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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나라’ 시안(西安)
 관리자  01-19 | VIEW : 8,534
[테마 기행]

7천 兵馬俑 1만 궁녀의 주지육림을 지키다

‘진시황의 나라’ 시안(西安)

중국 서부의 고도(古都) 시안(西安)은 진시황이 남긴 갖가지 유적과 유물로 가득하다. 표정과 자세가 제각각인 병마(兵馬) 도용(陶俑) 7000여 개가 그 핵심. 서른여덟 나이에 중국을 통일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한 그는 왜 등신대의 병마용을 만들었을까. 천하통일 후 그가 들어앉은 아방궁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병마용 제1호 갱에는 등신대의 도용이 즐비하다. 자세히 보면 이들이 표정과 복장,머리모양,자세가 제각각임을 알 수 있다.  
최근 상영된 영화 ‘영웅’의 줄거리는 극히 단순하다. 이를 모를리 없는 장이모(張藝謨) 감독은 붉은색, 파란색, 녹색, 흰색, 검은색 등 다섯 가지 색채를 덧칠해 단조로움을 달랬다. 주인공은 전설적인 무예를 자랑하는 장천(견자단), 파검(양조위), 비설(장만옥), 무명(이연걸) 등 네 명의 검객.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위(魏), 한(韓), 초(楚), 조(趙), 연(燕), 제(齋), 진(秦) 등 ‘전국(戰國) 7웅’ 가운데 ‘식욕’이 가장 왕성하여 이웃나라들을 게걸스레 먹어대는 진나라의 왕(진도명)을 암살하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그들은 머리를 썼다. 어차피 네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를 죽일 수 없다면 자기네 가운데 최고수를 가려낸 다음 그의 손에 나머지 세 사람의 목을 들려 왕을 찾아가게 해 그 자리에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자고.

그리하여 이름 없는 자객 무명(無名)은 드디어 진왕(秦王)과 마주앉게 됐다. 1만명이 넘는 황실의 호위군사와 항상 왕의 100보 안에서 움직이는 최정예 근위병 7인을 돌파하여 왕이 좌정한 옥좌 10보 앞까지 다가간 것이다. ‘10보 필살’의 검법을 익힌 무명으로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무명이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는 100보를 넘어 불과 10보 거리에서 왕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진왕조차도 그토록 두려워했던 세 명의 자객, 곧 장천과 파검, 비설을 처치했다며 그들의 검이 담긴 상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누군가가 자기의 목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 진왕은 최정예 호위대를 두고도 모자라 100보 이내 접근 금지령까지 내렸다. 자신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를 노리는 자객 장천과 파검, 비설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는 10보 안에서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공약했다. 그래야만 두 다리 쭉 뻗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해서 무명은 막상 진왕을 마주하긴 했으나 생각했던 대로 검을 빼들지는 못했다. 진왕을 겁내서도, 최정예 근위병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왕의 말을 듣다 그만 왕에게 설득당하고 만 것이다. 죄 없는 생명이 더 이상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자기 같은 자객이 아니라 천하통일을 이루려는 진왕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대의를 위해 자진해서 목을 내놓은 세 사람을 대신해 왕을 죽이려 했던 그가 더 큰 대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왕에게 살의(殺意)를 품었다는 죄를 짓고 말았다. 그래서 왕궁을 벗어나기 직전 왕의 부하들에게 붙잡혔고, “진나라 법에 따르면 그를 죽여야 하는데, 어찌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병사들의 물음에 왕이 “법대로 하라”고 대답함으로써 그는 처형됐다. 왕은 그의 용기가 가상해 살려주고 싶었지만 국법을 어길 수는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죽이긴 했으나 왕은 그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내렸다.

장이모의 ‘영웅’이 정작 보여주고자 했던 영웅은 누구일까. 진왕일까 무명일까.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일까. 무명은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형가(荊軻)라는 자를 꼭 닮았다.  

秦王, 자객을 베다

형가는 출중한 검객이었으나 검의 사용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 검법을 어디에,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사 전광(田光)을 만났고, 전광은 그를 연(燕)나라 태자 단(丹)에게 천거했다.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간신히 도망쳐 나왔기에 진왕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불탔던 태자는 형가에게 진왕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형가는 이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흔쾌히 “물론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전광은 국가 대사의 기밀이 누설되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야만 태자가 형가를 완전히 믿고 그 일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진정한 검객이었다.

철통 같은 호위를 받고 있는 진왕을 해치우려면 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필수조건. 그렇게 하려면 왕을 공개적으로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했다. 그때 형가의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진왕이 호시탐탐 노리는 독항(督亢)이란 지역의 지도, 그리고 왕의 진노를 사서 연나라로 도망쳐 1만의 식읍(토지)과 황금 1000근의 현상금이 걸려 있는 번어기(樊於期)의 목을 가져왔다고 하면 진왕은 기꺼이 나를 만나줄 것이고, 그 틈을 보아 왼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태자는 번어기의 목에 대해선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를 본 번어기는 태자의 고민을 읽고 “형가가 진왕을 때려잡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목을 내놓겠다”며 그 즉시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쳤다. 그리하여 형가는 그 두 가지 선물을 갖고 진나라로 향했다.

문제는 칼을 어떻게 숨기느냐 하는 것. 진왕을 만나려면 조그마한 칼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지도 속에 칼을 숨기기로 했다. 진왕은 번어기의 목을 가져왔다는 말에 크게 기뻐하며 형가 일행을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사마천은 당시를 이렇게 기술했다.

“진왕은 지도를 펼쳤다. 지도 끝에서 비수가 나왔다. 형가는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진왕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칼이 몸에 닿지 않았는지 진왕은 몸을 뒤로 빼내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 칼집을 잡았다. 하지만 칼은 쉽게 뽑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달아나야 했는데, 형가가 그를 뒤쫓았다. 진왕은 기둥을 돌며 형가의 칼을 피했다.”

옥좌 아래에는 무장한 근위병들이 있었지만, 왕의 허락 없이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게 진나라의 법이었다. 왕은 왕대로 이리저리 황급히 피하느라 근위병에게 명령할 겨를이 없었다. 근위병들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근위병들은 고함을 질렀다. “대왕께선 칼집을 등 뒤로 돌리고 칼을 후리쳐 뽑으십시오!”라고.

그 말을 듣고서야 칼을 뽑은 진왕은 형가를 향해 곧장 내리쳤고, 형가는 쓰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들고 있던 비수를 진왕을 향해 던진 것이다. 그러나 칼은 진왕의 귀를 스쳤을 뿐이다.

“아깝고 아까운 일이로다! 너는 참으로 운이 좋구나. 내가 오늘 일을 그르친 것은 내 검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나는 다만 너를 사로잡아 위협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 어쩌랴,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거늘!”

빈손으로 쓰러진 형가의 마지막 외침이 드넓은 궁전에 울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진왕의 본명은 영정(瀛政). 부왕 장양왕(莊襄王)이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12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그는 22세 때 성년식을 갖고 친정(親政)에 들어가 재위 26년째인 기원전 221년, 꿈에 그리던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인물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라 일컫는 이가 바로 그다.  


베이징보다 시안 먼저 간 클린턴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을 새긴 진시황 상(像).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군주로, ‘황제’란 칭호도 그가 처음 사용했다.  
진시황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 몇 년만에 고도(古都) 시안(西安)을 다시 찾았다. 공항부터 그 전과 많이 달라져 낯설게 느껴졌다.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40여km 떨어진 곳에 새로이 공항을 짓고는 ‘셴양(咸陽)공항’이란 이름을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셴양이란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중국식 표기다. 한(漢)·당(唐) 시절 도읍지로서 장안(長安)이라 불렸던 시안은 이 셴양까지 껴안음으로써 진시황의 도시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공항에서 시안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평탄했다. 두 도시 사이엔 위수(渭水)가 흐르고, 눈 앞으론 예로부터 ‘이곳을 취하는 자는 천하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 관중(關中)평원이 펼쳐졌다. 인공물이라고는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다 사라지곤 하는 작은 마을과 회색의 원자력발전소 정도뿐이라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되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내에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빌딩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시내 곳곳에 붙어 있는 ‘서부 대개발은 시안으로부터’라는 구호였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한 이래 동부 해안지대에 집중됐던 경제개발 열풍이 이제 내륙 깊숙이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시안은 이렇듯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외국 여행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여전히 이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문화유산이다. 중국 정부 역시 이 점을 간과하지 않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1998년 6월,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당국은 수도 베이징(北京)에 앞서 이곳 시안으로 그를 안내하고는 성대한 환영식을 베푼 다음 세계문화유산인 진시황(秦始皇)의 병마용(兵馬俑) 박물관을 참관케 했다. 그곳 도용(陶俑)들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클린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세계에 전함으로써 시안이 중국 역사의 고향이자 세계적인 명소임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클린턴이 아니더라도 시안을 찾은 사람이라면 방문 첫날에는 시내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명소, 이를테면 당나라 시대의 유적인 사각의 육중한 성벽과 곳곳에 세워진 종루, 당대의 명승(名僧)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한 곳인 대안탑(大雁塔), 크지는 않지만 오밀조밀한 맛을 선사하는 소안탑(小雁塔), 한(漢)대에서 청(淸)대에 이르는 2000여 년 동안 제작된 명필 비문(碑文) 2300여 점이 숲을 이룬 비림(碑林), 시안 일대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산시성(陝西省)박물관 등을 둘러보며 시안의 분위기를 익힌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침 일찍 시안역 앞에서 출발하는 병마용 박물관행 버스에 오른다. 입석을 허용하지 않는 데다 냉방도 비교적 잘 된 이 버스는 단돈 5위안(우리 돈으로 800원)에 사람들을 40km 떨어진 그곳으로 데려다준다.

물론 가는 길에 당 현종과 양귀비의 애틋한 로맨스가 어린 화청지(華淸池)와 온통 석류나무로 뒤덮인 거대한 진시황릉 앞에서도 내릴 수 있다. 바쁜 사람들은 진시황릉마저 건너뛰지만 대개는 겉핥기로나마 한번 둘러본다. 도로변은 이런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으려는 좌판들로 가득하다. 기념품이며 음료수 등이 그 대종을 이루는데, 한국어로 접근해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곡괭이 끝에 닿은 ‘지하왕국’


진시황이 즐겨 찾던 양산궁 터에서 발견된 장방형의 공심전. 가로누운 용과 원형의 옥이 새겨져 있는데, 용은 황제를, 옥은 미녀를 상징한다. 그의 호색 취향을 잘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매표소(입장료 26위안)를 통과하자 커다란 진시황의 석상을 비롯해 진나라 시대에 토목과 건축에 사용됐던 각종 도구와 흙벽돌, 토기, 무기 등과 당시 통용됐던 화폐와 문자 등을 그려놓은 도판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진의 문화와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라 일대는 작은 야외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석류나무 숲 사이로 난 돌계단을 따라 높이 76m의 무덤 정상으로 오르다 울산에서 왔다는 여행객 두 사람을 만났다. 단체관광팀에 섞여 왔다는 그들은 시간이 15분밖에 없다며 더운 날씨인데도 땀을 뻘뻘 흐리며 속도를 냈다. 속으로 ‘꼭 그렇게 바삐 서둘러야 하나’ 하고 딱해하면서 정상에 오르니 달리는 말의 형상을 한 여산(驪山)이 앞을 가로막았다. 2200년 전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을 그려보면서 나는 한참 동안 잘생긴 여산을 바라보았다.

무덤은 컸으나 이렇다 할 구조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무덤 구조도에 따르면 무덤 안에는 실제 궁전을 빼 닮은 지하궁전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그것도 동판으로 만들었다. 무덤 한가운데 모셔진 관 주위에는 백관(百官)의 자리까지 마련했을 뿐 아니라 진귀한 보물들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에 “시황제는 즉위한 다음해부터 꼬박 40여 년에 걸쳐 70여 만명의 인력을 동원, 여산에 자신의 능묘를 조영했다”고 기록했다. 황제는 도굴을 막기 위해 묘실 안으로 가까이 오는 자가 있으면 활이 자동적으로 발사되도록 장치했으며, 도랑을 파고 거기로 수은이 흐르게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상상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3km 동쪽에 자리한 병마용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다. 현장의 위치는 시안시 린둥(臨潼)현 시양(西楊)촌. 가뭄이 한참 심했던 1974년 여름, 들판에 물을 대기 위해 우물을 파던 한 농부의 곡괭이 끝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걸렸다. 당겨 보니 조그만 도용(陶俑)이었다. 도용이란 흙을 구워서 사람 형상으로 만든 인형 같은 것. 놀란 농부는 곧 행정당국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병마용 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중국 문화재 당국이 발굴 사실을 알리자 세계의 언론들이 앞다퉈 ‘이집트의 투탕카멘 왕묘의 발견에 버금가는 고고학적 대사건’이라며 대서특필했다. 흙으로 모양을 만들어 구워낸 등신대의 병사와 말, 무기 등이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7000여 체나 발굴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길이 230m, 너비 62m의 드넓은 공간에 병사들이 줄을 맞춰 서 있는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감전된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우선 규모가 놀라웠다. 말이 7000체이지, 그걸 하나하나 빚고 굽고 줄지어 세우려면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됐겠는가.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마용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 첫 눈에 힘이 절로 느껴졌다. 이보다 80년 뒤에 제작된 한(漢)나라 경제릉(景帝陵) 출토 용(俑)들은 소박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는데….  

‘진시황 테마마크’

더욱 놀랄 만한 것은 그 많은 병사들의 표정과 복장, 자세, 머리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똑같은 모습의 병사들을 만들려 했다면 틀 하나로 쉽게 찍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왜 성가심을 무릅쓰고 하나하나 달리 만들었을까. 그 일을 해낼 만큼 수준이 뛰어난 기술자를 동원할 수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황제가 단조로운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일까. 병마용의 제작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갖가지 추리를 내놓고 있을 뿐이다.

그런 추리 중의 하나를 볼 수 있는 것이 시안 시내의 한 호텔 부속극장에서 매일 밤 무대에 오르는 ‘진용(秦俑)의 혼’이란 제목의 발레극이다. 여기에선 그 부분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진왕 정이 싸움터에 나타났다. 적병이 그를 향해 활 시위를 당겼다. 그것을 본 진군의 병사 하나가 재빨리 몸을 날려 화살을 막았다. 죽음으로 진왕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병사의 젊은 아내는 슬픔에 빠져 비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남편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 모습을 기억해내고 병용을 만들었다. 어느 날 진시황도 그 병용을 보게 됐다. 순간, 그는 자신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을 떠올렸다. 그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전의 모습대로 재현하여 애도를 표했다.’

제1호 갱의 발굴에 이어 1976년엔 불과 20m 떨어진 곳에서 이들 도용 병사들을 지휘한 것으로 보이는 사령부와 기마 군단이 발견됐다. 제2호, 제3호 갱이 그것인데, 크기는 작아도 구조는 아주 복잡해서 살펴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병마용 박물관 안에는 앞서 말한 세 개의 병마용 외에 진시황 시대의 상황과 병마용 갱의 탄생과정을 입체영상으로 만들어 360°전방위에서 관람할 수 있게 꾸며놓은 ‘영상관’과, 병마용 갱에서 나온 두 대의 화려한 동제(銅製) 마차 등 여러 유물들과 그에 관한 연구 성과물들을 전시해놓은 특별전시관도 마련돼 있다. 한마디로 진시황의 ‘테마파크’인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65위안이란 꽤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구름처럼 몰려든다. 물론 중국인이 제일 많지만, 미국 영국 네덜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스웨덴 등에서 온 관광객들도 적지 않다. 연간 300만∼400만명이 이곳을 찾는다는데, 그 중 외국인이 100만명 정도라고 한다. 외국 관광객들은 연신 ‘원더풀’을 외치며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이곳저곳을 찾아다닌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날엔 마침 그리스의 파판드레우 수상이 수행원들을 이끌고 와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개최하는 중국 정부가 그에 앞서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여는 그리스의 수상을 공식 초청해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다.

수상 일행이 전시관 안에 있는 동안은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되어 밖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아무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나 역시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밀로의 비너스’ ‘포세이돈의 청동상’ 같은 아름다운 인체조각을 빚어냈던 고대 그리스인의 피를 물려받은 파판드레우 수상은 이곳에 가득찬 등신대의 도용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 뒤 그가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던 사람들은 마치 누가 시킨 것처럼 한꺼번에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진시황의 지하군단에서 자연스레 만났다. 진시황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병마용 덕분에 세계인이 자리를 함께하게 된 것이다.

합종책(合縱策) Vs. 연횡책(連衡策)


병마용 제1호 갱에 전시된 ‘좌사용(坐射俑)’도용. 무릎을 꿇은 채 활 쏠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적의 어떠한 공격도 용납하지 않을 듯 눈빛이 예리하다.  
진시황은 중국 대륙이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뉘어 치고받던 260년간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에게 하나의 ‘중국의식’을 심어줬다. 하지만 ‘통일 엔진’은 진시황이 통일을 이루기 140년 전, 진의 효공(孝公)에 의해 가동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란 영화 ‘영웅’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검’의 시대였다. 하지만 효공은 ‘머리’를 가진 책사를 찾았다. 통일은 몇 사람의 출중한 무예를 가진 검객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국강병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려 인물을 찾았다.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위(衛)나라 왕의 후손인 공손앙(公孫?)이었다. 위의 세력이 날로 약화되자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위나라에서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위(衛)를 버리고 위(魏)를 찾았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효공이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엔 진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는 도읍을 셴양으로 옮기고, 지역을 현으로 나누며, 토지를 개간하고 세제를 개편해 농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신상필벌과 엄격한 법 적용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효공에게 헌책(獻策)했다.

그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효공은 그를 재상에 임명하고는 그 일을 추진하라고 명했다. 그때 공손앙은 상앙(商?)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개혁안 또한 ‘상앙의 변법(變法)’이라 불리게 됐다. 상앙은 성악설의 주창자인 순자(荀子)에게서 법가사상을 배웠기에 변법의 바탕 역시 법가사상이었다. 법가사상에 대해 후일 그 완성자인 한비자(韓非子)는 이렇게 요약해서 설명한 바 있다.

“백성은 원래가 사랑하면 교만해지나 위엄에는 복종한다. 그러므로 총명한 군주라면 그 법을 험하게 하고, 그 영을 엄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법가사상은 소국과민(小國寡民),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추구하는 왕도(王道)보다는 유위이치(有爲而治)의 패도(覇道)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효공이 변법을 채택하고 그 집행을 상앙에게 맡겼다는 것은 패도의 길을 걷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상앙은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왕도는 민정(民情)에 순응하나 패도는 민정에 역행한다.”

진은 중국의 최서단에 위치한 탓에 힘도 변변찮았고 문화 수준도 낮아 그 전까지는 야만국이라 치부됐지만, 효공이 변법을 채택한 후로는 크게 강성해졌다. 기계적인 법 적용으로 비인간적인 측면이 강화되긴 했으나, 법에 따라 국가를 운영한다는 법치주의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근대 국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됐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위(魏)를 공략하여 하서(河西·황하 중류지역)의 땅을 빼앗았고, 그에 따라 위가 대량(大梁·지금의 허난성)으로 밀리는 등 판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곧 주위 여러 나라에도 충격을 안겨줬다.

이때 위에선 소진(蘇秦)이란 자가 나타나 동방의 열국들을 향해 종(縱)으로 합병해 진에 대항하자며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제안했다. 일종의 상호방위동맹 같은 것이었다. 이에 진에서는 소진의 친구 장의(張儀)가 개발한 ‘연횡책(連衡策)’으로 맞섰다. 연횡이란 열국을 가로로 연결하여 진과 화친한다는 계책을 말한다. 장의는 진을 대표하여 각국을 다니며 그 뜻을 전하면서 그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 결과 합종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졌다. 그런데 연횡책도 마치 그에 발 맞추기라도 하듯 곧 무너지고 말았다. 장의가 진을 떠났기 때문이다.

합종과 연횡이 사라져버린 천하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진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새로운 계책을 고안해냈다. 진의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를 진언한 범저(范雎)는 위나라 출신이라 그가 진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어느 문인은 시로써 이렇게 탄식했다.

“위나라 신릉군이여! 그대는 공연히 선비 삼천을 길렀구나. 위대한 인물이 진나라로 달아난 것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다양한 방책을 구사하던 진은 기원전 256년, 껍데기만 남아 있던 주 왕실마저 멸하고 말았다. ‘춘추 5패’ ‘전국 7웅’이라던 여타의 제후국들도 예전에 비해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영정, 즉 훗날의 진시황이 제위를 물려받은 것은 이 즈음인 기원전 247년이었다.  

인재를 찾아내 천하를 얻다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여산 기슭에 위치한 진시황의 무덤은 석류나무 숲으로 덮여 있다. 사람들은 그 사이로 난 돌계단을 따라 높이 76m의 정상에 오른다.  
그 해 조나라의 이사(李斯)가 진으로 왔다. 그 역시 순자의 제자였다. 처음엔 승상(丞相·총리)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 되어 그를 도왔으나 영정이 축객령을 내리자 몸을 숨겨야 했다. 그는 그런 위기상황에도 왕에게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올려 그 부당성을 따졌다.

“신이 듣건대 태산은 조그만 돌 하나도 거부하지 않았기에 능히 그 높이를 이루었고, 바다는 조그만 시냇물도 버리지 않고 포용하기 때문에 능히 그 깊이를 이루었다 하더이다. 그러므로 하찮은 사람이라도 버리지 않아야만 명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山不辭石 故能成其高 海不辭水 故能成其大 明主不輕人 故能成其衆)”라고 전제하면서 “천하통일은 인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統一天下 人才爲本)”고 역설했다. 그런 다음 과거 진나라 왕들이 인재를 널리 구하려 한 사례들을 조목조목 들었다.

“옛날에 진 목공(穆公)은 오랑캐인 서융 땅에 있는 유여(由余)를 데려온 데 이어 동쪽 완(宛) 땅에 있는 백리해(百里奚)까지 등용했고, 송(宋)나라에 있는 건숙(騫叔)을 불려들여 영접했으며, 진(晉)나라의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枝)를 등용하여 마침내 천하 패업을 성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 효공은 타국 사람인 상앙을 등용해서 진나라 국법을 세웠고, 진 혜왕도 타국 사람인 장의를 등용해 6국을 분쇄했으며, 소양왕도 외지인인 범저를 등용해 원교근공책을 세웠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진나라의 네 왕은 모두 타국 사람을 써서 공을 이뤘습니다. 타국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진나라에 해가 된다고 말씀하옵는지요. 이번에 대왕께서 타국 사람들을 국외로 추방한다면 그들은 장차 다른 나라에 가서 벼슬을 살며 도리어 진나라에 해를 끼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진왕 정은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곧 축객령을 거뒀다. 또한 사람을 보내 이사를 데려다 승상 자리에 앉혔다. 최측근 보좌역으로 모셨던 것이다. 이처럼 외부에서 발탁한 인재를 당시엔 ‘객경(客卿)’이라 불렀다. 진왕은 이사에게 자신의 속을 털어놓았다.

“과인은 장차 여섯 나라를 합병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싶은데 어떤 계책을 세워야 좋겠소?”

이에 이사가 “한(韓)나라는 우리 진나라에서 가깝고도 약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먼저 한나라부터 쳐서 없애십시오. 그러면 모든 나라가 우리 진나라를 두려워할 것입니다”고 조언하자 진왕 정은 이를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등 본격적인 통일작업에 들어갔다. 기원전 230년 한을 정벌한 데 이어 2년 후에는 조를 공략하여 근공(近攻)을 마무리한 후 그 전까지 원교(遠交)의 대상이던 먼 나라들을 차례로 공격했다. 6국 멸망에 꼭 10년의 세월을 투자해 그는 드디어 천하를 통일했다. 이 작업에는 이사가 천거한 병법의 달인 위요(尉?)와 명장 왕전(王?)과 왕분(王賁) 부자, 몽념(蒙恬) 등이 가세했다.

진왕 정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자는 여불위다. 그는 정의 아버지 자초(子楚)를 제위에 올려 장양왕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정의 실제 아버지라는 얘기도 있다. 정이 친정할 때까지 상국(相國·총리)의 지위에서 왕을 보필했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되면 다스려지고 제각기 존립하면 어지러워지며, 통일되면 안정되고 제각기 존립하면 위태로워진다(一則治 異則亂 一則安 異則危)”며 정의 통일 의욕을 북돋아주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제왕학이었다. 그를 제왕다운 제왕, 곧 진정한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법가사상만으로는 국가를 원만하게 이끌어갈 수 없다”며 유가의 덕치와 도가의 무위사상을 보태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기계적인 법 적용에 반대한 그는 법이 제대로 서야 천하가 따른다며 민심을 따라야 민심을 유지할 수 있고, 민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천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진시황이나 법가사상에 물든 책사들이 영토의 합병이라는 형식적인 통일에 관심을 가졌다면 여불위는 민심의 통일, 다시 말해 명실상부한 통일을 바랐다. 그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심을 얻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고, 민심을 잃으면 천하 또한 잃게 된다(得民心 得天下 失民心 失天下)’는 말을 진시황이 실천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여불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사기’ 진시황 본기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시경(詩經)과 상서(尙書) 등 고전을 금지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집행했으며, 매사에 속임수와 폭정으로 일관했고, 인의(仁義)는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강력한 힘만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짐’은 ‘황제’다”


셴양(咸陽)의 화려한 궁궐로도 만족하지 못한 진시황은 위수 변에 1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아방궁을 건설했으나, 항우에 의해 불태워져 지금은 폐허로만 남아 있다. 중국 정부는 최근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시안 남쪽 교외에 아방궁을 재현했다.  
아무튼 진왕 정은 그렇게도 꿈꾸었던 천하통일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그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다. 득의감에 들뜬 그는 천하통일을 끝내자마자 제일 먼저 “제호를 논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왕이라는 칭호 대신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오제’의 존칭을 줄여 ‘황제(皇帝)’라 하고는 그것을 자신의 호칭으로 삼았으며, 그때까지 아무나 쓰던 1인칭 대명사인 ‘짐’을 황제의 전용어로 만들었다. 진시황제란 말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천하에 알리는 시그널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중국 대륙에선 340여 명의 황제가 배출됐으니 말이다.

통일은 나뉜 것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자 그 결과다. 권력은 그것을 작동시키는 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진시황은 맹자가 역사의 사이클을 일러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 했던 바를 몸소 보여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후일 나관중(羅貫中)은 이를 두고 ‘삼국지연의’에 “나누어진 것은 언젠가 합쳐지고, 합쳐진 것은 언젠가 쪼개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진시황은 전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제후에게 땅을 나눠주고 통치하던 주(周)의 봉건제도를 더 이상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했다. 이는 관료정치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종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통치 패러다임이었다.

아방궁의 여인들

그 다음에는 법률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신상필벌을 최우선시할 것임도 밝혔다. 모든 제품에는 제작자의 이름을 새기게 해서 우수한 제품을 만든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고 불량제품을 만든 자는 엄히 벌했다. 이 제도는 농민과 병사들에게도 적용됐다.

내친김에 6국마다 따로따로 존재하던 도량형과 월력, 문자 등도 하나로 통일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아귀에 든 영토를 지키고 북방 흉노족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6국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축성한 성을 증축하여 하나로 잇기 시작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축조물인 만리장성은 이렇게 해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진국 최대의 권력기구는 조정(朝廷)이었다. ‘조(朝)’란 황제가 문무백관들을 만나는 곳이니 국정을 논의하고 국가대사를 결정하는 조당(朝堂)을 말하고, ‘정(廷)’은 조에서 결정한 사항을 집행하는 사무기구였다. 정에는 수상격인 승상과 군사담당 장관인 태위(太尉), 감찰업무를 관장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 등의 고위관료들을 뒀다. 조정은 물론 황제가 주재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어긋난다고 하여 수백명의 유생들을 시안 동북쪽 여산 기슭에 생매장했으며, 국가이념에 반하는 서적은 모두 거둬 불태웠다. 이들 대부분은 이사의 진언에 따른 것이었다.

시황제는 욕심이 많았던 만큼 호사도 좋아해 수십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도도히 흐르는 위수 변에 동서 길이가 1300m, 남북 400m로 1만명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황궁인 아방궁(阿房宮)을 세웠다. 셴양의 화려한 함양전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워낙 방대한 공사라 그는 완공을 보지 못했지만, 당(唐)대의 시인 두목(杜牧·두보가 아님)은 ‘아방궁부’이라는 시에서 아방궁을 이렇게 표현했다.

“육국은 망하고 천하는 통일됐다. 촉산이 평지가 되자 아방궁이 솟아났다(六國畢 四海一 蜀山兀 阿房出)”.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이 아방궁도 불태웠는데,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폐허에서 발견된 한 와당에는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왕조가 수천년 이어지고 천하가 평강하게 해주소서”라는 글귀가 써 있으나, 황제는 이 아방궁에서도 자신의 소재를 비밀에 부친 채 수많은 후궁과 미녀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그 가운데서도 제나라의 갈훼(葛卉), 조나라의 낙하(洛夏), 초나라의 탁협(卓?), 연나라의 대설(岱雪)을 일러 ‘아방궁의 4대 미인’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진시황이 죽자 곧바로 여산에 순장됐다.

‘삼보구사(三輔舊事)’라는 기록에 “여인의 수가 1만명을 넘었다(後宮列女 萬有餘人)”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삼천 궁녀’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밤마다 새로운 상대를 찾았지만, 궁녀의 수가 워낙 많아 죽을 때까지 그 모두를 상대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아방궁은 향락과 욕망, 사치를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진시황의 호색 취향

필자는 최근 중국 정부가 아방궁을 시안 남쪽의 한적한 곳에 재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까지 가보았다. 원래의 것이 너무 커서 몇 분의 일로 축약해서 지은 것이라는 데도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기와 선과 붉은 색 수직 기둥이 유난히 위엄스레 보이는 3층 구조의 정궁은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이 45도 각도를 이루는 데다 그 한가운데에다 옥좌와 진시황 상을 세워놓아 사뭇 긴장감을 자아냈다.

궁전 내부에는 황제의 집무실과 침궁도 마련돼 있었다. 그 뒤쪽에는 난지(蘭池)라 부르는 커다란 못까지 파놓았지만 서둘러 만든 흔적이 역력해 영화 세트처럼 정교한 멋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웅장한 것을 좋아했던 진시황의 취향만은 엿볼 수 있었다.

진시황이 미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물증은 또 있다. 그가 즐겨 찾았다는, 셴양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져 있는 양산궁(梁山宮) 터에서 발견된 장방형의 공심전(空心?·진시황이 밟고 다니는 계단에 쓰인 벽돌)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길게 가로누운 용과 둥근 고리 모양의 옥이 가느다란 선으로 아주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매우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용은 물론 황제인 진시황을 나타내고, 용의 허리 부분 하단의 옥은 미녀를 상징한다. 시안의 산시성박물관에 전시된 용이 디자인된 공심전을 보면서 나는 시황제의 ‘허리 하학’적인 생활을 이것 이상 상징적이고도 해학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된 후로 그가 산 삶은 ‘주지육림’, 바로 그것이었다.

무너진 왕국

이처럼 ‘좋은 것’을 두고 어찌 저 세상으로 가고 싶겠는가. 그는 불로장생까지 꿈꿨다. “내가 천하를 얻었는데 또 이루지 못할 게 어디 있겠느냐”며 전국 곳곳으로 방사(方士)들을 보내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했다. 아까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도무지 기대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결국은 그가 스스로 찾아 나섰다.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는지, 그 길에서 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재위 37년, 그의 나이 마흔아홉 되던 기원전 210년이었다.

그의 생물학적인 생은 이렇게 끝났지만 제국의 패망 조짐은 통일을 이룬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불위의 충고를 뿌리치고 힘만을 내세우자 고통에 신음하던 자들이 판을 송두리째 뒤엎을 생각으로 이제나저제나 때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행운이 뒤따라 몇 차례의 암살 위기를 무사히 넘겼고 조직적인 저항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정은 달라졌다. 진은 진승(陳勝)·오광(吳廣) 등이 주동이 돼 일으킨 농민의 난을 평정치 못해 크게 흔들렸고, 시황제가 죽은 지 4년 뒤인 기원전 206년 항우가 셴양에 입성하고, 3세 자영(子텊)이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문을 내렸다.

진시황은 천하를 두루 평안하게 하기 위해 통일이 필요하다며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지만, 통일을 달성하자 자신이 내세운 대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그 결과 자신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다져놓은 진나라를 뿌리째 흔들어놓고 말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남을 옭매기 위해 만든 사슬이 어느새 자신마저 묶어버린 자승자박의 결과로 보아야 할까. 이는 비단 진의 멸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래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진은 망했다. 그러나 진은 ‘중국(China)’이라는 큰 그릇을 남겼다. 신은 그릇을 만든 자에게 그 속에 담을 내용물까지 채울 기회는 주지 않는다는 듯 진을 멸망시켰다. 그 일은 남겨뒀다 다음에 오는 선수에게 주어야 한다면서. 역사는 이런 것이다.

권삼윤
● 1951년 출생
● 한국외국어대 무역과 졸업
● 중동지역 등 60여 개국 여행
● 저서: ‘차도르를 벗고 노르웨이 숲으로’ ‘문명은 디자인이다’ ‘세계문화유산’ ‘나는 박물관에서 인류의 꿈을 보았다’ 등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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