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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관리자  05-20 | VIEW : 2,314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①]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강원용 목사는 ‘살아 있는 한국 현대사’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남북한을 두루 체험했고, 일본 제국주의, 미군정, 건국정부, 과도정부, 군사독재, 민주체제를 온몸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파란의 역사 고비고비에서 핵심적인 인물들과 교류, 접촉하면서 우리 현대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가 ‘몸으로 쓴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역사 대담’을 연재한다. 신탁통치와 친일문제 등 광복 직후 정국에서부터 조봉암 사건 등 이념갈등, 박정희 시대, 1960∼80년대의 민주화 운동, 주요 정치인들의 행적, 남북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가 강목사의 생생한 숨소리와 함께 다뤄질 것이다. 대화 사이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대담자가 붙인 것이다.<편집자>


박태균 : 목사님께서 최근 발간하신 저서 ‘역사의 언덕에서’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처럼 현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유익한 읽을 거리가 될 듯합니다. 그런데 현대사 연구자로서 좀 욕심이 생기더군요. 목사님께서 방대한 내용을 쓰셨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좀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아마 일반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한 부분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마침 ‘신동아’에서 좋은 기회를 만들어줬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목사님의 소중한 증언을 듣고자 합니다.

강원용 : 좋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책을 통해 정리하긴 했지만 그리 체계적이진 못했어요. 더욱이 관련자료를 일일이 찾아보고 쓴 게 아니라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쓴 것이라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번 기회에 현대사 전문가와 함께 다시 과거를 돌아보면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겼으면 합니다.

박 : 책 앞쪽에서는 이승만 박사와 신탁통치 반대운동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평가와는 아주 다른 해석을 하셨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박사가 반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셨는데요.

강 : 광복후 이승만 박사가 귀국했을 때만 해도 저는 그분을 거의 광신도처럼 지지했어요. 그 무렵 이박사 반대파가 ‘이승만은 일제시대에 해외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사람이다’는 얘기를 많이 퍼뜨렸습니다(실제로 이승만은 1920년대에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것이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직에서 탄핵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저는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알기에 이박사는 신탁통치에 대해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박사처럼 단호하게 반대하진 않았어요. 그는 신탁통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겁니다.

지지세력 없는 이승만의 선택

박 : 신탁통치가 발표된 시점에는 이박사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강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45년 12월29일 밤 김구 선생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큰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어요.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으니까. 남로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어요. 다들 아주 격해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어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어요. 송진우 선생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지만. 이박사는 그날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당시 그는 신탁통치에 대해 담화를 낸 일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나서서 뭘 하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분의 정치적 판단으로는 신탁통치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던 듯합니다.

박 : 이박사가 예컨대 비상국민회의나 남조선대표국민의원 같은 데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반탁운동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말씀이죠?

강 : 제가 보건대 반탁운동이 고양되던 상황에서 누구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을 읽어보거나 면밀하게 검토한 사람이 없었어요. 방송만 들은 겁니다. 그저 다들 격해 있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부터 달라진 겁니다. 남로당과 좌익에서는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섰고, 온건세력은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어요. 이들이 3상회의 결정안에 반대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에 어떻게 통일정부를 세울 것이냐를 논의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를 해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해서 하자는 것이었어요. 김규식 박사 계열이나 안재홍씨, 그리고 한국민주당까지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매우 강했던 거죠.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그런데 당시 이승만 박사에겐 지지자가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박사가 신탁통치 반대세력을 선택한 것이죠. 이박사는 그때서야 신탁통치 반대를 들고 나왔어요. 그 전까지는 신탁통치에 대해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았거든요.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힘이 된다면 언제든지 끌어 쓸 수 있는 사람이니까 반탁세력을 끌어다 썼다고 생각합니다.

박 : 당시 지식인들이 처음 경교장에 모였을 때는 3상회의 내용을 잘 모르고 반탁을 주장하다가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에는 생각을 바꿨다고 하셨는데,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쯤입니까.

강 : 경교장 모임 이틀 후인 1945년 12월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를 했어요. 그때 저도 강연 등을 했는데, 그때까지는 여론이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1월 초에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에서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왔어요. 여기에서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부딪쳤는데, 그때부터 5월 사이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세력들이 차츰 내용을 알게 되면서 운동의 강도가 약해졌습니다. 5월 초순에는 양측이 남산과 서울운동장으로 나뉘어 모였는데, 저는 아무 데도 안 갔어요.

암살의 배후는?

박 : 혹시 좌우익으로 나뉘어 진행된 1946년 3·1절 기념식이 아니었습니까.

강 : 제가 기억하기엔 5월 초순입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면 그 무렵 ‘강원용이 배반해 남로당이 모이는 남산에 가서 강연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경동교회에서 조향록 목사와 얼마 안 되는 교인을 모아놓고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테러단이 왔다”고 합디다. 당시엔 테러단이 자주 몰려다녔는데, 좌익 테러단인지 우익 테러단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요. 양쪽에서 다 몰려다녔으니까. 그날 테러단이 트럭을 타고 왔다길래 제 집사람과 조목사의 부인이 살펴보러 나가면서 저더러는 도망을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교회 뒤 울타리를 넘어 신당동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어느 교회 청년들이라는데,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었대요.

조목사 부인이 나가보니 인솔자가 이북에서 넘어온 인척 오빠더래요. 그래서 “오빠 여긴 어떻게 왔소?” 하니까 “너는 왜 여기에 있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과 나하고 이 교회에서 예배드린다고 하니까-그때 저는 아직 목사가 아니었어요-그 청년이 “좌익하는 놈을 왜 끼고 다니냐”며 “그놈이 남산에 가서 공산당 강연을 했다”고 했답니다. 저는 근처에도 간 적이 없어요. 당시에 우리는 대개 양쪽에 다 동의하지 않았어요. 지지운동도, 반대운동도 안 했죠. 물론 계속해서 반대하는 과격파도 있었고, 계속해서 지지하는 좌익들도 있었지만.

박 : 경교장 모임으로 다시 돌아가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날 송진우 선생이 반탁이 주조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했다고 하셨는데, 그는 경교장 모임에서 귀가한 직후 암살당했습니다. 암살자는 이전에 송진우 선생의 경호원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으로 밝혀졌죠. 그런데 나중에 장택상씨가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경교장에서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겁니다(로빈슨 저 ‘미국의 배반’ 참조). 당시 그런 소문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강 : 김구 선생과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송진우 선생을 죽인 한현우가 법정에서 한 얘기가 있습니다. “왜 송진우 선생을 죽였냐”고 물으니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했어요. 둘 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먼저 여운형 선생을 죽이려고 따라다녔답니다. 그러다 종로3가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여운형 선생이 걸어오는 걸 보고 죽이려 했는데, 그가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아, 현우군! 오랜만일세” 하고 다가와서는 어깨를 탁탁 두드리니 차마 못 죽이겠더라는 거예요.

한현우가 두 사람을 다 죽이고자 했다면 김구 선생이 개입됐을 리는 없습니다. 김구 선생은 1947년 장덕수 선생 암살 배후로도 의심받아서 미군정이 그를 법정에 불러내 조사하려 한 일이 있죠. 미국 사람들이 송진우 선생을 죽인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다고 봤다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겁니다. 미군정은 김구 선생을 싫어했으니까. 그를 테러리스트로 봤거든요(송진우, 장덕수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박태균 저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도진순저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참조).

송진우의 혜안(慧眼)

박 : 지금의 시각으로 모스크바 3상협정을 돌아본다면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강 : 저는 송진우 선생이 당시 정치가로서는 가장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밤 그는 “3상회의 결의문도 읽지 않고 방송만 듣고 떠들어선 안 된다”며 “길어야 5년 이내에 끝나는 신탁통치를 하고 결국엔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의논해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운다고 하는데, 이대로라면 우리가 5년을 왜 못 견딘다는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 끼여들지 않고 우리끼리 정부를 세우라고 하면 과연 우리가 5년 안에 통일정부를 세울 자신이 있느냐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저는 ‘저 사람이 무슨 저 따위 소리를 하고 있냐’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역시 송진우 선생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때 우리가 3상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쉽게 통일정부가 섰으리라곤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3상회의 자체를 결사반대한 것은 잘못이었어요. 미소공동위원회에 들어가 당당히 우리 입장을 내세우다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몰라도 미리부터 반대한 건 옳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누군가가 좌익이냐 우익이냐, 정통이냐 비정통이냐를 평가하는 데 있어 신탁통치에 반대했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아요. 이건 옳지 못해요. 물론 제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모임에 적극 참여하며 연설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었습니다.

박 : 이승만 박사가 반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셨는데, 이박사가 종교를 이용했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까. 시간적으로 조금 뒤의 일이지만, 장면 박사도 그렇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지 않나요.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사로서 말입니다.

강 : 장면 박사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저와 기독교 모임에서 종종 만났어요. 그런데 제가 평가하건대 그분은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집안이 독실한 가톨릭인데, 이박사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끌어들이려 했어요. 개신교에서는 이윤영 목사를 끌어넣었어요. 이윤영 목사는 1948년 첫 국회가 열릴 때 개회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당시 가톨릭 지도자들이 중간파와 백범을 지지하니까 장면씨를 끌어간 겁니다. 이박사는 장면 박사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죠. 당시 국회는 제헌국회였습니다. 제헌국회 의장은 이박사 본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박사가 사회를 보다 말고 단하로 내려와서는 장면 박사 곁에 가서 귀에 대고 무슨 얘긴가를 속삭이는 척하는 거예요. 장박사를 키우기 위해 ‘나와 이렇게 하는 사이다’는 걸 보여준 거죠.

하지만 한마디로 장면 박사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조병옥 같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분을 해방 후의 여느 정치가들과는 다르게 봅니다. 대단히 선량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이박사, 자유당과 갈라지게 됐죠.

친일에도 級이 있다

박 : 장덕수 선생에 대해 잠깐 언급하셨기에 화제를 좀 바꿔볼까 싶은데요. 장덕수 선생은 친일 경력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친일파 처리를 놓고서도 많은 비난을 샀습니다. 목사님 저서에는 ‘푸른하늘 은하수’를 쓴 동요작가 윤극영 선생의 친일행각에 대한 얘기도 있더군요. 그런가 하면 김활란 박사에 대해서도 친일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분들의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강 : 저는 일제 때 해외에 나가지 않고 이 나라에서 산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상황을 경험했어요. 저 자신 일본 경찰에 잡혀가 있을 때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강목사는 1944년 겨울 일경에 체포되어 해방 직전까지 옥고를 치렀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살려면 이들이 강요하는 걸 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다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며 다시 이를 악물곤 했습니다. 결국은 죽는 길밖에 없다 싶어서 일주일간 단식하다 병보석으로 나왔죠. 그런 제가 보기에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버텨낸 분들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이지 않게, 하는 수 없이 소극적으로 친일한 이들은 친일파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해요.

친일한 사람들을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끝내 친일하지 않은, 정말 위대한 이들입니다. 안재홍 선생은 감옥에 아홉 번인가 드나들며 고초를 겪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끝내 달관했어요. 여운형 선생도 끝까지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 살면서 그렇게 한 사람들은 그저 위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두 번째는 살기 위해서, 혹은 가령 김활란 박사처럼 이화대학을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친일을 한 유형이죠. 이렇게 한 사람들을 지나친 흑백논리로 친일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칭찬을 할 수는 없지만, 개인이든 집단이든 한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은 다른 시각으로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능동적으로 친일을 한 부류입니다. 예를 들어 윤극영만 해도 그래요. 제가 간도 용정에 있을 때 그가 소위 ‘협화회’를 한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걸 안 하면 잡혀갈 입장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본인이 능동적으로 한 거예요. 제게도 협조해달라고 하면서 안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했거든요.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에 비행기를 바친 박흥식(화신 사장)도 이러한 부류라고 할 수 있죠. 노덕술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총독부 아래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던 책임자였죠.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의 기밀을 들춰내고 잡아가고 죽인 일본의 앞잡이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면 안 되죠. 그런데 노덕술은 미군정하에서 다시 정보과장을 했거든요.

하지만 이들과 김활란 같은 사람들을 같게 볼 생각은 없습니다.


박 : 그렇긴 합니다만, 예컨대 소극적으로 친일을 했더라도 그런 행위에 대해서 본인의 소명이나 반성이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강 : 그랬으면 좋았겠죠. 그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싶진 않지만, 국민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분명히 밝혔어야 해요. 제 친구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들추고 얘기한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잘못은 청산되지 않고 남게 된다”고. 제가 늘 공감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청산을 해야 합니다. 안 했다고 우기면 안 되죠.

박 : 그랬다면 지금 와서 친일파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흑백논리로 평가하는 상황은 빚어지지 않았겠죠?

강 : 그랬겠죠. 김활란 박사도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정당화할 수는 없죠. 이 문제는 모두 덮어버린다고 해서 편한 게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 시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 히틀러와의 공범자라는 걸 알아야 된다”고 한 야스퍼스의 말은 옳아요. 살아남기 위해 공범행위를 어느 정도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그러니 이걸 역사적으로 청산해야지, 계속 끌고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걸 청산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탄압받던 나라 중에 해방되고 나서 그렇게 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못했습니다.

서로를 이용한 이승만과 한민당

박 : 그것이 제대로 안 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강 : 미군정이 시작됐을 때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왔어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도, 첫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도 한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그냥 들어온 겁니다. 들어와보니까 이북은 공산당이 차지하고, 이남에도 사방에 공산당 벽보가 붙어 있으니 어떻게 공산당을 막을 것인가에만 급급했어요. 그런데 공산당 조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들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 밑에서 그 일 하던 친일파들 아닙니까. 그러니 공산당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우선 이들을 활용해야겠다고 판단한 거죠.

미군정을 그렇게 만들고 또 그들과 함께 행동한 게 한국민주당입니다. 공산당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미군정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써먹은 겁니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해서 살펴보니 한국민주당도 한국독립당도 자신을 이용하려는 세력이지, 자신을 정말 믿는 세력은 아닌 거예요. 그래도 그 중에서 자기가 써먹을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한민당이라고 판단했기에 한민당을 잡은 겁니다. 한민당도 이박사를 좋아한 게 아니에요. 좋아한 건 아닌데, 김구, 여운형 등과 손잡을 수는 없으니 이박사를 등에 업은 거라고 생각해요.

한민당과 이박사는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 것인데, 이들이 가장 잘못한 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일입니다. 김상돈씨 등의 주장으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까지 만들었지만, 자동차 사고를 빌미로 일을 방해하기도 했잖아요(김상돈 의원은 당시 반민특위 부위원장이었는데, 1949년 4월17일 지프를 직접 운전하다 어린이를 치는 교통사고를 냈다. 이승만은 이례적으로 이 사건과 관련해 김의원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죠.

친공으로 처형된 반공경찰

박 : 친일 경찰 논쟁도 뜨거웠습니다. 시민과 경찰이 유혈 충돌한 1946년 대구 10·1사건 이후 경무부에서 경무부장 조병옥씨와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씨가 친일파 경찰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죠. 당시 목사님께선 남조선 과도정부의 의뢰로 대구에 조사를 다녀오시기도 했는데, 목사님 책에서도 언급됐고 저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인물인 최능진씨에 대해 말씀을 좀 해주시겠습니까(대구사건의 원인을 놓고 친일 경찰 문제가 제기됐을 때 최능진은 “친일 경찰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병옥은 “그들은 대부분 직업을 위해 일했던 ‘Pro-Job’이지 친일을 한 ‘Pro-Jap’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강 : 미군정하 경찰의 수뇌로는 조병옥, 장택상, 최능진 세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색깔이 다 달랐어요. 조병옥과 장택상은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한민당 라인이었어요. 최능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반공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치적으로는 한민당 라인이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최능진은 수사국장으로 일할 때 조병옥, 장택상과는 일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 그분의 도움도 받은 일이 있습니다.


1948년 반민특위가 구성된 후 법정으로 끌려온 친일파들.

박 : 어떤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강 : 그때 제가 미군정측에 “이북에서 넘어와 학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으니 건물을 하나 마련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미군정으로부터 서울 회현동에 있는 큰 기숙사를 얻게 됐어요. 거기에 고학생들을 머물게 했는데, 얼마 후 이모라는 사람이 미군정 요원을 등에 업고 그곳을 빼앗아버리는 바람에 쫓겨나게 됐어요. 그래서 최능진씨에게 그 얘기를 전했는데, 그 양반이 학생들 안 쫓겨나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좋아했어요.

최능진씨에 대해서는 현대사 연구하시는 분들이 관심을 기울여주기 바랍니다. 그분은 1952년 한국전쟁 당시 이적활동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는데, 왜 사형을 당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한 가지 짚이는 게 있긴 해요. 최능진씨는 1948년 5·10선거 때 이박사가 출마한 서울 동대문구에서 입후보했습니다. 그는 이박사를 꺾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단일 후보가 출마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이박사에 맞서 출마했던 겁니다.

박 :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강 : 그렇지는 않았어요. 저는 최능진씨의 말을 믿습니다. 그분은 이박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최능진은 일제 때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렀다. 수양동우회는 당시 이승만과 갈등관계였던 안창호 계열의 기독교인들이 만든 단체다). 박교수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박 : 제가 알기로 최능진씨는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반전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9·28 수복 이후 인민군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게 됐고, 결국 처형됐습니다.

강 : 그것은 조작이라고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수많은 사람이 조작으로 죽어갔습니다. 제가 아는 최능진씨는 사상적으로 진짜 우익입니다. 그건 틀림없어요. 우익이지만 이승만 라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병옥이나 한민당 계열도 아니었죠. 잘은 몰라도 안창호 라인이 아니었나 해요.

여운형, 이승만 모욕받고 퇴장

박 : 미군정 시기에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인물은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이던 버치 중위입니다. 미군정 관련기록들을 보면 버치 중위가 당시 정치공작의 핵심에 있었던 것 같아요. 좌우합작위원회 1차 모임이 열린 곳도 버치 중위의 집이었습니다. 여운형 선생이 조선인민당에서 나와 사민당을 만들 때도 그가 관련됐고, 남북협상 당시 김구·김규식 선생에게 북한에 가지 못하도록 종용했던 사람도 그였습니다. 버치 중위를 직접 만나거나 그에 관한 얘기를 들으신 게 있습니까.

강 : 버치 중위와 사적으로는 몰랐지만, 그는 당시 제가 활동한 분야와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미군정에서 정치적인 역할은 그가 주로 했죠.

박 : 겨우 중위 계급으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강 : 어떤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어요. 1946년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을 만들고 2월14일 첫 회의를 할 때 여운형 선생이 참석하기로 돼 있었어요. 그때 제가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좀 알죠. 그날 민주의원 회의를 라디오에서 중계했어요. 여운형 선생이 회의장에 좀 늦게 들어왔는데, 그때 이승만 박사가 짐짓 모른 체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누구죠?” 하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근로인민당 당수입니다” 하자 이박사는 “아, 피플스 파티(People’s Party), 피플스 파티” 하면서 “저쪽에 앉으시오” 하는 거예요. 그날 회의 참석자가 28명인가 됐는데, 가장 말석에 김선이라는 여성이 앉아 있었어요. 여운형 선생더러 그 옆에 가서 앉으라고 한 겁니다.

박 : 여운형 선생이 회의장에 들어오기는 들어온 겁니까.

강 : 제 기억으로는 그래요. 분명히 라디오에서 그렇게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박사가 그렇게 나오니까 여운형 선생이 화가 나서 나가버린 겁니다. 뒤에 박갑동이라는 당시 ‘경향신문’ 기자에게서 그날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박기자는 좌익 쪽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말로는 여운형 선생이 참석하기로 해서 명패까지 다 만들어 놓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안 오니까 버치 중위가 들어와서 여운형 선생의 명패를 들고 나갔다는 겁니다.


광복 후 거리로 쏟아져나와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는 군중들.  

그런데 얼마 전에 작고한 송남헌씨(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에 따르면 여운형 선생이 회의장 밖까지 오긴 했지만, 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냥 갔다는 겁니다(여운형이 민주의원에 참석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좌익세력 중 일부가 그를 납치해 협박했다는 설도 있다). 누구 얘기가 정말인지는 모르겠어요. 여하간 버치가 명패를 가지고 나간 것은 사실인 듯한데, 버치가 민주의원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게 틀림없어요. 주로 그런 정치공작을 담당했던 거죠.

당시 저와 자주 접촉한 사람은 미군내 정보 책임자인 로버트 키니였습니다. 그가 실제로 한국 정치관계를 총괄한 사람이에요. 그 다음으로는 예비역인 하우스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 생각으로는 버치가 현장에 나가서 활동했고, 키니와 하우스만이 이를 종합하는 식으로 역할분담을 한 것 같습니다. 저와 키니의 얘기를 글로 쓰면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나올 겁니다. 그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만났어요. 키니는 1980년대에 하와이에서 죽었는데, 그가 하와이에 살 때 그 사람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키니는 백낙준 박사와도 친했죠. 키니 얘기를 하면 박정희 시절 얘기까지 나오니까 길고 복잡한 사연이 많습니다. 이 사람과 관련된 얘기는 다음 기회에 나눠보기로 하죠.

부안사건의 진실

박 : 목사님의 책에 언급된 광복 이후의 정치적 사건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 두 가지는 애국부녀동맹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관련됐다는 부분과 부안군 농민사건입니다. 먼저 애국부녀동맹과 정판사 얘기부터 들려주시죠.

강 : 당시 서울 혜화동에 여자의학전문학교가 있었어요. 그 학교에서 제가 매주 화요일에 강연을 했습니다. 학생들이 꽤 많았어요. 거기에 박은성이라는 사람이 나이가 가장 많고 가톨릭 신자인데 위원장이었죠. 그 밖에 홍만길, 나신애 등 30명 정도의 젊은 여성이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애국부녀동맹을 조직해서 반공운동을 했죠. 그런데 이 여자들이 정판사 옆에서 잠복을 하다가 위조지폐를 찾아낸 겁니다. 이들 뒤에는 신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굴을 안 드러내고 뒤에서 이들을 조종했죠. 애국부녀동맹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나와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제가 이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여운형, 김규식의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는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선에 들어와서 일하면서 저와 가까워졌어요.

박 : 당시 좌익에서는 정판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군정이 자신들을 탄압하려고 조작했다는 거죠.

강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 상황을 고려하면 미군정이 그걸 조작했을 리 없다고 봐요.

박 : 1947년 3월에 일어난 부안군 농민사건은 그간 해방 정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었는지 설명을 좀 해주세요. 그때 조사관으로 현지에 내려가셨죠?

강 :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당시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어요. 지방신문들이 조금 다뤘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미군정이 공출한 쌀을 배급받고 살았는데, 1946년에 전라도 산악지대에선 농사가 제대로 됐지만 부안, 김제 등지에선 형편없었어요. 평야지대에서는 질소비료를 써서 농사를 짓는데, 질소비료 공장이 함경도 흥남에 있었거든. 그런데 남북간에 교역이 끊겼으니 비료를 쓸 수가 없게 됐잖아요. 그러니 흉작도 그런 흉작이 없었지.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 쌀 공출을 실시한 겁니다. 미군정은 현지 실정을 조사해 공출 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일제시대 공출 문서를 가져다놓고 그것대로 밀어붙였어요. 농민들이 통지서를 받고 보니까 1년 지은 농사를 다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이었습니다.

그 무렵 부안 인구가 15만쯤 됐는데, 글 못 읽는 사람이 9만이었어요. 사상이고 뭐고가 없었어요. 물론 거기에 공산당이 들어갔던 건 사실이에요. 그들이 농민들에게 “일제 때는 공출 다 하고도 먹을 게 있었는데, 해방된 마당에 이게 무슨 일이냐. 군산 앞바다에 미국 배들이 잔뜩 들어와서 우리 쌀 다 실어간다”며 공출 반대를 선동했죠. 경찰들도 그걸 단속할 만한 힘이 없으니 내버려둔 겁니다. 내버려두니 공출한 셈치고 먹자며 떡도 해먹고 술도 만들어 마셨죠. 그렇게 겨울을 났는데, 봄이 되면서 곡식이 들어오지 않으니 배급을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그제서야 정부가 경찰조직을 동원해서 강제로 걷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처음에는 우익청년단체들을 들여보내 테러를 하고 뒤이어 경찰이 투입됐습니다.

박 : 청년단이 들어갔다고요? 대구 10·1사건과는 양상이 좀 다르네요.

강 : 대구사건과는 달랐어요. 일단 청년단체들이 들어가서 한번 휩쓸고 난 다음에 경찰이 들이닥친 거예요. 그러니까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은 전부 산으로 도망가고 노인과 어린이들만 남았습니다. 산으로 도망친 이가 수만 명인데, 먹을 것도 없는 산에서 이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때 공산당이 다시 들어옵니다. 그들이 “어차피 죽을 것, 싸우다 죽자” 면서 폭동을 일으킨 겁니다. 처참했어요.


누가 그들을 죽였나


박 : 양쪽 다 피해가 컸겠군요.

강 : 그랬죠. 경찰들이 몰려와서 산에 있는 사람이나 집에 있는 사람이나 마구잡이로 잡아들였어요. 쌀 보관할 창고에다 사람을 밀어넣고 죽였죠. 제가 현장 조사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연락을 했는데, “즉각 공출을 중지하고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청했어요. 결국엔 군청에서 공출을 중단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으니까. 저는 부안사건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제주 4·3사건 등 광복 이후에 불거진 유혈사태들을 일컬어 한쪽에서는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하고, 운동권 좌익에서는 조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조작은 아니에요. 공산당이 개입한 건 분명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이 공산당의 말을 믿고 들고일어났을까 하는 겁니다.

박 :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씀인가요.

강 : 그렇죠. 당시의 사회적 조건이,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대구사건도 그렇고, 4·3사건도 그런 겁니다. 이것도 현대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대구사건 때도 제가 현지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당시 총지휘자가 경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재복 목사였고, 부위원장은 저의 중학교 때 스승인 최문식씨였어요. 미군정은 최문식 선생을 통해 사건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최문식 선생이 라디오에 출연해 “우리는 피를 나눈 동포 아니냐. 동포끼리 죽여서야 되겠냐.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고 하고 나왔는데, 경찰이 바로 잡아갔던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러 박정희가 집권하고 난 뒤에 알아보니까 대구사건의 진짜 주동자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 그리고 이북에서 넘어왔다 죽은 황태성, 조치기였어요.

이런 사건들에서 희생된 사람을 다 합치면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만큼이나 될 겁니다.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해도 아직껏 그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어요.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들을 다 덮어놓고 있어요. 나라가 바로 서려면 이렇듯 숨겨진 역사를 밝혀내야 합니다. 이젠 관련자들도 거의 다 죽었을 테니까 처벌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사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후손에게라도 명예를 회복시켜주자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환경은 이쪽에서 만들었고, 그것을 이용한 것은 좌익 아니었습니까.

박 : 광복 직후의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1948년 이후의 사정은 오늘 다 듣기 어렵겠군요. 조봉암, 박정희, 그리고 미국 대사관 등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호로 넘기겠습니다.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姜 元 龍
●1917년 함남 이원 생
●일본 메이지학원 영문학부·한신대·캐나다 매니토바대·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 졸업
●경동교회 목사,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이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중앙위원, 방송위원회 위원장
●(現)대화문화아카데미 명예이사장, 경동교회 명예목사,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평화포럼 이사장
●저서 : ‘강원용 전집’ ‘한국신학의 뿌리’ ‘빈들에서’ ‘역사의 언덕에서’ 등  

  
  朴 泰 均
●1966년 서울 생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연구원
●KBS ‘특별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상임자문위원,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자문위원
●저서 : ‘조봉암 연구’ 등
●논문 : ‘1956~1964년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성립과정’ ‘5·16과 미국’ ‘1950년대 경제개발론 연구’ ‘1961~1964년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수정’ 등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발행일: 2003 년 12 월 01 일 (통권 531 호)
쪽수: 400 ~ 413 쪽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진보당 바람을 일으키며 두 차례나 대통령선거에 출마, 이승만과 맞선 죽산(竹山) 조봉암.
두 번째 출마 때는 파렴치한 부정선거 속에서도 간발의 차로 낙선해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진보당은 풍비박산이 나고, 조봉암은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박태균 : 지난호 ‘신동아’에 목사님과 나눈 대담 기사가 나간 이후 몇몇 독자께서 질문을 보내왔습니다. 하나같이 매우 수준 높은 질문들이어서 우리 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께서 이승만 박사가 우익 내부에서 임시정부를 제치고 세력을 확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임시정부가 1946년 초에 조직한 비상국민회의가 민주의원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이승만이 우익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듯합니다만….

강원용 :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서 국내로 들어올 때 국민에게 공약을 한 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27년간 내려온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해서 거기에다 정권을 넘기겠다는 것이었어요(1941년 제정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는 귀국 후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비상국민회의가 1946년 2월1일 결성됐습니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결성식이 열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제가 가장 나이 어린 대의원이었습니다. 연도에 기마경찰들이 쫙 늘어서 있는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사로 치러졌죠.

후에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씨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됐는데, 회의 시작 무렵 미술가인 고희동(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며, 4·19 이후에는 민주당 소속 참의원 역임)씨가 ‘긴급동의’를 했어요. “지금 시국이 긴급한 상황이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 조직을 오래 끌지 말고 이승만·김구 두 분에게 전권을 위임, 새로운 정부조직(최고정무위원회)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어나 “아니, 세상에 임시정부를 긴급동의로 세우는 나라가 어디 있냐”고 반대했지만, 고희동씨는 “빨리빨리 해야 된다”며 긴급동의안을 읽었어요. 내 기억에 당시 대의원이 202명이었는데, 102명의 도장을 받아서 내놨습니다. 그렇게 통과됐던 거예요(1946년 2월2일자 신문에는 201명 초청에 164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2월3일자에는 권동진 외 100명의 연서로 이뤄졌다고 되어 있다). 나중에 내가 나갈 때 뒤에 앉아 있던 항일 국어학자 이극로씨가 잘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줍디다.

박 : 그것이 첫 회의였습니까?

강 : 그렇지요. 그날 저는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새 정부를 세우면서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는 거죠. 우리가 정부를 세우는 날인데, 당시 미군정 책임자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뉴맨인가 하는 이름의, 별로 계급도 높지 않은 사람이 참석했을 뿐이에요(당시 신문에는 대령급 인사로 나와 있다). 그 사람이 군정사령관과 군정장관의 축사를 대독했어요. 그런데 그 축사란 게 ‘국민들은 굶고 있는 형편에 당신들은 여기에서 뭐 이런 짓을 하고 있냐’는 내용이더라고요. 축하하러 온 게 아니라 비꼬러 나왔던 겁니다.

박 : 그때 임시정부와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미군정은 강력한 반탁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임시정부 요인 경호원들의 무기를 압수하기도 했고, 김구 선생을 미군정으로 불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죠.

미군정과 臨政의 기싸움

강 : 사이가 안 좋았어요. 미국은 임시정부가 들어오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니까. 미군정은 임정이 들어오려면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임정은 조직을 전부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 이름으로 비상국민회의를 여니까 미국 사람들 보기엔 약속위반이었던 거죠. 비꼬는 듯한 연설을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미국으로선 그 사람들을 모아 새 정부를 만들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인 버치 중위가 왔다갔다하면서 만든 게 민주의원(정식 명칭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입니다. 28명인가, 30명인가로 만들었어요(민주의원 회의 참석을 거부한 여운형을 포함해 28명). 이승만 박사가 의장,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부의장을 했는데, 내용을 보면 이승만·김구 두 사람이 다 한 겁니다. 그때 국민들은 김규식 박사를 포함해서 ‘3영수’라고 불렀는데, 실제로는 두 사람에게 위임했기에 영 마뜩지 않았어요.


박 : 민주의원을 만든 2월14일은 북한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된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3월로 다가온 미소공동위원회를 염두에 두고 미군정 쪽에서 민주의원을 급조했으며 이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강 : 명동성당에서 열린 비상국민회의에서 정부 조직을 이승만·김구에게 위임한 것은 미군정측이 조정한 결과입니다. 특히 버치 중위의 역할이 컸던 듯싶어요. 임시정부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비상국민회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미국측이 개입한 게 아닌가 싶어요. 북한에 대한 미군정청의 대응과 관련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 : 말씀 중에 이극로씨 이야기가 나왔는데, 유명한 국어학자이지 않습니까. 이극로씨는 중간운동을 좀 하다가 조봉암씨와 손잡고 제3전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전선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려 하자 김규식 박사가 거부한 것으로 압니다.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죽산(竹山) 조봉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해방 직후 상황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강 : 조봉암씨는 공산당 인천지구당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박헌영하고 노선을 달리해서 신문에 ‘박헌영 동무에게 보내는 글’을 쓰고 탈당했죠. 그런 글을 두 번인가 썼어요(조봉암은 1946년 4월말 미군정에 체포됐고, 그 직후 미군정이 그의 사무실을 수색하다 편지를 발견했다. 그가 미군정에서 풀려난 직후 그 편지가 신문에 실렸고,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에서 탈당하고 전향하겠다고 선언했다). 조봉암씨는 탈당한 후 김규식 박사를 만나려고 했는데, 김박사가 이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제가 김규식 박사한테 “만나야지 왜 거부합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한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하는 겁니다.

그 무렵 조봉암씨가 공산당을 탈당한 게 아니라 박헌영이 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앉혔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조봉암은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박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은 절대 안 돼”

박 : 김규식 박사가 조봉암씨를 그토록 신뢰하지 않았습니까?

강 : 김규식 박사가 중간노선을 취했다며 불그스레한 사람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 양반은 철저한 반공이었습니다. 미군정에서는 김규식 박사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적십자사 총재를 시켰죠. 그런데 적십자사 이사로 각 정당 대표가 다 들어오는 바람에 박헌영이 이사가 됐어요. 그러니까 김규식 박사가 “나는 박헌영이 이사를 맡은 조직에 앉아서 일 못한다”는 거예요. 김규식 박사가 그런 사람이거든. 그래서 제가 김규식 박사더러 “그렇게 공산당을 싫어해서야 어떻게 좌우합작을 합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김 박사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이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보니 공산당이라고 하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조봉암씨가 들어오지 못하고 이극로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든 거죠. 여기에는 나중에 이북에 가서 거물이 된 사람들이 여럿 들어왔습니다.

저는 독립전선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어요. 이 사람들이 중앙위원 명단을 발표하면서 거기에다 제 이름을 집어넣은 겁니다. 저는 독립전선에 가담한 일이 없거든요(강원용 목사는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김규식의 주도로 조직된 민족자주연맹에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했다). 당시 전북지방에 자주 강연하러 갔었는데, 한번은 거기에서 차를 세우려니까 잘 아는 장로 한 사람이 차에 뛰어오르더니 “내리지 마십시오” 해요. 왜 그러냐니까 “내리면 테러당해 죽습니다” 하는 거예요. 까닭을 물으니 제가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 돼서 그렇다더군요. 그 무렵 제가 전북 일대에 강연을 하면서 바람을 일으켰는데, 보수파에서 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보수파에서는 저를 초청한 이승만 박사 계열의 김춘호라는 사람까지 징계했을 정도예요. 그런 분위기에서 조봉암과 이극로 같은 이들이 중간세력으로 나서려다 결국 와해되고 말았죠.


조봉암 끌어들인 이승만의 속셈

박 :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와해된 듯합니다. 그 결과 이극로 계열은 북으로 올라가고, 조봉암 쪽은 남에 남았고요.

강 :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때 조봉암씨가 이극로씨랑 그걸 하다 5·10 선거에 참가했어요. 5·10 선거는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 반대했습니다. 저도 반대 일선에 섰고요.

박 :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갔더니 이극로씨 묘지가 있더군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요?

강 : 그 사람이 왜 북에 남았는지는 분명치 않아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는 대부분이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는 겁니다. 1948년 유엔총회 결의-유엔이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던 시절이니-대로 단독선거를 하면 나라가 동강날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방되고 3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분단이 되게 생겼으니 다들 반대할 수밖에요. 남쪽에다 정부를 세우면 이북에 또 정부가 설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전쟁으로 가는 것 아니냐, 그러니 이건 절대로 안 된다면서 들고일어났죠. 이승만 박사는 이미 1946년에 단독정부라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이 양반 머릿속엔 어떻게든 대통령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박 : 만약 장덕수씨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의원내각제로 갈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강 :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죠. 어쨌든 한국민주당과 서북청년회말고는 전부 5·10 선거에 반대했습니다. 미국도 순우익들만으로 선거가 치러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어요. 그래서 이승만 박사가 남한 정부에는 우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봉암씨를 끌어다 넣고, 그 다음에 김구 선생 계열에선 신익희씨를 끌어넣은 것이죠. 신익희·조봉암을 끌어넣음으로써 충칭 임시정부 계통에서 좌익 인사까지 망라됐다는 인식을 주려 했던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봉암이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가 5·10 선거에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산당에서 탈당하더니 5·10 선거에도 참여했고, 거기에서 당선돼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했잖아요. 너무 왔다갔다한다 싶었습니다.

요시다 총리도 혀 내두른 정략가

박 : 저도 그 점이 1950년대의 소위 혁신세력들이 조봉암씨를 신뢰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와 갈등관계였던 박헌영이 북한에서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로선 남한에 남아서 선거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 : 제가 보기에 조봉암씨는 원래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신봉했다기보다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그 방편으로 내세운 듯합니다. 일제시대에는 공산당과 민족주의자 사이에 별로 갈등이 없었습니다. 저도 감옥에 있을 때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피차 생각이 다르지 않았어요. 어떻게 민족을 독립시킬 것인가 하는 생각들만 했으니까.

박 : 미군정 자료를 보면 조봉암씨가 전향하는 과정에도 미군정이 개입했고, 전향한 다음에도 조씨가 미군정 장관들을 여러 차례 만나 “내가 공산당을 누를 수 있는 당을 만들 테니 지원해달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조봉암씨에 대해서만 유독 ‘가짜 전향’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강 : 저는 가짜 전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조봉암씨를 위해 여러 번 증언하기도 했지만, 그 사람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확실한 증거를 하나 들어볼까요? 6·25가 나서 사흘 만에 서울이 무너지자 국회의원들이 다 도망가버렸어요. 그때 조봉암씨가 국회에 있던 비밀문서들을 자기 차에다 싣고 빠져나왔는데, 문서를 차에 가득 싣느라 부인을 태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인이 거기서 죽었어요. 그 사람이 이북하고 통합하려 했던 사람이라면 인민군들을 영웅으로 맞이했지,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그 사람이 지조가 굳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변절을 모르는 지사형 정치가가 아니었어요. 그는 대단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현실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적어도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까지나 이극로씨와 돌아다녀선 될 일이 없을 것 같거든요. 그렇게 판단하고는 마침내 이 박사와 손을 잡고 나온 겁니다. 물론 이 박사도 그 사람을 이용한 것이고. 이걸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박사는 탁월한 정략가(politician)예요. 아마 정략가로서는 대한민국 역사에, 아니 미래에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무렵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나는 정치적으로는 이 박사의 상대가 못 된다”고 털어놨을 정도예요. 미국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미 의회에서 증언할 때 “이 박사 앞에 있으면 커다란 바위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고 했죠.

조봉암씨가 그런 이 박사에 맞서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는데, 저더러 선거사무장을 맡아달라길래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부산의 박기출-나중에 진보당 부위원장을 지냈는데-이라는 사람 집에 저를 초청했어요. 갔더니 이은상씨 등도 와 있더군요.

박 : 노산(鷺山) 이은상 말입니까?

강 : 그래요. 시인 이은상씨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봉암씨가 제게 또 선거사무장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그저 대통령 입후보자라는 이름이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가. 그렇다면 당신 머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승만하고 맞붙어 싸우려 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조봉암씨가 “정치적으로 이승만은 어른이고 조봉암은 어린아이다. 정치적으로는 내가 이승만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어요.

“농림부 장관 시절 나는 쌀 공출에 반대했고, 미군정은 쌀 공출을 주장해서 갈등이 생겼다. 그때 이 박사가 미군 책임자와 나를 불러서 의견조율을 했다. 미군정 사람들은 ‘쌀 공출을 안 하면 많은 국민이 굶게 된다’고 했고, 나는 ‘당신들은 카우보이 기질 때문에 밤낮 밀어붙이기만 하는데, 조선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하고 맞섰다.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이 박사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미군들에게 ‘우리 조 장관의 생각도 당신들과 같은데 영어를 못 해서 뜻이 잘못 전해졌다’며 미군들을 달래 보냈다.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 이 박사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 생각이 내 생각과 분명 다른데 왜 같다고 했냐’고. 그랬더니 이 박사가 ‘장관 마음대로 해,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라고 했다. 이 박사는 그 정도로 고단수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런 사람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물러나지 않으면 나라도 안 되고, 또 이승만 자신도 불행해진다.”

결국 조봉암씨는 이 박사를 견제할 목적으로 출마를 결정한 것 같아요. 그는 “이 박사가 언제까지나 혼자 해먹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조봉암의 야심

박 : 제헌선거 후 조봉암씨가 농림부 장관을 할 때 식민지 시절 같이 활동한 분들이 농림부에 많이 들어갔더군요. 대표적으로 조봉암씨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임원근씨도 농림부에 들어갔고. 그때 목사님은 제의받은 게 없습니까?

강 : 제게는 농민운동을 한번 크게 일으켜보라면서 농림부 지도국장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농민운동 할 사람들을 훈련시키라면서 지금의 서울시립대학 자리를 내줬습니다. 제가 정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해서 경제학자 조동필 교수가 대신 들어갔어요. 조봉암씨는 농림부 장관을 맡으면서도 꿈이 있었어요. 그때는 노동자 세력이 크지 않았으니까 농민들을 조직화해 정치세력을 형성하려 했습니다. 5·10 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고 농림부 장관이 됐지만, 그런 뜻을 품고 있었기에 이 박사 밑에서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농민과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겁니다.

조봉암씨는 농림부 장관을 그만두고 나와서 제2대 국회의원이 된 뒤 국회부의장을 했는데, 저는 그 과정이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2대 선거 얘기를 좀 하지요. 1950년 6·25가 일어나기 직전인 5월30일에 선거를 치렀는데, 이때는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나왔어요. 서울 성북구에서는 조소앙씨와 조병옥씨가 맞붙는 등 지역마다 접전이었습니다. 또 중구에선 최동오, 성동구에선 김붕준, 경기도 평택에선 안재홍 등 중간파 거물급들이 다 나왔죠.

그런데 5·30 선거는 정말 상상하기조차 힘든 부정선거였습니다. 이들에 대해 어마어마한 탄압을 했어요. 이 사람들이 죄다 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면서 체포령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숨어지내야 했죠. 그랬더니 투표소 앞에다 후보 사퇴했다고 써붙였어요. 성동구에 출마한 김붕준씨는 체포령이 내리니까 숨어 있다가 선거 당일인 5월30일 아침에 차를 떡하니 타고 선거구로 들어갔습니다. 선거구 주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서야 아, 저 사람이 사퇴한 게 아니구나 했던 거죠. 결국 김붕준씨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표 차이가 크지 않았어요.


그때 김붕준씨 선거사무장이 제 친구인 이명하였는데, 선거사무위원회에다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개표 현장에 참석하지도 못하게 하니까 “우리가 보는 앞에서 개표하라”고 길길이 뛰었죠. “단 한 표 차이에라도 떨어지면 내가 자결을 하겠다, 우리가 분명히 다득표로 이겼다”면서. 그러는데도 끝내 개표를 안 하더군요. 개표하지도 않고 그냥 떨어진 걸로 만든 겁니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중간파 인사들이 많이 당선됐어요. 윤기석씨, 조소앙씨, 안재홍씨 같은 분들이었죠.

제가 보기에 그런 인물들에 비하면 조봉암씨는 작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조소앙씨나 안재홍씨를 국회부의장에 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나섰습니다. 어느날 아침 조봉암씨 집엘 갔더니 목욕을 하고 나오더라고. “(조소앙씨나 안재홍씨를 국회부의장으로 앉히기 위해) 당신이 나서서 운동 좀 해주시오” 하니까 “잘 알겠다”고 합디다. 이의를 달지 않았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자기를 위해 운동해서 스스로 부의장이 됐거든. 그래서 제가 아, 이 사람이 공산당을 해봐서 그런지 정치적 술수가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조봉암씨는 그처럼 철저한 현실주의자, 현실 정치가였어요. 나름대로 야심도 있었고.

박 : 조봉암씨와 한국민주당은 사이가 아주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가 농림부 장관을 할 때는 한민당이 농림부 장관 사퇴 결의안을 냈고, 나중에 민주당 만들 때도 그가 민주당 만드는 데 참여하겠다고 하자 한민당 계열의 반대가 가장 심했잖습니까. 특히 공산주의 하다가 전향한 김○○씨가 극렬하게 반대했고 조병옥씨도 반대했죠.

강 : 김○○은 일제시제 ML당이었는데, 이 사람은 공산당이 하는 못된 버릇이란 못된 버릇을 다 갖고 있던 자였어요. 길거리에 흑색선전 포스터 붙이고 하는 건 그 사람이 다 했는데, 가령 ‘김규식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적산을 팔아 돈을 벌었다’는 글을 써붙이기도 했어요. 김규식 박사는 부인이 재봉틀을 돌려 생계를 꾸릴 정도로 빈한했는데 그렇게 모함을 한 겁니다(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장 때 모함을 받은 사건). 그런가 하면 안재홍씨가 공창연합회에서 돈을 받아먹었다고 한 것도 김○○의 소행이었죠.

서북청년단 출신 선거사무장

박 : 1956년에 조봉암씨가 제3대 대통령후보로 나왔을 때 유력한 후보였던 신익희씨가 급서했습니다. 그래서 조봉암씨로 야당 후보가 단일화됐는데, 그때도 김○○씨가 신문에 성명을 냈더군요. ‘조봉암을 지지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을 지지하겠다’고.

강 : 김○○은 한민당에서 가장 질이 안 좋은 사람이었어요. 저는 아예 관심도 안 가졌죠. 그래서 제 책에서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당시 서울시경 정보과장이 노덕술인데, 그 사람이 일제 총독부 밑에서 독립군 잡아넣던 인물 아닙니까. 그 사람과 밤낮으로 음모를 짜내던 게 김○○입니다. 모략을 해서 뒤집어엎는 일을 전문적으로 한 사람이니까 조봉암보다는 이승만을 지지했겠죠.

박 : 다시 1952년의 2대 대통령선거 때로 돌아가보죠. 당시 조봉암 후보의 선거사무장은 서북청년단 부단장을 했던 김성주씨였습니다. 조봉암씨가 서북청년단 출신을, 그것도 부단장까지 했던 사람을 선거사무장에 앉히다니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강 : 제가 선거사무장을 안 한다고 하니까 윤길중씨와 김성주씨를 끌어들인 겁니다. 김성주씨는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6·25 후에는 평안남도 지사까지 한 사람이에요. 조봉암씨가 저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사상적인 이유 때문이었는데, 김성주도 그런 이유로 끌어왔던 것 같아요. 저한테 무슨 정치적 역량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산당을 했던 조봉암으로선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저를 택했던 듯합니다. 제가 기독청년운동을 했으니 저 같은 사람을 내세우면 사상 면에서의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본 거죠. 그런데 제가 안 한다니 김성주를 시킨 겁니다. 이승만 정부는 그가 서북청년단 출신인 데도 결국 죽여버렸죠.

조봉암씨가 대통령선거에 나오면서 저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많이 끌어넣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던 1953년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습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한국 신문을 보면서 그가 진보당을 만들고 진보당 창당대회를 연 것도 알게 됐죠. 조봉암씨가 1956년 3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한 것도 미국에서 신문을 보고 알았죠. 신익희씨가 서거하자 신익희씨 지지표까지 끌어들여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여오는 목덜미

박 : 귀국하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강 : 1957년 10월입니다.

박 : 진보당 사건이 터지기 두어 달 전이군요.

강 : 그렇습니다. 그때는 김포에 비행장이 없었고 오산에 있었어요. 오산비행장에 내리니 여러 사람이 마중을 나왔는데, 이명하, 김기철 등 진보당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박 : 김기철씨라면 한국독립당에 관여했던 인물인데, 그가 쓴 통일론이 좀 급진적이어서 진보당 사건 과정에서 문제가 됐죠.

강 : 김기철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기질이 곧은 사람이었어요. 아마 전기공 같은 일을 했을 겁니다. 머리가 비상하리만큼 좋았고, 사상적으로는 철두철미 중간파였습니다. 다 저와 친했던 이들이라 비행기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그 중에 전혀 얼굴을 모르는 한 사람이 다가와서 손을 잡더니만 “아이구, 강 동지 오래간만이야” 하는 거예요. 제가 당황해하니까 마중나온 아내가 “인사 그만하고 얼른 차를 타라”고 하더군요. 차를 탔더니 차 안에서 아내가 사정을 들려줍디다.


며칠 전에 경찰 정보과에서 누군가가 찾아와서 “당신 남편이 귀국할 때 조봉암이 비행장에 나간다고 하더라. 만약 조봉암이 비행장에 나가면 당신 남편은 한국에 와서 아무것도 못한다. 경찰이 눈여겨보고 있다”고 귀띔을 하고 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조봉암씨 집에 찾아가서 싹싹 빌었대요. 제발 비행장에 나오지 말라고. 그랬더니 조봉암씨가 “그러면 내가 안 나가는 대신에 친구들을 내보내겠다”고 하더랍니다. 아내가 그래도 걱정이 돼서 당시 육군 소장으로, 저와 회령에 있을 때부터 친했던 박남표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답니다. 박남표는 생각 끝에 자신과 친한 자유당 국회의원 안동준(후에 관광공사 총재 역임)에게 “네가 비행장에 나가서 강원용과 친한 것처럼 행동해달라”고 부탁했대요. 그러니 저는 영문도 모르고 인사를 한 거죠. 그때 이미 진보당 인사 주변에 경찰이 쫙 깔렸던 겁니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이명하가 찾아왔더군요. 이명하와는 부모님들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명하는 “오랜만에 귀국했다고 부모님이 당신한테 인사를 하고 싶다시는데, 여기에 앉아서 인사를 받겠냐, 아니면 나랑 같이 가서 인사를 드리겠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아, 내가 인사를 드려야지” 하면서 제가 따라나섰죠. 그런데 가다보니까 길이 좀 달라요. 대문도 다르고. 알고 보니 조봉암씨 집이었어요. 자기 부모를 만나게 한다면서 조봉암한테 데려간 겁니다. 집으로 들어가니 윤길중, 김기철 등이 죽 앉아 있어요. 그래서 같이 밥을 먹는데, 조봉암씨가 “강 동지가 돌아와 정말 반갑다”고 했습니다. 제가 “작년(1956년 대통령선거)에 상당히 잘 했는데, 아직도 대통령 꿈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내가 이긴 건데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해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인데,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목도한 매카시즘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당신이 대통령 되기는 틀렸다”고.

미국 지지 확신한 조봉암

박 : 매카시즘이 1950년대 후반에도 심했습니까?

강 : 그럼요. 공산주의자들이 여는 독서클럽 같은 데 한번 참석하면 면서기도 안 시킨 게 그때 미국이었어요.

박 : 1959년에 아이젠하워가 흐루시초프를 만났는데, 그 전부터 해빙 조짐이 보이진 않았나요?

강 : 두 사람이 만나서 분위기가 좀 달라졌지만, 그 전까지는 매카시 선풍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파들이 장악한 CIA의 경우에는 그런 성향이 더욱 강했어요. 제가 그 얘기를 하면서 “한국이 미국의 최일선 기지인데, 당신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조봉암씨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어요. 자기가 미8군 사령관도 만나고 미국대사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남북 문제는 평화적 해결 외엔 방법이 없다. 그 일에는 당신이 적임자니까 당신이 해야 된다”고 했다는 겁니다.

박 : 미국이 그렇게 내놓고 얘기를 했다는 겁니까?

강 : 대사와 8군 사령관이 다 그랬다고 해요. 더구나 그들은 한술 더 떠서 “당신이 한국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힘들겠지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8군 사령관이 매일 아침 자기 부하를 조봉암씨에게 보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 미국이 왜 자기를 싫어하겠냐는 얘기죠. 조봉암씨는 미국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확고하게 믿었어요. 그런데 미국이 정치하는 방식이 그렇잖아요. 이승만 박사의 정치가 영락없이 미국식이거든. 항상 양쪽을 나란히 붙들고 대립을 시켜요.

윤길중 등은 그런 미국의 속내를 모르고 “미국이 조봉암 선생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해선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건 믿기 어렵다”고 하고 말았는데, 조봉암씨는 “나는 당신이 좋으니까 당신 보러 주일마다 경동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더군요. 교회에 나오겠다는데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랬더니 제 아내가 또 조봉암씨를 찾아가서 제발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조봉암씨가 성당을 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그 사람은 결국 천주교도로 죽었을 겁니다.

박 : 당시 미국대사관에 토머스라는 문관이 있었는데, 그 사람 얘기로는 자기가 조봉암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조봉암씨를 만나 얘기를 듣고 성향을 파악해서 본국에 보고하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마침 자기가 잠깐 한국을 떠나 있을 때 진보당 사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 얘기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조봉암씨가 미국과의 관계를 그처럼 확신했던 건 사실인 모양이죠.

강 : 자세한 사정은 저도 알지 못해요. 저는 귀국하자마자 교회를 맡았으니까 진보당 일에 관여할 수 없었죠. 그때 제가 아는 분 중에 김일사라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중국에서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오래 한 사람인데, 저를 무척 아꼈죠. 하루는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귀국했으니 점심을 사겠다며 반도호텔에서 만나자고 합디다. 그래서 할머니하고 유명한 추어탕집엘 갔는데, 거기에 조봉암씨가 앉아 있는 거예요. 할머니는 “두 사람이 얘기하라”며 곧 자리를 떴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봉암씨와 추어탕집에서 마주앉게 됐는데, 그게 조봉암씨가 체포(1958년 1월)되기 며칠 전이었어요.


“더는 못 견디겠다”


박 : 그 자리에서 조봉암씨가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강 : “진보당은 아주 탄탄한 조직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요지였어요. 그때 진보당 조직국장이 이명하였습니다. 이명하는 두 형이 공산당에 맞아 죽은 사람이라 중간파지만 반공의식이 있었어요. 이런 사람이 조직국장이다 보니 진보당은 공산당 출신은 물론, 과거에 공산당 관련단체에 좀 관계했던 사람도 절대 당원을 안 시켰어요. 그날 조봉암씨는 “진보당은 서민층을 파고든 탄탄한 조직인데, 내가 계속 붙들고 나가다가는 나도 죽고 진보당도 해체된다. 나는 죽더라도 진보당은 살리고 싶다”며 “그래서 나는 탈당할 테니 당신이 진보당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얼토당토않은 얘기 하지 마라. 내가 지금 목사 노릇을 하고 있는데 왜 거기엘 들어가냐. 못 하겠다”고 하니 조봉암씨 표정이 어둡습디다. 자기는 당을 살리기 위해 물러날 생각으로 처음에 신흥우씨를 교섭했는데 잘 안 됐대요. 그래서 나중에는 장택상씨한테도 부탁했는데, 장택상씨가 “그러려면 당명부터 고쳐야겠다”고 해서 그렇게까진 못 하겠다고 거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까지 싫다고 하니까 “당신과 친한 사람을 소개해달라. 해외에 있는 사람도 좋다. 다만 진보당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된다”는 거예요.

바로 그때 신문 파는 사람이 “신문이요, 신문” 하면서 지나가더군요. 조봉암씨가 신문을 한 부 사서 펴보더니 얼굴이 새파래지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더니 “나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가봐야겠다”면서 급히 나가더라고. 그게 제가 조봉암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어요.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온다는 것을 직감했던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피하고 진보당은 살리려 했던 것이죠.

박 : 그때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났길래 그렇게 놀랐을까요? 혹시 박정호 간첩사건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인 박정호는 체포되기 전에 조봉암씨 집을 방문한 것으로 밝혀졌거든요. 방문은 했어도 조봉암씨를 만나지는 못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강 : 그 때문이었을까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신문을 보더니 내용은 말하지 않고 놀란 얼굴로 사라졌으니까. 그 며칠 후에 잡혀가서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1979년 중앙정보부에 붙들려가서 일주일 동안 밤샘 조사를 받을 때도 조봉암씨 얘기가 나오더군요.

박 :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조사받을 때 말이죠?

강 : 조사관들은 조봉암씨가 김일성과 연결됐다고 했어요. 일본에 있는 교포를 통해서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박 : 아마 1952년 선거 때 조봉암의 선거본부에서 활동하다 일본으로 망명한 이영근을 지칭한 듯합니다.

강 : 아무튼 그런 사건으로 엮어 조봉암을 죽였습니다. 조봉암이라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죽인 것은 전적으로 1956년 대통령선거 때문입니다.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조봉암씨가 실제로 떨어졌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었어요. 하지만 1956년 선거는 사정이 다릅니다. 사실상 조봉암이 이승만을 이긴 선거였거든요.

조봉암 98표 + 이승만 2표

박 : 말도 못할 부정선거였다죠?

강 : 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낸 박종태씨(박종태 의원은 1969년 삼선개헌을 전후한 시기에 당에 항명했다는 이유로 공화당에서 제명당했고 이후 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1967년 7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무렵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여·야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토론회를 가졌죠. 야당에서는 정일형, 양일동씨 등이 왔고, 여당 사람도 많이 왔어요.

그날 정일형 박사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농민들을 계몽해야 된다. 도시는 야당을 지지하는데 농촌은 무식해서 여당을 찍으니 도리가 없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자 제 기억으로는 박종태씨가 “야당 지도자가 그런 말을 하다니 놀랍다”며 “농촌이 무식해서 그런거라면 우리가 지금껏 공명선거를 했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1956년 선거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박종태씨가 당시 여당 선거감시위원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사람 얘기가 개표장에서 표를 100장 단위로 묶는데, 조봉암 표가 워낙 많이 나오니까 조봉암 표 98장에다 앞뒤로 이승만 표를 한 장씩 붙이고는 이승만 표 100장으로 계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나중에는 양쪽에 붙일 이승만 표가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조봉암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인데 이걸 뒤집는 게 한국 정치라는 거예요. 전국적으로 그렇게 개표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얘길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결국 이승만이 그런 조봉암에게 위협을 느낀 것 아니겠어요. 조봉암씨는 죽을 때도 멋있게 죽었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고 물으니까 “내게 술 한잔 달라”고 해서 술을 한잔 마시고 처형당했다고 해요.

  
박 : 아까 윤길중씨와 조동필씨를 잠깐 언급하셨는데, 그 두 분은 진보당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분의 성향은 어떠했습니까.

강 : 윤길중씨는 원주 출신으로 법률 공부를 해서 일제시대에 고등고시에 합격해 군수를 지냈죠(해남 군수 역임). 해방 후에는 유진오씨를 도와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습니다. 머리가 좋고 문학적 재질도 있었어요. 서예도 잘해서 전시회도 몇 번 열었죠. 제가 미국에 간 뒤부터 조봉암씨와 친해진 모양이에요. 조봉암씨가 대선 출마했을 때 총책임자 격인 사무장을 맡았습니다. 조봉암에 대해서는 그렇게 극진할 수 없었어요.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조봉암기념사업회장을 했죠. 국회의원을 역임했지만, 성품을 보면 정치할 사람은 아니었어요. 아주 부드러운 사람으로 예술가에 가까웠다고 할까.

경제학자인 조동필씨는 윤길중씨와는 성향이 좀 다르죠. 머리가 비상하고 성격이 정겹고 사상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에요. 조동필씨는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한다든지 해서 어울리면 음담패설을 끝도 없이 늘어놓곤 했습니다. 그 사람 얘기를 듣고 나서 다른 사람 음담패설을 들으면 재미가 없어 못 들을 정도였죠. 그래서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왜 만날 그런 소리만 하고 다니냐”고 면박을 줬더니 그 사람이 “내가 조봉암 장관 밑에서 농림부 지도국장을 하다가 당국의 주목을 받아왔는데, 하루는 밥 먹으면서 정치 얘기를 하다 붙들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나왔다”며 “그래서 다시는 밥 먹는 자리에서는 정치 얘기를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겁니다. 밥 먹는 자리에선 정치 얘기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음담패설이라서 그런다고 하더군요. 좀 소심한 데가 있어서 책잡힐 일은 안 하고 살았어요. 그러더니 언젠가는 지방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고 살겠다더군요. 그후로는 자주 못 만났어요. 좋은 세월을 만나 경제기획원 장관을 시켰으면 참 잘했을 사람인데….

미국의 양다리 걸치기

박 : 좀 전에 조봉암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당시 미국 관련 자료들을 보면 미국이 우리 정치에 개입한 경우가 많이 눈에 띄더군요.

강 : 물론이죠. 제가 김규식 박사나 여운형씨 등과 가까웠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저를 보자고 해서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이 그리 깊숙이 개입하진 않았습니다. 미국이 정말 사활을 걸고 한국 정치에 본격 개입한 것은 5·16 쿠데타 이후입니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얘기가 많지요. 조봉암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미국은 어디 가서 뭘 하든 양다리를 걸쳐놓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자기 편인 것처럼 믿게 하죠. 그렇게 저울질을 하면서 자기 이해관계를 따지는 겁니다.

박 : 지면관계상 미국과 1960년대 한국 정치에 대한 얘기는 다음호로 미뤄야겠군요. 다음 호에서는 박정희 시대와 야당, 미국대사관 관련자 등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기로 하죠.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 사이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대담자 박태균 교수가 붙인 것임.<편집자>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5·16 당일, 유엔군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는 윤보선 대통령에게 쿠데타군 진압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태도를 180도 바꿔놓았다. 박정희가 참전을 약속하자 미국은 “朴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박태균 : 오늘은 ‘박정희 시대’ 얘기를 들어봤으면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이기도 합니다.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우리 현대사 전체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먼저 5·16 쿠데타 초기에 박정희에 대한 지식인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박정희씨의 좌익 전력-이는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크게 불거지기도 했는데-에 대해 지식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강원용 :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그게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씨가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겁니다.

문제는 당시가 반공이 불가피한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어요.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반면에 우리는 내외적인 위협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4·19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 박정희씨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거죠.

박 : 근소한 차이기는 하지만, 박정희씨는 윤보선측의 사상 공세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에 합류한 지식인들의 태도가 그의 승리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시 지식인들은 박정희씨를 어떻게 평가한 것일까요.

강 : 저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를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몇 단계로 나눠서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특히 5·16 직후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의 평가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혁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5·16이 나던 무렵은 도저히 나라가 유지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4·19는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4·19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학생들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조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식인들 중에는 비록 바람직하진 않지만, 보다 건전한 생각을 가진, 애국심으로 충만한 군인들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가 적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저는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보선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5·16이 좌익혁명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고, 박정희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보니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됐어요.

‘민생고 해결’ 다짐과 청렴함에 기대

박 : 박정희씨를 처음 만나신 게 언제입니까.

강 : 쿠데타 직후였죠. 그때 장도영씨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었고, 박정희는 부의장이었습니다. 육군 소장 군복을 입고 퇴계로 보훈처회관 3층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 내용이 ‘동아춘추’라는 잡지에 자세하게 나왔어요. 그때 제가 “독재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독재는 군중을 끌어들일 만한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 하는 거다. 히틀러도 그랬고, 무솔리니도 그랬다. 신화 같은, 전설 같은 뭔가를 가져야 하는데, 이승만에겐 그런 게 있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런 게 없다. 그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일개 군인일 뿐이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민주주의를 할 사람으로 보진 않았어요. 일정 때 대구사범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온 사람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혁명공약 중에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씨는 정말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설움이 뭔지,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면 자연히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독재할 생각일랑 말고 민생부터 챙기라고.

박 : 박정희씨가 왜 목사님을 만나려 했을까요. 뭔가 부탁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강 : 그때 박정희씨는 여러 분야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어요. 저를 만난 것은 아마 박창암씨(식민지 시기 만주에서 하사관 생활을 하다 해방 후 국군에 투신했으며, 5·16 쿠데타 후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하다 반혁명 사건으로 군사정부에서 퇴출됐다)의 조언 때문이었을 겁니다. 박씨가 그때 박정희 바로 밑에서 특보실장을 했거든.

박정희씨는 대화를 끝낸 뒤 “혁명 이후 지도층 인사 몇 사람을 만났는데, 내게 기탄없이 얘기를 해주는 사람은 강목사가 처음”이라면서 자기는 정치를 할 테니 저더러는 국민운동을 해달라고 했습니다(군사정부는 후에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고, 그 책임자로는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임명됐다). 저는 “국민운동은 국민이 하는 거지, 군사혁명을 한 사람이 어떻게 국민운동을 하겠다는 거냐”고 반문했죠. “국민운동은 간판만 갖다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니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국민운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초기에 제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매우 청렴하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때 박정희 반대자들이 ‘박정희 집에는 피아노가 스무 대나 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건 다 중상모략입니다. 제가 잘 알아요. 박정희는 우리 교회에 나오던 박덕혜 집사의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아주 작은 기와집이었습니다. 5·16 후에도 거기서 살았죠.

박 : 신당동 집 말입니까?

강 : 그래요. 5·16이 일어난 뒤에 저도 가봤는데, 낮에는 집이 눈에 잘 띄지도 않았어요. 늦은 밤에 군인 몇 명이 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걸 보고서야 박정희 집인 줄 알았죠. 제가 박정희에게 기대를 건 또 하나의 이유는 박정희라는 이름이 쿠데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당시에 육군 소장쯤 되면 모를 사람이 없었어요. 대부분 정치군인들인 데다가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거든요. 우리 교회 옆에도 양모라는 육군 소장이 살았는데, 아침마다 그 집 앞 쓰레기통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정도예요.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남긴 갈비 같은 걸 가져갔어요. 장군들이 거의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라는 이름을 제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돈 먹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미국, 한국민 반응에 당혹

박 :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하셨다는데, 윤보선씨는 그 말 때문에 쿠데타 1년 후인 1962년부터 지금껏 논쟁에 휘말려 왔습니다. 과연 그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요(윤보선 대통령은 1961년 5월16일 아침 혁명군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훗날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올 것이 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년이 지난 1962년 5월 유원식의 진술로 밝혀졌다. 유원식은 이에 대해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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