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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6
 관리자  08-22 | VIEW : 3,120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6)]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까닭은?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법수(法水)는 동쪽으로 흐르고



    물 은 차면 넘쳐 흐르게 마련이다. 인류문화도 이와 같아서 차고 넘쳐 흐르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무한히 전파돼 나아간다. 불교가 우리에게 전해져 온 것도 이런 속성 때문이다.
  교조 석가모니(서기전 566~486년)가 인도 북부 설산(雪山) 아래 작은 나라인 가비라국 태자로 태어나서 온갖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그 모든 것이 덧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출가하여 6년 고행 끝에 크게 깨달아 불타가 되는 데서부터 불교는 시작되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었으므로, 근본불교 즉 소승(小乘) 불교시대에는 자력(自力) 수행을 중시하여 교조 석가모니불을 먼저 깨달은 큰 스승 이상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즉 영원히 받들어 모실 성인(聖人)으로만 생각하고 신격화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격 신상으로 불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발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더구나 성인으로 떠받들어야 할 위대한 인물이 범상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불경스럽다고 생각한 동양적인 위계(位階)의식은 불타의 전기를 소재로 그려내는 불전도(佛傳圖)에서 불타를 빈자리(空座)나 발자국 등 상징표현으로만 처리했다. 그리하여 불타의 인간적 모습은 불멸(佛滅; 불타의 입멸, 즉 불타의 돌아감) 이후 약 600년 동안 어디에서도 표현되지 않았다.
  그런데 불멸 후 600년이 지난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쿠샨제국의 중심지인 간다라 지방에서 대승(大乘) 불교가 일어나자 이를 이념기반으로 하여 서북인도의 간다라와 중인도의 마투라 양대 지역에서 불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동쪽의 진(秦)·한(漢)제국과 서쪽의 그리스·로마제국을 연결하는 무역 통로인 비단길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인도 대륙까지 이어지는 삼거리에 위치하여 세계무역을 주도하는 상업제국으로 번영을 누리던 쿠샨제국에서 불교가 점차 세계성을 띠어가면서 불보살의 권능에 의지하려는 타력(他力) 신앙으로 발전해 나갔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수많은 중생들을 모두 큰 수레(大乘)에 태우고 깨달음의 경지에 함께 도달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이들이 보살이기 때문에, 자연 사람들은 보살의 초월적인 능력에 귀의하게 되니 이로부터 불보살이 예배 대상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인격 신상을 출현시킨 그리스 문화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결과로 간다라 지역에 300여년 동안 뿌리내리고 있었으니 불보살상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승불교 이념이 쿠샨제국을 가득 채워 가는 동안 불상은 점차 예배 대상으로 착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대승불교가 쿠샨제국에 가득 차고 넘쳐 중국으로 흘러갈 때는 불상이 예배의 주대상으로 신앙의 구심점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전도승이었던 가섭마등(迦攝眠)과 축법란(竺法蘭)도‘42장경(四十二章經)’과 석가불입상을 백마 등에 싣고 왔던 것이다.
  불경과 불상을 처음 접한 후한의 명제(明帝, 58~75년)는 우선 불상을 본떠 만든 뒤 남궁(南宮)의 청량대(淸凉臺)와 개양문(開陽門) 위에 봉안하고 자신의 수릉(壽陵)인 현절릉(顯節陵) 안에도 모셔 놓았다 한다. 이처럼 중국 불교는 처음부터 불상을 예배대상으로 삼는 불교로 출발하게 되었다.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쿠샨제국의 중심지였던 간다라 지방에서 떠나 왔을 터이니 이들이 모시고 온 불상은 당연히 간다라 초기 불상양식을 보였을 것이다. 라호르 중앙박물관 소장의 <상투구슬 있는 불입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듯하다. 그러니 명제가 본떠 만든 불상도 간다라 초기 양식이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전도승들이 계속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중국인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후한이 멸망기에 접어들어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시작하는 2세기 후기부터다. 그래서 ‘삼국지(三國志)’ 권49, 유요전(劉繇傳)에서는 “착융(?融)이 구리로 불상을 만들고 금을 발랐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국에서 최초로 금동불상(金銅佛像)을 조성한 사실을 정사(正史)에서 밝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중국 하북성 석가장 부근에서 출토돼 현재 미국 포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견염선정불좌상(肩炎禪定佛坐像)>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간다라 초기 불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불상양식은 이후 장인들의 몰이해와 모방의 반복을 거치면서 극단적인 퇴영화(退化) 현상을 보인다. <퇴영선정불좌상>과 같은 양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대체로 불교가 가지고 들어온 공(空)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어 도가(道家)의 무(無) 개념을 빌려 불교를 어렴풋이 이해하던 단계인 격의불교(格義佛敎) 시대를 반영하는 현상이었으니, 외래문화 수용 과정에 언제 어디서나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과도기적 퇴영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런 과도기 현상은 받아들이는 쪽의 문화수준 여하에 따라서 장기화하기도 하고 단축되기도 하는가 하면 자기적인 요소가 강하게 극복되기도 하고 외래적인 요소에 압도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나 결국 두 문화의 장점이 혼연일치되어 제3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것이 인류문화 진보의 공통된 발자취였다. 그래서 중국에도 불교가 들어온 지 200여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난다.
  이는 중화로서의 자존의식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강했던 한족(漢族)이 400년 치세이념이던 유교가 말폐를 노정하여 더 이상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는데다 이를 대치할 만한 새로운 이념이 나타나지 않아 전에 없던 사상적 공백기를 맞이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위에 야만족이라고 무시하던 북방의 호족(胡族)에게 무력으로 유린되어 참담한 굴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현실에서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귀의처가 절대로 필요하였다는 시대적 여건도 크게 작용하였던 듯하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불도징(佛圖澄, 232~348년) 같은 대전도승이 후조(後趙) 황제 석호(石虎)와 같은 5호(五胡) 제왕들의 절대적인 신봉을 받아 불교를 중국화하는 일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점도 불교 수용을 더욱 신속히 이루어내는 데 한몫했다.
  불도징은 종래에 금지되었던 중국인의 출가를 허용하게 하여 문도(門徒) 1만인을 양성하고 손수 893곳의 절을 건립하여 중국불교 교단 확립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그를 뒤이은 중국인 수제자 석도안(釋道安, 314~385년)은 불경 원의(原意)에 충실한 주석을 가하여 원뜻을 제대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격의불교를 탈피하는 작업을 서두르는 한편, 교단의 중국화를 꾀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 승려의 법성(法姓)을 석씨(釋氏)로 통일하고 의제(衣制)와 법계(法階)를 정하였으며 율장(律藏)을 토대로 승단생활의 규칙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역의 고승을 초빙하여 한어(漢語)를 익히게 한 뒤 직접 역경(譯經)에 종사케 함으로써 불교 경전의 정확한 번역을 서두른다. 따라서 불상도 당연히 이런 중국화 운동에 발맞추게 되었던 것이니 후조(後趙) 건무(建武) 4년(338)에 조성된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禪定佛坐像)>과 같은 황인종 용모의 불상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제 법수가 중국대륙에 충만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법수는 다시 동토(東土)인 우리나라로 흘러 넘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도안에게 깊이 귀의하고 있던 전진(前秦) 황제 부견(符堅, 338~385년)이 소수림왕 2년(372) 고구려에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 및 불경을 보냄으로써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해준다. 그리고 뒤이어 동왕(同王) 4년에는 아도(阿道)가 다시 왔다 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위해 동왕 5년에 각각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살게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 전파의 시초라 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도안의 명령을 받고 해동전도(海東傳道)의 큰 책임을 수행하고자 온 전도승이었므로 둘 다 도안의 제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져온 불상은 당시 중국에서 흔히 만들어지고 있던 양식화된 간다라불상 형태의 전통적인 것이거나 중국화된 신형일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처음 전해주는 불교 개척지에 신형을 보내는 모험은 하지 않았을 터이니 간다라식의 구형(舊形)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불상은 중국에서 양식화되었던 간다라식 불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조본(祖本)으로 하여 이후에 불상을 조성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뚝섬 출토 선정불좌상>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형태의 불상이기 때문이다.
  서울 지역이 당시 백제의 수도권이었고 백제에도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滅難陀)가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인을 출가시켰다 하였으니 혹시 이 불상이 이들과 관련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뒷날 장수왕(413~491년)이 이곳을 점령하여 고구려 판도에 넣었으므로(475년) 이 불상이 고구려에서 흘러들어 왔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떻든 이 불상은 5호16국 시대에 유행하던 사자좌상(獅子座上)의 선정불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일찍이 중국제작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사자상이 지나치게 양식화되어 본연의 면목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모작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성장

  그러면 어째서 전진 황제 부견이 하필 소수림왕 2년에 가서야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 주었을까.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과정 및 대중국 관계를 대강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서기전 108)에 한의 침략군이 위만(衛滿)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북부지방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의 4군(郡)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한 무제는 영토 확장 욕심이 강한 무단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고질적인 위협세력인 북방 유목민족 흉노 정벌을 제일 목표로 삼아 원삭(元朔) 2년(서기전 127)부터는 적극 공세로 나가 하투(河套)지역을 빼앗아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고 원수(元狩) 2년(서기전 121)에는 흉노 혼야왕(渾邪王)의 항복을 받아 내몽고 지역에 5속국을 설치한다. 그리고 원정(元鼎) 2년(서기전 115)에는 하서(河西) 통로를 장악하여 주천(酒泉)과 무위(武威) 두 군을 설치하고 원정 6년(서기전 111)에는 장액(張掖)과 돈황(敦煌) 두 군을 더 둔다. 이곳이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이다.
  다음 원봉(元封) 2년(서기전 109)에는 서남쪽 운남(雲南)을 정벌하여 익주(益州)를 두니 지금의 운남성이 그곳이다. 그 다음 차례로 동북 지역을 정복하여 우리나라 북부에 4군을 두었던 것인데, 한 무제는 영토 확장 욕심 이외에도 흉노세력의 왼쪽 날개를 꺾어 놓으려는 목적과 늙지 않게 하는 불로초(不老草)가 나는 삼신산(三神山)이 이곳에 있다는 속설을 믿고 이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무리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무려 5만7000의 수륙 양군이 일년 동안 악전고투하여 얻어낸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이 침략세력에 곧바로 강력하게 저항하고 나선다. 중국 본토와 거리가 먼 진번과 임둔, 두 군은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서기전 82)에 소멸하고 만다. 그래서 침략군의 중심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대동강 유역 평양 중심지역에 설치했던 낙랑군과 압록강 유역에 두었던 현도군만 남아 있게 된다. 낙랑은 해로로 중국 본토와 연결되고 현도는 육로로 본토와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한이 기울어가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고구려가 현도군 내의 압록강 중류 환도성에서 나라를 일으켜(서기전 37년) 현도와 낙랑마저 우리 땅에서 몰아내고자 한다. 고구려는 힘을 키워가며 힘이 닿는 대로 끊임없이 현도와 낙랑을 괴롭혔는데 드디어 태조왕 69년(121)에는 현도성을 함락하고 태수 요광(姚光)을 잡아 죽이고 이를 구원하러 온 요동 태수 채풍(蔡風)마저 전장에서 죽인다.
  뒤이어 태조왕 80년(132)에는 요동과 낙랑을 이어주는 길목인 서안평(西安平), 즉 지금의 단동(丹東)을 들이쳐서 대방(帶方)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오기도 한다. 후한이 노쇠하여 황건란(黃巾亂)이 일어나는 등(184년)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고구려는 낙랑과 현도를 몰아내고 요동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지만 마침 이때 현도의 아전 출신인 공손도(公孫度)가 요동태수가 되어 고구려를 선제 공격함으로써(190년) 낙랑과 현도를 몰아낼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후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요동태수직을 이어받고는 산상왕 8년(204)에 낙랑군을 양분하여 둔유현(屯有縣) 이남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낙랑의 옛땅에 대한 식민통치를 더욱 강화한다. 또 그 아들 공손연(公孫淵)은 중원에서 3국이 나뉘어 패권을 다투는 것을 이용해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연합함으로써 이웃한 조위(曹魏)를 견제하며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다.
  이에 고구려는 공손씨의 세력에 눌려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동천왕 8년(234) 8월에 제갈공명이 진중에서 병사하고 공손연이 동천왕 11년(237) 7월에 연왕(燕王)을 자칭하자 위나라 군사권을 총괄하던 태위 사마의(司馬懿)는 공손연 토벌에 직접 나선다. 눈앞의 호랑이가 사라졌으니 등 뒤에서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집적대던 여우를 먼저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동천왕 12년(238) 8월이었다. 동천왕은 숙적 공손씨를 토멸한다는 한 가지 사실에만 정신이 팔려 사마의를 도와 공손씨 토멸에 일조를 해서 마침내 그해 10월에 양평성(襄平城)을 깨뜨리고 달아나는 공손연 부자를 목베어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손씨가 장악하고 있던 요동 현도 낙랑 대방 4군은 고구려가 차지하지 못하고 다시 위나라 수중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동천왕은 재위 16년(242)에 요동에서 낙랑으로 통하는 통로인 서안평을 점령하여 낙랑과 대방을 고립시키려 한다. 그러자 위나라 유주(幽州)자사로 있던 관구검(丘儉)이 동천왕 20년(246)에 현도성에서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환도성을 침략해오니 동천왕은 2만 병력을 거느리고 이를 맞아 싸우게 된다. 그러나 동천왕은 수의 우세를 믿고 적을 얕보다가 관구검의 5000 철기(鐵騎)의 방진(方陣)에 걸려 1만8000 병력을 잃고 10월에는 환도성마저 빼앗기고 만다.
  동천왕은 겨우 몸을 빼 남옥저로 달아나는데 적군의 추격이 매우 급하여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때 근신인 밀우(密友)가 죽음을 무릅쓰고 적군의 추격을 따돌려 왕을 무난히 남옥저에 당도할 수 있게 하고, 유유(紐由)는 항복을 가장하고 음식을 적장에게 바치는 척하며 식기 속에 감춰둔 칼로 적장을 찌르고 함께 죽음으로써 적군의 예기를 꺾어 놓는다. 이로써 동천왕은 반격할 기회를 마련하여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된다.
  이에 관구검은 다만 환도성에 전승기공비(도판 3)만을 세운 다음 철군해 돌아간다. 이후 위나라에서는 사마의 일가가 국권을 좌우하다가 결국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이 위(魏)로부터 나라를 빼앗아 진(晋)나라를 건국한다. 따라서 사마의가 직접 정벌했던 요동 일대에 대한 사마씨들의 연고의식이 이곳에 중앙집권력을 강하게 행사했으므로 여기서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기는 어려웠다. 고구려가 이후 한동안 낙랑과 대방을 아우르지도 못하고 현도와 요동으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모용(慕容)씨와 힘겨루기

  한편 공손씨가 멸망하자 요동지방에 세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막호발(莫護跋)이라는 선비족 추장이 내몽고 흥안령 부근 선비산 기슭에서 살던 부족을 이끌고 요서지방에 내려와 있다가 사마의가 공손씨를 토멸할 때 선봉이 되어 공을 세우고 사마의로부터 솔의왕(率義王)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에 막호발의 후손들은 스스로 모용(慕容)씨라 일컬으며 요서의 실력자가 되는데, 요동에 세력의 공백이 생기자 점차 요동으로 옮겨와 이곳을 장악해 나간다.
  결국 막호발의 증손인 모용외(慕容, 269~333년)에 이르면서 요동의 실력자로 떠올라 고구려 서천왕 16년(285)에는 모용부의 수장 자리에 오른다. 모용외는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바로 그 해에 부여를 침공하여 멸망시키는데 부여는 진(晋) 무제(265~290년)의 배려로 다음해(286년)에 나라를 다시 세운다. 옥저로 피난해 있던 태자가 진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진제국은 무제가 돌아가고 나자 혜제(惠帝, 291~306년)의 무능과 왕후 가(賈)씨의 천단 등으로 갑자기 기울기 시작하여 8왕의 난(300~306년)을 거치고 나서는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가가 해체되는 위기에 처한다.
  이에 장성을 넘어와 살던 호족(胡族)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벌써 혜제 광희 원년(306) 6월에는 이웅(李雄)이 대성(大成) 황제를 자칭하기에 이른다. 모용외도 때를 놓치지 않고 회제(懷帝) 영가(永嘉) 원년(307) 12월에 창려군(昌黎郡) 대극성(大棘城)을 근거로 대선우(大禪于)를 자칭하며 국가건설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중국이 쇠약해지기만을 기다리는 나라가 또 있었으니 바로 고구려였다. 전·후한 교체기에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나라를 세운 이래 300여년 동안 중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해온 고구려는 진나라가 해체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낙랑과 대방은 물론 현도와 요동에서 중국 세력을 몰아내고 우리 선조들이 살던 옛땅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이에 고구려 사람들은 제왕손들 중에서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영웅을 찾아 왕으로 옹립하니 이가 곧 미천왕(300~330년) 을불(乙弗)이다. 미천왕은 서천왕(270~291년)의 둘째왕자인 돌고(固) 고추가의 아들로, 돌고가 봉상왕 2년(293) 9월에 형인 봉상왕으로부터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누명을 쓰고 죄없이 죽임을 당하자 시골로 달아나서 7년 동안 신분을 숨기고 백성들 틈에 끼어 살며 온갖 고생을 겪었으나 이를 꿋꿋이 참고 슬기롭게 이겨낸 분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5 봉상왕 본기와 미천왕 본기에서는 그 정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을불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달아나 처음에는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 가서 머슴을 살게 되었다. 음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부리기를 매우 고되게 했다. 그 집 곁에 있는 둠벙에서 개구리가 울자 을불로 하여금 밤에 돌을 던져 그 소리를 금하게 하고 낮에는 나무하는 것을 재촉하여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으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일년을 채우고 떠나서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을 파는데, 배를 타고 압록강에 이르러서 소금을 강의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 집에 맡기게 되었다. 그런데 늙은 할미가 소금 좀 거저 달라고 한다. 한 말을 퍼주었더니 또 더 달라고 하므로 괘씸해서 거절하자 그 할미가 앙심을 품고 몰래 신발을 소금 속에 넣어 두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을불이 소금 짐을 지고 길을 떠나자 할미가 뒤쫓아와 소금 짐 속에서 신발을 찾아내고 압록현 원에게 고소하므로 변명할 방도가 없어 신발 값으로 소금을 물어주고 매까지 맞는 억울한 일을 당한다. 이에 몰골은 몹시 마르고 의복이 다 헤져서 누구도 왕손으로 알아볼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을불이 이렇게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소금장수로 여러 해를 압록강과 비류수 일대를 떠돌며 살아가는데, 마침 명재상인 창조리(倉祖利)가 봉상왕으로는 모용외를 누르고 낙랑 대방 현도 요동의 옛땅을 도저히 되찾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 과업을 감당할 만한 인물을 왕으로 모실 생각을 하게 된다.
  봉상왕은 재위 2년(293) 8월에 모용외의 침략을 받자 신성(新城)으로 피해가다가 모용외의 추격에 걸려 죽을 뻔하였다. 그리고 5년(296) 8월에는 모용외가 서천왕릉이 있는 고국원(故國原)까지 침략해 들어와 부왕인 서천왕릉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도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봉상왕은 이를 응징할 결심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7년(298) 10월과 9년(300) 8월 두 차례에 걸쳐 궁실을 화려하게 증축하고 수리하는 어리석은 정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결국 창조리는 북부(北部) 사람 조불(祖弗)과 동부(東部) 사람 소우(蕭友) 등으로 하여금 산과 들을 뒤져 은밀히 을불을 찾아보게 한다.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던 중에 드디어 소우가 압록강 서쪽 지류인 비류강(沸流江)가에서 배를 타고 있는 소금장수 을불을 발견한다. 모습은 볼품없어도 행동거지가 보통과 달라 을불일 것이라고 생각해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을불은 이들을 의심하여 자신은 왕손이 아니라 한낱 촌사람일 뿐이니 다른 곳에 가서 찾아보라고 시침을 뗀다.
  소우 등은 더욱 을불이라는 확신을 갖고 ‘금상이 인심을 잃은 지 오래라 나라의 주인노릇하기에 부족하므로 모든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의심하지 말라’고 간곡히 설득하여 창조리에게 모시고 온다. 창조리는 을불을 조맥(鳥陌) 남쪽 집에 숨겨두고 9월에 봉상왕이 후산(侯山)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가자 따라가서 그곳에 온 사람들에게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은 나를 본받도록 하라’고 하며 갈대 잎을 관에 꽂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따라 꽂았다. 창조리는 뭇사람의 마음이 같은 줄 알고 나서 다 함께 봉상왕을 폐위시켜 별실에 가두고 을불을 맞아들여 옥새를 올리고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미천왕의 대활약

  이렇게 등극한 미천왕은 백성들이 기대했던 대로 옛땅을 되찾는 일에 적극 나선다. 3년(302) 9월에는 왕이 3만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현도군을 정벌하여 아우르고 거의 해마다 요동성을 공격하여 모용외를 괴롭힌다. 그래서 ‘양서(梁書)’ 권54 고구려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진(晋)나라에서 영가(永嘉, 307~312년)의 난이 일어나자 선비족인 모용외가 창려군(昌黎郡) 대극성(大棘城)에 도사리니 동진 원제(元帝, 317~322년)가 평주(平州)자사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가 자주 요동을 습격하였고 모용외는 제압할 수 없었다.”

  현도를 손안에 넣은 미천왕은 한반도 안에 있는 낙랑과 대방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마침 미천왕 12년(311)에 이르러 진나라가 극도의 내분과 이민족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6월에는 흉노족 유요(劉曜)에게 수도인 낙양이 함락돼 황제인 회제가 사로잡히고 비빈들이 능욕당하는 수치를 당하며 멸망의 문턱에서 허덕이게 되자, 미천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낙랑과 요동을 잇는 통로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급습하여 빼앗아 버린다.
  통로가 막히고 본국의 구원이 가망없게 된 낙랑과 대방은 고구려의 압박에 견딜 수 없어 드디어 미천왕 14년(313) 10월에 자국민 1000여 가구를 이끌고 요동지방으로 옮겨간다. 이로써 한 무제가 우리 땅에 한 4군을 설치한 지 421년 만에 이들을 한반도 밖으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이때 정황을 중국의 역사책인 ‘자치통감(資治通鑑)’ 권88 진 효민기(晋 孝愍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건흥(建興) 원년(313)에 요동사람 장통(張統)이 낙랑과 대방에 자리를 틀고 앉아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였는데 해를 거듭해도 풀리지 않았다. 낙랑사람 왕준(王尊)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돌아가니 외는 그들을 위해 낙랑군을 설치하여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요동 출신 장통이란 자가 낙랑과 대방을 지켜보려고 2년여 동안 미천왕과 겨뤄보다가 견딜 수 없게 되자 들어와 살던 중국인 1000여 가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달아나 모용외에게 빌붙어 그곳에 낙랑군을 옮겨 세웠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에 의해 서안평이 막혔으므로 그들은 응당 바닷길로 달아났을 터이니 요동지방에 재건한 낙랑도 요동 반도의 갯가 어느 곳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천왕은 낙랑이 다스리던 우리 강산을 모조리 되찾은 다음 그 이듬 해인 미천왕 15년(314) 9월에는 남쪽으로 대방이 다스리던 지역까지 진격하여 손안에 넣는다. 한반도 안에 있던 중국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미천왕은 그 다음 해인 16년(315) 2월에 현도성을 다시 침공해 요동 땅을 되찾는 일에 앞장선다.
  그러나 미천왕은 이 현도성 정벌에서 모용씨 세력을 소멸시키지 않는 한 요동지역 진출이 어렵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를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미천왕은 20년(319) 12월에 평주(平州)자사 최슬(崔瑟)을 통해 모용씨의 서북쪽에서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 우문(宇文)씨와 서남쪽을 점거하고 있던 선비족 단(段)씨를 움직여 모용외를 포위 공격해 들어간다.
  위기에 몰린 모용외는 반간계(反間計; 연합세력을 반대로 이간질하는 계획)를 써서 우문씨 군사에게 음식을 보내고 최슬의 사자가 간밤에 도착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서 고구려군이 의심을 내 철군하도록 한다. 그래서 미천왕은 모용씨를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고구려와의 밀약이 탄로난 최슬은 도리없이 집안을 버려둔 채 10여기만을 이끌고 12월에 고구려로 망명하고 만다.
  삼국의 연합군을 계략으로 물리친 모용외는 그 장자 모용황()을 시켜 우문부를 격파하고 그 소자 모용인(仁)에게는 요동을 지키게 한 다음 낙랑태수 장통을 시켜 고구려군을 하성(河城)에서 격파하여 고구려 장수 여노(如)를 비롯한 1000여명의 군사를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후 미천왕은 계속해서 모용씨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성을 공략하였으나 모용한(翰)과 모용인 형제가 굳게 지켜내는 바람에 이를 차지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미천왕은 31년(330)에 갈()종 석륵(石勒, 319~333년)이 하북성 양국(襄國)에서 후조(後趙)를 건국하여 모용씨를 압박하자 그와 동맹을 맺는다. 미천왕은 모용씨를 섬멸하기 위해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건국을 축하하고 호시( 矢; 호나무로 만든 화살. 품질이 우수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지방에서만 난다)를 선물하기도 했다.
  아무튼 선비족의 영웅인 모용외는 소위 영가(永嘉)의 난이라고 부르는 서진(西晉) 말기의 대혼란을 틈타 대극성을 중심으로 요동을 장악하고 주변을 아울러 만주 일대를 호령하려 하였으나, 모용외를 능가하는 영웅인 미천왕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낙랑과 대방 두 군을 되찾은 미천왕도 모용외의 동방 진출은 막았다 하나 모용외로 인해 서방진출의 길이 막혀 끝내 요동정벌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미천왕은 이런 천추의 한을 남긴 채 미천왕 32년(331) 2월에 돌아가고, 모용외 역시 적수를 잃고 버틸 힘이 다하였던 듯 2년 뒤인 고국원왕 3년(333) 5월에 뒤따라 죽고 만다.

  고국원왕과 모용황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태자 쇠(釗)가 등극하고 모용부에서는 모용황이 뒤를 이으니 고구려와 모용 선비의 다툼은 두 번째 마당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쇠는 철(鐵)을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이었던 듯한데 음을 빌려 한자로 표기하려니 쇠(釗)라고도 하고 사유(斯由) 혹은 사유(斯劉)라고도 불렀던 듯하다. 미천왕이 태자에게 걸었던 기대를 그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떻든 미천왕의 태자로 등극한 고국원왕(?~371년)도 만만치 않은 영웅 기질을 타고난 임금이었다. 그런데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세자였던 모용황(291~348년)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용을 닮은 얼굴에 이마가 넓적하고 키가 7자8치(약 234cm)나 되는 거구에다 씩씩하고 용감하며 유교 경전 배우기를 좋아하고 천문(天文)에 능통했었다 하니 문무를 겸전한 호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용황은 시기심이 많아 형제들의 능력을 용납하지 못하였으므로 수장의 지위를 물려받고 나자 형제들이 모두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선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솜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무 겸전의 탁월한 능력을 타고난 서장형(庶長兄) 모용한이 숙적인 단(段)부로 망명하고 같은 배 소생의 아우인 모용인은 아우 모용소(昭)를 권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모용황은 아우 소를 잡아다 죽여버리고 평곽으로 달아난 모용인을 치기 위해 막내 아우들인 유(幼)와 치(稚) 및 사마(司馬) 벼슬하는 동수(壽, 289~357년)를 보낸다. 그런데 이들은 모용인을 정벌할 뜻이 없었으므로 전쟁에 패한 척 항복하니, 이 소식을 들은 요동 일대 군현의 우두머리들이 항복하거나 성을 버리고 달아나서 모용인 세력이 요동 일대에서 크게 떨친다.
  이에 고국원왕 6년(336) 정월에 모용황은 사마 고후(高)의 꾀를 받아들여 자신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바닷길로 얼음을 타고 급속하게 진격하여 육로만을 대비하고 있던 모용인을 격파하여 죽여버린다. 이때 모용인을 정벌하러 갔다가 항복해 합류해 있던 모용유, 모용치 형제와 동수, 곽충 등은 도중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는데 모용유 형제는 중도에서 되돌아왔으나 동수와 곽충은 계속 동쪽으로 달아나서 고구려로 망명해 온다.
  고국원왕은 이들의 형제 싸움을 지켜보면서 내분에 의해 멸망하기만을 기다리며 망명해 오는 자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모용황은 모용인을 잡아죽여 요동일대를 평정한 다음 고국원왕 7년(337) 10월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대극성에서 나라를 세운다. 이에 하북성 업()에 도읍을 정하고 천왕(天王)을 자처하던 후조(後趙)의 석호(石虎, 335~349년)는 고국원왕 8년(338) 5월에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연왕 모용황을 정벌하기 위해 대극성을 포위한다.
  사실 석호를 불러들인 것은 모용황이었다. 서남쪽에서 연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단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석호에게 청병했던 것인데, 석호는 모용황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트집잡고 도리어 단씨를 향도로 삼아 연나라 수도를 포위 공격하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요동과 요서의 많은 성읍들이 후조의 석호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연나라의 운명은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다행히 장하장(帳下將) 모여근(慕輿根) 등이 성벽에 개미떼처럼 붙어 오르는 조나라 병사들을 물리치며 10여일 동안 악전고투로 성을 지켜내자 조나라 군사가 지쳐 퇴각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때 모용황은 왕자 모용각(恪)으로 하여금 경기병(輕騎兵) 2000명을 이끌고 퇴각하는 10만대군을 추격하게 하여 3만여명을 목베어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강적을 물리친 모용황은 적의 내침 때 항복하여 창날을 거꾸로 댄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봉추(封抽), 송황(宋晃), 유홍(游泓) 등이 또 달아나 고구려로 온다.

  모용씨의 고구려 침략

  뿐만 아니라 조 천왕 석호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수륙 양면으로 연나라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도료(渡遼) 장군 조복(曹伏)으로 하여금 청주(靑州; 산동 서쪽의 황하 하구 이남지역) 사람들을 거느리고 발해만 입구의 섬으로 나가 지키게 하면서 곡식 300만섬을 실어다 주었다. 또 배 300척에 곡식 30만섬을 실어 고구려에 주었고 전농 중랑장(典農中郞將) 왕전(王典)으로 하여금 사람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바닷가에서 둔전(屯田)을 일구도록 하였다. 그 다음 다시 청주자사에게 명하여 전선 1000척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내분과 서쪽의 강적인 조나라 때문에 그동안 고구려의 태도가 못마땅했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모용황은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는지 고구려를 침공하여 자웅을 가리려 한다. 그동안 고구려도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꾸준히 군비를 증강해 왔었다.
  드디어 모용황은 고국원왕 12년(342) 10월에 수도를 용성(龍城)으로 옮긴 뒤 11월에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으로 침공해 들어온다. 서쪽의 단씨와 우문씨에 오랫동안 망명해 있다가 귀국한 모용황의 큰형 모용한(翰)이 반대편에 있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배후의 근심을 없애야 마음놓고 서쪽으로 중원을 도모해 나갈 수 있다고 권한 까닭이었다. 모용한은 과거 모용외 시절에 요동에 진치고 있으면서 고구려와 오랫동안 겨루어 왔기 때문에 고구려를 잘 알고 있었다.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한 말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문씨가 강성한 지 오래되어 오랫동안 나라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문 일두귀(逸豆歸)가 빼앗고 훔쳐서 나라를 얻었으나 뭇 사람의 마음이 따르지 않고 더해서 성품과 지식이 못나고 아둔합니다. 장수는 재주가 변변치 않고 나라는 방위가 없으며 군대는 부오(部伍)가 없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그 나라에 있어서 그 지형을 아는데 비록 멀리 강한 갈종(宗; 석호를 일컫는다)에 빌붙었다 하나 명성과 위세가 걸맞지 않으니 더욱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공격한다면 백번 해도 백번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으면서 항상 넘볼 뜻이 있으니, 저들은 우문씨가 이미 망한다면 화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아 반드시 빈 때를 틈타 깊이 들어와 대비하지 않은 것을 덮칠 것입니다. 만약 군병을 조금 남겨 놓는다면 지키지 못할 것이고, 군병을 많이 남겨 놓는다면 치러 다니지 못할 터이니 이는 가슴과 뱃속의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먼저 이를 제거해야 하니 그 세력을 살피다가 일거에 이기셔야 합니다. 우문씨같이 자신이나 지키는 오랑캐는 반드시 멀리 와서 이해를 다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고구려를 취했다면 우문씨를 다시 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두 나라가 이미 평정되면 이익이 동해까지 미쳐 나라는 넉넉하고 군대는 강해서 뒤돌아볼 근심이 없을 터이니 그런 연후에라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모용한은 고구려 환도성 공격의 전략을 모용황에게 알려준다. 환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남쪽과 북쪽 두 길이 있는데 남쪽 길은 험악하고 좁으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니, 고구려 사람들은 반드시 대군이 북쪽 길로 쳐들어오리라 생각할 터이므로 그 반대로 공격해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용황은 날랜 군사 4만을 친히 거느리고 모용한과 모용패(覇)를 선봉으로 삼아 남쪽 길로 쳐들어가고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에게는 1만5000군사를 주어 북쪽 길로 진격하게 하였다.
  과연 고국원왕은 여기서 전략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왕제 고무(高武)에게 정병(精兵) 5만을 주어 북도로 나아가 맞아 싸우게 하고 자신은 노약병 약간을 이끌고 남도로 나아갔던 것이다. 남도에서 주력부대를 만난 고국원왕은 대패하여 거의 필마단기로 달아나니 환도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대비인 주(周)씨와 비빈을 비롯한 왕족들이 모두 포로로 잡히고 환도성 내 남녀 5만여명 역시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북도의 연나라 침략군 1만5000이 모두 전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고구려의 주력 부대가 달려왔으므로 모용황은 고국원왕을 더 추격할 수 없었다. 이에 왕궁을 불사르고 성벽을 허문 다음 포로를 이끌고 회군하려는데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라는 자가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하였다.

  “고구려 땅은 군대를 남겨 지킬 수 없는데 이제 그 임금이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졌다 하나 산골짜기에 잠복해 있을 터이니 대군이 가고 나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그 남은 불씨를 거둬들여서 아마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청컨대 그 부왕의 시신을 싣고 생모를 잡아가두어 돌아가서 그(왕)가 스스로 몸을 묶고 귀순해 오면 되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지십시오.”

  이에 황은 고국원왕의 선왕인 미천왕릉을 발굴하여 그 시신을 싣고 미천왕비인 대비 주씨를 비롯한 비빈과 왕족들을 포로로 잡아 급급히 회군해 돌아갔다. 미천왕 생존시에는 모용황의 부친인 모용외가 항상 미천왕에게 패배했었는데, 이제 그 아들대에 와서는 고국원왕의 전략적 실수로 그 화가 미천왕의 시신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야만적이고 비겁한 전술에 밀려 모용황과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저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국원왕은 13년(343) 2월에 왕제를 연나라에 보내 신하를 일컫는 수모를 참아내며 부왕의 시신을 찾아온다. 그러나 저들은 모후를 인질로 잡고 끝내 풀어주지 않아 주대비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모용황이 죽고 그 아들 모용준(儁)이 등극하여 수도를 계()로 옮기고 황제를 일컬은 지(352년) 3년이 지난 뒤인 고국원왕 25년(355)에야 주대비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모용씨들의 고구려 공포증은 체면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이처럼 심각하였던 모양이다.

  동수의 무덤

  1949년 4월에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구 안악군 대원면 장신리)에서 채석공사를 하던 중 벽화 고분이 나왔다. 이에 북한의 문화유물보존위원회가 파괴된 고분을 정리하고 그에 인접해 있던 벽화고분 하나를 더 발굴하여 안악 고분 1호, 2호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여기서 멀리 남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기슭에 큰 언덕 같은 고분 하나가 더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이를 발굴하여 안악 제3호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그곳은 황해남도 안악군 유설리(구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였다. 그런데 이 벽화고분 속에서 뜻밖에 다음과 같은 묘지명(墓地銘; 도판 4)이 발견되었다.

  “영화(永和) 13년(357) 10월 무자일이 초하루인 26일 계축에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이고, 낙랑 창려 현도 대방 태수이며 도향후인 유주 요동 평곽 도향 경상리의 동수는 자가 이안인데 나이 69세에 벼슬 살다 죽다(永和十三年 十月 戊子朔 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及 昌黎 玄 帶方 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敬上里 冬壽 字而安 年六十九 薨官).”

  이 내용은 고국원왕 27년(357) 10월 26일에 대방태수를 지내다가 69세로 순직한 동수(289~357년)라는 인물이 이 무덤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주태후가 풀려나 귀국한 지 2년 뒤에 죽은 것이다.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는 중국황제가 동북지방을 다스리는 수장에게 내리는 명예직이니 별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창려와 현도 태수를 두루 지낸 인물이라면 상당한 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고향이 요동군 평곽 경상리라 하였으니 모용외가 요동을 차지하고 모용부의 수장 노릇을 하던 시기(285년)에 요동에서 출생한 인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이 동수라는 인물은 고국원왕 6년(336) 1월에 고구려로 망명해 왔었다. 이 사실은 중국측 역사책인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5 진(晋) 현종(顯宗)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함강(咸康) 2년(336) 정월에 모용황이 장차 모용인을 토벌하려 하였다. 사마(司馬) 고후(高)가 이렇게 말하였다. ‘인이 임금과 친척을 배반하니 백성과 귀신이 모두 노하여 이전에는 바다가 일찍이 얼지 않았었는데 인이 배반한 이래 해마다 언 것이 세 번이었습니다. 또 인은 오로지 육지길만 방비했을 터이므로 하늘이 아마 우리로 하여금 바다 얼음을 타고 습격하게 하려는 것인 듯합니다.’

  황이 이를 좇으려 하자 뭇 신하들이 모두 얼음을 밟는 것은 위험하니 육지길을 가느니만 못 하다고 말하였다. 황은 ‘내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감히 막는 자는 목을 베리라’ 하고 임오일에 그 아우이자 군사(軍師) 장군인 모용평 등을 거느리고 스스로 창려 동쪽으로부터 얼음을 밟고 나아갔다.
  무릇 300여 리를 지나 임구(林口)에 이르러 무거운 짐수레를 모두 버리고 가벼운 차림의 병사들을 이끌고 평곽으로 들이닥쳤다. 성밖 7리 지점에서 척후병이 이를 발견하고 모용인에게 보고하니 인이 낭패하여 나와 싸웠다.(중략)
  인의 무리가 막는 데 흔들림을 보이자 황은 이를 좇아 공격을 퍼부어 크게 깨뜨리니 인은 달아나고 그 장하(帳下)가 모두 배반하여 드디어 인을 사로잡아 왔다. 황은 먼저 그 장하의 배반자들을 모두 목베어 죽인 다음에 인에게 죽음을 내렸다.(중략)
  모용유(幼) 모용치(雉) 동수(壽) 곽충(郭充) 적해(翟楷) 방감(龐鑒)이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는데 유는 중도에서 돌아왔고 황이 추격하여 적해와 방감을 목베어 죽였으며 동수와 곽충은 고려로 달아났다.”

  동수가 48세 때의 일이다. 그런데 동수에 대한 기록은 중국측 정사(正史)인 ‘진서(晋書)’ 109권 모용황기에 한 번 더 언급되고 있다.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황이 모용인을 토벌하러 군사를 보내는 내용이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애초에 황의 서형(庶兄)인 건성(建成)장군 한(翰)은 날래고 싸움 잘하며 씩씩한 재주가 있어 황이 꺼리는 바 되었고, 같은 배 소생인 동생 정로(征虜)장군 인(仁)과 광무(廣武)장군 소(昭)도 아울러 부친 외에게 사랑받으니 황이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외가 죽자 모두 스스로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한은 단료(段遼)에게 달아나고 인은 소에게 권하여 군대를 일으켜 황을 폐위시키려 하였다.
  황이 소를 죽이고 사신을 보내 험독(險瀆)에서 인을 만나 인의 동태를 검색하게 하니 인은 일이 발각된 줄을 알고 동쪽 평곽으로 돌아왔다. 황은 그 아우 건무(建武)장군 유(幼)와 사마(司馬; 군권을 총괄하는 직책) 동수(壽) 등을 보내 이를 토벌하게 했는데, 인이 무리를 모두 끌고 나와 맞아 싸웠으므로 유 등은 크게 패하여 모두 인에게 포로가 되었다.
  양평(襄平)령 왕빙(王)과 장군 손기(孫機)는 요동에서 황을 배반하였고 동이교위 봉추(封抽)와 호군 을일(乙逸), 요동상(相) 한교(韓矯), 현도태수 고후(高)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돌아갔다. 인은 이에 요동 땅을 모두 장악하고 거기(車騎)장군 평주(平州)자사 요동공(遼東公)을 자칭하였다.”

  이로 보면 동수는 본래 모용황의 중신으로 군사권을 총괄하는 사마 벼슬을 지내다가 그가 45세 되던 해에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으로부터 이의 토벌을 명령받고 요동성 평곽으로 진격해 갔다가 패배하고 포로가 돼 모용인에게 포섭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모용황이 군사권을 맡길 만큼 신임하던 인물이 거꾸로 모용인을 위해 자신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섰으니 모용황으로서는 그의 배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수는 모용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도중을 이끌고 결사적으로 고구려로 도망쳐 왔던 것이다. 이에 요동정벌을 목표로 삼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동수의 망명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장차 그를 요동 정벌의 길잡이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국원왕 12년(342)에 모용황의 선제공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부왕의 시신과 대비를 비롯한 왕족들이 인질로 잡혀가게 되니 동수의 일차적 가치는 소멸하게 되었다.
  이에 동수가 모용씨 아래 있으면서 창려 현도 등의 군태수를 지낸 전력을 참작하여 옛날 낙랑이 있던 평양 지역과 대방이 있던 안악 지방의 군태수를 시킴으로써 이곳에 남아 있는 중국계 사람들과 중국 문화에 오랫동안 순치돼 중국화한 우리 민족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문화적으로 수준 높은 신탈환지 낙랑과 대방을 무난히 다스리는 한편으로 망명자를 본국에서 멀리 떼어놓는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낙랑과 대방 태수의 임명권자가 중국 조정이었지만 이제는 고구려 조정이 된 것이다. 고국원왕 12년 이래로 동수는 연과의 국경 반대편인 평양 지역과 대방, 즉 안악 지방의 군태수를 지내다가 망명한 지 21년 만에 대방 태수 자리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당시 요동지방의 중국식 묘제대로 봉토 석실 벽화 고분양식으로 무덤을 썼던 것이다. 이 무덤이 지금까지 발견된 봉토 석실 벽화 고분으로는 가장 앞선 예에 해당하니 현재로서는 고구려 봉토 석실 고분 벽화의 선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근 반세기 뒤인 장수왕 원년(413)경에 축조되었을 광개토대왕릉인 장군총이 축석총(築石塚) 형태로 순 고구려 양식의 묘제를 고수하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되는 무덤이라 할 수 있다.
  동수의 무덤은 석회암 판석으로 지하에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다음 흙으로 석조 건축물을 덮어 놓은 형태인데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인 연도(羨道)와 앞방인 전실(前室), 곁방인 측실(側室), 뒷방인 후실(後室)로 꾸며져 있다. 모든 방의 4벽면은 무덤 주인공의 생전 생활모습을 재현해놓은 벽화로 가득 차 있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서쪽 곁방 서쪽 벽에는 무덤의 주인공인 <동수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그 남쪽 벽에는 <동수부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앞방에서 서쪽 곁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남쪽 벽면에는 <동수의 묘지명>이 묵서돼 있고 그 아래에 문지기에 해당하는 장하독(帳下督)이 그려져 있는데 입구 맞은 편과 한 쌍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다. 동쪽 곁방에는 왼쪽 벽으로부터 방앗간, 우물, 부엌, 창고, 차고, 외양간, 마구간이 차례로 그려져서 생활공간이 재현돼 있다. 한 벽면이 한 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면은 곱게 물갈이 돼 그림 그리기에 좋도록 되어 있다.
  뒷방은 마치 툇마루처럼 뒷방의 동쪽과 북쪽 벽을 싸고도는 ㄱ자형 복도가 둘려 있는데, 그 동쪽 벽면으로부터 북쪽 벽면으로 이어지는 곳에 주인공이 수레를 타고 전배(前陪) 후배(後陪) 측배(側陪) 등 수많은 호위 군중을 이끌고 출행(出行)하는 장면을 그린 <출행도>(도판 11)가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5열에서 8열 내지 9열에 이르는 종대(縱隊) 행렬을 조감도(鳥瞰圖) 식으로 그렸는데 확인된 인물만 대략 250여명에 이른다 한다.
  동쪽 벽면만 높이 2m, 길이 6m의 판석 한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쪽 벽면은 길이 5.34m에 높이 2m의 판석 한 장으로 돼 있다. 호위 군중은 의장병, 악대, 관인, 시녀, 무희, 마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벽화 고분의 벽면총면적은 81㎡인데 거의 모든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모든 벽화의 채색은 보통 밀타승(密陀僧) 혹은 호분(胡粉)이라고 부르는 산화연(酸化鉛, PbO)의 흰 분말에 특정 염료를 섞은 뒤 참기름과 같은 건성 유지(乾性油脂)에 개서 썼고 먹은 유연묵(油煙墨)을 쓴 듯 발굴 당시만 해도 유채(油彩)의 광택이 선명했다 한다.
  무덤은 사다리꼴의 네모난 언덕 모양으로 발굴 당시 남변 길이가 약 17m, 북변 길이가 약 30m이고 직경은 남북이 33m 동서가 약 30m이며 높이는 약 6m였다 한다. 동수묘의 발굴 내용은 1958년에 북한에서 출간한 ‘안악 제3호분 발굴 보고’에 요약되어 있다.

  고구려의 불교 전래 배경

  고국원왕 12년(342)에 미천왕의 시신을 도둑질하고 대비를 인질로 잡아가는 등 야만적인 행위로 겨우 고구려를 제압할 수 있었던 모용황은 고구려 사람들의 저주 때문이었던지 불과 6년밖에 더 살지 못하고 고국원왕 18년(348) 11월에 52세로 죽고 만다.
  한편 황의 둘째 아들인 모용준(儁, 319~360년) 또한 문무 겸전한 영웅으로 키가 자그마치 8자2치(약 246cm)나 되는 거물이었다. 그는 황의 뒤를 이어 연왕의 자리에 오른 다음 후조의 내분을 틈타 고국원왕 22년(352) 4월에 후조를 멸망시켜 중원을 차지하고 11월에는 황제의 위에 오른다. 그래서 한때는 전진 황제 부견과 북중국을 양분할 만큼 위세를 떨쳐 고국원왕도 그의 봉작을 받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도 고구려의 대비를 계속 인질로 잡아둔다는 것이 체면 깎이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고국원왕의 간청에 못이기는 척하고 고국원왕 26년(356) 12월에 다른 인질을 받는 대신에 주대비를 풀어 보내는데 전중(殿中)장군 조감(龕)으로 하여금 호위해 가도록 한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정동(征東)대장군 영주(營州)자사 낙랑공으로 봉한다.
  이어 고국원왕 27년(357)에 모용준은 수도를 계성(城)에서 업()으로 옮긴다. 여기서 모용준은 후조 황제 석호(石虎)가 지어 놓은 궁전에 들어가 사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팔뚝을 무는 악몽을 꾸게 된다. 준은 이것이 석호의 악령 짓이라 생각하고 석호의 무덤을 찾아내 그 시신을 꺼내놓고 매질하면서 ‘죽은 오랑캐가 살아있는 천자를 두렵게 한단 말인가’ 하고 꾸짖은 뒤 시신을 장하(河)에 던져 버리니 시체가 다리 기둥에 걸려 떠돌며 내려가지 않았다 한다(‘高僧傳’ 권9 佛圖澄傳, ‘晋書’ 권110 慕容儁記 참조).
  이런 악행을 일삼았으니 모용준도 천수를 누리기는 어려웠을 듯하다. 그래서 업도로 천도한 지 3년 만인 고국원왕 30년(360)에 불과 42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때 태자 위(暐, 349~383년)는 12세였다. 이로부터 연나라는 모용준의 아우 모용각(恪, ?~336년)이 섭정하는 기간까지는 그 위세를 그대로 지속한다.
  그러나 모용각이 죽고 나자 모용각의 숙부 모용평(評)이 대권을 장악하여 탐욕을 일삼고 태후 가족혼(可足渾)이 정치에 간여하여 정치를 어지럽히니 급속도로 혼란에 빠져 고국원왕 40년(370) 11월에는 드디어 전진 황제 부견이 보낸 대장군 왕맹(王猛)에 의해 업도를 함락당하여 멸망하고 만다.
  이때 고구려와 부여의 인질들이 연나라 구도인 용성에 있다가 전진 군사가 공격해 오자 밤에 성문을 열어 부견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한다. 고국원왕으로서는 부왕의 시신을 탈취하고 모후를 생포하여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모용황의 후손들이 전진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상 연나라를 망친, 난정(亂政)의 장본인인 모용평이 고구려로 피난해오자 고국원왕은 즉각 잡아서 전진 황제 부견에게 보내버렸다. 이러니 전진 황제 부견이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느끼는 감정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불교 수용

  이에 자신이 극진히 신봉하는 불교를 고구려에 전해주고 싶어하였을 것이다. 부견은 특히 당시 중국 불교 교단을 새로 확립하여 그 수장의 지위에 올라 있던 도안(道安, 314~385년)을 지극히 존숭하였다.
  도안은 하북성 석가장 부근의 상산(常山) 부류(扶柳) 출신으로 후조시대에 그 수도인 업에서 불도징을 만나 제자가 된 이래 불도징의 인가를 받아 중국 불교 교단을 설립하고 이를 이끈 인물이었다. 그래서 35세 때인 후조 말기에 벌써 조나라 일대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며 존경받게 된다. 그런데 도안은 후조의 멸망을 예측해 석호의 아들로 후조 최후 왕이 된 석준(石遵)이 궁중 안 화림원(華林園)에 집을 크게 지어 놓고 들어와 살기를 청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서쪽 견구산(牽口山)으로 옮겨갔다가 왕옥산(王屋山) 여휴산(女休山)을 거쳐 양자강 상류인 양양(襄陽)으로 피난해 간다.
  여기서 도안은 15년을 지내다가 고국원왕 36년(356) 부견이 그 서장자 부비(丕)로 하여금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양양을 함락시키고 도안을 왕사로 모셔오게 하니 할 수 없이 양양을 떠나게 된다. 이때 부견은 황금 5000냥을 미리 적장에게 주어 도안을 안전하게 모셔내온 다음 양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다. 그리고 부견은 도안을 수도 장안으로 모셔온 다음 복야(僕射) 권익(權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짐이 10만 군사로 양양을 취하여 오직 한 사람 반을 얻었다.” 권익이 그게 누구냐고 물으니 “도안이 한 사람이고 반쪽은 도사(道師) 습착치(習鑿齒)”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고승전’ 권5 釋道安傳).
  전진황제 부견이 이토록 도안을 존경했으니 그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려했던 것도 도안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고구려에 온 최초의 전도승인 순도나 아도는 모두 도안의 제자일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국원왕은 부견이 보낸 이들 전도승들을 보지 못하고 바로 전 해인 41년(371) 10월 23일에 돌아가고 만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3만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오자 평양성까지 나가 직접 맞아 싸우다 날아다니는 화살에 맞아 돌아갔던 것이다. 숙적 연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겨우 한시름 놓았는데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백제의 북침을 받아 이를 막다가 어이없이 유시(流矢)에 맞아 돌아갔으니 고국원왕은 참으로 불운한 영웅이었다고 하겠다. 이에 고국원왕에게 보낸 불교 사절단은 왕이 돌아간 다음 해인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도착하여 선왕의 명복이나 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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