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역사교실


  
도올에 대한 정리
 관리자  05-21 | VIEW : 7,032
[도올의 사상기행] 英박물관도 반한 한국인콜렉션  

도올의 사상기행-玩遊英國 1녪내가 영국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78년 6월 30일의 일이었다.

누렇게 바래버린 일기장의 먼지를 툭툭 털고, JFK공항 배낭여행족속의 긴 매표줄에 서서 99불짜리 표를 사느라고 밤을 지새웠던 희미한 추억을 되살리며, 개트웨이 공항에서 빅토리아 스테이션까지 기차에 몸을 실었던 그 이야기에 시선을 더듬었을 때,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 나의 단상을 발견했다: “영국인은 아직도 역사 속에 살고 있다. 영국의 역사는 혁명을 불허할 정도로 타협적이며 점진적이며 연속적이다. 전통의 단절이란 비극이지만 역사의 연속성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못갖는다는 것은 미래의 창조를 위해 더 큰 비극인 것 같다. 제1차·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속에서도 자기부정의 기회를 못얻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내가 이 말을 일기장에 적었을 때, 나는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하바드 대학에 갓 입학한 청년학생이었다. 꼭 25년만에 다시 가본영국이었지만 나의 영국에 대한 느낌은 이 한마디의 범주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국은 여전히 역사 속에 있었다.

내가 9월 8일 저녁 히드로우 공항에 다시 발을 디디게 된 것은 한광호(韓光鎬)회장과의 기묘한 인연 때문이다. 내가 KBS논어강의를 끝내고 인도에 가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불교와 인류문명 전반에 관하여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것은 이미 숙지된 사실이다. 나는 그 대화를 3권의 책으로 엮었다(‘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2002). 그 과정에서 나는 초기불교를 이해해야만 했고, 팔리어 삼장과 티벳장경에 관해 깊은 연구를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나는 티벳밀교와 만다라의 세계에 눈을 떴다.

기업인 한광호의 티벳 佛畵는 세계최고 수준!그러던 어느 날, 아주 귀엽게 생긴 한 젊은 여인이 날 한의원으로 찾아왔다. 의사로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녀가 어느 사설박물관에 근무하는 큐레이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티벳의 탕카(불화)들이 엄청나게 쌓여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체없이 다음날로 그녀가 근무하고 있다는 평창동으로 달려갔다. 내가 가본 곳은 한국삼공(三共)이라는 너른 마당이 있는 농약제조회사였다. 그곳의 회장님이 그렇게도 열심히 골동품을 수집한다는데, 티벳 탕카 전문이라는 것이다. 티벳불교에 특별한 신심이라도 가지고 계신 분일까?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창고에 들어가 일별 해본 바로, 우선 그 수장품의 양에 나는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벳에 대한 강압적인 무력지배를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불행했던 역사적 사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는 공산주의 이념 아래 유서깊은 6천여개의 티벳사원들이 훼멸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그만치 130여만명의 티벳 인민들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용서하기 어려운 역사의 추억 속에 묻어둔다 하더라도 그 훼멸의 과정에서 세계적인 불교미술의 문화유산들이 가차없이 파괴되고 약탈되고 반출되어 세계적으로 흩어졌다는 가슴아픈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혁명의 열기 속에서 더 많은 훼멸과 반출이 이루어졌는데 그 흩어진 탕카를 가장 많이 수집한 콜렉터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미국의 루빈(Shelley and Donald Rubin)이라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수장품 중에서 200여 점을 선보인 ‘고양(高揚)의 세계’(Worlds of Transformation)라는 미술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바로 한국삼공의 회장이 소장한 티벳 탕카의 규모가 양과 질에 있어서 루빈의 콜렉션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이었다. 티벳 예술의 세계 최대 수장품이 한국에 있다! 이충격적 사실을 가능케한 그 장본인, 그 사람은 바로 한광호! 휘하에 한국삼공, 서한화학, 한국베링거잉겔하임, 백수의약을 거느리고 있는 건실한 중소기업의 창업주였다. 토끼띠라니까 1927년 정묘생, 하얼빈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에야 조선땅에 왔다 했다. 조실부모하고 자수성가, 종로3가 어느 화공약품원료가게 점원으로 시작하여 오늘의 대업을 성취하기에 이르렀다 했다. 우리나라 기업창업주의 인생역정이 모두 그러하듯이 근대사의 영욕을 체화하면서 근면과 검약으로 일관한 연륜의 그림자가 토끼 같이 순한 그 얼굴에 고집스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왜 하필 탕카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탕카만을 집중적으로 모으셨습니까?“저는 큰 부자도 아니고 돈이 생기면 취미 삼아 조금씩 모으기 시작한 것인데, 처음에는 외국으로 반출된 한국미술품들을 사들이는 데 사명이 있었어요. 그러나 한국물건은 많지도 않고 도무지 너무 비싸요. 그래서 여력이 닿는 중국골동품들을 모으기 시작했죠. 싸고 잡다했고 또 가짜도 많았죠. 속아보지 않으면 수장가가 되지 못해요.”

―탕카와의 직접적인 인연은?“1988년 전에 내가 수장한 골동 중에 우연히 티벳 탕카 몇십장이 있었어요. 88년 2월 2일로 기억하는데 주한 일본대사였던 야나기씨가 관저로 나를 초대했어요. 그때 소개해준 사람이 기마민족설로 유명한 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선생이었어요. 에가미씨가 내 콜렉션을 보더니, 콜렉션에 일관된 특징이 있는 것이 좋겠다, 이미 가지고 있는 탕카콜렉션이 매우 좋다. 아직은 값이 싸고 사람들이 눈독을 안들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들이 많다, 티벳 예술품을 전문적으로 모아보라고 권유하는 것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루빈콜렉션도 아주 초보단계였어요. 우리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모았죠. 루빈도 내가 개발한 루트를 졸졸 따라다녔어요. 홍콩, 런던, 북경, 동경, 뉴욕, LA …… 그런데 북경에선반출이 어려웠고, 제일 많이 산 곳이 런던 켄싱턴 앤티크거리였죠. 지금은 값이 무척 올랐지만 그때만 해도 싸니까 좋았고, 또 저는 무엇을 해도 세계 제1이 되는 것을 좋아해요.”80년대부터 동·서양 누비며 2500여점 수집! 그가 소장한 티벳예술품은 이미 2500여 점으로 탕카에만 국한하면 명실공히 세계제1의 콜렉션이다. 한광호는 왜 그렇게 열심히 골동을 모았을까?“우리 아버지는 가족하구 골동밖엔 모르는 사람예요.” 종이박스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둘째 따님 한채경(韓彩卿)씨의 말이다.

―가족하고 골동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요?“골동은 우리 아버지 애인이나 마찬가지예요. 골동취미가 아버지에게서 주색을 대치했고, 따라서 가족만을 사랑했죠. 골동얘기로 항상 가족과 시간을 보내셨죠. 여행도 골동여행이었구요. 우리엄마를 잉그릿드 버그만이라구 부르며 일편단심 사랑했죠. 외골수로 빠지는 데는 아무도 못말려요.”티벳탕카 외골수! 한광호의 콜렉션은 2001년 일본 5개 도시에서 순회전시를 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드디어 전세계 박물관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2003년 9월 11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서 그 탄생 250주년 기념행사로 ‘런던 1753’특별전과 함께 한광호의 콜렉션 ‘티베탄 레가시’(Tibetan Legacy)를 초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영 이태식대사님의 말대로, 장소는 영국,내용은 티벳, 주인은 한국, 21세기 최고급의 국제문화벤쳐사업을 벌이게 된 것은 반세기에 걸친 한광호의 고혈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도대체 왜 브리티시 뮤지엄이 대영박물관입니까? 그냥 영국박물관이지. 대(大)자도 없는데 굳이 대자를 넣어 부르는 한국인들의 자비감, 대영제국의 환영에 눌리는 사대주의 풍토, 이런 풍토속에서 한회장님의 역사는 통쾌하기 그지없는 한민족의 쾌거로 봐야겠죠. 그는 한국인의 인식의 지평을 넓혔어요. 도대체 한국에 돈 뿌리면서 제대로 존경받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냐구요? 한회장은 그 어눌한 영어로, 세계적인 문화자산으로 영국귀족사회를 꼼짝못하게 만들잖아요. 도대체 영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축제를 벌이다니요? 있을 수 없는 얘기죠. 한국사람들, 겸재 그림 들어간 부채만 제일인 줄 알지요? 한회장은 유럽부채를 2천점이나 모았어요. 그는 한국인의 안목과 시야를 넓히고 있어요.”런던대학에서 한국미술사를 가르치고 있는 박영숙교수의 말이다.

국제적 문화벤처로 영국사람 마음 사로잡아!“티벳의 예술이 서양이 아닌 동양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은 참 의미있는 일이죠. 우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인류문화에 헌신하는 한회장님의 사심없는 인품에 경의를 표합니다.” 영국박물관의 회장이며 캠브릿지대학의 교수인 죤 보이드경(Sir John Boyd)의 말이다.

“인간이란 자연과 영적 세계에 걸친 좁고 위험한 다리다. 그런데그 다리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항상 변하는 체험의 덩어리다.

” 일찍이 헤르만 헷세는 이와 같이 간파했다. 그 체험의 세계를 티벳의 고승들은 도식화된 심볼로 표현했다. 2차원의 평면을 통하여 3차원, 아니 4차원, 5차원의 영적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나는 영국박물관에 펼쳐진 탕카의 세계를 체험키 위하여 런던에 왔다. 결코 대접을 받지 못하는 기자의 신분으로 약속되었던 여정이었지만 나의 완유영국(玩遊英國) 나흘은 즐겁기만 했다. 나에게는 런던 그것이 하나의 탕카였다.

(수요일 계속) ⓒ[문화일보 09/15 23:05]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도올의 사상기행]`800년 민주`영국 삼권분립 안돼  

도올의 사상기행-玩遊英國 Ⅱ나는 모처럼만에 영국엘 간 김에 누구 한 명 정치적 인물을 인터뷰할 생각을 했다. 갑자기 토니 블레어 수상을 만나기란 절차를 중시하는 영국사회에서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사람이 대처 전 수상이었다. 노동문제가 현재 한국의 가장 큰 현안 중의 하나이고 보면, 그녀가 영국의 노동쟁의를 제압해간 과정에서 생생한 지혜라도 얻을 수 있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에서였다.

대처와 같은 인물의 보수당정책의 득실을 형량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사회를 조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알아보니 대처는 요즘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그런 건강상태에 있질 못하다는 것이었다. 주영대사관의 성창기 공보관으로부터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불가능하다는 회신이 왔다.

조그만 국회 본회의장, 엉덩이 부비며 열띤 토론! 영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우연히 가수 조영남과 통화를 했는데 그는 런던의 날씨가 ‘미친년 속치마’ 같다고 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을 했다: “파리는 화사하고 로마는 화려하다. 그러나 그레이 톤의 런던만큼 깊이가 없다. 나는 유럽의 도시 중에서 런던을 가장 좋아한다. 단색조의 침울한 분위기, 그 속에서 위대한 현대예술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트라팔가 광장 한 모퉁이에 있는 샬록 홈즈 레스토랑을 가보라고 했다. 영국이 음식맛 없기로 유명한데 그곳에서 먹는 ‘피시앤칩스(Fish and Chips)’ 하나만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코난 도일(Sir Arthur Connan Doyle)의 서재가 있는 그 그윽한 전통의 내음새가 런던의 안개를 더욱 짙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그의 말에 따라 가본 음식점 치고 단 한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었다. 미친년 속치마처럼 또 한번 속아보리라고 작심은 했지만 설마 했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잡는다구, 아이쿠 두야, 관광객을 위하여 꾸며놓은 싸구려 퍼브에 불과한 곳이었다. ‘바스커빌가의 개’라는 작품에서 샬록 홈즈와 바스커빌경이 처음 만난 장소를 가상해서 만든 곳으로 전혀 역사적 리얼리티가 없었다. 역사도 오래된 곳이 아니었다. 런던의 감각이라면 1666년의 런던시티 대화재를 살아남았다는 프리트가의 위그 앤 펜(Wig & Pen Club) 정도는 가봤어야 했을 것이다. 음식도 저질은 아니었으나 분량이 과도한 싸구려 음식이었다. 런던에까지 와서 또 속는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피식 웃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다.

내가 런던에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에이에이스쿨(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을 나와 세계적인 공장설계자로 활약하고 있는 이언우(李彦雨)선생이었다. 그 부인이 나의 아내와 절친한 고교동창생이었기 때문에 30년 전부터 교분이 있었다. 우리는 트라팔가 광장 내쇼날 갤러리 계단을 내려오면서 쭉 뻗는 화이트홀(Whitehall: 관가. 정계를 상징) 거리 끝에 우뚝 솟은 비그벤(Big Ben: 국회의사당 시계탑)을 쳐다보면서 대화를 이었다.

민주주의는 허세·권위가 용납 안된다는 교훈!―대처 전 수상을 만나려다 못 만났는데 영국인은 대처의 정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녀의 노조제압의 강성 정치는 지금도 높게 평가되고 있나요?“대처가 집권할 당시 노동운동은 근원적으로 영국인의 일상생활을 망가뜨리고 있었어요.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파업하면 쓰레기가 푹푹 쌓이고 장의사가 파업하면 시체가 푹푹 쌓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그러니까 대처의 강성제압의 정당성을 회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처의 실책은 그 과정에서 근원적으로 영국의 쏘시알 패브릭(social fabric)을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조를 탄압하면서 노조의 본산인 제조업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죠. 부의 축적이 제조업만을 기반으로 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자동차, 조선, 기차, 금속, 철강, 엔지니어링 분야의 유구한 전통을 지닌 업체들을 도산시키거나 약화시키고, 뱅킹이나 보험, 호텔, 관광 등의 씨티 써비스업만 키웠다는 것이죠.

그러나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나라는 근원적으로 취약합니다. 독일과 일본의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탄탄한 이유는 바로 제조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이 DJ정권이래 오늘날까지 꾸준히 대처의 실책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아이티니 벤처니 하는 허황된 꿈만 키우고, 제조업이라고 하는 근본을 소홀히 해왔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뱅킹장사를 잘 할 수 있는 민족성의 기반이 부족한데 너무 그런 방면으로 희망을 거는 것은 아닌지요. 합리적이면서도 음흉해야하고, 신사적이면서도 타협 잘해야하고, 또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하는데 우리 삶 속엔 그런 전통이 축적되어 있질 않아요.”“이쑤시개가 공장 담 안에 있으면 산업폐기물이 되고 공장 담밖에 있으면 재활용품이 되죠.” 작은 제조업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광호 회장님 따님의 말이다. 말인즉슨 한국에서 제조업을 하는 사람들은 트집만 잡힌다는 뜻이다. 소방서나 경찰서나 세무서에서 나와서 휘둘러보고 트집을 잡으려든다면 안 잡힐 곳은 없다는 것이다. 제조업의 생리상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주고 국가전체의 부의 창출을 위해 협조하는 분위기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조공장 하나 운영하면 봉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시달림을 당하는 상황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경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는 생각보다 급속히 붕괴되고 있습니다. 매우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한국의 대기업·중소기업을 살려내는 혁신적인 조치, 그리고 일반국민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런던의 톱레벨의 어느 은행가의 지적이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필리핀 사람들이 세계 구석구석에서 하인(servant) 노릇을 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들과 실제로 얘기해보면 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이 많다구요. 단지 돈이 없기 때문이죠. 필리핀사람 하면 노래나 부르고 식모 노릇하는 민족으로 인상이 박혀있어요. 마르코스가 나쁜 놈이라는 뜻은 그 사람이 독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필리핀 사람들을 모조리 그 독재의 과정에서 세계인의 하인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50년대만 해도 아시아에서 필리핀 하면 일본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로 선진국이었습니다. 이 타락한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는 몇 세기가 걸릴지 모릅니다. 대우같은 기업만 해도 잘못 벌여놓은 일로 단죄 받을 것은 단죄 받는다 하더래도 세계경영자로서의 우리 국민의 이미지를 제고시킨 공로는 확실하게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한국에서만 갇혀사는 사람들은 너무 세계인식이 부족합니다. 세계를 운영하는 새로운 국민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테임즈의 황혼에 빛나는 비그벤을 쳐다보면서 이언우는 대화를 매듭지었다.

대처 前수상 노조 제압하다가 제조업까지 죽여!

이날(9일) 저녁 나는 보수당의 스탠리 의원(Sir John Stanley)의 초청으로 영국의 팔러먼트(Parliament) 건물 속의 상원(House of Lords)과 하원(House of Commons)의 본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방청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나는 대영제국의 본산이었던 국회본회의장을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들어가

본 상원의 광경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작은 방이었다.

화려한 금빛의 왕의 옥좌 아래로 상원의장이 앉아있는 매우 불편하게 생긴, 팔걸이·등걸이 아무 것도 없는 붉은 양모자루(Woolsack)가 하나 놓여있고 그 앞에는 가발을 쓴 서기 한 명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네 줄의 붉은 기다란 가죽의자가 놓여있을 뿐이었는데 도무지 100여명도 앉기 힘든 정도의 규모였다.

좌석명패도 없었고 좌석을 구분할 수 있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교회의자 같이 생긴 팔걸이도 없는 긴 벤치에 엉덩이를 부비고 을 수밖에 없다.

“영국의 상원의장은 사법부의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원장도 되고 또 행정부의 각료도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영국에서 발생하였고 그것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것 같지만 영국은 삼권이 가장 분립이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의 영예로운 18명 판사 중의 한 사람이며 서울대 법대 교수인 송상현 선생의 말이다. 동행했던 그도 의원의 고정의석조차 없는 영국국회의 실제 모습에 경악한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국민의 실제적인 대의기관인 하원은 다른 모습이려니 기대했다. 그러나 실내분위기의 색깔 톤이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을 뿐 대차가 없었다. 결국 국회본회의장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어마어마하게 권위로운 금배지들의 거대전당이 아니라 조그만 세미나실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혹은 서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매우 불편한 장소인 것이다.


우리도 '벤처허황'벗어나 제조업 살리는데 힘써야!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란 왕권으로부터 삼권이 떨어져나가는 과정이었어요. 그런데 영국의 경우, 팔러먼트와 캐비넷은 떨어져나갔지만 사법부는 왕권의 보호 속에 머물러 있었어요. 대륙에서는 국회와 법원이 떨어져나갔지만 행정부가 끝까지 남아있었죠.

그래서 영국에서는 법질서가 주인노릇을 했고, 불란서에서는 행정관료가 주인노릇을 했죠.”내가 본 하원의 모습, 여당의원 몇 명과 야당의원 몇 명이 교사수가 모자라니까 교육환경의 개선을 위하여 정부보조가 필요하다는 주제를 놓고 국회대본회의장이라는 작은 방에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것이 내가 목격한 800년 전통의 민주주의 선진국의 실상이었다. 민주주의에는 일체 허세나 권위가 용납될 틈바구니가 없는 것이다.

(18일 계속) ⓒ[문화일보 09/17 23:05]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도올의 사상기행]피의 역사와 로맨스가 함께 숨쉬는 런던탑  

도올의 사상기행-玩遊英國 Ⅲ

“로맨스! 그것은 결코 깨질 수 없는 행복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월터 랄레이경은 그의 로맨스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로맨스는 땅만을 기어다니지는 않는다. 로맨스는 저 워싱턴의 기념첨탑처럼 위로 위로 뻗어 올라간다. 이 땅을 저기 저 드높은 하늘의 푸르름으로 연결시키는 한 줄기의 은빛실처럼!”

영국 캠브릿지대학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가 철학교수로 변신하여 미국 하바드대학으로 초빙되어 간 것은 1924년, 그가 63세 되던 해였다. 미국에 온지 3년 되던 해, 화이트헤드는 미국의 버지니아대학에서 ‘상징주의’에 관한 일련의 강의부탁을 받고, 1927년 4월 18일, 마사츄세츠 캠브릿지를 떠나 난생 처음 뉴월드 버지니아주의 주경을 넘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디씨, 삼백년전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지금은 워싱턴 메모리얼의 첨탑이 링컨의 거대석상 앞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광활한 장관의 충격을 체험한다. 그때 영국의 노신사, 20세기의 철성(哲聖), 화이트헤드는 위와 같이 썼던 것이다.

버지니아(Virginia)란 주명은 본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녀(Virgin Queen)였기 때문에 그 처녀성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 버지니아라는 식민지를 최초로 개척하여 여왕께 헌납한 사람은 희대의 로만티스트였던 월터 랄레이경(Sir Walter Raleigh, 1554∼1618)이었다. 화이트헤드는 버지니아 주경을 넘으면서 그 주의 최초의 개척자인 랄레이경을 머리에 떠올렸고 그의 로맨스를 워싱턴 메모리얼의 솟구치는 드높은 저 하늘의 푸르름에 비유했던 것이다. 로맨스는 깨질 수 없는 행복만을 생산하지는 않는다.(Romance does not yield unbroken happiness.) 그리고 그것은 대가를 요구한다. 랄레이경이 치루어야만 했던 대가는 좀 가혹한 것이었다.

21세연하 랄레이卿과 몰래한 '여왕의 사랑'! 엘리자베스여왕! 희대의 풍운아 헨리8세와 교양있고 야무진 여인 앤 볼린(Ann Boleyn) 사이에서 태어난 비운의 왕녀, 그녀의 탄생을 위하여 앵글리칸 쳐치가 탄생되어야만 했던 파란만장한 역사의 곡절을 줄타며 성장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참으로 위대한 정치가였다. 창백한 안색에 매부리코, 꼿꼿한 몸매에 붉은빛이 감도는 금발, 그녀의 몸이 지닌 모든 마력을 그녀는 국민에 대한 자애와 국민의 사랑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다.

음녀(淫女)였던 그녀에겐 섹스조차도 고등한 정치의 수단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을 카톨릭의 보편지배 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타협과 통합의 새로운 정신적 풍토를 확립시켰을 뿐 아니라 그녀가 키운 함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면서 영국을 유럽의 메이저 파우어로서 확고하게 격상시켰다. 그리고 검약과 적시의 과감한 투자로 영국의 부를 축적시켰으며 셰익스피어의 드라마가 상징하는 위대한 문예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이 엘리자베스의 눈에 21세 연하의 랄레이가 눈에 띈 것은 그가 문스터에서 아이리쉬 반역도들을 진압하면서(1580) 아이리쉬를 다루는 영국의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한 양심의 소리를 접했을 때였다. 용감히 말할 줄 알고, 모든 종교의 편견을 거부하는 회의론적 합리주의자였으며, 수학, 항해술, 화학, 의학에 정통했던 랄레이는 곧 여왕의 총신이 되었고 1585년에는 경의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많은 영토와 무역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랄레이는 여왕의 총신이라기보다는 애인이었을 것이다.

랄레이는 1588년 여왕 몰래 트로크몰톤경(Sir Nicholas Throckmorton)의 아리따운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한다. 그러나 1592년 첫아들의 탄생으로 뽀록이 나게되고 질투에 사로잡힌 여왕은 랄레이 일가족을 런던탑에 감금시킨다.

랄레이는 일생, 런던탑에서 세번 감금생활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한 후, 스페인과 대항하여 남미와 대서양의 식민지 개척에 힘쓴 랄레이를 그의 적들은 그가 제임스1세를 폐위시키는 역모를 했다고 모함하여 두번째로 감금시킨다. 랄레이는 이곳에서 자그만치 13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영국사람으로서 역사상 최초로 파이프 담배를 물었던 멋쟁이 랄레이는 바로 이곳 감옥에서 그의 방대한 저작 ‘세계의 역사’(The History of the World)를 썼다. 내가 런던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랄레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런던탑(The Tower of London)이었다.

딸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하지 않는 둘째 부인 앤 볼린의 목에 도끼날을 내리쳤던 헨리8세, 그는 다섯째 부인 캐더린의 목에도 도끼날을 드리웠다. 그의 치세기간 동안에만도 7명의 목을 날려버린 스캐폴드(scaffold)가 서있던 자리가 고스란히 정원에 보존되어 있는 그곳으로부터 비스듬히 테임스강 쪽으로 걸어가면 「블러디 타워(Bloody Tower)가 나온다. 이 블러디 타워가 바로 랄레이가 갇혀 살았던 곳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집필했던 서재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었고, 감격스럽게도 1614년에 출간된‘세계의 역사’ 원본이 진열되어 있었다. 랄레이는 인류의 역사를 신의 섭리의 전개로 파악하였다. 그를 무신론자로 휘몰려는 당시 보수지식인들의 구미를 맞추려했을지도 모른다.

편견을 거부한 탐험가의 비운 간직한 '블러디타워'! 랄레이는 1616년에 풀려났고 또 다시 남미의 구야나(Guyana)로 금광을 찾으러 항해를 계속했다. 금광은 발견되지 않았고 지쳐 돌아온 그에게는 사형의 음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샹 타워(Beauchamp Tower)에 잠시 갇혀 있다가 1618년 10월 29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참수대에 올랐다. 현재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의 뇌리에서조차 기억되지 않고 있는 한 로맨티스트의 최후였다.

나는 인류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보석으로 꼽히는 무굴제국의 코이누르(Koh-i-noor) 다이아몬드가 박힌 엄마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왕관의 진품이 진열되어 있는 워터루 배럭스(Waterloo Barracks)를 지나 런던탑을 걸어나왔다. 런던탑은 감옥이라기보다는 널찍한 궁전이었다. 9월 10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내가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었던 여정은 스톤헨지(Stonehenge)였다. 고전학자인 나로서는 고대유적의 수수께끼는 항상 매혹적인 것이지만 그 수수께끼를 푸는데 나의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단순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린다. 런던 워터루역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반을 남서쪽으로 가면,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의 원본이 보존되어있다는 대성당이 있는 솔즈베리(Salisbury)라는 예쁜 도시가 나온다. 나는 그곳에서 35파운드에 택시를 대절하여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대평원을 가르며 계속 질주하였다. 짙은 안개속에 축축히 가는 빗발이 스며든다. 20여분후 푸른 초원위로 순례자들이 빙글빙글 주변을 돌고있는 거대한 돌무더기에 도착하였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우주적인 전율이었다. 그것은 영감이었고 그것은 침묵이었다. 우리나라도 고인돌의 거석문화는 이 지구상에 가장 밀집된 분포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고인돌이 명백히 무덤인데 반하여 이 스톤헨지는 무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고인돌이 개인적인 것임에 반하여 공적이고 집단적인 것이라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서 체계적인 플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특색이다.

스톤헨지의 우주적 전율은 영원한 침묵·신비! 그 형성시기는 5000여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현재 고고학적 정설은 신석기후기로부터 청동기초기 그러니까 1800∼1400 BC, 한 400년 동안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가장 핵심부분의 말발굽모양으로 배치된 블루스톤(Bluestone)이라는 화성암(igneous rock)은 그곳으로부터 250마일이나 떨어진 남서 웨일즈지방 프레셀리산맥(Prescelly Mountains)으로부터 해로·육로를 거쳐 운반해온 것이다. 그 외곽의 사르센 사암의 디귿자 문설주(trilithon) 모양의 돌들은 20마일 북방의 말보로 다운즈(Marlborough Downs)에서 날라온 것이다. 이 돌 한 개를 끌어오는데 600명의 인력은 족히 걸린다는데 왜 이런 짓을 그토록 열심히 했을까? 많??사람들이 힐스톤(Heel Stone)의 방향이 하지의 일출방향과 일치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것이 무슨 우주시계를 상징한다고도 하고 태양신을 숭배하는 제식의 장소라고도 하지만 스톤헨지의 매력은 이 모든 해석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모든 해석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것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침묵이었다. 나에게 리얼한 것은 더버빌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가 이곳에서 마지막 자유를 구가했다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고국이 그리웠다. 내 나라의 숨결이 그리웠다. 내가 가르치는 어린 생령들의 뜨거운 함성이 스톤헨지의 돌무더기 사이사이로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자유의 비상은 오직 한국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스톤헨지였다. 〈完〉 ⓒ[문화일보 09/18 23:05]


[사상가 도올이 만난 사람] 역사, 진보냐 후퇴냐 선택할 때  


도올, 김근태 통합신당 원내대표 인터뷰세계정치사의 어떤 구비에서도 집권여당이 몸집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제살을 깎고 몸집을 줄여서까지 어떤 추상적 이념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예를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1인 보스 체제하에서 의원들이 정당을 이동하는 예는 많으나, 누구 한사람의 강력한 지휘자도 없이 당장 총선을 앞둔 마당에 42명이나 되는 지역구현역의원들이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황량한 들판에 나온 것은 참으로 상식에 어긋나는 결단이다. 나는 우리나라 정치가 아무리 지리멸렬하고 지지부진하다 해도 무엇인가 뜻을 가지고 움직이는 새로운 샘물의 물줄기가 어김없이 진행중에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민족사의 한 새벽이요, 현대정치사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나는 요즈음 글을 안쓰려고 노력중이다. 그리고 더더욱 정치 다반사에는 신경을 절단시키려고 노력중이다. 달밤의 외로운 늑대처럼 컹컹 짖어대는 나의 목소리가 이 땅의 치자들의 귀에 닿으리라는 기대는 포기한지 오래, 푸념에 그치고 말 냉가슴이나 시원하게 뚫어버릴 생각으로 지난 토요일 오랫만에 북한산등반을 시도하고 있었다. 가는 택시간에서 우연히 민주당 탈당의원 37명과 한나라당의 독수리5형제가 김근태를 원내대표로 뽑고 교섭단체 등록을 마쳤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는 도저히 한가롭게 산행을 즐길 수만은 없었다. 발길을 돌려 여의도 신동해빌딩 2층 한반도재단에서 김근태를 만났다.

원칙존중·경쟁력 있는 평화 만들어낼 것

―그대는 한 때 참혹한 고문을 이겨내며 재야의 양심을 대변했다. 그러나 정치에 입문한 후로는 신선도가 떨어졌고 별볼일 없는 사람처럼 비쳐졌다. 젊은 날의 정의감, 그 신선함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의감이란 시대정신(Zeitgeist)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7·80년대는 민주화가 우리의 시대정신이었지만, 97년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경제·사회적 측면에 있어서의 국제경쟁력의 문제였다.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햇볕정책노선을 확고히 지지하였지만 DJ 1인 보스체제를 일관되게 비판하였다. 우리사회의 경쟁력회복의 문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정치가 확립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모든 정치적 프로세스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인들은 분식회계를 일삼으면서 경제인들보고만 분식회계 말라고 으름짱을 놓으면 말이 되는가? 나는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대선후보 경선자금을 공개하는 등 일관된 나의 소신을 밝혔고 그런 입장으로 끊임없이 박해와 소외를 당해왔다.”

―그렇게 확실한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왜 중도파의 카테고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미적미적 거렸나?

“중도파란 강경파와 보수파의 사이에서 우물쭈물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면 곤란하다. 나는 신주류 강경파와 구주류 보수파들의 입장을 모두 아우르는 원칙을 고집했다. 그 원칙이란 새로운 정당의 탄생이, 80년 광주사태로부터 노무현정권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공헌을 한 지역민중과 더불어 같이 거듭나야한다는 것이다. 호남대중은 어떠한 다른 지역대중보다도 민주화에 헌신했으며 뚜렷한 정치의식을 견지하였다. DJ의 정치적 그늘에 숨어 역사를 도태시키는 소수 호남정치인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호남대중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입장을 ‘통합신당’이라는 기치로 표방하였다. 나의 통합신당론은 일관된 것이었다. 변한 것은 오락가락한 신주류와 구주류의 입장이었다.”

―도대체 신당 만들기가 왜 그렇게도 어려웠고 오래 걸렸나?

“첫째 신주류강경파들이 오만해서 민주당 지지자들을 능멸했다. 그 결과 노무현지지도가 핵심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의 통합신당 입장으로 선회했다.

둘째 구주류가 다시 오만해져서 신주류의 인적 청산론을 빌미삼아 반격과 역습을 시도했다. 신당을 노무현 보스체제로 퇴행시키는 행위라고 역습을 가하면 가할 수록 그들의 호남지역 지지도는 상승한 것이다. 그리고 신당 만드는 것은 당무회의에서 할 수 없으며 전당대회에서 결정하자고 했다. 나는 당헌당규상 전당대회 소집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셋째 신주류가 전대결정을 받아들이니까 이번에는 구주류가 오히려 전대에 대해 근원적인 거부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9월 4일 폭거로 이어졌다. 나는 민주당이 더 이상 시대정신과 싸우며 몸부림치는 정당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주당은 더 이상 민주당이 아니었다. 9·4폭거는 민주당의 조종(弔鐘)이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국민과 당원에게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심정으로 사흘간단식을 감행했다. 나는 신당으로 이동해서 평화개혁세력의 재결집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뱃짱맞는 사람끼리 우선 기득권을 포기하고 다시 대연합을 이루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기나긴 산고는 일관된 논리의 필연적 과정이었으며 결코 지리멸렬한 이권투쟁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여태까지 비주류로 겉돌다가 이제 비로소 주류가 되었다. 그런데 그대는 정의감은 있으되 상황판단이 부족하고, 논리적이기는 하나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신당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혐의하는 시각들이 있다.

“도올도 날 처음부터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표현했고 기자들도 날 항상 ‘습관적인 비주류’라고 기술한다. 이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모독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정치적 정의감은 정당에서 1인 보스체제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95년 DJ가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 때 이기택과의 경선을 거부한 것을 비판했다. 그리고 97 대선후보 때도 국민경선을 주장했다. 두번이나 불경죄의 낙인이 찍힌 것이다. 나는 부총재의 직위는 얻었지만 그것은 데코레이션일 뿐이었고 인너써클(innercircle)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현실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만두도 빚고 알랑방귀도 뀔 줄도 알아야 하는데 꼿꼿하게만 논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은 '유엔평화유지군' 때만 찬성!

―정치사는 어차피 승자중심으로 기술되는 것이 아닌가?

“한국정치판에서는 시대정신에 대한 논리적 정합성을 문제삼지 않는다. 어려울 때 날 무조건 도와줬냐 안 도와줬냐 그것만 모든 판단에 우선한다. 한국정치는 기본적으로 패거리정치일 뿐이다.

사람들이 날 보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어보라고 권유하길래 몇번이나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몇페이지 안읽고 팽개쳐 버렸다. 정치가 현실일 뿐이라면 개선과 개혁은 어떻게 가능하며 왜 우리가 피흘리며 군사독재와 싸워야 했는가? 도올! 한번 생각해보라! 사람이 벼랑끝 나무가지에 매달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하자! 그대로 매달려 있으면 손에 힘이 풀려 떨어져죽을 뿐이다. 이때 최선의 길이란 마지막으로 뛰어내리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뛰어내리는 의도적 선택이란 결국 원칙을 고수하고 현실의 제약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는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그 다음 세대의 가슴에 촛불로 살아남는다.”

나는 김근태의 절규를 이해한다. 그와 나는 같은 65학번 동기다. 우리 65학번에 별볼일 있는 친구가 별로 없는데, 우리시대 김근태는 참으로 존경스러운 전우였다. 그리고 그가 케이에스 마크의 소유자라는 사실도 한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경기고교를 나오고 서울상대 경제학과출신인 그는 도올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재였고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의 전선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신당은 지금 매우 위태롭다. 잘 해나갈 수 있겠는가?

“재야운동할 때는 사람들이 날보고 말도 잘하고 카리스마도 있고 국면돌파도 잘한다고 했다. 그래서 매도 맞고 고문도 당했다. 그뒤로 정치판에서는 내가 강성이니까 소프트하게 보이라는 주문만 받았다. 그리고 1인 보스체제하에서 권력의 핵심에 낄 수가 없으니까 구박·핍박만 당했고 권력과는 사이가 안좋은 비리비리한 놈으로만 비쳐졌다. 그러나 재야운동시절에는 합리적으로 의견을 모으고, 적시의 결단을 내리고, 희생을 감수하면 항상 상황을 장악할 수 있었다. 내가 신당의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나라 정치사가 이러한 합리성의 기반을 새롭게 획득해가고 있다는 증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리더십은 다시 발휘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 그대는 집권여당의 주류가 된 셈이다. 그런데 원내대표로서 정책을 총괄해야 하는 역할과 개인적 소신이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라크파병을 반대한다더니 이제는 신중하게 고려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은 그 일례가 아닌가?

“이라크파병을 원치 않는 것은 이념적으로 정당할 뿐 아니라 국민의 7·80%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다. 누가 자기자식을 명분없는 전쟁에 내보내기를 원하겠는가? 국익을 위해 파병을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은 경제적 실리면에서도 중동의 복합적 정세를 볼 때 별 설득력이 없으며 한 국가가 인권과 평화를 존중한다는 레퓨테이션(reputation)만큼 국가브랜드를 높이는 것도 없다. 단지 신당내부에도 파병을 찬성하는 사람이 있으며 부시행정부의 요청을 가볍게 거절하기 어려운 제반사정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결정에 관해서는 토론과 논쟁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내대표로서 과정과 절차를 공정하게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내 개인의 생각을 묻는다면 분명하고 확고하게 말하겠다. 나는 파병을 반대한다. 유엔의 결의를 거치지 않은 어떠한 형태의 파병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유엔결의가 있으면 찬성하겠다는 것인가?

“유엔의 결의가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아니라 평화유지군인 경우에만 찬성한다.”

―신당의 DJ와 노무현과의 관계설정은?

“DJ의 1인 보스체제는 철저히 배격하지만 그의 비젼과 정책은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남북관계와 한미관계를 양쪽 손에 쥐고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만 우리의 선택공간이 넓어진다는 DJ의 생각은 백방 옳은 것이다. 노무현은 DJ 햇볕정책의 한계를 극복한다고 특검을 받아들이면서 정치적으로도 망했고 원칙적으로도 망했다. 한나라당의 대북노선과 실제적 차이를 상실했으며 핵심적 지지세력의 실망을 초래했다. 우리는 DJ를 참칭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사이비 DJ 추종자와 DJ를 분리시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호남대중을 살리는 길이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발현하는 길이다. 노무현과의 관계는 신당은 노무현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표방할 것이다. 대통령의 권력과 영향력에 좌지우지되는 당이 될 수 없다. 노무현은 보스도 아니고 보스가 될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그 정도의 새로운 민주적 합리성의 감각은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노무현당이 되는 순간 우리 통합신당이 망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안다.”

―노무현의 입당도 반대하는가?

“신당의 윤곽이 다 드러난 후에 그가 개인적으로 입당한다는 것은 정치인 노무현의 선택이다. 그러나 내가 노무현이라면 입당해서 공격의 빌미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DJ 참칭하는 사이비, 호남민중이 버릴 것!

―잔류한 중도파와 한나라당의 개혁세력을 규합하는 문제가 당면한 최대과제가 아니겠는가?

“조순형, 추미애, 한화갑, 김상현… 이런 분들만 신당에 가세하면 대세는 판가름난다. 지금 11명의 지역구 의원만 신당으로 적을 옮기면 우리는 기호 2번의 당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총선에서도 확실한 승리가 보장된다.”

―그 분들은 왜 머물러 있나?

“아직도 민주당의 정통성을 고집하며 분당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양비론을 깔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우리는 확실히 구분해야한다. DJ의 민주당은 반독재 투쟁을 한 정당이긴 하지만 새로운 정치를 한 정당은 아니었다. 국민참여 통합신당은 한국정치사에서 새로운 정치실험을 목표로 도전하는 최초의 정당이다. 1인 보스의 지휘도 없이, 특정한 정치적·지역적 기반도 없이 42명의 현역국회의원이 새 정치를 위하여 정치생명을 거는 결단을 했는데 이러한 역사의 중대한 계기를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역사의 발전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 계기, 용기, 결집력은 다시 생겨날 수 없다. 정치가 여태까지 우리국가발전의 발목을 잡아왔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새롭고, 청정하고, 저비용 고효율의 두뇌정치를 이루어 국가도약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이 정치적 운동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민주당에 잔류하고 계신 중도파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다. 개인적 득실이나 이해를 떠나 단 한순간만이라도 역사의 진보와 후퇴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허심탄회하고 너그럽게 판단한다면 행동의 바른 방향이 설 것이다. 국민은 결코 신당을 외면치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제일 큰 믿음이다.”

―내가 생각키엔 신당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문제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제1당이 되는 성공을 거두어야만 한국정치가 살고 노무현의 미숙함을 견제하고 또 격려할 수 있다는데 있다. 그 복안은?

“지난 대선 때 노무현은 이회창에게 11개월 내내 졌다. 그런데 11·26 대선후보 단일화이후부터 이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273명의 총선후보를 단일화 시킬 것이다. 냉전수구세력을 제외한 모든 리버럴 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이다.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들어오게 해서 273군데에서 모두 국민참여경선의 대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상향식 공천제도 각론에 들어가면 문제가 많다.

“그걸 지금 도올선생과 논의할 시간은 없다. 그러나 마음이 열린 신당의 정치적 리더들은 경쟁력 있는 신인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며 선거의 부작용을 최소화 시킬 여러 복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상향식공천, 국민참여경선, 선거자금내역 공개 등의 원칙은 반드시 지킨다.”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이 합해서 신당을 고립시키는 정계개편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데?

“정치적 야합일 뿐이다. 햇볕정책을 계승한 세력과 철저히 반대한 세력이 야합해봐야 그 야합이 유지될 리 있나? 그리고 우리당을 제외한 전원이 합쳐진다는 보장이 있을 수 있나? 합쳐도 일부가 합칠 것이고 합친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선명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총선에서 우리가 유리해진다. 그들의 목표는 내각제 개헌인데, 현 정치권력구조의 개편은 모든 정치인을 전쟁에 내모는 꼴이며 국정, 민생, 한반도평화는 헛소리가 되어버린다. 단명하는 수상만 나오고 정정의 불안은 계속되며, 참여의식이 단절된 상태에서 계파정치가 복원될 것이다. 신바람을 사랑하는 한국국민에게 직선제는 필연이다. 일본식의 더러운 계파정치로 한국정치가 후퇴하는 것을 그리워할 국민이 누가 있겠나? 해보라지!”

―우리사회의 궁극적 비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경쟁력 있는 평화다. 평화는 소극적이고 안온한 것이 아니다. 4강의 힘이 직접 교체되는 한반도의 평화는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핵문제와 체제보장을 해결하고자 하는 6자회담도 동아시아의안전과 평화를 위한 다자안보대화체제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한국이 주도적으로 길을 열어야 한다. 남북경협도 적극적으로 하여 미국매파를 누를 수 있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유럽에서 프랑스가 하는 역할을 동아시아에서 우리가 해야한다. 꿈을 바르게 담대하게 꾸자! 각박한 현실에서도 머리를 제키고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낭만을 버리지 말자!”―친구여! 그대의 웅변을 그대로 믿어주겠다. 그러나 제발 빌겠다. 이 도올만은 또 다시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그는 묵묵부답 미소로 떠나는 나를 배웅했다. <了> ⓒ[문화일보 09/22 23:06]


[도올 담세][도올]도선사 아미타본존불의 放光  


나는 본시 기적을 믿지 않는다. 기적이란 우리의 일상적 인식의 궤도를 일탈하는 현상을 이름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그것을 반드시 초자연적(supernatural)이라 규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기적의 대부분이 자연적(natural)인 현상일 뿐이나 단지 우리의 상식적인 인과관계로 설명이 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파악하는 인과의 한계는 매우 명백한 것이다. 일인일과(一因一果)의 반복적 현상은 물론 과학이 컨트롤하기 쉬운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의 결과에 대해 수없이 많은 원인을 상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다 제어할 수 없을 때는 그 인과는 미스터리로 남을 수 있다. 기적은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란 본시 긍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요, 부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하나의 재미로 해석하면 족하다.

우리 조선의 하늘이 열렸다하는 개천절 유난히도 천고마비의 추색(秋色)이 청명한지라 나는 아내와 함께 북한(北漢)의 산성에 올랐다. 대남문에서 능선을 따라 보국문을 거쳐 대동문에 이르렀을 때 아내가 수족이 신산(辛酸)하니 속히 하산하자고 졸랐으나, 나는 웬일인지 용암문을 거쳐 도선의 계곡으로 직하하는 코스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화한 도선사를 그냥 지나치려 하였으나 지난 몽헌(夢憲) 49재에 들르지 못한 것도 마음에 켕기는지라 발길을 돌려 종무소 뒷계단으로 올라갔다. 때마침 주지스님 혜자(慧慈)가 내 손을 잡으며 반긴다.

“지난 초하루 새벽에 대웅전 부처님께서 방광(放光)하셨습니다.”

이건 또 웬 말인가? 원위(原委)를 캐어본즉 그 자세한 내막은 여하(如下). 몽헌회장이 타계한 칠월칠석 바로 그날 혜자스님은 도선국사(道詵, 827∼898)가 도선사와 함께 창건한 황해도 정방산의 성불사에 가게 되었다.

송두율의 나약함은 분단민족의 비극!

가서본즉,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 그 그윽한 풍경소리가 들리지 않아 타계한 정씨 부자 두 사람의 이름을 새겨 성불사 추녀끝에 풍경을 달기로 서원을 세웠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장례 뒤치다꺼리를 하고 49재까지 지내고 난 지난 초하루(9월 26일)에는 민간에게 친숙한 웃음 띤 포대화상의 석상을 사람들이 잘 오가는 돌계단 곁에 세우는 제막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5시경 100여명의 신도들과 함께 초하루 예불을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웅전 아미타여래 본존의 법의로부터 찬란한 광채가 나기 시작하여 후불탱화의 부처복대, 관세음보살의 보관과 천의, 사천왕의 보검과 비파 등 차례로 서광이 옮겨다니는 것이었다.

신도들이 환희의 눈물을 흘리며 어쩔줄을 몰라하던 중 주지도 황홀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때마침 포대화상제막식을 위해 주지방에 준비해놓은 비디오카메라가 생각나서 맨발로 뛰어 내려가 당장 가져왔는데도 부처들은 여전히 푸른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는 주지가 찍었다는 비디오를 엄밀히 검토하고 대웅전 현장을 검증하였는데 그것은 달리 해석키 어려운 발광의 물리적 사실이었다. 그것은 외부적 빛의 반사일 수가 없었으며 평소와 동일한 빛의 조건하에서 40분간이나 지속된 그 발광은 이례적 사건임이 분명했다. 삼존불과 후불탱화는 모두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며 10여년전에 새로 개금한 것이다. 물론 평상시에는 능동적으로 빛을 발할 아무런 조건이 없는 차디찬 금부처일 뿐이다. 대웅전 전면의 일체불이 푸른빛을 띠었는데, 후불탱화 부처의 복대와 사천왕의 비파의 발광이 가장 강렬했다.

그것은 용담 백담의 푸른 물과도 같은 맑은 비취색의 깜박이는 광채였다. 그것은 분명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운 취기(翠氣)요 서광(瑞光)이었다. 더 이상의 현혹적인 이야기는 삼가키로 하겠지만 어찌 인간의 정성의 감응을 평상적 인과로만 다 설명할 수 있으리오? 나는 생각했다. 49재를 지낸 친구 몽헌의 혼령이 대기로 흩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면 그 순간 무량광(無量光)의 아미타불 뒷전에서 비취색의 청량한 기운으로 우리에게 어떤 염원을 발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정몽헌 遊魂의 푸른 호소는 민족화해! 오늘 평양 류경 정주영체육관의 개관식을 위해 천명이 넘는 남측인사들이 육로로 평양을 간다. 분단이래 최초의 사건이다. 김윤규사장의 간청이 있었지만 나는 중앙대학교의 일천 이백 눈동자와휴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교단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이런 대규모의 화해축제가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송두율 교수의 북한행적을 두고 매카시즘의 선풍이 이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송두율이 남한을 버리고 북한엘 간 것도 변절이요, 독일에서 구태여 남한에 기어들어온 것도 변절이다. 이 이중의 변절에 앞서 우리는 분단사의 비극을 논해야 하지만 송두율의 최종적 진실은 인간의 나약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이념적 허구의 최종적 진실을 밝히는 사건이다. 그는 그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그 나약한 송두율이 한국정계의 태풍의 눈이 될 만큼 대단한 그 무엇일까? 지금 이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미타불의 푸른 서광이요, 우리의 친구 몽헌회장의 마지막 서원이다. 호국도량 도선사의 목불마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염원을 발하고 있는데 우리는 서로 헐뜯고 죽이려고만 광분하고 있다. 그러나 나 도올은 말한다.

우리의 조국 이 조선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아이러니, 그러나 세계사의 갈등을 극복하려는 우리민족사의 몸부림! 우리미래의 서광! 아미타불의 방광과 더불어 우리는 긍정적 사고를 해야한다. 모든 부정을 넘어서.

편집국 논필 ⓒ[문화일보 10/06 12:44]  


<도올담세>부패·위선의 정치 심판기회로

(::도올담세-盧 '재신임 선언'에 부쳐::)

플라톤(Platon, 428∼348 BC)의 ‘이상국가론’ 그의 전 대화편의 18%나 차지하는 이 방대한 저작은 한 국가가 어떠한 모습이 될 때 가장 이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몇몇 등장인물들의 대화형식으로 서술해나가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50세 가량의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플라톤 자신의 변신이다.

그 원명은 ‘폴리테이아’(Politeia), 그것은 정치체제를 뜻하는 말이므로 그 정확한 서명은 ‘정체’(政體)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박종현(朴琮炫)선생의 주장은 너무도 자명하다. 나는 지난주 이 ‘정체’(서광사, 1997)를 중앙대학교 도서관에 쑤셔 박혀 정독하였다. 최근 인촌상을 수상한 박종현교수는 희랍원전의 한줄 한줄을 치밀한 주석과 함께 엄밀한 우리말로 옮겨 놓았는데, 내가 대학교시절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었던 어느 영역본보다도 원전의 본래적 맥락을 우리 가슴에 잘 전달해주고 있다. 가히 우리나라 번역문학사의 한 금자탑이라 칭송할 만 하다.

1789년에 바스티유감옥의 장벽이 무너지고 근세적 민주주의 새장이 열렸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각적 체제로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레미제라블’이 쓰여지는 19세기중엽 이후의 일이 아닐까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1945년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 민주공화체제를 세웠다고는 하나 그것은 국민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각적 구상이 아니었으며 단순한 모방에 그치는 혼돈속의 모색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요즈음 우리나라의 정치행태와 문화전반을 관망하면서 우리나라의 ‘폴리테이아’는 반세기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이제야 그 진정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케된다. 이제야 비로소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의 서막이 오르고있는 것이다. 바로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최후보루였던 대통령이라는 권위주의적 정체, 그 자체에 도전장을 내던짐으로써 비자각적 구정치 체제의 입각점을 붕괴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맥락에서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탐독하는 즐거움은 고전학자인 나로서는 천고마비의 저 푸른 하늘의 유혹보다 더 신선한 것이었다.

정치적 관행의 정당성 묻는 장치로 이해돼야!

‘폴리테이아’하면, 누구든지 제7권의 ‘동굴의 비유’를 생각게 되고, 암흑과 빛, 감각과 지성, 현상과 본체, 개체와 보편, 가시계(可視界)와 가사계(可思界), 의견과 인식의 건널 수 없는 홍구(鴻溝)를 연상케 된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이데아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이데아론은 기독교의 천당론과 결합되면서 초월주의적 우주론으로 각색되어갔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하여 초월주의를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위대한 정치가를 길러내기 위한 인식의 방편으로서 언급된 것이다. 지나치게 감각적 지각에 의존하여 상대적 의견(doxa, opinion)에만 빠져있는 사람은 치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통치자의 최고의 선이란 절제를 아는 삶이며, 매사에 적도(適度, to metrion)를 아는 것이다. 그 적도가 인간의 행위와 관련될 때 그것을 중용(to meson)이라 부른다. 결국 그의 이데아론도 우주론적 초월주의가 아니라 현실적인 중용을 실천하기 위한 원리적 인식을 말한 것이다. 결국 모든 철학적 진리는 우리의 현실적 삶의 훌륭함(to agathon)을 위한 것이다. 그 훌륭함이란 결국 현상적 사물의 지성적본(paradeigma)을 인식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전체(본)를 알아야 절제와 중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사의 모든 혼란은 본을 상실함으로써 절제와 중용이 불가능해진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재신임 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무현 개인의 도덕성이나 개인적 자질, 성품, 능력에 대한 신임을 묻는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아니 된다. 12월 15일 시행된다는 국민투표는 노무현을 포함한 우리나라 정치사 전체의 관행의 정당성을 묻는 제도적 장치로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노무현의 행동방식이 아무리 반전을 노리는 도박사적 경솔에 물들어 있다고는 하나 대통령의 직위 그 자체를 승부수로 던진 그의 결단의 배면에는 한국정치의 부패와 위선, 독선과 무반성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일관되게 깔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무기력이 그의 원죄가 될 수는 없다.

그의 무기력을 야기시키고 있는 야당이 그의 재신임 제안을 얼씨구나 덥썩 물었다가 또 내뱉고 하는 식의 원칙 없는 처사는 결국 자기무덤을 파는 것이다.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만을 흠잡는 그들의 계산은 그 제안을 노무현 개인의 스캔달로 축소시키려 하겠지만 우리국민은 그러한 흉계를 본원적으로 차단시켜야 한다. 노대통령이 물러나야 할 상황이 온다할지라도 그때는 우리나라 정치, 그 전체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주사위는 그런 방식으로 던져지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노무현의 정치개혁에 관한 일관된 집념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하등의 일관된 정책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특검, 남북관계·대미관계 설정, 새만금, 네이스, 이라크파병… 그 어느 것 하나도 국민의 진보적 열망을 구현시켜 준 것이 없다. 콘텐츠가 없는 무위(無爲)의 형식이 나의 민주주의라 강변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그의 무능(無能)을 입증한 우왕좌왕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무현 자신이 깊게 반성치 않는다면 재신임 이후의 정국에도 아무런 서광이 비치지 않을 것이다.
ⓒ[문화일보 10/13 14:08]


영남대서 특강 도올 김용옥


"우리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만 가지고도 우리는 이 사회를 훌륭하게 건설하는 철학을 정립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유교는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앎의 기저일 것이며 상식의 예찬일 것입니다".

철학교수. 한의원장. 방송 강연자. 신문기자 등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인 도올 김용옥(55) 중앙대 석좌교수가 31일 오후 영남대 인문관 강당에서 '유교와 앎'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동아시아 유교와 근대의 앎(知)'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 강연한 김 교수는 특유의 강렬한 어투와 열정적인 강연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먼저 '인간의 앎'을 몸에 관한 앎과 몸을 둘러싼 환경세계에 대한 앎으로 나누면서 그러나 궁극적으로 몸과 세계는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는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몸은 기(氣)의 사회(Society)이며, 세계는 기의 사회들의 사회입니다. 따라서 몸에 대한 앎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를 알 수가 없으며, 세계에 대한 앎을 통하지 않고서는 몸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은 세계며, 세계는 바로 몸인 것입니다". 김 교수는 "유교적 앎이란 바로 몸과 세계의 통합, 물리(物理)와 인리(人理).생리(生理)의 융합이라는 총체적 앎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앎에 대한 사고가 지나치게 과학(science)이라고 하는 '유령'에 짓눌려 있다고 지적한 그는 "과학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앎이며, 인간의 앎은 인간이 잘 산다는 문제와의 관련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과학적 이성이 밝혀 놓은 모든 법칙도 인간의 삶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라며 "앎은 삶에 귀속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지금 진실로 논구해야 할 것은 오직 무엇이 과연 잘 사는 것이냐 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앎이란 곧 사람을 아는 것이다'란 공자의 얘기를 인용한 뒤 김 교수는 "유교의 앎은 물리보다는 인리를 추구한 앎이었다"고 규정했다. 물리를 인리에 귀속시켰던 유교에 있어서 인간의 앎은 곧 인간을 아는 것, 인간을 안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곧 인(仁)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그 인에는 인성의 보편적 선(善)이 전제돼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앎과 모름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할 때, 그 경계를 분명히 하는 기준은 앎보다는 모름에서 더 선명하게 주어진다"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때만이, 아는 것이 아는 것으로서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모름에 대한 예찬이야말로 유교적 앎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라며 "이러한 태도가 유교적 앎을 형이상학적 독단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보편적인 민(民)의 기회균등을 위한 도덕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측면 등에서 남한은 유교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앞으로 남북한의 대화는 유교를 매체로 해서 이루어질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며 "남북의 교류도 결국 유교적 사회주의와 유교적 자본주의의 융합으로서 해석될 여지를 남기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매일신문 10/31 12:02]


<도올담세>[도울]KBS 공공성은 강화돼야  

(::한나라 '수신료분리징수'정당한가?::) 본시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는 것은 한 나라의 공공자산을 증대시키는 것을 지고의 목표로 삼는다. 공공자산의 증대를 통하여 국력을 일사불란하게 결집시키는 것이 보수주의가 노리는 것이다. 그리고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보수주의는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민족자결의 국방력 강화를 통해 민족과 국가의 역량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보수주의는 민족이 빠져있다. 외세에 의존하는 반민족주의와 반공만을 그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고 미국말만 듣고 미국 흉내만 내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다. 이제 그들은 우리나라의 공적 자산마저 허물어버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국정의 위기를 실감한다.

한나라당이 수신료 분리징수를 위한 방송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은 참으로 국가대계를 염려치 않는 경박한 처사라고 개탄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한나라당이 언제나 야당을 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수권정당으로서 이 나라를 과연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가, 그 기본 정강정책을 바로 세우기만 한다면 하시고 여당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당이 되었을 때, 국가의 대간을 이루는 공적 자산을 허물어뜨려 놓은 그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KBS의 문제는, 정책이나 이념노선의 호오(好惡)와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되어야하는 국가의 공공성 즉 국력의 집결과 관계되는 매우 근원적인 문제인 것이다. 지금 KBS의 몇 개의 프로그램이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볼 때 불리한 성향을 과시한다고 해서 KBS의 공공성 그 자체를 궤멸시킨다는 것은 정치를 안다고 하는 사람의 자세일 수가 없다.

시청료와 수신료는 별개

이미 저승의 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우인 한창기선생이 십여년 전 빗물이 떨어지는 성북동 한옥의 툇마루에 앉아서 나에게 절박하게 외친 한마디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김형!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삶의 질을 가장 하락시킨 혁명이 바로 텔레비전의 출현일 것이우이.” 나는 그 순간 그의 외침의 진실을 깊게 공감했다. 단군 개국이래 텔레비젼처럼 우리 백성의 일상적 삶의 행태를 뒤바꿔놓은 것은 없다. 그것은 우리의 안방을 마구 출입하는 유령이다.

유위(有爲)의 죄업은 유위(有爲)로 씻을 수밖에 없다. 텔레비젼이라는 레바이아탄(leviathan)의 타락은 우리국가의 타락이요 우리국민의 파멸이다. KBS의 수신료분리징수는 징수율의 저하와 징수비용의 증대를 가져와 결국 KBS라는 공영방송을 상업주의의 경쟁구조로 휘몰게 된다. 그러면 그나마 유지되었던 공익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청료(subscription fee)와 수신료(licence fee)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시청료는 극장 관람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신료는 수상기를 소유한 사람이 국가에 지불해야하는 준조세 개념의 요금이다. 그것이 합헌의 정당한 징수라는 것은 이미 1999년 5월27일 헌법재판소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상파방송은 한계대역을 가진 공공재며 사유될 수가 없는 것이다.

보수주의 본질은 국력의 결집, '상업화 막아라'!

문제는 KBS가 1961년 개국이래 그러한 공공성의 명분에 합당한 프로그램의 성격과 수준을 유지해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대답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오늘 KBS의 움직임은 이러한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그것은 강준만교수의 지적대로 “부끄러움”이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아픔”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정연주는 KBS취임사에서 개혁의 세 방향을 제시했다. 독점에서 경쟁으로, 집중에서 분산으로, 폐쇄에서 개방으로! 그리고 내가 이해하는 한 정연주는 이러한 자신의 소신에 충실했다. 내가 이해한다고 하는 뜻은, 나는 일년 가까이 KBS 내부멤버로서 핵심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에 KBS를 너무도 잘 안다는 뜻이다. ‘도올의 논어이야기’의 녹화, 편집에 몸소 참여했다. 그 조직속에서 나는 많은 부조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KBS는 지금 변하고 있다. 제왕적 사장의 이미지는 사라졌고, 부장급이하의 일선PD에게 응당한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고 있으며, 방만한 조직은 창의성을 위하여 조여지고 있다. 그리고 입사시험도 토익점수 비중을 최소화시키고 학연·지연의 줄타기를 완벽하게 차단시켰다. 그 결과 올해는 신입사원 137명이 전국의 무명대학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되었다. 정연주는 의로운 다중과 함께 뛰는 사람이다. 한나라당이 정연주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KBS의 공공성 그 자체를 파멸시키려고 한다면 단언컨대 그것은 곧 한나라당을 파멸시키는 길일 뿐이다. 한나라당은 방송법 개정안을 하루 속히 철회하고 폐기시켜야 한다. 만약 다수당의 폭력으로 그것을 통과시킨다면 노무현대통령은 단호하게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정연주의 KBS개혁은 KBS직원 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으며, 양식 있는 이 땅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든지 KBS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인물을 키울 줄 알아야하며, 의로운 시도에 대해서는 시행착오에 연연치 말고 응분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개정법안 철회, 한나라당의 살길!

사랑하는 국민들이여!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단돈 2,500원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KBS라는 문화적 혜택을 과연 아깝다고 해야할 것인가? 63년에 100원, 74년에 500원, 81년에 2,500원 냈던 것을 지금 20년 넘도록 그대로 내고 있는 이 수신료를 과연 깎아내려야 할까? 영국인들은 BBC를 위하여 월 2만원을 내고있는데! 미국이 BBC같은 공영방송 하나 확보 못한 것이 토마스 제퍼슨이래 국가정책의 최대 실수라는데! KBS수신료를 올려서 우리사회의 공익성을 증대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상업화되어 가면 갈수록 KBS와 같은 공영성은 보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펄펄 끓는 물 속의 얼음조각처럼 급속한 해체의 일로로 치닫게 될 것이다.

ⓒ[문화일보 10/30 12:28]


<도올담세>[도올] 우리시대 진정한 목탁 만났다  
(::문화일보 창간 12돌에 부쳐::) 공자가 어느날 의(儀)라는 조그만 읍의 변경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그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장(封人)이 공자라는 인물이 제자들과 함께 그곳을 지난다는 것을 알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내가 이 지역을 지나는 유명한 사람은 인터뷰를 안한 적이 없소.”(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자의 시종인들이 인터뷰를 허락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두 사람만의 인터뷰가 관문 옆방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수비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궁금해하던 공자의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선생께서 지위를 얻지 못하고 유랑하심을 걱정하느뇨? 천하에 도가 없은 지 오래되었도다. 하늘은 장차 선생님을 목탁으로 삼으실 것이다.”(天將以夫子爲木鐸.)

신문은 백성의 소리를 전하는 방울소리.

여기서 목탁(木鐸)이란 스님이 절간에서 두드리는 목탁이 아니다. 이것은 옛날의 제사장들이 들고 있었던 지팡이 꼭대기에 씌워지는 동제나 철제의 장식인데, 그 속엔 방울이 들어있었다. 쇠방울이 들어 있으면 금탁(金鐸)이라 했고, 나무방울이 들어 있으면 목탁(木鐸)이라 했다. 하늘이 공자를 장차 목탁으로 삼는다 하는 뜻은, 신탁의 대행자가 지팡이 방울을 울려 신의 소리를 알리듯이, 공자가 사문(斯文)의 소리를 이 세상에 펴게 되리라는 예언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 예언은 적중했다.

우리가 보통 신문을 가리켜 ‘사회의 목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논어’ 팔일편의 마지막 고사에 그 출전이 있는 것이다.

신문이 사회의 목탁이라 함은, 바로 신문이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전령의 방울소리라는 뜻이다. 인내천(人乃天)이다. 하늘(天)의 소리란 곧 민(民)의 소리다.

저널리즘이란 인간세의 소식(消息)이나 그와 관련된 다양한 언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배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세계 최초의 일간지로서 BC 59년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발간한 고대로마의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꼽는다. 그것은 로마의 시민들이 바글거리는 광장(Roman Forum)에 족자형태로 걸려있었고, 거기에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이벤트들이 적혀있었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에만 갇혀있었던 정보를 일반시민들에게 공개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표방했던 것이다. 중국의 당(唐)나라 때도 ‘빠오’(報)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관아에서 발간되는 것이었다.

근대적 저널리즘의 역사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식자의 증대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정보의 유통방식에 관한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따라 그 양식의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사에 등장한 대부분의 신문이나 저널들이 초기에는 매우 당파적인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한 당파나 종파의 특정한 이념을 옹호하며 반대파를 비방하는 것을 그들의 소임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발행부수가 증가하고 그 자체로 부를 축적함에 따라 신문은 그러한 당파성에서 독립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그렇지만 그렇게 당파성에서 독립된 신문들은 오로지 발행부수의 증대를 위한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에 매달렸다. 이러한 성향은 뉴욕시의 양대 신문이었던 퓰리처의‘월드’지(the World)와 허스트의‘저널’지(the Journal)사이의 선정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에서 극치에 달하게된다. 이것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세계 저널리즘의 대표적 정황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의 거대 신문들은 아직도 이러한 19세기 당파주의와 선정주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언론은 19세기적 당파주의 벗어나야!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한 선정주의는 결국 관능적 쾌락이 지속될 수 없는 것처럼, 그 자체로 지속될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선정주의의 반복은 피로와 권태를 유발시킨다. 진정한 뉴 저널리즘(new journalism)의 과제상황은 어떻게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품격 있는 교양성을 유지하면서도 지속적인 재미를 제공하느냐에 매달려 있었다.

뉴스페이퍼는 어디까지나 뉴스를 생명으로 한다. 뉴스(news)란‘새로움’이다. 그런데 신문은 새로운 사실의 신속한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이미 텔레비전의 기능과 경쟁상대가 될 수가 없는 시대로 돌입했다. 따라서 신문의 생명력은 ‘하드 뉴스’(hard news) 즉 스트레이트 기사의 신속한 전달이라는 애초의 목표로부터 멀어져 갔다. 하루라는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도, 신문의 유니크한 역할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사실의 해석(interpretation of facts)이 되어버린 것이다.

20세기 신문의 역사에 있어서 또 하나의 과제상황은 신문과 신문이 속한 사회의 권력구조와의 관계였다. 신문이 다루는 내용이 국가의 목표와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제한성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한성을 우리는 ‘검열’(censorship)이라고 부른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엄격한 검열제도가 지배적이다. 북한이나 중국의 상황은 그러한 극단적 예를 과시하고 있다. 독재정권하에서의 우리나라 신문의 모든 문제도 바로 이 검열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문민화되어 가면서 이 검열의 문제는 사라져갔지만, 김중배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우리나라의 검열은 바로 언론자본의 권력 그 자체의 검열이 더 악랄한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독재권력의 검열은 사라져갔지만 그것의 공백을 신문사 자체검열이 메웠다.

한국의 신문은 아직도 검열이 없이 생존키는 서운한 모양이다.

내가 기자로서 서대문 문화일보 사옥에 역사적 첫발을 디딘 것은 2002년 12월 2일 새벽 6시 정각이었다. 그동안 아직도 1년이 채 안되는 세월이었지만 나는 편집국의 기자로서 원고지 3000장에 가까운 막대한 분량의 글을 썼다. 기네스북에 오를 기록이라고 생각되지만 내가 이토록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프로페셔널리즘의 완벽성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문화일보의 자유롭고도 개방적인 분위기, 그리고 인간의 선의를 자극시키는 우애와 격조 때문이었다.

우선 문화일보 편집국의 신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외재적 권력의 개입이 없다. 평기자들의 양식(良識)의 합의가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컨센서스에 의하여 신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추구한 뉴저널리즘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갖는다.

권력과 자본의 '보이지 않는 검열' 상존!

첫째, 나의 기사는 기존의 모든 저널리즘의 양식을 파괴했다. 기사작성의 형식이나 그에 따른 고정적 언어의 양식을 모두 파괴시켰다. 나의 기사는 사실의 보도이면서도, 해석이었고, 문학이었고, 예술이었고, 시였다. 그리고 언어도 고등한 언어, 저속한 언어, 학술적 언어 ,일상적 언어, 고졸(古拙)한 언어, 현대적 언어, 그 모든 양식을 파괴했다. 나의 언어는 혼용이 아닌 그 이상의 몽타주였다. 그리고 문어와 구어의 구분을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6하원칙의 모범답안을 고수하지 않았다.

둘째, 나는 어떠한 정치적 이념의 입장에도 나의 기사의 관점을 고정시키지 않았다. 내가 신봉한 이념이란 인간세의 상황적 진실일 뿐이었고, 모든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일 뿐이었다.

셋째, 나는 긍정과 부정을 적당히 섞거나, 기사 끝에 비꼼이나 뒤틀림의 꼬리표를 붙이는 그런 야비한 짓을 하지 않았다. 나는 긍정할 때는 철저히 긍정했고, 부정할 때는 철저히 부정했다. 그렇게 철저한 방식으로만 재미를 증폭시켰다.

넷째, 나는 타인의 말을 전함에 있어서 나의 소감을 전하는 것보다는 그 본인이 가장 전하고 싶어하는 논리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논리와 감정이 이입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본인의 논리와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나와 인터뷰를 한 모든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보이스를 증폭시키는 즐거움을 만끽했다고 자부한다.

다섯째, 나는 신문의 사명이 객관성(objectivity)보다는 책임성(social responsibility)에 있다고 생각했다. 객관적 사실이란 결국 인식론적으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은 보편성을 지향하는 책임성이다.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하며, 사욕보다는 천리를 존중하며, 쾌락보다 절제를 사랑하는 책임성을 나는 강조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주관을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자로서 나의 가치관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이었다.

이것이 나의 뉴저널리즘이다. 뉴(new)란 곧 일일신(日日新)이요, 우일신(又日新)이다.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할 뿐이다. 이러한 나의 끊임없이 새로운 오디세이를 지켜준 잔잔한 바다, 그 바다가 문화일보였다. 그것은 우리시대의 목탁이다. 나는 문화일보를 사랑한다.

ⓒ[문화일보 11/01 11:58]


<사상가 도올이 만난사람> [도올]"5大그룹서 72억 받았다"

(::대선자금고백 우리당 이상수의원::)

―도대체 얼마를 받았습니까?

“춘여사(春女思), 추사비(秋士悲)란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게 뭔 뜻입니까?

“봄날의 여인은 사랑에 설레고, 가을철의 선비는 슬픔이 많다, 사내로 태어나 큰 뜻을 못피우고 또 속절없이 한 해를 넘기는구나 하는 비감이 짙어진다는 뜻이겠죠.”

―그러니까 솔직하게 모든 것을 까발겨야 할 것 아닙니까?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라는 영국인 에집트 발굴학자는 왕릉들의 계곡이라는 사막에서 15년을 헤맨 후에 1922년 11월 4일 드디어 투탄카멘의 무덤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투탄카멘의 미라를 덮은 그 황홀한 골드마스크 위에서 카터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송이의 꽃이었습니다.

삼천년이 넘도록 그곳에 있었던 그 꽃이 사흘 전에 놓아둔 한 떨기 장미보다도 더 생생하게 향기를 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천년과 사흘! 그것이 시간이라는 것이죠.”

―갑작스레 왜 이런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시간의 주관성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요즈음 제가 사는 시간은 1각이 3천년 같습니다. 저는 이제 모든 것을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마음을 비웠습니다. 우리당 총무위원장 자리까지 내던졌습니다. 김선생님도 ‘노자’강의 속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잔은 차서는 아니 되고, 유약(幼弱)이 강강(剛强)을 이기는 것이라고….”

SK 25억으로 최다...도덕적으로 부끄러운 내용 없어

―자아! 그러니까 이제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까발깁시다. 제가 의원님을 인터뷰하려는 뜻은 의원님을 골탕먹이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민족은 너무도 중요한 정치사적 기로에 서있습니다. 여기엔 이제 여·야가 없습니다. 우리사회의 보편적 선(善)의 증대를 위하여 모두가 희생해야 할 시점입니다.

큰마음, 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 역사는 또다시 저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 때 세 사람의 명신이 있었습니다. 백만 대군을 통솔함에는 한신(韓信) 같은 장군이 없었고, 군막속에서 계책을 짜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데는 장량(張良)만한 책사가 없었고,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로를 끊기지 않게하는데는 소하(蕭何)만한 살림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권을 잡은 후 한신은 토사구팽되었고, 장량은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오직 살림꾼 소하만이 한고조 유방 곁에서 끝까지 복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2·19 대선의 소하인 이상수는 복락은 커녕 명예와 자존심이 짓밟히는 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도 더욱 정직한 고백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길만이 의원님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첩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좁혀서 이야기해봅시다. 5대그룹으로부터 도대체 얼마를 어떻게 받았습니까?

“그런데 제가 여기서 아무리 정확한 액수를 밝힌다고 해도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거란, 영수증, 계좌 등 구체적인 서류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서류적 근거와 인간의 기억 사이에는 반드시 몇 억의 오차범위는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이런 오차를 가지고 기자님들은 이상수가 말 바꾼다 어쩐다 또 크게 떠벌립니다. 이미 밝힌 바대로 지난 대선의 총수입 규모는 보조금, 보전금, 후원회 모금액을 포함하여 400억 안팎의 규모입니다. 아무리 여기서 까발기고 정밀한 조사를 해봐도 단언컨대 그 오차범위는 10억을 넘지는 않을 것입니다. 100억이냐, 1000억이냐, 2000억이냐, 하는 따위의 오차는 존재할 수가 없는 매우 성실한 회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400억에 대한 모든 서류적 근거는 훼손되지 않은 채 정확하게 보존되어 있습니까?

“계산하기 어려운 몇 억의 돈이 누락되어 있을 수는 있으나 거의 모든 수입액이 정확하게 영수증처리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주당은 1억 이상의 돈은 모두 수표로 받았습니다. 한나라당처럼 지하주차장에서 검은 돈이 오가는 그런 마피아영화장면 같은 짓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당선가능성이 희박했던 우리당에게 도대체 누가 그런 거액의 사과박스를 건네준단 말입니까?”

―400억의 총수입 중에서 내역이 확실한 공식적인 선거보조금·보전금 250억을 제외하면 결국 후원회 모금총액인 150억 가량이 문제가 되겠는데요. 그 중 돼지통장 국민성금 50억을 제외하면결국 100억 정도가 기업으로부터 받아낸 돈이 아닙니까?

적절한 시기 전모 밝힐 것... 盧대통령도 이미 동의!

“그렇습니다. 우리쪽에서 모금한 것도 있고 그쪽에서 자발적으로 내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아무리 정확히 실사를 해도 150에서 160억 사이 정도의 오차밖에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업성금이 110억을 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3월 기자들과 허물없이 술자리에서 100대 기업으로부터 110억을 거두었다고 순진하게 무

 PREV :   일본부는 伽倻가 설치한 倭 통제집단이었다 관리자 
 NEXT :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관리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