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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부는 伽倻가 설치한 倭 통제집단이었다
 관리자  08-22 | VIEW : 5,508
일본부는 伽倻가 설치한 倭 통제집단이었다



逆說 한국사 / 고대사 최대쟁점 任那日本府의 실체는?



이희근 <역사학자>(s2lhk@unitel.co.kr)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은 일제시대 이래 한·일 양국 학계의 최대 쟁점이었다.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이 문제에 관한 한 감정적 판단까지 숨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주제로 남아 있다.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씨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았던 광개토대왕비문이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해 조작됐다고 폭로했을 때를 기억해 보라.



당시 국내 언론매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진희씨의 비문조작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를 둘러싼 논쟁과 발표회가 뒤따랐고, 관련 논문과 서적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진희의 조작설 제기는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당시 유신에 쏠릴 국민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비문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사람들의 반일감정에 다시 불을 지폈고, 학자들도 대체로 비문조작설에 동조해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그의 주장은 조작설의 당사자인 일본 학계에도 충격을 주었다. 일부 일본 학자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비문조작설을 일본 근대 역사학의 왜곡된 체질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연결지었다. 즉, 일본의 근대 역사학이 군국주의 침략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된 것 아니냐는 반성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 연구자들은 비문조작설을 ‘공중에 지은 누각’으로 평가절하했다. 그들의 논리는 일개 위관급 포병장교에 불과한 사쿠오(酒句景信) 대위는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현장에서 비문을 조작할 만한 지식이 없었으며, 더구나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한 조직적인 조작이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임나일본부 문제가 고대 한·일 관계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점령하는 것은 어찌보면 쉬운 일이다. 군사력만 있으면 일단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정복에 대한 피정복민의 동의를 얻거나 피정복민의 저항 의지를 원초적으로 빼앗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정복민의 뇌리를 세뇌시켜 타민족의 정복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이 경우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역사가 이용되는 것이다. 아다시피 이런 전략에 능란한 민족이 일본 민족이었다. 일본은 단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의로 조작해 저항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임나일본부란 한마디로 말해 ‘고대 야마토(大和) 조정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일제 강점의 도구로 이용된 셈이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견해는 일본 지식인들의 의식 속에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서구열강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자 이는 더욱 확대생산됐다. 군국주의자들은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한국을 침략해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정한론이었고, 그것의 역사적인 주된 근거가 바로 임나일본부였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그 뒤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정당화해 주는 역사적 장치로 작용했고, 일제가 패망한 현재까지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수록품?있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日帝의 한반도 강점의 무기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집대성한 인물은 스에마츠(末松保和)다. 스에마츠는 1949년 출간한 그의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집대성했다. 그 근거와 내용부터 짚어보자.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49년(369)조에 따르면, 신공황후가 황전별(荒田別)·녹아별(鹿我別) 등을 보내 백제 장수들과 함께 신라를 치고, 이어 가야 지역의 7국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 임나일본부설의 주요한 근거자료다. 또한 “일본서기”는 그 이전에도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복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 역시 임나일본부를 실재화하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신공황후 때부터 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인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 세력은 백제·신라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562년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요체다.



스에마츠는 ‘광개토대왕비문’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았다. 비문의 그 유명한 신묘년(391)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혹은 가라)·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확인해 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은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1차자료이고, 고구려 입장에서 쓰여진 자료라는 점에서 “일본서기”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스에마츠는 이밖에도 중국 남조 송·제·양나라의 정사(正史)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 기사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들었다. 이들 기록에는 왜왕이 ‘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諸軍事)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 송과 양나라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3국인 중국측 사서에도 야마토 조정의 한반도 중남부 지배를 반영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으니, 임나일본부설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밖에 그는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칠지도(七枝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를 합리화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은 북한 학계에서 먼저 나왔다.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은 1963년 “력사과학”에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해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했고, 이후 이를 보완한 “초기 조일관계사”(1965)를 출간해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했다.



여기서 김석형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반도 관련 사건은 실제 한반도 여러 나라와 야마토 조정 사이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주민들에 의해 각지에 세워진 이른바 ‘삼한·삼국의 분국(分國)’들과 야마토 조정이 일본열도 안에서 벌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는 임나일본부도 일본열도 내의 가야계 분국인 임나국에 설치한 것이지, 한반도 남부에 설치된 것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이론은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 본국과 연계를 가진 분국들이 일본열도를 지배했다는 정반대 논리였다. ‘분국설’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이처럼 일본의 논리를 정반대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으나 그 파격성만큼의 관련 자료에 제시가 불분명해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일축해 버렸다.




임나일본부설에 守勢였던 한국 역사학



남한 학계에서는 김석형의 주장이 나온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렇다할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천관우(千寬宇)가 1977∼1978년 “문학과지성”(28·29·31호)에 기고한 일련의 논문을 통해 임나일본부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관련 사건의 주체는 일본의 주장대로 야마토 조정이 아니라 백제라고 주장했다.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에 의해 “일본서기”가 편찬되면서, 원래 백제가 주체로 되어 있던 기사들이 왜가 주체로 된 기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 지역의 통치를 위해 설치한 파견군 사령부와 같은 것으로, 고대 일본은 한반도 남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북한의 유력한 학자들이 일본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에 반론을 제기하자 일본 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을 보완한 여러 견해들을 제출하였다. 가야 지역에 있던 왜국계 주민의 자치기관이라는 견해, 가야와 왜의 외교교섭을 맡은 기관으로 보는 견해, 왜가 설치한 상업적 목적의 교역기관으로 보는 견해 등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들이다.



어쨌든 이들 견해는 과거같이 2세기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당초의 주장에 비해 상당히 후퇴한 모습이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는 현재까지도 임나일본부설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인식의 기본틀, 즉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진출하여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에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다”는 생각 자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일부 논거들은 무너졌지만 ‘광개토대왕비문’을 비롯한 우리측 기록에도 분명히 등장하는 왜병의 존재는 결국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해 강력한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형된 임나일본부설도 가야 지역에서 왜의 역할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제 논쟁의 핵심은 임나일본부 자체가 아니라,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 혹은 영향력 행사의 확인에 모아졌다. 이 사실만 훼손되지 않는다면, 임나일본부가 통치기관이었든 아니든, 더 나아가 실제 존재했든 안했든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이에 대한 우리 학계의 주된 견해는 임나일본부설 자체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신묘년,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에는 그러한 대규모 정복전쟁을 수행할 만한 정치세력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을 허구라고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였다. 과연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미마나’로 읽는데 좁은 의미로는 김해, 넓은 의미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임나가 김해의 금관국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넓은 의미로 가야 지역의 나라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많지는 않지만 임나의 용례는 우리측 기록에도 나타난다.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 ‘진경대사탑비문’(眞鏡大師塔碑文·923) 등에서 3회나 나온다. 예컨대 “삼국사기” 열전 강수전에는 신라 문무왕 때 활동한 유명한 문장가 강수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이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任那는 우리 역사 기록에도 實在



이렇게 임나가 지역 명칭이라면 이른바 임나일본부란 그곳에 설치된 일본의 관부(官府)를 뜻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쪽 기록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이것이 한때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돼 왔다. 그러나 우리쪽 기록에 없다고 그 존재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결코 학문적 태도가 아니다. 우리측 기록인 “삼국사기”는 삼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나 임나에 대한 기록 자체가 극히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임나’가 무려 215회나 등장한다. ‘일본부’라는 용어도 총 35회가 나올 정도로 빈번히 나타난다. 그 중에서 ‘임나일본부’라고 되어 있는 것은 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조에 2회, 7월조에 2회, 5년(544) 11월조에 1회 등 총 5회이다.



특히 “일본서기” 신공(神功) 49년(369) 3월조에는 왜가 가야 지역을 정벌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여기에서는 신공황후가 황전별·녹아별 등을 보내 백제의 구저·목라근자(木羅斤資)·사사노궤 등과 함께 탁순(卓淳)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남가라(南加羅)·록·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가라(加羅) 등 가야 7국을 평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어떤 기록들은 과장과 왜곡이 심한 것으로 일본 학계에서조차 인정하는데, 우리 학계는 위의 기록들이 가장 대표적 왜곡기사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왜가 가야 지역을 정복했다는 기사는 “일본서기” 기사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왜의 가야 정복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영락(永樂) 9년(399) 기해(己亥)에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했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신라왕)을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10년(400)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왜적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났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곧 항복하였다.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 기사는 왜 군사가 임나가야를 비롯한 가야 지역만이 아니라 신라 영토까지 점령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러면 이 비문에 등장하는 왜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비문에 따르면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기 위하여 보낸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무려 5만명이다. 이는 이런 정도의 대병력을 보내야만 왜를 물리칠 수 있었음을 뜻하는데, 당시 일본열도 내에는 이런 정도의 병력을 움직일 만한 국가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에 통일된 국가권력이 형성된 시기를 6세기 말로 보는 학설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는데, 최근 일부 학자들이 그 시기를 7세기 말로 1세기 이상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여 점차 세를 얻어가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광개토왕비문의 왜가 현재의 일본열도 내의 세력은 아니遮?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를 점령한 왜의 실체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중국 史書에서도 확인되는 한반도 倭



이 시기에는 왜가 가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사실은 3세기 한반도 상황을 알려주는 중국 삼국시대(220∼265년)의 정사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진한·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지금의 진한 사람은 모두 납작머리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地]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이 기록에서 변진 지역은 가야 지역을 가리키는데, 위 기사는 가야의 독로국이 왜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보다 앞선 시기인 후한시대(25∼220년)의 사서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한조에서도 확인된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이렇듯 이 시기 왜는 일본열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도 분명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왜는 가야 지역에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과 전쟁을 벌였다 패배한 4년 후인 404년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런 사정은 광개토왕비문 영락 14년조의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쭕 쭕 쭕 로 나아가 서로 맞부닥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는 구절이 입증해 준다.



왜의 고구려 본토 침략은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싸울 정도로 고구려에 대단히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이때 광개토왕이 몸소 군대를 지휘했는데 이는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작전에 나서야 했을 정도로 왜가 동원한 병력이 대규모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의 왜 세력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하정책에 맞서 두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결정적 타격을 입었고, 5세기 어느 시점에 그 주도세력이 일본열도로 옮겨간다. 그러면 한반도 왜의 중심지는 어디일까.



필자는 최근 몇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한반도 왜의 중심이 나주 일대였음을 확인하였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월간중앙” 1999년 3월에 실린 ‘나주 반남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에서 자세히 밝히 바 있다).



“삼국사기” 왜 관련 기사도 이같은 사정을 뒷받침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왜 관련 기록이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혁거세 8년(서기전 50)부터 소지왕 19년(497)까지 대략 550여년 동안 49회에 걸쳐 왜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려 33회가 왜가 신라를 침략했다는 기사이다.



그러나 그 뒤로 약 160여년 동안 왜 관련 기사는 사라졌다가 백제의 멸망 무렵인 문무왕 5년(665)에 다시 등장한다. 백제본기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왜 관련 기사는 아신왕 6년(397)에 처음 등장하여 비유왕 2년(428)까지 7회에 걸쳐 보이나 그후 180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다시 무왕 9년(608)에 다시 등장해 의자왕 대에는 두 차례 나타난다.



백제 비유왕 2년(428)과 신라 소지왕 19년(497) 이후 왜 관련 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오랫동안 사라지게 된 것은 이 무렵, 즉 5세기경 한반도 내의 왜 주도세력이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5세기경 한반도倭 일본으로 대규모 이동



물론 왜의 일부 세력은 가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런 사정은 황룡사의 ‘본전’(本傳)을 인용한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黃龍寺九層石塔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선덕왕 5년(636)에 자장(慈藏)이 증언한 내용 중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과 연(連)하고, 남으로 왜인과 접(接)해 있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이처럼 한반도 왜세력이 이 시기까지 신라의 남쪽에 잔존해 있었다.



이때 일본열도로 이주한 왜는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세력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란 용어가 총 215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 왜 정권과 ‘임나’ 관계 기사가 68회에 걸쳐 나타난다. 이는 왜와 임나 양자 사이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562년 임나가 멸망하자 흠명(欽明)천왕은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내며 임나를 부흥시키라는 유언을 남긴 데서도 그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그후 민달(敏達)·숭준(崇峻)·추고(推古)천왕도 계속 임나의 부흥을 명령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관련 기사는 바로 일본열도?건너간 왜 세력과 한반도 남부에 잔존해 있던 왜 세력 사이의 이런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임나 즉, 가야 지역은 일본열도의 왜 세력에게는 자신들의 고토(故土)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 및 중국 국가들과 교류하는 데 가장 소중한 요충지였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는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지인 부산(김해)이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 남부 지역인 옛가야 지역이 지닌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은 일본열도로 이동한 왜의 중심세력이 왜 임나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즉 일본으로 건너간 왜 세력은 한반도 남부 혹은 중국 국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교통 요충지인 옛가야 지역과 계속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그것이 바로 임나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 잔존했던 왜는 광개토대왕의 남하정책에 맞서 싸우다 결정적 타격을 입고 주도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한반도의 왜는 가락국의 원자료인 ‘본기’(本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의 “제8대 질지왕 2년(452) 임진에 이 땅에 절을 설치하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받음과 동시에 남쪽의 왜까지 진압하였다. 모두 이 나라 ‘본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금관가야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가야는 452년 한때 자신들을 지배했던 왜를 진압하고나자 왜 세력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일 역사학계의 최대 쟁점인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부’일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일본서기” 웅략(雄略)기 8년(464)의 “(신라왕이) 임나왕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의 위태로움이 누란의 위기보다 더하다. …일본부의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하였다. 이에 임나왕은 선신반구(膳臣斑鳩)·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난파길토적목자(難波吉土赤目子)에 권하여 신라로 가서 도와 주게 하였다”는 기사가 뒷받침해 주고 있다.




日本府는 7세기말 이후에 사용했던 用語



“일본서기” 편찬자가 일본의 권위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 대담한 개찬이나 윤색을 가했기 때문에 그 표현상의 문제는 있지만, 이 기사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임나(가야)왕의 지시에 따라 일본부가 신라에 구원군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같은 사건을 다룬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3년(481)조 기사는 이 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여기서는 아예 신라 구원군을 왜병이 아닌 가야병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측에서는 왜를 가야의 예속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일본부’라는 용어는 “일본서기”에서 앞의 웅략기 1회를 포함하여 35회 나오는데, 나머지 34회는 모두 흠명(欽明)기 2년(541)부터 15년(554) 사이에만 보인다.



흠명기에 나오는 일본부 관련 기사에서도 왜가 가야 제국에 대하여 조세 및 역역(力役)의 징수나 군사동원,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제했다는 사실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즉 관청이나 기관인 부의 실체를 나타내는 정치·군사적 지배에 관련되는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단지 흠명기 기사 모두는 532년 신라에 멸망당한 금관국 등 남부 임나의 부흥 문제 등을 둘러싼 외교활동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일관되게 가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부는 가야제국의 왕들의 통제 하에 있었다.



결국 일본부는 일본학계의 주장처럼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 혹은 영향력을 행사한 기관이 결코 아니었다.



‘일본부’라는 명칭도 6세기 중엽인 이 시기에 실제로 사용했던 명칭은 아니다. ‘일본’‘부’는 7세기말 이후에나 쓰였던 용어들이다. 따라서 일본부는 왜가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 가필 수정된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일본서기”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음으로 ‘미마나노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읽고, ‘임나지왜재’(任那之倭宰)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여기에서 ‘야마토’는 왜를 의미하고 ‘미코토모치’는 천황의 의지를 전달하는 사람, 즉 사신을 의미한다.



결국 ‘임나일본부’는 ‘임나에 파견된 왜의 사신’을 의미한다. “석일본기”는 헤이안(平安)시대(782∼1190) 이래 조정에서 행해졌던 “일본서기”에 대한 강독을 가마쿠라(鎌倉)시대(1190∼1336) 말기에 집대성한 것이므로, 헤이안·가마쿠라시대의 해석으로 ‘일본부’는 ‘왜의 사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일본서기” 흠명기 15년(554) 12월조의 백제가 왜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를 ‘안라제왜신’(安羅諸倭臣·안라에 있는 여러 왜신들)이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부’란 왜의 사신 내지 그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더라도 ‘임나일본부’는 왜 천왕의 명령을 받아 ‘임나에 파견된 왜의 사신 내지 그 집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유력 씨족이 작성하여 제출한 가문 기록을 토대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 유력 씨족은 정치·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조상의 활동을 천황과 관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반도의 잔존 왜 세력의 후손도 조상들의 과거활동이 천왕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꾸밀 필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부는 천왕과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있다.  



실제 흠명기에 보이는 일본부의 구체적 활동을 보면 그들은 야마토 정권의 명령이 아니라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 심지어 흠명기 5년(544) 2월조에 따르면 왜왕의 사신조차 일본부와는 임나 부흥문제에 관한 정책을 직접 논의하지 않고 따돌렸기 때문에 그들은 백제나 신라에 가서야 이 문제에 대한 왜왕의 의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본부가 임나 부흥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금관국의 멸망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결과이다.




임나일본부, 倭王의 통제 받지 않았다



그러면 일본부는 어째서 왜왕과 소원한 채 가야 제국 왕의 이해를 대변했을까? 우선 일본부 소속 인물들의 출신지와 가야 지역에서의 장기체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흠명기에 따르면 일본부경(日本府卿·일본부의 최고위직)인 적신(的臣)이 적어도 12년 이상 줄곧 안라에만 체류하다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휘하의 길비신(吉備臣)·하내직(河內直) 등도 거의 비슷하게 오랜 기간에 걸쳐 안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일본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좌로마도(佐魯麻都)는 그의 어머니가 가야인인 것으로 보아, 그는 가야에 거주하던 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흠명기 2년(541) 7월조의 “일본경(日本卿) 등은 임나국에 오래 살았고 신라의 경계에 접해 있으니 신라의 사정도 알 것”이라는 백제 성왕의 증언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왜 왕권이 그들을 임나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사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부는 임나 지역에 거주하는 현지 왜인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본서기”에서 일본부와 야마토 조정과

의 예속관계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기사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임나의 일본부가 야마토 조정의 예속기관이었다면 당연히 야마토 조정과 공동으로 전략 전술을 짰을 텐데 오히려 이들은 야마토 조정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부가 왜왕과 꽤나 소원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백제의 성왕은 반백제·친신라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하내직 등을 본거지로 송환시킬 것을 왜왕에게 여러번 요청하였으나, 이에 대해 왜왕은 아무런 실력행사도 못하고 있다. 일본부가 왜왕의 통제와 무관한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흠명기 기사를 보면 왜왕은 몇차례에 걸쳐 가야의 일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그 입장 표명이 일본부에 직접 전달되지 못하고, 백제나 신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왜왕은 일본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그 관계도 아주 소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부가 기존 한국학계의 주장처럼 백제가 설치한 기관 혹은 백제의 통제하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는 흠명기에 나타난 백제 성왕이 일본부 소속 인물에 대한 통렬한 비난과 그들의 송환을 왜왕에게 요구한 데서 확인된다. 이렇게 성왕이 일본부를 비난한 것은 그들이 반백제 세력인 신라와 접촉해 임나의 부흥 및 독립 보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부는 왜왕이나 백제왕이 아닌 가야제국의 왕에 의해 조종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백제 성왕은 23년(545)부터 25년까지 왜에 방물을 주거나 기술자 또는 학자 등을 파견하는 등 ‘물량공세’를 퍼부어 왜왕으로부터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약속받아 냈다. 이에 안라와 일본부는 불안을 느끼고 대항체제를 정비할 여유를 얻기 위해 뜻밖에 고구려에 백제의 정벌을 요청하기도 했다.



마침내 고구려는 548년 1월, 군사 6,000명을 보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의 참전으로 패했고, 전투에서 잡힌 고구려측 포로는 이 전쟁의 발단이 안라국 및 일본부가 백제의 처벌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한 증거를 잡은 백제 성왕은 일본부 관원의 소환을 요청했지만 야마토 정권은 번번이 이에 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보아 일본부는 당시 가야제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고 오히려 백제나 야마토 조정에 반하는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伽倻, 일본부를 백제·신라의 견제기구로 활용



결국 “일본서기” 흠명기를 통해 살펴보면 왜와 임나일본부의 주종관계를 증명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부의 구체적 활동을 보면 그 실체는 기껏해야 가야지역에 잔존한 왜인집단의 대변기구에 불과했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은 오히려 임나의 부흥 및 가야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이었다. 가야제국은 백제·신라·왜와의 외교 교섭에서 오히려 일본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가야제국은 열본열도에 있던 왜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왜의 세력이 자국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양국의 침략을 견제했다.



요컨대 한반도에 잔존했던 왜는 광개토대왕에게 두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큰 타격을 받고, 주도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마침내 왜 세력은 452년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금관국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 결과 금관국은 왜 세력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일 역사학계의 최대 쟁점인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부’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금관국이 신라에 멸망하자 자연스럽게 그 통제 하에 있던 왜 집단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들 왜 세력은 이른바 일본부를 중심으로 가야제국과 함께 신라에 멸망당한 금관국 등 남부 임나의 부흥 및 나머지 가야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 03월호 | 입력날짜 200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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