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역사교실


  
해상제국의 위대한 CEO 장보고
 관리자  09-08 | VIEW : 2,490
세계 해상무역을 양분하다

해상제국의 위대한 CEO 장보고


  최용범 와우북 서평위원(gaji15@hanmail.net)  


탁월한 조선술과 항해술, 기동성 있는 선단 운영으로 극동항로를 장악하고
나․당․일 3국무역을 독점했던 해상왕 장보고. 이미 1,000년 전에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것을 내다본 위대한 선각자 장보고의 파란만장한 생애.


841년 청해진은 여전히 북적거리고 있었다. ꡐ여전히ꡑ라 함은 당시 청해진 대사 장보고와 신라 왕실간의 혼약이 파기돼 신라 조정에서는 긴장이, 장보고로서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장도에 자리잡은 무역항에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멀리 눈 깊고 코 큰 아랍 상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을 하역하고, 청해진에 산처럼 쌓여 있는 물자들을 싣느라 분주했다. 통역인을 대동한 외국인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흥정을 하고, 거래처 사람들과 석별의 인사를 나누느라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항구 곳곳에서 들렸다.

장보고는 청해진 한 구석, 바닷가의 정자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ꡒ삼국사기ꡓ에서는 장보고가 혼약이 깨진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이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었다. ꡒ삼국유사ꡓ는 이와 달리 단지 ꡐ반란을 꾀했다ꡑ는 증거 미비한 말로 모호하게 이 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로서도 쉽사리 반란을 일으킬 결심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청해진은 군사기지라기보다 무역기지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에 ꡐ황금알을 낳는 거위ꡑ인 무역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거병을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래저래 보스로서의 고독감만 더욱 밀려왔을 것이다.

생업을 자신에게 맡긴 이 지역 1만여명의 ꡐ무역회사 청해진ꡑ 임직원과 그 가족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중신들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말이 귀에 분명히 들려오는데, 그 모욕감을 감내하기도 어려웠다. 더욱이 모욕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 그 무리들이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결단의 고독함 때문일까. 장보고는 ꡐ이사급ꡑ 막료들조차 물리치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장보고와의 痛飮 인터뷰

서해에 낙조가 물들기 시작하면서 서늘한 아름다움이 밀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장보고에게 다가갔다. 생각에 골몰한 장보고는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대사님 안녕하십니까?
ꡒ누구요?ꡓ
― 후대에서 온 사관이올시다. 장대사님을 뵙고 싶어 멀리서 왔습니다.
ꡒ그래요. 올라와 한 잔 하시오.ꡓ

수많은 외국인을 대면해서인지 장보고는 후세에서 왔다는 말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환대했다. 생각의 끝무렵인지라 마침 말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장보고는 초면의 필자에게 술 한잔을 가득 부어 주었다. ꡒ삼국사기ꡓ 같은 정사를 봐도 장보고는 친구 정년이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나 그를 암살한 염장이 찾아왔을 때도 술을 마시며 기뻐했다고 할 만큼 애주가였다. 게다가 장보고를 반역자로 기술한 ꡒ삼국사기ꡓ조차 그가 ꡐ재능과 기개 있는 자(壯士)를 사랑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는 바 없는ꡑ 인물이라고 할 정도로 인재를 아낀, 리더로서의 면모가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필자 같이 낯선 사람이라도 우선 환대하는 것 같았다.

― 심사가 복잡하신 것 같습니다.
ꡒ그래요. 신라 조정의 배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 벌떡 일어날 정도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던 선대 신무왕(김우징)을 기꺼이 받아들여 2년간 후대해 주고, 우리 병사 5,000명까지 지원해 왕위에 올렸는데, 이제는 등 뒤에서 칼을 들이대려 하니 말이오. 허, 문성왕으로서도 힘들겠지요. 선대 왕의 유지를 받들어 내 여식과 혼인하려 하는데도 그 완고한 신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소.ꡓ

― 왜 그렇게 반대한답디까?
ꡒ왜, 반대하겠소? 그 잘난 뼈대 때문 아니오. 바다에서는 해적이 난립해 제 백성이 약탈당하고 노예로 팔려가는 것조차 막지 못하는 무능한 자들이 같잖은 ꡐ진골ꡑ이니 뭐니 하며 김씨들끼리 다 해먹는 골품제를 내세우는 것 아니오. 아쉬울 때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으며, 갖은 말로 아첨을 떨더니 다시 권력을 잡고는 핏줄을 내세워 나를 ꡐ섬놈ꡑ이니 ꡐ미천한 자ꡑ라니 하며 모욕해요. 이 놈들이 말이오.

미천하다는 내게 감해군사니. 진해장군이니 하는 관직은 왜 주었소. 뼈에 사무칠 정도로 모욕을 주었던 말이 ꡐ해도인ꡑ(海島人․섬놈)이라는 말이오. 어린 시절부터 그 잘난 귀족 놈들이 내게 섬놈이니 천민이니 하며 업신여기는 데 이가 갈렸오. 가난하게 살고 출세길이 막힌 것도 억울한데 섬사람이라고 천대까지 하니 어찌 이 땅에서 살겠소. 바다에서 사는 것이 어떻다고 저렇게 천대하오. 이 바닷길을 열어야 수많은 재물을 쌓을 수 있는 것 아니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천하를 지배한다는 것을 저 고지식한 귀족나부랭이들이 알 리 없는 것이오.ꡓ
장보고는 신분상의 핸디캡 때문에 왕실과의 혼약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뼈아프게 들어왔던 ꡐ섬놈ꡑ이란 출신상의 약점을 신라 왕가와 사돈 관계를 맺어 단숨에 극복하려고 말이다.

― 왜 그토록 왕실과의 혼사에 집착하십니까. 귀족이 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ꡒ허, 내가 뭐가 아쉬워 귀족 자리에 연연하겠소. 지금 이 자리로도 충분해요. 내가 귀족이 아니어서 못하는 것이 뭐가 있소. 얼마 전에는 일본 조정과도 공식적인 무역길을 텄소. 비록 공식적인 외교관계까지 수립한 것은 아니지만 저들이 필요한 물자를 우리가 공급해 주겠다는데 왜 반대하겠소. 당나라와도 별 문제 없이 지금까지 거래해 오지 않았소? 무엇보다 인간의 신의를 배반당했다는 것이 가장 괘씸한 일이오. 지금 조정에서 최고 실권을 가진 김양도 청해진에 몸을 의탁했던 자요.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불의를 바로세우고자 군사를 기꺼이 김양에게 내주었던 것이오. 그런데, 그 자가 이번 혼사를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 딸을 내 여식 대신 둘째왕비로 올리려 한다니 어찌 배신감이 들지 않겠소. 들려오는 소리로는 그가 청해진을 공격하려고 계획한다고도 합디다.ꡓ

― 신의를 배신한 것도 문제지만 그래도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면 사업하시기도 편하지 않습니까?ꡓ
ꡒ그야 왜 없겠소.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왕실과 대등한 관계를 대외적으로 공포하는 것 아니오?ꡓ
그는 분명 왕실과 대등한 관계를 맺는다고 했다.
― 아니, 신하로서가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 서시겠다는 것입니까?
ꡒ그렇소. 이곳 청해진은 신라 조정이 관여하는 곳이 아니오. 이곳에서는 ꡐ개평ꡑ(開平)이라는 연호를 따로 쓰고 있어요.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일본에 사절을 보내는 것 아니었소. 내가 ꡐ대사ꡑ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신라 관직에는 없는 것이오. 신라 왕도 당 황제에게 ꡐ영해군 대사ꡑ라는 관직을 제수받았소. 발해의 공격을 바다에서 막는 책임자라는 말이오. 나는 서남해안을 지키면서 교역하는 대사이니 신라 왕과 대등한 자리라 할 수 있소. 조정에서는 그게 두려운지도 모르지.ꡓ


신라 왕과 대등한 위치에 서다

하기는 이때는 신라 왕실의 지방 통제력이 거의 상실된 시점이었다. 왕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왕권다툼에 바빴고, 골품체제로 인해 등용되지 못한 6두품 이하의 유능한 인력은 당나라로 가거나 지방에 웅거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장보고와 같이 당나라에서 연대장급(무령군 소장) 군직도 얻고, 무역으로 돈을 벌어 신분제의 틀을 벗어난 이들이 신라 왕실에 미련을 가질 리 없을 것이다. 장보고 사후 불과 60년만에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되지 않았는가. 장보고는 이들의 선배인 셈이다.

― 계획이 빗나간 셈인데,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ꡒ글쎄, 뭐 딱히 방도는 없소. 신라 조정에서도 저들의 잘못을 아는지라 불안해 하면서 뭔가 대책을 세우는 것 같은데, 군사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소. 사관께서도 봐서 알겠지만 청해진이야 바다에서도 그렇고, 육지에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곳이오. 우리 병사들은 훈련이 잘 돼 있고, 더욱이 배후에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 제일의 강군이오.

무리하게 군대를 이끌고 여기까지야 오지는 못하겠지. 우리 또한 마찬가지요. 무역업이란 기본적으로 신용이 바탕이 돼야 하는 사업인 만큼 정벌을 이유로 함부로 군사를 일으킬 수도 없소. 누가 싸움터에 장사하러 오겠소. 내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청해진이고, 1만여 병사와 휘하 상인들의 가족들 생계도 책임져야 하지 않소. 분을 가라앉히고 힘을 더욱 길러야겠소. 요즘은 도자기제조업도 궤도에 오르고 있으니 머지않아 예전보다 몇 배의 이익이 날 것 같소. 그러다 보면 기회가 생기지 않겠소? 과년한 딸아이도 미련을 버리고 빨리 출가시켜야겠소.ꡓ

장보고로서는 고심 끝에 나온 결단일 것이다. ꡐ사사로운 복수는 버리자. 기업을 확실히 더 키우자.ꡑ 이것이 그의 결론인 것 같았다. 그런데 ꡐ도자기 제조업ꡑ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자기는 당나라에서 수입하는 물품이 아니던가?

― 도자기를 수입하지 않고 제조도 합니까?
ꡒ그렇소. 무역업, 그것도 중개무역을 하다 보면 직접 물건을 만들어 팔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중간유통으로 이문만 남기다 보면 돈이야 벌지만 아무래도 만드는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게 되고, 큰돈 만지기도 힘듭니다. 지금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오죽 많습니까? 도자기는 거래 물품 중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라고 못 만들겠느냐 싶어 강진에 가마를 세우고 당의 월주요에서 기술자를 특급대우해 초빙했소. 기술자가 도자기를 빚을 흙을 찾아내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우리 땅에서도 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소. 청해진의 여러 젊은이들이 앞다퉈 배우고 있으니 머지않아 우리도 좋은 도자기를 일본에까지 수출할 수 있을 것 같소.ꡓ

― 무역업에 종사하신 지 꽤 되셨죠?
ꡒ그렇소. 벌써 20년이 넘었소. 819년에 시작했으니 햇수로 따지면 22년이 되네요. 산둥(山東)반도의 서주절도사 휘하 무령군 소장으로 근무하다 ꡐ치청군ꡑ을 토벌한 때가 819년 무렵인데, 이때를 고비로 군대는 별로 필요 없게 되고 웬만하면 퇴직하기를 바라던 때였소. 군사는 전시에는 많이 필요하지만 평화시에는 최소병력만 남겨놓게 마련 아니오? 나도 신라인으로서 출세할 만큼은 했고, 미련스럽게 남아 있고 싶지 않아 기꺼이 퇴직하고 무역업에 뛰어들었소.

산둥 땅에는 신라인도 많고, 그 중에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니 군문에 있을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일이오. 내가 즐겨 읽던 ꡐ사기ꡑ(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도 부자가 되려면 장사를 해야 한다는 사마천의 말이 있어요. 이 말이 딱 들어맞았소. 몇차례 거래만 잘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소.

824년에는 일본에도 다녀왔는데, 그들이 당나라와 직접 거래를 못하니 우리가 가져온 물품이면 값을 보지도 않고 앞다퉈 사가니 수지가 큰 장사였소. 1~2년 하니 돈도 제법 벌어 법화원도 창립해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삼한인들의 정신적 위안처이자 생계의 터전을 이룰 수 있게끔 했으니 보람도 많았소.ꡓ

― 기반도 상당히 잡았는데 828년에는 귀국하셨죠. 어떤 계획이 있었습니까?
ꡒ무엇보다 서해에 해적들이 설치고 있어 무고한 신라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 오는 것을 자주 보자니 의분이 일어나 참을 수 없었소. 나도 그랬지만 신라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제 발로 와도 낯선 타국에서 살기가 힘든데 노예로 팔려오면 그 비참함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소. 동물처럼 사슬에 묶여 시장에서 팔리는 동포를 몇 번은 내 돈을 내 해방시켜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소. 근원적으로 막아야 했소.

그런데 당나라나 신라 조정이나 어떻게 해볼 힘이 없었소. 저들끼리 권력다툼이나 하고, 신료들은 기득권이나 챙기기에 바쁘니 말이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했소. 해상무역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방법도 보였소. 내 고향 청해에 진을 설치해 서해만 잘 지키면 중국이나 신라의 해적을 능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았소.

그리고 솔직히 말해 상인의 눈으로 봐도 이것은 크게 남는 일이었소. 서해를 장악했던 이정기 일족이 몰락한 뒤 서해는 주인 없는 바다가 되었소. 이 바다의 해상권만 장악하면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소. 그런데 외국인으로서 중국에서 무역을 해봤자 크게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소. 자위력을 갖추자면 대규모 부대가 붙어야 하는데 지방세력을 억제하는 당나라에서 용인해 주겠소?

그런데 신라는 달랐소. 옛신라 땅이나 지킬 힘이 있지, 옛백제 땅이나 고구려 땅에는 힘을 미치기 힘들었소. 가서 해안만 안정시켜 주면 용인해 줄 것이 눈에 보였소. 고향에 사람을 보내 진을 꾸릴 만한 곳을 찾아보기도 하고, 무역항을 설치할 지대도 살펴보게 했소. 고향에서는 내가 간다고 하니 무척 반겨주고, 휘하에 들어오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소. 그래서 확신이 들자 청해 지역에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사람과 물자를 보내놓은 뒤 흥덕왕을 알현하고는 청해진 설치를 허락받았소.ꡓ

― 골품제가 강한 신라 왕실인데 미천한 출신으로 왕을 알현하기는 어렵지 않았습니까?
ꡒ아무리 신분제를 고수하려 해도 대국 당나라에서 군직으로 제법 이름도 날리고, 재력도 적지 않은 나를 쉽게 거부하지는 못했소. 물론 그때 시중으로 있던 선대왕 김우징(신무왕)과 완주(전주)도독으로 있던 김양이 도와주기는 했소. 그런 도움도 있고, 서남해 방비를 큰 힘 기울이지 않고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쾌히 응낙했소.ꡓ

― 역사서에는 흥덕왕이 1만명의 병력을 주었다던데요?
ꡒ무슨 얘기요? 반란이 수시로 일어나 경주 인근을 지키기도 힘든 마당에 어떻게 1만명의 병사를 줄 수 있겠소? 또 1만명이면 이를 먹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양식과 물자가 들어가는데 쉽사리 내줄 수 있소? 내가 당에서 쌓은 물자를 청해진에 다 풀어놓았소. 당에서 활동하던 신라 상인들도 나를 따라 청해진으로 오면서 자산을 보태기도 했고요.

청해 인근의 백성들은 먹고살기도 빠듯한 데다 도둑이 자주 출몰해 살기 어려웠는데, 내가 와서 1만명이 일할 일자리도 만들고 치안도 안정시킨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오. 물론 소규모 밀무역이나 노예 수출을 하던 군소 해상세력들이야 불만이 없지 않았겠지만, 저들 중 많은 수도 귀순해 청해진에서 일을 했으니 큰 분란은 없었소.ꡓ


장보고는 노예상이었다?

― 그런데 대사를 해적의 우두머리(중국 류융지 교수)라고 하거나 노예 매매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일본 가모 교코 교수)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인 학자는 장대사께서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노예 약탈매매를 독점하려고 중소 노예상의 해상활동을 봉쇄했다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ꡒ허, 그래요? 내가 노예 매매를 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이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내가 활동하던 바로 전시기 신라의 밀무역 중 상당수가 노예무역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소. 그렇다면 무역항을 설치해 대규모로 무역을 하던 청해진에서 노예무역을 한다고 하면 조직적이고도 대규모로 해야 할 것이오. 어디 그런 흔적이 있소? 내가 중국의 신라방에서도 지지받았던 것은 남녀노소존비(男女老少尊卑)를 막론하고 다들 한 가족처럼 지내는 것 때문이었소. 그런 내가 인간을 짐승처럼 부리는 일로 돈을 벌겠소? 돈은 다른 데서도 많이 벌 수 있소.

해적이라면 모르겠소. 사실 뱃사람 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해적과 해군, 해적과 해상(海商) 간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 있을 뿐이오. 국가의 공인을 받으면 해상이요, 없으면 해적이오. 대규모로 조직돼 힘이 강하면 해군이나 해상이고 없으면 해적이오. 그러니 청해진이 무역조직이기도 하고, 군사조직이기도 한 것이오. 망망대해에서 낯선 배를 만나면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니 무장해야 하고, 밀무역을 행하는 소규모 해적단을 소탕해야 장사꾼들의 배가 안전하게 오갈 수 있소. 아마도 그 과정에서 밀무역을 하는 중소 규모의 배들을 봉쇄한 것을 해적으로 몰아붙였던 것인지 모르오. 그런데 청해진은 신라 조정은 물론이요, 일본과는 공식 교역까지 했고 중국과 일본에 지점까지 차렸소. 어느 나라가 드러내 놓고 해적과 교역을 하겠소?ꡓ

중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내놓았던 것은 청해진의 주활동무대였던 중국과 국교가 단절돼 있던 1980년대 이전 상황에서 중국이나 일본 학자들이 자의적으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짙다. 최근 중국과 일본 학자들은 장보고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 규슈(九州)대의 하마다 코사코 교수는 ꡒ장보고가 해상치안을 유지함으로써 서일본 해안의 백성에게 대외적 안심감을 주어 도착하는 신라선이나 거주하는 신라인에 대한 의심이나 경계심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중계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전체적으로 서해의 안정은 신라․당․일본에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ꡓ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내 장보고 연구의 권위자인 양저우(楊洲)대 주장(朱江) 교수는 ꡒ9세기 초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조직적으로 무역활동을 펼친 사람은 장보고뿐ꡓ이라고 평가했다.

― 엔닌(圓仁)이라는 일본 스님에게는 배 9척을 내주셨다고 하는데, 그 스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습니까?
ꡒ엔닌 대사요? 잘 알지요. 3년 전(838년)에 내가 후원하는 적산 법화원에 머물렀던 스님입니다. 일본 천태종의 고승이신데, 당에 들어와 도를 깨치시려는 큰 뜻을 품고 있던 스님입니다. 대사께서 도움을 청해 배를 구해 드리고 당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죠. 당과 일본은 국교가 제대로 수립돼 있지 않아 처음에는 불법입국자라 하여 추방당하는 수모도 겪었다고 합디다. 후쿠오카(福岡)현의 태수로부터 편지를 가지고 오다 잃어버리기도 했다는 편지도 받았습니다. 큰뜻을 품고 있는 스님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데 도와드려야죠.ꡓ

엔닌 대사는 천태종의 1인자로 일본 불교사에 커다라는 족적을 남긴 승려였다. 그는 45세에 선진 불교를 접하기 위해 838년부터 9년간 당나라 각지를 주유하고는 그 기록인 ꡒ입당구법순례행기ꡓ(入唐求法巡禮行記)를 남겼다. 이 기록은 당대의 사회사를 알리는 중요한 사료다. 이 기록에서 엔닌은 ꡐ오래 전부터 (장보고 대사의) 고명은 듣고 있사옵니다. 엎드려 경모의 정을 더할 뿐이옵니다ꡑ라며 장보고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 특히 이 문헌을 번역한 전 주일 미 대사였던 하버드대의 라이샤워 교수는, 이 기록을 통해 장보고를 접하고는 그가 ꡒꡐ영웅적인 모험가이며 거상ꡑꡐ세계사에 기록될 불세출의 한국인 호걸ꡑ이라고 평하며 당시 청해진의 해상활동은 서양에서 세계 해상무역의 주류를 이루던 지중해상인의 활동에 대응할 만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활동ꡓ이라고 평가했다. 라이샤워는 서구적 의미에서 청해진은 상업제국이요, 장보고는 상인군주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 정년이라는 친구와는 원한이 있었다는데, 어떤 원한입니까?
ꡒ허, 그 친구 얘기는 왜…. 지금 서라벌에 올라가 있소. 정년은 친구라고 하기에는 한참 동생이지요. 10살 연하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자라는 동생이오. 그런데 정년과 같이 당나라에서 군생활을 함께 했는데, 정년이 헤엄치는 솜씨나 창술 같은 것은 나보다 잘했소. 그것을 가지고 한참 선배인 나를 무시하려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소. 그러나 군사 일이 어찌 개인적 무공만 가지고 할 일이오. 무엇보다 군사를 잘 지휘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정년은 그 점에서는 내게 미치지 못했소. 내가 몇번이고 군사 지휘의 원칙에 관한 얘기를 해주어도 무시하고 무공 자랑만 하며 나보다 우위에 서려 하니 사이가 좋지 않았소. 그뒤 내가 군에서 퇴직하고 무역업을 하고, 청해진으로 건너올 때도 정년은 군직에 미련이 남아 계속 근무하다 결국 부대가 해체돼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생활을 한 것 같소.


일본의 대종사 엔닌도 경외한 장보고

내가 신무왕을 도와 군사를 일으킬 즈음 정년이 나를 찾아왔는데, 앙숙이었던 기억은 하나 없이 반갑기만 했소. 정년의 얘기를 들으니 풍원규라는 당나라 친구가 ꡒ구원이 있는 장보고에게 어찌 목숨을 맡기려 하느냐?ꡓ고 했다는데,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소. 오히려 거사를 일으키려는 마당에 군사 경험이 많은 정년이 온 것이 너무 반가웠소. 결국 정년이 군사를 지휘해 거사를 성공적으로 해내지 않았소?ꡓ
정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장보고는 불쾌한 옛 추억에 사로잡혀 대사를 그르칠 인물이 아니었다. 원한이라기보다 앙숙관계라 할 정년은 10년 연상의 장보고에게 상당히 건방지게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그에게 대군의 지휘를 맡길 만큼 도량이 컸던 인물이었다. 이런 도량이 있었기에 서남해안의 한적한 바닷가에 불과한 완도를 대규모 무역단지로 조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덧 해는 저물고, 술동이는 거의 비워진 듯했다. 장보고도 심사숙고하던 혼약 파기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려서인지 홀가분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 행여 불의의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해 보셨습니까?
ꡒ죽음이야 하늘에 달린 것. 천운에 맡겨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소?ꡓ
며칠 후면 염장이 신라 조정에 불만이 많은 것처럼 가장해 찾아와 그를 암살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대답할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궁금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 아닙니다. 그저 대사의 사생관을 듣고 싶었습니다.
장보고는 싱거운 사람 다 본다는 듯 한번 웃고는 수인사를 나누고 사저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장보고는 암살당했다. 그는 옛 부하 염장을 반갑게 맞이해 술대접을 하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염장은 장보고 대신 청해진 대사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당나라에 있는 신라인들이 암살자에게 협력할 리 만무했다. 일본 역시 염장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긴 내란에 빠진 청해진 부근을 대규모 상단이 왕래할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청해진 세력은 일본으로, 당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로부터 10년뒤, 청해진은 폐진의 운명에 처해졌다. 청해진을 삶의 근거지로 삼았던 백성들은 김해 일원으로 강제이주당했다.

조선시대 안정복은 ꡒ동사강목ꡓ에서 ꡒ도적이 장보고 장군을 죽였다ꡓ며 원통해 한 바 있다. 장보고 이후 해상권은 중국과 일본에 넘어갔다. 바다는 우리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역사에서 아쉬움이 남는 한 대목이었다.


역사상식 장보고는 누구인가

자유무역항을 연 해상군주

장보고는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국제적인 인물로 꼽힐 것이다. 그의 활동무대는 한․중․일 3국이었다. 그런 만큼 그에 대한 기록은 중국과 일본에 걸쳐 있다. 그것도 야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ꡒ신당서ꡓ ꡒ속일본서기ꡓ에 당당히 등재돼 있다. 특히 ꡒ신당서ꡓ에 게재된 것은 장보고와 동시대에 살았던 중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역사 평론가인 두목(杜牧)이 그의 문집 ꡒ번천문집(樊川文集)ꡓ에 장보고를 칭송하는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내용인 즉, 장보고는 사사로운 원한에 구애받지 않고 청년 시절 라이벌이었던 동향 후배 정년이 불우할 때 그를 기용했다는 것이다. 두목은 이를 ꡐ안사의 난ꡑ을 평정했던 곽자의와 그의 앙숙이었던 이광필의 관계와 비교해 장보고가 인의 높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두목의 이 글을 토대로 ꡒ신당서ꡓ는 장보고를 진(晉)과 당나라의 명재상과 동렬에 기록한 바 있다. 그에 비해 우리쪽 기록은 빈약하다. ꡒ삼국사기ꡓ와 ꡒ삼국유사ꡓ는 바로 이들 사료를 기초로 하여 ꡐ장보고․정년전ꡑ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이런 역사의 역류가 일어난 것은 장보고가 반역자로 낙인찍혔기 때문. 일족이 몰살당하는 반역자로 죽은 이상 그에 관한 기록이 온전할 리 없다. 그래서인지 그의 출생은 물론 사망 시기와 출신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추정할 뿐이다. 장보고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쌓은 김문경 교수는 그의 생년을 787~789년으로 추정하며 출생지는 청해진이 있던 완도 일대로 보고 있다.

장보고는 20대인 810년대 중반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미천했던 신분인 데다 신라 지배층의 수탈로 먹고살기조차 힘든 조국을 떠나 개방적이고 기회가 많았던 당나라로 건너가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유래 없을 만큼 개방적이고도 국제적인 분위기가 넘치던 나라였다. 당시 골품제에 한계를 느꼈던 야망에 찬 6두품 출신 이하 신분이 낮은 젊은이들은 당나라에서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오늘날의 아메리칸드림에 해당할 것이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군인으로 출세해 당시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는 무령군에 들어가 1,000명의 병력을 지휘하는 소장이라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819년 반란군 토벌이 끝나면서 군 병력을 축소하는 구조조정이 진행되자 장보고는 과감히 명예퇴직하여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신라․ 중국․일본 간의 3국간 중개무역에 종사했는데, 824년에는 일본에까지 건너가 무역 상담을 진행했다. 그 결과 거대한 부를 쌓아 적산에 법화원이라는 신라인 전용사찰이자 자신의 무역거점을 마련했다. 법화원은 연 500석을 수확하는 전답을 기반으로 할 정도였고, 이는 전액 장보고의 시주로 마련했다고 한다. 연 500석을 추수하는 토지라면 오늘날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재산. 819년 신라인 자치기구인 구당신라소의 대사로 임명된 바 있던 장보고는 무역업에서도 성공해 재당 신라인 사회의 리더로 부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는 828년 귀국을 결심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남해안에 출몰하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것을 보고 분개한 끝에 이들을 소탕하고자 하는 것도 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더 큰 목적은 무역업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반을 고향인 완도에 구축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흥덕왕과 독대하여 병사 1만명을 얻어 청해진을 설치했다는 ꡒ삼국사기ꡓ의 기록과 달리 그 이전에 이미 완도 인근의 주민을 모아 청해진의 기반을 구축한 뒤 흥덕왕에게 추인받았으리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청해진을 설치한 뒤 장보고는 서남해안 인근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의 계획대로 본격적인 무역활동에 나서 중국․일본․동남아․아랍 각국과 교역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상당한 재력을 갖추게 된다. 이로써 청해진은 군사력과 재력을 동시에 갖춘 기지로서 위치지워졌고, 장보고는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런 그에게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한창인 왕족이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김명과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한 김우징(후일 신무왕이 됨)이 청해진으로 피난오면서 장보고 역시 중앙의 권력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마침 김명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왕위에 올렸던 희강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민애왕이 되어 왕위에 오르자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군사 5,000명을 지원받아 민애왕을 죽인 뒤 왕(신무왕)이 되었다. 장보고는 이 공으로 식읍 2,000호와 감의군사와 진해장군이란 관직을 받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김우징과의 혼약이었다. 바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겠다는 것.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한 해에 죽고 아들인 문성왕이 즉위했다. 문성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아 장보고의 딸과 결혼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장보고의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강력히 거부하는 바람에 결혼은 무산되었다. 장보고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ꡒ삼국사기ꡓ는 장보고가 이에 대해 ꡐ왕을 원망해 청해진에서 모반했다ꡑ고 하고, ꡒ삼국유사ꡓ는 ꡐ난을 꾀하고자 하였다ꡑ고 기록돼 있는데, 아마도 본격적인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해진의 군사력이 강성한 것을 두려워한 신라의 귀족들은 정면대결 대신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사주해 그를 암살하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장보고를 대취하게 한 뒤 살해했던 것이다. 죽은 그는 ꡐ구국의 영웅ꡑ에서 반란자로 낙인찍힌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장보고가 20여년간 구축해 놓은 무역기지 청해진 역시 10년만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가 주도했던 해상무역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PREV :   직언(直言) 모범보인 황희 관리자 
 NEXT :   이순신 관리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