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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호걸, 철학자, 정치인 정도전을 다시 본다
 관리자  05-20 | VIEW : 1,939
조선의 호걸, 철학자, 정치인 정도전을 다시 본다

재상 중심의 완벽한 내각제 꿈꾼 야심가


조선시대 사대부는 직업정치가의 전형이다. 사진은 TV드라마 ‘용의 눈물’의 한 장면.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사상가요 정치가였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37~98)의 정치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회장 한영우 한림과학원 특임교수)는 11월29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제1회 삼봉학 학술대회를 열고, 성리학적 민본국가인 조선의 탄생을 주도한 삼봉의 정치·사상적 업적을 기렸다. 한영우 교수는 삼봉에 대해 “당대 호걸 중의 호걸로 정치·경제·국방·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남다르다”고 평가하면서 “삼봉학이 율곡학, 퇴계학, 다산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학자층이 형성되고 있다”고 했다. 축사를 한 고려대 윤사순 명예교수는 “지금까지의 삼봉 연구는 역사 분야가 주도했고 철학에서 몇 편의 논문이 나온 정도에 불과하나 삼봉은 정치가, 혁명가로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면서 “정치학 분야에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했다. ‘신동아’는 이날 발표된 4편의 논문 가운데 고려대 최상용 교수의 ‘정치가 정도전을 생각한다’를 요약해 싣는다(편집자).]


삼봉 정도전(고려 충혜왕 3년~조선 태조7년)은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세변화 속에서 주자학이라는 이념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거쳐 새로운 정치공동체-조선왕조-를 탄생시킨 정치가였다. 그에 대한 연구는 1973년 국사학자 한영우 교수의 ‘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계기로 철학,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TV사극 ‘용의 눈물’에서 정도전이 부각된 이래 이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필자는 정치가의 자질과 유형, 정치적 인격의 형성, 정치이념과 권력의 제도화 등 현대정치학의 개념으로 정도전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한국사에 한정하지 않고 서양사로까지 확대하여 정치가 정도전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인간은 권력을 매개로 다양한 정치공동체를 만들어왔다. 신과 야수는 정치사회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은 인간과 정치, 인간과 권력의 관계를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동물’은 정치적 인간의 원초적 표현이다. 러셀의 정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의 욕망의 차이는, 욕구가 충족되면 활동을 정지하는 동물에 비해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다. 그 욕망 가운데 최고의 것이 권력욕이다.

정치적 인간은 권력추구를 향해 인격을 형성하는 사람인데 권력을 추구함에 있어 선택하는 역할과 기능은 다양할 수 있다. 인격형에 착안해 정의 내린 정치적 인간이란 ①존경에 대한 생래적 욕구 ②가치박탈에 의한 정치화 ③사적동기의 공적목표에로의 전환 ④정치적 자질의 소유 등의 요건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 역사에서 사대부 계층은 존경에의 욕망이나 사적 동기를 공적 목표로 전환하려 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정치적 인간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권력투쟁 과정에 참여한 사대부들이 나름의 ‘가치박탈’ 체험을 갖고 있다.

정도전은 가치박탈에 의한 정치화를 경험했고, 발군의 정치적 자질을 소유한 정치가였다.

직업정치가의 전형, 조선 사대부

직업정치가는 정치에 대한 헌신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함으로써 내면적인 균형과 자기만족을 취하는 사람이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직업정치가의 첫 번째 범주로 군주의 참모가 있다. 그는 스스로 국가와 정치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고 군주의 봉사 역을 자임한다. 서양의 직업정치가들은 대체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해독이 가능했던 인문주의자들로 군주의 정치고문이 되거나 정치적 문서의 기초자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반면 중국·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직업정치가들의 행보는 서양과 사뭇 달랐다. 고전 교육을 받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문주의적 문학자들이었던 이들은, 인문 교양 수준에서는 르네상스시대 서양의 인문주의자들과 비슷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서양보다 훨씬 컸다. 베버는 중국을 대표하는 직업정치가로 청나라 말기 최고의 실력자이며 탁월한 문장가였던 리훙장(李鴻章)을 꼽았다.

베버의 분류법에 따르면 조선시대 정치일선에 있던 사대부들은 직업정치가의 범주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정도전은 직업정치가의 전형이라 하겠다. 정도전은 근대 이전에 생존했던 문인 정치가이면서도 근대국가의 필수조건인 군사력과 관료제의 존재이유를 예견했고, 실제로 조선왕조의 건설을 위해 국가수준의 군사훈련을 위한 병법과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정비했다.

정도전 자신은 문무를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조선의 사대부가 평시에는 문인정치의 지도자이면서 전시에는 전장의 군사적 지도자로 활약했던 점을 감안하면 정도전은 베버가 말하는 군주의 보좌역에 머물지 않고 정치목표의 설정과 실천의 전면에 나선 직업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또 베버는 ‘지도적 정치가’가 예로부터 군주의 실질적이고 권위있는 정치고문의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대표적 인물로 중국의 리훙장을 들 수 있고, 그밖에 근대 이전 터키 왕국의 총리와 16세기 마키아벨리 시대에 인문적 교양을 습득하고 외교술에 조예가 깊었던 정치가가 이에 속한다. 정도전은 14세기에 생존했던 지도적 정치가였다.

이상에서 볼 때 정도전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철했던 정치적 인간으로서 남다른 자질을 소유했던 정치가요, 정치이념의 실천에 헌신했던 직업정치가임은 물론이고, 실권을 가진 지도적 정치가로서 역량을 발휘한 정치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의 상황은 한마디로 위기였고 역사적 전환기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연속성보다 변화에의 욕구가 강렬했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상황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혁명적 위기상황은 경제 파탄, 도덕의 부패, 힘의 균형의 파괴로 나타난다. 고려말 경제의 파탄은 근본적으로 토지제도의 문란에 그 원인이 있었다. 당시는 토지소유가 극도로 편중되어 빈부격차가 심해 중농정책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자립을 포기한 이들은 농토를 버리고 전업을 하거나 유민이 됐고 심하면 도적이 됐다. 당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50%의 고율지대를 바치는 차경(借耕)제도에 있었다. 정도전은 “빈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며 역다자(力多者), 강자(强者), 호강자(豪强者) 등으로 표현된 지주의 횡포를 비판했다.

혼란기에 태어난 정치적 인간

이처럼 여말(麗末) 사회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으로 계급간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가족·사회·국가 질서가 와해됐으며 그에 따른 도덕과 윤리체계가 붕괴된 ‘사회적 아노미’ 상태였다. 고려말의 아노미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불교와 유교의 반(反)도덕성이다. 특히 고려말 사회의 도덕적 부패는 고려 건국 이래 이념적 기반이었던 불교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불교는 원래 청정(淸淨)과 과욕(寡欲)의 종교임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대지주로서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삼봉은 사원이 “평민 10가(家)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탕진했다”고 적는다.

원래 고려는 신라말 신흥 호족세력이 중심이 돼 건국한 나라로 호족 세력간 힘의 균형 위에서 중앙집권체제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무신의 난을 계기로 중앙문벌세력과 지방호족세력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됐고, 그 결과 전자가 붕괴하고 후자가 득세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깨졌다. 그후 힘의 균형이 회복되지 않은 채 여말에 이르러 몰락 양인과 부곡민 같은 하층민까지 물리적인 힘을 배경으로 권력투쟁에 관여하게 됨으로써 정치체제가 몰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고려말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전형적인 위기상황이었으며, 정도전은 그 위기상황의 한가운데에서 자기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해나갔다.

정치적 인격의 형성에는 그 인간의 정치사회화 과정에서 경험한 상대적 가치박탈이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가치박탈에 대한 보상의 수단으로서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인격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좌절과 울분의 경험이 정치가를 만든다.

그런데 정치적 인격 형성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가치박탈과 가치부여 사이를 떠도는 상태다. 즉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산계급이 입신출세의 온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중산계급의 ‘자유부동성(浮動性)’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중소지주인 중간층 출신의 정도전은 시대상황과 그 자신의 가치박탈의 체험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혁적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쌓아 나갔다. 정도전의 부계는 경상도 봉화지역 향리의 후손이다. 봉화 정씨의 시조인 정공미는 정도전의 고조부로서 호장(戶長)을 지냈고, 증조부인 영찬은 종7품∼8품의 하급관리였으며, 조부인 균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었다.

좌절과 울분 속에 성장

봉화 정씨로 중앙정부에서 관직을 지낸 사람은 정도전의 아버지 운경(云敬)이 처음이었다. 운경은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수령을 거쳐 공민왕 때에는 병부시랑 형부상서 검교밀직제학에까지 올랐다. 관직에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훗날 ‘고려사’ 양리전(良吏傳)에 오를 정도로 청렴결백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아버지 운경이 “평소 가산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공리에 담박”하였으며 “집에는 여유 있는 재산이 없어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으나 이를 담담하게 여겼다”고 말한다. 장남인 정도전은 아버지로부터 노약(老弱)한 노비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이다.

부계만 보면 정도전은 당시 중소지주출신 향리 집안의 평균 수준이었으나, 모계는 그가 중앙무대로 진출하는 데 장애가 됐고, 그가 신분상의 상대적 박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태조실록’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정도전의 어머니 우(禹)씨는 우연(禹淵)의 딸로 우연은 승려 김진과 여자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또 정도전의 부인 최씨는 최습(崔?)의 첩의 자식으로, 최습은 우연(禹淵)의 부인 연안 차(車)씨의 오빠 차안도(車安道)의 사위였다. 요컨대 어머니와 부인의 출신이 미천하다는 사실은 정도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공양왕 3년 10월에는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함에도 지나치게 높은 벼슬을 얻어 조정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정도전을 나주로 유배시키라는 내용의 상소가 있었다. 공양왕 4년 4월 정몽주는 김진양 등으로 하여금 “정도전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다”는 내용의 모욕적인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하던 동심우(同心友) 정몽주로부터 받은 수모는 정도전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원래 정도전은 아버지 운경이 개경에 진출함에 따라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정몽주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책을 많이 읽어 발군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360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1363년), 전교주부(典校注簿)(1364), 통례문지후(通禮門祇侯)(1365),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태상박사(太常博士)(1371) 등을 거치면서 비교적 순탄한 관리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공민왕 시해사건 때였다. 당시 이인임이 우왕을 옹립하고 친원(親元)정책을 취하자 정도전은 이를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이인임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를 당한다(1375년). 그 후 1384년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유배생활은 문자 그대로 궁핍과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다음은 ‘삼봉집’에 나오는 시구다.


추위는 아직도 위세를 부려
으시시 살갗에 스며드누나
이역에 묶여 있는 오랜 나그네
떨어진 옷에 헌 솜이 뭉쳤네
새벽 닭이 좀처럼 울지 않으니
밤새도록 부질없이 슬퍼만 하네.


10여년에 걸친 정도전의 처지는 서양 중세의 붕괴과정에서 근대국가의 미래를 내다보고 굴욕을 감내하면서 고난의 정치투쟁을 했던 단테를 방불케 한다. 아마 정도전은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쓰고, 남의 집 계단을 오르는 다리가 얼마나 무겁고 피곤한 일인가”를 뼈져리게 느꼈던 단테 이상으로 처절함을 맛보았을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 글과 칼의 만남

정도전은 신분적 굴욕, 경제적 궁핍, 그리고 정신적 고독과 싸우면서 정치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열망을 품고 1383년(42세) 9월 함주막사(咸州幕舍)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평소 정도전은 그 자신이 문무를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공동체를 떠받칠 이념과 군사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글(書)과 칼(劍)로 표현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은 문자 그대로 글과 칼의 결합으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훗날 권근은 명왕(明王) 이성계와 양상(良相) 정도전의 천재일우로 정치가 안정되고 대공(大功)을 이룩했다고 쓰고 있다. 변방무장(邊方武將) 이성계와 정치낭인(政治浪人) 정도전의 극적 해후에서 뿜어나온 변혁의 열기는 그야말로 ‘혁명은 변경으로부터’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이처럼 정도전은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정치공동체-조선왕조의 건설을 위한 비전과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도전은 상대적 박탈감을, 현상변혁을 위한 정치구상으로 보상한 셈이다.

무릇 하나의 정치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떠받치는 정치이념과 사회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하고, 그 권력시스템에 걸맞은 제도적 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정도전은 여말 조선 건국기의 출중한 주자학자로, 주자학을 조선 왕조의 정치이념으로 선택했다.

우선 그가 주자학을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의 이기론(理氣論)과 그 연장선에서 전개한 불교 비판의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정도전은 인(人)과 물(物), 즉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기(氣)라는 실체의 변용과정으로 파악했다. 그에 의하면 기(氣)에는 통(通)과 색(塞), 편(偏)과 정(正), 청(淸)과 탁(濁), 후(厚)와 박(薄), 고(高)와 하(下), 그리고 장(長)과 단(短) 등의 다양한 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氣)의 운동에 따라 인(人)과 물(物)에 여러 가지 차별이 생긴다.

이에 대해 불교는 심(心)·성(性)을 본질로 보며 천지만물은 가합이나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군신·부자관계에 나타나는 현실의 상하질서를 부정한다. 정치의 요체를 ‘질서’로 본 정도전은 당연히 그 질서를 부정하는 불교가 정치이념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왕도적 이상주의와 현세의 합리주의

정도전 사상에서 기(氣)는 주자학의 기본 개념으로 불교에 의해 부정된 차별적인 상하관계의 질서를 긍정적으로 파악한 개념이다. 물론 그가 질서를 강조함에 있어 기(氣)에만 의거한 것은 아니다. 정도전은 기(氣)와 이(理)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氣)라는 것은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서 만물을 화생(化生)함에 사람도 이를 얻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인 것으로 반드시 형이상(形而上)의 이(理)가 있은 후에 있는 것이니, 기(氣)를 말하면서 이(理)를 말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끝만 알고 그 근본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기(氣)와 이(理)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특히 이(理)의 존재이유를 기(氣)개념이 만물을 상하 차별적 관계에서 긍정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선악에 대한 긍정·부정이 애매한 데서 찾는다. 그러므로 절대적 선(善)인 이(理)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기(氣) 개념에 의한 인간관과 사회관에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한다.


정도전은 “기(氣)는 성하고 쇠함이 있으나 이(理)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이기론에서 열쇠개념인 도리(道理)는 이(理)에 다름 아니며 이 경우 도리는 만물에 내재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부자·군신·부부·장유·붕우 관계를 바람직하게 하고 물(物)에 있어서는 물을 물답게 한다. 도리는 기(氣)와 구별되면서도 기(氣)와는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기(氣)로서의 만물은 도리가 내재함으로써 일정한 질서하에서 만물다워진다. 이 도리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서 개개인간에 내재한다. 특히 정도전은 정치의 요체를 예악(禮樂)에 두었는데 예(禮)는 질서에 다름 아니며 예악은 서화(序和), 즉 질서와 평화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기(氣)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상하·선악의 다양한 가능성과 기능이 이(理)에 의해 긍정적으로 매개되어 각기 제구실을 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조화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정도전은 유교 이념의 양면, 즉 왕도적 이상주의와 현세 내 합리주의를 통합하려고 했다. 그는 전자로부터 역성혁명 사상을 받아들여 구체제를 혁파하려 했고, 후자의 제도화를 통해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려 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불교 비판은 단순히 학술적 차원이나 종교적 관점에서 행해진 게 아니라 출발부터 정치 권력과 이념의 이중 투쟁적 성격이 짙다. 그는 고려의 정치이념인 불교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조선 왕조의 정치이념으로서 주자학의 정당성을 옹호했던 것이다.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정치를 경제의 집중적 표현으로 본 레닌의 관점은 결코 유물사관의 독점물이 아니다. 어떤 정치시스템도 그것을 떠받쳐줄 경제적 기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무엇보다 ‘정치는 의식의 풍족에 있음’을 알고 있었고 다음과 같은 말들을 남겼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도적이 되는 것이 어찌 인간의 본성이겠는가. 항산(恒産)이 없는 사람은 항심(恒心)이 없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정도전의 이상은 인욕(人欲)이 아닌 천리(天理)에 바탕을 둔 도덕정치였지만, 이에 앞서 민생 안정을 위한 경제적 기반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그가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 전제(田制)개혁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전시과(田柴科)를 근간으로 하는 전제(田制)와 함께 국가가 직접 지배할 수 없는 사적 소유지가 있었다. 국가권력이나 국왕의 권력을 등에 업은 세력들이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면서 온갖 폐단이 나타났다. 고려말 신흥 사대부들은 전제개혁을 통해 그런 폐단을 바로잡고 자기들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다.

정도전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계민수전(計民授田, 민수를 헤아려 토지를 지급함)의 원칙에 입각한 전제개혁을 주도했다. 1388년 7월에 시작된 전제개혁운동은 1391년 5월 과전법(科田法) 제정으로 일단락했다. 과전법은 정도전이 최선의 모델로 삼았던 고대 중국의 공전제(公田制)는 아니었지만, 과전법 시행 후 온 나라가 크게 기뻐했고 민심도 좋아졌다고 한다. 그 후 정도전은 전제개혁 추진과정에서 반대 또는 미온적 태도를 보인 이색, 권근, 정몽주 등과 끝내 갈라선다.

정도전이 전제개혁을 단행한 것은 토지제도 자체의 개선뿐 아니라 여말 정치권력 자체를 혁파하고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정도전은 권귀(權貴)·구가세족(舊家世族)으로 불리는 부패한 기득권층에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토지를 둘러싸고 중소 토지소유자와 경쟁관계에 있는 막강한 세력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혁파의 대상이었다.

정도전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기득권층과 대립하는 신흥 사대부층을 기득권층과의 권력투쟁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가졌고, 그 실현을 위한 경제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토지 소유에 국가권력의 지배가 미치는 제도(공전제)를 추구했다.

정도전의 전제개혁은 권귀층의 대토지 소유를 겨냥한 것이었다. 권귀층은 중소지주로서 사대부층의 존립을 위협했다. 특히 권귀층의 기생적, 비생산적 토지 경영은 고려 경제파탄의 주범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은 자연스럽게 당시 광대한 토지와 많은 노비를 가진 사원(寺院)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전은 사원을 기득권층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자 재정파탄의 원천, 그리고 권력부패의 온상으로 보았다. 이처럼 정도전의 공전제론은 중소지주의 이익과 함께 새로운 권력주체인 사대부의 권익,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공동체-조선왕조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재상 중심의 강력한 관료제


경기도 평택에 있는 삼봉의 묘(왼쪽)와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해 종묘 앞 광장에 세워진 시비.  
정도전은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관료체제 구축을 지향했다. 그에 의하면 재상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식견과 사물의 복잡함을 넓게 헤아릴 수 있는 도량, 또한 아랫사람을 심복시킬 수 있는 덕성을 골고루 갖춰야 한다. 군주는 재상의 시비, 적부를 논해야 하고 재상은 군주를 바르게 하여 양자가 고유의 임무를 다할 때만 정치적 권위와 질서가 유지된다.

재상의 시비를 논하면서 자기 형편에 맞는 자를 구하고 자기를 바르게 하려는 의견을 내놓은 자는 구하지 않으며 자기가 총애하는 자를 선발하고 경원하는 자를 선발하지 않는다면 군주는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군주를 바르게 해야 할 재상이 시비를 제대로 가리지 않고 ‘옳소 옳소’ 하기만 하거나 군주의 총애만 받으려고 한다면 재상은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정도전에 의하면 왕위는 세습되어도 좋고 왕이 성현이면 더욱 좋지만, 왕이 중간 정도의 자질을 갖고 있다 해도 재상만 훌륭하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문제가 없다.

또 왕권을 경제적으로 제한하기 위해 왕의 사유재산(私藏)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론상 천하의 인민과 토지가 모두 왕의 소유이므로 왕이 따로 사유재산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왕이 필요로 하는 비용은 일체 국가 경리에서 지출하고 왕실경비의 지출권은 재상이 장악하여 군주가 사치와 낭비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 왕이 사유재산을 갖게 되면 결국 권세와 농간을 부리게 되어 만사의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되고 드디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왕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국사에 전념해야 할 최고의 공인인 왕에게 부패의 뿌리인 사유재산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판단과 함께 결과적으로 왕권 견제를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왕과 재상의 합의 방법에 대해서도 “재상이 선 채로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온 문자를 몇 줄 읽고 훌쩍 나가버리는” 형식주의가 아니라 왕과 재상이 상호 존중하는 자세로 대화하여 진지하게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협의사항도 대사(大事)에 한정하고 그 외 작은 일들은 재상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재상의 권한에서 왕을 보필하는 것 못지않게 백관, 즉 상·하급 관리를 다스리는 것도 중요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급관료의 임명을 내용으로 하는 인사권, 최고 군사기관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책임자를 재상이 겸임하고 군의 통수를 책임지는 군사권, 국가경비의 출입을 관장하는 재정관할권, 상벌권(賞罰權) 등을 갖는다. 특히 정도전은 정치의 아름다움(政治之美)은 인사에 있다고 보고 재상의 직분을 사람의 임용에 두었다.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의 자질과 행동규범으로 ①정기(正己) :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 ②격군(格君) : 군주를 바르게 하는 것 ③지인(知人) : 인재를 잘 가려서 쓰는 것 ④처사(處事) :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 등을 들었다. 그는 중국의 요순 및 하·은·주 시대의 재상을 논하면서 제도상으로는 주례(周禮)를, 재상으로는 은의 이윤(伊尹)을 모델로 삼았다. 이색은 “삼봉이 이윤의 뜻을 품어 뜻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다”고 했다.

정도전이 재상중심체제를 고수한 것은 여말 권력투쟁에서 역성(易姓)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그의 민본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능력위주로 엄선된 현인집단과 현인 중에서도 최고의 현인인 재상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것이 유효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도전은 왕의 가장 중요한 권한은 재상을 뽑는 것이며, 재상은 천하의 기강(紀綱)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권은 불가불 재상에 있다고 단언했다. 이와 같은 언술은 조선왕조 권력의 중심축을 재상제에서 찾고자 한 정도전의 확고한 신념을 말해준다.

이상에서 보듯이 정도전은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이념적·경제적·제도적 기반을 튼튼히 함으로써 민본정치에 바탕을 둔 도덕정치의 이상과 조선왕조가 당면한 현실을 접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정도전에 적대적이었던 ‘태조실록’에서조차 조선왕조 창건의 주역을 삼봉(三峰) 정도전으로 기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략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철인(哲人)이 왕이 되는 것이 최선이고 그렇지 못하면 왕이 철학을 공부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위대한 정치가에게 ‘고상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했다. 정치의 내재적 요구인 이상과 현실을 염두에 둔 정치가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신화나 비전, 정치이념을 뜻하는 것이고 ‘고상한 거짓말’은 그 신화나 비전을 조작하는 기술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의 정치가론을 기준으로 볼 때 정도전은 분명 철학이 있는 정치가였다. 정도전은 새로운 정치공동체인 조선왕조를 건설하기 위해 주자학이라는 정치이념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경제문감’ ‘조선경국전’과 같은 구체적인 프로그램도 갖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 자신이 죽음을 예감하면서 쓴 시구대로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다간 철인 정치가인 동시에 현실정치에 철저했던 국가의 설계자였다.

근세 정치철학의 비조인 마키아벨리는 당시 조국 이탈리아가 처한 위기의 원인을 종교와 도덕의 타락, 용병의 폐단, 지도자의 무능으로 인한 국가의 분열로 진단했다. 그는 도덕성의 고양을 외치는 한편 정치를 종교와 도덕으로부터 분리시켜 그 독자성을 주장했다. 애국심이 없는 용병을 해체하고 국민군을 창설하자고 제창했다. 그리고 기득권에 사로잡혀 분열의 극에 달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열망했다.

이러한 인식하에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인물로 체사레 보르자를 꼽았다. ‘군주론’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 지도자의 자질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자질론에서 돋보이는 것은 덕성(virtu)의 정치적 의미다. 여기서 덕성은 고대의 단순한 지적 탁월성이나 중세의 인간 내면의 덕성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요, 통합을 향한 고도의 정치력이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에게 막강한 권력과 함께 심지어 위선, 분할통치 등의 정치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권위까지 부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대한 신념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권력에의 의지는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덕성의 극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의 수행 과정에서 우(友)·적(敵)관계에 대한 판단과 권력투쟁 과정에서 그의 선택에는 마키아벨리나 카를 슈미트의 문제의식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에게 법의 지배와 함께 힘의 지배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요구한다. 역사를 살펴 보면 법의 지배의 시기도 있지만 힘의 지배가 요청되는 시기도 있다. 특히 위기상황, 혁명상황이야말로 힘에 의한 지배가 전면에 대두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자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奸智)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했다. 고려말의 아나키에서 조선왕조의 건설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정도전은 기회와 덕성의 결합을 체현한 정치가였다.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의 차이

조선 개국기에 군웅이 할거했지만 정치가의 유형으로 특징적인 인물은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이다. 이들은 고려말의 위기의식을 공감하면서도 역성혁명의 추진과정에서 견해의 차이, 보다 정확히 말하면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우(友)·적(敵)관계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세 사람이 다같이 주자학적 교양을 공유하고 여말 위기를 해결하려 노력한 정치가였으나 끝내 정몽주와 정도전은 권력투쟁에 희생되고 최후의 승리는 이방원에게 돌아갔다.

정몽주는 정치적 교의(敎義)에 집착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신념 때문에 역성혁명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보이다가 끝내 반대 입장을 취했다. 한편 이방원은 역성혁명의 타당성을 지지했지만 구체적인 정치이념보다 권력의지에 철저했다. 이에 비해 정도전은 주자학 이념에 바탕을 둔 조선왕조 건설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실현을 위한 권력에의 의지 또한 강렬했다.

강조점에 따라 세 사람을 분류해보면 정몽주가 이념형, 이방원이 권력형, 그리고 정도전은 이념과 권력의 통합형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를 이념과 권력의 상호작용이라고 볼 때 정치가가 공동체를 떠받칠 정치이념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질로 볼 수 있다.

‘우아한 냉혹’의 소유자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삼은 마키아벨리를 속류(俗流)로 받아들인다면, 결과적 승리자 이방원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법의 지배와 힘의 지배를 종합하려는 메시지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내재해 있고 공통항인 ‘냉혹’을 뺀 ‘우아함’의 농도에 눈을 돌린다면 그 선택은 정도전일 것이다.

베버는 정치가의 자질로 열정, 책임감, 안목을 꼽았고 이 세 가지는 삼위일체의 성격을 갖는다. 열정은 단순히 불모(不毛)한 흥분이나 책임감을 결여한 낭만이 아니라 즉물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안목은 목측(目測)으로도 번역되는데,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필요한 심리적 자격으로 정신적인 집중과 평정으로 현실을 냉엄하게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 경우 안목은 사물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둔 냉정한 태도다.

정치가의 책임윤리

정치는 인간의 작위적인 행위지만 단순히 경박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진지한 행위이다. 따라서 열정 없이는 정치에 헌신할 수 없지만 그 열정은 정치 아마추어가 가지기 쉬운 불모한 흥분이 아니라 베버가 말하는 ‘혼의 억제’를 통해서만 단련될 수 있다. 정치를 소명(召命)으로 아는 참다운 의미의 정치가는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판단이 영혼 속에서 용해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열정의 경우든 안목의 경우든 투철한 책임감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베버는 허영심과 권력욕을 엄밀히 구별한다. 그는 권력욕을 정치가의 정상적인 소질로 파악하면서 허영심이야말로 정치가의 적이라고 했다. 권력욕이 즉물성과 책임성에 바탕을 두지 않고 단순히 개인적인 자기도취의 욕망이 된다면 정치가의 최대 해악인 허영심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요컨대 책임감을 수반하지 않은 권력욕은 허영심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정치와 윤리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정치와 윤리는 배타적인 선택관계가 아니다. 베버가 그토록 주장했던 ‘심정윤리’와 ‘책임윤리’의 긴장과 통합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정치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동에는 두 가지의, 근본적으로 다르나 불가피한 긴장관계에 있는 심정윤리와 책임윤리의 문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선한 목적을 지향하는 심정윤리가는 위험한 수단이나 부차적 효과도 정당화하려 한다. 그는 선(善)은 선(善)에서 나오고 악(惡)은 악(惡)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임윤리가는 윤리적인 합리주의와 거리가 먼 평균적 인간의 결정을 계산에 넣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세계사의 전 과정을 보나 인간의 일상적 경험에서 보면 윤리적 합리주의와 동떨어진 현상들이 많아서 선에서 악이 나올 수도 있고 악에서 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가는 현실의 수많은 비합리성에 직면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책임윤리를 가지고 공적인 일에 정진하는 인간을 말한다. 베버의 정치가 자질론에서 볼 때 정도전은 우선 무엇보다도 열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독서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민본정치에 대한 신념과 새로운 정치공동체 건설을 위한 구상을 가지고 일로 매진한 열정의 정치가였다.

베버가 열정과 함께 제기한 안목은 어쩌면 정치가에게 이성과 감성의 양면의 자질을 요청한 것인데 양자 모두 강한 책임감과 즉물성에 바탕을 둔다. 여말 정치상황에 대한 위기의식과 그 해결책으로서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전과정에서, 정도전은 책임감과 즉물성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정도전의 객관적인 정세 판단과 전인격적인 헌신의 모습에서 우리는 정치가의 책임감을 바탕으로 하는 열정과 안목의 종합태를 발견할 수 있다. “벼슬에 나아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정도전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 이색의 평가는 동시대를 살았던 스승이자 정적으로서의 솔직한 인물평이라 하겠다. 정도전은 무엇보다 “재상의 직책은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정치가의 책임윤리가 막중함을 강조했다.

동양의 단테

정도전은 14세기 후반을 살다간 사람이다. 이 시기 서양에서는 중세의 암흑에서 깨어나는 인간의 모습을 예견한 사상들이 움트기 시작했다. 정도전과 가장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서양의 사상가이며 정치가로 단테가 있다. 단테가 1321년에 죽고 정도전이 1342년에 태어났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동시대인은 아니나 역사의 큰 전환기에 자기류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단테는 서양 중세의 황혼에 서서 근세의 여명을 내다본 사상가이며, 18년의 유랑을 강요당하면서도 황제당의 입장에서 교황당과 줄기차게 싸운 정치가였다. 서양 르네상스의 출발이 이탈리아였음을 생각하면 단테의 고민은 곧 서양 중세의 고민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것은 흡사 조국 이탈리아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고투했던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서양 중세의 틀을 깨고 근세 정치사상의 보편적 메시지를 발신했던 것과도 닮았다.

대륙에서 원(元)이 명(明)으로 바뀌고 왜구의 침투가 극심하던 동아시아의 정치 상황하에서 정도전은 도덕과 경제의 파탄, 정치의 혼란에 허덕이던 고려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공동체-조선왕조를 건설하기 위해 사상과 행동 양면에서 투철했던 정치가다. 그가 위기에 대한 극복방안으로 내놓은 각종 정책에서 일관되게 민생과 실용을 강조한 것에서는 훗날 조선의 근대사상이라 할 수 있는 실학사상의 싹을 미리 보는 듯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탈리아의 시인정치가 단테나 조선의 학자정치가 정도전이 조국의 위기상황에 대응하면서 내놓은 처방전들은 각기 서양의 근세, 동양의 근세에 이어질 수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정도전의 주자학적 질서관은 현세 내 합리주의 내지 관료합리주의로, 그의 공전제는 근·현대로 이어지는 토지의 공개념으로, 그리고 그의 재상론은 분권 내지 왕권제한의 의미로, 근대적 사유의 맹아를 간직하고 있었다.冬
   (끝)
  
  崔相龍
●1942년 경북 경주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 정치학 석·박사
●주일본 대사 역임
●저서 : ‘탈냉전기 한일관계의 쟁점’ ‘Democracy in Korea’(이상 공저), ‘평화의 정치 사상’ 등  


글: 최상용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 syongchoi@korea.ac.kr
발행일: 2004 년 01 월 01 일 (통권 532 호)
쪽수: 554 ~ 56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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