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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중재도 협상도 소용없는 21세기 최대의 화약고
 관리자  01-19 | VIEW : 4,110
[세계의 갈등 지도 (4)│카슈미르]

중재도 협상도 소용없는 21세기 최대의 화약고


1947년 분리독립 이래 1200만 카슈미르인을 담보로 계속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극한 대립은 1980년대 후반 양국의 핵 보유 이후 더욱 위험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족·종교·외세가 얽혀 추악한 패권다툼을 벌여온 50여 년 분쟁史.


카슈미르의 봄은 해피밸리 초원의 아름다운 들꽃바다와 주도(州都) 스리나가르를 에워싼 달레이크 호수의 연한 물안개 사이로 피어오른다. 눈부시게 흰 히말라야와 캐라코람의 설산 사이로 계곡마다 넘쳐흐르는 에메랄드 물빛. 그래서 1970~80년대 영국의 록밴드 레드 제플린은 그 아름다움을 노래 ‘카슈미르’로 지어 불렀다. “태양이 내 얼굴에 부딪히고 별들이 내 꿈을 채우는 곳,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가게 해주오….” 50년 이상의 전화(戰禍)에 휩쓸렸지만 카슈미르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땅을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의 긴장관계는 최근 다시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세계의 이목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쏠리는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의 긴장관계는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했으나, 지난 2월초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정찰비행하던 인도의 무인정찰기가 정체불명의 공격을 받고 격추된 후 양측이 자국 주재 상대국 대표부 대표를 추방하는 등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사건발생 10일 후 인도 정부는 정찰기 피격에 대한 보복으로 자릴 압바스 질라니 뉴델리 주재 파키스탄 대리대사를 카슈미르의 무장단체에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추방했다.

이에 파키스탄도 스파이 혐의를 씌워 이슬라마바드 주재 인도대사관의 수디르 비아스 대표를 비롯해 다섯 명의 외교관을 추방시켰다. 비아스 대표는 이미 수주 전부터 외교관 업무수행에 있어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고 항의했으며 파키스탄측은 이를 맞받아 자국의 외교관들도 뉴델리에서 업무수행에 많은 장애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거친 설전이 오가고 있다.

최근 들어 양국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이 휴전선(LOC)을 월경해 카슈미르로 침공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침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도와 미국 관리들은 수 개월 전부터 파키스탄 정부의 침투재개 허용을 비난해왔다. 둘째는 이라크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동안 인도는 자국 영토 내에서 테러행위를 부추기고 있는 파키스탄의 만행에 대해 세계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셋째는 인도에서 3월 하순에 치러질 몇몇 주선거와 내년에 있을 총선 전략의 하나로 집권당인 힌두민족주의 정당 BJP가 다시 파키스탄에 대한 비난의 고삐를 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카슈미르의 사회불안 조장

카슈미르 문제의 시작은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가 종교적 이유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게 되었을 때 인도의 독립문제 처리를 맡았던 영국의 마지막 총독 마운트 배튼경은 562개에 달했던 군주국(君主國, Princely State)들에게 지리적 인근성, 종교분포 등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을 선택하도록 했다. 카슈미르는 주민의 다수가 모슬렘이었는데도 힌두왕 하리 싱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파키스탄이 아닌 인도연방에 귀속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카슈미르의 자국 귀속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던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내의 사회불안을 야기시켜 인도로부터의 분리를 끊임없이 획책해왔고, 인도는 그같은 파키스탄의 시도를 인도연방 전체를 해체시키려는 기도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대응해왔다. 그 결과 지난 50여 년간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벌어진 세 차례 전면전쟁은 물론 수많은 위기상황들의 근저에 카슈미르 문제가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카슈미르 문제는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카슈미르의 오늘날 공식명칭은 인도령은 잠무 카슈미르(Jammu & Kashmir), 파키스탄령은 아자드 카슈미르다. 이곳의 인구는 인도령 900만, 파키스탄령 300만으로 총 1200만에 달한다. 잠무는 남부지역으로 힌두교도가 많이 사는 지역이다. 중부의 인구 밀집지역인 해피밸리는 회교도가 많이 거주하며 현재 잠무 카슈미르의 수도는 밸리지역의 중심도시인 스리나가르로 되어 있다.  


통칭 카슈미르로 불리는 이 주의 공식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한 22만2000㎢. 마름모꼴로 되어 있으나 1948년 제1차 인파전쟁 이후 남북으로 갈라져 현재는 인도령 10만1000㎢, 파키스탄령 7만8천㎢, 중국점령지역 4만㎢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인도령은 또 크게 잠무(2.6만㎢), 카슈미르밸리(1.6만㎢), 라다크(4.9만㎢) 등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지도1>

북위 35도에 걸쳐 있어 사계가 뚜렷하며 풍광이 수려한 카슈미르는 역대 무굴제국 황제들과 영국 식민통치 관료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마름모 형태 국경의 북부 두 변은 소련(아프가니스탄의 와칸 협장지를 사이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과 중국, 남부 두 변은 인도,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앙아시아의 한복판에 위치한 높은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다.

독립 당시 200만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이 지역의 종교 분포는 힌두교도가 마하라자(왕) 하리 싱 등 집권계층을 포함, 30%에 불과했던 데 비해 모슬렘은 60%가 넘었다. 따라서 인구비례로 한다면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에 속해야 했다.

그러나 이같은 종교분포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카슈미르인들은 파키스탄이 아닌 인도 잔류를 원했다. 이는 카슈미르의 중심을 이루는 밸리 지역이 힌두성자들의 순례지로 전통적으로 인도에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도 독립투쟁의 중심에 섰던 자와하를랄 네루 초대 총리가 카슈미르밸리 지역 브라만의 후손이다.

또 이 지역 출신으로 카슈미르인의 ‘국부’ 혹은 ‘카슈미르의 라이온’이라 불린 민족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 압둘라가 인도를 지지, 대다수 카슈미르인들의 인도 편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말 브라만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압둘라가(家)의 후예인 셰이크 압둘라는 “나의 종교는 지나(파키스탄 초대 수상)와 같지만 나의 꿈은 네루와 같다”고 강조할 정도로 네루를 추종했다.

힌두 소수정권의 모슬렘 차별

카슈미르는 8세기 이전부터 독립된 힌두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말 무굴제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17세기 이후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지역이 남아시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영국이 카슈미르를 잠무의 왕 굴랍 싱에게 750만루피에 양도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는 당시 펀자브의 시크족들과 맞서고 있던 영국이 잠무 도그라족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화해의 제스처로 넘겨준 것이었다.

당시 인도식민지를 견고하게 구축하려 했던 영국은 러시아 세력의 남하에 신경을 썼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국 세력 아래 두기 위해 두 차례 영-아프간 전쟁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굴랍 싱은 영국을 적극 도와주었다. 또한 굴랍 싱은 1845년 영국과 시크족의 전쟁인 앵글로-시크전쟁에서 라호르 왕국이 패하자 1846년 시크왕국과는 라호르 조약, 영국 식민정부와는 암리차르 조약 등 2개의 조약을 맺음으로써 펀자브 지방에서 영국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카슈미르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이로부터 1백년 가까이 카슈미르는 잠무 카슈미르 왕국의 지배 하에 놓였으며 카슈미르 수도인 스리나가르는 여름 수도 역할을 해왔다. 남부의 잠무 지역은 힌두교도가 다수였으며 전체적으로는 모슬렘이 압도적으로 많아 모슬렘과 힌두의 비율이 3:1에 달했다.

원래 카슈미르에서는 힌두 지배에도 불구하고 모슬렘과 힌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힌두 우위정책으로 돌아섰고 그에 따라 힌두 지배층이었던 카슈미르 브라민(판디트)과 잠무 지역의 도그라들이 남쪽의 기름진 농토들을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다. 자연히 이들 농토에서 일하던 다수 모슬렘들은 힌두의 소작인으로 신분이 격하되었다. 이 지역의 종교분포 비율은 잠무 지역은 53%, 카슈미르 지역은 93%로 모슬렘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지역 마지막 군주였던 하리 싱의 통치 때까지 모슬렘의 신분 개선을 위한 노력은 기울여지지 않았다.

이같은 소수 힌두의 압정에 대한 반대 감정이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갖고 있던 젊은 모슬렘 지도자 셰이크 압둘라에 의해 결집되기 시작했다. 숄 직조공장을 운영하던 카슈미르 브라민의 후손으로 18세기말 모슬렘으로 개종한 집안에서 1905년 태어난 압둘라는 알리가르 모슬렘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한 뒤 스리나가르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 점차 모슬렘 자치와 토지개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잠무의 한 감옥에서 코란이 간수에 의해 훼손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모슬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압둘라는 이 운동을 이끌며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다.


제1차 인·파전쟁, 카슈미르 분할


’50여년간 분쟁이 계속된 카슈미르 주변지역 지도  
카슈미르의 병합을 위해 인·파 양국의 경합이 치열할 무렵 카슈미르 민족지도자인 셰이크 압둘라는 1947년 10월20일 델리에서 열린 한 모슬렘 집회에서 청중들을 향해 지나의 ‘2개국 이론(Two Nation Theory)’에 현혹되지 말고 인도로 병합해야 한다고 호소했고 카슈미르 출신은 이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에 초조감을 느낀 파키스탄은 마침내 그 이틀 후인 10월22일 파키스탄 북서부의 파탄족(Pathans) 무장세력을 주축으로 한 파키스탄 병력을 카슈미르 내부로 침투시켰다. 이것이 최초의 공격이었다. 이들은 주도인 스리나가르를 향해 진격했다. 이번 침투는 종전의 양상과는 달리 전면적 공격이었고 또 사전에 면밀히 계획된 것으로 카슈미르나 인도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전면공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는 이 침략자들을 ‘해방자’라 부르며 카슈미르 내 부족들의 봉기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해방자들의 행동은 모슬렘 거주민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한 것”이라며 이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실상은 파키스탄측이 카슈미르를 병합시키고 페샤와르와 펀자브에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부족들을 전쟁에 투입시킴으로써 그들의 세력도 통제하겠다는 두 가지 목적에서 공격을 취한 것이었다.

침투사건 발생 이틀 후인 10월24일 카슈미르 왕인 마하라자 하리 싱은 침략자들의 격퇴를 위해 인도에 파병을 청했다. 카슈미르인들은 일찍부터 파탄족의 침입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더욱이 이번 경우는 규모도 큰데다 이틀 만에 스리나가르 인근 35마일 지점까지 진격해왔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두 가지 조건으로 카슈미르에의 파병을 승인했다. 첫째는 하리 싱의 카슈미르 인도 병합 선언, 둘째는 카슈미르인의 민족지도자로 카슈미르 최대의 비종파 정당인 ‘내셔널 컨퍼런스’ 지도자인 셰이크 압둘라의 인정이었다. 이같은 협약안에 26일 하리 싱이 서명하고 27일에는 인도측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카슈미르의 인도 병합은 합법화되었다.

이에 따라 인도는 28일 일단의 병력을 카슈미르에 공수, 본격적으로 해방군의 진격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이들 해방군은 이미 카슈미르 북서부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들의 철수문제 협의를 계속했고 그해 말까지 2개월여에 걸친 협의가 결렬되자 네루는 마운트 배튼의 충고를 받아들여 1948년 1월1일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했다. 네루는 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통해 침략자들의 철수를 도모했다.

유엔 안보리는 중재를 위해 1월20일 ‘유엔 인도-파키스탄 위원회(UNCIP)’를 결성했다. 이같이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파키스탄의 두 번째 공격이 그해 5월 첫 주 동안 방어진지 구축을 구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UNCIP의 노력으로 8월13일, 양측은 즉각 휴전하고, 양측 군대가 철수하며, 카슈미르의 정치적 장래를 카슈미르인 스스로의 결정에 맡긴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인도는 이를 찬성했으나 파키스탄은 자유 주민투표에 대한 구체적 보장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UNCIP의 거듭되는 노력으로 1949년 1월1일, 양국은 휴전에 합의했고 1월5일에는 위원회의 합의안에 찬성하여 카슈미르 사태는 잠정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 결과로 7월27일에는 카슈미르에 정식으로 휴전선이 그어졌고 북서부의 파키스탄령 ‘아자드(자유) 카슈미르’와 남동부의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인도정부 사주받은 쿠데타

독립 당시 카슈미르는 지리적으로 중립적 위치였기 때문에 주민의 종교 비율에 따라 파키스탄에 속하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서 파키스탄의 모슬렘연맹은 카슈미르의 통합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더욱이 파키스탄은 모슬렘의 종교적 기반 위에 건국되는 국가인 만큼 카슈미르의 통합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인도 콩그레스당의 입장은 달랐다. 인도는 비종파적 국가로 민주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수립하는 국가인 만큼 모슬렘 다수의 카슈미르를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비종파적 국가수립을 완성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한편 카슈미르 왕 하리 싱은 주민 다수가 모슬렘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편향을 보였다. 힌두 우위 정책을 펴온 하리 싱에 대한 반대세력을 이끌어오던 셰이크 모하메드 압둘라는 초기의 종파적 편향 태도를 버리면서 네루의 콩그레스당과 긴밀한 유대를 갖게 되었으며 알리 지나의 모슬렘연맹과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앞서 설명한 대로 1947년말 파키스탄이 게릴라로 위장, 카슈미르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자 하리 싱은 인도에 지원을 요청했고 네루는 카슈미르의 인도 병합과 셰이크 압둘라의 인정 등 두 가지를 조건으로 파병을 단행하였다.

인도의 지원을 받아 자치권을 획득한 압둘라는 대대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과감한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 카슈미르 주민들의 사회 경제적 여건을 개선시켰다. 1951년에는 제헌의회를 소집,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러나 ‘내셔널 컨퍼런스’ 조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그는 지나치게 독선적이었으며 반대파를 강압적 수단으로 억압하는 등 독재적 권력을 행사해 델리 연방정부의 불만을 샀다.

연방정부의 간섭이 강화되자 압둘라는 뒤늦게 카슈미르가 인도에 병합되는 것을 반대하고 친(親)파키스탄 성향을 보이며 카슈미르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1953년 8월 카슈미르 내에서 연방정부가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쿠데타가 발생, 압둘라는 체포되고 박시 굴람 모하메드가 후임 총리로 새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압둘라 통치시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교육받은 식자층의 확대를 가져와 카슈미르 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뉴 제너레이션 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2차 인·파전쟁, 인도의 승리


인·파 긴장의 두 주역, 아탈 바지파이 비하리 인도 총리(아래)와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위).  
‘제2의 카슈미르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2차 인·파전쟁은 1965년 4월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의 파키스탄 국경에 위치한 토후국 커치(Kutch)의 불모지대인 랜(Rann) 지역에서 전투를 시작하였으나 9월에는 그 불똥이 카슈미르로 튀어 전장이 옮겨지는 등 다소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이 전쟁은 1962년 중국-인도전쟁에서 서방의 군사원조로 인도 방위력이 증강되자 남아시아지역의 세력균형파괴에 크게 우려한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이 1964년 12월 인도의 카슈미르 병합 강행에 따른 응징으로 일으킨 것이다.

중국측의 일방적 휴전선언으로 중-인전쟁이 갑작스레 종결되었다. 이 전쟁에서 적대국인 인도가 패배함으로써 영토 축소 등 보다 많은 피해를 입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파키스탄으로서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다만 인근에 인도를 제압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 양국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63년 들어 카슈미르의 정정불안으로 종파적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인·파 간의 긴장도 높아졌다. 더욱이 이듬해 5월 인도는 네루 총리의 사망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콩그레스당 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던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무임소장관이 총리로 추대되어 승계과정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잃은 인도 정국은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 틈타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은 카슈미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인도에 대한 압력정책이 더 유효하다는 판단 하에 이른바 ‘인도 몰이(Leaning on India)’ 정책을 썼다. 이 정책의 기조는 중국 및 아프리카-아시아 국가들과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 인도에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이 무렵 샤스트리 총리는 인도의 강력한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힌두 우파들의 압력을 비롯, 복잡다단한 국내문제들로 다양한 반발에 직면하게 되자, 카슈미르 문제에 강경책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마침내 12월 카슈미르주의 인도 합병을 선언하고 다음달인 1965년 1월에는 카슈미르 집권당인 ‘내셔널 컨퍼런스’를 인도연방 집권당인 콩그레스당에 통합시켰다. 이에 분노한 아유브 칸은 ‘인도 몰이’정책의 재개를 선언하고 휴전선에서의 긴장을 강화시켜나갔다.

(1) 랜 오브 커치 전투

이 전투는 1965년 4월 인·파 양국간의 긴장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에서 의외의 지역에서 발생했다. 인도 구자라트주의 일부인 커치의 파키스탄 국경과 연한 서부 랜 지역은 반(半)사막지대로 쓸모없는 땅이어서 국경조차 제대로 획정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석유가 많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소규모 충돌이 잦았다. 인도는 파키스탄 신드주 쪽으로 9300㎢의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파키스탄측은 북쪽으로 치우친 국경이 중앙으로 획정돼야 한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측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병력을 전진배치했고 아유브 칸 대통령은 선제공격으로 인도군을 제압했다. 보병뿐 아니라 야포와 탱크까지 동원된 전투가 수주일 동안 계속되었고 인도군은 수마일 남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인도 내에 파키스탄 응징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다. 이때 영국의 윌슨 총리가 중재에 나서 양국이 1965년 1월 당시 경계로 돌아갈 것을 제의했다. 집중적인 협상이 개최되어 결국 6월30일 ▲양측 병력의 철수 ▲분쟁완화를 위한 직접협상 ▲직접협상에 있어서 중재 허용 등을 규정한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2) 카슈미르 전투

‘랜 오브 커치’ 전투의 결과는 양측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웠으나 파키스탄은 자만감에 차게 된 반면 인도는 굴욕감에 젖게 되었다. 특히 파키스탄은 샤스트리 수상이 허약하고, 중국의 재침공 두려움 때문에 군사적 대결을 원치 않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파키스탄군이 인도군보다 수적으로는 열세에 있으나 그 동안 미국의 원조로 군 기계화나 공군전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1965년초 아유브 칸 대통령 재선 캠페인의 주요 이슈는 인도의 카슈미르 강제합병 문제였다.

이같은 이유들로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장악을 위한 이른바 ‘지브랄탈(Gibraltar)작전’을 전개했다. 8월초 아유브 대통령은 정규훈련시킨 게릴라 5000명을 휴전선을 넘어 인도령 카슈미르로 침투시켰다. 카슈미르에 대규모 시위 및 사회불안을 조성해 인도를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는 압력수단이었다.

동시에 국제적인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 것이었으나 작전이 실패하면서 아유브 대통령은 게릴라 철수냐 아니면 본격 전투냐의 진퇴양난에 처했다. 그는 결국 전투를 선택했다. 마침내 9월1일 파키스탄 기갑부대가 남부 카슈미르의 휴전선을 넘어 본격적인 진군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인도가 굴복이냐 확전이냐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나흘 후인 5일 인도군은 파키스탄의 전면전 획책을 이유로 서파키스탄 국경의 세 지점을 향해 진격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경에서 불과 20여 마일 떨어진 파키스탄 북부 최대 도시 라호르였다. 인도군은 암리차르에서 라호르로 진격했다. 그리고 카슈미르 남부 잠무에서 파키스탄의 시알코트를 향해 남쪽으로, 또 암리차르 남부 페로제푸르에서 파키스탄 펀자브주를 향해서 공격했다. 양측 전폭기들은 후방지역을 폭격했고 아라비아해의 전함들도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등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자 장비 및 화력에서 파키스탄이 우세했음에도 전세는 인도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양측은 2차대전 이후 최대의 탱크전을 펼치는 등 격렬하게 싸웠다. 파키스탄 탱크들은 작전 미숙으로 많은 피해가 속출한 반면, 인도는 중국 침공 때나 랜 오브 커치 때와는 달리 침착하게 응전했다. 이 전쟁은 어떤 구체적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양국 사이의 자존심과 증오 등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양측 모두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3) 종전(終戰)과 타슈켄트 협정

전투가 심화되면서 가장 당황한 것은 양측에 무기를 제공했던 미국이었다. 파키스탄과의 동맹관계로 많은 신예무기들이 파키스탄에 주어졌고 인도에도 중·인전쟁시 미국의 무기가 원조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미국이 코너에 몰린 틈을 이용, 중·인전쟁시 인도를 지원한 것 때문에 미국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중국은 파키스탄에 밀착하였고 소련은 인도의 눈치를 보면서도 파키스탄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는 등 양다리 걸치는 자세를 취했다.

결국 유엔 안보리가 중재에 나서 본격적인 전투개시 15일 만인 9월20일 인도가 종전을 수용하고 이틀 후인 22일에는 파키스탄이 수용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어서 소련의 중재로 전후문제 처리를 위한 타슈켄트 평화협상이 열렸다. 결국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만 당한 가운데 무승부로 끝난 셈이다. 특히 인도는 무력으로 카슈미르를 점령하겠다는 파키스탄의 기도를 무력화시키는 소득이라도 얻은 반면, 파키스탄으로서는 아무런 소득이 없는 전쟁이었다.

새로운 중재세력의 등장은, 그동안 이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온 영국 세력의 쇠퇴를 의미했다. 1966년 1월 중재 책임을 맡았던 소련의 코시긴 총리는 연초부터 샤스트리 총리와 아유브 칸 대통령을 타슈켄트로 초청, 양쪽을 오가며 활발한 중재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 전 위치로의 철수 ▲포로 교환 ▲양측의 평화적인 분쟁해결 노력 등을 포함한 9개항에 합의하고 1월10일 서명식을 가졌다. 그러나 협정 서명 수시간 뒤인 11일 새벽, 서명 당사자인 샤스트리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후임으로 선출된 인디라 간디 새 총리에 의해 이 협정은 그대로 준수됐다.

방글라데시의 독립

2차 인·파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1969년 3월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야히야 칸 군참모총장이 취임했다. 그는 헌법을 개정, 1970년 12월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평등 선거를 실시하였다. 새 헌법에서는 의원 총수 300명 가운데 인구가 많은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이 각각 할애되었다. 결과는 무지부르 라만 당수가 이끄는, 동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야당인 아와미연맹이 동파키스탄에서만 160석을 차지, 과반수를 얻음으로써 다수당이 되었다.

당초 재집권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서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81석에 그쳤다. 동파키스탄 출신 총리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서파키스탄 출신 위주의 권력구조가 하루아침에 동파키스탄인 위주로 바뀐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야히야 대통령은 약속했던 민정이양을 늦추고 있다가 1971년 3월1일, 민간내각을 해산시키고 의회의 개회도 연기시켰다.

이에 반발해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나자 야히야 대통령은 3월25일 새벽을 기해 시위진압을 구실로 동파키스탄에 군대를 투입했다. 수도 다카 등에 통행금지를 선포하고 26일에는 아와미연맹을 불법화해 무지부르 라만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언론 검열이 실시되었으며 군대가 대학을 점거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동파키스탄 동남부 최대의 항구도시인 치타공에서 무명의 지아우르 라만(Ziaur Rahman) 소령이 ‘방글라데시(Bangladesh, 벵갈인의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며 모든 벵갈인의 궐기를 촉구했다. 아와미연맹 지도부는 인도 캘커타로 피신하여 4월10일 타주딘 아메드를 수반으로 한 망명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또 지아우르 라만은 추종자들과 군사조직체인 ‘무크티 바히니(Mukti Bahini, 해방군대)’를 결성, 파키스탄군에 맞섰다. 인도 의회는 3월31일 방글라데시의 지원을 의결하고 무크티 바히니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동파키스탄의 소요 수일 만에 25만명의 피난민들이 인도 국경을 넘어 피신해왔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도의 웨스트벵갈주는 피난민들의 수용소를 지어주고 식량과 의복의 공급은 물론 질병치료도 해줘야 했다. 이들 피난민의 수는 점점 늘어 6개월 후에는 약 1000만명에 달했으며 웨스트벵갈주뿐만 아니라 전체 인도경제가 파탄에 직면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초기에 이를 ‘파키스탄 국내문제’로 간주, 공식 반응을 피하던 인디라 간디 총리도 입장을 바꿔 “파키스탄 문제는 또한 인도의 국내문제도 된다”며 인도 개입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번 기회에 동파키스탄을 파키스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그동안 동서 양쪽에 위치, 인도 방위에 취약성을 안겨주었던 파키스탄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벵갈 해방 군사단체인 ‘무크티 바히니’에 대한 인도의 지원도 같은 맥락이었다. 파키스탄은 “그같은 인도의 행동은 파키스탄의 분열을 획책하는 무력간섭”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제3차 인·파전쟁, 인도의 패권장악

피난민의 인도 유입이 계속되는 가운데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는 소규모 무력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11월21일 ‘무크티 바히니’가 다카 서남부 제소르를 공격해왔을 때 파키스탄의 야히야 대통령은 23일을 기해 파키스탄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민들에게 전쟁대비를 촉구했다. 동시에 인도와 동파키스탄 국경을 침공한 인도대한 반격을 구실로 12월3일 새벽 파키스탄 공군기들이 서북부 인도의 여러 군사목표에 공격을 개시했다. 스리나가르, 조드푸르, 암발라, 아그라 등 주요 공항에 대한 공습이었다.

그러자 인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인 4일을 기해 육해공군을 총동원, 동파키스탄 공격에 나섰다. 그동안 양국간 제한전 형태로 지속돼오던 교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3차 인·파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력은 지상군이 90만:45만, 전차가 1300:700, 대포가 3700:900, 전투기가 625:270으로 인도가 단연 우세했다. 오래 끌수록 불리한 게임이었다. 따라서 파키스탄은 인도가 동부전선에서 동파키스탄 전투에 주력할 때 서부전선을 공격했다. 이는 동부전선에 집중돼 있는 인도군 주력을 분산시킨다는 의도와 함께 한편으로는 만약의 경우 동파키스탄에서 패배하더라도 그 반대 급부로 지난 두 차례의 전쟁에서도 미해결로 남아 있는 카슈미르를 완전 장악한다는 전략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의 공격도 인도군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흘 뒤인 12월6일 의회에 나가 그동안 보류해왔던 독립국 방글라데시의 승인을 발표했다. 그리고 ‘번개작전’이라고 명명된 이번 작전이 10만 정예 인도군과 벵갈의 무크티 바히니 세력과 함께 합동사령부를 구성,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하고 있음을 밝혔다.

방글라데시 승인문제는 지난 3월 이래 줄곧 제기되어왔으나 그동안 파키스탄과의 관계를 고려, 반대 입장을 취해왔었다. 동파키스탄 전(全) 전선에서는 잘 훈련되고 사기 높은 인도군에 의한 기습작전이 감행되었다. 서파키스탄 전선에서는 유일한 항구인 카라치항을 봉쇄함으로써 동파키스탄으로의 병참선을 차단시켰다.

한편 파키스탄측은 인도가 전면전을 개시해올 경우 자연스럽게 중국이나 미국, 또는 유엔 안보리의 개입을 끌어들여 즉각 종전협상을 벌이게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동파키스탄의 독립요구도 수그러들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전면전 확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원은 전혀 없었고 미국도 7함대에 벵갈만에서의 기동훈련 명령만 내렸을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군은 전쟁 발발 14일째인 12월16일 동파키스탄의 수도 다카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항전하던 9만3000명의 파키스탄군이 항복해옴으로써 인도측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인도는 이와 동시에 서부전선에서도 일방적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동파키스탄이 신생국 방글라데시로 독립했고 파키스탄은 국토를 잃어 1947년 독립 이래 또다시 국가 분할이라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남아시아의 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파키스탄의 분할은 결과적으로 남아시아 역내 힘의 균형에 있어 파키스탄의 힘을 반감시켰고 상대적으로 인도는 남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카터의 개입,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세 차례의 전면전 이외에도 양국간에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직간접적인 충돌이 계속되었다. 1979년초 중동 국가 중 미국 최대의 우방이던 이란에서 회교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정권이 붕괴하고 미국에 적대적인 아야톨라 호메이니 정권이 수립되었다. 또 그해 말 발생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는 깨지고 이른바 신냉전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소련과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오던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에 점령됨으로써 공산주의 팽창의 ‘전선국가(Frontline State)’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1971년말 3차 인-파전쟁 이후 불거진 핵기술 의혹 등 파키스탄과의 거의 모든 군사적 협력관계를 종결시키고 있던 미국의 정책은 부득이 파키스탄 지원정책으로 급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파키스탄의 핵개발 의혹에 덧붙여 카터 대통령의 개인적인 인도 편향 등 여러 요인으로 미·파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갑작스런 상황변화는 미국의 입장을 180도 돌려놓아 미국은 파키스탄에 막대한 군사원조를 제공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도를 자극하였으며 결국 이는 인도와 소련이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3차 인·파전쟁 이후 소강상태에 있던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는 1976년 10여 년 동안 중단되어 있던 양국의 외교관계를 재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1980년 2월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은 남아시아에 있어 강대국의 행동에 대한 공동입장을 모색, 양국 각료급이 상호 교환방문을 하는 등 노력이 있었다.

중재도 협상도 소용없는 21세기 최대의 화약고


1982년 1월 인도를 방문한 파키스탄 대표단이 조건부 ‘비전쟁협약(No-war Pact)’을 다시 제안했으나 인디라 총리는 이를 거절했다. 인디라는 그같은 협정이 없더라도 파키스탄을 선제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고 얼마 후 지아 파키스탄 대통령은 갑작스레 뉴델리를 방문,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의 행동을 모니터할 ‘인·파 합동위원회’ 설립에 합의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남아시아 지역의 안보를 긴장으로 몰고간 것뿐 아니라 미·소관계를 악화시켜 신냉전 기류를 몰고 왔다. 파키스탄은 360만명에 달하는 아프간 피난민을 받아들여 접경인 노스웨스턴프런티어주(NWFP) 지역에 거주케 했다. 주도(州都)인 페샤와르에 여러 정치단체들의 본부를 두게 하고 저항단체인 무자히딘(Mujahideen)에게 파키스탄 영토를 경유하는 무기공급선을 제공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벌였다.

결국 이 사건은 카터 행정부의 대(對) 소련 정책에 있어 군사적 접근과 방위비 증액을 가져왔다. 인도양 주변과 디에고 가르시아 등에 미 해군 증강이 시도되었고 CIA 차원에서는 비밀리에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과 맞서 싸우는 회교반군세력의 지원에 들어갔다. 이 대치는 1989년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해소되었다.

핵전쟁의 위협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무자히딘 반정부군과 지리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남아시아는 본격적인 핵 경쟁시대에 돌입했으며 국내정치의 혼란 등으로 계속 불안정한 안보상황에 직면했다. 더욱이 인도의 스리랑카, 몰디브 등 인접국에의 파병 등 남아시아 지역 내 패권국가적 행동은 파키스탄을 자극했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1986~87년과 1990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무력충돌 직전까지 갔으며 양국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추정에서 전세계적으로 핵전쟁 발발의 공포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양국간에는 갈등 요인이 항상 내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펀자브주에서 시크교 분리독립주의자들의 소요가 발생하자 인도측에서는 파키스탄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파키스탄의 신드주에서도 분리독립 소요가 일어나자 역으로 파키스탄은 인도의 사주가 있었다고 비난하는 등 안보적 긴장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사건은 양국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인도군의 ‘브래스택스 기동훈련(Exercise Brasstacks)’ 때였다. 파키스탄을 남북으로 분단시킬 목적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인도 라자스탄주와 파키스탄 신드주 북부 접경의 전략적 요충에서 인도군이 대규모 기동훈련을 벌이자 이를 자국 안보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인식한 파키스탄은 12월에 시크 소요로 정정이 불안정한 인도 펀자브주 국경에 대규모 군대를 집결시켜 ‘사프 시칸(Saf-e-Shikan)’이란 이름의 기동훈련으로 맞섬으로써 4차 인·파전쟁 위기가 발생했다.

더욱이 문제가 된 것은 양국이 은밀하게 추진해온 핵개발을 공공연히 내세웠기 때문에 자칫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는 위협을 안겨주었다. 결국 이 불안한 대치는 인도 라지브 총리와 지아 파키스탄 대통령의 정상접촉을 통해 이듬해인 1987년 3월 양국군이 모두 철수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들은 상호간 신뢰구축방안(CBMs)의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으나 군사적 대치상황은 계속돼 1990년 카슈미르 일대에서 또 한차례의 군사적 대치를 벌여 긴장을 초래했다. 1989년 겨울 파키스탄측이 ‘자르베 모민(Zarb-e-Momin)’이라는 기동훈련을 카슈미르 접경에서 실시하자 인도군이 동부에서 서부로 3개사단을 이동시켜 맞섰던 것이다.

특히 파키스탄은 발루치스탄의 핵무기 저장소에서 공군기지로 핵무기를 옮겨 F-16기에 장착시킨 상태로 맞섰는데 이것이 미국 CIA에 의해 감지되어 전세계가 핵전쟁의 위협에 떨어야 했다. 이 긴장사태는 이듬해인 1990년 여름까지 계속되었으며 로버트 게이츠 당시 CIA 부국장의 중재로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한편 인도는 그해 7월 타밀 반군게릴라의 분리운동으로 소요를 겪고 있던 스리랑카에 5만명을 파견하는 등 주변국가문제에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또 형제국가로 여겨온 네팔이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자 인도에서 네팔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 수입을 막았다. 1988년 11월 인도양 아라비아해의 섬나라인 몰디브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자 보병대대를 파병하는 등 역내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강화시켜나갔다. 인도의 이같은 위상 강화는 결국 파키스탄이 핵무장에 박차를 가하도록 자극한 셈이 되었다.

특히 1999년 5월 카슈미르 카르길 지역 북부 산악지대 휴전선 부근에서 양국이 충돌, 양측에 5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야포는 물론 전투기 폭격까지 동원된 이 충돌은 3차 인-파전쟁 이후 최대 규모였다. 미국의 중재로 전면전은 피했지만 충돌의 여파로 파키스탄에서는 그해 10월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 축출되고 무샤라프 군 참모총장이 집권하는 정변을 겪었다. 카르길 충돌은 양측이 모두 핵 무장국이었다는 점에서 핵전쟁으로의 비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해결책은 카슈미르 독립 뿐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카슈미르의 분쟁 양상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 인도 정부는 강경자세 일변도로 나가고 있다. 즉 반군세력에 대한 군사적 압력 강화, 반군세력들과의 개별협상을 통한 반군내 불화 조장, 카슈미르주 내부에 정치적 질서의 재구축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인도 정부의 태도는 과거 펀자브주와 북동부주의 분리주의운동을 패퇴시킨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같은 경험을 카슈미르에 적용시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 이유는 펀자브주나 동북부주들은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았으며 카슈미르주가 인도의 타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또한 그 위치가 외부 침입이 용이하고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국제적인 무기시장에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특수성 때문이다.

한편 일부 무장단체들을 중심으로 인도나 파키스탄 어느 쪽도 아닌 카슈미르의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인·파 양국은 물론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카슈미르의 독립은 티베트에 영향을 미치는 도미노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단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으로 카슈미르 완전독립 이외에 다른 방안은 생각하기 어렵다. 지난 50여 년간 수많은 중재와 협상이 있었으나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의 국민감정상 어느 한 쪽으로의 병합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양국은 화해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SAARC(남아시아지역협력기구) 등을 통한 지역경제협력 노력도 강화되고 있다. 21세기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이 카슈미르 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할 것을 기대해본다.

카슈미르 정치상황의 변화
주민들의 각성과 무자히딘의 등장

인·파분쟁의 희생양이 되어온 카슈미르 문제는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새로운 변화 양상을 보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카슈미르인은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인도와 파키스탄 두 행위자가 외부에서 개입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카슈미르인들이 적극적으로 분쟁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이들로 구성된 수십 개의 무장단체들이 각각 행위자로 등장했다.

그동안 연방정부의 카슈미르에 대한 집중지원으로 교육기회와 경제적 기회가 확대돼 주민들의 정치적 각성을 불러왔던 것이다. 특히 이같은 조류는 독립 후 20여 년 동안 탄탄하게 유지되어오던 인도정부의 민주적 제도수립과 국가결속의 응집력이 1975년 인디라 간디 총리의 비상조치 이후 서서히 와해되면서 더욱 촉진됐다.

연방정부는 각 주 단위의 자치에 대한 강한 욕구들을 연방의 통합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강압적 수단으로 맞서왔으나 콩그레스 1당 지배구조가 허물어진 상황에서 연방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는 그대로 카슈미르에도 전파되어 새로운 정치적 그룹들이 다양한 이익을 주장하는 혼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셰이크 압둘라 주총리에 의한 사회경제적 변혁 추구는 그 후임들에 의해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교육환경의 개선, 매스미디어의 확충을 가져왔고 이는 카슈미르의 사회적 동원 및 참여 활성화의 기반이 되었다.

교육환경의 개선에서는 공식 교육기관으로 마드라사(madrassas)라는 모슬렘 학교가 곳곳에 세워져 카슈미르인들을 교육시켰다. 특히 1983년 전통적인 힌두 다수주인 아삼주에서 종교폭동이 발생, 방글라데시로부터 이주해온 모슬렘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들 상당수를 카슈미르로 재이주시키게 되었는데 의식화된 이들이 카슈미르인들의 각성에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주민들의 각성에 기여한 것은 매스미디어다. 문자해독률의 증가에 힘입어 신문이 급성장, 1960년대 중반 40여 개이던 신문 수가 1980년대 중반에는 200개 이상으로 늘었으며 발행부수도 30만부에 달하게 되었다. 동시에 카슈미르 지역은 지리적 원격성으로 인하여 연방정부에서 전력화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또한 파키스탄 방송과의 경쟁으로 출력의 강도를 높여 전파 미디어의 급성장을 가져왔다.

복잡다기한 세력구도

이는 또한 종교적 집단화의 형태로 나타났다. 즉 중앙의 카슈미르 밸리와 북부의 카르길은 이슬람, 동북부의 라다크는 불교, 남부의 잠무는 힌두교 우세지역인데 압둘라의 세속주의적 통치에 따라 각 종교는 큰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원래 주류사회는 밸리 지역의 모슬렘 사회였고 나머지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는데 파키스탄이 인도의 카슈미르 지배를 약화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카슈미르 내 반(反)인도운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시켜왔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적 집단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소련의 붕괴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이후 알 카에다 색출을 위한 미국의 대대적 작전전개 등으로 아프간에서 활동하던 이슬람 무장단체인 무자히딘의 상당수가 카슈미르로 활동무대를 바꾸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인티파다가 카슈미르 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무장화를 지원하는 움직임도 감지되어 종교세력도 복잡다기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지난해 9월16일부터 10월8일까지 4단계에 걸쳐 실시된 총선 결과는 앞으로 카슈미르 문제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20여 년간 집권당으로 기반을 굳혀온 JKNC(잠무-카슈미르 국민회의)가 재집권에 실패하고 창당 4년의 PDP(인민민주당)가 국민회의당과 연합하여 PDP의 모하메드 사이드를 총리로 새정권을 창출한 것이다.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JKNC는 57석에서 과반수(44석)에도 못 미치는 28석으로 줄었으며 지난번에 7석이던 국민회의(I)당은 20석, 한 석도 못 얻었던 PDP는 16석으로 대약진을 보였다. 또한 이 선거에서는 JKNC의 당총재인 오마르 압둘라마저 낙선해 그동안 카슈미르 정치를 장악해온 압둘라가家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압둘라家는 카슈미르의 국부로 추앙받는 셰이크 압둘라에 이어 그의 아들이자 직전 총리인 파루크 압둘라와 오마르 압둘라 3대에 이어 내려오고 있으며 파루크 압둘라 총리는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국민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아왔으나 최근에는 주 정치는 뒷전에 두고 델리에서만 지내 중앙정치를 기웃거리는 총리 혹은 부패 총리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같은 비난을 의식한 파루크는 총선 3개월 전 당총재직을 이미지가 좋은 아들 오마르에게 물려주어 총선 승리를 기도했지만 텃밭인 칸데르발 선거구에서조차 패배했다.

현재 새로 들어선 사이드 정부의 최대 과제는 지역 내 테러와 폭력을 파괴시키는 것. 사이드 총리는 지역 내 각종 테러단체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사이드 총리는 PDP와 연정을 수립한 국민회의당과 임기 6년 중 3년씩 총리를 하기로 해 임기가 3년인데다 각 정파들의 합종연횡 움직임마저 있어 불안한 상태다.


  라윤도
●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 한국외대 인도어과 졸업
● 인도 네루대 대학원 수학
● 인하대 정치학박사
● 대한매일 워싱턴특파원·문화부장·국제부장 역임
● 건양대 문학영상정보학부 교수
● 저서 ‘판문점 일기’ ‘로스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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