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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5
 관리자  08-22 | VIEW : 9,242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5)]


중국식 불상의 정수, 운강석굴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북중국 불교의 위기


    북 중국에서 패권을 다투던 5호(胡)16국은 기멸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선비족(鮮卑族) 탁발씨 (拓跋氏)가 세운 북위(北魏)에 의해서 통일된다. 통일을 성취한 태무제(太武帝, 424~452년)는 절대군주적 성향이 강한 무단적 인물로 지략과 용병에 뛰어난 재간을 가지고 북중국을 통일해 가는데, 절대군주권의 확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과감한 정책을 시행해 간다.

우선 전통적으로 지방세력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한족(漢族)의 호족(豪族)세력을 파괴하기 위해 강권을 발동해 이들을 미개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개간에 종사케 했다. 이로써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원래 한대(漢代)로부터 지방에 뿌리를 내려온 호족(豪族) 세력은 각기 지방을 장악하고 있어서 중앙의 지배자가 바뀐다 하더라도 지방 단위 질서에 별다른 동요가 일어나지 않게 했다. 이는 이민족이 한족(漢族)을 완전 지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호족 (胡族)국가가 쉽게 와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탁발씨의 호족(豪族) 강제이주 정책은 한족의 이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면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전토(田土)를 확장할 수 있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로써 북중국에서는 호족 지배의 지방질서가 거의 파괴되고, 토지와 백성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는 명실상부한 절대군주국의 탄생을 보게 된다. 이것이 북위로 하여금 북중국을 통일하여 150여년 간 중국 지배를 가능케 한 원인이었다.

이렇게 토지와 백성에 대한 철저한 장악을 원칙으로 하던 태무제가 북중국 통일에 성공하면서(439년), 당시 이미 사회 심층까지 침투해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좌우하던 불교세력을 그저 보아넘길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불교가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직접 간여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救援)하는 일에만 힘쓰는 순수종교라 해도, 상하 민심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황제의 절대권이란 실상 유명무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 여러 가지 시대 여건으로 너무 쉽게 중국 포교에 성공한 불교 교단이 역대 왕실의 보호를 믿고 지나치게 오만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태무제가 북중국 통일을 위해 북량왕 저거목건(沮渠牧)과 마지막 전쟁을 치르며 그 수도인 고장성(姑臧城), 즉 양주성(州城)을 공격할 때 승려들이 나와서 최후의 항쟁을 벌였었다. 이때 태무제는 포로로 잡힌 승려 3000명을 즉결 처분하려 했으나, 태무제의 귀의를 받고 있던 도사 구겸지(寇謙之)의 청으로 사형을 면제해서 노역형(勞役刑)에 처하기도 한다.

여하간 이런저런 일들로 불교는 태무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는데, 이때 불교와 대립관계에 있던 도사 구겸지와 유학자 최호(崔浩)가 태무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는 하루하루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러나 불교계는 이러한 위기가 박두(迫頭)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의 번영에만 도취되어 있었으니, <태평진군4년명 불입상(太平眞君四年銘佛立像)>(도판 1)의 유려한 양식기법을 통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이 불입상은 <병령사불입상(炳靈寺佛立像)>(전호 도판 8)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굽타 불상과 간다라 불상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 중국화를 시도한 불상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불타의 의복이 장방형포(長方形布; 긴 네모꼴 천)인 승려의 가사(袈裟)와 같은 형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그 옷주름을 자연스럽게 어깨와 가슴으로 이어지도록 표현하였다.

그러나 두 팔을 크게 벌려 겉옷 자락을 넓게 펴내 겨드랑이 아래로 많은 수직 옷주름이 생기게 함으로써, 넓은 소매가 달린 중국식 곤룡포의 소매를 연상케 한 것이 그 첫번째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얼굴 모습은 당시 탁발씨(拓跋氏)들의 용모를 모본으로 했던 듯 뒤에 운강석굴(雲岡石窟)에서 보이는 얼굴과 같은, 갸름하고 턱이 풍만하며 코에 날이 선 귀엽고 복스러운 동안형(童顔形)의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다. 몸매도 날씬하게 균형 잡혀 있어 굽타 불상이나 간다라 불상이 가지던 조각적 우수성을 거의 능가할 정도다.

유려정치(流麗精緻; 물결치듯 아름답고 정밀하고 치밀함)한 옷주름 표현이라든지 생동감 있게 마무리지은 옷자락 처리 등은 간다라 불상과 굽타 불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기법이며, 특히 활짝 핀 연꽃을 상징한 연화좌(蓮華座)의 씨방과 연꽃잎들의 예리한 조각법은 금동주조술의 극치를 보이는 듯하다.

이는 당시 통일왕조로서의 북위의 문화역량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은· 주(殷·周) 이래 수천 년 동안 청동예술의 종주국이 되어 왔던 중국의 청동 주조술과, 북방계의 다른 청동기문화 전통 위에 철기 주조술에 뛰어났던 북방계 호족들의 기술이 혼연일치돼 이루어낼 수 있었던 동조(銅造)예술의 합일점이라고도 생각된다.


대·소승 경전을 거의 다 번역하다


이 시기는 이미 구마라습(鳩滅什)을 비롯하여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담무참(曇無讖) 등 대역경사(大譯經師)들의 활약으로 인해 불교경전이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번역돼 중국 불교로의 터전이 확고하게 다져져 있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도징(佛圖澄, 232~348년)이 불교의 중국화를 시도하고 그의 수제자 석도안(釋道安, 314~385년)이 그 기틀을 확립하자, 불교의 바른 이해를 위한 역경(譯經)이 시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역문물(西域文物)의 집산지로서 당시 중국 대륙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선진적인 도시 분위기를 가지던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역경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나간다.

우선 계빈(賓; Kaspi쳒i)출신의 승가제바(僧伽提婆; Sam.ghadeva), 불타야사(佛陀耶舍; Buddhaya쳒as), 도거륵(兜勒; Tukha-ra) 출신 담마난제(曇摩難提; Dharmanandi) 및 양주인(州人) 축불념(竺佛念)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불교의 착실한 이해를 위해 소위 소승경전(小乘經典)이라는 근본경전(根本經典)의 번역에 주력한다. 제일 먼저 담마난제가 ‘중아함경(中阿含經)’과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을 번역했다고 하는데 이는 전하지 않고, 승가제바가 뒷날 동진(東晋) 수도 건강(建康) 에 가서 다시 번역한 ‘중아함경’ 60권(397~398년 번역)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불타야사는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412~413년 번역)을 번역하여 불교의 근본 경전인 4아함 중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435~443년, 劉宋 求那跋陀羅 번역)을 제외한 3아함이 이 시기에 모두 번역된다.

다시 승단(僧團)의 행의규범(行儀規範)인 율장(律藏)의 경우도 소승률(小乘律)이라는 근본율장(根本律藏)인 ‘사분율(四分律)’ 60권(408년 번역)과 ‘십송률(十誦律)’ 61권(404년 번역)이 번역된다. ‘사분율’은 불타야사와 축불념이 함께 번역하고 ‘십송률’은 불약다라와 구마라습이 함께 번역한다. 이로써 근본 불교에 대한 이해는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뒤이어 후진(後秦)의 현군(賢君)인 고조(高祖) 문환제(文桓帝) 요흥(姚興, 394~416년)이 홍시(弘始) 5년(403) 8월에 후량(後凉)의 항복을 받고 양주 고장성에 억류돼 있던 불세출의 대역경사(大譯經師)인 구자국(龜玆國; Kucha) 출신 구마라습(鳩滅什; Kuma-rajiva, 344~ 413년)을 12월20일 장안에 초빙하면서부터 역경 사업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구마라습은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요흥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당대 제일 고승들의 협조를 받으며 10년 동안 35부 279권의 경전을 번역해 내는데 그 대부분은 대승경전들이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경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경(阿彌陀經)’ 1권(404년 번역; 종래의 402년 번역설은 구마라습이 401년 12월20일 장안에 이르렀다는 ‘고승전’ 기록을 사실로 믿고 이를 기준으로 산정한 것인데 403년 12월20일 장안에 이르렀으므로 402년은 모두 404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 3권(406년 번역),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2권(404~412년 번역),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 1권(404~412년 번역),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1권 (404년 번역), ‘선비요법경(禪秘要法經)’ 3권(404~412년 번역), ‘좌선삼매경 (坐禪三昧經)’ 2권(404년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406년 번역), ‘인왕반야바라밀경 (仁王般若波羅蜜經)’ 2권(412년 번역),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1권(412년 번역),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404년 번역), ‘소품반야바라밀경 (小品般若波羅蜜經)’ 10권(408년 번역),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404년 번역), ‘중론 (中論)’ 4권(409년 번역), ‘십이문론(十二門論)’ 1권(409년 번역), ‘백론(百論)’ 2권(404년 번역),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17권(412년 번역), ‘성실론(成實論)’ 16권(412년 번역) 등이다.

그의 문하 제자는 3000인을 헤아렸는데 특히 도융(道融), 승예(僧叡), 승조(僧肇), 도생 (道生)은 관중사걸(關中四傑)이라 하고 담영(曇影), 혜관(慧觀), 도항(道恒), 담제(曇濟)를 사영 (四英)이라 불러 습문팔준(什門八俊)으로 꼽는다. 이들의 활동은 중국 불교의 주류를 대승화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Buddhabhadra, 359~429년) 삼장(三藏)이 인도로부터 해상(海上)을 통해 청주(靑州)에 상륙하여 장안에 왔다가 구마라습파와 반목하다 축출당해 동진 건강으로 가게 됐는데, 때마침 구법승 법현(法顯)이 인도에서 구득해 온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60권(418~420년 번역)과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 (418~420년 번역)을 법현과 함께 번역해 낸다.

북량(北)에서는 담무참(曇無讖; Dharmaraks.a, 385~433년)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416~423년 번역)과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 6권(414~426년 번역),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10권(414~426년 번역), ‘불소행찬(佛所行讚)’ 5권(414~426년 번역),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7권(426~428년 번역) 등을 번역해내니, 이제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도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석가모니불 이래로 불지(佛旨; 불타의 뜻)를 받들어 각 시대, 각 지방에서 이루어진 모든 불경이 마치 백천(百川)이 바다로 모여들 듯이 중국으로 모여들어와서 한문(漢文)이라는 한 가지 문자로 번역 표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물길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그러니 당시 중국 불교의 성격은 중류(流; 여러 물길)가 한데 모여 이루어진 대해(大海)와 같이 중미(味; 여러 맛)를 구비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불상 양식에 있어서도 모든 지역, 모든 시대 양식이 중국에 들어와 혼합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각 지방으로부터 각 시대에 이루어진 불상을 전도승(傳道僧)들이 모시고 와서 전하고, 중국인들이 이를 종합하여 자신들이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교리에 합당하게 재해석하면서 자기화해 나갔기 때문이다. 이 <태평진군4년명 불입상(太平眞君四年銘佛立像)>(도판 1)이 바로 이런 상황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예다.

불상은 간다라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곱슬머리 형태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이 황인종의 용모에는 없는 요소이므로 이미 역경(譯經) 과정에 80종호(種好)를 열거할 때,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3이나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10 등에서 “부처님의 머리칼에는 오만자(五卍字)가 있다(髮有五卍字)”고 하여 머리칼의 표현을 사태극문양(四太極紋樣)과 같은 만자형(卍字形)으로 이상화시킬 소지를 마련해 놓고 있다. 여기서는 아직 태극 모양으로 돌지는 않았으나 이마 위와 육계(肉) 부분의 정면에서 소용돌이 형태의 기이한 두발 표현이 확인되니, 오만자형 머리칼 표현의 조짐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귓불은 어깨까지 늘어지고 손가락 사이의 물갈퀴 표현이 분명하여 2세기 후기 간다라 불상이 가장 아름답게 이상화되었을 때의 모습을 모본으로 삼은 듯하나 옷주름 처리로 보면 분명히 굽타 불상에서 연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의 핫다 (Had.d.a)지방에서도 역시 간다라 극성기로의 복고적 경향을 보이는 새로운 불상 양식이 출현하고 있어서, 소조미술의 극성을 보이므로 혹시 이와의 연결도 생각해볼 만하다.

대좌(台座) 뒷면으로부터 왼쪽으로 돌려가며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평진군(太平眞君) 4년 고양군(高陽郡) 여오현(吾縣, 현재 河北省 博野縣 西南) 임구촌 (任丘村)에 사는 사람인 완신(申)이 발원해서 동궁황태자(東宮皇太子)를 위해 백옥보살상 (白玉菩薩像)을 만드는데, 아래로는 부모와 일체지식(一切知識)을 위해서입니다. 미륵께서 하생하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번 모이시면 법언(法言)을 받아듣고 일시에 득도하소서.

신(申)의 아우 완패(覇), 완경(景), 완은(恩), 완량(亮)이 부처님을 모실 때면 구하는 바가 뜻대로 되고 항상 제불(諸佛)을 뵙게 하소서. 청신사녀(淸信士女) 유문강(劉文姜)이 완경 처(妻)로 부처님을 뫼실 때.”

(太平眞君四年, 高陽吾任丘村人申 發願, 爲東宮皇太子, 造白玉菩薩, 下爲父母. 一切知識. 彌勒下生, 龍華三會, 聽受法言, 一時得道. 申弟覇景(以上背面)恩亮 侍佛時, 所求如意, 常見諸佛. 靑信士女 劉文姜景妻 侍佛時.(以上左側)

황태자를 위하여 만든 백옥미륵보살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아마 백대리석제 석조미륵보살상을 만들면서 지어넣은 명문을 그대로 새겨넣음으로써 발생한 오류일 듯하다. 명문 내용에 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태평진군 4년(443)에 만들어진 것만은 틀림이 없다고 보아야 하니, 황제를 위해서 조성한다는 말이 없이 황태자를 위해서 조성한다고 한 것은 이 해에 황태자 황(晃)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유유() 정벌에 나가서 태무제로부터 지략을 인정받고 감국 (鑑國)의 영광을 얻기 때문인 듯하다. 아마 이를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불보살상 중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불교교단이 이와 같이 불심이 돈독했던 황태자의 부상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태무제의 측근으로 불교 배척을 목적으로 삼던 구겸지(寇謙之)와 최호(崔浩)를 지나치게 자극하고 태무제로 하여금 의구심을 일으키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미증유의 법난(法難)인 폐불(廢佛)을 자초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소장 불입상>(도판 2)은 <태평진군4년명 불입상> 양식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불입상이다. 다만 양식화 현상이 진행되면서 인체의 사실적 표현보다는 불신으로의 이상화 경향을 보여,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지은 두 손의 손가락이 훨씬 길어졌고, 하복부의 부피감도 사라져서 아랫배가 드러나지 않았으며, 머리칼의 표현이 육계와 앞머리에서 소라껍데기처럼 돌아가는 나선형(螺旋形)을 보이되 중심부는 마치 만(卍)자와 같은 4태극무늬의 소용돌이 모양을 보이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는 ‘방광대장엄경’ 권3이나 ‘대승백복상경(大乘百福相經)’에서 말한 불타의 특상 (特相) 중 세부적 특징인 소상(小相) 80종호를 구체화시킨 것이다. 즉 “손가락이 가늘고 길다(手指纖長)” “배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다(腹相不現)” “머리칼에 오만자가 있다 (髮有五卍字)” “머리칼이 빛나고 소라처럼 돌아 오른다(髮彩螺旋)” 등의 내용이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옷주름도 규칙적인 반복과 좌우대칭 등으로 균형있게 정리되면서, 양각으로 융기된 옷주름의 중앙에 음각선을 넣는다든지 앞가슴의 포물선을 지나치게 둥글게 처리한다든지 하는 작의성(作意性)을 강하게 드러내 양식화 현상을 노골화시켰다.

이런 양식적 특색은 <황흥5년(471)명 미륵불교각좌상(延興元年銘彌勒佛交脚坐像)> (도판 3)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불입상의 제작시기도 470년대 초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좌의 연자방(蓮子房)도 높이가 훨씬 낮아져 있고, 목이 가늘어졌으며 얼굴 윤곽이 넓고 얇아진 것도 이 시기 양식의 특징이다.

뒷면에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일어나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이 부착돼 있었던 듯 아래 위에 네모난 촉꽂이가 돌출하였고, 어깨 너머로 넘어간 옷자락이 뒤집히며 팔뚝에 걸린 옷자락과 이어지는데 팔뚝에서 모여진 옷주름은 톱날 모양으로 규격있게 처리했다.


가혹한 폐불(廢佛) 사건


태무제의 황태자였던 황(晃, 428~451년)은 매우 총명했다. 그래서 태평진군 4년(443) 9월에 북쪽의 유유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녹혼곡(鹿渾谷)에서 적과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을 때 적의 본영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이는 것을 보고 부황께 이렇게 진언했다 한다.

“지금 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모름지기 신속하게 진격하십시오. 졸지라 대비하지 못했을 테니 반드시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를 들은 상서 유결(劉潔)은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적이 많다는 증거인데 평지에 노출됐다가는 적에게 포위될 염려가 있으니 대군이 이른 다음에 공격하는 게 좋겠다고 반대한다. 태자는 이 말에, “이 먼지는 적들이 겁을 먹고 놀라서 일으키는 먼지다. 만약 군인이 어지럽히는 것이라면 어째서 먼지가 본영 위에서 일어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한다. 그러나 세조는 17세밖에 안 된 태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대군이 이른 다음에 공격해 들어가 보니 적들은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이에 세조는 태자의 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후부터는 군국대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태자의 진언을 많이 받아들여 쓰고 국정을 다스리는 일을 모두 맡겨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

그래서 태평진군 5년(444) 정월 임인(壬寅)에 황태자에게 서정(庶政) 일체를 총괄하는 대권을 위임하고 시중(侍中) 목수(穆壽)와 사도(司徒) 최호, 시중 고필(古弼)로 하여금 태자를 보필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때 사도 최호는 불교가 주도이념이 돼 민심을 좌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한나라 때처럼 유교를 주도 이념으로 하는 한족(漢族) 중심의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을 꿈꾸며 불교 박멸을 획책한다.

이런 최호의 포부는 한무제와 같이 통일 중국의 절대 군주가 되기를 꿈꾸던 세조 태무제의 이상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무제는 최호의 진언을 받아들여 점차 불교를 멀리하다가 드디어 태자에게 감국을 맡긴 6일 뒤에는 곧장 불교를 탄압하는 조서를 내리니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백성이 무식하여 요사한 것을 믿는데 빠져서 사사로이 무당을 기르고 음양 도참(圖讖) 방기(方伎)의 책들을 감추어두며 또 사문(沙門, 승려)의 무리들은 서쪽 오랑캐의 헛된 거짓말을 빌려 생으로 재앙을 불러들인다. 한결 같이 고르게 다스려나가 천하에 순박한 덕을 펼치는 방법이 아니다.

왕공(王公) 이하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문이나 무당 및 금은으로 만든 공교한 사람 (불상)을 사사로이 공양하고 있거나 집에 두고 있는 자는 (이를) 모두 관청으로 보내고 숨기지 말도록 하라. 금년 2월15일을 한정하여 기간이 지나도 내놓지 않는다면 무당과 사문은 죽이고 주인은 일문을 모두 죽일 터이니 분명히 서로 알려주어 모두 들어 알게 하라.”

불교 박멸의 첫 신호탄이었다. 절대군주 태무제(太武帝)의 불교 혐오증은 불교계의 비대와 비례하여 점점 높아갔고, 도교 홍포를 꾀하는 구겸지(寇謙之)와 유교적 이상국가의 재현을 꿈꾸는 최호(崔浩)의 사주(使嗾)는 점점 깊어져서 드디어 전례 없이 엄청난 대불교박해를 가져온다.

이 박해의 직접적인 동기는 태무제 태평진군 6년(445) 9월에 섬서성(陜西省) 행성(杏城)에서 노수(盧水) 출신의 개오(蓋吳)라는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킨 데 있다. 개오는 “위(魏)를 멸하는 자는 오(吳)다”라는 참언이 유행하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바로 그 오(吳)라고 하면서 천태왕(天台王)을 자칭하고 장안(長安)까지 진출한다. 이에 산서(山西) 하동(河東)에서 설영종(薛永宗)이란 자가 호응함으로써 위(魏)는 내란에 직면하는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태무제는 최호의 계책을 받아들여 먼저 설영종을 격파하고 신속하게 군대를 움직여 장안으로 진격함으로써, 개오는 장안을 버리고 북쪽 산간 지방으로 달아나 장기적인 반란 태세를 취한다. 이때 한 군관이 장안의 어느 절에 들어갔다가 무기가 많은 것을 보고 이것을 태무제에게 보고한다.

그렇지 않아도 불교에 대한 혐오감이 크던 태무제는 개오와 내통해 모의하지 않았나 의심하고 엄중한 수사를 지시한다. 이 수사를 맡았던 관리들은 절 안에서 큰 규모의 양주기구 (釀酒器具)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주군현(州郡縣)의 지방 관청에서 바친 엄청난 재물이 비축돼 있는 것도 찾아냈다. 그리고 여자와 음란한 행위도 했을 듯한 밀실이 있다는 보고도 했다.

이에 대로한 태무제는 즉시 군대를 풀어 일거에 장안의 승려들을 죽여 없애고 불경과 불상을 태워버리거나 깨트려버린 후 곧바로 조정에서 정식으로 폐불의 조서(詔書)를 반포하도록 한다.

이에 감국을 맡고 있던 태자는 본래 어려서부터 고승인 현고(玄高), 혜숭(慧崇)을 비롯해 승려 출신 학자인 고윤(高允) 등에게서 배워 불교에 정통했기 때문에 태무제에게 글을 올려 승려 죽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아뢰고 사찰과 도상의 파괴는 서둘지 않더라도 그대로 방치하면 사라질 터이니 그대로 두자고 간하는 등 폐불이라는 극한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비록 태무제가 끝내 태자의 말을 듣지는 않았으나 이로 말미암아 폐불조서의 반포시기를 조금은 늦출 수 있게 되니 불교 교단에서는 사전에 대비를 할 수 있어 금은 불상 등 숨길 수 있는 성보들은 모두 숨기고 승려들은 모두 도피해 노출된 탑상만 파괴되는 최소한의 피해를 입게 된다.


오랑캐 신을 믿는 자는 죽이리라


다음해인 태평진군 7년(446) 3월에는 폐불의 조서가 천하에 내려지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사악한 거짓에 빠져서 오랑캐 귀신을 믿고 천도(天道)를 문란케 함으로써 정교(政敎)가 행해지지 않고 예의가 크게 허물어져서 중원(中原)에 난화(亂禍)가 계속되니 모두 귀도(鬼道)가 성하여 내려진 천벌이다. 이제 오랑캐 귀신을 소탕(掃蕩) 박멸(撲滅)하여 상고(上古)의 태평치세(太平治世)를 회복하려 한다.”

이런 내용의 머리글 아래에 다음과 같은 혹독한 칙령이 내려진다.

“지금 이후로부터 감히 오랑캐 신을 믿거나 흙과 구리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자는 한집안을 모두 죽인다. 비록 오랑캐 신이라 말하고 있지만 요즈음 오랑캐들에게 물으면 한결같이 없다고 한다. 이는 전대의 한인(漢人) 무뢰 자제였던 유원진(劉元眞)과 여백강(呂伯强)과 같은 무리가 거렁뱅이 오랑캐의 거짓말을 듣고 노자와 장자의 빈말로 더 보탠 것이니 모두 진실이 아닌데 왕법(王法)조차 폐지하여 실행되지 않게 하니 대체로 크게 간사한 무리의 괴수라 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범상치 않은 일을 행할 수 있다 하였으니 짐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대물림해온 거짓덩어리를 제거할 수 있겠는가. 맡고 있는 관청은 정벌하거나 진치고 있는 여러 군대와 자사(刺史, 지방관)에게 널리 포고하여 여러 곳에 가지고 있는 불교 형상 및 오랑캐 경전을 모두 다 때려부수거나 불질러 태워버리고 사문(沙門)은 젊고 늙고 할 것 없이 모두 묻어버리도록 하라.

(自今以後, 敢有事胡神, 及造形像泥人 銅人者, 門誅. 雖言胡神, 問今胡人, 共云無有. 皆是前世漢人無賴子弟 劉元眞 呂伯强之徒, 接乞胡之誕言, 用老莊之虛假, 附而益之, 皆非眞實. 至使王法廢而不行, 蓋大姦之魁也. 有非常之人, 然後能行非常之事, 非朕孰能去此歷代之僞物. 有司宣告征鎭諸軍 刺史, 諸有佛圖形像及胡經, 盡皆擊破焚燒, 沙門無少長悉坑之.)

한편 태무제는 태평진군 10년(449)까지 타클라마칸 사막과 내몽골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서북지역을 평정하고 돌아와서 이제 남조 송과 한판 자웅을 결하여 천하통일을 이루려 한다.

그런데 그 통일제국의 이념기반 담당자로 믿고 있던 최호가 꿈꾸는 것이 한족(漢族) 중심의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자, 태무제는 남북 통일 이후에 전개될 문화적 역정복 현상에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오랑캐족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분노가 폭발하여 태평진군 11년(450) 6월 기해(己亥)에 사도 최호와 그 삼족을 모두 죽여버린다.

북위의 국사(國史)를 사실대로 서술하여 돌에 새긴 다음 길가에 세워 놓은 일이 국가를 능멸하려는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태무제를 부추겨 폐불을 자행하게 했던 인과(因果)가 불과 4년 만에 자신과 일족의 몰살이라는 과보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남조 송의 문제는 선수를 쳐 7월에 보국장군 소빈지(蕭斌之)로 하여금 6만 군사를 이끌고 산동 제주(濟州)를 점령하게 한다. 태무제는 이를 기회로 9월에 남정(南征)에 나서 회수(淮水) 이북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남조 송이 화친을 제의하자 태무제는 회수를 국경으로 확정짓고 태평진군 12년(451) 1월1일에 회수 강상에서 대연회를 베풀며 문무관에게 상작(賞爵)을 내린 다음 3월에 포로 5만여 가구를 이끌고 회군해 온다.

이때 태무제의 측근 내시로 중상시 벼슬에 있던 종애(宗愛)라는 자도 남벌에 황제를 시종해 공을 세우고 이 강상대회에서 진군공(秦君公)의 작위를 받고 돌아오는데, 본래 이 자는 천성이 음험하고 흉포하여 불법을 많이 저지르고 있었으므로 이를 아는 태자가 자주 억제했었다. 그래서 이 자는 항상 태자의 감국 사실을 세세히 정찰하여 태무제에게 보고하여 부자를 이간해왔다.

그런데 태자 측근 인물인 급사 구니도성(仇尼道盛)과 시랑 임평성(任平城)이 남벌 기간에 태자를 빙자해 권세를 부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자 이들을 미워하던 종애가 이 사실을 침소봉대하여 태무제에게 보고하니 태무제는 이들을 저잣거리에 내다 참수케 하고 태자를 불러 크게 꾸짖는다.

그러자 태자는 울분과 두려움으로 6월 무진(戊辰)일에 우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만다. 정평(正平)이라고 연호를 고쳐 천하통일의 의지를 천하에 표방한 지 7일 만의 일이었다. 폐불의 인과가 태무제로 하여금 5년 만에 사랑하는 태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게 만드는 비통을 안겨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간신 종애의 장난임을 알게 된 태무제는 내심 종애를 벼르게 되는데 이를 눈치챈 종애가 다음해인 정평 2년(452) 봄 3월 갑인(甲寅)일에 태무제를 시해하고 만다. 폐불을 단행한 지 6년 만에 차례차례 돌아오는 과보의 끝이었다.

황제를 시해한 종애는 황후의 명령을 위조하여 자신과 가까운 오왕(吳王) 여(余)를 옹립하고 스스로 풍익왕(馮翊王)이 되지만, 신황제가 권력을 뺏으려 하자 10월에 그마저 시해한다.

이에 황세손이던 고종 문성제가 곧바로 등극해서 종애를 모반 대역으로 다스려 극형으로 죽음을 내리고 삼족을 멸한다. 문성제는 즉위 직후인 11월 임인(壬寅)에 곧바로 부친 경목태자 황(晃)을 경목황제로 추존하고 12월 을묘(乙卯)에는 불교를 회복시키라는 복불령(復佛令)을 내린다.



복불(復佛)의 환희


‘위서(魏書)’ 권114 석노지(釋老志)에 따르면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 452~464년)가 등극해서 내린 복불(復佛)의 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조께서 그 잘못으로 인해 그 죄 있는 자들을 도륙하라 했는데 맡은 관청이 본뜻을 잃고 일체 금단(禁斷)했으므로 경목황제(景穆皇帝, 太子 晃, 恭宗; 428~451년)께서 매양 개탄하셨으나 군국(軍國)의 일이 많아서 미처 수복(修復)할 겨를이 없었다. 짐(朕)이 대통을 이어 만방에 군림하매 선대 황제의 뜻을 이어 도(道) 일으킬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정하노니 모든 주군현(州郡縣)의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각각 절 하나를 세우되 그 재용(財用)에 한정을 두지 말라. 도법(道法)을 좋아하여 사문(沙門)이 되고자 하면 장유(長幼)를 묻지 말고 양가(良家) 출신으로 성행(性行)이 독실하고 흠집이 없어 향리(鄕里)를 밝힐 만한 자는 그 출가를 허락하라. 대주(大州)는 50인, 소주(小州)는 40인으로 하고 멀리 떨어진 곳은 10인으로 한하여 각각 분수에 맞게 악을 교화하여 선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도의 가르침을 전파하라.”

(是以先朝因其瑕, 戮其有罪. 有司失旨, 一切禁斷, 景穆皇帝 每爲慨然, 値軍國多事, 未遑修復. 朕承洪緖, 君臨萬邦, 思述先志, 以隆斯道. 今制諸州郡縣, 於衆居之所, 各聽建佛圖一區, 任其財用, 不制會限. 其好樂道法, 欲爲沙門, 不問長幼, 出於良家, 性行素篤, 無諸嫌穢, 鄕里所明者, 聽其出家. 率大州五十, 小州四十人, 其郡遙遠臺者十人. 各當局分, 皆足以化惡就善, 播揚道敎也.)

국가가 불교 재건에 직접 개입하여 앞장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숨거나 변신했던 승려들이 다시 세상에 나와 국가의 복불 정책에 적극 호응하게 되는데, 이때의 중심 인물은 계빈국(賓國) 왕족 출신인 사현(師賢)이었다.

사현은 원래 북량(北)에 와 있다가 북량이 망할 때 북위로 끌려온 승려로 공종 경목제의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그는 폐불의 조서가 내려지자 거짓 환속하여 의술로 업을 삼으면서 속으로 법도를 지키고 있었다 하는데, 이에 이르러 황제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서 교단의 총수인 도인통(道人統)이 된다. 그는 고종 문성제 흥안(興安) 원년(452)에 도인통이 되자마자 제권(帝權)과의 적극 타협방도를 강구했던 듯 황제가 곧 지금의 여래(如來)라는 생각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서둘러, 황제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과 같은 불상을 조성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한다.

그런데 황제 모습의 석불상(石佛像)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기적이 나타난다. 황제의 얼굴과 발바닥에 나 있는 검은 사마귀와 같은 검은 돌이 바로 황제의 것과 같은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이에 황제는 자신이 여래의 화신임을 확인하고 복불의 신념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듯하니, 역대 선제(先帝)도 역시 여래의 화신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흥광(興光) 원년(454)에는 오급대사(五級大寺)에 태조(太祖) 이하 5제(帝)를 위해 석가입상 5구(軀)를 적금(赤金) 2만5000근을 들여 각각 1장(丈) 6척(尺)의 크기로 조성하게 한다.

즉 북위의 건국자인 태조 도무제(道武帝, 386~409년)로부터 태종(太宗) 명원제(明元帝, 410~423년), 세조(世祖) 태무제(424~452년), 공종(恭宗) 경목제(景穆帝, 428~451년)를 거쳐 현왕(現王)인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 452~465년)에 이르는 다섯 황제가 바로 당금(當今)의 여래로 신격화된 것이다.

그래서 화평(和平) 원년(460)에 도인통 사현이 입멸하자, 사문통(沙門統)이란 한결 불교적인 명칭의 교단 총수가 된 담요는 문성제의 깊은 귀의에 힘입어, 서울인 항안(恒安, 平城, 지금의 大同) 서쪽 무주새(武州塞)의 무주산(武州山) 남쪽 석회암 단애(斷崖)에 5제를 상징하는 5구의 대불을 봉안하는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을 시작했다. 높이가 60척에서 70척에 이르는 대불이라 했는데 현존한 5불의 높이가 13~17m에 이르므로 대강 이에 합당하다고 하겠다.


석굴사원을 조성하다


이때 다만 5불을 봉안하는 5굴만 굴착한 것은 아니었다. 동서 1km에 달하는 석벽에 5굴에 배속하는 무수한 굴실을 왕공귀족(王公貴族) 내지 유력자의 원력에 의해 함께 조영해 나가게 했던 것이다. 이런 공전의 대사업을 위해서 담요는 승기호(僧祇戶)나 불도호(佛圖戶)의 설치를 주선하는데, 이를 통해 그 경비를 충당해 나가려는 심모원려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 황제의 허락을 얻어 정복민을 승기호로 삼고 중죄수를 불도호로 삼아 이들을 불교 사원에 예속시키고, 승기호는 1년에 60섬의 곡식을 승조(僧曹)에 바치게 하며, 불도호는 그가 예속된 사원이나 전장에서 노역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기발한 제도가 세계 불교미술사상 불가사의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운강석굴 조영에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석굴 조영작업은 북위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는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7년(493)까지 계속 활기를 띠고 진행되었으며, 이후에도 비록 그 주력이 낙양 부근 용문석굴(龍門石窟)의 조영으로 옮겨졌다 하나 구도(舊都)의 유력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위될 수 있었다. 이후 그 여맥은 수당(隋唐)을 거쳐 요대(遼代)까지 이어졌었다. 그래서 금세기 이래 많은 파괴와 도둑질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석굴 수는 53굴에 이르며 불상 수는 5200여 구에 이른다고 한다.

담요는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 석담요(釋曇曜) 조에서 그 출신을 잘 알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폐불시에 업도(都) 불교의 중심지인 중산(中山)에 숨어 있었고 복불령이 내려진 다음해에 제명(帝命)으로 초빙될 때 황제가 직접 마중하였다는 것을 보면 업도불교의 대표였던 듯하다. 그러나 한편 양주(州) 불교의 대표자인 사현을 뒤이어 사문통이 되고 양주 불교승들이 많이 쓰던 담자(曇字)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면 북량(北) 출신인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북량 출신으로 업도불교와 인연을 맺음으로써 양파(兩派) 불교를 통합시키는 구심점이 되었던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운강석굴20동 본존선정불좌상(雲岡石窟20洞本尊禪定佛坐像)>(도판 4)은 운강의 5대 석굴 중 맨처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위 건국자인 태조 도무제 탁발규(拓跋珪)의 모습을 부처님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운강석굴의 가장 초기 양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실을 대변하듯 제반 양식이 복불 직후인 태안(泰安) 3년(457)에 만들어진 <태안3년명 석가불좌상(太安三年銘釋迦佛坐像)>(도판 5)을 그대로 뒤잇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태안3년명 석가불좌상>을 먼저 살펴보아야겠다. 이것은 당시 인도로부터 새로 받아들여진 신지식의 일환으로 조성된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까지 중국 불상에서 볼 수 없었던 나발(螺髮)의 표현과 광배(光背)에 불꽃무늬, 화불(化佛), 비천(飛天)을 비롯한 풀꽃무늬 등이 띠를 이루면서 가득 조각된 것이 바로 굽타 조각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불의 좌우로 광배에 부조(浮彫)된 보살상의 표현은 이 상이 불삼존비상(佛三尊碑像) 양식임을 나타내는 것인데, 대좌 정면에 부조된 목이 긴 쌍사자의 표현에 이르면 바로 굽타 조각의 사자상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얼굴 모양도 종래 중국 불상이 가지던 청순하고 건강미 넘치는 앳된 얼굴 모습과는 좀 다르게 탐스럽고 육감적인 느낌이 강하여 굽타불상의 영향을 즉각 연상할 수 있다.

혹시 폐불 이후에 굽타불교계가 복불에 대한 지원책으로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를 북위에 계속 공급한 결과로 이루어진 신양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중국은 폐불 이전에 이미 <태평진군4년명 불입상>(도판 1)과 같은 독특한 양식으로 불상을 중국화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양식이 들어오면 곧 중국화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태안3년명 석가불좌상>은 불의(佛衣) 자락이 어깨를 반쯤 덮는 반단식(半袒式; 어깨를 반만 드러내는 식) 중국풍 편단우견법(偏袒右肩法;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법)을 보이고 있다. 광배의 뒷면은 3단으로 나누어 상부 2단에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남비니원에서 석가보살이 탄생하는 모습)과 구룡토수상(九龍吐水相; 석가보살 탄생 직후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토하여 씻겨주는 모습)을 부조하였고, 하단과 대좌에 걸쳐서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태안 3년 9월23일 정유년(丁酉年)에 청신사(淸信士) 송덕흥(宋德興)이 죽은 딸 종향(香)을 위해 석가문불상을 만드니, 원컨대 선사(先師)와 7세 부모 및 모든 내외 권속과 돌아간 친지들 및 망녀(亡女) 종향 등 일체중생은 날 때마다 복된 곳에 왕생하여 항상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고인(苦因)을 영원히 끊으소서. 꼭 이 원을 이루고 빨리 보리대도(菩提大道)를 이루소서.”

(太安三年, 九月三日, 歲在丁酉, 淸信士宋德興, 爲命過亡女香, 造作釋迦文佛像. 願先師七世父母, 外內眷屬, 朋仝知識, 亡女香, 一切衆生, 生生蒙其福所往生, 常値遇諸佛, 永離苦因, 必獲此願, 早成菩提大道.)



운강석굴(雲岡石窟)


다시 <운강석굴20동 본존선정불좌상>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불의 표현에서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고 팔뚝 아래에서 왼쪽 어깨로 넘겨 입은 반단식(半袒式) 편단우견(偏袒右肩) 착의법(着衣法)이라든지, 뒤집혀 넘어간 옷자락의 구김을 톱니모양으로 처리하며, 옷주름은 양각(陽刻)의 융기선(隆起線)에 음각선을 넣고 다시 그 융기선 사이에도 음각선을 넣어 입체감을 강조한 것 등이 그대로 <태안3년명 석가불좌상>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광배를 화불 (化佛)로 채워진 구간과 공양을 올리는 천인(天人)무리로 채워진 구간 및 불꽃무늬로 채워진 구간으로 구분하여 내용물로 가득 장식하고, 두광(頭光)을 만개한 연화로 대신한 것도 그중에 하나다.

태조의 용모를 불상으로 표현한 초상조각이라서 그런지 장대한 체구와 준수한 얼굴에서 제왕의 풍도가 넘쳐 흐른다. 그러나 이렇게 건장하고 수려한 용모는 태조만 가졌던 특징이 아니라 미인족인 선비족(鮮卑族)이 가졌던 체질적인 특징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운강석굴에 표현된 모든 인체조각이 이런 특징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머리 모양은 머리카락의 표현을 얕게 파낸 파임선으로 처리함으로써 거의 민머리에 가까우니, 이는 곧 그것을 생략하여 민머리가 되게 하려는 조짐이었다. 넓은 이마와 압도적으로 강한 부피감을 나타내주는 눈·코·입·귀의 분명한 표현은 건강미 넘치고 매력적인 얼굴 윤곽과 함께 이상적인 미남상을 제시하는데 점잖은 코밑수염은 황제의 위엄을 더해 준다.

좌우에 불입상 2구가 시립하여 삼존의 구도를 이루었던 것이나 오른쪽 불입상은 사라졌고, 앞을 가리던 굴실 입구도 파괴되어 중앙불좌상과 왼쪽 불입상만 노천불(露天佛)처럼 드러나 있다. 굴실의 벽면과 천장은 화불(化佛)과 불꽃무늬로 장식된 광배로 가득 차 있다.

<천안원년명 시무외불좌상(天安元年銘施無畏佛坐像)>(도판 6)이 이와 동일한 양식기법을 보이고 있어 이 <운강20동본존선정불좌상>의 조성도 천안(天安) 원년(466) 경에 끝난 것이 아닌가 한다.

운강석굴이 태무제의 폐불이라는 미증유의 법난(法難)을 치른 다음 사문통 담요의 심모원려한 계획에 의해서 황제권과 적극적인 타협책으로 북위 태조 이하 다섯 황제를 불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서 조영의 실마리를 삼았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따라서 태조 도무제 이하 고종 문성제를 상징하는 5대불이 봉안된 5대 석굴이 운강석굴의 중심이 되고 있는 바, 이에 대한 확실한 이해 없이는 운강석굴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운강석굴의 불상 조각을 모른다면 중국 불교조각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불교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5대굴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운강석굴에 대해 근대적인 학술조사를 가장 철저하게 했던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중국 침략의 소용돌이 속에서 1937년 운강석굴을 황군(皇軍) 보호라는 미명으로 재빨리 접수한 다음, 1938년 초부터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해주기 위해 설립된 동방문화연구소(東方文化硏究所)를 통해 철저한 조사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가던 1942년 말에 이르기까지 만 4년 동안 6차에 걸쳐 조사작업을 했다.

현지 주둔 일본군의 비호와 현지 대사관, 현지 괴뢰정부 및 현지 착취기관이던 화북교통주식회사(華北交通株式會社), 대동탄광주식회사(大同炭鑛株式會社) 등의 적극적인 지원이 정책적으로 배려되었기 때문에 최상의 여건 아래서 여유있는 호화판 조사작업을 벌일 수 있었다.

이 조사작업의 중심 인물은 뒷날 중국불교미술사의 대가로 활약하는 수야청일(水野淸一)과 장광민웅(長廣敏雄)이었다. 결국 이 조사작업은 일본의 패망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그 동안의 업적은 1950년대에 미군정하에서 경도대학(京都大學) 인문과학연구소 (人文科學硏究所)로 넘겨져서 15권 30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로 출간되는데, 이 역시 수야 (水野), 장광(長廣)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담요5굴(曇曜五窟)에 대한 논고가 여러 측면에서 속출(續出)하여 기왕의 업적을 비판하기도 하고 보완해 주기도 하였다.

일찍이 상반대정(常盤大定), 관야정(關野貞) 양씨는 태조(太祖) 이하 오제(五帝)를 위해 석가주금상(釋迦鑄金像)을 만들었다는 ‘위서(魏書)’ 권114 석로지(釋老志)의 내용에서 태조(太祖)를 태조 도무제의 증조(曾祖)인 태조(太祖) 평문제(平文帝)로 보았다. 그래서 오제 (五帝)가 태조의 선대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20굴을 태조 도무제의 증조인 평문제(平文帝), 19동을 태조 도무제, 18동을 태종 명원제, 17동을 세조 태무제, 16동을 공종 경목제 굴로 짜맞췄다.

그러나 불교사학자 총본선륭(塚本善隆)씨는 곧 태조 이하 오제의 어의(語義)대로 이것이 태조 이하 고종 문성제에 이르는 오제를 불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것은 매우 타당성 있는 해석으로 석로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곧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총본씨의 주장 이후로는 이 5대굴(五大窟)이 태조 이하 문성제에 이르는 오제의 굴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굴이 어떤 황제의 굴이냐 하는 데 있어서는, 총본씨가 가장 높고 큰 중앙굴인 18동이 현재 황제인 문성제 굴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보였고, 길촌령(吉村怜)씨는 ‘담요5굴론(曇曜五窟論)’이라는 논문에서 중앙인 18동이 태조굴(太祖窟)이고 좌우로 신위소목 (神位昭穆; 신위의 좌우 차례)의 역배열(逆配列)이 이루어져 19동이 명원제, 17동이 태무제, 20동이 경목제, 16동이 문성제일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이는 좌우 2굴이 중앙굴을 협시(脇侍)한다는 생각과 신위배열(神位配列)의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한 위에, 태조 도무제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폐불(廢佛)의 장본인인 태무제를 고의로 폄훼하였으리라는 선입견도 아울러 작용하여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태무제가 바로 폐불의 장본인이라 하더라도 북중국 통일의 영군 (英君)으로 북위사상(北魏史上) 최고의 권능을 행사한 절대군주였으며, 현재 황제인 문성제의 조부로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그 위령(威令)에 백성들이 벌벌 떨던 바로 전 황제였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명암(明暗)을 일시에 구비한 거인불(巨人佛)로 제18동의 주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도판 7)을 태무제의 초상조각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17동의 본존인 <미륵보살교각좌상(彌勒菩薩交脚坐像)>(도판 8)이 유일하게 등극 전에 돌아간 공종 경목제를 상징하는 것이라 보는 데도 더욱 타당성을 부여하게 하니, 앞서 우리가 짜맞추었던 대로 <20동 본존선정불좌상>이 태조 굴이고 <19동 본존시무외불좌상> (도판 9)이 태종 굴로 모두 석가모니불을 상징하며, 18동이 세조 굴로 노사나불을 상징하고, 17동이 공종 굴로 미륵보살을 상징하며, <16동 본존 시무외포복불입상>(도판 10)이 당금여래 (當今如來)인 현재 황제 문성제 굴로, 재현(再現)한 석가모니불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포복식 불의(袍服式佛衣) 출현


따라서 5대굴의 굴착은 20동부터 차례로 진행됐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어떤 계획에 의해서 첫 굴의 시험굴착(試驗掘鑿)이 성공하면서부터는 동시에 5대굴이 모두 착공될 수 있다는 가정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사문통(沙門統) 담요의 치밀한 계획과 원대한 포부에 의해서 제권(帝權)을 등에 업고 승기호(僧祇戶)니 불도호(佛圖戶)니 하는 경제기반과 노동기반까지 충분히 마련하면서 진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므로 담요는 당금여래인 문성제의 모습을 불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돌아간 선황제(先皇帝)가 아닌 생존한 현(現) 황제의 초상조각(肖像彫刻)이어야 한다는 데서 그 표현 형식에 대해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창안해낸 것이 포복불(袍服佛) 형식이었다. 소삼일웅(小杉一雄)씨가 ‘상현좌고 (裳懸座考)’에서 지적했듯이 이 포복형 불의(佛衣)는 결코 긴 네모꼴 천으로 이루어진 승가리(僧伽梨; 불타나 승려가 맨 위에 입는 겉옷, 大衣 혹은 袈裟라고도 함)의 원뜻을 상실한 것이 아니고 다만 여기에 중국식 포복(袍服; 곤룡포 형식의 의복)이 가지는 외형적 특징을 부여했을 뿐인 의복 표현이었다.

그래서 같은 간격으로 포물선이 중첩되던 인도불상 양식의 옷주름 표현이 중국식 포복이 가지는 수직층판형(垂直層板形) 평행선 옷주름으로 바뀌고, 그것을 좌우균제(左右均齊)로 새의 날개깃처럼 날아갈 듯이 아래에서 두 끝을 벌려 놓는다.

그리고 신대(紳帶; 왕공귀족들이 곤룡포나 도포를 입고 가슴 부위에 매던 넓은 띠, 大帶라고도 한다)를 상징하는 군대(裙帶, 尼洹僧 끈)가 가슴에 표현되어 더욱 중국 황제의 포복을 상징하게 했다. 이런 포복으로의 양식 진전 과정은 특히 16동의 벽면을 장식한 불상군(佛像群) 속에서 차례로 확인할 수 있으니, 요즈음 일인학자(日人學者) 중에서 포복식(袍服式)의 출현이 남조(南朝)에서 비롯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근거 없는 억설이다.

따라서 문성제를 상징한 이 불입상은 포복불(袍服佛)의 완비된 상형식으로는 최초의 작례(作例)라 할 수 있다. 머리카락 표현은 간다라 극성기나 핫다 조각에서 보이던 자연스러운 곱슬머리 형태를 모방하면서, 곱슬의 표현에서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로 나뉘고 다시 사상(四象)으로 분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쌍태극(雙太極) 모양을 나타낸다. 이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3에서 80종호(種好)의 하나로 들고 있는 “머리카락에 5만자(卍字)가 있다”는 내용을 상징한다.

이런 머리카락 표현은 이후 포복식 불상 양식에 따라다니는 머리카락 표현 양식의 한 특징을 이룬다. 좌우 벽면에는 협시(脇侍)라 할 만한 불보살상이 표현되지 않고 무수한 천불 (千佛)의 군상(群像) 속에 이불병좌상감(二佛竝坐像龕)과 선정불좌상감(禪定佛坐像龕)이 작은 규모로 섞여 있을 뿐이니, 이도 담요5굴에서 보지 못하던 특징이다.

이 <16동 본존 시무외포복불입상>이 이와 같이 담요5굴의 다른 본존상 양식과 판이하게 다르므로 종래 이 방면의 탐구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에게는 지대한 관심사였다. 그래서 수야청일씨는 ‘운강석굴군(雲岡石窟群)’(1944)에서 어떤 사고로 본존상을 뒷날 다시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장광민웅 역시 ‘운강석굴에 있어서 불상 복제(服制)에 대하여’ (‘東方學報’ 제15권 4책, 京都, 1947)에서 이 의견에 동조했고, 그 둘이 함께 편찬한 ‘운강석굴’ 권11의 <16동 본존상> 해설에서도 이 주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상이 가지는 당당한 체구와 충만한 부피감에서 초기 양식의 특색이 있음도 아울러 지적했다.

그런데 길촌령씨는 ‘담요오굴론’에서 <16동 본존상>도 다른 4굴과 마찬가지로 초기에 동시 제작되었으리라는 주장을 했다. 이를 남조(南朝) 불상 양식 연원으로 보아 장안파 (長安派) 불공(佛工)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한족식(漢族式) 복제가 되었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남조가 한족왕조이니 한문화(漢文化)의 적통이 그곳에 있었으리라는 단순 논리에 입각해서 북위의 문화역량을 과소 평가한 데서 범한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북위에서 균전법(均田法)이 비로소 시행되는 상황이라든지 복제개혁(服制改革)이 고제 (古制)로의 환원이라는 등 한민족(漢民族)들이 이상으로 여기면서 미처 실행하지 못하던 미황지사(未遑之事;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겨를이 없어 못했던 일)들이 과감하게 실천으로 옮겨지는 정황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불의(佛衣)의 한식화(漢式化)는 논리적으로도 오히려 북위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가 없겠다.

그런데 담요5굴에서 차례로 서역식(西域式) 긴 네모꼴이 중국식 포복형으로 서서히 양식변화를 보인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규(戴逵, ?~396년) 창제(創製)의 남조 연원으로 보려 한 것은 한족(漢族)우위론에 치우친 지나친 억단(臆斷)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남조문화 성향을 가진 일본 문화의 취향이 저도 모르게 남조 우위론을 내세운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상론(理想論)이 본고장에서 실행되지 못하고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의해서 과감하게 실천에 옮겨지는 것은 역사 일반에서 항상 보아온 보편적 현상이다. 더구나 남조연원론의 결정적 증거로 들고 있는 남제(南齊) <영명(永明) 원년(483)명 무량수불상 (無量壽佛像)>(도판 11)이 길촌씨 주장대로 상당히 양식 정리가 되어 있는 상 양식을 보이고, 이 <16동 본존시무외포복불입상>이 운강 초기(460~467년)에 조성되어 아직 양식적으로 미비한 상태라고 한다면 어느 상이 어느 상의 양식을 본받았는지의 해답은 자명해질 것이다.

장차 남조 기년명이 분명한 앞선 시대의 포복식 양식의 불상이 출현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포복불 양식의 남조연원론은 근거가 전무하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더구나 이 <16동 본존시무외포복불입상>은 양식적으로 보아 이미 수야청일, 장광민웅 양씨가 지적했듯이 운강 제2기의 양식 기법을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대로 본존상만은 제2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제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듯하다.

그렇다면 이 <16동 본존시무외포복불입상>은 저들의 추측대로 개작(改作)을 했거나 유보된 상태에서 제2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터이니, 그 이유는 문성제의 장자(長子)인 헌문제(獻文帝, 466~471년)의 불만이 큰 이유였으리라 생각된다.

길촌령씨의 추측대로 황흥(皇興) 원년(467) 헌문제의 석굴사(石窟寺) 행행(行幸; 제왕의 나들이)이 5굴 낙성(洛成)을 위한 것이었다면 헌문제의 불만은 이때 피력되었기 쉽다. 그렇다면 개작은 이보다 얼마 지난 뒤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에 대한 숙고 (熟考)와 실험 과정을 거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6동 본존시무외포복불입상>은 대체로 헌문제 황흥 4년(470)에서부터 효문제(孝文帝) 연흥(延興) 5년(475)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중국불상은 의복까지 중국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의복까지 중국화한 불상


문성제의 복불정책에 힘입어 사문통 담요가 화평(和平) 원년(460)부터 운강석굴을 개착 (開鑿)하기 시작한 이래 북위 제실(帝室)은 내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우선 문성제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12세의 어린 황태자가 등극하니 이가 현조(顯祖) 헌문제(獻文帝, 466~471년)이다. 헌문제 등극 초에 권신(權臣) 을혼(乙渾)의 모역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 문성제 황후인 문명황태후(文明皇太后) 풍씨(馮氏)의 임조청정(臨朝聽政; 조정에 나와 정사를 들음)이 이루어진다.

태후의 간정(干政; 정치에 간섭함)은 결국 헌문제로 하여금 정사를 포기하게 해 헌문제는 불과 18세에 5세 된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앉는다. 다시 5세의 어린 손자를 황제로 앞세우고 정사를 돌보게 된 문명태후는 사생활조차 문란해져 이혁(李奕)이란 자를 불러들여 음행을 일삼기에 이른다.

헌문제는 참다 못해 이혁을 목 베어 죽여버린다. 이 일이 있은 후 헌문제는 갑자기 돌아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태후의 소행이라 말했다 한다. 그러나 태후는 명민하고 과단성이 있어 정사에 능했으므로 어린 효문제(孝文帝, 471~499년)를 대리해 국기(國基)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효문제가 24세의 청년으로 성장한 다음에 49세로 죽는다(490년).

이런 제실의 불안은 오히려 운강석굴의 착실한 조영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제실의 추선공양(追善供養)이나 참회공양(懺悔供養)을 위한 조영 위탁은 그에 합당한 막대한 국가적 지원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수야청일, 장광민웅의 ‘운강석굴’ 권3에 의하면, 운강 제5동과 6동은 헌문제의 추선공양을 위한 헌문제굴(獻文帝窟)이라 한다.

효문제로서는 비명에 간 불행한 부황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고, 문명태후로서는 가해자로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굴의 조영을 계획했으리라는 것이다. 5동조차 추선굴이겠느냐 하는 데는 문제가 있지만 상당히 타당한 견해이다. 항농군(恒農郡) 북섬현인(北陝縣人) 왕현위(王玄威)와 같은 절의지사는 헌문제가 갑자기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100일 동안 상복을 입고 사재를 털어 반승(飯僧; 복을 짓기 위해 많은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과 재(齋)를 베풀었다 하니(‘魏書’ 권87 列傳 節義 王玄威條), 헌문제에 대한 당시 인심의 동정은 능히 이 굴을 만들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운강석굴’ 권13, 14 서장에 의하면, 굴은 승명(承明) 원년(476)으로부터 태화(太和) 7년(483)에 걸치는 7년 동안에 이루어졌으리라고 한다. 이는 ‘위서’ 권7 고조기(高祖紀)에 보이는 효문제의 3차 행행(行幸, 太和 4년 8월, 6년 3월, 7년 5월)이 공사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었고, 이미 5대굴에서 충분한 시행착오를 거친 담요가 아직 70여세의 노인으로 살아 있어 이 일을 일사불란하게 주관해 나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매우 타당한 견해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운강 5대굴 본존불의 의복이 포복식 불의로 변화되는 양식변천 과정만 추적해도, 이 굴들이 5대굴 조영 이후에 거기서 터득한 새로운 양식기법으로 자신있게 처리해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포복삼존불입상(袍服三尊佛立像)>(도판 12)도 가장 정비된 포복불 양식을 대표하는 좋은 예다. 두 어깨를 덮어 내리며 일정한 간격의 층단을 이루어나가면서 새의 날개깃처럼 좌우로 벌려 나간 의벽(衣; 층단식 옷주름) 표현은 날개를 편 거대한 새를 연상케 하는데, 왼쪽 어깨와 팔뚝 너머로 넘겨져 가닥가닥 날리는 깃털 같은 옷자락의 어지러운 표현과 오른쪽 어깨를 덮어 내린 승가리(僧伽梨, 겉옷)가 오른 팔뚝에 의해 들리면서 새의 접은 날개인 듯 표현된 소매 모양이 어찌 그리 대칭으로 느껴져 균제미를 이루었는지!

아마 승가리 밑에서 층을 이루며 2단으로 전개되는 승기지(僧祇支, 내의)와 이원승(尼洹僧, 치마)의 옷주름이 같은 기세로 좌우로 뻗어나가면서 철저하게 균제성을 유지하는 것과 연결되는 데서 오는 느낌이리라. 치마와 내의의 표현을 2단으로 구분지어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이름과 실제는 일치되어야 한다는 철저한 중국식 표현의식이라 할 것이다. 같은 간격의 층진 옷주름과 팔뚝을 적당한 높이로 들게 하여 이루어놓은 소매 형태로 황제의 곤룡포를 상징하게 한 표현기법 역시 중국미술을 지배해 온 상징주의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치마끈은 분명히 신대(紳帶)의 표현으로 가슴에서 맺어져 배꼽 아래 허벅지 사이로 드리워져 있으며, 내의 역시 중국식 옷깃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여며져 있다. 이런 균제성· 완벽성·상징성은 결국 권위주의적 표현의식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니, 태무제 이래 절대화하기 시작한 제권의 현황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얼굴은 훨씬 둥글넓적하게 변하고 목은 가늘며 체구는 빈약해져 초기 탁발씨들의 야성적 아름다움이 많이 감퇴되고 있으나 대신 한식(漢式)의 세련미가 두드러지고 있다. 머리칼의 표현은 이미 16동 주존인 <시무외포복불입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위 오만자형 (五卍字形)이라 할 수 있는 소용돌이 무늬의 상징적 표현으로 신비화시킴으로써 종래 얕은 음각선에 의한 가는 머리칼이나 삭발이 가지던 소극적인 의미를 청산하는 듯하다.

좌우로 감실 밖에 두 구의 보살상이 시립해 있는데, 이 역시 천의(天衣)의 표현이 양쪽 어깨 위에서 날개처럼 벌어지고 아래로 내려온 두 가닥은 허벅지 사이에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중국식 여자 의복에서 보이는 피건(披巾)의 표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보살상은 철저한 대칭을 이루어 균제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좌우에 협시한 회중(會衆)은 아직 철저한 대칭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높게 상투를 틀어 올린 천인(天人), 삭발한 비구(比丘), 머리칼이 곤두선 귀신들이 뒤섞여 있다. 그 자세도 각양각색이어서 혹은 호궤합장(胡合掌; 한 무릎을 꿇고 합장함)하고 혹은 시립합장(侍立合掌)하며 혹은 어떤 몸짓을 하는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는 청법회중(聽法會衆; 법문을 듣기 위해 모인 대중)을 각종 형태의 자유로운 자세로 표현하던 인도식 조각전통을 아직 완전히 불식하지 못해, 균제의 법칙이 철저히 적용되지 않은 단계의 양식기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야 하겠다.

이와 동일한 양식의 <포복삼존불입상(袍服三尊佛立像)>이 6동 4벽의 상층에 3구씩 모두 12구가 조각돼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로부터 포복식 불의는 남중국을 비롯한 전중국으로 확산되고 곧바로 우리에게도 전해와서,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조성되는 거의 모든

불상이 이런 포복식 불상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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