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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神에게 소원빌고 출세한 일본 정·재계 인사들
 관리자  08-22 | VIEW : 3,034
고구려 神에게 소원빌고 출세한 일본 정·재계 인사들

【아남그룹 명예회장 金向洙의 한일 문화  유적 탐방기(하)】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자 분석 결과 다른 어떤 종족보다 일치하는 점이 많은 걸로 나타났다. 그들이나 우리나 한 조상을 두고 있다는 뜻인데, 일본인들은 지금도 열도에 산재한 한국의 문화적 흔적을 지우려 애쓰고 있다. 자기네 조상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東京)의 이케부쿠로(池袋)역에서 도부토조센(東武東上線)을 타고 40분쯤 달려 가와고에역(川越驛)에 내리면 사이타마(埼玉)의 고려천역(高麗川驛)에 가는 전동차가 항시 기다리고 있다. 전동차를 갈아타고 20여분 달리니 종착역인 고려천역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네 한적한 시골역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역전에는 「고려천 택시(高麗川 TAXI)」라고 쓰인 초록색 택시가 10여 대씩 대기하고 있는데 마치 한국의 지방 소도시에 도착한 듯한 착각마저 준다. 고려천 택시 뿐만 아니라 역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세워진 건물들에는 「高麗○○○」라는 간판들이 즐비하다.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고려(高麗)라는 명칭이나 지명은 거의 예외없이 고구려 (高句麗)를 지칭함은 두말할 나위없다.

이 지방에서 만난 토박이 주민들은 물론 일본말을 사용하지만, 나는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규슈의 가야 후손, 나라의 백제 후손과는 또달리 어쩐지 대륙적 기질이 엿보임도 느꼈다. 이번 답사에 함께한 일행도 나의 느낌에 동조하는 듯했다.

사실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문화 이전은 흡사 도도한 물줄기처럼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 문화 이전은 곧 사람의 이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반도 도항민(渡航民)들의 이주는 지리적 여건과 주변국 상황에 따라 그 경로가 각각 달리 나타난다. 가야는 일본 규슈(九州)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대마도와 이키(壹岐)섬을 징검다리삼아 일찍이 규슈 일대를 개척했으며, 백제는 남해안을 거쳐 세토내해를 따라 오사카로 상륙해 야마토(大和) 평원, 즉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조류가 순탄한 서해를 따라 남하하다가 일부는 규슈 가고시마(鹿兒島)에 정착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지금의 나고야(名古屋)시 근처에서 거마군(巨摩郡)을 이루어 살다가 그후 도쿄 인근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 사이타마에 정착하여 고려본향(高麗本鄕)을 이루었다.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신라는 비교적 순조로운 동남해 조류를 타고 시마네현(島根縣)의 이즈모(出雲)와 오타(大田) 지방으로 상륙, 정착하였다. 여기서 일부는 니가타현(新潟縣)의 사 도시마(佐賀島)에 집단 거주하게 되었고 다른 신라인들은 오사카와 교토(京都), 그리고 멀리 규슈 가고시마(鹿兒島)에까지 그들의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이처럼 한반도의 제국은 마치 일본 열도에 식민지를 개척하듯 그들의 세력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점은 한국의 신생아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에서 태어나고 있는 신생아의 엉덩이나 허리께에 푸른색 반점, 즉 몽고반(蒙古斑)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 인류학적으로 고찰하면 일본인 대부분은 남방 해양세력보다는 한국인처럼 북방 대륙계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동족이라는 것이다. 사업차 수십 년 동안 일본을 드나들면서 보아온 일본인들의 모습이나 생활방식이 우리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도 역시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인구가 오늘날 일본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한일 고대사를 연구하는 동경대학교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교수는 그의 저서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 대륙인』에서 『인류학적 시각에서 고찰해보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주족(移住族)과 일본 원주족(原住族)의 비율은 대략 85 대 15』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주족들은 나라시대까지도 한복(韓服)을 입고 한국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심지어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만엽집(万葉集)」 등의 책에서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에는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 있다』는 것.


일본인들의 고구려 흔적 없애기

그러나 양심적으로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학자보다는 일본 열도 곳곳에 나타나는 한반도 것을 어떻게 해서든 인멸 내지 왜곡시키려는 사람들이 더 큰 힘을 발휘 하는 것 같다.

고려천역이 있는 사이타마현의 고려향은 원래 고마군(高麗郡)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려왔는데, 결국 일본인들에 의해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고려라는 명칭을 없애기 위해 고마군을 이루마군(入間郡)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히다카시(日高市), 쓰루가시마시(鶴ケ島市), 한노우시(飯能市)의 3개시로 분할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은 고려향이 히다카시에 속한 조그만 고장 이름에 불과하다.

고마군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없어져 버렸지만 다행히도 히다카시에는 아직도 곳곳에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과 고구려 유적이 산재한다. 고려향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산을 고려산(高麗山)이라고 하며, 고려향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맑은 시내를 가리켜 고려천(高麗川)이라고 한다. 특히 고려천은 시냇물을 그냥 마셔도 될 만큼 일년 내내 1급수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고려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고려교(高麗橋)에서 한가로이 흐르는 냇물을 굽어 본다. 이 다리는 일명 「출세교(出世橋)」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고려교를 지나 바로 맞닥 뜨리게 되는 고려신사(高麗神社)가 출세운을 열어준다는 「출세개운(出世開運)」의 신사로 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출세를 위해 자기네 나라 신이 아닌 고구려 신을 찾아가 절 하고 소원을 빈다. 또 일본의 양심있는 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예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왜 자신들의 조상을 부인하고 역사적 지명과 유적마저 말살하려고 할까. 결국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역사를 변조, 왜곡하는 데에 대단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변조가 가능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의 모호한 표현 때문 일 것이다.

일본어는 음독과 훈독만으로도 외국인들이 공부하는 데 엄청난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단어가 두세 가지로 발음되는 것은 보통이고 어떤 단어는 일곱 개의 각각 다른 음으로 말할 수 있다. 또 같은 발음이지만 전혀 뜻이 다른 단어들도 부지기수다. 외국인들이 일본인에게 그런 단어를 어떻게 분간하느냐고 물으면 그들도 암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처럼 그들만이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일본어의 특성(?) 때문에 그들은 역사적 지명에서도 발음은 그대로 두면서도 단어를 제멋대로 바꿔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문 화 유적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왜곡돼 있는데, 그들이 바꿔친 단어조차도 원래 말과는 사뭇 다른, 엉뚱하고도 저속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아래 표는 그런 예들이다.

즉 한국신사는 발음이 같은 신국신사(매운 나라 신사)로, 신라신사 역시 같은 발음을 이용해 무명나무 신사로 둔갑시켰는가 하면, 고려강은 사나운 짐승 강으로 비하됐고, 한 국 동자들의 춤(무용)은 엉뚱하게도 당나라 동자들의 춤으로 국적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고구려 족보 지켜오는 후손들

나는 씁쓸한 마음을 고려천 냇물에 흘려보내고 고려신사로 발길을 돌렸다. 고구려 출신의 약광왕(若光王)을 제신으로 모신 이 신사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한이 절절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몇년 전 이 신사에서 궁사(宮司: 우리나라 절의 주지와 같은 직책)를 맡고 있는 고마 스미오(高麗澄雄)가 학계의 초청으로 내한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제28대 보장왕(寶藏王)의 후손으로 고려향의 개척자인 약광의 59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을 잊지 말라는 결의를 다지고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 즉 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 아직까지 고려인들의 족보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처럼 서기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이역 만리 일본 땅에서, 그것도 1천3백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서까지 고구려 후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고구려 조상을 섬기는 신사를 지키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민족인 것이다.

고려신사 입구에는 이 신사의 내력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씌어 있는데 그대로 옮겨본다.

『고려신사는 고구려국의 왕족인 고려왕 약광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중국대륙의 송화강 유역에 살았던 기마민족으로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중국대륙 동북 부로부터 조선반도의 북부를 영유하고 약 3백년간 군림했다. 그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 이때의 난을 피해 고구려의 귀족과 승려들이 다 수 일본으로 건너와 주로 동국(東國)에 살았으나, 레이키(靈龜) 2년(716년)에 그중의 1천7백99명이 무사시국(武藏國)에 옮겨져 새롭게 고려군이 설치되었다.

고려 약광왕은 고려군의 군사(郡司)로 임명되어 무사시노(武藏野) 개발에 힘썼으며, 다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여기에 묻혔다. 군민(郡民)은 그의 유덕을 기리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명신(高麗明神)이라고 하며 숭배해 왔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왕 약광의 직계자손에 의해 신사가 지켜져 왔으며 지금도 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고구려의 지속 연수를 3백년으로 잘못 설명한 것을 빼고는 고려 약광의 존재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더욱이 이 신사의 제신 인 약광왕이 출세개운(出世開運)의 신이라는 점도 남다른 대목이다. 역시 기록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답게 신사 안에는 「출세명신의 신」에 대한 안내판이 또 세워 져 있었다.

『이 신사는 멀리 나라시대 겐쇼오(元正)천황 때 고려군을 통치했던 고려왕 약광을 기리는 신사다. 따라서 그 창건은 1천2백여년 전의 옛 관동지방에 속한 유서깊은 신사다. 이 신사는 기원(祈願)을 잘 들어주는 영험한 신사로 알려져 고려군의 총진수(總鎭守)로서 군민에게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는 미즈노(水野), 하마구치(浜口) 등 5명이 이곳에 참배한 후 계속해서 총리대신(總理大臣) 또는 국무대신에 취임하는 등 출세를 함으로써 출세 관련 신으로 신봉(信奉)됐다. 이 신사는 정계, 재계를 시작 으로 해 각계 각층의 숭배와 공경을 받아 전국적으로 숭경자(崇敬者)들이 널리 퍼져 있다』

현재도 일본의 정·재계를 주름잡는 거물들이 그들의 출세를 빌기 위해 고구려 신을 찾는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바로 약광왕이 살아 있었을 당시에도 일본의 실력자들 은 약광왕을 찾아 한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일본에서 비중 있는 인사들이 참배하는 고려신사는 그 규모나 대우 면에서 일본 곳곳에서 허름하게 버려져 있는 한국계 신사와는 여러 모로 대비된다. 특히 도 쿄 인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오이소(大磯) 해안에 세워진 고려신사는 이곳의 고려신사와 이름은 똑같지만 처지는 너무나 다르다.

오이소의 고려신사는 오이소 해안으로 상륙한 고구려인들 대부분이 사이타마현으로 이동할 때, 일부가 그대로 오이소에 머물면서 세운 신사다. 그들은 오이소 해안 동쪽에 높이 솟은 산을 고려산으로 명명하고 고려산 언저리에 고려신사(高麗神社)를 지어놓고 그들이 숭경하는 조상신을 모셨다. 그러다 1945년 8·15 광복을 전후해 고래신사(高來神社)로 개명당하고 말았는데, 당시 이 지방 유지들의 강한 불만과 반발 속에서 이같은 짓이 저질러졌던 것이다.


사자의 울음소리

한편 고려신사의 입구 참도(參道)에는 히다카시(日高市) 지정 민속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사자무상(獅子舞像)이 세워져 있다. 어느 시대에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지만 사자상은 고구려 씨족들의 기원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매년 10월19일 대제일(大祭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암수 사자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기원하 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신사 안내책자에는 『애조 띤 울부짖음, 소박한 사자의 춤은 고대의 로망스를 불러일으킨다』고 하고 또 『산속에서 울부짖는 사자의 소리는 고려의 소리를 생각나게 울려퍼 진다』라는 노랫가락도 전해 내려온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사자를 구슬프게 노래한 것은 고구려인들의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고려신사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그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가 주택(高麗家住宅)을 찾았다. 고려가(高麗家) 역시 일본정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에도시 대(江戶時代) 초기의 중요한 민가(民家)로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건축물은 16세기 말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평 35.7평에 동향(東向)으로 지어진 고려가는 입모옥(入母屋) 방식의 외부구조를 하고 있다. 즉 지붕꼭대기는 한자의 입(入)자처럼 서로 맞붙게 하고 처마 쪽은 사각으로 경사지게 하여 하늘에서 보면 마치 어머니 모(母)자처럼 보이게 띠로 이은 집이다.

다섯 개의 방 중 바깥쪽 방이 제일 넓어 다다미 21개가 깔려 있고, 나머지 방은 이 방을 중심으로 안쪽의 벽으로 배치돼 있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큰 방에는 우물 정(井)자로 짠 발이 쳐져 있다.

부엌은 우리의 시골집 아궁이와 꼭 같았는데 전기 장치로 장작에 불이 타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일본의 여느 가옥구조와는 다른 고려가는 아마도 고구려의 전통가 옥 구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가를 나선 후 고려산 동쪽 자락에 고구려 승려들이 세운 성천원승락사(聖天院勝樂寺)와 경내에 모셔진 약광왕의 묘지인 고려왕묘를 둘러보고서 다음 일정을 위해 고려 역으로 갔다. 대체로 도쿄에서 고려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고려천역에 내려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다른 역사인 고려역으로 찾아가게 마련이다.

신기하게도 고려역전에도 고려신사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한국의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마을 어귀에 세워 마을 수호신으로 삼아왔던 천하대장 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모습 그대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장승을 그대로 옮겨와 「장군표(將軍標)」라고 부른다. 장승 옆에 세워놓은 장군표의 안 내문은 친절하게 한국장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에는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장군표가 있다. 높이 4m 정도의 소나무 자연목에 안광(眼光)이 날카롭고 무서운 형상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문자를 새겨넣어 재난과 위험을 방제(防除)하고 또 악마를 퇴치하며 가내 안전을 기원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네 토속신앙의 상징인 장승이 일본에서 그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또 세계 각국의 관람객이 오가는 고려역사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고려향 에 살고 있는 고구려 후예들의 정신과 혼이 이 땅에 살아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장군」이라는 명칭도 일본 것이 아닌, 우리 고유의 장승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일본에서 찾은 한국 동자무(童子舞)

일본은 한국에서 도래한 문화 중 눈에 보이는 것은 어떻게든 왜곡시키려 한다는 점은 누누이 목격해온 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계 무형문화 중 요행히 살아남아 그 옛날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도 더러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오카야마현(岡山縣) 오쿠군(邑久郡) 우시마도정(牛窓町)의 전통춤인 동자무(童子舞)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잠깐 밝혔다시피 이 동자무의 원이름인 가라 코오도리(韓子踊)는 일본어로 똑같은 발음이 나는 당자용(唐子踊)으로 개명돼 마치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한 전통춤인 것처럼 포장돼 있다. 그러나 이름은 바꿀 수 있어도 그 내용까지는 일본인들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수년 전 사업차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알아낸 일이다. 호텔에서 무심코 TV를 켰는데 마침 NHK-TV에서 「도래(渡來)의 예능」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에 관심있 게 봤더니 뜻밖에도 우리 한국의 동자무였던 것이다. 춤을 추고 있던 동자들의 무복(舞服)이 우리네 소년 소녀들이 입은 옷과 너무나 똑같아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화면을 계속 지켜보았다. 폭이 넉넉한 바지에 천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고 발목은 우리 한복의 대님과 똑같은 끈으로 묶었으며 저고리와 머리에 쓴 무모도 우리것 그대로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동자들이 춤을 추며 소리지르는 춤말이 「오슈운데」 「하슈운데」여서 혹시 우리말이 아닌가 가슴을 설레는데, 해설자 역시 『이 말은 오셨는데, 하셨는 데라는 한국말에서 유래된 것 같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는 동자무가 놀랍게도 일본에서는 비록 이름은 바뀌었을지언정 소프트웨어는 계승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부드러운 선율과 흥겨운 가락에 맞 춰 춤을 추고 있는 이국 동자들 대신 우리의 꼬마들이 신명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한국에서 그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무엇을 빼앗겨버린 듯한 마음에 그날 밤을 꼬박 설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인들의 일본 도항은 주로 북륙지방(北陸地方)과 시마네현(島根縣)의 이즈모(出雲)와 오타(大田)지방을 통해 이루어졌다. 니가타(新潟)와 토야마(富山), 이시카와(石川), 후쿠이(福井) 등 동해와 인접해 있는 북륙지방은 지금은 일본 열도의 뒤쪽이 돼버렸지만 고대 한반도로부터 문화이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는 일본의 앞쪽, 즉 현 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이 지방 해변에는 한반도에서 대한해협의 조류를 타고 흘러온 플라스틱 음료수병이 수북이 쌓여 있을 만큼 신라와 직결되는 매우 안전했던 해로(海路)였다.


대마도는 신라땅

뿐만 아니라 대마도에도 신라인들이 남긴 유적과 지명이 곳곳에 나타난다. 대마도 최남단에는 서라벌(徐羅伐)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현존 지명인 게치(鷄知) 역시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 지방 향토사학자는 게치를 『조국 계림국(鷄林國)을 잊지 말자는 뜻의 지명』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게치에 사는 현지주민에게 지명의 유래를 물어보니 『닭이 울어 새 벽임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내게 반문한다.

이 두 사람의 대답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닭(鷄)이다. 그리고 닭에서 나오는 계란은 신라의 개국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의 난생신화(卵生神話)에 등장할 뿐만 아 니라 가야 김수로왕의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에도 등장하는 상징적인 물증이다. 신라의 후예들은 이같은 신화 속의 물증을 신성시하며 1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근세 에까지도 이를 지키려 애썼던 것이다.

그 흔적이 니가타현의 섬 사도시마(佐賀島)에도 남아 있다고 해,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 니가타항으로 출발했다.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에 세운 도시라 하여 니가타라고 불 리는 이 항구도시는 거친 대한해협의 풍랑을 막기 위해 4∼5km의 방파제를 쌓아 항구를 보호하고 있었다.

니가타항에서 사도시마까지는 배로 약 2시간 거리. 연락선이 니가타항의 긴 방파제를 빠져나오는 데만 30여분 걸렸다. 방파제를 탈출한 배가 좌현 쪽으로 방향을 90° 바꾸 니 한반도의 등 부위인 강릉을 향해 직진하는 방향이었다.

선실에는 사도시마에 대한 개략적인 안내판을 부착해 놓고 있었다. 이 섬은 면적이 8백75㎢ 로 일본의 4개 본섬을 제외한 7천여 개의 섬 중에서 가장 크다고 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이 섬의 생긴 모습이 흡사 한반도를 빼어닮은 것이 내게는 더 기이했다.

배가 차츰 섬으로 다가가자 멀리 사도시마의 묘견봉(妙見峯: 해발 1천12m)과 금강산(金剛山: 해발 9백62m)이 흰 눈으로 뒤덮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치 한반도의 금강산과 설악산에 흰 눈이 덮인 것과 흡사했다. 가야의 공주이자 일본 최초의 왕인 묘견의 이름을 딴 묘견봉이 이곳에 있다는 것에도 놀랐으나, 금강산은 또 왜 이곳에 있는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항구에 내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사도시마 최남단 오기마치(小木町)에 내리니 제법 큰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어선이 빽빽이 정박돼 있는 모습을 보니 사도시마 일대는 분 명 황금어장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다시 택시를 타고 비탈진 산길을 10여분 달리니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 시라기촌(白木村)이 나타났다.


섬에서 만난 신라의 후예

마을 입구에는 「여기가 시라기입니다(ここが 白木です)」라는 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의 도로 건너편 바닷가에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흡사 사자머리 모양을 하고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바위가 바로 백목신자암(白木神子岩)이었다. 신라의 후예들이 이 바위 밑에서 수평선 건너편 한반도를 향해 향수를 달랬으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백목신자암 바로 뒤편에는 새로 지은 조그만 신사가 아무런 표식도 없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몇년 전에 새로 지은 「시라기신사(白木神社)」라 했다. 배전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고 벽면에 조그마한 신전(神前)을 만들어 놓고 어떤 신을 봉안하고 있었다. 좀 떨어져 있긴 했으나 마을 뒷산 숲속에도 기와를 올린 시라기신사 가 있는데, 바닷가에 또다시 지어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항수신(港守神)을 봉안하고 있으리라.

마을 앞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한가로이 뛰어놀고 있는데 휠체어를 탄 노인이 햇빛을 쬐기 위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가토(加藤力太郞)라는 이 노인은 시라기마을의 토박이 로 태평양전쟁 중에 하반신 불구가 됐다고 한다. 그에게 시라기 마을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라기(白木)는 모두 세 곳의 마을로 나뉘어 있는데 제일 큰 동네가 시라기에서 남쪽으로 1km쯤 떨어진 사와사키(澤崎)로 24가구가 살고 있고, 중앙에 위치한 이곳 시라기(白木)에는 현재 8가구가 살고 있으며, 북쪽 해안으로 1km쯤 떨어진 미쓰야(三ツ屋)에 사는 3가구를 합해 총 35가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 마을을 통칭해 시라기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마을의 가구수는 옛날부터 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남에게만 상속해주는 일자상속(一子相續)의 풍습을 지켜오고 있어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타지(他地)로 나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 사는 남자들 이름에 장남이라는 뜻의 「타로(太郞)」가 많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법 규제에 의해 사라져버린 관습이 이곳 사도시마에서는 풍습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여실히 나타내주는 또 다른 증거물이 규모가 가장 작은 미쓰야 마을이다. 미쓰야는 가옥이 셋이라는 뜻인데 옛날부터 이 마을은 세 가구밖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 을 이름을 「역사적으로」 그렇게 지은 것이라 한다.

중앙의 시라기에서 남쪽 해안으로 가면 터널이 있고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 사와사키 마을. 동네 아이들이 할머니 등에 업히거나 손을 잡고 마을 어귀의 그네 터에서 놀고 있는 모습은 우리 한국의 어촌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집의 마당에 들어서니 할아버지가 가사를 돕고 있었고 할머니도 등에 지게를 지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쓴 채 무엇인가를 나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여기가 일본이라는 것을 잊고 한국땅 어느 어촌에 여행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을의 포근한 정경에 넋을 잃고 한참을 둘러보는데 할머니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나 는 그 노파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는데, 주로 시라기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시라기 사람들은 예부터 성격이 강인하고 독립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매우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가장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뒷산에 있는 시라기신사 를 참배한 후 다시 집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는 가족과 함께 집안에 모신 불단에 엎드려 절을 하며 예를 올린 다음 비로소 아침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신사(神社)나 신불(神佛), 그리고 조상에 대한 그들의 신앙심은 이처럼 두텁다.

풍습 또한 우리와 유사한 것이 무척 많다. 우물가에 나란히 앉아 방망이질로 빨래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나, 신사에 참배하러 갈 때 목욕재계하고 흰 옷에 제복(祭服)을 갖추는 것이나, 제물 그릇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 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이다.

또 이 마을 사람들은 과거 닭과 달걀을 매우 신성시했는데 요즈음은 그런 풍속이 거의 사라졌다는 노인의 얘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달걀 에서 나왔다 하여 달걀을 신성시했던 것이 신라인들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박혁거세 신사를 찾아

그러나 이같은 정신은 박혁거세를 제신으로 봉안하고 있는 신사의 숫자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일본열도 전역에 산재한 30여만 개의 크고 작은 신사 중에서 단일신을 봉안하 고 있는 신사로는 신라신사(新羅神社), 즉 시라기신사가 단연 최고다.

근세까지만 해도 2천7백여개나 있던 신라신사가 50∼60년 사이에 7백여개가 합사(合社)되거나 없어져 버렸고 지금은 2천여개가 남아 있다. 이 숫자 역시 적은 것은 아니다. 박혁거세나 신라의 훌륭한 조상을 제사지내는 신라신사가 아직도 2천여개나 남아 있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신앙심과 투철한 민족혼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 다.

또 일본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은 그들의 성씨(姓氏)를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도 유달리 강했던 것 같다. 실제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보면 제45대 쇼오무(聖武) 왕 때인 서기 773년, 일본 무사시노국(武藏野國) 사이타마현(埼玉縣)에 살던 신라인 53명이 성을 김씨(金氏)로 해줄 것을 청원해 허락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곳에 김씨가 많이 살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신라유민들은 니가타현 외에도 교토와 오사카 그리고 멀리 규슈에까지도 그들의 세력을 뻗쳤는데 그 유적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교토(京都) 인근의 오쓰시(大津市)에 위치한 신라선신당은 8·15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어느 지도에서나 신라사(新羅社)로 표시돼 있었는데 현재는 미이데라(三井寺)로 바뀌어 있었다.

최근에 답사해 보니 신라사가 소재한 비예산 자락 초입에 있는 미이데라는 규모가 매우 크고 참배객들이 무척 많았지만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신라선신당은 찾아오는 사람 도 드물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거에 비와코(琵琶湖) 주변 일대에 절이라고는 신라사(新羅社)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30여 개의 절이 새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신라사(新羅社)마저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으로 이름이 바뀌고 규모가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신라선신당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미이데라의 수호신(守護神)이라고 소개했다.


버려진 한국신들

혼슈(本州)의 주고쿠지방(中國地方)인 시마네현(島根縣)에 있는 한신신라신사(韓神新羅神社) 역시 초라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즈모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오타시 오우라(大浦)항 포구에 있는 이 신사를 찾으려니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수소문해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도대체 한신신라신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 하나를 보기 위해 도쿄에서 이즈모까지 비행기로 날아온 마당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의 노력에 하늘의 도우심인지, 신라 선인들의 안내 덕분인지 한적한 시골 국도에서 바닷가 쪽으로 1km쯤 들어간 조그마한 포구에서 나는 정말 우연히도 찾아낸 것 이다. 포구 입구에 누추하기 그지없는 기와집 한 채와 대리석 도리이(島居)가 쓸쓸히 서 있기에 혹시나 싶어 차를 세웠더니 바로 그 신라신사였던 것이다.

현해탄 건너 옛 신라땅이 수평선 너머로 보일 듯한 곳에 서 있는 신라신사는 찾는 이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 버려진 신사나 다름없었다. 제신의 위패를 모시는 본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주위는 잡초만 무성하였는데, 최근에 세운 듯한 조그마한 후나다마신사(船玉神社)가 신라신사 경내 뒤편에 웅크리고 서 있었다.

이 신라신사의 원래 이름은 가라카미시라기신사(韓神新羅神社). 한국의 신을 모시는 신라신사라는 뜻으로 앞에다 「가라카미(韓神)」를 붙였던 것인데 누가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도리이 위의 대리석 편액에 새겨 놓은 「韓神」이라는 두 글자를 망치 같은 쇠붙이로 두드려 마멸시켜 버렸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흔적에는 분명히 글자 형 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라신사라고만 해도 그 뜻이 분명할진대 앞에다 「한국의 신」이라는 뜻의 두 글자를 더해 놓았던 철두철미한 한반도 도래인들의 혼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신사 바로 옆 오우라 마을은 옛 신라인의 후손들이 20가구 정도 모여 사는 평화스러운 어촌이었다. 모두들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쁜 모습이었고 길가에는 어린이가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가을 햇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오우라 마을을 뒤로 하고 왼쪽으로 펼쳐진 현해탄을 바라보니 수평선 너머에 한반도가 다가오는 듯했다.

한편 규슈 가고시마현 다루미즈시(垂水市)에는 박혁거세왕을 제신으로 모시는 거세신사(居世神社)가 있다. 이 거세신사는 가고시마시와 다루미즈시 경계에 위치한 거세마 을(居世村) 뒤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는데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해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서쪽에 있는 가고시마의 사쿠라지마(櫻島)에서 편서풍을 타고 끊임없이 날아오는 화산회(火山灰)가 2∼3cm 쌓여 흡사 신사에 흰 눈(雪)이 내린 것처럼 화산먼지 투성이였다. 참배는커녕 걸어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나마 신사 입구 국도변에 서 있는 자그마한 도리이(鳥居) 옆 잡초 속에 흰 페인트칠을 한 각목(角木)에 검 은 글씨로 거세신사(居世神社)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이곳이 신라의 신사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표였다.


사쿠라의 진정한 의미

한편 사쿠라지마는 옛날 화산활동이 없었을 때 벚나무인 사쿠라나무(櫻木)가 해안을 따라 숲을 이뤄 봄이면 사쿠라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섬이었으나, 근세에 화산이 폭발 하면서 용암이 섬에 있는 사쿠라나무와 모든 식물을 덮어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지금은 휴화산으로 수천 가구가 들어가 살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엄청난 회색먼지를 내뿜으며 폭발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곳 주민들은 태연하기만 하다.

그런데 사쿠라지마는 사쿠라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흔히 진짜가 아닌 가짜나, 줏대없 이 흔들리는 사람 또는 모사꾼을 일컬어 「사쿠라」라고 한다. 이는 지명은 분명 사쿠라(櫻島)인데 실제로 보면 사쿠라 나무도 없고 사쿠라꽃도 피지 않는 섬을 빗댄 것이다.

나는 그간 사업일로 무척 바쁜 몸이었지만 틈나는 대로 일본에 산재한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적과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국 일본이 승전국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 된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자는 데 가장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의 예측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근면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매사에 철두철미한 일본인들의 정신적 원류는 유교와 불교의 정신에 바탕을 둔 조상숭배 정신 과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확실히 느꼈다.

그들의 훌륭한 조상들은 우리의 옛 조상과 같은 뿌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 핏속에도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흐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피를 이어받은 우 리가 더욱 노력한다면 머지 않은 날 일본을 능가하는 결과를 일궈낼 수 있음도 당연하다.

그러나 작금의 어지러운 정치행태와 무질서한 경제질서 속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건전한 가치관마저 혼탁해져 버린 것같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게다가 21세기 세계 경제의 주무대를 꿈꾸고 있는 아시아 제국의 기지개는 우리에게 심상찮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정신을 가다듬고 심기일전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 후손들이 한반도에서 그 결실을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정리:안영배<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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