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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언(直言) 모범보인 황희
 관리자  09-08 | VIEW : 1,846
[언관 역사를 지킨다]<5>직언(直言) 모범보인 황희

조선 왕조의 명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황희(1362~1452)는 태종에 의해 발탁되어 큰 신임을 얻었다. 그는 태종 10년(1404) 7월 대사헌에 임명되어 만 1년 간 언관의 수장인 대사헌으로 재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언관제도가 막 정비되기 시작하던 때여서, 아직 언관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던 시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태종의 발탁으로 중용되기 시작한 황희는 개국공신 등 건국 초기 공신세력을 약화시키고 새 왕조의 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태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글 싣는 순서▼
1. 조선 성리학의 순교자 조광조
2. 조선 언관의 사표 김제신
3. 조선 지조의 상징 성삼문
4. 유교이념의 파수꾼 김일손
5. 直言 모범보인 황희  



그래서 대사헌 재직 기간에 왕과 날카로운 대립을 초래한 일은 없었다. 그가 대사헌이 되었던 그 당시는 이미 태종의 개혁도 상당히 진척되어 즉위 초의 복잡한 정치적 사건들도 거의 마무리 된 뒤였기에 그럴 만한 쟁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과 황희의 관계는 양녕대군의 폐세자 문제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된다. 이미 태종 7년 외척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사건이 있었을 때부터 세자 양녕대군의 문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태종은 여러 왕자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후계를 놓고 무척 고심했다. 그는 새 왕조의 기틀을 잡으려면 다음 왕이 뛰어난 인물이어야 하며 영녕대군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뒷날의 세종이 된 충녕대군을 세자에 봉하려 했다. 그러나 한번 세워둔 적장자인 세자를 폐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황희와 의논했다.


이미 태종의 마음은 양녕에게서 떠나 있었고 황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희는 그냥 태종의 뜻을 따라 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서 원칙을 강조했다.


그는 양녕대군이 몇 가지 말썽을 피운 것은 단지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이지, 큰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양녕대군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최고 통치자가 결정한 후계문제에 대해 신하가 그에 반대되는 견해를 피력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 정한 세자를 함부로 폐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밀고 나갔다.


이 때 태종은 다른 사람도 아닌 황희가 양녕대군을 옹호하고 나설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태종은 당황하고 섭섭한 나머지, ꡒ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세자를 따르려 한다. 만약 늙은 나를 버리고 젊은 세자를 따르려 한다면 노인인 나는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다ꡓ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태종은 황희를 남원으로 귀향 보내버리고 말았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황희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그 이상 황희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세자를 바꾼 직후 전격적으로 왕위를 새로운 세자, 즉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새 왕이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런 과정에서 태종은 사소한 실수를 구실로 내세워 세종의 장인이며 공신인 영의정 심온(沈溫)을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세종이 혹시라도 처가 쪽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할까봐 화근을 사전에 제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사후에도 세종을 진심으로 보필할 신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황희를 다시 발탁했다. 그리하여 세종 4년 2월, 태종의 추천으로 황희는 다시 복직했다. 이로부터 1년 후, 태종은 세상을 떠났으나, 세종과 황희는 이후 20년이 넘도록 더불어 국사를 보살피며 조선왕조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황희와 태종은 군신(君臣) 사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도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친구였다. 이처럼 깊은 우정을 바탕으로 한 상하(上下)관계 사이에서, 황희가 왕이 스스로 정한 권력승계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군주로부터의 신뢰도, 친구로서의 우정도,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목숨도 다 잃기가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희는 후대의 어느 언관도 할 수 없는 간언을 한 사람이다. 이처럼 원칙에 엄격했기에 황희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명재상으로서의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리 가정해보자. 황희를 다시 등용해 세종의 가장 중요한 협조자로 일할 수 있게끔 한 태종의 포용력과 결단이 없었더라면 황희의 일생과, 나아가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될 기회를 막았던 황희를 조금도 의심않고 중책에 기용한 세종의 정치력이 없었더라면 또 어떤 결과가 나왔을 것인가.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언관이 나라를 구하려면 그 간언을 받아들이는 왕도 그만큼 식견과 도량을 갖추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간언을 하고서도 살아 남아 큰 업적을 이룬 황희의 일생을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두희(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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