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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조폭
 관리자  01-19 | VIEW : 2,276
[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 ②]

조폭 날뛰고 포주 설쳤다

劍契와 왈자

조선사회에도 사회악은 있었다.
검계(劍契)와 왈자(曰字)로 불리던 문제집단이 그들.
군사조직에 가까운 조직과 규율을 갖췄던 검계, 사실상 기방의 운영자였던 왈자. 이들 때문에 조선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한국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말한 것은 누구던가? 지금 한국을 홍보하는 말로까지 쓰이는 이 센텐스가 나는 자못 불만스럽다. 조용한 아침이라니, 조용하지 않은 아침도 있는가? 딴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조용한 아침 운운하는 말이 어딘가 맥빠진 한국 역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조용한 아침 운운 탓은 아니지만, 역사가들이 그려낸 한국사에서 인간들이 북적대며 살아가는 정경을 상상하기는 실로 어렵다. 어딘가 조용하다. 뭔가 소리가 난다면 그것은 왕실과 사대부에서다. 권력을 두고 죽고 죽였으니 그들의 세계에 얼마나 많은 곡소리가 났을 것인가? 그래서 그들만 늘 TV연속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리라.

역사란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역사는 묘사하는 바에 따라 달리 그려지기 마련이다. 활기찬 역사를 그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그려질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조선의 깡패에 해당하는 인간 부류를 묘사해 보려고 한다. 양반님네들이 장죽을 물고 느릿느릿 팔자걸음을 걷는 점잖은 조선시대에 웬 깡패인가.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지 않으랴? 먼저 숙종 때의 기록을 보자.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도하(都下)의 무뢰배(無賴輩)가 검계(劍契)를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습진(習陣)합니다. 여리(閭里)가 때문에 더욱 소요하여 장래 대처하기 어려운 걱정이 외구(外寇)보다 심할 듯하니, 포청(捕廳)을 시켜 정탐하여 잡아서 원배(遠配)하거나 효시(梟示)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신여철(申汝哲)에게 명하여 각별히 살펴 잡게 하였다(숙종실록 10년 2월12일).

서울 시내의 무뢰배가 결성한 검계(劍契)가 습진을 하여 서울 시민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습진이란 진법을 익히는 훈련이다. 군사훈련인 것이다. 정식 군사가 아닌 무뢰배의 조직이 군사훈련을 하니 일반 시민들이 불안해 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더욱이 이 시기 민간인이 불안해할 만한 정황이 조성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 기록에 등장하는 문제의 검계란 무엇인가? 검계에 관해서는 이 자료와 연속된 숙종실록의 자료가 셋이 더 있다. 관변의 공식 자료가 아닌 것으로는 ‘조야회통(朝野會通)’이 있고, 이것이 ‘연려실기술’에 다시 인용되어 있다. 또 하나는 홍명희가 인용한 ‘화해휘편(華海彙編)’에 있다. 이 자료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자해는 조폭문화

좌의정의 보고가 있고 난 뒤 임금의 명으로 포도청에서 검계의 도당을 체포한다. 그 결과를 2월18일 다시 민정중이 보고하는데, 포도청에 갇힌 검계 도당 10여 명 가운데 ‘가장 패악(悖惡)한 자’는 칼로 살을 깎고 가슴을 베기까지 하는 등 그지없이 흉악한 짓을 한다. 자해는 아마도 조폭문화(?)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데, 예컨대 영화 ‘투캅스’에서 조서를 받던 깡패가 자해소동을 벌이는 것을 상기해 보라. 민정중은 느슨히 다스릴 경우 그 무리가 불어날 것이고 그 결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걱정이 있을 것이라면서 우두머리는 중법(重法)으로 처결하고, 붙좇은 무리는 차등을 두어 처벌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민정중은 2월25일 다시 검계에 대해 보고하는데, 이 보고에 의하면 검계는 원래 향도계(香徒契)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향도계란 장례를 치르기 위한 계를 말한다. 장례에는 비용이 많이 들게 되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 계를 구성하여 평소 얼마간의 금전을 염출하고, 구성원 중에 누가 상을 당했을 경우 평소 염출한 금전에 얼마를 더하여 비용을 마련해 주는 그런 계였을 것이다. 이 계는 원래 한국민의 독특한 풍습인 계와 다를 것이 없다. 민정중의 보고에 의하면 이 계는 서울 시내 백성들, 즉 일반 민중들 것이었으며 사대부가나 궁가에서도 가입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과 검계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민정중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무리를 모을 때에 그 사람이 착하고 악한 것을 묻지 않고 다 거두어 들였으므로, 여느 때에는 형세에 의지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상여를 맬 때에는 소란을 피우면서 다투고 때리며 못하는 짓이 없으며, 또 도가(都家)라 하여 매우 비밀하게 맺어서 망명(亡命)한 자를 불러 모으는 곳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계의 관리조직인 도가 내부에 존재하는 검계다. 도가란 어떤 조직이건 조직의 중추를 이루는 관리 센터를 말한다. 향도계의 도가는 망명하는 자, 곧 죄를 지어 법망을 피하려는 자들을 거두어 숨겨주는 곳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가 내부의 비밀 조직이 바로 검계였다.

숙종은 한성부(漢城府)에서 향도(香徒)를 뽑아 군정(軍丁)에 채우고 조례를 세워 폐습(弊習)을 고쳐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른다(숙종실록 10년 3월 22일).

이상에서 소개한 것이 유명한 검계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석종 교수에 의해 비상하게 주목받은 바 있다. 즉 민중 저항 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했던 것이다(정석종, ‘조선후기 사회변동 연구’, 일조각).  

검계가 민중저항운동?


하지만 나는 검계를 민중 저항과 연결시키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까지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자료를 ‘조야회통’의 자료와 연관지어 다시 한번 꼼꼼하게 검토해 보자. ‘조야회통’의 자료는 다음과 같다.

① 갑자년에 왜(倭)의 국서가 온 뒤로 소란이 날로 심해져 동대문으로 나가는 피난민의 가마와 짐이 꼬리를 물었다. 무뢰배들이 모여들어 계를 만드니, 혹은 살략계(殺掠契)라 하고, 혹은 홍동계(?動契)라 하고, 혹은 검계(劍契)라 하였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남산에 올라가 태평소(角)를 불어 마치 군사를 모으는 것같이 하고, 어떤 때는 중흥동(重興洞)에 모여 진법(陣法)을 익히는 것같이도 하였다. 간혹 피난하는 사람을 쫓아가 재물을 빼앗기도 했는데, 어떤 경우 사람의 목숨을 해치기까지 하였다.

② 청파(靑坡) 근처에 또 살주계(殺主契)가 있었는데, 목내선의 종[奴] 또한 가입하였으므로 목내선이 즉시 잡아 죽였다. 좌우 포도청에서 7,8명을 잡아서 살주계의 책자를 얻었는데, 그 약조에 ‘양반 살육’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무리는 모두 창포검(菖蒲劍)을 차고 있었다. 우대장 신여철(申汝哲)은 관대하게 용서한 적이 많고, 좌대장 이인하(李仁夏)는 자못 엄하게 다스렸다. 적당들이 남대문 및 대간(大諫)의 집에 방을 걸었는데, “만약 우리가 모두 죽지 않는다면, 끝내 너희 배에다 칼을 꽂고 말리라”고 하였다.

③ 광주(廣州)에 사는 과부 한 사람이 피난하다가 길에서 적한(賊漢) 일곱 명에게 잡혀 강간을 당했는데, 적당을 잡고 보니, 그중 하나가 과부의 서얼 사촌이었고 검계의 당원이었다.

④ 교하(交河)의 깊은 산골에 시골 사람이 많이 모였다. 한 사람이 “장차 난리가 일어나면 우리도 양반으로 마누라를 삼을 수 있다”고 하자, 숙수(熟手) 개천(開川)이란 자가 큰 소리로 “듣자니 양반의 음문은 아주 좋다는데 이제 얻을 수가 있구나” 하였다. 그 마을의 양반이 이 소리를 듣고, 50대의 볼기를 쳤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광주의 적한과 함께 목을 베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⑤ 광주의 적당을 잡아 신문할 때 청탁의 편지가 분분히 날아들자, 과부가 날마다 관문(官門)에 와서 울부짖었다. 적한이 사형되자, 과부도 목을 매어 죽었다.

‘반양반’적인 조직들

먼저 갑자년(1684년 숙종10년) 왜의 국서라는 것부터 간단히 설명해두자. 이 국서는 한 해 전인 1683년 12월 대마도주가 보낸 것인데, 그 내용인즉 명이 청에 망한 뒤 반청(反淸)운동의 잔존세력으로 대만을 근거로 삼고 있던 정금(鄭錦)이 조선을 침입한다는 것이었다. 이 근거없는 말에 조야(朝野)가 발칵 뒤집혔고, 이 난리판에 불만세력들이 준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의 해독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자료가 어느 한 조직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어떤 조직이 있는가. ①에는 살략계(殺掠契) 홍동계(?動契) 검계(劍契)란 세 가지 명칭이 나온다. 그리고 ②에는 살주계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조야회통’은 적어도 둘 이상의 조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①의 살략계, 홍동계, 검계는 동일한 조직으로 보인다. 습진한다는 것이 숙종실록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주계는 살주란 말에서 보듯이 노비가 주인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검계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조직이 왜 같이 취급된 것인가. 이 조직들은 모두 양반 체제를 위협한다는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④의 조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반 백성의 이야기가 끼어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야회통’의 필자는 반양반적 조직과 의식이면 구분하지 않고 한 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조직은 원래 그 성격이 비밀스럽다. 역사적인 대사건이 아닌 한 기록에 소상히 남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렇다면 검계는 숙종 때의 소탕으로 소멸된 것인가. 뜻밖에도 검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조야회통’의 자료와 동일한 자료가 홍명희의 ‘비밀계’(임형택·강영주 편,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 자료’, 사계절)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원자료는 아니고, 이원순(李源順)이란 사람의 ‘화해휘편’이란 책을 전재한 것인데, 모두 ‘조야회통’과 같고, 다음과 같은 끝부분이 첨가되어 있는 것만 다르다. “검계는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말썽을 피워 포도대장 장붕익(張鵬翼)이 그들을 다스렸다. 검계의 당은 모두 칼자국이 있는 것으로 자신들을 남과 구별했기에 몸에 칼자국이 있는 자를 모두 잡아 죽이자, 마침내 검계가 사라졌다(劍契至英祖朝猶作梗, 捕將張鵬翼治之, 其黨皆以劍痕爲別, 故凡身有劍痕者, 皆殺之, 遂息)”.

영조대에 와서 검계가 다시 소란을 떨었기 때문에 포도대장 장붕익이 일망타진했다는 것이다. 이 자료의 기록자는 숙종의 검계와 영조대의 검계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아쉬운 것이다. 좀더 면밀한 자료 검색이 이루어진다면 혹 모르겠으되, 현재로서는 가망이 없다(향도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장붕익의 검계 소탕은 매우 잔혹하고 철저했던 것 같다. 장붕익의 일망타진으로 검계는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런 비밀조직은 잘라도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조폭이 어디 한번 소탕으로 사라지던가. 알 카포네의 죽음으로 마피아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순조실록에 검계는 다시 한번 몸체를 슬쩍 드러내고 있다. 순조 3년(8월9일) 사간 이동식(李東埴)은 상소에서 검계를 언급하고 있다.

검계의 끈질긴 생명력


0“문무 백관(文武百官)이 게으르고 법강(法綱)이 해이해졌으며, ‘검계(劍契)의 이름’이 나오기에 이르러 풍속이 허물어지고 세도가 무너짐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일종의 무뢰한 무리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黨)을 이루고, 소와 송아지를 팔아서 검(劍)을 차고 다니며 하늘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돈을 추렴하여 개와 돼지를 잡지 않는 날이 없으며, 약탈하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고, 능범(凌犯)하는 것을 장기(長技)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문(朱門)에 횡행(橫行)하여 재상을 꾸짖어 욕보이고, 깊은 규방(閨房)에 돌입하여 부녀자를 때리는 등 분의(分義)를 멸절시키고 기강을 어지럽힘이 거의 여지(餘地)가 없으니 주머니를 털고 상자를 열어 물건을 훔치는 것은 단지 자질구레한 일일 뿐입니다.”

이때의 검계도 과거 숙종 때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검계는 영조 때 사라진 듯하다가 되살아났던 것이다.

순조 3년에 검계의 이름이 다시 나온 것은 도하(都下), 곧 서울의 ‘무뢰배’들이 떼를 지어 승지 최중규(崔重圭)의 집에 돌입(突入)하여 최중규의 아들과 연로한 부녀(婦女)를 구타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순조실록 3년 8월1일). 형조 판서 채홍리(蔡弘履)는 범죄자들을 무겁게 의율(擬律)했어야 하는데도 심상하게 의율하여 파직되었다. 이동식의 상소도 아예 채홍리를 간삭(刊削)하고, 그를 추천했던 이면긍(李勉兢)을 귀양 보낼 것을 청하려고 쓴 것이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검계란 조직이 적어도 숙종 때(1684) 발생하여 순조 때(1803)까지 120년간이란 장구한 시일에 걸쳐 존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순조 때의 검계가 숙종 때 검계의 직접적인 후신인지, 다시 말해 조직의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판단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이상의 자료를 근거로 이들이 모종의 공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알 수 있다.

이들의 소업은 ‘조야회통’과 ‘순조실록’에서 보듯, 약탈·강간·살인이다. 이들은 대개 폭력을 행동강령으로 삼는다. 몸에 칼자국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칼을 차고 다니며, 칼로 자해를 한다는 것도 모두 폭력 숭상의 징표인 것이다. 이들은 순조 3년의 사건에서 보듯 양반 중심의 사회 자체를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극히 반사회적 반체제적 속성을 가진 조직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폭력이 정석종 등이 말하는 바와 같이 뚜렷한 반봉건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폭력성이 증식될 경우 결과적으로 봉건체제에 위협은 되겠지만, 뚜렷한 이념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검계 이야기를 조금 더 상세히 해보자. 영조 때 포도대장으로 유명했던 장붕익의 전기 ‘장대장전(張大將傳)’에 검계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맑은날엔 나막신, 궂은날엔 가죽신

“서울에는 오래 전부터 무뢰배들이 모인 것을 ‘검계’라 하였다. ‘계’란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모인 것을 이르는 말이다.

검계 사람은 옷을 벗어 몸에 칼을 찬 흔적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낮에는 낮잠을 자고 밤에는 나돌아다니는데, 안에는 비단옷을 받쳐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는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삿갓 위에는 구멍을 뚫고 삿갓을 내려 쓴 뒤, 그 구멍으로 사람을 내다본다. 혹은 스스로 칭하기를 ‘왈자’라고 하며,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 쓰는 재물은 전부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다. 양가 부녀자들이 겁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대개가 호가(豪家)의 자식들이어서 오랫동안 제압할 수가 없었다. 장대장이 포도대장으로 있으면서 검계 사람을 완전히 잡아 없애고 발뒤꿈치를 뽑아 조리를 돌렸다.”(이규상, 張大將傳 중 ‘一夢集’)

유난스럽지 않은가. 낮에는 자고 밤에 돌아다니고,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으며,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니, 일상적 행위를 철저히 뒤집는 것이다. 일견 저항의식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희한한 존재인 것이다.  

검계 킬러 장붕익

위의 인용문은 18세기의 문인인 이규상이 쓴 ‘장대장전’의 일부다. 장붕익은 앞서 ‘화해휘편’의 영조 때 포도대장으로 검계를 소탕했다는 바로 그 인물이다. 장붕익은 1725~35년 사이에 포도대장을 지냈다. 포도청에 관한 자료로는 ‘포도청등록’이 있지만, 남아 있는 문헌들은 대개 19세기 것이고, 18세기 초반 것은 없다. 따라서 이 자료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영조대의 유일한 검계 자료일 것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검계는 약 50년 뒤까지 그대로 존속했다. 이것은 아마도 검계 자체가 비밀 조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검계는 매우 비밀스런 조직인데, ‘장대장전’의 작자 이규상은 검계의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이규상은 물론 양반이며, 그것도 명문 중의 명문인 한산 이씨다.

이규상은 이 이야기의 소스를 밝히고 있다. 즉 검계의 구성원이었던 표철주(表鐵柱)가 그 정보원이다. 이규상이 만난 표철주는 ‘집주름’이었다. 집주름이란 요즘의 부동산중개업자다. 이규상이 표철주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 70여 세였으며, 귀가 먹고 이도 빠지고 등이 굽은 늙은이로 쇠로 만든 삽을 지팡이 삼아 짚고 다니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철주란 이름 역시 쇠삽을 짚고 다녀서 붙은 것일 터다.

일흔이 넘은 표철주는 초라한 노인이지만, 소싯적에는 “용감하고 날래며 사람을 잘 쳤으며, 날마다 기생을 끼고 몇 말의 술을 마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 동궁에 있을 때 호위하던 세자궁의 별감(別監)이었다. 늘 황금색 바지를 있었는데, 비가 와서 옷이 젖으면 새 바지로 갈아입을 정도로 깔끔하고 사치스런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규상이 표철주를 만났을 때 그의 미간에는 여전히 젊은 날의 사납고 불평스런 기색이 있었다. 이규상이 표철주에게 물었다.

“너는 마치 미친 사람 같구나. 평생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표철주가 한참 귀기울이고 주름진 입술을 달달 떨더니 몸을 뒤집고 철삽을 세우며 말했다.

“장사또가 죽었는가? 죽지 않았는가?”

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지 않는 것은 장사또를 지하에서 만나기 싫어서지.”

또 검계 사람들의 일을 상세히 전해주며

“적잖은 호한들을 장사또가 죄다 죽여버렸지.”

표철주가 공포에 떠는 장사또는 다름아닌 장붕익이다. 이야기로 보아 표철주는 한참 외지로 도망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어쨌거나 장붕익이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검계의 인물을 잡아 죽인 일이 검계 구성원에게는 일대 공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하게 말해 장붕익은 조폭을 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소탕해버렸던 것이다.

머리를 기른 중

검계에 관한 모든 정보는 여기서 끝난다. 그럼 이야기는 끝인가. 이규상은 검계에 대해 더 언급할 수 있는 중요한 여지를 남겨 두었다. 위의 인용문에 검계 구성원이 자신들을 ‘왈자(曰字)’라고 칭했다는 부분에 주목하자.

별 소용은 없겠지만, 왈자를 사전에서 찾아보자.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은 왈자를 ‘왈짜’라 쓰고, “①왈패 ②미끈하게 잘 생기고 여자를 잘 다루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왈패” 항에서는 “말이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수선스러운 사람. 흔히 여자에게 대하여 쓴다”라 정의하고 있다. ①의 정의는 주로 여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니,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②는 확실한가? 이건 오입쟁이에 한정된 것이다. 별 도움이 안되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왈자에 대해서 나름대로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연암 박지원은 ‘발승암기(髮僧菴記)’라는 글에서 ‘왈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발승암’이란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의 호다. 김홍연(金弘淵)이란 사람의 호가 발승암이고, 여기에 대해 그가 기(記)를 지어준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머리를 기른 중’이라니.

김홍연은 기사(騎射)에 능해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힘은 능히 손으로 범을 잡고 기생 둘을 끼고 몇 장의 담을 넘으며, 녹록하게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집안이 본래 부유하여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쓰고 고금의 법서(法書)와 명화, 금검(琴劍) 이기(彛器) 기화이훼(奇花異卉)를 모으되, 천금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언제나 준마와 명응(名鷹)을 좌우에 두었다.

어떤가. 재물을 분토처럼 쓰며 기방에 드나들고, 힘이 장사인 인간이다. 거기다 예술취향까지 있다. 김홍연은 개성 사람이다. 한말의 문장가 창강 김택영도 개성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개성 사람은 망국의 유민이라 출세를 할 수 없었다. 김택영 역시 이런 연고로 문한(文翰)에 탁월한데도 출세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개성인으로서 자의식이 매우 강했기에 개성 사람 중에 이름을 전할 만한 인물들을 골라 ‘숭양기구전’이란 전기집을 엮었다. 여기에 김홍연이 나오는 것이다.

김홍연의 집안은 부자로 묘사돼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서적과 고서화를 많이 사주며 유업(儒業)을 권했다. 아버지는 아마도 부유한 상인이었을 터이고, 그게 한이 되어 자식에게 과거 공부를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홍연은 학업을 팽개친다. 이유는 과거에 골몰한다는 것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과로 옮긴다. 무예가 탁월했음에도 무과를 포기한다. 말인즉 “시골구석에서 무과에 급제한들 대장군의 인끈을 찰 수 있으랴”라고 하였으니, 개성 출신이라는 것이 출세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름을 남겨 놓는다. 조선의 차별적 체제가 낳은 불우한 인물인 것이다.  

차별이 낳은 반항아들

연암은 김홍연을 ‘활자(闊者)’라 부르고, 활자에 대해서 다시 “대개 시정간에 낭탕우활(浪蕩迂闊)한 자의 칭호로 이른바 협사 검객의 부류와 같은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낭탕우활하다는 말에는 방탕하고 어리석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생업을 돌보지 않고 낭비벽이 심한 성격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왈자와 검계의 관계를 한번 더 따져보자. 김홍연의 경우, 분명히 기존체제에 대해서 부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검계의 구성원처럼 반사회적 인물로 볼 수는 없다. 뒤에 소상히 언급하겠지만, 왈자의 활동공간과 검계의 활동공간은 일치한다. 즉 이규상의 ‘장대장전’에서 검계가 자신들을 ‘왈자’라고 칭하며,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즉 검계나 왈자나 모두 도박장이나 기방, 술집 등 도시의 유흥공간을 주무대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김홍연의 경우 기생을 끼고 담장을 넘었다는 기록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왈자와 검계는 상호 완전히 일치하는 것인가?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시 표철주를 불러오자. 표철주는 연암 박지원의 글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연암은 18세기 서울 시정의 거지 출신으로 상가에서 신용을 쌓아 신의 있는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던 ‘광문(廣文)’ 이야기를 전으로 쓴다. ‘광문자전(廣文者傳)’이 그것이다.

표철주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광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문 이야기는 한시(漢詩)로, 전(傳)으로 변형되어 기록에 남아 있다. 이름을 ‘달문(達文)’이라고 쓴 곳도 있다. 거지였던 광문은 나이가 들자 약국 점원이 된다. 하루는 약국 주인이 자신의 돈궤를 바라보다 또 광문을 쏘아보다 하며 무슨 말을 할듯말듯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눈치를 준 것이 여러 날이었다. 광문은 영문을 몰라 묵묵히 앉아 있을 뿐 그만두겠노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인의 조카가 돈꾸러미를 가지고 찾아왔다.

“지난번에 돈을 꾸러 왔다가 안 계시기에, 제가 방에 들어가서 그냥 가져갔지요.”

주인은 이 말을 듣고 광문에게 사과를 했다.

“내가 소인일세, 점잖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했으니 자넬 볼 면목이 없네.”

주인은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친구와 거래하는 부자, 상인들에게 칭찬했다. 이로 인해 광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광문은 신용 있는 사람이라, 대금업자들도 광문이 보증을 서면 패물이나 가옥 따위의 저당물이 없어도 쾌히 돈을 빌려 주었다.

광문은 서울의 기생가에서도 이름난 사나이였다. 서울의 명기(名妓)로 제아무리 미색이라도 광문이 이름을 내주지 않으면 한푼의 값도 없었다. 밀양 출신 기생으로 검무를 잘 추었던 명기 운심(雲心)이도 내로라하는 오입쟁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광문의 장단에 춤을 추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광문이 어느 날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하옥된다. 물론 무고였기에 다시 풀려난다. 광문이 풀려난 다음 이야기 역시 연암의 붓끝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이 ‘광문자전’ 끝에 붙인 ‘서광문전후’이다. 여기에 표철주가 등장한다.

광문이 옥에서 놓여 나오자 노소 없이 구경을 나가 서울의 저자가 여러 날 텅 빌 지경이었다.

광문이 표철주를 보고 말했다.

“네가 사람 잘 때리던 표망동이 아니냐. 이제는 늙어서 별수 없구나.”

망동은 표철주의 별호였다. 이어서 근황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했다. 광문이 묻는다.

“영성군과 풍원군은 무양하시냐?”

“이미 다 돌아가셨단다.”

“김군경이는 지금 무슨 구실을 다니느냐?”

“용호영의 장교로 다니지.”

“그 녀석 미남자였거든. 몸은 좀 뚱뚱했지만 기생을 끼고 담장을 뛰어넘고 돈쓰기를 똥과 흙처럼 했지. 이제 귀한 사람이 되어서 만나볼 수도 없겠구나.”

광문이 옥에서 나와 맨처음 이야기를 건넨 사람은 표망동이다. 이어 두 사람은 공히 아는 사람들 안부를 묻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사이임이 분명하다. 그것도 그냥 안면만 있는 사이가 아니다. 둘은 한 그룹이 되어 어울린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광문의 행동에는 반사회적인 속성이 없지만, 표철주에게는 반사회적인 속성이 있다. 광문의 “네가 사람 잘 때리던 표망동이 아니냐”는 첫마디는 표철주의 성격을 ‘폭력성’으로 집약하고 있다. 폭력이 사태 해결 수단이라고 믿는 것은 깡패와 조폭의 고유 성격 아닌가. 즉 검계 구성원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인 것이다.  

검계는 왈자의 부분집합

나는 검계와 왈자는 집합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검계는 왈자에 포함된 부분집합이다. 즉 검계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왈자가 되지만, 모든 왈자가 곧 검계는 아닌 것이다. 즉 김홍연과 같은 사람은 왈자지만, 검계는 아닌 것이다. 왈자와 검계는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공유하지만, 그 폭력의 방향이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향할 때, 즉 강간, 강도 등의 행위로 향할 때 검계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조직화할 때만.

그렇다면 다시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왈자가 된단 말인가. ‘게우사’라 불리는 국문소설이 있다. 이것은 이름만 남아 있고 작품은 없어져버린 것으로 알려진 판소리 ‘왈자타령’이다. 여기에 왈자들이 기방에 모인 장면이 나온다.

청루(靑樓) 고당(高堂) 높은 집에 어식비식 올라가니,

① 좌반의 앉은 왈자 상좌의 당하(堂下) 천총(千摠) 내금위장(內禁衛將) 소년 출신 선전관(宣傳官) 비별랑(備別郞) 도총(都摠) 경력(經歷) 앉아 있고,

② 그 지차 바라보니, 각 영문(營門) 교련관(敎鍊官)의 세도(勢道)하는 중방(中房)이며, 각사 서리(書吏), 북경(北京) 역관(譯官), 좌우(左右) 포청(捕廳) 이행군관(移行軍官), 대전별감(大殿別監) 울긋불긋 당당홍의(堂堂紅衣) 색색이라.

③ 또 한편 바라보니 나장(羅將)이 정원사령(政院使令) 무예별감(武藝別監) 섞여 있고, 각전시정(各廛市井) 남촌한량(南村閑良)

④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선소리 송흥록이 모흥갑이가 다 있구나(‘게우사’: ‘한국학보’65, 일지사, 1991년)

① ② ③ ④로 나눈 것은 이들의 신분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①은 무반으로서의 양반이다. 원래 양반이 기방에 드나드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반의 경우이고, 무반은 세상 물정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로 출입이 가능하였다. 이들은 양반 중에 왈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뭐라 해도 왈자의 중추 세력은 역시 ②와 ③이다. 이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기술직 중인이 있다. 북경에 드나드는 역관(譯官)인데, 이들은 의관(醫官)과 함께 중인의 대표적인 존재다. 역관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에 드나들면서 무역을 하기 때문에 부자가 많다. 둘째 각사 서리(書吏)가 있다. 곧 서울 중앙관서에 근무하는 경아전(京衙前)이다. 경아전은 중인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간계급이다.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쓰는 사람들

그 다음 ‘각 영문 교련관의 세도하는 중방’이란 대개 군대의 장교를 말한다. ‘포청 이행군관’은 포교(捕校)인 것같고, 나장(羅將)은 의금부 나장을, 정원 사령은 승정원 사령을 말한다. 나장과 사령은 원래 다른 관청에도 있고 또 천역(賤役)이지만, 의금부 나장과 승정원 사령은 사회적 위상이 경아전과 같다. 대전별감은 대전, 곧 임금 주위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며, 무예별감은 임금의 호위무사다. 각전시정이란 서울 시전의 상인이다. 상인들 역시 서리와 같은 사회적 위상을 지닌다. 남촌한량이란 서울 남산 기슭에 주거하며 무과를 준비하는 자란 뜻이지만, 그것의 정확한 사회적 의미를 밝히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②와 ③에 등장하는 부류는 거개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조선사회의 중간계층이다. 여기서 꼼꼼히 따질 수는 없지만, 대개 서로 통혼(通婚)을 할 수 있는 그런 부류로 보면 될 것이다. 왈자는 대체로 조선시대의 중간계층을 모태로 하여 나온 존재들로 보면 무방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양반도 일부 끼어들고, 중간계층 아래의 상민도 일부 끼어들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 왈자 패거리의 특징이다.

왈자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가. ‘서광문전후’의 광문과 표철주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광문이 다시 표철주에게 말하기를,

“너도 이제 늙었구나. 어떻게 먹고 사느냐?”

“집이 가난해서 집주름이나 하고 지낸다네.”

“너도 이젠 살았구나. 어허! 옛날 집 살림이 여러 만금이었지. 당시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지금 그 투구가 어디 갔느냐?”

“이제야 나는 세정(世情)을 알게 되었다.”

광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도 목수질을 배우면서 눈이 어두워졌구만.”

표철주는 이규상이 말했던 것처럼 집주름이다. 그러나 젊어서의 표철주는 살림이 ‘여러 만금’이었고, 별명이 ‘황금투구’였다. 표철주는 원래 갑부였던 것이다. 왈자를 언급하는 자료들은 왈자가 대체로 부유한 축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광문이 표철주에게 안부를 물었던 용호영, 장교를 다니는 김군경 역시 ‘돈쓰기를 똥이나 흙처럼’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연암이 직접 왈자라고 불렀던 김홍연의 경우도 ‘집안이 본래 부유’하여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쓰고, 골동과 서화를 수집했던 인물이었다.

‘무숙이타령’(‘게우사’ ‘왈자타령’)의 주인공 무숙이는 ‘대방왈자’다. 이 소설은 무숙이가 새로 서울에 진출한 평양기생 의양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무진장 써대며 갖은 사치와 유흥판을 벌이다가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의양이의 지혜로 회개한다는 내용이다. 대방왈자 무숙의 출신 성분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중촌의 장안갑부’다. 중촌은 지금 관철동 일대로 주로 역관 의원 등 중인과 시전 상인 등 서민 부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어쨌거나 장안의 갑부 대방왈자 무숙은 유흥과 사치에 돈을 쏟아 붓는다. 그는 오로지 돈 쓰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기생을 장악한 왈자

요컨대 왈자에게는 돈이 풍부하여 무진장 써대는 그런 속성이 있다. 물론 그들이 써대는 돈이 모두 자신만의 재산은 아닐 것이다. ‘장대장전’의 “쓰는 재물은 모두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라는 증언에 의하면, 이들이 써대는 돈은 어떤 경우 살인 강도 행각으로 얻은 것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돈을 쓴다는 것은 사실 돈을 쓸 곳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치와 낭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과 상품 따위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정인들의 사치와 낭비를 가능하게 했던 전제 조건이란 무엇인가. 앞서 ‘게우사’의 왈자들이 기방에 모인 것을 묘사한 대목을 인용했는데, 기방이 그 전제 조건의 하나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국가 소유다. 조전전기에는 오로지 양반만 그들의 예능과 성(性)을 소비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에 예속되어 있던 기녀는 전쟁 전의 제도가 붕괴하는 틈을 타서 시정으로 진출했다. 기녀들은 국가에 복역(服役)하면서 한편 시정에 기방을 열고 자신들의 예능과 성적 서비스를 팔았던 것이다.

이 기방을 장악한 것이 곧 왈자들이다. 이들은 기방의 운영자이기도 했고, 동시에 고객이기도 하였다. 다시 ‘서광문전후’의 광문과 표철주의 대화를 읽어보자. 앞서 김군경에 대한 언급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분단(紛丹)이는 어디 갔지.”

“이미 죽었다네.”

광문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전에 풍원군(豊原君)이 밤에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하고 나서 오직 분단이만 데리고 잔 일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서 풍원군이 입궐(入闕)하려고 서두는데 분단이가 촛불을 잡고 있다가 잘못해서 초피 모자를 태웠것다. 분단이가 황공해서 어찌할 줄 모르자 풍원군이 웃으며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로구나’ 하고 즉시 압수전(壓羞錢) 오천 푼을 얹어 주더군. 내가 그때 수건을 동이고 난간 밑에 지키고 있었는데 시꺼먼 것이 우뚝 선 귀신처럼 보였겠지. 마침 풍원군이 지게문을 밀치고 침을 뱉다가 섬뜩 놀라 분단에게 몸을 기대면서 ‘저 시꺼먼 것이 웬 물건이냐’고 소곤거리더군. 분단이 ‘천하에 누가 광문을 모르오리까’라고 아뢰었지. 풍원군은 빙긋이 웃으며 ‘저 사람이 너의 후배(後陪)냐. 불러들여라’ 하고 내게 큰 술잔을 주셨지. 그리고 당신은 홍로주(紅露酒) 일곱 잔을 마시고서 초헌(?軒)을 타고 가시더군. 이게 모두 지나간 옛날 일이야.”

“서울의 기생 중에 누가 제일 유명하지.”

“소아(小阿)란다.”

“그 조방(助房)군은 누구냐?”

“최박만(崔撲滿)이지.”

기생이야기라니, 감방에서 이제 막 나온 인물이 나누는 이야기 치고는 좀 한심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의 주된 활동공간이 바로 기방이었기 때문에 기생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후배’ ‘조방군’이란 말이다. 이건 바로 기부(妓夫)를 말한다. 기부는 기생의 서방으로 대개 기녀의 매니저 노릇을 한다. 조선후기의 기생은 대개 지방에서 올라온다. 기생이 서울에 올라오면 당장 의식주 해결에 곤란을 겪게 되는 바, 기부는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생을 장악해 기생의 영업으로 발생하는 이익 일부를 차지한다.

모든 사람이 다 기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별감, 포도청 포교, 의금부 나장, 승정원 사령 등 몇몇 제한된 부류만 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기방의 고객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왈자들이 곧 기방의 운영자이고 또 고객이었던 것이다. 앞서 김홍연은 기생을 둘이나 끼고, 김군경이 뚱뚱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기생을 끼고 몇 장의 담을 뛰어넘었다고 한 것은 모두 이들과 기방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해 주는 이야기다.

왈자와 기생 간 불가분의 관계를 말해 주는 증거가 ‘춘향전’의 이본(異本)인 ‘남원고사’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던 춘향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자 남원의 왈자들이 몰려들어 춘향을 찾아가는 대목이 나온다. 옥문 앞에서 왈자들이 소란을 떨자 옥사장이 나무란다.

옥사장(獄鎖匠) 하는 말이,

“여보시오. 이리 구시다가 사또 염문(廉問)에 들리면 우리 등이 다 죽겠소.”

한 왈자 내달으며 하는 말이,

“여보아라 사또 말고 오또가, 염문 말고 소곰문을 하면 누구를 날로 발기느냐? 기생이 수금(囚禁)하면 우리네가 출입이 응당이지 네 걱정이 웬 일이니?”

남원의 왈자라고 했지만, 읽어보면 서울 왈자들이다. 그것은 “기생이 수금(囚禁)하면(옥에 갇히면) 우리네가 출입이 응당”이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다. 기생과 왈자가 밀착된 관계가 아니면 이런 발언이 나올 수 없다.  

오로지 노는 것이 소업

기방은 생산 공간이 아니라, 유흥 공간이다. 놀고 마시는 곳이다. 왈자들의 소업은 오로지 ‘노는 것’일 뿐이다. 노는 것에서 도박을 빼놓을 수 없다. 이규상은 왈자에 대해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도박장이라 해서 라스베이가스의 도박장이나, 강원랜드, 혹은 합법화된 호텔의 카지노는 아닐 터이다. 중국만 해도 송나라 때 전문 도박장이 생기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런 공식적 도박장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정식 도박장의 존재 여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도박판이 벌어지면 어디나 도박장이 된다.

조선후기는 도박이 비상하게 발달한 시대였다. 투전, 골패, 쌍륙 등 온갖 종류의 도박이 성행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에서 숙종 연간에 수입된 투전이 엄청난 기세로 유행하였다. 저 지체 높은 양반에서부터 하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투전 열풍에 휩싸였음은 여러 문헌이 증거하는 바이다.

아니 투전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갑오니 장땡이니 하는 것도 원래 투전의 족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실례를 한번 보자. 김양원(金亮元)이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조희룡(趙熙龍)과 절친한 사이였다.

조희룡이 누군가? 19세기의 빼어난 서화가이자,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이런 사람의 친구이니, 뭐 좀 고아한 사람으로 알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조희룡은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김양원전’을 지었는데, 그 첫머리가 이렇다.

김양원은 그 이름은 잊어버렸고, 자로 행세했다. 젊어서 유협 노릇을 했는데, 계집을 사서 목록에 앉혀 술장사를 했다. 허우대가 크고 외모가 험상궂어 기생집과 도박장을 떠돌아다녔지만, 기가 사나워 누구하나 그를 업신여기지 못했다.

행태를 보아하니, 김양원은 왈자다. 그는 뒷날 시인으로 자처하고 시에 골몰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오로지 기방과 술집, 도박판을 쫓아다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남원고사’에도 왈자들은 춘향을 찾아가기 전에 골패노름을 한참 벌인다. 도박장 따위를 전전하는 왈자의 생리가 짐작이 되시는지.

주먹을 휘두르고 기방과 술집, 도박판을 쫓아다니는 왈자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는 것은 근엄한 도덕주의자들의 눈에는 정말 쓸데없는 언어의 낭비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왈자에게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왈자는 조선후기 민간 예능의 주향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남원고사’를 보면 왈자들이 춘향이를 찾아가면서 여러 행각을 벌이는 썩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민간예능의 주 향유자

왈자들은 먼저 노래를 부르는데, 선소리와 ‘신선가(神仙歌)’ ‘춘면곡’ ‘처사가’ ‘어부가’ 등이 주 레퍼토리다. 선소리는 ‘서울 중심의 경기요와 서도 소리의 속된 노래의 일종’이며, ‘신선가’는 경기잡가이고, ‘춘면곡’ ‘처사가’ ‘어부사’는 십이가사의 레퍼토리다. 이 노래들은 서울의 기방에서 오입쟁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것들이었다. 왈자들은 이런 민간 가요의 주 향유자였던 것이다. 나는 조선후기의 음악을 비롯한 예능이 이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실제 왈자들은 연예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앞서 인용했던 ‘게우사’에서 기방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노래 명창 ‘황사진’ 가사 명창 ‘백운학’ 선소리의 ‘송흥록’ ‘모흥갑’이었다. 황사진과 백운학은 알 길이 없지만, 송흥록과 모흥갑은 국문학사를 장식하는 판소리 광대들이다. 이들 역시 왈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 증거로 ‘게우사’의 주인공 무숙이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창한 유흥판을 벌이면서 삼남의 제일가는 광대, 산대놀음을 하는 산대도감의 포수와 총융청 공인, 각 지방의 거사 명창 사당패를 모으고, 우춘대·하은담·김성옥·고수관·권삼득·모흥갑·송흥록 등 22명의 명창 광대를 불러들인다.

물론 과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장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그 증거로 가사 ‘한양가’의 ‘승전(承傳)놀음’을 들 수 있다. 승전놀음은 왈자의 한 부류인 대전별감이 서울의 기생을 총동원하여 거창하게 벌이는 놀이판인데, 별감은 금객, 가객 등을 불러 모으고 있다. 왈자들은 연예인의 예능을 소비하는 주체였으며, 돈 이외에도 그들을 불러올릴 권력이 있었던 것이다.

왈자는 책 읽고 공부하는 그런 세계와는 팔만구천리나 떨어진 존재다. 왈자를 기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력 폭력이다. 말이 아니라 주먹이 통하는 세계에 살던 인간인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왈자와 검계는 집합의 관계다. 왈자가 전체집합이라면, 검계는 그 속에 포함된 부분집합이다. 그들의 폭력이 반사회성을 띠면 검계가 되었던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이들은 주로 먹고 마시고 노는 데 골몰하던 부류다. 조선후기 시정 공간을 북적대게 만든 흥미로운 존재인 것이다. 왜 이런 부류가 나타나게 되었던가. 조선사회는 상업과 농업 분야의 발달로 약간의 경제적 잉여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경제적 잉여를 바탕으로 사치와 유흥이 발달할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앞서 살폈듯 왈자란 대개 중간계층을 모집단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이 부를 축적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당시의 사회 체제로 보아, 과거를 통해 고급관료가 되거나 학문을 하여 명예를 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이 유흥으로 빠진 것은 거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조선은 조용한 아침이란 이미지와는 결코 맞지 않는 나라였다. 검계가 살인과 강간과 강도를 저지르고, 왈자가 술집과 기방과 도박판에서 왁자하게 야단법석을 떠는 곳이었다. 조용하긴 뭐가 조용하단 말인가.   (끝)


   강명관
● 1958년 부산 출생
● 1981년 부산대 국어과 졸업
● 성균관대 한국한문학 박사
● 저서 :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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