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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는 몰라도 王仁은 안다”
 관리자  08-22 | VIEW : 1,978
日本에서 되찾은 잃어버린 백제문화

“총리는 몰라도 王仁은 안다”

【 아남그룹 명예회장 金向洙의 한일 문화유적 탐방기(중) 】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세계 최고(最古)여서 「세계보물 1호」로 지정된 법륭사, 역시 세계 최대(最大)를 자랑하는 동대사의 비로자나불상, 그리고 최고(最高)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갖춘 백제관음상… 이들 모두 한반도 백제인들의 작품이었다. 한국에서 사라진 백제문화를 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일본 나라현으로 가보라.》

    80여 평생을 기업에만 몸담아온 내가 일본열도에 흐르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인 1930년경부터였다.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주경야독하고 있던 어느날. 모처럼 휴일을 틈타 나라(奈良)의 어느 사찰에 들렀는데, 60대의 일본 노인이 나를 보더니 조선에서 온 소년임을 금방 알아차리고 「나라」라는 지명의 유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엉뚱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보면서 그 노인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망하자(서기 660년) 귀족을 포함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잃어버린 나라를 기필코 되찾자」는 각오로 부르게 된 것이 바로 「나라」라는 지명의 유래다. 오늘날 한자로 「奈良」라고 쓰는 것은 취음을 위한 차자(借字)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라 지방에는 백제인들이 남겨놓은 훌륭한 문화 유물이 곳곳에 산재한다』

나는 그후 그 노인의 얘기를 가끔씩 되새기며 틈이 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이루어놓은 찬란한 문화유적 답사를 즐겼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정부가 수립된 후 제4대 국회에 진출하여 의정 활동을 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나는 줄곧 기업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우수한 문화를 이어받아 경제대국이 된 일본과 우리나라가 동반자적 경쟁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두 나라의 올바른 역사 인식과 상호 이해를 통해 양국의 우호 증진에도 기여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여 지난 95년에는 일본 열도에 흩어져 있는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적 탐사자료들을 엮어 『일본은 한국이더라』(문학수첩사)라는 책자로 출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나는 「신동아」 4월호에서 가야 김수로왕 후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초대왕인 진무(神武)천황이 되었다는 아라타 에이세이(荒田英誠)씨 등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다루었고 규슈 일대에 산재한 7왕자 유적과 묘견공주 유적을 통해서 가야가 일본 건국의 주체였음을 고찰해 보았다.

특히 이와 관련해 일본의 권위 있는 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의 최근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동경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동 대학의 오리엔트박물관 관장으로서 수십년간 이 분야 연구에만 몸바쳐온 그는 동아시아사학회장(東亞細亞史學會長)의 신분으로 지난 95년 10월26일 동아일보사 초청으로 내한, 「한일관계의 고대 사」란 주제로 강연회를 가진 바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본 기원은 고대 한민족」이었음을 재차 강조, 일본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뒤엎는 발언을 함으로써 일본 사학 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가야신화 베낀 일본 건국신화

그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전하는 일본 건국의 주인공인 니니기노미코토의 강림과 『삼국유사』가 전하는 수로왕의 강림을 비교해본 결과 강림 방법이나 장소(지 명), 도구가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니니기노미코토가 다카치호(高千穗)의 쿠지후루타케(龜旨峯)에 강림했을 때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라쿠니(駕洛國)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조칙(詔勅)을 남겼다는 사실도 니니기가 가야 출신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反論)이나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일본 학자는 아무도 없다.

에가미교수는 또 니니기노미코토의 증손(曾孫)인 진무(神武)가 규슈 휴가(日向)에서 동정(東征)에 나서 세토내해(瀨戶內海)를 거슬러 올라가 일본열도의 심장부인 오사카( 大阪), 교토(京都), 나라(奈良)지방인 긴키(近畿) 평야를 정벌하고 일본 천황가의 제1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신빙성 있는 고고학적(考古學的) 물증으로 입증하였다. 일본 사학계가 에가미교수의 주장에 대해 함구불언(緘口不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고고학적 물증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야가 일본 건국의 주체였다면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일본문화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삼국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백제 인들의 숨결은 1천5백여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퇴색하지 않고 오늘날 야마토(大和) 평원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백제가 일본과 국교를 맺은 것이 4세기 후엽인데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서기 404년에 아직기는 오오진(應神) 천황이 태자로 있을 당시 그의 스승이 되었으며, 405년에는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이 『천자문』 한 권과 『논어』 열 권을 가지고 와 오오진 천황의 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결국 백제가 낳은 아직기와 왕인박사는 일본 황실의 스승 역할을 했고 찬란한 아스카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셈이다.


영원한 문화민족 구다라(百濟)

1985년 12월29일 나라현 아스카촌(明日香村)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목간(木簡)에 백제인 아직기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담겨져 있음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책인 『고사기』에는 왕인의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와니(ワニ)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의 훌륭한 면면이 잘 소개돼 있다. 도쿄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는 왕인박사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어 관람객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나는 백제유적 탐사 첫번째로 왕인박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사카와 교토의 중간 지점인 히라가타(枚方)에는 왕인공원과 왕인묘가 있다. 이곳은 1731년 묘소가 고 증돼 묘역이 조성되었으며 1938년에는 오사카부(大阪府) 사적으로 지정돼 정결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입구 안내문에는 정중한 경고문이 부착돼 있었다. 「강아지나 개를 데리고 이 묘역에 들어오지 말 것이며,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거나 고성방가도 삼갈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든 일본인들에게 문자와 학문을 깨우쳐준 백제인 스승을 존경 하는 뜻이 담겨 있는 안내문이었다.

또 묘 옆에는 흰색 칠을 한 4각 각목에 「잘 오섰어요 백제 왕인박사 묘에」라고 철자법은 다소 틀렸지만 또렷하게 한글로 써놓은 표지판도 세워져 있었다. 1천6백여년 전 백 제에서 건너간 학자가 일본인의 영원한 스승으로 그들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나는 이번 탐사에서 왕인을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우연히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왕인신사」가 있다는 기록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돼 있는 나라현 덴리시(天理市)의 이소토카미신궁(石上神宮)을 가려고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골목 안쪽에 아담한 도리이(鳥居)가 눈에 들어와 차를 세우게 하고 신사 곁으로 다가갔다. 나라에 있는 신사라면 십중팔구는 백제와 연관 있는 신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신사 정원에 세워 놓은 안내판을 보니 와니시타신사(和爾下神社)였다. 틀림없는 왕인(王仁)의 신사였다. 그들은 『고사기』에 왕인을 와니(和爾), 그리고 『일본서기』에 와니(ワニ)라고 표기해 놓고 있지 않은가. 내용을 살펴보니 고대 야마토(大和) 정권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와니씨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에 이 신사를 건립했다고 적혀 있었 다. 그렇다면 이곳이 왕인박사의 거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신사가 있는 덴리시도 나라현에 속한 도시이며, 나라현은 야마토국의 수도이자 중심지로서 왕인이 활약 했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신사 배전 앞뜰에 두 마리 소(牛)가 마주 보고 있는 석상이 안치돼 있었다. 소는 예로부터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상징 동물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 하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그의 남동생 스사노(須佐之男)의 신화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牛頭峰)」의 소머리봉(牛頭峰)도 한반도를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와니시타신사를 나와 인근에 있는 이소노카미신궁을 찾았으나 백제왕이 하사했다는 칠지도는 보지 못했다. 이유는 궁내청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칠지도는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신비의 칼이다. 명문(銘文)에 새겨진 「供(공)」자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이 供자가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 학자들은 백제왕이 일본천황에게 「헌상했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뜻 있는 일부 일본학자들간에도 이에 대한 논쟁이 가끔 벌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 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칠지도를 보고 싶다는 말에 난색을 표하는 사무소 직원을 뒤로 하고 히라 가타의 백제왕신사를 찾았다.

왕인묘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백제왕신사는 백제사적(百濟寺跡) 뒤편에 세워져 있다. 1970년대에 이 지방 유지들이 찬란했던 옛 조국 백제를 그리워하여 성금을 모아 이처럼 훌륭한 신사를 건립한 것이다. 한편 백제사적은 드문드문 축대만 보여 이곳이 절터였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듯했으나 현재 나라현의 가스카와카미야신사(春日若宮神社)의 경내에 세워져 있는 백제사와 비슷하지 않았나 추측됐다.

나라의 백제사는 원래는 9중탑이었으나 지진으로 소실돼버려 다시 지으면서 현재의 3중탑으로 축소 재건했다고 기록돼 있었는데, 히라가타의 백제사는 탑마저 사라진 채 축대만 남아 있고 아기자기하게 심어놓은 소나무들만이 나그네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줄 뿐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 발길을 다시 나라의 아스카로 돌렸다.


아스카(明日香)의 유래

일본 최초의 수도 나라, 이곳에 꽃핀 찬란한 아스카문화는 옛 백제인들의 한과 혼을 곳곳에 간직한 채 천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밤하늘의 별처럼 아스카에서 찬연히 빛나 고 있다.

전란(戰亂)을 피해 이곳에 도래한 백제인들이 「아주 편안한 안식처」라고 하여 이름붙인 「安宿(안숙)」이 오늘의 아스카(明日香)가 되었다. 또 그들이 바다를 건너 새처럼 날아와 이곳에 뿌리내린 문화라고 하여 이름붙은 아스카문화(飛鳥文化)는 일본 문화 그 자체이자 전부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한반도에서 건너간 불교문화가 이곳에서 화려하게 개화했던 것이다.

아스카촌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 아마카시노카에서 고도(古都) 아스카를 바라보면 그 문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인들이 건립한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사(飛鳥寺)와 아스 카대불(飛鳥大佛), 신비에 싸인 거북돌 가메이시(龜石), 경주 포석정과 흡사한 주선석(酒船石) 사카부네이시, 그리고 피장자가 백제계의 소가노마코(蘇我馬子)라고 알려진 석무대(石舞台) 고분이 있는가 하면 다카마쓰(高松)총 고분, 문무(文武)천황릉, 덴무(天武)와 지토(持統)천황의 합장릉도 눈에 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해는 서기 538년, 백제 제26대 성명왕 때다. 불타의 가르침과 불상 등이 일본에 전파됐는데 일본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숭불파인 소가노마코와 받아들이지 말자는 배불파인 모모노베노모리야(物部守屋)가 거의 반세기에 걸쳐 격렬하게 싸운 끝에 결국 587년 소가노마코가 승리함으로써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을 피우 게 되었다. 아스카사(혹은 법흥사)는 이때 지어진 일본 최초의 사찰로 불교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원점이자 요람이기도 하다.

아스카사는 소가노마코의 발원으로 건립되기 시작, 9년 만인 596년에 준공되었다. 이 절을 건립하기 위해 백제에서 혜총을 비롯 여러 명의 승려와 사찰 전문 기술자가 파견 되었으며 고구려의 설계기술이 도입되기도 했다. 이 절의 완성으로 아스카에 수도가 세워지면서 아스카문화가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사는 1천4백여년이 흘러오는 동안 당초의 건물은 소실되고 전원과 민가(民家)로 변해버렸다. 그러다 발굴조사단의 노력으로 사찰규모가 탑을 중심으로 동, 서 , 북쪽에 3개의 금당이 배치된 일본 최고의 가람이었으며,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리고 그 외측에는 강당이 있는 장대한 사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아스카사에 안치된 본존 아스카대불은 일본 최초의 석가여래상으로 사찰이 완성된 지 10여년 후인 609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스이코(推古)천황이 성덕태자(聖德太子), 소가노마코 대신들과 함께 서약을 맺어 백제 도래인인 시바타토(司馬達等)의 손자 구라즈쿠리(鞍作)라는 불사(佛師)에게 명하여 만든 일본 최고의 불상이다. 당초에는 금동 불상으로 양측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린 석가삼존이었는데 12세기 후반 대화재로 전신에 상처를 입었고 그후 보수를 받아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이처럼 일본 불교문화의 원점이 된 아스카사는 옛 백제국에 대해 후의와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 위해 한국의 수덕사와 교류를 갖고 있다. 현재 절의 규모는 창건 당시에 비해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보잘것없지만 처음 백제의 혜총법사와 고구려 혜자법사가 주도하여 이 절을 만들었다는 데 우리 민족의 자부와 긍지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혜총과 혜자법사는 그후 수년 동안 아스카사에 머물면서 성덕태자를 불교에 귀의케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반도 문화의 보고(寶庫)

아스카촌은 그야말로 한반도 문화의 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백제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아스카촌 어느 곳이라도 발길이 닿는 곳이면 으레 한반도와 연관이 있는 문화유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스카촌 주변도로를 걷다 보면 백제계 실력자로서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소가노마코의 능묘로 추정되는 석무대(石舞台) 고분을 만날 수 있다. 거석 을 쌓아올린 엄청난 규모의 석실은 아스카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꼽힌다. 횡혈식 상원하방분인 이 고분은 돌 무게만도 2천3백여t에 달하는데 국립특별사적으로 관리하고 있을 만큼 중요시되고 있는 문화유적이다.

그 옛날에 이렇게나 거대한 바위를 어떻게 옮기고 또 축조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웅장한 규모의 석무대 고분은 발견 당시 부장품이 모두 도굴된 상태여서 피장자에 대한 정설은 없다. 다만 막강한 실력자가 아니면 이처럼 거대한 고분 축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소가노마코일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일 뿐이다.

또 마을입구 쪽 민가 뒤편에는 거북 혹은 개구리를 닮은 거대한 화강암석이 역시 장구한 세월 동안 아무 말 없이 한곳에 쪼그린 채 앉아 있다. 거북은 가야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인데 야마토(大和)를 평정하였던 인물이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초대 진무(神武)천황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지만 안내문에도 자세한 설명은 보 이지 않는다.

다만 사방의 경계를 알리는 표주(標柱)가 아닐까 추측된다고 적혀 있지만, 표주로 보기에는 바위가 지나치게 크고 또 생긴 모양이 거북을 닮은 것이 심상찮은 역사의 산물임 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곳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다.

『아득한 옛날 야마토국(大和國)이 호수였을 때 호수를 사이에 두고 다이마(當麻)와 가와라(川原)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다이마는 뱀을, 가와라는 메기를 앞세워 수년간 싸움을 해왔지만 결판이 안 나다가 결국은 메기가 패했다. 그래서 가와라는 살고 있는 쪽의 호수물을 모두 다이마 쪽으로 빼앗겨버렸다.

가와라의 호수물이 말라버리자 그곳에 살고 있던 수많은 거북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몇 년이 지난 후 거북을 불쌍히 여겼던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돌에다 거북 모양을 새겨 이곳에 놓았다. 지금은 이 거북돌이 서북쪽을 향하고 있지만 만약 반대쪽인 동남쪽으로 돌려 다시 다이마를 노려보게 하면 이 야마토분지는 대홍수가 나 늪지가 될 것이다』

이 전설에 나오는 상대방은 바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가리키는 방향이다. 한반도 도래인들이 조국을 그리워한 나머지 이런 전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스카의 또 다른 수수께끼는 주선석(酒船石) 사카부네이시다. 파인 홈이 경주 포석정을 닮은 이 주선석이 위치한 곳은 비조좌신사(飛鳥坐神社) 뒤편 대나무 숲속이다. 현지 인들에게 주선석의 유래를 아느냐고 물으면 『이 바위 위에서 술을 빚었거나 기름을 짰을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약을 만들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저런 추측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래도 그 거대한 바위가 생활용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됐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파인 홈의 모양으로 봐 무언가 의 미있게 사용되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저 멀리 미미나시야마(耳成山)에 해가 기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그 옛날의 아스카를 그려 본다. 아스카촌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무언가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우리의 저녁 짓던 마을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히노쿠마(檜猥) 언덕에 있는 다카마쓰총(高松塚)을 찾았다. 다카마쓰총은 아스카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70년대 초 세계적인 가전사(家電社) 마쓰시타(松下) 그룹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辛之助)옹과 컬러 TV 합작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가 이 고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옹은 당시 「아스카문화 고적보존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다카마쓰 고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지만 20여년 전 발견 당시만 해도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고분 봉토 위에 서 있어 고송총(高松塚)이라 이름붙여졌다.

내가 다카마쓰 고분을 처음 답사했을 당시에는 노송(老松)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80년대 후반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대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어 「다케시타(竹下) 고분(?)」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만큼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1972년 3월21일 가시하라(彊原) 고고학 연구소가 이 고분을 발굴했을 때 석실안에서 채색 벽화가 나타나자 조사단은 즉시 발굴을 중단하고 다시 묻어버렸다. 출토된 벽화가 옛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당시 발굴을 총지휘했던 고고학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고분의 벽화는 조선의 벽화와 유사하며 아마도 귀인(貴人 )의 분묘 같다』고 말하고 발굴을 중단한 채 함구하고 있다가 몰래 발굴을 재개했었다.

석실벽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예부터 임금을 상징해온 사신도(四神圖)인 청룡(靑龍:동쪽벽), 백호(白虎:서쪽벽), 현무(玄武:북쪽벽)가 그려져 있었고 도굴이 돼버린 남쪽벽의 주작(朱雀)도는 훼손돼 없어졌다. 동서 양쪽벽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해와 달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에는 네 명씩의 여자군상(女子群像)과 남자군상(男子群像)이 각각 그려져 있다. 또 천장에는 북두칠성 등 20여개의 성좌도가 배치돼 있어 소우주를 상징하는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고분으로서 문화적으로나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일본 궁내청은 이 고분의 보존 유지를 위해 막대한 경비를 들여 물리화학적인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최첨단 시설을 석실 입구 아래쪽에 설치해 놓고 컴퓨터로 보존 상태를 자동 조절 및 감시하고 있으며, 철책을 만들어 일반인의 고분내 관람은 물론 접근마저 일체 금지하고 있다.

다만 고분 입구에 벽화관을 따로 지어 고분의 단면모형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내가 처음 가보았을 때는 철책을 설치해 놓지 않았을 때여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내부는 튼튼한 철문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서 볼 수 없었다. 고분 내부는 발굴 당시의 발굴팀과 궁내청의 극소수 관계자만 보았을 뿐, 학자들마저 내부관람을 불허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

이 고분의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고분 주변에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처럼 제29대 킨메이(飮明), 40대 덴무(天武), 41대 지토(持統), 42대 몬무(文武) 천황의 대형 능이 밀집해 있는 점으로 봐도 임금의 고분임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법륭사 금당벽화

야마토 평원의 중심지 나라시(奈良市)에 자리잡고 있는 법륭사(法隆寺), 즉 호류지는 고구려와 백제문화의 진수가 살아 숨쉬는 사찰이다. 부지만 해도 무려 22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사찰이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돼 「세계 보물 1호」로 지정돼 있다. 대부분의 사찰들이 소실된 후 다시 지었지만 이 법륭사만은 당초 건물이 현재까지 보존돼 내려오고 있어 그야말로 문화적 사찰이다.

이 법륭사에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약 50년 전인 1949년 1월 내부공사를 하던 중 전공(電工)의 조그만 실수로 12개 벽면에 그려진 세계적인 벽화가 모두 불타버린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후일 화가들이 그린 모사품을 벽면에 끼워 놓 았지만 담징의 벽화에 비할 바가 못되며 그나마도 관람객에게 보여주기를 꺼리고 있다.

또 법륭사에는 세계 불교미술의 최고봉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백제관음상」이 보존돼 있다. 현재 대보장전에 보관돼 있는데 높이 2백10cm의 우아한 자태와 단아한 아름다움은 불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백제관음상에 서면 우선 온몸으로 전해오는 짜릿한 감동에 전율을 일으킨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그 아름다움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표현할 수 없으며 최첨단 영상기자재로도 그 진실된 모습을 담을 수 없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것의 아름다움, 우리 문화의 훌륭함을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문화를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관계 당국자들이나 역사를 가르치는 학자들이 백제관음상을 못보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음을 권한다.

이처럼 일본의 나라에는 백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데 반해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부여나 공주는 백제문화의 폐허나 마찬가지다. 백제문화를 보려면 일본의 나라를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아픈 비극인 것이다.

일본에서 느껴지는 백제인의 숨결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백제에서 건너간 로벵(良辨)의 책임하에 건립된 「나라의 얼굴」 도다이지(東大寺) 역시 호류지(法隆寺)와 더불어 세계 문화재로 등록된 사찰이다. 도다이지에 안치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은 역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데 그 높이가 22m에 달한다. 쇼무(聖武) 천황 때인 749년에 완성된 이 불상은 주조에만 3년이나 소요되었는데 역시 백제 조불사(造佛師)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동대사의 장엄한 규모에 넋을 잃은 채 남대문을 나서노라면 방목하고 있는 사슴들이 다가와 먹을 것을 달라는 시늉을 하거나 졸졸 따라다닌다. 나라에 처음 입성(入城)한 장군이 백마를 타고 사슴을 가져왔다는 전설에 따라 나라의 상징 동물이 되었으며, 나라 공원내에 자리잡고 있는 동대사에 방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감추는 일본인들

동대사 옆 낮은 동산에 가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신국신사(辛國神社)가 자리잡고 있다. 동대사 관람객 십중팔구는 그냥 지나쳐버릴 정도로 내버려진 외진 곳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신사가 한국인들의 혼령을 모신 우리들의 신사다. 즉 나라에서 숨져간 한반도 도래인들의 혼령을 모신 곳이다. 신사 이름은 처음에는 「한국신사(韓國神社)」였지만 명치유신 때 韓자와 똑같이 「가라(から)」로 소리나는 辛(매울신)자를 써서 신국신사, 즉 가라쿠니신사로 개명해버린 것이다. 한국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꾸준히 진행해온 역사 인멸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라에는 동대사와 서대사에 이어 남대사로 속칭되는 백제대사가 있었으나 서기 1017년 지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기록에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 그 환상의 절터가 발견되었다는 외신보도가 있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백제대사는 일본의 7대 명찰이면서 동시에 일본에 르네상스를 일으킨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성덕태자는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법사에 의해 불교에 귀의하였고 그 불력(佛力)으로 왕위에 등극했다고 믿고 있던 백제 서명왕(舒明王)이 백제천(百濟川)변에 대찰을 지어 백제대사로 이름붙인 후 성덕 태자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대사는 일본 최초의 왕립(王立) 사찰임과 동시에 백제 망명정권의 원찰(願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찬란했던 백제불교의 진정한 모습이 또 하나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신라가 이민족(異民族)인 당(唐)나라를 한반도에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곧 세계에서 가장 섬세하고 훌륭한 문화를 말살시켜버린 것이다. 참으로 애석해서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생각은 야마토 평원의 교토(京都)에 자리잡고 있는 광륭사(廣隆寺), 즉 고류지에 가서 보면 더욱더 아픔으로 마음을 저미어 온다. 일본 국보 제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 이는 우리 한국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백제에서 만들어 가져갔거나 아니면 건너간 백제인들이 만들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 재질 이 한국산 적송(赤松)임이 이를 증명해 준다. 불공을 드리는 불자(佛子)의 발등에 떨어지는 그 시선과 잔잔한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지난 80년대 초반 미륵보살의 매력에 감동한 일본 관람객이 불상을 껴안는 바람에 불상의 새끼손가락이 잘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 관람객은 당황한 나머지 잘라진 새끼손가락을 가지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언론의 간절한 노력으로 그 새끼손가락을 다시 찾아 접합했는데 범인은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한국의 사학계를 흥분시키고 말았다. 절단된 새끼손가락의 단면 재질을 정밀 분석해 보니 한국산 붉은 소나무(赤松)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어서 그 흥분은 더 했던 것이다.

광륭사 역시 백제에서 건너간 하타카와카쓰(秦河勝)가 축조하여 그의 성(姓)을 따 진공사(秦公寺), 태진사(太秦寺), 또는 진사(秦寺)라고 불린다. 하타카와카쓰는 일본에 술을 만드는 법과 양잠, 농경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산업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교토의 마쓰오대사(松尾大社)는 하타씨(秦氏) 부처(夫妻)를 신체(神體)로 조각하여 제신으로 봉안하고 있는데 일명 「주조신사(酒造神社)」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일본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백제를 일본인들은 「큰 나라(大國)」로 불렀다. 백제의 일본 표기는 구다라(百濟)인데 큰 나라 → 쿠나라 → 구다라로 바뀐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금도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말 중에 「구다라 나이(百濟無い)」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백제가 없다」인데 속뜻은 백제 것이 아니다, 즉 백제 것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라는 말로 「백제 것이면 무엇이든지 최고」라는 속담이 된 것이다.

백제는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 선민의식, 즉 우월감으로 표출되어 자신의 성(姓)을 백제와 연관하여 짓는 경우도 허다했다. 「구다라」라는 성씨도 있고 또 부여의 여(餘)자를 따 성을 삼기도 했으며 남원의 남바라(南原), 충주의 옛 지명인 중원을 따 나카하라(中原)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늘날 그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음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준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백제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도 무수히 많다. 백제군, 백제면, 백제역, 백제천, 백제교, 백제천역, 백제촌, 백제고개, 백제산 등이 있는가 하면 오사카에는 오사카시립 남백제소학교도 있다.


백제왕족의 슬픈 전설

백제의 유적은 대부분 야마토 평원에 밀집해 있지만 규슈(九州)에도 일부 남아 있다. 규슈 미야자키(宮崎)현 동부해안의 휴가(日向)시에서 서쪽으로 40여km 들어가면 난고 손(南鄕村) 또는 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라는 아담한 산중 마을이 있다. 남쪽에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이란 뜻의 남향촌은 이름 그대로 옛 백제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휴가에서 자동차를 타고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길 위로 「百濟の里, Kudara no sato, 백제마을」이라고 한문, 영문, 한글로 쓴 대형 이정표가 자주 눈에 띄고 산언저리에 도「南鄕村」이라고 쓴 초대형 마을 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 마을에는 백제왕의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망한 후 일본에 건너간 여러 왕족 중에 정가왕(禎嘉王)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정가왕은 그의 장남 복지(福智), 차남 화지(華智)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규슈의 남쪽 사쓰마국에서 살다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규슈 동쪽 휴가국(日向國)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배를 타고 건너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목선(木船)이 난파되는 바람에 파도에 떠밀려 아버지 정가왕은 두 아들과 헤어진 채 살게 되었다.

정가왕 일행은 휴가 해안의 가네카하마에 표착했고 장남 복지 일행은 30km나 떨어진 가쿠치우라에 표착했다. 아버지 정가왕은 산중에 있는 미카도(神門)에 살았고 아들 복지는 히키(比木)의 기조초(木城町)라는 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수년이 지난 후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됐다. 그후 매년 한 차례씩 부자(父子)가 상봉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왕족의 소재를 찾고 있던 추격군이 눈치채 정가왕이 있는 미카도로 쳐들어 왔다. 히키의 복지왕도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미카도로 구원군을 데리고 와 응전했으나, 아버지 정가왕과 장남 복지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왕은 미카도 입구의 쓰가노하루(塚の原)에 묻혔으며 그의 높은 인격과 식견에 한없는 존경심을 가졌던 후세 사람들은 그곳에 미카도신사(神門神社)를 세워 미카도대명신(神門大明神)으로 모셨으며 그의 아들 복지도 사후 히키신사(比木神社)의 대명신으로 받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왕족 부자가 매년 한 번씩 상봉하는 대면의식(對面儀式)을 양쪽 마을 사람들이 시와쓰마쓰리(師走祭)로 승화시켜 축제를 갖는데, 축제라기보다 슬픔이 가득 찬 행사다.

3일간의 행사가 끝나고 히키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날이면 마쓰리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고 한다. 천수백년 전 의 역사적인 사실(史實)들을 축제로 재현해 이어가고 있는 일본인들의 높은 문화의식이 경제대국 일본을 만든 원동력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다.

이같은 역사적 인연으로 미카도에는 백제 정가왕족의 후손들이 모여 살게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남향촌(南鄕村) 또는 구다라노사토로 불리게 된 것이다. 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몇해전 미야자키시와 충남 부여시는 자매 결연을 하고 본격적으로 백제 마을을 가꾸게 되었는데 두 도시간의 우의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두텁다. 매년 우정의 사절단이 교환 방문을 하는가 하면 부여시 직원이 교대로 백제마을에 파견돼 근무하기도 한다.

마을 한복판에는 백제의 옛 수도 부여의 왕궁터에 있는 객사(客舍)를 그대로 본떠 만든 백제관(百濟館)이 있는데 두 도시의 공동 작업으로 건립돼 자료관과 영빈관으로 사용 되고 있다. 또 백제관 뒤편 「연인의 언덕」에는 부여 낙화암의 무대인 백화정(百花亭)을 그대로 본떠 만든 백화정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부여시가 기증한 종이 걸려 있다.

두 도시간에 서로 실처럼 끊어지지 않은 우의(友誼)를 돈독히 하며 그 정을 계속 이어가자는 뜻으로 반종(絆鐘)이라 명명되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속삭이면 그 종소리에 사랑이 결실한다는 이 「연인의 언덕」은 청춘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고 마을 아낙이 웃으며 얘기한다.

이곳 백제마을 한복판에는 최근에 원목으로 만든 건물이 있는데 그들은 「서 정창원(西の正倉院)」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있는 정가왕의 미카도신사에서 몇 해 전 구리거울, 검, 곡옥 등 수백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이를 보관하는 장소다. 그리고 나라에 있는 정창원(외국에서 일본에 보내온 여러 가지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 이름을 그대로 본떠 서 정창원, 즉 니시노쇼소인(西の正倉院)이라고 명명한 것.

이를 건립하려고 미야자키현청과 백제마을 사람들은 눈물겨운 모금 활동을 벌여야 했고, 수백년 된 노송(老松)을 구하기 위해 혼슈(本州)의 북쪽 끝 아오모리(靑森)현까지 가서 사와야 했다. 정창원 건립에 사용될 노송을 그들은 「어목(御木)」이라 부르고 마치 신을 모시듯 신성시했으며, 마을에 어목이 하나씩 반입돼 올 때마다 모든 마을 사람 들은 일손을 놓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면서 조심스럽게 맞아들였다. 수년의 노력 끝에 1996년 2월에 모든 공사가 끝났고 5월1일에는 성대한 준공식을 가졌다. 그들의 소원대 로 백제 왕족 정가왕의 모든 유물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처음 미카도신사에서 구리거울이 발굴돼 언론에 보도되자 일본 사학계는 또 한번 놀랐다. 나라의 정창원에 보관중인 구리거울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구리거울, 즉 신경(神鏡)은 검(劍)과 곡옥(曲玉)과 더불어 일본에서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신기 3종(神器三種)이라 부른다.

오늘날 일왕의 즉위식에도 이 신기3종이 수여되고 있다. 고대 한반도의 삼국과 가야의 왕릉에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이 신기3종이 자주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문화 역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혼이 살아 숨쉬는 야마토평원과 규슈 미야자키의 백제마을을 살펴보니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움만 남았다. 그처럼 찬란했던 백제 유적이 한국에는 빈약하기 그지없는데 일본에서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고도(古都) 부여가 당나라 소정방에게 함락될 때 소정방군이 지른 불로 도시 전체가 불타는 바람에 찬란한 백제문화는 잿더미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준 무령왕릉 마저 없었더라면 그 허전함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 6월호에서는 마지막 탐사로 고구려와 신라의 유적지를 소개해 보겠 다.


정리:안영배<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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