는 임진강을 건너서 칠중성(七重城, 현재 경기도 積城)을 깨뜨리고 이근행은 말갈병을 거느리고 바다로부터 쳐들어와 매초성(買肖城, 인천)에 진을 치자, 문무왕은 사죄사를 보내 사과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달랜다. 당 고종도 한반도를 침략하는 것은 수렁에 빠지는 일과 같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하여 못이기는 척하고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김인문을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고쳐 봉하여 중도에서 당나라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나 당 고종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해 문무왕 15년(675) 9월에 숙위학생 김풍훈(金風訓)의 아비 대장군 김진주(金眞珠)가 모반하려다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설인귀로 하여금 김풍훈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다시 침공해 들어가게 한다.
천정성(泉井城, 경기도 교하)으로 쳐들어온 대군을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이 크게 격파하여 1400여명을 참수하고 병선 40척을 빼앗으니 설인귀는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전마 1000필도 노획하였다. 내친 김에 신라군은 9월29일 매초성에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주둔해 있는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 이근행의 본영을 들이쳐서 전마 3만3080필과 그만한 숫자의 병장기를 빼앗으니 이근행은 주둔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싸움 18회를 벌여 모두 이기고 6000여명을 참수하며 전마 200여필을 빼앗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자, 당군은 더 이상 한반도 내에서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드디어 문무왕 16년(676) 2월6일에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으로부터 요동성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공주에 있던 웅진도독부도 요하 하구 발해만의 영구 부근에 있던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겨서 당나라에 있는 백제 백성들을 잠시 이곳으로 옮겨 놓는다. 사실 요하 하구 일대는 원래 백제의 식민지가 있던 곳이었다.
이로써 한반도 안에 있던 당나라 주둔군 사령부는 일단 모두 압록강 밖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무왕은 이달부터 의상대사로 하여금 태백산 기슭에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浮石寺)를 짓게 한다.
그러나 당이 신라 침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1월에 설인귀는 다신 수군을 이끌고 와서 웅진도독부를 되찾기 위해 금강을 거슬러 오르려 한다. 이에 사찬 시득(施得)은 병선을 이끌고 기벌포에서 맞아 싸우는데 이 싸움에서는 패하였으나 이후 22회나 계속되는 크고 작은 싸움에서 번번이 이겨 4000여명을 참수하게 되니 설인귀는 다시 소득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당의 한반도 以夷制夷 전법

이후 당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고전적인 이민족 제어 방법을 쓰기 시작한다. 문무왕 17년(677) 2월25일에 옛 고구려왕인 고장(高藏), 즉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군왕(遼東州都督朝鮮郡王)에 봉하고, 옛 백제 태자 부여융(夫餘隆, 615∼682년)에게는 웅진주도독대방군왕의 직함을 주어 각각 요동으로 돌려보내 유민들을 모아 다스리게 한다. 그러자 문무왕은 다음해인 18년(678) 1월에 배 만드는 일을 총괄하는 선부령(船府令)을 두어 제해권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런데 다음 해인 문무왕 19년(679) 1월29일에 보장왕을 따라서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신성에 와 있던 연개소문의 장자 천남생(泉男生, 634∼679년)이 46세로 안동부의 관사에서 죽는다. 고구려의 최고 통치권자로 적국인 당나라에 투항하고 그 앞잡이가 되어서 조국을 멸망시키는데 앞장섰던 치욕의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당 고종은 그에게 양공(襄公)이란 시호를 내려주고 낙양 동북쪽에 있는 망산(邙山, 북망산)에 장사지내게 했다. 그의 묘지명은 1925년 가을에 발견됐는데, 당시 최고 명필인 구양통(歐陽通)이 묘지명을 쓴 사실이 밝혀졌다. 구양통은 초당 삼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순(歐陽詢, 557∼641년)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인 구양순의 서체를 이어받아 모질고 굳센 글씨를 잘 썼는데, 이런 구양순체를 좋아하던 고구려 기질이 구양통에게 묘지명 글씨를 부탁하게 했던 모양이다.
보장왕이 당나라의 꼭두각시가 되어 요동으로 돌아와 고구려 유민들을 무마해 나가자, 신라는 보덕왕 안승의 권위를 높여 고구려의 정통성을 지켜나가게 하기 위해 문무왕 20년(680) 3월에 왕의 누이를 시집 보내고 금은 그릇과 비단 등 많은 선물을 보낸다. 그리고 문무왕 21년(681) 1월에는 사찬 무선(武仙)으로 하여금 정병 3000을 거느리고 가서 비열홀(比列忽; 함남 안변)을 지키게 한다. 이렇게 고구려 쪽을 단속하는 것은 보장왕이 만주를 근거지로 삼아 나라를 다시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문무왕은 수도에도 새로운 성을 쌓아 왕경 수비를 튼튼히 하려고 그 가부를 의상대사에게 물으니, 의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비록 들판의 초가에서 산다 하여도 정도(正道)를 행하면 복업(福業)이 장구하겠지만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는다 할지라도 이익되는 바 없을 것입니다.”

문무왕은 이 말을 듣고 성 쌓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상은 ‘삼국사기’ 권7 문무왕 본기의 내용인데‘삼국유사’권1 문호왕 법민(文虎王 法敏)조에는 같은 내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또 서울의 성곽을 쌓으려고 이미 관리를 배치하였는데 그때 의상법사가 이를 듣고 글월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금을 그어 놓고 성이라 한다 해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않아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증진해 나갈 수 있겠지만,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을 쌓는다 해도 재해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삼국유사’쪽이 사실 기록에 가깝고‘삼국사기’는 유교사관으로 윤색한 듯한 느낌이 든다. 어떻든 이렇게 국방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며 삼국통일을 이룩해내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던 문무왕도 죽음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래서 21년(681) 7월1일에 56세의 나이로 돌아가고 만다.
  이 해에 당은 보장왕이 요동에서 말갈과 내통하여 모반을 꾀했다 하여 보장왕을 소환하여 사천성 성도 부근의 공주(州)로 유배시킨다. 보장왕(620년 경∼682년)은 울분을 삭이지 못해 다음 해인 신문왕 2년(682)에 유배지인 공주에서 돌아간다. 권신 연개소문에 의해 옹립된 이래 평생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 만년에 정신 차리고 나라를 되찾아보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약속이나 한 듯이 백제의 마지막 태자인 부여융도 이 해 낙양의 사저에서 죽는다. 당나라에 항복한 이래 그 앞잡이가 되어 본국의 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앞장서는 치욕의 삶을 살아온 그가 68세의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이다.
자 시절에 항복하러 온 그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을 주었고 전승의 연회석상에서 당하에 앉아 술을 따르는 치욕을 당했어도 이를 묵묵히 참아내며 천수를 다하고 죽었으니 참으로 용렬한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인물이 태자의 지위에 있었으니 백제 백성들이 아무리 나라를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었을 듯하다. 부여융의 묘지명(도판 7)도 1920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되어 그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히 밝혀지고 있다.
어떻든 이제는 삼국 말기에 각국에서 국권을 책임지고 패권을 다투던 당사자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쟁패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당나라에서도 당 고종이 그 다음해인 신문왕 3년(683) 12월에 죽는다. 그리고 웅진도독을 지낸 유인궤가 좌복야(左僕射)에 올라 국정을 좌우하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 및 신라의 저항의지를 충분히 체험했던 그는 신라 정벌의 불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지라 신라 침공을 영원히 중단하고 만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정권장악이라는 당나라 국내 사정이 신라에 눈 돌릴 겨를이 없게 하였다는 사실도 지나쳐서는 안될 요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여래불좌상

의상대사가 당나라 화엄종조 지엄화상으로부터 화엄종지를 전수받고 귀국하자 문무왕은 만법귀일(萬法歸一, 만 가지 법은 一乘法, 즉 대승법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의 화엄종 이념으로 장차 통일 왕국의 주도이념을 삼으려 한다. 이미 문무왕의 매제가 된 원효대사와 충분히 의논한 뒤에 결정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의상으로 하여금 화엄종의 중심 사찰을 창건하도록 하니 의상대사는 새로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까지 두루 편력하며 적지를 물색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얻은 땅이 태백산 줄기가 뻗어나오다 일으켜 놓은 봉황산 자락이다. 여기에다 의상은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을 마련한다. 그 과정을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의상이 입국한 후에 산천을 두루 돌아다녀 고구려와 백제까지 이르더니 말과 소가 이르지 못하는 곳을 얻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은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빼어나서 참으로 법륜을 굴릴 만한 곳이다. 그런데 얼마 안돼 다른 종파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500여명이나 되었다. 의상이 속으로 대화엄교는 복선(福善)을 갖춘 땅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선묘룡(善妙龍, 당나라 등주 문등현 출신 소녀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타고 귀국하는 의상대사를 보호하는 용이 되겠다고 바다에 뛰어들어 용이 되었으므로 선묘룡이라 하였음)이 항상 따라다니며 보호하고 있다가 가만히 이 생각을 알아차리고 대 신변(神變)을 나타내 허공중에서 큰 돌로 변하였다. 가로 세로 각각 1리(里, 400m)나 되는데 절 위를 덮고서 떨어질 듯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형상을 지으니 뭇 승려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달아났다. 의상이 드디어 절에 들어가서 이 경전(화엄경)을 전파하니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여 부르지 않아도 오는 이가 많았다. 국왕이 공경하여 존중하고 논밭과 노복을 시주하였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6년(676) 2월조에 의하면 이때 의상이 문무왕의 칙지를 받들어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립했다 했으니, ‘송고승전’에서 기술하고 있는 신비한 일들은 이 어름에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부석사에 가보면 이런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단으로 장대하게 높이 쌓은 석축과 각 단에 지어진 문루(門樓) 전각(殿閣)들이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규모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맨 윗단, 즉 제 9단 위에는 이 절의 중심전각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자리하고 있다. 화엄의 종지대로라면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大光明殿)이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곳에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의상이 창시한 신라 화엄종이 당시 통일 신라왕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주도이념이 되기 위해 그에 알맞게 변형된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삼국 통일 과정에 무수한 살육이 자행돼 죽은 원혼들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아미타신앙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서 지적하고 나왔다.
이런 현상은 중국에서도 비슷하여 초당 시기에 정토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집집마다 관세음이고 곳곳마다 아미타(家家觀世音, 處處阿彌陀)’라고 일컬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의상대사는 아미타정토 신앙을 화엄종지와 결합시킨, 독특한 신라 화엄종 체계를 확립하고 그 실체를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에 구현했던 것이다.
남향한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가 보면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 남쪽을 바라보며 북벽에 기대 앉지 않고 서방정토를 상징하듯 서쪽 벽에 기대 앉아 있다.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과 같은 협시 보살상이 함께 모셔져 있지도 않고 아미타여래좌상만 독존으로 모셔져 있다.
혹시 이것이 뒷날 계속된 중수 과정에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 전기에 이곳에 머물러 살았던 화엄종 승려인 원융(圓融)국사 결응(凝, 964∼1053년)의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으니, 의상이 초창할 당시부터 아미타불좌상 1구만 독존으로 모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의상대사가 서쪽 중국으로 가서 지엄의 법등을 전해 받고 돌아와서 창건한 곳이다. 불상을 모신 전각 안에는 오직 아미타불상만 조성해 모셨고 보처(補處, 협시)보살이 없다. 또 영탑(影塔)도 세우지 않았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대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 지엄이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일승(一乘)의 아미타는 열반에 들지 않아서 시방정토로 몸을 삼으니 나고 죽는 모습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화엄경 입법계품에 이르기를 간혹 아미타와 관세음보살이 관정수기(灌頂授記)한 자들이 여러 법계(法界)에 가득찬 것을 본다고 하였다 라고 하셨다. 보처라는 것은 빈 곳을 메운다는 의미인데 불타가 열반하지 않는다면 빌 때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보처보살도 세우지 않고 영탑도 세우지 않는다. 이것은 일승의 깊은 뜻이다.’ 지엄대사가 이로써 의상대사에게 전하고 의상대사는 법을 이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원융)국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화엄 일승 법리와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 아미타불의 성격을 신묘하게 결합시켜 아미타여래를 독존으로 모셔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아미타 신앙의 주체인 아미타불의 권능을 절대화해 의심없이 이에 귀의하게 하면서 화엄 1승 법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유도한 탁월한 종교적 감각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화엄종 사찰에서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화엄종의 발전과 더불어 아미타신앙은 통일 신라사회에 더욱 깊게 뿌리를 내려가게 된다.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45호)은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무량수전이 불탈 때 머리가 전각 밖으로 뛰쳐나갈 만큼 큰 손상을 입었다 하니 의상대사가 조성한 원래 모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항마촉지인을 짓고 편단우견을 한 기본자세가 석굴암 본존불의 상형식과 일치하니 석굴암 불상이 조성된 이후에 이를 모방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 이후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그 수리는 현재의 무량수전이 재건되는 우왕 2년(1376) 경에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두광과 신광으로 나뉜 목조 광배가 독립상의 뒷면에 부착된 구도자체는 원래 모습 그대로일 듯하나 광배 양식만은 개수할 당시의 양식대로 개조한 것일 듯하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 아마티불을 주존으로 모신 사실은 진골 귀족을 비롯한 전 신라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석가불상이나 미륵보살상 대신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그 공덕으로 미타정토, 즉 극락국토로 왕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듯하다. 보물 221호 <영주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이나 국보 201호 <봉화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등이 모두 이런 배경에서 조성된 아마티불상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봉화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북지리는 일찍이 진평왕 때 삭주도독을 지낸 김술종(金述宗)이 그 아들 김죽지(金竹旨, 610년 경∼690년 경)가 태어나기를 빌며 장륙의 <봉화북지리 석조미륵보살반가상>을 조성해 놓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 태어난 김죽지는 이미 진덕여왕 5년(651)에 중시(中侍)의 직책을 맡아 국정을 총괄하기 시작하여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681∼692년 재위)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김유신 다음으로 전공을 많이 세운 백전노장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0)에 당군을 격파하는 기록을 끝으로 전쟁판에서는 이름이 사라지나 그 이전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항상 김유신의 부장이 되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니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자신의 출생을 기원하면서 그 부친인 김술종공이 거대한 규모로 미륵보살반가상을 조성해 놓은 그 곁에 자신의 부모와 자신 그리고 자신과 관련되어 죽은 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봉화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현재 그를 에워싸고 있던 감실도 파괴되고 오른손도 떨어져 나갔으며 코와 눈이 손상되었으나 당당한 체구에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어 경주 <배리미륵삼존불상>의 주존불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듯하니, 그의 부친 때처럼 경주의 장인들을 데려다가 이 여래좌상을 조성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현재는 협시보살이 없으나 광배 아래 공간으로 미루어 원래는 있었으리라고 추정하지만 그 흔적이 분명치 않은 것으로 보면 부석사 무량수전의 <소조아미타여래좌상>처럼 원래 단독좌상으로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그 위치도 호골산(虎骨山) 수월암(水月庵)의 서쪽 암벽에 있어 무량수전의 <소조아미타여래좌상>과 동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두원광과 거신광이 굴실 벽면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화불좌상이 좌우에 2구씩 표현된 것이 남아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광배의 원모양도 이와 비슷한 양식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시무외여원인을 지은 손모습이나 네모 반듯한 얼굴, 넓고 두터운 어깨와 무릎, 통견 양식의 불의 표현 등도 원래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봉안했던 <소조아미타여래좌상>과 같은 양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봉화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와 부석사가 있는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는 산줄기 하나로 갈라 놓은 인접지역이기 때문이다. 물야면과 부석면은 경계를 맞대고 있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신라 쌍탑 양식의 시원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681) 7월1일조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했다. 군신이 유언으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세속에서 전해오기를 왕이 변화해서 용이 되었다고 하고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 유조(遺詔)에서 이렇게 말하였다.(중략) 염을 한 뒤 10일 만에 고문(庫門) 밖 바깥 마당에 나아가서 서국(西國, 인도)식에 의하여 화장하도록 하라. 상복의 차등은 정해진 법도가 있을 터이나 상례제도는 가능한 한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삼국유사’ 권1 문호왕법민조에는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왕이 나라를 21년 다스리고 영륭(永隆) 2년(681) 신사에 돌아가니 유조(遺詔)로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시에 항상 지의(智義)법사에게 말하기를, 짐은 뒷날 호국 대룡이 되어 불법(佛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소원이다 라고 하였다. 법사가 용은 축생의 업보에 해당하는데 어찌 하시렵니까 하고 물으니 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다. 만약 나쁜 업보로 축생이 된다면 곧 내 뜻과 잘 들어맞는 것이다.”

이로 보아 문무왕이 돌아가자 그의 장례는 불교 의식대로 화장으로 치러지고 그 유골은 동해변 대왕암 위에 장사지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무왕이 돌아가고 나자 권력구조의 재편성이 불가피했던 신라의 집권층은 극심한 내분에 휘말리게 되었다. 통일의 원훈이던 김유신이 돌아가고 겨우 8년 만에 문무왕이 돌아가게 되니 통일 과정에 군공을 세운 무장들을 정리하여 그 발호를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미처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자연히 진골귀족으로서 막대한 군공을 세웠던 원로 대신들이 통일전쟁에서 제구실을 못한 세대인 신문왕(645년 경∼692년)을 가당치 않게 볼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즉위 당시 37세 정도가 되었을 신문왕은 정비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여 왕비의 부친인 소판 김흠돌(金突)은 자신의 군공과 세력 기반을 믿고 파진찬 김흥원(金興元), 대아찬 김진공(金眞功) 등과 반란을 꾀하다가 8월8일에 모두 처형되고 만다. 이 사건에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병부령 김군관(金軍官)까지 연루되어 사형을 받았으니 얼마나 광범위한 모반사건이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당연히 왕비 김씨는 폐위되었다.
이런 정변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신문왕은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왕암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입구인 대종천(大鍾川) 변 용당산(龍堂山) 남쪽 기슭에 대규모의 가람을 건립한다. 통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자신의 통치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절의 중심 전각에는 아미타불상이 모셔져 있었을 터이나, 현재 터만 남은 이곳에서 주존불의 존명을 유추할 길은 없다. 다만 금당터 앞에 높이가 13.4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의 삼층석탑이 동서 쌍탑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위용을 짐작케 해준다. 국보 12호로 지정된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국보 30호 <분황사석탑>과 같은 고구려계의 벽돌탑이 보여주는 옥개석의 층급받침 형식과 국보 9호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보여주는 옥개석 상면의 기와지붕 같은 매끄러운 물매 형식을 결합하여 새로 만들어낸 통일 석탑 양식의 효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국보 38호 <고선사(高仙寺)지 삼층석탑>과는 거의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어 선뜻 선후문제를 결정짓기 어렵지만, 쌍탑 양식의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뒤로 놓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1960년 서탑 해체수리 때 3층의 탑신에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런 쌍 3층 석탑 양식은 이후에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전형으로 굳어져서 통일신라 문화의 영향이 미치던 전 지역에 전파돼 우리나라 고유 석탑 양식으로 자리를 잡아 나간다.
‘삼국유사’ 권1 만파식적(萬波息笛) 조에 의하면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서 감은사를 창건했다 해놓고 사중(寺中)의 기록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여 놓고 있다.

“이미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돌아가서 바다 용이 되었으므로 그 아들인 신문왕이 등극하여 이를 끝내고 금당 계단 아래에 동향으로 구멍을 뚫어 놓아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닐 수 있도록 대비해 놓았다. 대개 유조에서 말한 대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 은혜를 느끼는 절, 또는 은혜에 감사하는 절)라 하며 뒷날 용이 형태를 드러내는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한다.”

그리고 신문왕은 뒤이어 2년(682) 7월25일에 문무왕의 능비(陵碑)를 사천왕사 앞에 세우는데 그 이유는 용이 천룡(天龍) 8부중의 하나로 사천왕의 권속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신은 파괴되었지만 비신을 짊어지고 있던 귀부(龜趺)는 사천왕사지에 남아 있어 <문무왕릉비 귀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귀부는 머리 부분이 파괴됐다. 귀갑 문양이나 등판 주변을 두른 인동문띠 및 비신을 받치는 연화문띠가 무열왕비의 귀부보다 더 장식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어 무열왕릉비를 계승한 느낌이 강하다. 글씨는 초당 삼대가 중에서 그 필체가 가장 굳세고 모질기로 이름 높은 구양순체에 가깝다. 조선후기의 금석학자인 홍양호는‘신라문무왕릉비에 부침(題新羅文武王陵碑)’이라는 글에서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의 글씨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농부의 쟁기에 걸려 나온 비 조각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신문왕은 이런 역사(役事)를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끝내고 탈상한 다음 해인 신문왕 3년(683) 2월에 김흠운(金運, ?∼655년)의 막내 딸을 왕비로 간택하여 5월에 성대한 혼인 의식을 치르며 맞아들인다. 그런데 김흠운은 내물왕의 8세손으로 태종 무열왕의 둘째 사위가 되었다가 무열왕 2년(655) 양산(陽山, 충북 영동)의 조비천성(助比川城, 飛鳳山城)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이다. 그러니 그의 부인은 원효대사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던 과부 공주인 요석(瑤石)공주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문왕의 계비로 간택된 신목(神穆)왕후 김씨는 요석공주와 김흠운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딸로 설총의 성 다른 누이였음에 틀림없다. 뒷날 설총이 신문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바치는 것도 이런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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