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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4
 관리자  08-22 | VIEW : 23,90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4)]


  호(胡)족 닮은 북조 불상, 한(漢)족 닮은 남조불상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중국 5호 16국시대


    전 ·후한(前後漢) 400여 년 동안의 통치 기준이던 유교 이념은 2세기 말 경에 이르면 말폐(末弊; 말기적인 폐단)를 드러내 더 이상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집권층의 부패와 타락으로 이념 자체가 본뜻을 잃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는 가치기준이 없는 원칙 부재의 상태가 되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풍조가 팽배해졌다. 이에 군웅이 할거하여 천하를 다투게 되었으니,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과 같은 혼란의 시기가 전개된다. 이런 쟁패 과정에서 전쟁 영웅인 사마의(四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武帝)은 진(晋)나라를 건국하고 일시 삼국을 통일한다(280년). 그러나 이념 부재의 상태에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한 것이 오래 지속될 리는 없었다.
  무제(사마염, 265∼290년)를 뒤이은 혜제(惠帝, 291∼306년)의 무능과 가후(賈后)의 천권(擅權;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름) 및 문란한 궁중생활은 곧 8왕의 난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제실(帝室)의 내분은 중앙 집권력을 약화시키고 제권(帝權)을 땅에 떨어뜨림으로써 장성 밖에 웅거하면서 기회만 노리던 호족 (胡族)들에게 틈을 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시황(秦始皇, 서기전 246∼210년)의 6국 통일과 한무제(漢武帝, 서기전 140∼87년)의 확장정책으로 엄청나게 비대해진 중국 제국의 힘에 눌려 국가적 발전을 저지당해 왔던 중국 주변의 호족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곧 국가건설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래서 힘을 얻는 대로 칭제건원(稱帝建元 ;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세움)하기에 이르렀으니, 306년 이웅(李雄)이 성(成)의 황제를 자칭한 이후 무려 16국이 기멸 (起滅; 일어났다 사라짐)하면서 중원을 두고 다투게 된다.
  결국 호한(胡漢 ; 흉노족 유요가 세운 한나라)의 유요(劉曜)가 진(晉)의 수도인 장안을 함락하고 민제 (愍帝)를 항복시킴으로써 진(晋)은 망하게 된다(316년). 다행히 사마의의 증손인 낭야왕(琅邪王) 사마예 (司馬睿, 276∼322년)가 남쪽으로 달아나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 도읍하여 양자강 유역 일대를 확보하고 진나라를 부흥시킴으로써(이를 東晋이라 함), 한족 지배층은 이곳에 피난하여 겨우 한(漢)문화의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북쪽에서 5호16국(五胡十六國)이 기멸하는 사이에, 건강을 수도로 하는 여섯 나라(吳, 東晋, 宋, 齊, 梁, 陳)가, 서로 이어서 남중국을 차지해 한문화의 순수한 전통을 이어간다. 이를 육조시대(六朝時代) 라고 하는데, 결국 북중국 중심의 5호16국 시대라는 말과 중복되는 의미이다. 단지 어느 곳을 중심으로 부르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선비족 탁발씨(拓跋氏)의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통일(439년)한 이후로는 양쪽을 공평하게 부르는 용어로 ‘남북조(南北朝)시대’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호족(胡族)들의 다양한 불교 수용

  남북조 시대는 이와 같이 중국대륙이 남북으로 갈리어 북쪽은 호족들이 차지해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했으며, 남쪽은 한족이 차지해 그들의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분단적 상황을 보였다. 따라서 문화전통이 서로 다른 호족들은 중원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문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였다. 대부분 유목민족인 이들은 그 문화수준이 고급의 한문화에 비교할 만한 것이 못 되었으므로, 무력으로 한족을 정복하고도 문화적으로는 역정복당하는 비운을 맞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이의 방비에 부심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로서는 한문화에 대항할 만한 세계적인 문화라면 불교문화밖에 없었다. 북중국에서 불교가 호족 왕들에게 보호받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5호들은 문화전통이 서로 다르고 그 거주지역이 각기 달랐던 탓으로 북중국에서는 몇 개의 불교 문화권이 따로 형성된 듯하다. 불도징(佛圖澄, 232∼348년)과 도안(道安, 314∼385년)으로 대표되는 ‘업도(쨈都)불교’와 구마라습(鳩滅什, 343∼413년) 중심의 ‘장안(長安)불교’, 담무참(曇無讖, 385~ 433년)으로 대표되는 ‘양주(州)불교’가 그것이다. 이는 현재 불교사학계 내지 불교미술사학계에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지는 주장인데 타당성 있는 견해인 듯하다.
  업도 중심의 연·조(燕·趙)지역은 주로 동호계(東胡界)의 선비족과 흉노별종(匈奴別種)인 갈족(즼族)이 와서 살던 지역이었고,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關中) 지역은 주로 흉노족과 티베트계의 저(?)· 강(羌)이 내려와 살고 있었으며, 사막으로 이어지는 하서(河西) 통로인 양주지역은 월지와 흉노, 선비, 저족 등이 뒤섞여 살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세 지역은 기후 및 풍토가 서로 달라 역사 이래에 각기 다른 성격의 문화를 일궈왔다. 먼저 기후가 비교적 온난하고 사계가 분명하며 수량이 풍부해 농사짓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인 업도 일대에서는 가장 먼저 중국 고대 농업문명이 싹튼다. 서기전 3000년경에 하남성 앙소(仰韶)를 중심으로 꽃핀 채도(彩陶)문화가 그에 해당할 듯한데, 중국 역사에서는 삼황(三皇)이라 불리는 복희(伏羲)·신농 (神農)·여와(女 )와 오제(五帝)라 불리는 황제(黃帝)·전욱(?頊)·제곡(帝쬋)·제요(帝堯)·우순(虞舜)이 나와 이 시대를 다스려 나갔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후 서기전 2205년에는 제우(帝禹) 하후(夏后)씨가 나와 하(夏)나라를 건국했다고 한다. 이 분이 바로 황하 치수(治水)사업으로 유명한 우임금이다. 이 우임금의 치수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황하 최하류에 해당하는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부근의 용산진(龍山鎭)에서 흑도(黑陶)문화기의 유적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서기전 1776년에 성탕(成湯), 즉 탕임금이 박(뛰)에 도읍을 정하고 상(商)나라를 건국했다고 하는데, 박은 바로 지금 하남성 정주(鄭州)이다. 이후 성탕의 후손인 반경(盤庚)이 서기전 1401년에 현재 하북성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으로 도읍을 옮기고 은(殷)이라 국호를 고치니, 소둔촌에 있는 은나라 도읍터인 은허(殷墟; 은나라의 남은 터)에서는 청동기와 갑골(甲骨)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은의 문화역량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들에 새겨진 금문(金文; 쇠붙이에 새겨진 문자)과 갑골문(甲骨文; 거북의 등판과 짐승뼈에 새겨진 문자)에 의해 당시의 역사 사실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은의 수도였던 안양은 삼국시대 위(魏)나라 오대 도읍 중 하나가 된 이래 5호16국의 후조 (後趙)와 전연(前燕)의 수도로 화북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업도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업도 중심의 황하 하류 일대 동방지역은 중국 문화가 제일 먼저 발흥한, 온난하고 비옥한 지대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지역의 문화 특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온화하고 전아하며 세련될 수밖에 없었다.

  삼엄한 관중(關中)문화 전통

  한편 중국대륙이 가지는 서고동저(西高東底 ;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음)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황하의 중상류지역인 관중(關中)지역은 험난한 고산지대에 해당한다. 그래서 산의 조종(祖宗)이라는 곤륜산으로부터 발원한 황하가 감숙성 난주(蘭州)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서진(西進)하지 못하고 사막 사이를 뚫어가며 내몽고 쪽으로 북류해 간다. 이어 강물은 내몽고 오원(五原)에서 다시 동쪽으로 꺾어 탁극탁 (托克托)에 이르렀다가 이곳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거의 일직선으로 섬서성 조읍(朝邑)까지 당도한다.
  황하 물줄기를 사다리꼴 형태로 수천 리나 꺾어 돌아가게 한 이 험준한 산악지를 가리켜 동쪽의 함곡관 (咸谷關), 서쪽의 산관(散關), 남쪽의 무관(武關), 북쪽의 소관(蕭關)인 4관(關) 안에 있는 중심지(수도권 지역)란 의미로 관중이라 부른다. 험준한 산악지대인 이 지역은 하류의 평야지대보다 문화를 일으키기에는 비교적 열악한 환경에 있다 보니 초기 문화가 이곳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하류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가 이곳 변방으로 전파돼 오자 상황이 달라진다. 지키기 쉽고 쳐내려가기 좋은 지리적 이점을 가진 이 지역에서 후발 왕국이 속속 출현하여 하류의 선진 왕국을 정복하는 역조(逆潮)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서기전 1122년에 무왕(武王)이 주(周)나라를 세우고 다음해에 현재 서안(西安) 서쪽 지척에 있는 호경(鎬京)에 수도를 정하여 천하를 통일한 것이 그 효시이다. 이로부터 중국문화의 중심이 이 관중 지방으로 옮겨지게 된다. 호경이 서주(西周)시대 341년 동안 수도로서 전중국을 호령한 데 뒤이어, 춘추(春秋, 서기전 770∼475년) 전국(戰國, 서기전 475∼221년)의 분열 시대를 거친 다음, 서기전 221년에 진(秦)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6국이 통일되고 나서도 서안시 북쪽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사이에 있던 함양(咸陽)이 통일 진 제국의 수도가 돼 통일 천하를 다스려 나갔기 때문이다. 또 단명한 통일 진 제국(서기전 221∼207년)을 뒤이어, 200여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통일 제국을 유지하면서 사방으로 영토확장을 도모하여 한족(漢族)의 위세를 만방에 떨쳤던 전한(前漢, 서기 전 206∼서기 8년) 역시 함양 동쪽 위수 건너, 지금의 서안시 북쪽 지척에 장안(長安)을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 일대는 서주(서기전 1122년) 이래로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통일 중국을 이끌던 역대 왕조의 수도권 지역으로, 절대 군주의 절대 권위가 항상 존재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문화 성격은 살벌할 정도로 권위적인 특성을 드러내 보인다. 각종 조형 예술품에서 규격성(規格性)과 획일성(劃一性), 균제성(均齊性)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권위주의적 경직성(硬直性)이 강조돼 있는 것은 이 지역이 험준한 산악지대라는 지리적 특색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불교가 전중국으로 확산되고 각처에서 불상이 조성돼가자 이곳 관중지방에서는 서주 이래의 살벌한 권위주의적 조형 전통을 계승하여 규격성과 획일성, 균제성이 지배하는 가장 경직된 양식의 불상을 만들어낸다.

  서역 특색 짙은 양주문화

  다른 한편 황하의 물줄기가 관중의 산악에 막혀 사막을 뚫고 북류해가는 난주(蘭州) 부근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하서회랑(河西回廊) 일대의 감숙성 지역은 본래 페르시아계의 월지(月氏)족이 터잡아 살던 곳이다. 월지족은 이곳에 살면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과 중국의 관중지역을 넘나들며 동서의 문물 교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서기전 150년경에 대월지(大月氏)라 불리는 일부는 흉노족에게 정복당해 서북인도 간다라 지역으로 이주해가서 쿠샨왕조를 이룩했고, 소월지(小月氏)라 일컫는 일부는 이곳에 그대로 눌러 살아 토착세력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전한(前漢) 무제(서기전 140∼87년)가 확장정책을 펼쳐가는 과정에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족을 몰아내고 4군(郡)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이 지역이 한의 영토로 편입된다. 원수(元狩) 2년(서기 전 121년)에 무위(武威)와 주천(酒泉) 양군을 설치하고 원정(元鼎) 6년(서기전 111년)에는 장액(張掖)과 돈황(敦煌) 양군을 설치하였다. 전한의 군주들이 4군을 설치하면서 삭방(朔方)과 오원(五原)지역에 살던 백성 10만 구(口)를 모집하여 옮겨 살게 하였다 하나, 이곳의 원주민인 소월지족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곳의 문화성향은 대승불교를 일으켜 불상을 출현시킨 대월지족 쿠샨제국의 그것과 방불하였을 것이다. 이에 이곳 서북 변방 4군을 비롯하여 곤륜산 기슭의 황하 상류지역인 금성(金城), 농서(쾱西), 천수(天水), 안정(安定) 4군을 통괄하던 양주(州 ; 양주 자사부(刺史部)가 무위에 설치되었음) 지역의 불상양식은 간다라 불상양식 특유의 양식적 특색을 자연스럽게 계승하면서 얼굴 모습만 황인종의 용모에 좀더 가깝게 바꿔 놓고 있다.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넓적한 얼굴은 아마 이곳에 거주하면서 흉노와 저 및 선비 등 여러 호족과 혼혈한 결과로 얻어진 소월지족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업도파(쨈都派) 불상 양식

  이제 위에서 살펴본 3대 지방 양식을 대표하는 불상을 실례로 들어 비교해 보기로 하자. <시무외불좌상 (施無畏佛坐像)>은 업도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불좌상이다. <시무외불좌상>의 시무외형식은 전호의 <시무외불입상>과 일본인 등목정일(藤木正一)씨가 소장했었던 <시무외불 좌상>을 계승했지만, 왼손은 무릎 위에 손등을 대고 손바닥 위로 옷자락을 거둬잡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새로운 양식임을 드러낸다. 손의 크기도 지나치게 크다든지, 한쪽이 크고 한쪽이 작은 짝손이 아닌 정상적인 표현이다.
  옷주름은 가슴 정면 중앙에서 깊고 부드러운 포물선이 중심축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거듭되며 내려오고 있어 등목정일씨 구장(舊藏; 옛날 소장)의 <시무외불좌상>을 계승한 듯하나, 복부에서 그 끝이 혀 모양으로 네모 꼴에 가깝게 변해 있다. 이것은 오히려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建武四年銘禪定佛坐像)>의 옷주름 선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느낌이다. 보름달 모양의 육계 아랫부분에 이마를 따라 발제(髮際; 머리칼이 나기 시작하는 머리의 끝부분)에 머리칼 표현을 성글게 가하면서 앞가르마를 분명히 타놓은 것은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과 <시무외불입상>의 영향이 두루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호모(胡貌; 오랑캐 용모, 즉 간다라풍의 서역인 용모)의 특징이 점차 사라져서 중국인 청년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 귓불이 지나치게 늘어진다거나 백호(白毫; 부처님 32상 중의 하나로 두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 구슬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동그랗게 말려 있다)가 표현되는 신비적 요소는 나타나지 않고 삼도(三道 ; 목에 팬 세 줄의 선)의 표현도 없다. 다만 옷깃 끝에 세로 줄의 가는 줄무늬가 새겨지고 사자의 표면 및 두 마리 사자 사이에 있는 박산향로의 표면에 역시 가는 선의 빗살무늬나 마름모꼴 무늬가 새겨지는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두 팔뚝을 따라 무릎 위로 흘러내린 옷자락 처리에서도 드러난다.
  바로 앞단계에서 간다라 불상 양식이 극도로 퇴영화하면서 돋을새김 모양으로 추상화되었던 사자는 여기서 입체형을 회복시키면서 퇴영적 추상성을 구상적 표현감각으로 현실화시키고 있다. 이는, 주둥이는 이빨 없는 소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꼬리는 백로의 깃털이 휘어진 듯해 소위 ‘당사자(唐獅子)’라는 상상 동물의 선구를 이루어놓는다.
  이런 업도 불상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소형 선정불좌상의 남은 예는 상당히 많다. 그 중의 하나인 <절충식 선정불좌상>을 예로 들어 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이 선정불좌상의 특징을 말한다면 지난호에서 언급한 <외래재현 선정불좌상>과 같은 외래 양식에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과 같은 자기화 양식이 혼합된 제3의 절충양식이라 해야 하겠다. 머리 모양과 얼굴 및 사자좌는 <외래재현 선정불좌상>을 계승하였고 포물선 옷주름과 선정인 형태는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양팔뚝을 타고 내려온 옷자락 처리는 두 양식을 절충 하였다. 이런 소형 선정불양식은 4세기 말기에서부터 5세기 초기에 걸쳐 크게 유행했던 듯, 현재 학계에 알려진 것만도 40여 구의 예가 있다.
  그런데 1955년 여름에 업도 불교지역인 하북성 석가장시 동쪽 교외 북송촌(北宋村)의 한 분묘 속에서 업도 양식과는 상당히 다른 양식의 불상이 발굴돼 1959년 1월호 ‘문물(文物)’에 소개된 적이 있다. 이것이 현재 하북성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석가장 출토 <일산(日傘)과 광배를 갖춘 삼존불좌상>이다. 첫눈에 정면 옷주름이 네모꼴로 딱딱하게 틀잡혀 있어 부드러운 동방의 조형전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자좌의 중앙에 력( ; 세 발 달린 술항아리) 형태의 화병을 표현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중첩 시키고 있어 동방적인 조형감각이 전무하지만도 않다는 사실이 감지되기도 한다.
  혹시 전진(前秦) 황제 부견이 379년에 업도 불교의 대표자로 사실상 중국 불교 교단의 창립자인 석도안 (釋道安, 314∼385년)을 호북성 양양(襄陽)의 피란지에서 5000금을 적장에게 주고 국사로 초빙해온 이래, 업도 지역에도 장안파 불상 양식이 전래돼 이런 불상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자 사이에 표현된 력 형태의 화병은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의 연꽃을 꽂은 꽃 항아리의 사실적인 표현이 양식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전진 황제 부견이 석도안을 국사로 초빙해온 379년에서부터 부견과 도안이 다 같이 돌아가는 385년 사이에 해당하리라고 본다.
원형의 일산은 활짝 핀 연꽃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광배 뒤에 고정된 일산대로 받쳤고, 키(箕) 모양의 2단 타원형 광배 안에는 두광 아래에 한 쌍의 비천상(飛天像)과 신광 아래에 한 쌍의 승상(僧像)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았는데 광배에 붙어 있다. 광배와 일산을 갖춘 사자좌의 불좌상은 네 다리를 갖춘 상 모양의 아랫대좌에 의해 다시 받쳐진다. 아랫대좌의 네 다리 표면에는 구름 당초 무늬가 가는 파임 선으로 새겨져 나갔고, 상 모양 표면에는 마름모 꼴의 예리한 꽃잎 장식이 가는 선으로 새겨져 나갔다. 불상과 광배, 일산, 일산대, 아랫대좌가 각각 따로 만들어져 조합되는 과정으로 제작됐다.

  장안파 불상 양식

  장안파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불상으로는 <승광2년명 선정불좌상(勝光二年銘禪定佛坐像)>을 당연히 먼저 꼽아야 한다. 불상을 만들게 된 내력을 밝히는 명문(銘文)에 만든 때가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명문은 네 다리로 이루어진 아래층 대좌의 앞다리 왼쪽에서부터 새겨지기 시작하여 오른쪽 뒷다리 뒷면까지 이어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승광 2년 기사 봄 정월 초하룻날 중서사인(中書舍人) 시문(施文)이 모든 가족의 평안을 위하여 1구의 상을 만듭니다 (勝光二年己巳春正月朔日, 中書舍人施文, 爲合家平安, 造像一軀).”

  승광이란 연호는 대하(大夏)의 마지막 황제인 혁련정(赫連定)이 428년 2월부터 431년 6월까지 쓰던 것이다. 따라서 승광 2년, 즉 서기 429년 정월에 ‘중서사인’이라는 요직에 있는 시문이란 인물이 온 가족의 평안을 위해 이 불상을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중서사인이란 황제의 측근에 있으면서 황제의 명령을 문서로 작성하며 기밀을 담당하는 관직인데,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불상을 조성하는 공덕으로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였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당시 역사 상황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때 북중국을 통일했었던 전진(前秦) 세조 부견(묑堅, 357~385년)이 남조의 동진(東晋) 정벌 실패(383년)로 북조가 재분열하는 과정에, 북중국은 다시 5호(五胡)가 패권을 다투는 열국 쟁패의 마당으로 바뀐다.
  우선 전연(前燕)의 제 왕자들인 선비족 모용(慕容)씨들이 각처에서 복국운동을 일으켰다. 부견이 전연을 멸망시킨 뒤 모용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그들을 신뢰하고 중용한 결과였다. 부견이 남색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총애하여 평양(平陽)태수를 시켰던 모용충(慕容?)이 제일 먼저 반란을 일으켜 385년 정월에 장안을 수도로 삼아 서연(西燕)을 건국하였다.
  뒤이어 386년 2월에는 모용수(慕容垂)가 현재 하북성 정현(定縣)에 있던 중산(中山)에 도읍을 정하고 후연(後燕)을 일으켰고, 같은 해 5월에는 강(羌)족 요장(姚?)이 다시 장안을 차지하여 후진(後秦)을 건국하였다. 특히 요장은 385년 8월에 전진 세조 부견을 사로 잡아 신평의 절에서 목매 죽이고 나서 자립한 것이다.
  부견이 죽고 나자 5호들이 각처에서 일어나 나라를 세웠다. 386년 4월에 선비족 탁발규(拓跋珪)는 현재 내몽고 화림격이(和林格爾)현 북쪽에 있는 성락(盛樂)에 도읍하여 북위(北魏)를 일으켰고, 같은해 10월에는 저(?)족 여광(呂光)이 현재 감숙성 무위(武威)현에 있는 고장(姑藏)에 도읍하여 후량(後凉)을 건국하는 등 비온 뒤에 죽순이 솟아나듯 각처에서 나라가 세워졌다. 결국 이들은 쟁패를 거듭한 끝에 420년대가 되면 탁발 선비가 세운 북위가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여 최강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에 대적할 만한 나라는 418년 11월에 가서야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세운 후발국가인, 철불(鐵弗) 흉노족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대하(大夏)뿐이었다. 철불이란 이름은 부계가 흉노족이고 모계가 선비족인 혼혈종을 일컫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황하가 사다리꼴로 꺾어져 도는 안쪽 하투(河套) 지역을 차지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하투 북단의 동쪽 황하 건너 성락에서 나라를 일으킨 북위와는 일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북위는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396년에 제위에 올라 398년에 수도를 성락 동쪽, 현재 산서성 대동(大同)인 평성(平城)으로 옮긴 뒤 국세를 점점 키워 황하 이북 거의 전역을 차지하게 되니 하투지방과 이에 연결되는 관중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대하와는 자웅을 결정짓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하의 운명

  그런데 대하의 세조 무열제(武烈帝) 혁련발발은 북위 태조 탁발규의 고종 사촌아우였다. 혁련발발의 외조부가 탁발규의 조부인 북위 소성제(昭成帝) 탁발 습익건(什翼健)이었던 것이다.
  본래 혁련발발의 성은 유(劉)씨로 그 부친 유위진(劉衛辰)은 철불흉노의 추장이었다. 혁련발발은 천하 제패의 꿈을 품고 407년 6월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인 삭방(朔方)에서 나라를 세우고 대하(大夏)라 일컬었다. 그리고 대하 천왕(天王) 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며 용승(龍升)이란 연호도 세웠다. 그는 유(劉)라는 성씨도 마음에 차지 않아 ‘아름답게 밝은 빛이 하늘과 이어졌다(徽赫與天連)’라는 말을 줄여 혁련(赫連)씨로 성을 바꾸고, 그 종족 이름도 ‘굳세고 예리하기가 쇠와 같아 모두 남을 정벌할 수 있다(剛銳如鐵, 皆堪伐人)’는 의미로 철벌(鐵伐)이라 부르게 하였다 한다.
  혁련발발은 관중 일대로 영토를 확장해나가 후진의 옛 땅을 차츰 되찾아간다. 그 과정에 413년에는 지금 섬서성 유림현(楡林縣) 서남쪽 백성자(白城子) 자리에 통만성(統萬城)이라는 새로운 성곽도시를 건설하여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는데, 그 이름이 가리키듯이 만국을 통일하려는 야욕을 과시하는 작업이었다.
  혁련발발은 통만성을 쌓을 때 흙을 쪄서 쌓게 했는데, 만약 송곳으로 찔어보아 한치(一寸)만 들어가도 그 쌓은 사람을 죽여 함께 묻어버릴 정도로 가혹하게 독려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병장기도 만들고 나서 시험해 보는데 만약 화살이 방패를 뚫지 못하면 활 만든 자를 죽여버리고, 방패가 뚫리면 방패 만든 자를 죽여버릴 정도로 병장기 제조에도 완벽을 기했다 한다. 그 결과 대하의 국세는 날로 커갔다. 드디어 418년 11월에는 혁련발발이 스스로 황제라 일컬으며 연호를 다시 세우고 서주 이래의 도읍지이던 장안을 남도(南都)로 칭하고 천하통일의 기반을 다진다. 그러나 천명(天命)의 향배는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 북위에서 북조 통일의 영주 세조 태무제(424~ 452년)가 423년 11월에 등극하고 나자 대하의 영웅 혁련발발은 그 다음해인 425년 11월에 천수(天壽)를 다하고 만다.
  이에 북위 태무제는 426년 10월부터 대하를 정벌하기 위해 몸소 출정한다. 427년 6월의 2차 친정에서는 통만성이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포위한 채 물과 풀의 공급을 끊어 놓고 적은 병력으로 대하의 2대 황제 혁련창(赫連昌)의 대군을 유인해 섬멸하는 작전으로 통만성을 함락한다. 이때 대하의 왕모와 왕비 비빈공주와 제왕자는 물론 공경대부와 그 가족들까지 포로로 잡혔는데 그 수가 수만을 헤아렸다 한다.
  혁련창은 겨우 수백 기를 거느리고 몸을 삐쳐 지금의 감숙성 천수현에 있는 상규(上め)로 달아났다. 428년 2월에는 조금 북쪽인 감숙성 평량(平)으로 옮겨 북위군과 싸우다가 북위 감군시어사(監軍侍御史) 안힐(安?)에게 사로잡힌다. 이에 혁련창의 아우 혁련정(定)은 곧바로 평량에서 제위를 계승하여 연호를 승광(勝光)이라 바꾸고 이 해를 승광 원년으로 삼는다.
  따라서 승광 2년은 429년에 해당하는데, 이때 대하는 수도 통만성과 남도 장안성이 모두 북위군에게 함락돼 서남쪽 변방인 평량 일대만 겨우 남은 상태였고 황제마저 적에게 생포돼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다. 정녕 국가 존망의 위기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신황제 측근에서 중서사인의 중책을 맡고 있던 시문도 그 자신의 신변안전은 물론이거니와 그 가족의 안위를 전혀 보장받을 수 없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가족들이 통만성이나 장안성에 남아 있었다면 그 생사조차 가늠할 길이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래서 시문은 내일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불상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족의 안위를 지켜달라고 기원할 대상은 오직 부처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불상에 서린 비원(悲願)

  이런 지옥 같은 현실이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중국인들로 하여금 초월적인 신성(神性)을 내세우며 내세(來世)를 얘기하는 불교로 몰입하게 했던 것이다.
  더구나 406년에는 중국 불교사상 최대 역경사(譯經師; 경전을 번역하는 승려)인 구마라습(鳩滅什, 343~413년)에 의해 장안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줄여서 법화경이라 함)’이 새로 번역돼 나온 터였다. ‘법화경’ 권1 방편품(方便品)에서는 ‘불상을 어떤 형식이나 어떤 재료로 만들든지 간에, 만들기만 하면 그것이 비록 아이들의 장난이라 할지라도 그 공덕으로 성불(成佛)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시문으로서는 일가의 안녕쯤이야 불상을 조성한 공덕으로 능히 지켜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시문의 이런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으되, 이 불상이 만들어진 지 2년 뒤인 승광 4년 (431년) 6월에 대하의 마지막 황제인 혁련정은 토욕혼(土谷渾; 이 경우 관용적으로 谷을 욕으로 읽음) 왕 모괴에게 사로잡혔고 다음해인 432년 3월에 북위로 강제 송치되었다가 피살됨으로써 대하는 영영 멸망하고 만다. 이런 경황 속에서 조성된 불상이 바로 <승광2년명 선정불좌상>이다.
  이제 그 양식을 살펴보자. 우선 정면 가슴 부위의 옷주름이 입 구자(口字)에 가까운 사각형으로 4중의 ‘같은 한 변 사각형’ 층을 이루는데, 주름선 자체가 돋을새김이라서 딱딱한 느낌이 극에 이른다. 선정인을 지은 겉옷 아랫자락 옷주름도 둥근 맛이 적고 사자좌의 화병 표현은 삼각추를 두 개 맞대놓은 듯 예리하게 표현되었다. 경직 현상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머리칼 표현도 앞가르마를 탄 아랫부분은 가르마 선을 동일변으로 하는 직삼각형의 중복인 것처럼 몇 층의 굵은 빗금을 그어 곧은 머리칼을 상징하고 있다. 육계 부분은 환벽(環璧; 넓은 테를 가진 고리 모양의 둥근 옥) 모양의 둥근 고리테를 돌려가며 붙여 곱슬머리를 상징하였는데, 이미 사실성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석가장 출토의 <일산과 광배를 갖춘 삼존불좌상>에서는 불상과 아랫대좌가 각각 따로 만들어 졌는데 이 경우는 하나로 합쳐져 있다. 다만 분실된 일산과 광배만 따로 만들어졌을 듯하다. 상(床) 모양의 아랫대좌에서 상판 아래 다리 사이를 연결하는 받침 부분에 안상(眼象) 모양의 돌기 장식이 더해져서 장식성을 강조하였고, 네 다리 표면에는 이 불상을 만들어 낸공덕으로 일가족이 모두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내용의 명문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다.

  장안파 불상의 특징

  이런 것들이 바로 장안파 불상 양식의 특징이다. 경직된 절대 권위주의 형식이 자연스러운 포물선의 중첩으로 이뤄진 옷주름선마저 사다리꼴 모양의 네모꼴 돋을무늬로 경직시켜 놓았던 것이다. 실제 상황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추상적인 표현이다.
  서주 이래 역대 절대군주권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에 수도권 지역으로서 전중국을 호령해왔던 관중 지방의 극단적 권위주의와 산악 지방이 갖는 준엄성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상징성의 표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관중 특유의 삼엄한 기법인 것이다.
  이런 양식은 관중지방에서 널리 유행했던 듯, 평량에서 경수(涇水)를 따라 장안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이웃 고을 경천현(涇川縣)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식의 불상이 출토되었다.
이 경천현 출토의 선정불좌상은 다행히 일산(日傘)과 광배가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석가장시 북송촌 출토 <일산과 광배를 갖춘 삼존불좌상>과 비교가 된다. 양식 진전 상황으로 보면 <일산과 광배를 갖춘 선정불좌상>이 석가장 출토의 <일산과 광배를 갖춘 삼존불좌상>과 <승광2년명 선정불좌상> 사이에 위치해야 할 듯하다. 정면의 네모꼴 옷주름의 경직도(硬直度)나 사자좌에서 두 마리 사자 사이에 놓여 있는 력 모양 화병의 양식화 진행 형태 등에서 서로를 비교해 보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일산과 광배를 갖춘 선정불좌상> 역시 불상과 광배, 일산, 일산대, 아랫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립했다. 광배는 분명히 2중원으로 그려 두광과 신광으로 구분했다. 두광에서는 활짝 핀 연꽃 한 송이를 씨방과 함께 전면에 돋을새김으로 새겨넣는 사실성을 보이고, 신광에서는 연꽃 잎만 겉테를 따라 띠를 이루며 돋을새김으로 새겨넣는 차이를 보인다. 광배의 모든 여백에는 물결무늬 같은 불꽃무늬를 가늘게 파낸 선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다.
  이런 팬 줄무늬 장식은 아랫대좌의 네 다리 표면에도 가득 채워져 있다. 상 모양 윗면의 경사진 표면에는 팬 줄무늬 기법으로 연꽃잎을 사면에 둘러 나갔는데, 그 끝 표현이 예리하여 석가장 출토 <일산과 광배를 갖춘 삼존불좌상>의 마름모꼴 장식 문양의 예리한 마름모꼴을 뒤잇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따라서 경천현 출토 <일산과 광배를 갖춘 선정불좌상>은 전진 황제 부견 시대에 창안된 양식이 차분히 양식 정비를 해 나가던 후진 고조(高祖) 요흥(姚興, 394~416년) 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법화경’을 비롯하여 ‘유마경(維摩經)’ ‘능엄경(楞嚴經)’ 등 74부(部) 380여권을 번역해낸 구마라습의 행적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구마라습은 383년 전진 황제 부견의 명령을 받은 후량(後) 태조 여광(呂光)에 의해 구자(龜慈)로부터 강제 초빙되던 중 부견이 후진 태조 요장에게 시해되자 그대로 후량에 억류돼 있었다. 그러다 후진 고조 요흥이 후량을 정벌하고 그를 장안으로 초빙해와 서명각 (西明閣) 소요원(逍邀園)에 머물게 하면서 국력을 기울여 역경 사업에 종사하도록 후원했다. 그러니 바로 이 시기에 제작된 <일산과 광배를 갖춘 선정불좌상>은 그 시대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양식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양주파(州派) 불상 양식

  양주파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것은 감숙성의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과 감숙성 난주(蘭州) 영정현(永靖縣) 병령사(炳靈寺) 석굴의 불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석굴들은 모두 5호16국 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우선 중국 석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돈황 막고굴의 조각상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도, 폐르시아, 로마 등 서역으로부터 오는 나그네가 동서를 갈라놓는 열사(熱砂)의 땅 타클라마칸(Takla-makan, 大戈壁) 사막을 지나 물과 초목이 있는 기름진 땅 중국대륙에 첫발을 들여놓는 곳이 돈황이다.
  아직 모래의 끝은 이어져서 강풍에 모래 우는 소리가 처절(凄絶)하다는 명사산(鳴沙山), 혹은 사람이 올라가면 소리쳐 울며 무너져 내리나 하룻밤만 자고 나면 바람이 먼저대로 해놓는다는 그 명사산(혹은 神沙山) 아래로 쪽빛 당하(黨河)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다. 물 적셔진 하반(河畔)에는 모래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초목이 자라고 있다.
  몇 달을 모래 속에서만 헤매야 했던 대상(隊商)들은 여기서 살아났다는 안도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을 것이고,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괴로운 여행을 자원하였던 전도승(傳道僧)들은 불덕(佛德)을 소리 높여 찬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불보살(佛菩薩)의 대자대비(大慈大悲)에 귀의하고자 하는 경건한 마음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래서 전량(前) 태청(太淸) 4년(366년)에 악준(樂?)이라는 비구는 삼위산(三危山)이 석양에 물들어가는 장관을 명사산에서 바라보고 마치 금빛 찬란한 천불(千佛)의 모습이 저녁노을 속에 나타난 듯한 감명을 받아 천불을 재현하려는 의지로 명사산 동쪽 기슭에 굴실(窟室) 경영을 시작하니, 이것이 막고굴 (莫高窟) 천불동(千佛洞)의 시원이다.
  이후 전진(前秦, 377~385년), 후량(後, 386~403년), 서량(西, 400~421년) 북량(北 , 421~439년), 북위(北魏, 439~534년), 서위(西魏, 535~556년), 북주(北周, 557~581년), 수(隋, 581~617년)에 걸쳐 왕실과 지방 유력자에 의해 석굴사원은 계속 파여 나가고, 다시 당(唐), 송(宋), 서하(西夏), 원(元)대까지 조영(造營; 집 등 건축물을 지어냄)이 이어지니 현재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에 의해 조사된 것만 해도 492굴에 이른다. 그중에서 가장 초기 양식을 가진 북량 이전의 굴은 3개소로, 제268굴과 제272굴 및 제275굴이 그것이다.

  굴실을 판 까닭

  여기서 왜 그 당시에 이곳 사람들이 하필 굴을 파내어 절을 짓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는지를 살피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원래 인도는 열대 지역이며 바위산이 많아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는 석굴(石窟)이 가장 알맞은 주거(住居) 환경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굴실을 이용한 절 생활이 이루어졌던 듯하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에 칠엽굴(七葉窟, Sapta-parn·aguh)에서 오백 나한(羅漢)이 모여 제일결집 (第一結集)을 감행했던 것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초기의 석굴들은 대체로 천연동굴을 이용한 것이었겠지만 차차 교단세력이 확대되고 승려 수가 불어나면서 인공 굴을 파나가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기전 2세기경부터는 인공굴을 파나가는 일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현존하는 인도 석굴에서 두 가지 성격의 굴실(窟室) 경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사당굴(祠堂窟) 혹은 탑묘굴(塔廟窟)이라고 번역되는 차이티아(caitya)굴이고, 다른 하나는 승원굴(僧院窟) 혹은 승방굴(僧房窟)로 번역되는 비하라(vih땢a)굴이다. 이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듯이 하나는 예배굴(禮拜窟)이고 하나는 수행굴(修行窟)이다.
  탑묘굴은 예배에 적합하도록 불탑(佛塔)을 석굴 안에 봉안하였고, 수행굴은 중앙의 빈 대청을 중심으로 각 벽면에 작은 규모의 석실(石室)을 만들어 승려들의 수행과 주거 및 집회에 편리하도록 조성하였다.
  이 두 가지 양식이 차차 혼합돼 예배와 주거가 한 굴실 내에 이루어지는 사원 규모로 발전된다. 즉 요사(寮舍; 승려들이 생활하는 집)와 불전(佛殿; 불상을 모신 전각)이 함께 있는 요즈음의 사원 형태와 같은 굴실 양식으로 바뀌면서 2세기경까지 활발하게 만들어진다.
  결국 이 굴실 사원경영의 영향이 불교 전파와 함께 북인도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의 여러 오아시스에 전해졌고 다시 중국에까지 미쳐서 서역으로부터의 첫 기착지인 돈황에 막고굴을 처음 경영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돈황지역은 소위 제4기 옥문계(玉門系) 역암층(礫岩層)이라 하여 그 석질이 매우 거칠어 조각 재료로는 부적당했다. 거기에다 이곳은 사막이 끝나는 모래땅으로 목재 역시 희귀했으므로, 굴실경영과 함께 봉안할 불보살상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재료란 흙밖에 없었다.
  이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꽃피기 시작하여 사막을 따라 전파돼온 소조(塑造; 흙으로 빚어 만듦)의 묘법 (妙法; 신묘한 기법)을 전수받게 된다. 이는 굴실을 파낸 다음 소조상을 만들어 안치(安置)하고, 그 거친 벽면에는 진흙으로 맥질한 위에 벽화를 그려 장식하는 기법으로 석굴사원을 경영하였다. 그래서 당하(黨河)의 쪽빛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명사산(鳴沙山)의 동쪽 암벽에 492개소나 되는 석굴을 파내고(벽화와 소조상이 없는 굴이 100여 곳 더 있다) 4만5000㎡에 달하는 벽화와 1400여구에 이르는 소조상을 남겨 놓고 있다.

  어정쩡한 다리앉음새의 미륵불교각좌상

  여기에 들고 있는 <미륵불교각좌상(彌勒菩薩交脚坐像)>은 제268굴의 주벽(主壁; 정면에서 바라다 보이는 중심 벽)인 서쪽 벽에 봉안된 이 굴의 주존(主尊; 주인이 되는 존상)이다. 다리를 발목에서 교차시킨 의좌상(倚坐像 ; 의자에 걸터앉은 상)으로 흔히 교각좌상(交脚坐像; 의자에 앉아 두 발목을 서로 교차시키며 앉은 상)이라 부르는 불상이다.
  반가좌상(半跏坐像 ; 한 다리는 땅을 짚고 다른 한 다리는 땅 짚은 다리 위에 올려 반만 가부좌를 틀고 의자에 앉은 상)이나 교각좌상은 모두 간다라 조각에서 출현되는 특징적인 상양식이다.
  이런 앉음새는 평좌(平坐; 평지에 다리를 개고 앉는 앉음새)를 습관으로 하는 중인도에서 수행의 앉음새로 가부좌(跏趺坐; 두 발바닥이 모두 위로 보이도록 양 다리를 서로 꼬며 다리를 개고 앉는 앉음새)를 틀던 것이, 의자 생활을 습관으로 하는 그리스계의 간다라 지방으로 오면서 의자에 앉은 자세로 가부좌를 틀려고 하다 보니 부득이 만들어졌던 형태의 앉음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점잖지 못한 형태의 앉음새로 경건한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상을 만들어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런 보살교각상은 간다라에서 이미 단독예배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이 양식이 중국에 들어오고, 나중에 운강석굴(雲岡石窟) 제17굴 명창(明窓) 동쪽 벽과 용문(龍門) 고양동(古陽洞) 북쪽 벽 위층에서는 ‘미륵보살’이란 존상(尊像)의 이름으로 새겨진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미술사학자들 사이에는 교각(交脚)의 앉음새를 하고 있는 불보살상을 대개 미륵보살 내지 미륵불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 <미륵불교각좌상>은 불꽃으로 둘러싸인 감실 안에 교각좌로 안치돼 있는데, 목 부분 이상은 뒤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식 편단우견법(偏袒右肩法)인 반단식(半袒式 ; 어깨를 반쯤 드러내놓는 형식) 불의(佛衣) 표현을 보인, 몇 안 되는 초기 상 중의 하나인데 왼쪽 어깨 위로 겉옷 자락이 반쯤 덮여서 팔뚝을 따라 내려와 오른쪽 어깨로 넘어간다. 굽타 양식의 특징인 비치도록 얇은 의복 표현법의 영향을 받아 육체의 윤곽이 옷 밖으로 드러나도록 표현돼 있다. 중국 조각 전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육감적인 기법이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이나 설법인(說法印)을 지었을 두 손은 떨어져 나갔으나 법열(法悅)로 인한 열락 (悅樂)의 극치를 보이는 듯 발가락을 세워 팽팽하게 교각자세를 짓고 있는 모습에서 불타의 다양성을 실감 할 수 있다.
  등 뒤 감실 벽면에 채색대(彩色帶)의 중첩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나타냈고, 4구의 협시보살 (脇侍菩薩)을 좌우에 그렸으며, 감실 밖에는 비천(飛天)을 좌우에 3구씩 배치하였다.
  넓은 얼굴과 시원한 이목구비, 굵은 목, 튼튼한 어깨 등에서 당시 이 지역에 터잡고 살던 월지족과 흉노족 등의 혼혈상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본래 이 지역은 월지족이 터잡아 살다가 흉노의 침략을 받고 일부는 밀려서 간다라 지역으로 옮아가 쿠샨제국을 건설하였고 일부는 남아 흉노의 지배를 받으며 이들과 뒤섞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황석굴을 처음 파내던 시기는 오지(烏氏, 月氏의 다른 표기인 듯, 모두 氏를 지로 읽음)족 출신의 장(張)씨가 전량(前, 314~376년)을 세워 이곳을 다스리던 때였고, 이 268굴이 만들어질 때는 노수호(蘆水胡)라 부르는 흉노족 저거(沮渠)씨가 세운 북량(北, 401~439년)이 다스리고 있었다.
  <미륵불교각좌상>은 원칙적으로 간다라 양식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 형태는 훨씬 더 세련돼 있다. 그래서 한문화(漢文化)와 스키타이문화 그리고 서역문화가 혼합된 이 지역 돈황문화의 우수성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겉옷의 옷주름은 규칙적인 돋을무늬선과 그 위에 넣은 파임선의 이중표현으로 이루어져 있고, 옷자락은 톱니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것은 장차 북위 조각에 이어져서 소위 포수좌(袍垂座 ; 곤룡포 자락이 대좌를 덮어 내린 대좌 형식)의 특징으로 발전한다. 비취 빛에 가까운 밝은 청록색과 적색조의 채색이 인상적인데, 이것은 모래로 뒤덮인 사막에서 추구할 수 있었던 색채감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병령사(炳靈寺)의 석굴

  감숙성 난주(蘭州) 서남 120km 지점이자 영정(永靖)현 서남 40km 지점의 황하 상류에 위치한 병령사 (炳靈寺; 당대에는 龍興寺라 부르고 북송대에는 靈巖寺라고 했음)에는 183개의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 크고 작은 불상들이 776체나 봉안되어 있다. 서진(西秦, 385~431년)에서 청대(淸代, 1662~1911년)에 걸치는 1500여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조성된 것들이다.
  여기 든 <병령사불입상>은 그 곁에 건홍(建弘) 5년(424년)의 햇수가 담긴 먹 글씨 기록이 남아 있어 서진의 문소왕(文昭王) 걸복치반(乞伏熾盤, 412~428년) 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석굴불상 조각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연대가 확실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병령사소조불입상>이 봉안된 제169굴은 높이가 15m, 폭이 25m 정도 되는 자연 동굴로 내부에 30여 체에 이르는 불상과 그 협시상들이 모셔져 있는데, 대부분 서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나머지는 북위 중·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이 불입상의 왼쪽 발 아래에는 다시 ‘법현이 이를 공양하다(法顯供養之)’라는 먹글씨 기록과 걸복치반의 왕사(王師)이던 인도승 담마비(曇摩毘)에 관한 먹글씨 기록도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법현이 최초로 인도 순례를 한 그 법현이라면, 그가 순례를 떠나던 해인 399년 이전에 이 석굴이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법현이 장안을 출발한 때가 후진 홍시(弘始) 원년(399년)인데, 이후 법현은 인도에서 동진 의희(義熙) 9년(414년)에 해로를 따라 동진 지경인 청주(靑州)로 돌아온 후 계속 남조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면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416년 번역), ‘불설대반니원경 (佛說大般泥洹經)’ 6권(416~418년 번역) 등을 번역해내고, 양자강(揚子江) 상류인 강릉(江陵) 신사(辛寺)에 이르러 82세(혹은 86세)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상(像) 양식으로 보면 자세와 의복 및 용모에서 굽타 불상양식에 근원을 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데, 그것이 서북 인도와 비단길의 오아시스 지역들을 거치면서 변질되고 다시 중국의 조형감각에 길들여진 탓인지 굽타양식 원형과 비교해보면 많은 이질감이 드러난다.
  우선 육계가 감(枾) 모양 아래로 졸아들어, 굽타불상의 밑부분이 큰 육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는 간다라의 북상투에서 상투끈으로 졸라매던 상투의 흔적을 육계 모양에도 남긴 데서 연유한 간다라풍이다.
  용모에서 이목구비(耳目口鼻)의 표현이 분명하고 시원스러워 강장미(强壯美; 강건하고 장대한 아름다움)를 느낄 수 있다든지 윤곽이 보름달 모양으로 앳된 얼굴 모습인 점은 모두 마투라계 굽타양식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지만, 눈이 좁고 눈두덩이 높은 것은 중국적 인체 표현법이라고 해야 한다.
  목에 삼도(三道 ; 세 줄)가 있는 것은 굽타양식이고 통견투박의(通肩透薄衣 ; 양 어깨를 감싸 입은 비치도록 얇은 의복)에 포물선 옷주름이 거듭되고 옷자락끝이 굴곡을 이루는 것도 역시 원칙적으로 굽타양식에서 비롯되는 특징이나, 옷주름선의 경우 굽타 조각에서 보이던 돋을무늬선이 아닌 파임선이고 포물선의 중첩도 아래 옷자락까지 물결 일듯 이어져 내려가는 굽타양식 그대로가 아니다.
  가슴에서 새로 일어난 옷주름 무늬는 넓적다리 사이 바로 위에서 그치고 넓적다리 사이로부터는 새로운 주름 무늬가 잠시 부피감있게 일어나다가 두 다리 사이에서는 수직의 옷주름선으로 변화한다. 무릎 근처로부터는 정강이를 따라 포물선 주름 무늬가 다시 각각 일어나 내려가고, 이것이 두 겨드랑이로 이어져 어깨로 넘어가는 복잡한 표현을 보인다. 이것은 투박의(透薄衣)를 입고 걸을 때 실제로 생기는 옷주름 무늬의 사실적인 표현일 것이다. 마투라계 굽타불상이 사실정신이 강한 간다라 지방을 거치면서 변화된 표현이라 할 수 있으니, 택실라(Taxila) 출토 소조상에서 이 선구를 확인할 수 있다.
  가슴의 옷주름선도 굽타 불상이 보이던 정연성(整然性)을 버리고 간다라풍의 자유로운 것을 택했으며, 겉옷이나 치마의 길이도 굽타상에 비해 길어 간다라풍을 따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두 손을 크게 벌려 겉옷을 넓게 펴내어 양쪽 겨드랑이 아래로 많은 옷주름선이 내려오게 함으로써 마치 몸체와는 별개로 소매를 달아 입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이는 역시 길고 큰 소매를 달아 입던 중국의 포복식(袍服式; 도포를 입는 의복 형식) 복제관(服制觀 ; 의복제도에 대한 관념)이 은연중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장차 중국 특유의 포복식 불상 출현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왼쪽 어깨로 넘긴 겉옷 자락이 뒤집혀서 바람에 나부끼듯이 표현되는 것은 모래바람 속에 사는 오아시스 사람들이 창안한 사막풍(沙漠風) 의복 표현법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하니, 우전(于?)이나 고창(高昌) 등 오아시스 지역으로부터 비롯된 양식 기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 손을 크게 벌려 겉옷을 넓게 펴는 것은 위의(威儀)를 장엄하게 꾸미는 데도 효과가 있어 바미얀(Ba-miya-n) 대불이나 굽타 성기(盛期)의 동불입상(銅佛立像)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광배는 전신광(全身光)으로 연꽃잎 모양(혹은 촛불 모양)이며 그 안에 두원광을 나타냈다. 굽타식대로 여러 겹의 무늬 띠를 겹겹이 둘러나갔으나 풀꽃무늬 대신 불상과 비천(飛天) 그리고 불꽃만을 장식하여 중국대륙의 서북지역 의장(意匠)이 접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토록 양주파 불상 양식은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을 통해 서역과 맞닿아 있다는 지리적 특색 때문에 서역 양식과 오아시스 양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보여 주고 있다.

  강남파(江南派) 불상양식

  <시무외불좌상>이나 <승광2년명 불좌상>은 외래양식과 자기화(自己化)양식의 재결합에 의한 신경향을 보이는 양식계열에 속하지만, 불상 본래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세부표현을 합리적으로 중국화시키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요즈음 불교학계 내지 불교미술사학계에서 주장하듯이 5호16국의 불교를 하북파(河北派; 업도파), 장안파(長安派), 양주파(州派), 강남파(江南派)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시무외불좌상>은 하북파에 속하고 <승광2년명 불좌상>은 장안파에 속하며 돈황 막고굴 제268동 주벽 <미륵불교각좌상>과 난주 영정현 169동 <병령사불입상>은 양주파에 속한다는 사실도 이미 지적하였다. 이제 <원가14년명 선정불좌상(元嘉14年銘禪定佛坐像)>은 그런 분류기준에 따른다면 강남파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용모에서 맑고 깨끗하며 기품 있는 귀족적 풍도(風度; 풍채와 태도)가 엿보인다. 난만하게 꽃피었던 남조(南朝) 귀족문화를 대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얼굴의 윤곽과 이목구비는 더할 나위 없는 중국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겉옷을 어깨 너머로 넘겨 입는 것에 대한 이해는 끝내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가슴과 배에 도식적인, 같은 간격의 단층선(段層線)을 넣는 옷주름선의 비합리적인 표현이 이미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에서 비롯된 이래, <승광2년명 선정불좌상>을 거치면서 팔뚝의 옷주름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되어 나름대로 전통기법화하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옷이라면 반드시 소매가 달려야 한다는 중국식 의복습관에 따른 중국인들의 고정관념에서 말미암은 고집으로 생각된다.
  지금 이 불상에서 보인 모양대로라면 뒤에서 여며지는 내리닫이 옷에 도포(道袍)와 같은 큰 소매가 달리고 목부분의 옷깃을 뒤집어놓은, 기괴한 도포 형태의 의복이 된다. 이것이 당시 중국인들이 겨우 이해할 수 있었던 부처님 의복의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승려들의 가사(袈裟)에서 그 원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으나, 당시에는 외래신상(外來神像)에 대한 충실한 복사(複寫)과정에서 그 본뜻을 자세히 살펴보고 합리적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당시인들에게는 고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절대적 신앙대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합리성을 요구한다는 것이 우리의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어깨선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이나 얼굴이 달걀 모양으로 갸름해지고 입모양이 작아지는 등 <승광 2년명 선정불좌상>에 비하면 여성적인 세련미를 보이는데, 이는 철불 흉노 혁련씨의 야성적인 분위기와 남조 송(宋)의 세련된 한족문화(漢族文化)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며, 북방문화의 강인성(强靭性)과 남방문화의 온화성(溫和性)으로 대비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전신(全身)을 둘러싼 촛불 모양의 광배는 그 바깥 부분이 불꽃을 상징하는 무늬로 가득 차고, 부처님 몸을 중심으로 하여서는 동그라미 모양의 두광과 연꽃잎(혹은 촛불꽃) 모양의 신광이 넓은 테를 두르며 중첩되고, 두광의 테에는 당초 무늬가 가는 선으로 새겨져 있어서 굽타양식의 먼 영향이 엿보인다.
  대좌도 사자좌의 형태를 탈피하여 아래 위 대좌와 그 사이에 사잇기둥이 있어 삼단(三段)을 이루는 수미좌(須彌座) 형태로 새로운 기법을 보이나, 아랫대좌에 네 다리를 붙여 상(床) 모양을 한 것은 <승광2년명 선정불좌상>에서도 보았던 전통양식이다. 명문(銘文)은 아랫대좌 오른쪽 다리에서 시작하여 뒷면과 왼쪽으로 이어지면서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가(元嘉) 14년(437년) 해는 (정)축년이며 병오가 초하루인 5월1일에 제자 한겸(韓謙)이 삼가 불상을 만듭니다. 원컨대 돌아가신 부모와 처자 형제로 하여금 여러 부처님을 만나게 하시고 항상 삼보(三寶 ; 불·법·승)와 함께 있게 하소서(元嘉十四年, 歲在丑丙午朔五月一日, 弟子韓謙敬造佛. 願令亡父母妻子兄弟, 値遇諸佛, 常與共會三寶).”

  불상 조각의 천재 대규(戴逵)

  남조에서 불상이 출현하는 것은 삼국(三國)시대 오(吳, 221~280년)나라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초기 양식의 불상으로 장식된 <청자(靑磁) 신정호(神亭壺)>가 남겨질 정도다. 그러나 불상 양식을 중국화하는 것은 대체로 4세기 후반경이다. 이 시기에 동진(東晋)은 중원(中原)에서 피난해온 귀족들이 양자강(揚子江) 유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이에 힙입어 상당한 사회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다. 한편 독자적인 경제기반을 확보한 귀족들은 후한말 이래의 노장적(老莊的) 둔세은일 (遁世隱逸; 세상을 피해 멀리 달아나 숨어 삶)사상에 의해 세상일에 벗어나서 순수 예술에 탐닉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시종(詩宗) 도연명(陶淵明, 365~427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21~379년), 화성(畵聖) 고개지 (顧愷之, 346~407년)가 거의 동시에 출현하며, 조각의 거장으로는 대규(戴逵, ?~395년)가 나온다. 대규는 조각뿐 아니라 시문서화금(詩文書畵琴)에 모두 능한 다예다능인(多藝多能人)이었으며 은일사상에 투철한 은사(隱士)였다. 이런 자격을 갖춘 사람을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지식인상으로 꼽았었다.
  대규에 관해서는 당(唐)나라 도선(道宣)이 지은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 664년)’ 권 중(中), 9, 동진 회계 산음 영보사 목상(東晋會稽山陰靈寶寺木像) 조(條)나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 (法苑珠林, 668년)’ 권13, 경불편(敬佛篇)의 동진 회계 산음 영보사 목상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대규는 이전의 불상이 모두 소박하고 치졸하여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므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불상을 만들기 위해 불전(佛殿)의 장막 밖에 숨어서 불상의 좋고 나쁜 점을 평하는 뭇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참고하기를 3년이나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고심 끝에 하나의 목상(木像)을 만들어냈는데, 동쪽 중국에서 만들어 낸 불상의 신묘함으로는 이와 같은 상이 없었다.”

  중국인의 심금을 울릴 만한 불상이었다면 필연 중국인의 용모를 한 중국식 불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이 당나라 시대까지만 하여도 조주(趙州) 가상사(嘉祥寺)에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소식을 알 수 없다. 당(唐)나라 장언원(張彦遠)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권5, 서역대능화인명(敍歷代能畵人名) 대규 (戴逵) 조(條)에서 대규의 둘째 아들 대옹도 천재 조각가로 이름을 떨쳤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송(宋)의 태자(太子)가 와관사(瓦官寺)에 장육주금상(丈六鑄金像; 두 길이 되는 금동불상, 한 길이 8尺이므로 장육은 두 길)을 만들어 봉안(奉安)하였는데 얼굴이 너무 작았다. 백공(百工)이 모두 이를 고칠 수 없었으나, 대옹이 보고 팔뚝을 줄로 갈아서 그 비례를 맞게 하였다.”

  여기 든 <원가14년명 선정불좌상>도 대규가 창안해낸 중국식 불상양식을 계승한 것일 것이다. 강남파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예를 또 하나 든다면 미국 프리어미술관 소장의 <원가28년명 선정불좌상>을 들 수 있다. 전체적으로 <원가14년명 선정불좌상>을 계승한 것이지만 육계가 높고 커졌으며 선정인을 지은 손 아래의 옷주름이 도식성(圖式性)을 탈피하였고, 광배에 화불을 표현하는 등 변화를 보였다. 그 사이 14년 동안 끊임없이 북방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외래요소 및 북방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양식 진전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광배도 불꽃무늬가 광판(光板) 안에 제한되는 대신 전면에 퍼지면서 섬세하고 나약한 새김법을 보여 여성화하였고, 옷주름 무늬도 지나치게 정리된 느낌이다. 두원광이 연꽃으로 표현돼 굽타식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수미좌도 아래 위대좌의 층급을 정리하여 위 하나, 아래 둘로 줄여 나갔다. 고상하고 아담하며 맑고 소박한 문인적 귀족 취미가 깊이 작용한 상양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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