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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관리자  09-08 | VIEW : 2,141
李舜臣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통해 본 「한국형 武士道」의 심층

『그의 칼은 칼일 뿐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정치의식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武力은 순결한 脫정치성의 武力
●조정을 향해 「사실」을 보고하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
●그는 사실과 의견을 엄격하게 구분한 기자 같은 武士였다
●그는 오직 사실에 충성했다

金薰 퇴직기자  


「李舜臣은 잘 훈련된 신문기자」

李舜臣이 남긴 글은 많지 않다. 李舜臣은 문장으로 세상을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위하여 글을 쓰지는 않았다. 李舜臣은 오로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글을 썼다. 그가 남긴 글은 「亂中日記」와 여러 편의 狀啓(장계․관원이 임금에게 하는 보고-편집자 注)들이다.

개인적인 편지와 짧은 漢詩가 몇 편 전한다.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칼에 새겨진 劍銘(검명)도 李舜臣이 남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李舜臣은 본래 육군이었다. 從八品(종팔품)의 초급장교 시절에 李舜臣은 함경도 국경에 근무했다. 거기서 李舜臣의 부대는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과 대치했다.

그 시절에 李舜臣은 「함경도 일기」라는 진중기록을 남겼다. 「함경도 일기」의 원본은 지금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초서체로 급히 써내려간 이 기록은 한글 번역판이 없어서 나는 읽을 수 없었다.

「亂中日記」는 임진년 開戰(개전) 초기부터 그가 노량바다에서 전사하기 직전인 무술년 동짓달까지의 진중일기다. 중간 중간에 기록이 누락된 기간도 적지 않다.

「亂中日記」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명상적인 일기라기보다는 水軍(수군)의 상황과 작전의 내용을 기록한 日誌(일지)에 가깝다. 「亂中日記」에서 겸淀資?가끔씩 私的(사적)인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의 정치의식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亂中日記」는 고도로 압축되고 억눌린 문장을 보인다.

「亂中日記」는 뼈만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亂中日記」에서 李舜臣은 「바다의 사실」들을 비켜가거나 건너뛰는 언어의식을 보이지 않는다.

李舜臣이 조정으로 보낸 狀啓(장계)는 모두 73편으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 狀啓들 중 71편이 「李忠武公全書(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었다. 狀啓는 승정원이나 비변사를 경유해서 임금에게 바쳐졌다. 狀啓는 朝廷(조정)에서 공개되고, 공론화되는 공문서이다.

그러므로 狀啓에서 李舜臣의 私的인 내면이 드러나는 대목들을 기대할 수 없다. 狀啓는 치밀하고도 사실적인 戰況보고서이다. 그러므로 「亂中日記」나 狀啓의 문장을 분석해도 李舜臣의 개인적 자아의 빛깔이나 무늬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李舜臣은 그 자신의 마음의 지옥에 대해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었다.

이 작은 글은 발설하지 않은 말들을 더듬어보려는, 매우 위태로운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위태로움을 피해가기 위해서, 나는 되도록이면 그가 한 말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그가 하지 않은 말들의 내용에 도달하려 한다.

「亂中日記」와 狀啓에서 우선 확연히 드러나는 글쓰기의 정신은 사실을 사실로써 진술하는 者의 엄격성이다. 李舜臣의 글은 어떠한 불운과 역경 속에서도 사실과 의견(혹은 소망)을 구분해서 말하고, 직접 정보와 간접 정보를 구분해서 기술한다. 그는 사실 위에 완강히 자리잡고 있다.그는 잘 훈련된 신문기자와도 같다. 전쟁은 개전 초기부터 절망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정 내부는 당쟁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李舜臣은 그러한 나라의 水軍 최고지휘관이었다. 사실을 사실로서 진술하는 일, 그리고 그 「사실」들을 朝廷을 향해서 문서로 보고하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李舜臣에게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것들은 오직 「사실」이었으며, 그 「사실」을 해석하거나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혹은 의미를 박탈하는 정치의식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또는 박탈하는 정치행위는 언제나 바다의 사실들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고 朝廷 대신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사실」을 이리저리 주물러서, 그 의미를 변형시켜내는 정치행위는 「사실」에 완강히 입각해 있는 자의 피를 요구 했다. 사실이 아니라 허위가 오히려 인간을 편안하게 해 준다.

정치적 언어는 현실을 추상화하거나 이념화한다. 그렇게 이념화한 언어는 흔히 정치 슬로건으로 나타난다.

이 정치 슬로건은 전망 혹은 가치라는 탈을 뒤집어 쓴다. 이 탈이 언어를 사실로부터 유리시킨다. 추상화된 언어는 권력으로 바뀐다. 이 권력이 다시 「사실」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그렇게 해서 「사실」은 실종되거나 매장된다. 정치적 언어의 특징은 그 둔감함에 있다. 돌아가신 김현 선생은 이 둔감함을 「뻔뻔스러움」이라고 말했다. 둔감한 언어는 힘을 갖는다. 이 힘은 언어의 힘이 아니라 권력의 힘이다. 「사실」과 언어의 관계는 그처럼 적대적이다.

李舜臣의 칼과 글은 현실을 쳐부수어 개조하려는 꿈의 소산

李舜臣의 시대뿐 아니라, 인간이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한 (이태원의 노래 「솔개」처럼)이 적대관계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사실 위에 완강히 입각하려는 자의 언어는 순결하고, 脫정치적이다. 脫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 李舜臣의 글은 李舜臣의 칼을 닮아 있다. 현실을 쳐부수어서 개조하려는 꿈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李舜臣의 글과 칼은 다르지 않다.

李舜臣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전망이 없는 戰況 속에서도 사실과 사실에 대한 사실적 인식만이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이라고 믿었다. 그의 생애가 보여 주는 정치적 불운은 오직 그의 글과 칼이 지향했던 脫정치성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李舜臣의 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도요토미의 칼과 李舜臣의 칼은, 칼의 양극점에서 대치하면서 서로 겨누고 있다. 도요토미의 칼은 칼 자체의 순결을 떠났다. 도요토미는 칼로써 일본 천하를 제압했고, 칼로써 정치권력을 창출했으며, 그 정치권력의 힘으로 초기 산업자본주의가 가져다 주는 풍요로운 이윤을 독점했다. 도요토미가 조선을 경유해서 明나라로 진공하려 했던 전략 목표는 세계적 규모의 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脫정치성과 조정의 정치적 언어 사이에서 피흘려

李舜臣의 칼은, 칼을 넘어서는 어떠한 다른 가치나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있다. 李舜臣의 칼은 세상을 구하고 나서 스스로 소멸하려는 「자멸적 정서」를 지닌 칼로 보인다.

노량바다에서의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李舜臣의 「자멸적 정서」에 바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李舜臣이 戰後의 권력구조 재편에서 발디딜 수 있는 정치적 여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확실한 근거나 기록이나 목격담이 없는 한 그의 죽음을 자꾸만 「자살」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그 완성된 武人(무인)에 대한 예절에 어긋나는 일로 보인다.

李舜臣을 사형 직전까지 몰고갔던 혐의들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를 해상에서 요격하라는 朝廷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李舜臣이 조정의 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사정의 전말을 여기서 분석할 수는 없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 李舜臣의 충성심은 임금이나 사직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바다의 사실」에 대한 충성심이었다는 점이다. 함대를 몰고 바다로 나아가 가토의 부대를 기다리기만 했어도 그는 혐의의 가장 무거운 부분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토의 부대가 바다를 건너온다는 朝廷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朝廷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동기에 따라 군대의 진퇴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실」에만 따랐다.

그의 武力은 순결한 脫정치성의 武力이었다. 그의 생애는 이 脫정치성과 朝廷의 정치적 언어 사이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때리면서 사형의 빌미를 짜맞추었던 朝廷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일언반구도 발설하지 않고 죽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脫정치적이었고, 그는 끝끝내 말하지 않고 죽었다.


수많은 아수라장을 돌파하는 자의 문장

<정유년 4월1일(음력).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 남문 밖 윤간의 집에 이르러 봄, 분, 울, 사행, 원경들과 한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하였다. (…) 취하여 땀이 몸에 배었다>

그가 40일 동안 의금부에서 악형을 받고 풀려나던 첫날의 일기이다. 그의 백의종군의 시작이었다.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는 이 첫 문장은 「亂中日記」를 읽을 때마다 늘 나를 울렸다.

나는 이 가차없는 사실주의와 이 한없는 단순성 앞에서 내 수사학의 허망함을 부끄러워하였다. 40일 동안을 모진 악형을 받고 풀려나서, 「오늘 옥문을 나왔다」라는 단순한 문장 한 줄을 쓰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괴롭다. 이것은 수많은 아수라장을 돌파하는 자의 문장이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얼마나 무서운 외로움과 적개심이 억눌려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 외로움과 적개심을 헤아리는 일은 영웅이 아닌 내가 다만 「亂中日記」를 읽으면서 몸서리쳐야 할 일이고, 李舜臣은 끝끝내 그 외로움과 적개심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정유년 4월17일(음력) 맑음. 금부 도사의 서기 이수영이 공주로부터 와서 어서 가자고 재촉하였다>

4월13일, 백의종군 길에 오른 李舜臣은 법성포에 이르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訃告(부고)를 받는다. 李舜臣은 걷거나 말을 타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李舜臣은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權慄(권율)에게 신고를 하고 처분을 받아야 했다. 李舜臣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지 못했다. 앞에 인용한 4월17일의 일기는 李舜臣을 순천까지 압송하는 의금부 관리들이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 한 줄이 이날 일기의 전부이다. 이날 일기에서 李舜臣의 글은 슬픔과 분노를 극한에까지 억눌러 버린다. 억눌려진 슬픔과 분노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슬픔은 다시 한번 칼의 모습을 닮아간다. 이때 억눌린 슬픔에는 현실을 베어버릴 만한 날이 선다.

정유년 6월에 李舜臣은 경남 하동에 당도했다. 李舜臣은 마을 종들의 토방에서 묵으며 남쪽으로 내려갔다.<정유년 6월1일(음력) 비, 비, (…)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장지 2축, 백미 1섬, 참깨 5말, 들깨 3말, 꿀 5되, 소금 5말을 하동 員이 보내 주었다>

음력 6월1일이니까, 아마도 장마 때였던 모양이다. 하동 員(원․고을의 수령-편집자 注)이 보내준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李舜臣은 낱낱이 적고 있다. 보내 준 물건은 종이와 식량이다. 깨와 꿀을 보내 준 것으로 보아 하동 員은 고문을 당한 李舜臣의 섭생을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동 員은 상한 몸에 보신이 될 만한 음식을 보내 준 것이었다. 참깨 5말, 들깨 3말처럼 곡식의 양을 기어코 정확히 기록한 그의 사실성은 나를 눈물겹게 한다. 백의종군으로 남행하는 그의 여정은 이처럼 단초로웠다. 이 물건들을 가지고 가자면 말(馬)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유년 6월10일 이후의 일기는 한동안 말에 관한 기사가 나타난다.

<정유년 6월10일 맑음. 아침에 가라말 워라말 간자말 유마(馬留馬)들의 편자가 떨어져 갈아 박았다(…)>

<정유년 6월11일 맑음. (…) 작은 워라말이 먹지를 않으니 더위를 먹은 모양이다>

<정유년 6월16일 맑음.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열과 정상명이 큰 내에 가서 싸움말(戰馬)을 씻겨 가지고 왔다>

<정유년 6월19일 (…) 저녁에 작은 워라말이 풀을 조금 먹었다>

<정유년 6월20일 (…) 종일 비가 내렸다. (…) 병든 말이 차차 나아갔다>

<정유년 6월26일 맑음.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이 현신하기에 곧 곤장 50대를 때렸다. (…) 이날 작은 워라말이 죽어서 내다 버렸다>

「李忠武公全書」를 번역한 李殷相(이은상)의 주석에 따르면, 가라말은 털빛이 검은 말이고 워라말은 털빛이 얼룩덜룩한 말이고 유마는 갈기가 검고 배가 흰 말이고 간자말은 이마와 뺨이 흰 말이다. 다시 이은상의 주석에 따르면 가라말과 워라말은 싸움말(戰馬)이고 간자말과 유마는 짐을 싣는 말(卜馬)이다. 백의종군으로 남행하는 李舜臣은 다양한 용도의 말을 네 마리 이상 끌고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칠천량 패전(원균의 지휘하에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한 해전)에서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은 수군의 참상을 가는 곳마다 확인하고 있었다.

그 참혹한 여정 속에서도 그는 작은 워라말이 더위를 먹고 비실비실하다가, 겨우 회복되어서 풀을 조금 뜯어먹고 이윽고 죽어버리는 과정을 아무런 정서도 개입시키지 않고 냉정하게 기록하고 있다. 6월26일에 李舜臣에게 곤장 50대를 맞은 「윤복」이라는 종의 죄는 알 수가 없다. 곤장 50대이면, 아마도 온전히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을 사실로서만 마주대하는 李舜臣의 정서는 종에게 곤장 50대를 때린 일과 말이 죽은 일이 모두 동등한 지위와 자격을 갖춘 사실, 즉 기록되어야만 하는 가치를 지닌 사실인 것이다.
죽음을 죽음으로서 긍정하고 돌파


경상 우수사 배설은 명량해전 직전인 정유년 9월2일(음력) 새벽에 탈영해서 도주했다. 해남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내습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군의 한 해역사령관의 탈영은 작전과 사기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 틀림없다〈이때 李舜臣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어 있었지만 戰船(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배설이 탈영하던 날 李舜臣의 일기는 불과 두 줄이다.

<정유년 9월2일 맑음. 정자에 내려가 앉았는데 보자기(어부) 점세가 제주로부터 보러왔다. 이날 새벽 배설이 도망갔다>

李舜臣은 비극이나 불행에 대해서 중언 부언하지 않는다. 해역사령관이 敵前(적전)에서 탈영한 사태는 아무런 수사학적 장치를 거느리지 않고 있다. 그 다음날 일기에 그의 심회는 겨우 조금 드러난다.

<정유년 9월3일. 비가 내렸다. 뜸 아래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심회가 어떠하랴>

이날의 일기에서도 李舜臣의 심회는 극도로 억눌려 있다. 그는 들끓는 심회의 내용을 진술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죽음을 통과하는 방식이다. 이 두 건의 간략한 일기 사이에서 그의 마음을 엿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여기서부터는 그의 마음을 더듬어 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아마도 李舜臣에게 적의 대규모 내습이 임박한 명량에서의 12척은 많은 배도 아니고 적은 배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12척은 그가 거기에 입각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죽음으로서 긍정하고 나서 그 죽음을 돌파한다. 배설이 탈영한 사태도 그가 거기에 입각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불과하다.

그는 배설 탈영의 뒷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우선 그 탈영의 사실을 사실로서 긍정하고 그 위에 발을 디딘다. 그때 그의 마음의 무서운 긴장과 억눌림이 그 간략한 일기문장들의 행간에 배어 있다.

「亂中日記」 속에서 李舜臣의 개인적 정서는 흔히 날씨나 건강과 관련되어서 산발적으로 표출되는데, 그 문장의 그 억눌림은 극도로 메말라서 끊어지기 직전의 긴장을 보인다.

<병신년 3월21일. 종일 큰 비가 쏟아졌다. (…) 초저녁에 토사곽란을 만나 한 시간이나 고생하다가 자정에 조금 가라앉았다. (…) 자정에 비가 그치고 오전 2시쯤에 이지러진 달이 비치었다. 방 밖에 나가서 거니는데, 몸이 몹시 피곤하였다>

<병신년 3월22일 맑음. 아침에 종금이를 시켜서 머리를 빗기었다(…) 이날 저녁에 무시로 땀이 났다>

<병신년 3월23일. (…) 오전 4시쯤 몸이 편치 않아 금이를 시켜서 머리를 긁게 했다. (…)>

<병신년 3월24일 맑음(…) 새벽에 미역을 따러 나갔다.(…) 어둘녘에 심히 피곤하고 무시로 땀이 흐르니 비가 올 징조였다>

<병신년 3월25일.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퍼부어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 낮에는 땀이 옷에만 배더니 밤에는 옷 두 겹이 젖고 다시 방바닥에까지 흘렀다>

모든 언어를 떨쳐버린 무장된 외로움 / 임금 心中 위안 정치적 배려 전혀 없어

「亂中日記」는 곳곳에서 병고에 신음하는 李舜臣의 모습을 보여 준다. 바다에서 李舜臣은 자주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그의 몸은 더욱 쇠잔하여 갔다.

몸이 아파서 식은땀이 흐르고 코피가 쏟아질 때도 그는 늘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혼자서 그 아픔을 감당한다. 그는 병을 정서화하지 않는다. 혼자서 병을 앓을 때, 그의 외로움은 모든 언어를 떨쳐버린, 무장된 외로움처럼 보인다. 몸이 아플 때, 그는 왜 종을 불러서 머리를 긁게 하고, 오랫동안 혼자서 머리를 빗는 것일까. 머리를 긁는 것은 어떤 의학적 효과가 있는 것일까. 종을 불러들여서 머리를 긁게 하는 李舜臣의 아픈 새벽들의 모습에서 나는 혼자서 세상을 감당해야 하는 자의 피나는 외로움과 적개심을 읽는다.

朝廷으로 보낸 李舜臣의 狀啓는 직접정보와 간접정보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임진년 4월15일 戌(술)시에 발송된 狀啓는 「삼가 아뢰옵기는 사변에 대비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4월15일 밤 8시에 도착한 동월 14일 발송된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원균의 공문에 따르면…」으로 시작된다. 이 狀啓는 개전 초기의 경상해안쪽 전황을 보고하면서 이에 대한 전라수군의 입장과 준비태세를 보고하고 있다. 李舜臣은 경상해안 쪽 정보가 자신에게 도착해서 다시 자신의 狀啓에 의해 朝廷으로 올라가는 과정과 시차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1. 4월15일 밤 8시에 경상해안 쪽 정세를 알리는 元均의 공문이 나에게 도착했다.

2. 元均의 공문은 이보다 하루 전인 14일에 발송된 것이다.

3. 나는 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날 새벽에 이 사태에 대한 나의 입장을 朝廷으로 발송한다는 것이다.

狀啓의 서두를 이루는 이 짧은 문장 한 줄은 사태의 발생, 발생된 사태에 대한 인지, 인지된 정보의 전? 전달된 정보의 역송의 과정을 시차별로 선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정보가 역송되는 과정에서 어느 단계 이후부터가 직접정보이고 어느 단계 이후부터가 간접정보인지를 확연히 구분짓고 있다. 말하자면, 직접 체험한 사태, 직접 입수한 정보와 전해 들은 정보를 李舜臣은 뒤섞지 않는다.

李舜臣은 정보의 순결성을 「의견」으로 오염시키지 않는다. 「사실」과 「의견」을 뒤섞지 않는 그 엄격성에 그의 武人다운 강인함이 있다. 그리고 그 엄격성은 그의 생애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엄격성은 그의 狀啓 전편을 일관하는 사실주의 정신이다.

임금 心中 위안 정치적 배려 전혀 없어

그의 狀啓는 임금의 心中을 위안하려는 정치적 배려가 전혀 없다. 그는 전쟁의 참상과 아군의 열세, 군량이 모자라 무더기로 굶어죽는 수졸들의 비참함, 피란민의 고통, 적들의 행패와 살육,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무능, 아군의 사기저하 등을, 그것이 사실인 한, 체험과 목격을 근거로 낱낱이 朝廷에 보고한다.

그래서 전쟁의 참상을 보고하는 그의 글들은 때때로 朝廷의 무능과 부패를 규탄하는 격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승리를 보고하는 문장과 아군의 참상을 보고하는 그의 문장은 똑같이 사실에 바탕하고 있다. 그의 「사실」에는 정치적 여백이란 없다. 남쪽 바다에서 올라온 李舜臣의 狀啓를 읽을 때, 임금은 불안했을 것이다. 아마도 임금은 李舜臣이 전해 오는 사실들을 외면하고 싶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외면되어지지 않는다.

당포․당항포에서의 승리를 알리는 장계는 李舜臣의 사실주의 정신의 한 절정을 보인다. 그의 狀啓는 전투에서 죽은 아군과 부상당한 수졸들의 이름, 출신지, 전투임무 등을 모조리 기록해서 임금에게 전하고 있다. 죽거나 부상당한 자들은 모두들 軍에 징집된 수졸들이거나 아니면 私家(사가)의 종, 절에 딸린 종, 관아에 딸린 종, 어부, 뱃사공들이다.

李舜臣은 이들의 이름과 직책을 낱낱이 적고, 이들에게 보상할 것을 임금에게 요구하고 있다. 전쟁과 살육은 먼 바다의 일이 아니라, 임금의 朝廷이 책임져야하는 해역 안에서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을 李舜臣의 狀啓는 임금에게 전하고 있다. 임금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종이나 어부들을 보상할 리는 없었지만 전쟁의 구체성과 현실성은 임금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李舜臣의 狀啓는 무기력하고 부패한 지방관리들의 죄상을 임금에게 알리고 이들을 처벌하거나 경질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징모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군량이나 군선을 기간 안에 공급하지 않는 나태하고 안일한 지방관리들을 李舜臣은 실명을 낱낱이 들어서 임금에게 알렸다.

朝廷은 당쟁으로 찢겨져 있었다. 그리고 朝廷대신들은 자신의 계보에 속하는 지방관리들의 정치적 입장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李舜臣이 특정한 지방관리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처벌해 줄 것을 朝廷에 요청하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위태로운 일에 전혀 위험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는 끝끝내 脫정치적이다. 이 脫정치적 입장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때 李舜臣은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狀啓는 朝廷으로 보낸 공문서이다. 李舜臣은 봉건적 충성심과 勤王(근왕)정신, 그리고 거기에 바탕한 적개심으로 전쟁을 수행해나간 것으로, 狀啓에는 나타나 있다. 그것이 狀啓라는 문서의 입장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충성심과 勤王정신만으로는 그의 절망과 절망을 돌파하는 내면의 힘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전쟁 기간 내내 병고에 시달렸다. 적탄에 맞은 자리가 쑤셨고, 임금의 매에 맞은 자리가 쑤셨다. 몸의 고통이나 몸의 징후로써 바다의 날씨를 예견하는 「亂中日記」의 문장들 속에서, 그의 몸 속에는 임금이 주는 고통과 적이 주는 고통이 동거하고 있다. 그 양쪽의 고통이 그에게 바다의 날씨를 예견하게 하고 노량바다를 향해 마지막 함대를 몰아가게 한다. 그는 기나긴 전쟁이 끝나던 날 바다에서 죽었다.

나는 적탄에 맞아 죽은 그의 죽음을 결국 자연사라고 생각한다. 그의 충성심은 「바다의 사실」과 아군의 사실, 적의 사실에 대한 충실성이었다. 그가 전쟁이 끝나던 날 죽었으므로 정치는 끝끝내 그에게 손댈 수 없었다. 그는 영원히 脫정치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는 사실의 영웅인 것이다.●


李舜臣 略史 / 亂中日記는 어떤 책인가

李舜臣은 154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명보극장 앞이 그가 태어난 터다. 1576년 武科에 급제한 뒤 末職을 전전하다가 1591년 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다. 이때부터 거북선을 만드는 등 군비확충에 전력하며 왜병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노량, 고성, 사천, 당포, 한산도 등지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 등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가 출옥, 백의종군했다. 원균이 왜병에 대패하자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른 그는 철수하는 왜군들과 노량 앞 바다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1598년). 훗날 朝廷은 그의 업적을 기려 영의정에 追贈(추증)했다.

亂中日記는 어떤 책인가

李舜臣 장군이 임진왜란을 겪으며 적은 日記다.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 5월1일부터 1598년 9월17일까지의 일들이 기록돼 있다. 이 기간은 임진왜란 발발 다음 날부터 장군이 전사하기 전 달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이 일기는 李舜臣의 인간적인 모습과 함께 임진왜란 중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76호로 지정됐다. 현재 온양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亂中日記」란 명칭은 조선 정조 때 「李忠武公全書」를 엮으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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