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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 일족의 최종 정착지는 平壤 아닌 山東
 관리자  08-22 | VIEW : 2,083
箕子 일족의 최종 정착지는 平壤 아닌 山東


기자동래설은 허구다


이희근 <역사학자>(s2lhk@unitel.co.kr)  




먼저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과 단군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단군왕검(檀君王儉)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 2333).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단정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우리 국정교과서는 고조선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학계 일부의 견해를 수용한다.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것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의 기록, 요컨대 단군이 나라를 세운 해는 (중국의) 요(堯) 즉위 25년인 무진년이라는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 학계는 요임금이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즉위한 해를 절대연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국내 주류역사학자들 가운데서도 요의 즉위연대를 토대로 산정한 “동국통감”의 고조선 건국연대 기사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류학자들은 오히려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10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이러한 결과는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제시된 것으로, 그 논리를 살펴보면 대략 이러하다.

국가의 성립에는 일정한 객관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농업경제와 청동기문화의 성숙이다.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청동기문화가 확산되는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전후다. 물론 그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동포(銅泡·단추 모양의 조그마한 청동기)가 확인되기도 했지만, 그 정도의 청동기 사용으로는 국가 형성을 논할 객관적 요건이 안된다. 청동기의 본격 사용은 보통 비파형 동검문화 단계로 본다. 이 시기가 바로 기원전 10세기 전후라는 것이 고고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또한 이 무렵이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이고,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시기이기도 하다.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실은 그렇다손치더라도 한 국가의 형성 시기를 문헌이 아닌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규정한 것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결국 고조선 건국시기에 대한 국내 학계의 통설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심각한 것은, 고조선이 기원전 10세기 무렵 건국되었다는 통설을 인정한다면 단군조선은 결코 한국사에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중국 사료인 “사기”(史記)나 우리 역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은 주나라 무왕(武王)이 즉위하던 해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11세기다. 결국 주류학계의 10세기 고조선 건국설을 인정한다면 단군조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돼버리는 것이다.

물론 고조선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라는 학계의 견해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부정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중국 학계는 물론이고 한국에서조차 지금도 ‘기자동래설’을 인정하는 학자군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滑×?가려진 고조선의 본질

국내에서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가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 때라고 볼 수 있다. 육당 최남선(崔南善)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는 기자조선이 아니라 ‘개아지조선’이라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민족주의 사가인 정인보(鄭寅普)와 안재홍(安在鴻)도 각각 ‘검조선’과 ‘크치조선’이 한자로 기자조선으로 음사(音寫)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설이 생겨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는 모두 기자조선과 관계있는 낱말들의 음운(音韻)을 비교 검토하여 그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 결정적 오류가 있다. 가령 세 학자가 기자조선의 본래 이름이 각각 ‘개아지조선’‘검조선’‘크치조선’으로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언어학적 고찰은 상상이나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말 그대로의 가설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입장과 달리 이병도(李丙燾)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 보이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한(韓)지역으로 도망하여 살면서 한왕(韓王)이라 자칭하였다는 문헌 기록에 주목하면서, 준왕이 후에 한왕이라 칭한 것은 그의 성이 한씨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기자조선은 ‘한씨조선’(韓氏朝鮮)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준왕이 한왕이 된 후 그가 군장(君長)을 뜻하는 그 지역의 언어인 ‘한’ ‘칸’(汗), 또는 ‘가한’(可汗)으로 불렸고, 그것이 한자로 ‘韓’으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결정적 근거는 될 수 없다.

최근에는 한국 학계에서만 통용되는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기자조선 대신 예맥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그 근거로 기자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무문토기(無文土器)와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는 예맥족이며, 그 문화에는 중국적 요소가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물론 이들 견해는 일제하에서 일부 외국학자가 시도한 중국인의 식민지국가 건설이라는 악의적인 한국사 왜곡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차원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그 어떤 결정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민족의식만으로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역부족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가설들은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추론 수준에 그쳐왔다. 그것도 그들 견해처럼 기자조선이 허구에 불과하다면 누가 왜 그것과 관련된 기록들을 조작하였는지 등 사료 비판도 도외시해왔다. 이들은 단지 기자조선을 대치할 만한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데 골몰했을 뿐이라는 인상까지 준다. 결국 이는 고조선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라는 한국 학계의 통설이 말 그대로 사상누각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 학계만 아니라 우리 학계 일부에서도 인정하는 ‘기자동래설’은 실재했을까.

기자동래설은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하니 주나라 무왕이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는 전설이다.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의 소중화주의자들도 기자조선을 우리나라에 실재했던 국가로 믿었는데, 그 근거가 되었던 것이 바로 기자동래설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평양에 기자 사당을 세워 그를 추모했을 정도다.




箕子東來說의 조작 가능성

조선 후기에는 특히 주자를 정통으로 보는 ‘주자정통론’이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기자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발점으로 설정하는 새로운 국사 체계가 수립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결과 평양에는 기자묘(墓)라고 전하는 무덤과 그가 실시하였다고 하는 정전제(井田制)의 터가 남아 있을 정도다.

이렇게 고려나 조선의 소중화주의자들이 기자동래설을 액면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던 것은 기자가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해 문화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들 소중화주의자들은 중국과 우리나라는 기자 이래 문화적으로 한 집안을 이루었으므로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의 문화수준은 중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中原)을 지배하면서 중국에서는 오히려 중화국가가 사라졌지만 조선은 주자정통론에 근거하여 오히려 문명국을 대표하는 소중화(小中華) 국가가 되었다는 자부심도 짙게 깔려 있다. 따라서 기자조선=소중화라는 등식은 조선 후기의 소중화주의자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인식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결코 기자조선이 실재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면 기자는 과연 조선에 왔던 것일까?

앞서 설명했지만 기자에 관한 기록이나 유적들은 모두 전설에 토대를 둔 것이고 실제로 문헌·유적들을 고찰해 보면 사실과 큰 격차가 있다. 기자동래설이 처음으로 보이는 책은 전한(前漢:서기전 108∼서기 8년)때 편찬된 “상서대전”(尙書大全)이라는 책이다.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武王)이 옥에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하였는데, 기자가 비록 상나라 주왕의 비행을 간하다 갇히기는 했으나 자신은 상나라의 신하를 자처했기 때문에 상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에 의해 석방된 것을 차마 감수할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다.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하였다는 것이다. 기자는 주 왕실로부터 봉함을 받았으므로 신하의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어 무왕 13년 주 왕실에 조근(朝覲)했는데, 이때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洪範)을 물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자동래설이 “상서대전”을 비롯한 한대(漢代) 이후에 편찬된 중국측 문헌들에서만 확인될 뿐, 한대 이전인 선진(先秦)시대에 편찬된 기록에는 그 어디에도 이러한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기자가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립된 후 주 무왕 16년에 기자가 주 왕실에 조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상서”(尙書)에도 기자가 주나라 무왕때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를 세운 후 13년에 기자를 찾아가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인 홍범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논어”(論語)도 기자의 인물과 행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자는 상나라 말기에 살았던 세 사람의 어진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그려졌는데, 미자(微子)와 비간(比干), 그리고 기자가 바로 그 세 사람이다. 車ざ瓚?마지막 왕인 주가 무도한 정치를 하자 비간은 이를 극력 간하다 처형되었고, 미자는 일찍 주의 곁을 떠났으며,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종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밖에 “주역”(周易)과 “좌전”(左傳) 등에도 역시 기자와 관련된 기록이 나타나 있지만 그 어디에도 기자가 동쪽으로 갔다는 기자동래설은 찾을 수 없다.

이렇듯 진대(秦代) 이전의 문헌에서 기자는 단지 덕과 학문을 지닌 어진 인물이었을 뿐 조선과의 관계, 특히 기자동래설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기자와 조선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한대 이후 문헌들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기자동래설의 실체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시대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던 내용이 후대의 기록에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기자동래설이 후세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한대 이후의 문헌들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무엇 때문에 기자동래설을 기록하고 퍼뜨리려 했을까. 그 해답은 바로 고고학 발굴자료 속에 있었다.


기자집단 유물 山東省에서 출토

1973년, 대릉하(大凌河) 연안지역인 랴오닝(遼寧省)성 카쭤(喀左)현에서는 기후(侯)의 명문이 새겨진 방정(方鼎) 등 청동예기(靑銅禮器) 6점이 출토되었다. 갑골문과 금문(金文)에서는 ‘’字는 ‘箕’字와 동일하게 쓴다. 바로 기자와 관련된 고고학 자료인 것이다. 이곳에서 불과 10km 내외의 거리에 있는 3개소에서 추가로 수많은 청동예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제작 시기는 상나라 말기로, 기자의 생존 시대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들 청동예기가 동북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인 대릉하 연안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당시 기자 일행의 망명 행로를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상나라 신하였던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나라가 망한 뒤 족속을 이끌고 어디론가 피신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데, 그곳이 바로 대릉하 연안지역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서 기후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청동기가 일반적인 무덤이 아니라 교장갱(藏坑)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교장갱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임시로 청동예기 등을 저장해 두는 저장소다. 이곳에서 기자집단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자로 상징되는 기자족이 오랫동안 정착한 곳은 오히려 산둥(山東省)성 지역으로 보인다. 1951년에 산둥성 황(黃)현 남부촌(南埠村)에서 출토된 8점의 기기(器), 1969년에 역시 산둥성 옌타이(烟臺市)시 남쪽 교외지역에서 출토된 기후정(侯鼎) 등이 이를 증언해 준다. 대릉하 연안의 청동예기와 달리 이들 청동예기는 교장갱이 아니라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기자 일족이 이곳에 영주 정착했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다. 이 유물들은 또 서주(西周) 후기에서 춘추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이므로 이 기간 기자족이 산둥성 지역에 줄곧 영주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기자산둥설’이 아니고 ‘기자동래설’이 퍼졌을까? 그것은 바로 기자가 잠시 중국 동북지방에 망명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대릉하 연안지역에서 발견된 기후 명문이 있는 방정의 존재는 기자와 그 집단이 동북지방에 일시적으로 망명해 거주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한서”(漢書) 지리지 연지(燕地)조에 있는 ‘연 지역에서 미(尾)와 기(箕)는 그 변두리다’라는 기록도 기자 일족이 동북지방으로 잠시 망명했던 사정을 말해 준다.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대릉하 서쪽에 위치한 연나라의 제후로 봉한 인물은 소공 석(召公 奭)이었다. 그런데 “사기” 주 본기(周本紀)는 소공 석이 바로 무왕의 명에 따라 기자를 풀어준 주인공임을 말해 준다. 소공 석과 기자의 이런 인연은 기자가 망명지를 소공이 제후로 있는 연나라로 택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중국 동북지방에는 기자가 망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기자집단의 주력은 산둥으로 이주했어도 그 일부는 여전히 동북지방에 잔류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리하여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기자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집단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런 전설을 토대로 하여 선진시대 기록들과 달리 한대 이후의 각종 문헌들에서는 기자를 조선과 관련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시기인 기원전 11세기 중국에서는 동북지방의 조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중국 문헌 가운데 조선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최초의 책은 “관자”(管子)와 “산해경”(山海經)이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전국시대(기원전 403∼221년)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한대(漢代 : 기원전 206∼기원후 220)에 편집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이들 책에 담긴 조선에 관한 정보는 한대의 인식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껏해야 중원의 중국인이 조선의 존재를 인식한 시기는 백번 양보해도 전국시대다.

이렇듯 중원의 중국인들은 한대, 빨라야 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동북지방의 주세력으로 등장한 (고)조선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무렵 중국인들은 그 지방에 전해져 내려온 기자의 망명 전설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기자동래설을 기정사실로 인식하였으며, 그 결과가 한대 이후의 각종 문헌에 나타난 것이 기자동래설이다. 그렇다면 한나라 사람들은 왜 기자동래설을 조작했을까?

한나라 무제(武帝)는 기원전 108년 동북지방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진번(眞番)·임둔(臨屯) 두 군은 설치 20년만에 폐지되었고, 그 일부 지역은 기원전 82년 낙랑(樂浪)·현도에 통합되었다. 더구나 현도군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75년부터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




시대 흐를수록 기자의 조선 행적 부풀려져

그것도 점차 토착세력의 저항에 부닥쳐 그 지역의 통치를 사실상 포기했을 정도였다. 이는 “후한서” 동이열전의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군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도위의 관직을 없앴다. 이후부터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후한 초에 이르러서는 중앙관리의 파견조차 못하고 그 지역 수장에게 통치를 일임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중원 왕조는 효과적으로 동북지방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력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대명분론에 입각한 이념적 통치방식을 모색하였다. 그것이 바로 상나라 멸망후 기자의 막연한 행적에 착안하여 조작해낸 것이 기자동래설이었다. 즉 기자 동래로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중원 왕조에 사대의 예를 철저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당시 동북지방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조선을 항구적으로 통제할 목적으로 중국인인 기자와 그 후손을 조선의 통치자로 둔갑시킨 기자동래설을 조작하였던 것이다. 이런 조작의 기저에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화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도 기자의 후예인 조선이 중원 왕조에 사대를 철저하게 수행해 왔음을 강조하였다. 그 단적인 사례는 “삼국지” 동이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략”(魏略)의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에 대항해 싸우며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는 기사다.

그리하여 한대 이후 중화주의자들은 기자동래설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설을 증폭시켜 나갔다. “사기” “한서” “후한서” 등의 역사서에 나타난 기사들이 그것이다. 그 내용도 당초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 등 원시적이었으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세련되고 풍부해졌다.

가령 한대에 편찬된 “사기”와 “한서”에는 기자동래설이 각각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와 지리지에 실려 있는데, 정작 조선의 상황을 다룬 ‘조선전’에는 기자에 대해 언급조차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자동래설이 중화주의자들에게조차 일반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한때 편찬된 “사기”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을 적고 있지만 후한때 편찬된 “한서”에는 기자가 동쪽으로 간 이후 조선에서의 행적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상나라의 도(道)가 쇠퇴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는데 그 지역의 백성을 예의로써 교화하고 농사·양잠·길쌈 등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낙랑군의 조선 백성은 원래 범금(犯禁) 8조만으로도 순후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가 낙랑군을 설치한 후 중국 관리와 상인들의 영향으로 풍속이 점차 각박해져 지금은 범금이 60여 조항으로 증가하였다. 즉 조선 백봉?기자의 교화를 받아 범금 8조만으로 다스려질 정도로 순후한 풍속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남조 유송(劉宋)의 범엽(汎曄·398∼445)이 지은 “후한서”와 진(晉)의 진수(陳壽·232∼297)가 저술한 “삼국지”에도 보이는데, 물론 옛 조선지역의 상황을 다룬 동이전에 실려 있다. 이들 책, 특히 “삼국지”에는 기자 후손의 사적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후한서” 동이열전의 ‘옛날 기자가 쇠망하는 은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 땅에 피난하였다. …(기자로 인해) 동이 전체가 유근(柔謹)으로 풍화(風化)되어 3방(三方 : 西戎·南蠻·北狄)의 풍속과는 다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정교(政敎)가 창달되면 도의(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분연히 9이(九夷)에 가서 살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이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가 군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 라고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다 라는 기사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풍속이 어지러워지자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다는 문명국가로 그릴 정도였다.


고려·조선 유학자들, 조작된 기자 기록 신봉

이같은 경향은 조선에 관련된 기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즉 “사기”나 “한서”는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 상황을 전하는 데 그냥 조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한대 이후에 편찬된 사서 등에서는 모두 기자와 관련시켜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사기”와 “한서” 조선전에서는 연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거나 위만이 조선을 복속시켰다는 간단한 표현만 나온다. 이에 비해 “후한서” 동이열전은 “일찍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그뒤 40여세가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고 하여, 조선을 분명히 기자와 관련시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동일한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상 모든 조작된 사건 등이 그러하듯 기자동래설에 관련된 내용의 조작도 처음에는 불완전하게 이루어지다 시대가 점차 내려올수록 그 내용이 한층 세련되고 풍부해지면서 완결된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조작된 기자동래설을 고려 이후 소중화주의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 기자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禮部)에서는 기자의 사당을 평양에 세워 제사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가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중화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기자에 대한 제사가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기자가 주 왕실의 봉함을 받은 뒤부터 나라가 시작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기자가 예의와 농상(農桑)을 가르치고 8조금법을 실시하여 공자가 살고 싶어할 만큼의 문명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대 이후 중국 중화주의자들의 조작된 자료를 토대로 기자를 국조(國祖)인 동시에 문명을 개화한 군주로 인식하는 기자상이 성립한 것은 고려시대였다. 고려의 소중화주의자들이 중국 중화주의자들이 조작한 기자 관련 기록을 얼마나 신봉하였는가는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사조의 기사를 보면 쉽게 확인된다.

요컨대 ‘(고구려) 풍속에는 음사가 많아 영성 및 일(日)·기자·가한(可汗) 등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라는 기사는 “신당서”(新唐書)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도 ‘그 풍속에는 음사가 많아 영성신·일신·가한신·기자신을 섬긴다(其俗多淫祀 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고 기록돼 있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신당서”는 “구당서”의 기사를 축약해 게재했지만 유독 기자신을 가한신 앞에 두었다.

하지만 “구당서”처럼 기자신보다 가한신이 앞서야 한다. 그 이유는 인종 6년(1122)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서긍(徐兢)의 저서 “고려도경”(高麗圖經) 건국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가한은 군장(君長)의 칭호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가한신은 고구려의 시조신임이 분명하고 기자신은 평양의 지역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자신은 평양 천도 이후에야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던 평양의 유력세력을 포섭할 목적으로 국가제사에 포함되었다(평양 일대의 같은 계열의 고조선계 주민들은 단군과 기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동시에 받들어 모신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에서는 천신인 영성신 및 일신 다음으로 지역신인 기자신보다 국가의 시조신인 가한신을 존중하였을 것으므로, “삼국사기”는 마땅히 “구당서” 기사를 인용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정보를 있는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평가받는 “구당서”가 아니라, 사대 등 명분론에 입각해 作疋?“신당서”를 인용한 것은 그것이 조작의 산물일지라도 사실보다 명분론에 근거한 기자 관련 기록을 중요시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이처럼 고려의 소중화주의자들은 조작된 기자 관련 기록조차 무조건 신봉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기자와 관련된 기록을 신봉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자는 존숭의 대상이 되었고, 그 정도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고조되고 강화되었다. 국호부터 기자의 고국(故國)이라 하여 조선으로 채택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자가 주 왕실에 의해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진 것, 기자가 홍범과 8조범금을 보급하여 그 문화적 업적이 뛰어났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인식은 15세기에 편찬된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 “응제시주”(應制詩註)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물론 사림파가 일정 정도 편찬에 참여한 “동국통감”부터는 기자를 도덕과 의리의 구현자로 부각시키는 기자 개인숭배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하는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16세기 후반 이후 기자 숭배는 한층 고조되고 심화되었다. 즉 기자는 이들에게는 명분과 의리의 구현자, 조선 도학(道學)의 시조, 왕도정치의 실천자일 뿐만 아니라 공자·맹자·주자와 같은 성현(聖賢)으로 받아들여져 그에 대한 극단적 숭배가 행해졌다.


올바른 고조선 연구 위해 사료비판 병행돼야

이제 기자동래설, 홍범의 전수자, 정전제의 실시자, 상 왕실의 왕족 등 기존의 기자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 결과 기자와 관련된 저서의 출간 붐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선조때 학자이자 정치가 윤두수(尹斗壽)는 기자에 관계된 중국과 우리 문헌을 모아 “기자지”(箕子志)를 편찬하였다. 이이(李珥)는 이 책이 자료집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한계로 여겨 기자조선을 체계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기자실기”(箕子實紀)를 저술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기자의 건국과 그 멸망에 이르는 과정, 기자조선의 세계(世系)와 역년(歷年)이 개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 한백겸(韓百謙)이 기자의 토지제도를 정전제로 규정한 “기전고”(箕田考)를 지었고, 서명응(徐命膺)은 기자가 동래한 이래의 사적을 적은 “기자외기”(箕子外紀)를 저술하였으며, 이가환(李家煥)과 이의준(李儀駿)은 기자의 정전제에 관한 연구들을 모아 “기전고”(箕田考)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기자 존숭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가령 영조 32년(1756) 3월 전국 유생들이 평양뿐만 아니라 서울과 각 도에 기자묘를 세워 기자를 영원토록 숭봉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나아가 기자는 특정 가문들의 시조로 받들어지기도 하였다. 청주 한씨(淸州韓氏), 행주 기씨(幸州奇氏),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의 족보에 기자가 시조로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에서도 이들 가문을 기자 후손으로 인정하고 군역을 면제하는 특권까지 부여하기도 했다.

마침내 대한제국 성립 전후에는 기자 숭배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예컨대 기자를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이라 존칭하고, 기자의 치적은 물론이고 기자조선 역대 왕의 왕명과 재위 연대, 그리고 각 왕의 치적이 역사서에 상세히 서술된 것이 그 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요컨대 한대 이후 중화주의자들은 동북지방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조선을 항구적으로 통제할 목적으로 기자동래설을 조작했다. 그들은 점차 그 내용도 더욱 세련되고 풍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 이래 소중화주의자들이 이렇게 조작된 기자동래설을 그대로 믿었던 것은 기자가 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해 문화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자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대가 내려올수록 이러한 생각은 고조되고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은 사실(史實)이 아니라 중화주의자들의 조작된 정보에 근거한 것으로 그야말로 허구에 불과하다. 현재 파악할 수 있는 고조선에 대한 정보의 대략은 고조선이 기원전 4세기 후반 전국(戰國) 7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대적할 정도로 중국 동북지방의 유력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기원전 3세기경 연의 침입을 받아 세력이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이어 기원전 194년에는 연나라 출신 위만에게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총 60권으로 편찬하고 있는 “한국사” 4권의 ‘우리나라의 국가 기원 및 형성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이른바 기자조선과 관련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側?있다’(94쪽)는 고백처럼,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한대 이후 중국 중화주의자들이 조작한 기자와 관련된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연구된 고조선상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실상이 이런데도 주류학계에서는 실증사학을 표방하면서도 엄격한 사료 비판은 도외시한 채 조작된 정보 등을 토대로 고조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여 그 성과를 대중에게 무책임하게 유포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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