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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적
 관리자  01-19 | VIEW : 3,222
[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① | 群盜]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 누구인가


태조 이성계의 강화도 회군, 세종대왕의 치적, 단종애사, 연산군의 비극,
여인천하, 사도세자의 죽음, 그리고 강화도령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아는 조선역사는 왕들의 역사요, 지배자의 역사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민(民)은 살아 있었고 묵묵히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민(民)의 생활사나
애환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신동아’는 지배 중심의 역사가
철저히 무시했지만 면면히 살아있었던 서민들의 삶과 문화를 발굴해보기로 했다.
강명관 교수는 ‘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공간’이라는
책을 저술한, 조선시대의 문학과 예술, 서민의 삶에 관심이 많은 소장학자다.
조선사회의 이면사 그 첫회는 사회의 골칫거리였지만
백성들의 영웅이기도 했던 군도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법은 절도를 금한다. “도둑질하지 않는다”는 십계 중 일곱번째 계명이다. 고조선의 팔도금법에도 있다. “도둑질을 하면 노비로 삼는다.” 절도가 용인되면, 즉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지 않으면, 사회 자체가 붕괴된다. 그러기에 절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사회적 금기다. 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절도에 대한 은밀한 욕망이 있다. 절도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많은 먹이를 획득하고자 하는 생명체의 생존욕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금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절도를 향한 욕망은 거침없이 드러난다. 1992년 LA 폭동 때 우리는 그 야수적 욕망의 분출을 목도한 바 있다.

절도는 범죄지만, 인간은 한편으로 그 범죄를 합리화한다. 절도의 합리화는 부조리한 사회, 주로 재화의 분배에 있어 불공정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절도 행위자인 도둑을 찬미한다. 나는 고위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부정한 축재와 부잣집 담장을 넘는 밤손님의 행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그 도둑이 넘었던 담장이 부정한 돈으로 쌓아올려진 것이라면, 월장(越墻)은 도리어 미화되고 찬양된다. 혹 그 도둑이 자신의 약탈물을 달동네에라도 던져주었다면, 그는 ‘의적(義賊)’으로 다시 태어난다. 급기야 그는 전설이 되고 소설이 되고, 가난한 우리는 일지매에 빠져들고 장길산에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도둑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나는 조선시대의 도적에 대해 내가 아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조선시대 도둑에 관한 연구는 정치사, 경제사, 제도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사 연구의 여담에 해당한다. 물론 몇몇 진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논문으로 쓰여진 것이라 너무 딱딱하고 근엄하다. 나는 그런 엄숙함이 싫다. 좀더 편하게 접근하고, 기존 논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조선시대의 도둑에는 여러 스타일이 있다. 혼자 활동하는 도적이 있는가 하면, 떼를 지어 다니는 군도(群盜)도 있다.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일시적으로 도적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기들 말로 수백년 유구한 전통이 빛난다는 그런 도적 집단도 있다. 구복(口腹)을 위해 고민 끝에 도덕심을 눌러버리고 칼과 도끼를 들고 나서는 생계형 도적이 있는가 하면, 기성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저항하는 각성한 도적도 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순진무구한 도적이 있는가 하면, 종적을 종잡을 수 없는 신출귀몰한 그런 도적이 있다.  


전통 자랑하는 群盜

어느 쪽도 재미가 있다. 하지만 도둑도 일종의 직업이니만큼 좀더 전문적이고 세련된 형태가 좋지 않겠는가? 굳이 예를 들자면 일지매(一枝梅) 같은 경우다.

조수삼(趙秀三·1762~1849)은 자신의 독특한 저작 ‘추재기이(秋齋紀異)’에서 일지매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주 짧막한 것이기에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지매는 도둑 중의 협객이다. 매양 탐관오리들의 부정한 뇌물을 훔쳐 양생송사(養生送死)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처마와 처마 사이를 날고 벽에 붙어 날래기가 귀신이다. 도둑을 맞은 집은 어떤 도둑이 들었는지 모를 것이지만 스스로 자기의 표지를 매화 한 가지 붉게 찍어 놓는다. 대개 혐의를 남에게 옮기지 않으려는 까닭이었다.


매화 한 가지 혈표(血標)를 찍어 놓고 / 부정의 재물 풀어 가난한 자 돕노라. / 때 못 만난 영웅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 오강(吳江) 옛적에 비단돛이 떠오놋다.

쪻오강의 비단돛이란 중국 삼국시대 감녕(甘寧)의 고사. 한때 적도(賊徒)로 횡행하여 오강에서 비단돛을 달고 다녔다 한다.”(이조한문단편선(중), 일지사, 1978, 339면)


일지매는 잡히지 않는다. 완벽하다. 게다가 매화꽃까지 남겨 남에게 피해가 가게 하지 않는다니 멋있지 않은가? 나는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보다 본 적도 없는 일지매의 붉은 매화에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느껴진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신가. 또 탐관오리의 부정한 재물을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니, 민중의 벗인 의적이다. 이런 도둑은 당연히 찬양의 대상이 된다. 조수삼은 그를 “때를 못 만난 영웅”이라고 하지 않은가.

일지매와 같은 유형의 도적으로 ‘아래적(我來賊)’이 있다. ‘어수신화(禦睡新話)’란 책에 있는 이야기다. 어떤 도적이 무엇을 훔치고 나면 반드시 ‘아래(我來·나 왔다 간다)’라는 두 글자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하나 아래적은 일지매보다 한 등급 밑이다. 의적이 아닌데다가 포도청에 잡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 기지를 써서 탈출하지만 말이다.

일지매와 아래적은 혼자 활동하는 도둑이다. 그 건너편에 무리 도둑인 군도(群盜)가 있다.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된다(聚則盜, 散則民)’는 말처럼 중세의 군도는 기본적으로 백성, 농민이다. 중세의 사회생산은 전적으로 농업생산이다. 농민이 농토를 떠나면 사회는 붕괴한다. 지배하는 자들은 언제나 거룩한 이념(조선으로 치면 주자 성리학)을 내세워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지만, 그 이념의 속내는 매우 간단하다. 그 이념이란 지배층은 일하지 않고 농민만 뼈 빠지게 일해야만 하는 ‘비합리’를 ‘합리’로 분식(粉飾)한 어려운 말의 덩어리다.

물론 이념은 언제나 지배층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켜진 시대는 유사 이래 없었다. 지배하는 자들의 욕망은 언제나 차고 넘친다. 그리하여 지배층의 욕망이 농민을 지나치게 압박하면, 달리 말해 농민을 지나치게 쥐어짜면 농민은 토지를 떠난다. 지주의 토지 침탈, 과도한 세금 등으로 인한 농민의 토지 이탈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항시 일어나는 일이었다.


왕조의 건국 초기 짧은 안정기를 벗어나면 농민의 삶은 언제나 괴로웠다. 여기에 흉년과 전염병이란 구체적 계기가 발생하면 토지로부터의 유리(遊離)는 필연적이다. 토지를 떠난 농투성이들은 갈 곳이 없다. 떠돌다가 죽든지 아니면 다시 고향을 찾기 마련이다.

이와는 달리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가 있다. 도적이 되는 것이다. 유개(流쾬)와 군도는 언제나 연관되어 있다. 18세기의 문인 이규상(李奎象)은 ‘우옹책(迂翁策)’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연래에 떠돌이 거지(流乞)들이 없는 때가 없었는데, 금년 가을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허다한 떠돌이 거지들은 아마도 무리를 불러 모아 (도둑의) 근거지를 마련했을 것이다.”

이처럼 토지로부터 이탈한 유민이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군도로 변하는 것이다.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했을 때 조직하는 군도의 형태도 퍽 다양하다. 영조17년 조문벽(趙文璧)이란 사람이 영춘역(迎春驛)으로 귀양을 가는데, 이유인 즉 그가 숙천군수(肅川郡守)로 있을 때 평안도의 극적(劇賊) 지용골(池龍骨)을 잡았다가 놓친 죄 때문이었다. 이해에 관동(關東)·관북(關北)·관서(關西)·해서(海西) 4도(道)에 기근이 들었고, 토지를 떠난 유민이 무리를 이루어 돌아다녔다. 서울에 있는 무리는 ‘후서강단(後西江團)’ 평양(平壤)에 있는 무리는 ‘폐사군단(廢四郡團)’ 재인(才人)이 조직한 무리는 ‘채단(彩團)’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무리는 ‘유단(流團)’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기회를 틈타 도둑이 되어 부고(府庫)를 습격해 탈취하였으나, 장리(將吏)가 체포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므로 조정의 근심거리가 되었으나 끝내 잡지를 못했다고 한다.(영조실록 17년 4월8일) 이 도적집단은 기근이라는 특정한 계기로 발생한 것이고, 또 그들의 출신지역이나 신분, 경제적 처지에 따라 각각 달리 집단화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습 도둑집단의 출현

대개 기근으로 발생하는 유민은 떠돌다 죽거나, 어렵게 살아남으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일정한 근거지를 가진 세습적 도둑집단도 있다. 앞서 잠시 인용한 이규상의 ‘우옹책’은 도둑의 방지책을 서술한 것인데, 이 글에서 그가 든 근거지를 가진 세습적 도둑집단을 보자. 그가 지목하는 군도는 충청도 아산 근처의 한 큰 촌락이 근거지다. 다른 마을은 도둑이 침입해도 이 마을만은 안전하다. 농사도 짓지 않고 상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거주민은 늘 호의호식을 하면서 지낸다. 근래 도둑을 맞은 촌락들도 대개 이 마을의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 이 마을 사람들이 절도와 관련되어 잡혀도 금방 풀려 나온다. 이규상은 이런 점들을 들어 이 마을이 도적촌이며, 철저히 추궁하면 도둑의 소굴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우옹책’의 도둑촌은 군도의 한 가지 스타일일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산채가 있고 파수를 보는 그런 도둑집단과 다를 뿐이다. 실제 군도도 스타일이 여럿이라는 것만을 말해두려고 예를 들었던 것이다.


내가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군도에 관한 것이다. 일지매 같은 멋이 넘치는 도둑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워낙 종적이 묘연하다. 자료가 없는 것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군도라면 다르다. 사료가 꽤 남아 있다. 이미 문학화된 군도 이야기도 많이 전한다.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로, 소설로 유포되고 있다. 도둑도 홍·임·장 정도의 규모를 가진 군도라야 역사적 중량감을 갖고 장편소설이 되는 것이다. 한국사학계에서 군도에 관한 연구물이 많지는 않지만, 읽어봄직한 것이 꽤 있다. 역사적 평가도 대체로 내려져 있다. 내가 여기에 무슨 말을 더할 것인가.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군도의 내부조직에 관한 것이다. 이건 아직 별로 보고된 적이 없으니 이야기해봄직하지 않은가.

먼저 한문 단편 ‘홍길동 이후’라는 작품을 읽어보자. 원 출전은 ‘청구야담’이다.(번역은 ‘이조한문단편선(중)’에 실려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심진사가 별난 인물이다. 명문 사족이었으나 진사에 오르자 과거공부를 폐해버렸다. 누가 이유를 물으면 껄껄 웃고 말 뿐이었다. 과거공부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니, 정말 호쾌한 사람 아닌가.

과거를 폐한 심진사의 유일한 취미는 말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것이었다. 답답한 세상 시원하게 달려보자는 심사였던가. 그는 귀족 고관 집에 좋은 말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타보기를 청했고, 또 말 주인들은 심진사의 명성을 이미 들었던 터라 선선히 말을 빌려주었다. 어느 날 심진사는 자기 집앞에 좋은 말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한번 타보자 하니 허락을 하였고, 말에 올라타자 말은 한달음에 황해도 금천(金川)까지 달린다. 집에 돌아올 길이 막연한데, 또 어떤 이가 말을 타고 간다. 심진사가 타보자 했더니 허락을 하였고, 올라타자 말은 정말 지도에도 빠진 그런 심산유곡으로 냅다 달려간다. 도착해보니 도둑들의 산채가 아닌가. 도둑들은 말 두 필로 심진사를 ‘초빙’했던 것이다. 계략으로 심진사를 데려온 도적의 대표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홍길동의 후예”

“이 산채는 홍길동 대장으로부터 우금 백여 년을 내려왔습니다. 그 사이 역대 대장들이 모두 지모가 절륜한 분들이어서 군민이 안온히 지내왔습지요. 그러다가 작년에 와서 전의 대장께서 작고하시자 군무가 계통을 잃었습니다. 저희들은 방방곡곡에 대장으로 모실 만한 분을 물색하였는데 나으리보다 훌륭한 인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준마 한 필로 나으리를 금천까지 유치해서 다시 이곳으로 모셔온 것입니다. 나으리께서는 특히 이곳 산채의 수많은 무리들을 사랑하시와 충의대장군의 인끈을 맡아주옵소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 심진사는 쾌히 청을 받아들여 도적의 두령이 되고, 지략으로 해인사와 안동 호곡의 김진사, 함흥성을 털어 산채를 안정시킨 뒤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재미있는 군도담이다.  


하지만 내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도적 입에서 나온 ‘홍길동 대장’ 이후로 백여 년을 내려왔다는 산채의 전통이다. 물론 허구일 것이다. 하지만 이 허구에는 모종의 역사적 내력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 이제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실천문학’ 통권 7호(1985년 여름호)에 ‘민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소설가 이문구의 글이 실려있다. 부제는 ‘김지하의 사상여행 제2회’다. 일종의 여행기다. 김지하와 함께 우리 땅에 서려 있는 민중사상의 저변을 찾아보자는 것이 기획의도인 듯하다. 7호의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분들이다. 천이두·송기숙·최창조·황석영·임진택·장선우·송기원 등이다. 여기에 주목해야 사람 둘이 더 있는데, 송명초·보원이란 스님 두 분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민중사상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두 분 스님네 입에서 흘러나온 ‘당취(黨聚)’의 존재에 마음이 비상하게 끌리는 것이다.

계룡산 갑사에 힘센 중이 많이 나와 그 기를 꺾으려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갑사를 중건하면서 절이 원래 있던 자리에 변소를 지었다는 보원 스님의 말에, 김지하는 힘센 중이라면 조선조 내내 산야에 출몰했던 당취, 즉 땡추들의 소굴이라도 됐단 말이냐고 묻는다. 이게 빌미가 되어 당취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보원 스님 이야기의 골자를 추리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땡추(黨聚)에는 금강산 땡추와 지리산 땡추의 양대 산맥이 있다. 이 양대 산맥이 형성된 시기를 보원 스님은 조선초로 잡고 있다. 조선 초 강력한 배불정책으로 불교의 종파들은 세종 연간에 선·교 양종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그 이전에 조계·천태·총남·화엄·자은·시흥·중신 등 7개 종파로 정리할 때 여기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버린 종파가 당취로 변했다는 것이다. 지리산 땡추는 선·교 양종의 통합에 순응했던 종파들 중에서도 조선의 불교정책에 대해 환멸을 느낀 나머지 금강산파에 통합을 희망했으나, 금강산파가 국책(國策)에 야합했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따로 독립하여 지리산 당취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들 땡추는 반조선적, 즉 반체제적 조직이다. 보원 스님의 말을 들어보자.

“창업 이래 배불정책만 더욱 확실해지니 더 이상 바라볼 게 없음을 미리 내다보고 전조(前朝)의 전철을 밟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왕권의 주변세력, 혹은 허울 좋은 호국불교 따위에 대한 부정적인 자기 평가에 따라 제도적인 종교정책을 무시하고 식읍적(食邑的)인 국토보다 중생의 불국토를 건설하자는 취지로, 일테면 재야불교(在野佛敎), 민중 속의 생활불교를 택했던 건데 이게 바로 금강산 땡추의 연원이에요.”

다음은 송명초 스님의 말이다.

“땡추는 백집 이백집 죙일 쏘댕기메 동냥해갖구 술집에 앉어 한입에 털어넣는 것이 땡춘디 … 그러나 이전 땡추덜은 억불정책에 대한 반항, 심에 밀려 산중으로 쫓긴 자긔덜 자신에 대한 반성, 신앙적 열정의 민중 보급로 두절 등 암울한 환경에 대한 저항으로 결국 반체제가 된 무리였이유. 그래서 객승 비젓허게 꾸미구서 때로는 산적패의 통신망두 되어 주구 때루는 항간에 떠돌메 민중교화에두 나스구 … 일종의 시대적 불교의 의붓자식덜이었슈.”  


산적패의 통신망 땡추


조선시대에는 유난히 군도(群盜)의 출현이 잦았다. 사진은 드라마 '임꺽정'의 한 장면.  
요약하자면, 당취는 조선체제를 부정하는 의식에 가진 자를 섬기는 귀족불교·호국불교가 아니라 민중을 위한 재야불교를 추구하는 반체적 승려집단인 것이다. 물론 보원 스님의 말에 나오는 땡추의 행실은 외견상 우리가 알고 있는 돌중, 스님에 대한 비칭인 땡추(땡초)에 가깝다. 또 땡추 혹은 땡초가 과연 당취란 단어의 음(音) 변화에서 온 것인지도 의문이다. 이 문제는 일단 덮어두자.

그런데 군도 이야기를 한다면서 필자는 왜 뜬금없이 땡추를 들먹이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송명초 스님의 말 중에 땡추가 “산적패의 통신망도 되어주고”라는 부분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땡초=산적이란 등식은 아니지만 양자간에 일정한 연관이 있음을 내포하는 말이다. 보원 스님의 말이 여기에 약간 덧붙는데, 다음과 같다. 즉 땡초는 민중교화만이 아니라 민중구제까지도 겸업했다는 것인데, 그 민중구제의 수단이 바로 산적질이다. 산적과 결탁해서 낮에는 동냥하며 떠돌다가 관가와 토호들을 염탐하고, 밤에는 자기가 낮에 동냥한 것을 고을의 없는 사람들에게 풀어먹이곤 했다는 것이다. 땡추는 적어도 산적의 통신망이 되거나 아니면 산적질을 하기도 했던 그런 집단인 것이다. 우선 이 점을 염두에 두자.

조선 체제에 대한 저항조직의 하나로 송명초·보원스님이 전하는 당취의 존재는 너무나 흥미롭다. 그러나 두 분 스님네 말이 얼마나 정확성을 갖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두 분 스님의 말씀 역시 전언에 의한 것일 테니 말이다. 보원 스님 자신도 “당취결사(黨聚結社) 자체가 비밀이었으니 문헌이 남아 있을 리 없고, 당취들도 그믐에 달지듯이 증빙을 두지 않았으니 ……”라며 스스로 문헌에 의한 증거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송명초 스님은 “시방 살아있는 최혜암 스님도 그 일당(당취의 일당)의 하나”였고, 청담 스님도 한 3년 따라다녔다고 증언한다. 이 모든 것이 산중의 전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혜암 스님 역시 송명초 스님이 이 말을 할 때 백세가 넘어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하고, 청담 스님도 열반하신 지 오래다. 이제 산중에서 더 상세한 전승이 남아 있을까 의문이다.

나는 공부하는 틈에 이 전승을 입증하는 문헌 증거가 혹시 나오지 않나 하고 엉뚱한 기대를 하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황성신문’에서 우연히 유관한 자료를 하나 찾게 되었다. ‘황성신문’ 1908년(융희 2년) 9월23일 자의 잡보에 ‘적단소탕(賊團剿蕩)’이란 기사가 그것이다. 내용은 경시청(警視廳)에서 2월7일부터 6월까지 화적당(火賊黨) 86명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도둑을 잡은 것이 아니고, 한 덩어리의 화적을 하나씩 잡아들인 결과다. 이어 9월25, 26일 양일간에 ‘적단(賊團)의 전말(顚末)’이란 기사가 실리는데, 여기에 화적단의 조직에 관한 언급이 있다. 먼저 씨앗이 될 만한 이야기부터 인용한다. 현대어로 약간 풀어 쓰면 이렇다.

“경시청 신문계(訊問係) 순사부장(巡査部長) 삼육치(森六治)씨가 우리나라 화적의 뿌리를 상세히 알아내는 데 종사한 지 5, 6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 2월7일 오후 3시에 중부(中部) 전동(典洞)에 사는 안만수(安晩洙)씨의 별실(別室) 생일에 강도 7명이 돌입하여 재산을 약탈한 일을 쫓다가 같은 달 28일에 남문 밖 동막(東幕) 객주(客主) 홍재현(洪在鉉)의 집에서 승도(僧徒) 송학(松鶴)과 같은 무리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왜 일본인 순사냐 하면 이때는 벌써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통감부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요는 안만수란 사람 첩의 생일에 강도 7명이 돌입해 재산을 털었던 바, 일본인 순사의 추적 끝에 같은 무리 20명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설렁탕 한 그릇에 들통난 조직

삼육치는 계속 추궁하였으나 도적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고문을 가했을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럼에도 함구로 일관하자 작전을 바꾼다. 순사부장 가납무평(加納武平)이 송학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옷을 벗어 입히고, 먹을 것을 시켜 먹이는 등 ‘인간적인’ 대우를 한다. 송학은 감동하여 입을 연다. 달리 말해 송학은 설렁탕 한 그릇에 동료를 판 것이다. 그의 배반으로 86명의 동료가 잡혔다.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이 아닌가. 송학이 설렁탕 한 그릇에 털어놓은 것이 무엇인가. 화적단의 조직이다. 이건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황성신문’이 지면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화적단의 조직은 내사(內社)와 외사(外社)로 나뉜다. 송학의 말에 따르면 내사는 “거금 500년 전에 강학(强虐)이 무쌍한 승려 홍길동이란 자가 5772명의 부하를 이끌고 의적이고 한 것”이 그 시초라 한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5772명의 부하란 것도 과장된 것이려니와, 실제 홍길동이 활동한 것도 1500년경이니 연도도 맞지 않다. 하기야 이런 자료를 실증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송학을 타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 조직이 오래되었을 가능성은 실제 있다. 내사는 모두 홍길동의 제자라 칭하고, 홍길동을 떠받들어 선생이라고 불러 존경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앞서 본 한문 단편 ‘홍길동 이후’에서 도둑들이 심진사에게 자신들 산채의 유래를 홍길동 장군으로부터 100년을 내려왔다고 하고 있으니, 군도는 실제 조선조부터 홍길동의 후예임을 내세웠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자료의 강점은 내사를 당취와 관련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사는 승려 출신으로 구성된다. 송학의 증언에 의하면, 승려 중에서 친자식에게도 자신이 내사의 조직원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관헌에게 체포되어도 내사의 비밀을 토설(吐說)하지 않을 ‘정신이 강고(强固)’한 승려를 가려 뽑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500년 동안 내사의 존재를 아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 즉 내사가 승려를 단원으로 뽑고, 대단히 강고한 내적 결속력과 비밀을 수호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당취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고 내사=당취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섣불리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보원·송명초 스님의 증언이 사실이라는 것, 곧 신빙성이 높은 전승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견해는 내사=당취의 상동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외사의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내사의 승려가 환속하여 역시 강도 노릇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사에서 그 조직의 발각을 우려하여 이들을 늘 엄중히 감시한다. 그러나 내사원 자체가 증가하기 때문에 감시가 소홀해지기도 한다. 이때 환속한 내사원이 내사의 규칙을 위반하고 속인으로서 화적단을 조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외사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일반 속인 출신의 저명한 강도가 외사에 가입하기도 해 적단의 구성원이 복잡해지게 된다. 외사의 기원 역시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른다.

‘황성신문’의 자료는 아쉽게도 여기서 끝난다. 좀더 많이, 소상히 기록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의 같은 시기의 자료가 남아 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는 독립운동사의 사료가 되는 저작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구한말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사회사 자료이기도 하다. 이중에 조선시대 군도의 조직이 소개되어 있어 더할 수 없이 고맙다.

김구가 만난 불한당의 괴수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백범 역시 참여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1월5일 일제 헌병대에게 체포돼 징역17년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소로 이감된다. 백범은 이때 삼남 불한당의 괴수 김진사로부터 조선 전래의 ‘계통 있는’ 다시 말해 역사적 유래가 있는 도적의 조직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이하, ‘백범일지’는 도진순이 주해한 2002년 발행, 돌베개판에 의한다.)

김구 역시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여러 교사들과 함께 지낼 때 이른바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비밀결사가 마을이나 읍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하던 것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활빈당과 불한당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식으로 민활하였기에 관에서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언젠가 독립운동에 필요한 견고한 조직과 민활한 훈련을 위해 그들의 결사와 훈련을 몇 달 동안 연구하였으나 소득 없이 실패하였다. 김구가 양산학교에 있었던 것은 1909년이다.

강재언의 연구(활빈당 투쟁과 그 사상, ‘근대조선의 민중운동’, 풀빛, 1982)에 의하면 활빈당은 1899년부터 1904년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활빈당이란 이름이 나온 문헌을 증거로 삼았던 것이고 실제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김진사의 자료는 앞의 ‘황성신문’의 자료와 불과 3년 정도의 차이가 나니, 비교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 자료를 토대로 하여 조선시대 도둑의 조직과 관습을 추적해보자. 먼저 김진사의 말을 인용한다.

“조선시대 이전은 상고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이후 도적의 계파와 시원은 이렇습니다. 도적이란 이름부터 명예스럽지 않거든 누가 도적질을 좋은 직업으로 알고 행할 자 있으리오만, 대개가 불평자의 반동적 심리에서 기인된 것이외다. 고려말 이성계가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以臣伐君) 나라를 얻은 후, 당시에 두문동(杜門洞) 72현 같은 사람들 외에도 고려 왕조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자 많았을 것이오.

양대 도적 목단설과 추설

그러한 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 혹은 집단하여 가지고,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운 것을 붙들고자(濟弱扶傾) 하는 선의와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보복적 대의를 표방하고 구석진 곳에 동지를 소집하였습니다. 조선의 은총과 국록을 먹는 자, 백성을 착취하는 소위 양반이라는 족속과 부유한 자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한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나라에서 도적이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500여 년 동안 압박·도살하여 온 것이외다.”

김진사는 두문동 72현 같은 반체제 세력을 군도의 시원으로 잡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보원 스님의 말과 아주 흡사하다. 보원 스님은 “땡추들이 힘을 모으게 된 것은 불국토의 현실화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고려 유민의 망국한이 조선조의 저변을 흐른 까닭”이라며 고려 유민의 망국한을 들고 있지 않은가. 고려 유민과 군도는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김진사는 불교와의 관련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따지기로 하고, 김진사의 말을 더 들어보자.

김진사가 전하는 군도의 조직은 이렇다. 강원도에 근거를 가진 도적을 ‘목단설’이라 하고, 삼남 즉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도적을 ‘추설’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 ‘북대’라는 것이 있는데, ‘무식한 자들이 임시로 작당하여 민가나 털고 하는 자’를 말한다고 한다. 목단설과 추설의 도당은 서로 만나면 초면이라도 동지로 인정하고 서로 돕지만, 북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적대시하는 규율이 있어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死刑)에 처했다고 한다.

추설과 목단설, 그리고 북대는 송학이 실토한 내사·외사와 일치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추설과 목단설을 승려를 중심으로 한 도적 조직으로 본다면, 이것은 송학의 내사에 해당하고, 북대는 외사에 해당한다. 물론 송학이 말한 외사는 원래 내사의 구성원이었다가 떨어져나온 자와 민간인 출신의 강도가 결합한 형태를 띠는 것이라서 약간 차이가 있다. 한데 목단설·추설이 북대를 적대시하여 만나면 무조건 죽인다는 과도한 적개심은 아마도 그들의 조직에서 떨어져나간 존재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추설과 목단설은 앞의 보원·송명초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목단설은 강원도에 근거를 가진 도당이고, 추설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도당이다. 지리산은 알다시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걸쳐 있으니, 보원 스님의 말과 일치한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할 때 도적단에 승려가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다는 것, 또 그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추설·목단설이 승려로 조직된 것인데 반해, 김진사의 군도조직은 승려에 관한 말이 없다.

군도의 소굴이 된 사찰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연결시킬 꼬투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김진사는 추설과 목단설이 1년에 한 번 내부의 공사(公事)를 처리할 때 반드시 큰 시장이나 사찰에서 모인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사찰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또 김진사의 지휘로 하동(河東) 화개장(花開場)을 털었을 때 쌍계사에서 장물을 분배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하동 화개장과 쌍계사는 지척지간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쌍계사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절이 아닌가. 이곳은 원래 군도의 소굴이거나 아니면 군도세력과 협력의 관계에 있는 사찰임이 분명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김진사가 추설(그는 원래 삼남의 ‘불한당’이었다)이고, 곧 지리산계의 땡추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찰과 군도와의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로 ‘숙종실록’의 자료를 들 수 있다.

“대저 불가(佛家)의 학설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리고,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유인하여 사찰(寺刹)이 팔도에 두루 차 있습니다. 양민(良民)의 아들이 군역(軍役)을 피하려고 꾀하여 다투어 모두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고, 흉년에 이르러서는 또 도둑 소굴이 됩니다.”(숙종실록 23년 5월18일, 이유제(李惟濟)의 상소)  


양민이 군역을 피해 승려가 되고, 흉년이 들면 군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구한말에도 볼 수 있다. 김윤식(金允植)의 ‘속음청사(續陰晴史)’(광무 4년 10월 조)에 의하면, 활빈당이라 칭하는 양남(호남·영남)의 군도가 경주의 운문사, 양산의 통도사를 근거지로 삼고, 10명에서 100명씩 무리를 이루어 부민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곧 경주 운문사, 양산 통도사가 활빈당의 소굴이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백범일지’의 김진사의 조직이나 아니면 당취 조직과 어떤 구체적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찰과 평소의 모종의 협조적 관계가 없으면 사찰이 군도의 근거지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 ‘장길산’으로 유명해진 사건을 들어보자. 숙종23년 승려 부운(浮雲)이란 자가 승려 수십명을 각도의 사찰에 파견하여 거병범궐(擧兵犯闕)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정석종 교수의 숙종 연간 승려세력의 거사계획과 장길산, ‘조선후기 사회변동 연구’ 일조각, 1983) 체제를 전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두 가지가 매우 흥미롭다. 첫째는 이들이 고려조의 충신인 정몽주나 최영의 후손에게서 새 왕조의 왕을 뽑을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서 땡추나 추설·목단설의 고려에 대한 충성 의식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숙종시대의 대적(大賊) 장길산 부대와의 연대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평소 승려 세력이 군도와 긴밀히 연통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땡추와 추설·목단설의 상관성은 이들이 단순한 생계형 도적이 아니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보원 스님은 “땡추들의 명분과 과제는 단연 현실 개혁적이었으며 혁명사상의 성취”라 하였다.

김진사의 도당 역시 그런 체제 저항적 요소가 충만하다. 김진사는 백범에게 백범의 출신지가 황해도임을 상기시키면서 황해도 청단(靑丹) 장을 치고 곡산(谷山)군수를 죽인 사건을 자신이 영솔하여 한 일이라고 말한다. 양반의 행차로 가장하여 사인교를 타고 구종 별배를 늘어세우고 시장을 턴 뒤 질풍뇌우처럼 곡산군아를 습격하여 인민을 ‘짓밟아 어육(魚肉)’으로 만든 군수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땡추처럼 체제 저항적인 의적의 이미지가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도둑들의 입당식


군도를 소재로 한 한글소설 '홍길동전'과 '경국대전'의 도적에 관한 부분들  
이제 군도의 조직 내부에 대해서 알아보자. 내사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가장 큰 우두머리가 별유사(別有司), 별유사를 보조하는 자가 부유사(副有司)다. 이하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영감(令監) 제반 사항을 지휘함

중년(中年) 유사 영감의 지휘에 따라 활동하는 자

만사(萬事) 회계 사무

종도(宗徒) 졸병

별유사는 내사 조직원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도둑들의 민주화!). 그외는 별유사가 추천한다. 다만 사중(社中)에 서류가 없어 상세한 것은 모른다고 한다.

목단설과 추설의 내부 조직은 다음과 같다. 각 설의 최고 수령을 ‘노사장(老師丈)’이라 한다. 이것은 내사의 별유사와 같은 것이다. 그 아래의 총사무를 유사(有司)라고 한다. 내사의 부유사나 영감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목단설·추설의 조직 구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이것이 내사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도 따라서 미상이다. 특기할 것은 목단설·추설은 지방의 하부 조직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각 지방의 책임자가 있으니, 이들도 유사라고 부른다.  


목단설·추설의 조직원은 이렇게 선발된다. 각 설의 도당은 소수정예주의다. 각 설의 노사장은 1년에 각 분(分)설에 자격자 1명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고할 것을 지시한다. 자격자가 되는 조건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强實)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등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아 보고하면, 설의 지도부에서 비밀리에 조사하여 그 합격자를 도적으로 만든다.

노사장의 명령에 의해 책임 유사는 자격자에 접근한다. 자격자의 기호 술·미색·재물 등으로 극진히 환대하여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워진 뒤 어느 날 밤이 깊어진 뒤 어떤 집 문전에서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사라진다. 이내 포교로 변장한 자가 자격자를 포박하여 70여 가지의 악형을 가하며 도둑으로 모는데, 스스로 도둑이라고 실토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끝내 아니라고 고집하면 결박을 풀고 따로 은밀한 장소에서 술과 고기를 먹인 뒤 입당식을 거행한다. 입당식 장면이 재미있다. 김진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입당식에는 책임 유사가 정석(正席)에 앉고, 자격자를 앞에 꿇어앉히고 입을 벌리라 한 뒤 칼을 빼 그 끝을 입안에 집어넣고, 자격자에게 ‘위 아래 이빨로 칼 끝을 힘껏 물라’ 호령합니다. 그리고 칼을 잡았던 손을 놓고 다시 ‘네가 하늘을 쳐다보아라. 땅을 내려다보아라. 나를 보아라’ 호령한 뒤, 다시 칼을 입 안에서 빼 칼집에 넣고 자격자에게 ‘너는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사람을 안즉 확실히 우리의 동지로 인정한다’라고 선고합니다.”

이렇게 신고식이 끝나면 정식으로 강도질을 한 차례 하고 장물을 분배해준다. 이런 식으로 몇 번 강도질에 동행하면 완전한 도적이 되는 것이다.

도적단은 어떤 방식으로 기율을 유지했는가. 김진사의 말에 의하면 4대 사형죄가 있다고 한다. 첫째 동지의 처첩과 간통한 자, 둘째 체포·신문 때에 자기 동료를 실토한 자, 셋째 도적질할 때 장물을 은닉한 자, 넷째 동료의 재물을 강탈한 자다. 이들은 발각되면 사형이다. 이들의 법은 극히 엄하여 포교를 피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어도 도적의 법에 사형을 선고받고는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고 한다. 만약 도적질이 하기 싫다든지 늙어서 도적단에서 빠지고 싶다고 청원을 해도 동지가 위급한 경우 자신의 집에 숨기를 요구할 경우 이 한가지만은 반드시 응한다는 서약을 받고 행락(行樂·도적질)을 면제해준다.

잔혹한 배신자 처단의식

이들이 수백년의 조직을 유지해온 것은 엄격한 내부 단속과 함께 외부의 권력기관과 연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각 설은 사환계(仕宦界·관계)에, 특히 포도청과 군대에 요직을 갖고 있다. 도적이 어떤 도에서 잡힌 뒤 그가 북대이면 지방 관청에서 처결하고, 설이면 서울로 압송하게 한다. 만약 도당을 털어놓으면 사형하게 하고, 자기 사실만 공술하면 기어코 살려 옷이나 음식을 공급하고 뒤에 출옥시킨다.

이상이 현재 도적의 입당식에 관한 유일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보원 스님의 말에도 땡추의 입당식에 관한 것은 전혀 없다. 대신 보원 스님은 땡추의 조직에 대해서 심진사보다 훨씬 더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땡추의 법을 어긴 자를 정죄하는 참회법이란 것이 있는데, 실정법을 초월한 제도로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 지리산계보다 금강산계가 더욱 엄격했다는 것이다. 지리산계는 당류(黨類)가 금기를 범했을 경우 신체에서 오염된 부분을 제거하거나 굴절시키되 기능을 마비시키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도벽이 있을 경우 손목을 자르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금강산계에서는 아량을 베풀어 범법자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든가 그대로 타살을 강행하여 당류뿐 아니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이문구는 보원 스님의 말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약해보자.

갑이라는 당원이 파계를 범하면, 그것을 안 최초의 땡추는 여러 곳에 기별하여 사람을 모은다. 성원이 되면 재판이 열리는데, 만약 유죄 쪽으로 기울면 갑을 잡으러 두 사람이 떠난다. 편의상 두 사람을 을과 병이라 하자. 갑이 있는 절을 찾아가서 갑에게 접근하여 갑에게 세숫물, 빨래, 청소 마른 일, 진 일, 심지어 발 씻을 물까지 대령하는 등 무상(無償)의 봉사를 하여 갑의 환심을 산다. 을과 병은 서로 모른 체한다.  


셋이 친숙해지면, 을과 병은 금강산 여행을 가자고 갑을 꾄다. 갑과 을이 금강산으로 떠나면 병은 각처의 땡추들에게 통문을 띄운다. 땡추들은 우연히 갑과 만나는 것처럼 한둘씩 시간을 두고 갑과 일행이 된다. 마침내 원래 정했던 장소에 도달한다. 이때까지 갑은 전혀 사정을 모른다. 갑을 처단하는 의식이 집행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처형의 방식이란 이렇다.

땡추의 일행 중에서 미리 돼지고기를 준비해온 사람이 돼지고기를 내놓으면서 “스님 원로에 공양이 부실하여 속이 허하실 텐데, 여기 성계육이나 좀 맛보시지요” 하면 갑은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된다. 갑이 살아나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갑이 선승이라면 선문답을 통해서, 갑이 강백(講伯)이라면 ‘금강경’이나 ‘화엄경’ 등에 대한 물음을 통해 땡추들의 입을 다물게 할 능력과 품위가 있으면 용서받을 도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는 죽음이다.

“너는 양민의 피땀에 영글은 시주밥과 그들의 한숨이 날줄과 씨줄을 낳은 옷에 살이 찌고도 스스로 근본을 저버렸으니, 그로써 혜명(慧命)을 모독한 죄는 실로 하늘을 덮고도 남는다. 하물며 이승에 목숨을 붙여 백성들의 고달픔에 덤이 되게 할 것이랴. 마땅히 너로 하여금 오늘로써 이승의 자취를 거두게 함이 법당의 크나큰 자비로다.…”

이런 말을 마친 땡추들은 갑을 층암절벽으로 밀어넣거나 구덩이에 산 채로 묻는다. 세상과 영원히 하직시키는 것이다. 이런 잔혹스러울 정도로 내부 조직을 다졌기에 그들의 말대로 수백년을 전해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군도의 일이 도둑질이니 이 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군도의 활동에 대한 자료는 조선시대의 관찬사료에 풍성하게 남아 있다. 우선 군도의 규모를 보자. 임형택 교수에 의하면, 성종 말년인 1489년 김막동 부대가 평안도를 중심으로 7년간 활동했고, 1500년경 홍길동이 경기·충청과 경상 북부에 걸치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1530년경 순석(順石) 부대가 전라·충청·경기 삼도에 걸쳐 투쟁했는데, 일당 39명이 관군에게 붙잡힌 뒤 연루되어 체포된 사람이 170여 명이었다고 하니 굉장한 규모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 유명한 임꺽정 부대가 출현한다.

이건 조선전기의 기록이다. 조선후기에는 군도에 대한 보고가 더 많아지고, 내용도 상세해진다. 영조28년 3월 비변사에서 보고한 김포에 침입했던 명화적을 예로 들어보자.

“김포군의 명화적(明火賊) 수백명이 말을 타고 깃발을 세우고서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며 곳곳에서 도둑질을 하여 다친 사람이 많은데, 본군(本郡)에서 감영(監營)에 보고한 것이 지극히 더디었으니, 군수 윤득중(尹得中)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오고 감사(監司) 및 토포사(討捕使)는 중추(重推)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기찰(譏察)해 잡도록 해야겠습니다.”(영조실록 28년 8월 3일)

명화적이 수백명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또 영조41년에 조정에 보고된 군도의 조직원은 약 300~400 명이었다고 한다. (영조실록 41년 12월 27일) 조선후기의 군도는 수백명 단위로 조직되는 경우가 허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명화적이 말을 타고 포를 쏜다고 한 것도 주목거리다. 포는 총을 말한다. 즉 기동성이 높은 말과 총으로 무장한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 무장한 조직을 움직이려면 당연히 엄격한 위계와 결속력을 갖지 않고는 안된다. 이쯤 되면 지방 관아 습격은 일도 아니다. 조선후기의 관찬사료에 지방 관청을 군도가 공공연히 공격하였음에도 지방관이 변변히 저항도 못하였다는 숱한 기록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위에 예시한 내용이 도적의 외부에서 기록한 것이라는 흠이 있다. 이런 점에서 ‘백범일지’의 김진사의 자료는 도적 스스로 공개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화개장터 습격사건

설이 조직원을 모두 불러모으는 것을 ‘장 부른다’고 하는데, 만약 목단설과 추설이 공동으로 장을 부를 경우 ‘큰 장 부른다’고 한다. 각 설이 단독으로 조직원을 불러모으면 그냥 ‘장 부른다’고 한다.

큰 장을 부르는 것은 원래 설의 공사(公事)를 처리하기 위한 것인데, 그때에 큰 시위 삼아 도적질을 한 차례 한다고 한다. 큰 장을 부르는 통지에 도 각 지방 책임자에게 부하 누구누구 몇 명을 파송하라 하면 어김없이 시행되는데, 흔히 큰 시장이나 사찰로 부른다.

이때 각지의 도둑들이 모이는데, 모두 형형색색으로 변장을 한다. 돌림장수로, 중으로, 상제로, 양반 행차로, 등짐장수 따위로 말이다. 김진사는 그 일례로 하동 화개장을 친 일을 들고 있는데,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다.

화개장은 유행가 가사처럼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 속에 도둑들이 섞인다. 중장(中場)이 되면 상여를 비단으로 꾸민 호사스런 행상(行喪)이 장에 들어서는데, 상주가 삼형제고 뒤에 복상제와 호상하는 사람들도 많다. 상여를 큰 술집 앞에 내려놓고 상주들이 곡을 한다. 상여꾼들은 술을 먹는다.

이때 호상객 한 명이 ‘갯국’ 즉 요즘말로 ‘보신탕’이요, 예전말로는 ‘개장’ ‘개장국’을 사서 상주에게 권한다. 상주에게 개장국이라니, 이건 있을 수가 없는 망발 중의 망발이다. 하지만 근신중인 상주가 아닌가. 온건한 말로 거절한다.

“무슨 희롱을 하다못해 상제에게 갯국을 권하는가. 그리 말라.”

호상객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권한다. 그리하여 상주와 일대 전쟁이 벌어진다.

“아무리 무식한 놈이기로 초상난 상제에게 갯국을 먹으라는 놈이 어디 있느냐?”

“친구가 권하는 갯국을 좀 먹으면 못쓰느냐?”

다른 호상인들도 싸움을 말리느라고 야단을 치고, 이래서 장터의 장꾼들은 모두 싸움판에 집중되고 웃음이 낭자해진다. 이때 상주가 죽장을 들어 상여를 부수고 널판을 깨어 널의 뚜껑을 잡아 제치면, 시체는 없고 오연발 장총이 가득하다. 이때는 이미 총이 상용화된 때라 오연발 장총이다. 상주·호상꾼·상여꾼들이 총 한 자루씩 들고 사방 길목을 지키고 시장에 놓인 돈과 집에 쌓아둔 부상(富商)의 돈을 모두 탈취한다. 쌍계사에서 분배하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도둑이 영웅되는 사회

한바탕의 도적질은 이렇게 끝난다. 김진사의 말에 의하면 계통 있는 도적들은 도둑질을 자주 하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많아야 두 차례다. 장물을 나누는 것도 예로부터 정한 규칙에 의해서 한다. 백 분의 몇은 노사장에게로, 그 다음 각 지방의 공용, 몇 분은 조난당한 유족의 구제비, 이렇게 몇 분을 제한 후 극단의 모험을 감수한 자에게 장려금까지 주고 나서 평균 분배한다. 따라서 장물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김진사는 옛날에는 해마다 큰 장을 한 번씩 불렀으나, 이 시기에는 재알이(왜놈)가 하도 심하게 구는 탓에 폐지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경찰력이 아마도 군도의 활동을 크게 제약했을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자 군도는 서서히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양산박의 군도를 그린 ‘수호전’은 지금도 읽힌다. 영화로 비디오로도 가공된다. ‘홍길동전’은 조선시대에 이미 소설화되었으며, ‘임꺽정’은 일제시대에, ‘장길산’은 해방 이후에 모두 소설화되었다. 소설이 아닌 실제의 홍길동과 임꺽정, 장길산이 과연 의적이었을까. 그들은 과연 탐관오리만을 제거하는 그런 도둑이었던가. 사료를 보건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아름다운 것으로 남는다. 부정직한 체제, 지배자에 대한 저항만으로도 그들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도둑을 영웅시하는 사회는 어딘가 곪아 있는 병든 사회다. 병든 체제에 대한 저항이 군도가 형성한 이미지인 것이다.

임꺽정 부대가 활동했을 때 사신은 ‘실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 도적이 생긴 것은, 도적질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부득이 도적이 되어 하루라도 연명(延命)하려고 하는 자가 많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백성을 도적으로 만든 자가 과연 누구인가. 권세가의 문전이 시장을 이루어 공공연히 벼슬을 팔아, 무뢰한 자제들을 주군(州郡)에 나열(羅列)하여 백성들을 약탈하게 하니 백성이 어디로 간들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명종실록 16년 10월 17일)

그리고 구체적으로 윤원형(尹元衡)과 심통원(沈通源)을 두고 “물욕을 한없이 부려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데도 못하는 짓이 없는” 대도(大盜)로 지적하고 있다.(명종실록 16년 1월3일) 조정에 있는 권세가가 대도란다. 뭐 생각나는 것 없는가. 신문이며 방송에 나날이 나는 소식을 보니, 과거 군도가 설치던 시대와 지금이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다. 땡추와 김진사가 사뭇 그립다.   (끝)


강명관
● 1958년 부산 출생
● 1981년 부산대 국어과 졸업
● 성균관대 한국한문학 박사
● 저서 :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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